42
상생의 다리
“아마도 이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증오하기 때문이겠지, 저자……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란젤은 그레칸을 경계하며 호루스의 질문에 대꾸했다.
“저자가 바로 황궁의 안방을 차지한 괴물이다. 우리의 가장 큰 적.”
“……!”
비명은 지르지 않았지만 신음을 간신히 참아 냈다.
긴장을 놓았던 어깨가 이전보다 단단하게 굳어졌다.
당장이라도 공격을 가할 것처럼 자세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레칸은 그들의 변화된 태도를 보면서도 묵묵히 앉아 있었다.
한층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에서 격한 감정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총……통!”
스미스의 눈이 흔들렸다.
그와 호루스는 그레칸에게 공격 자세를 갖춤과 동시에 그란젤을 보호하는 진형을 취했다.
일촉즉발의 상태.
“저들이 먼저 공격하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밀라니아.”
그레칸이 쉭쉭대는 소리가 밀라니아의 귓속을 뱀처럼 기어 흘러 들어갔다.
밀라니아는 꿈틀거리는 그레칸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네 마음에 살의가 보이는구나.”
밀라니아의 써늘한 시선이 그란젤에게 꽂혔다.
“너는 그레칸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을 터. 내게 도움을 청하면서 실은 그레칸을 죽여 없애고자 했던 것이야?”
굳어 있던 그란젤의 표정이 어그러졌다. 곧 기운이 빠진 얼굴로 한숨을 쉰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총수. 피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스미스가 불안하게 속삭였다.
그는 터전을 버리고 레지스탕스에 가입하기 전만 해도 총통을 두려워하며 수인들의 발아래 짓밟혔던 자였다.
누구보다도 그레칸을 두려워했으므로 힘을 주어 억누르곤 있지만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란젤은 스미스의 떨리는 몸을 눈치채곤 어두운 눈으로 책상을 내려다보았다가 밀라니아와 그레칸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렇게 총통을 피해 다녔는데 제 발로 찾아와 자살 행위를 할 정도로 미련한 놈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감히 인간의 대표를 자처할 수 없었겠죠.”
침착한 태도를 되찾은 그란젤은 더는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스미스와 호루스에게 기세를 거두라고 명했다.
호루스와 스미스는 긴장한 얼굴로 기운을 가라앉혔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란젤은 차분하게 말을 시작했다.
이전에 그녀와 마주했던 자가 단지 레지스탕스의 윗선이었다면, 지금은 레지스탕스 총수의 입장이었다.
“저는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총통만 아니라면 황궁의 그 누구도 저를 대적할 자가 없기에, 총통이 죽거나 아니면 떠나거나. 그 두 가지만 기다렸죠.”
“…….”
“그럼에도 한 가지 불안은 있었습니다.”
“점점 미쳐 가는 총통이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들 가능성.”
그레칸의 손가락이 움찔 움직였다.
“복구할 것이 하나도 없게끔, 모든 걸 망가뜨릴 가능성.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총통이라면. 이미 이 땅을 망가뜨린 총통이라면.”
감정을 억누르듯 다소 거칠게 뱉어 낸 그란젤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그는 다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나타났습니다. 대마녀님, 당신이요. 하루가 다르게 세상 만물을 파괴했던 총통이 파괴 행위를 멈추었고, 황궁에 남은 수장들이 활개 치는 것을 제외하고 황궁은 조용했죠. 저는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레칸을 흘끗한 그란젤이 눈을 반짝였다. 목소리가 활기차졌다.
“하지만 이제 확신했습니다. 당신 때문이었어요. 대마녀님, 당신이 돌아와서 총통은 이성을 찾은 겁니다.”
밀라니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스미스와 호루스에게서 얘기를 듣고 의심했을 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해야 할 일을 알겠습니다.”
양손을 무릎에 두고 그란젤이 고개를 푹 숙였다. 훨씬 공손해진 자세로.
“도움을 구하고자 합니다. 대마녀님.”
