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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스탕스
땅에서 솟듯이 튀어나온 그레칸이 까만 눈망울로 그녀를 비추었다.
“왜 이렇게 놀라?”
“귀신처럼 튀어나오니 안 놀라고 배기겠느냐? 일이 있어 나가 본다 하지 않았어. 일은 다 끝낸 게냐?”
그레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밀라니아의 오금에 손을 넣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밀라니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칸 씨, 언제 왔……. 왜 그러고 있는 거예요?”
양손에 의자 하나씩 들고 있던 미넬라가 그들을 발견하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학교의 선생들도 그레칸과 밀라니아를 보고 눈을 끔벅였다.
밀라니아는 굉장히 머쓱해졌다. 내려놓으라는 뜻으로 어깨를 툭툭 치자 그레칸은 외려 그녀를 제 몸에 더 가까이 붙이고는 싱긋 웃었다.
“우리도 이사 가.”
“예? 어디로요?”
이어진 질문은 싹 무시하고, 그레칸이 바닥을 박찼다. 한 번의 가벼운 발돋움만으로도 그레칸은 저택의 돌담 위에까지 올랐다.
품에 밀라니아가 있음에도 없는 것처럼 가볍고 날랜 움직임이었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에게 안겨서 세상이 휙휙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선생님들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그레칸을 말리기를 포기하고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한편 지상 위.
남겨진 깡치 패거리와 학교의 선생들은 멀어지는 둘을 보며 왠지 모를 패배감에 시달렸다.
미넬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에? 연애라고요?”
슬며시 다가왔던 도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어, 둘이 연애하잖아.”
“그야 말은 그렇게 하는 거……. 근데 왜 그렇게 흥분하니, 도니?”
미넬라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도니를 돌아보았다. 도니가 당황하며 아무 말 못 하자 씁, 입맛을 다시며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원래 첫사랑은 실패하는 법이야.”
“첫사랑 아니거든요! 어떻게 마녀님을……. 됐어요. 전 일하러 갈게요.”
퉁명스럽게 몸을 돌리는 도니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단단한 어깨에 엉거주춤하게 손을 올려 두었다.
평생 빗자루를 타고 다녔으니 공중을 날아다니는 건 낯설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안겨서 이동하는 건 어색했다.
“밀라니아, 많이 먹어야겠다. 너무 가벼워.”
“무슨 소리인고. 지금도 꾸역꾸역 먹고 있지 않누. 배 터지게 만들 작정인 게야?”
“엄살이라니, 이 고얀…….”
시답잖은 얘기를 하다 보니 금방이었다.
금세 어딘가 도착한 그레칸이 밀라니아를 땅에 내려놓았다.
“여기는…….”
밀라니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꼭 100여 년 전 귀족 가문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한 저택이었다.
반듯한 돌담을 담쟁이넝쿨이 휘감아 고풍스러운 맛을 더하고, 붉은 벽돌이 매끈한 저택은 크고 깔끔했다.
주변 풍경이 낯설지가 않다.
기시감을 느낀 밀라니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곧 그녀의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그곳이 아니냐. 100년 전에 인간의 재상이 내줬던 집.”
“맞아.”
성큼 다가온 그레칸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설레하는 얼굴에 밀라니아는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그대로 그녀를 품에 안고, 그레칸은 마당과 정원을 지나 저택으로 향했다. 거대한 철문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옛날에 재상이 우리에게 내주었던 그 집이야. 급하게 정리를 해 본건데, 나쁘지 않지?”
“여긴 갑자기 왜?”
“학교는 좁잖아. 안 그래도 사내놈들이 북적북적대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참이었어. 여기서 살자, 밀라니아.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레칸의 즐거운 목소리를 들으며 밀라니아는 안을 둘러보았다.
하루 이틀 준비한 게 아닌 듯 저택 안은 세간이 완벽히 마련되어 있었다.
소파와 장식품, 식탁, 의자 등 모든 가구가 최고급이었고,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2층의 침실로 들어가자 황궁에서나 사용하는 부드러운 침대가 있었다. 그레칸이 밀라니아를 침대 위에 떨구었다.
푹신푹신한 감각에 밀라니아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피식 웃으며 그레칸이 그녀의 옆에 앉았다.
“여기서 살자, 밀라니아.”
“사는 거야 나쁘지 않다만……. 넌 왜 그리 들뜬 것이야?”
그레칸이 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더듬었다. 손가락에 미처 가려지지 못한 입꼬리가 비죽이 올라갔다.
“그래 보여?”
“거울을 갖다주랴?”
“그게…….”
그레칸의 뺨이 복숭앗빛으로 불긋해졌다.
“신혼집 같잖아.”
밀라니아는 눈을 깜박였다.
“뭐라고?”
“이 집, 꾸미면서 즐겁고 설렜어. 당신이랑 단둘이 살 집이라고 생각하니까.”
쑥스러운 듯 손으로 입가를 매만지며 그레칸이 살짝 웃었다.
“영락없이 신혼집이잖아.”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말 안 해도 돼. 그 표정으로도 좋으니까.”
“내 표정?”
“싫어하지 않는 걸로 충분해.”
방싯방싯 웃는 그레칸은 뿌듯하고 행복한 얼굴이라서, 밀라니아는 ‘네가 그리 내 표정을 잘 알더냐.’ 면박을 주지 못했다.
밀라니아가 입을 다물자 그레칸은 더 기뻐했다.
그녀는 뒤늦게 그레칸의 ‘신혼집’을 수긍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 *
다음 날, 호루스를 비롯한 학교의 선생들이 밀라니아와 그레칸을 찾았다.
“어딜 가셨나 했더니, 한참을 찾았어