“뭐라?”
“아까 말씀드렸지요. 대마녀님의 의견도 괜찮을 것 같다고요. 사실은 처음 호루스에게 밀그렘의 창설과 창설 목적을 듣고는 아주 얼떨떨해졌습니다. 머리가 띵했죠. 총통과는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거나 도망치는 것.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의 존재 때문에 다른 선택지가 생긴 겁니다.”
그란젤이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차라리 경박한 장사치처럼 구는 것이 낫겠구먼.’
“도와주십시오. 대마녀님이 말씀하신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망가지기 이전의 세상. 총통이 망가뜨렸던 그 살기 좋은 세상 말입니다.”
그레칸은 차디찬 눈으로 그란젤을 바라보았다. 비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뻔뻔한 습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질 않는군, 인간들은.”
그란젤의 정중하면서도 간절한 말씨에 비해 거칠게 갈라진 그레칸의 목소리는 그를 악한처럼 보이게 했다.
‘이들에겐 악한이 맞을 테지.’
그란젤은 그레칸의 사나운 말에도 전처럼 경계하거나 적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외려 증오심을 억누르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호소하는 것이었다.
“100년 전, 참사에 얽힌 비극에 대해선 잘 알고 있습니다. 절 죽이시고 총통의 원한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그리해도 됩니다. 대신 미약한 제 힘 대신 두 분의 힘을 저희 레지스탕스에게 실어 주십시오. 아이들은 제 손으로 망가뜨린 장난감을 고칠 수 없지만, 두 분은 다르지 않습니까.”
“내가 가꾼 황궁을 버리고 너희 인간들을 도와라?”
그레칸의 비웃는 말에 그란젤이 고개를 들었다. 방금과 달리 냉정했다.
“총통이 가꾼 게 아닙니다.”
“…….”
“당신의 힘이 힘을 갈망하는 자들을 끌어모은 겁니다. 인간을 증오하고 짓밟고 싶어 하는 자는 황궁에 총통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하칸. 조인족의 수장. 우리 단체는 총통 당신보다는 그자와 얽힌 일이 많았죠.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당신과 다르게 그자는 모든 인간을 발아래 두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말씀드렸습니다. 총통만 아니라면 하칸이든 누구든 저를 대적할 자는 없다고요.”
그란젤의 눈이 사뭇 도전적으로 빛났다. 그레칸의 눈썹이 비뚜름해졌다.
“감정에 호소하는 건 그만두거라.”
밀라니아가 나서자 그란젤이 그녀를 응시했다.
“하면?”
“네가 한 얘기는 그다지 혹할 만한 얘기가 아니니라. 그러니 지금은 돌아가라.”
귀찮다는 듯이 대꾸하자 그란젤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뭐, 좋습니다.”
응접실을 빠져나가기 전 그가 밀라니아를 돌아보았다.
“……다음에 찾아뵐 때는 대마녀님이 혹할 만한 이야기를 가지고 올 것입니다.”
탁, 응접실의 문이 닫혔다.
“잘했다.”
그가 나간 문을 노려보고 있던 그레칸이 시선을 옮겼다.
“뭐가?”
그레칸은 망설이다가 고백했다.
“힘들었어.”
“평생 품어 온 증오심을 버리기는 쉽지 않겠지.”
피식, 실소한 그레칸은 곧 미소를 지우고 어깨에 이마를 툭 떨어뜨렸다.
“밀라니아가 내 손을 잡아 주어서 참았어.”
“…….”
그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저들만 보면 불안해져. 맥박이 뛰고, 화가 나서 숨이 가빠.”
“……널 위협할 힘이 없는데도.”
“당신을 위협할 수는 있잖아. 불안하다. 저들이 내게서 당신을 뺏어갈까 봐. 전처럼 당신이 사라질까 봐…… 불안해.”
인간을 증오하는 그레칸의 마음. 그 증오의 이면이 처음으로 흘러나왔다.
밀라니아는 머뭇거리며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전과 같은 일은 없을 것이야. 말없이 널 떠나지 않겠다, 그레칸.”
그레칸이 고개를 들었다.
“약속할게.”
떨리는 눈으로 입술을 달싹이던 그레칸은 다시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가늘게 흔들리는 어깨가 진정할 때까지, 밀라니아는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 * *
“또 왔느냐?”
“어이쿠, 제가 안 반가우십니까?”
밀라니아의 떨떠름한 말씨에도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너스레를 떠는 꼴이 지난 방문 때의 긴장된 분위기와는 또 달랐다.
카멜레온 같은 면모가 있는 자였다. 그레칸도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탐탁잖은 분위기에도 그란젤은 아랑곳하지 않고 빙그레 웃음을 보였다.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혹할 만한 얘기를 갖고 찾아뵌다고요.”
응접실로 자리를 옮긴 뒤, 그란젤은 책상 위로 거대한 양피지를 펼쳤다.
밀라니아는 양피지를 빠르게 훑었다.
언뜻 세계 지도를 그려 놓은 것처럼 보이는 양피지엔 양 끝에 두 개의 땅이, 사이엔 바다가 흐르고 있었다.
바다 위에 그려진 한 개의 선을 유심히 바라본 밀라니아가 이게 뭐냐며 그란젤을 힐끗했다.
“상생의 다리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상생의 다리?”
그란젤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생각을 좀 해 봤지요. 40년도 채 살지 못한 제가 대마녀님이 혹할 만한 대단한 걸 만들 수는 없을 것 같아 처음에는 막막했습니다. 하지만 천 년을 살아온 대마녀님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흥미를 끌 수 있는 의외의 것. 그걸 생각해 보니 이런 결과물이 나오더랍니다.”
밀라니아는 시큰둥히 대꾸했지만 눈빛은 은근한 흥미를 띠고 있었다.
그란젤은 더욱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예. 다리를 놓으려고 합니다. 그를 위해 제 무리에 속한 혼혈들에게도 여러 가지를 물어보고 다녔어요. 그 결과 적당한 답을 얻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수인들이 가장 원하는 것!”
그란젤이 검지로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개의 선을 쿡 짚었다.
“1대륙으로의 이주. 과거 바다를 건너 2대륙까지 왔지만, 영원한 그들의 영혼의 고향. 그게 1대륙입니다.”
“하?”
“2대륙의 수인들만이 아니지요. 수인들과 인간들은 표면적으로 1대륙과 2대륙으로 나뉘어 있지만 사실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조인족의 수장 하칸이 인간을 싫어함에도 모두 죽여 없애지 않으려는 것만 해도 알 수 있죠. 가령 1대륙의 박쥐족은 일족을 늘리기 위해 인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박쥐족뿐만이 아니죠. 대마녀님의 일족인 마녀족도 인간이 없으면 일족의 세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
“한 번도 이어져 본 적 없는 두 개의 대륙. 다리가 이어진다면 많은 것이 변할 겁니다. 첫째, 수인과 인간의 연결 통로라는 상징성. 둘째, 인간과 수인족 간의 실질적 화합. 많은 교류가 이어지게 되어, 인간이든 수인이든 서로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겠죠.”
손끝에 1대륙을 그린 검은 선이 문질러져서 까만 잉크가 번져 나갔다.
“흥미롭구나. 나 또한 생각 못 한 문제야. 하지만 대륙을 잇는 다리를 만드는 건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워터드래곤은 어찌할 테냐?”
그란젤은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는 듯 즉답했다.
“워터드래곤은 신수입니다. 제가 진정한 인간의 대표가 되면 자격이 생겨, 지나가는 자를 해하는 것이 아닌 다른 약속을 계약으로써 맺을 수 있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이미 연통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 또한 설득할 자신이 있습니다.”
“거대한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이냐.”
“이미 기술력은 있습니다. 잦은 전투와 화염에 휩싸여 많은 중요한 서책들이 불탔습니다. 하지만 제가 레지스탕스의 최우선으로 두었던 도서관에는 많은 책들이 모여 있습니다. 뛰어난 기술자들도 있고요. 인력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건, 차차 채워지고 있고요.”
밀라니아는 더는 물을 말이 없었다.
양피지에서 손가락을 뗐다.
그란젤이 쓰게 웃었다.
“일주일간, 이 생각에만 매달렸습니다. 밀그렘. 그리고 저희 레지스탕스의 신념과 이념의 상징이 되어 줄 것이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실직적인 평화의 다리가 될 것입니다.”
“…….”
“이는 많은 수인 혼혈들이 원했지만 능력이 없어 추진하지 못했던 숙원 사업입니다.”
밀라니아는 마음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단지 인간이 수인들을 제압하고 그 위에 서서 지금의 상황을 반전시키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진심이 그란젤의 눈에 담겨 있었다.
‘말한 것처럼 많은 생각을 했겠지.’
수인에 대한 증오심을 억누르고 진정한 상생을 떠올리기까지.
그란젤 일행을 돌려보내고 밀라니아는 생각에 잠겼다.
그레칸을 힐끗하자 그는 그녀의 생각이 궁금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밀라니아. 황궁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는 거지?”
“그래.”
그레칸은 아쉬움도 없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니아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란젤이 내게 도움을 원한다 했지만 진실로 기원하는 건 그레칸의 침묵일 것이다.’
굳이 몇 번이고 와서 도와 달라 하며, 도움의 정확한 정체는 말하지 않는 걸 보면 틀림없을 터.
총통이 아니라면 누구도 대적할 자가 없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총통이 나서면 일을 도모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오늘은 화가 나지 않느냐?”
그레칸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잠깐 생각하는 기색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응. 이상하지. 나쁘지 않았어.”
“왜? 내가 있어서?”
“그것도 그렇고……. 예전에 만났던 황족들과는 다른 것 같거든, 저자.”
“말했잖느냐. 교활하고 간악한 인간들만 있는 것이 아니야. 현명하고, 지혜롭고, 관용적이지. 배신이 잦지만 그 어떤 일족보다도 역지사지를 잘하는 모순. 그 모든 게 인간의 특성이다.”
“인간은 위험해.”
“맞다. 위험하지. 하지만 그란젤의 말처럼 그들을 멸족시키는 건 힘든 일이야. 살아남기만 하면 언제든 아득바득 힘을 모아 싸움을 걸어올 자들이기도 하고, 어떤 이종족은 인간이 없으면 세를 유지할 수 없기도 하니.”
이해한 건지, 아니면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레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밀라니아는 다소 힘이 빠져 잔잔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간이든, 수인들이든 지금보다는 웃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느니라.”
“…….”
“피곤하구나. 지금의 대륙은.”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손을 가져가 제 뺨에 가져다 댔다.
마킹하는 개처럼 그녀의 손에 제 냄새를 듬뿍 묻히고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당황한 밀라니아가 움찔하는데, 그에게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인간을 좋아할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방법은 간단해.”
“응?”
“그란젤이란 인간 놈이 몇 번이고 하려다가 삼킨 말 있잖아.”
“그게 무엇인데.”
고개를 든 그레칸이 눈을 맞추었다.
“내 죽음.”
밀라니아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도 동요 없는 얼굴. 시원스럽기까지 느껴지는 말투.
왠지 입가에 감도는 미소가 얄밉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노기를 억누르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레칸이 돌연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진지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했는데.”
날카로웠던 밀라니아의 눈매가 물러졌다.
“뭐?”
그레칸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편하게 앉았다.
“진짜 죽는다는 게 아니라, 내가 없어지면 되는 일이란 거야.”
“말뜻을 모르겠구나.”
“알잖아. 지금의 황궁은, 그들의 세력은 제대로 된 체제 없이 나 하나가 구심점이 되어 뒤엉킨 모습이니까. 내가 없어지면 저들끼리 흩어지고 알아서 질서를 찾아가겠지.”
“…….”
“자연이 그렇듯이. 이들은 자연 속의 존재니까. 그러니 인간도 역시.”
느릿하게 말한 그레칸은 그가 내내 머물렀던 황궁을 버리겠단 말에도 조금의 아쉬움도 보이지 않았다.
“우린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돼. 레지스탕스의 총수도 그랬지. 나만 아니면 알아서 해 나갈 수 있다고. 그 말대로 해 줘도 난 아쉬울 거 없어. 나 하나 빠진다고 잘해 나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다면 앞으로 어쩔 작정이냐?”
“일단은 속세와 멀어져야 하니까…….”
그레칸은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진지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행동은 수상쩍었다.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에 입맞춤을 하는데, 밀라니아는 고민스러웠다. 이걸 빼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급기야 그레칸은 그녀의 매끈한 엄지 끝마디를 앞니로 물기까지 했다.
“너 뭐 하는!”
“하늘길을 걸어 볼까?”
“뭐?”
“돌아온 후로 한 번도 위로 올라가 본 적 없지. 1대륙으로 도망간 건 제외하고.”
“도망이라니 무슨 망측한 말이냐. 그건 도망이 아니라 단지 상황을 보고자…….”
흠, 헛기침한 밀라니아가 중얼거리자 그레칸은 묘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밀라니아는 기가 막혔다.
“하다 하다 이젠 날 가르치려고까지 하는군.”
“이리 와 봐.”
역정을 내려는 밀라니아를 끌어안은 그레칸은 밀라니아가 아차 할 틈도 없이 창밖으로 빠져나갔다.
몸이 위로 솟구쳤다. 맑은 공기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3일 전 세차게 내리친 장대비가 지나가 맑게 갠 하늘은 보는 것만으로도 상쾌했다.
그레칸은 빠른 속도로 비행하더니 봉오리 두 개가 높이 솟아 있는 산 사이에 이르렀을 때 속도를 늦추었다.
밀라니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레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뒤늦게 그의 가슴팍 옷자락을 꽉 잡고 있음을 깨닫고 손을 폈다.
“아래를 봐.”
“대체 무슨…….”
황당하게 중얼거리긴 했지만 그녀는 그의 말대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푸른 숲과 들. 푸른 강물과 거리에 늘어선 붉은 지붕의 물결.
가까이서 보면 폐허인 곳도 높은 곳에서 보니 자연과 어우러져 아기자기하고 고적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지상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여기서 보니 모든 게 자연이구나.”
“여행.”
“뭐라 했느냐?”
밀라니아를 따라 아래를 굽어보던 그레칸이 그녀와 눈을 맞추고 씨익 웃어 보였다.
“여행 가자, 밀라니아.”
“이 상황에서 무슨 여행을 하겠느냐. 온통 똥밭인 거리를 하염없이 걷는 건 싫으니라.”
“하여간 밀라니아는 모든 걸 너무 귀찮아해서 문제야.”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서 찔린 밀라니아는 역정을 내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그 정도는 금세 알겠다는 듯 그레칸은 움찔하는 기색도 없이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나 좋자고 여행 가자는 거 아닌데.”
“그러면.”
“나만 빠지면 알아서들 될 거라지만 그래도 가만히 처박혀 있는 건 심심하잖아.”
그레칸이 손끝으로 땅의 한 점을 가리키고 그 주변을 넓게 휘저었다.
“이 땅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나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이 누구인지 궁금하잖아. 신경 쓰이잖아. 그들을 만나 볼 수 있을 거야. 만나서 도움을 주면, 마음의 짐도 덜어지겠지. 직접 살펴보자고. 그런 여행이야.”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던 그녀는 문득 이상함을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너인 것을 왜 내가 신경을 써야 하느냐?”
“자, 가자.”
“무시하는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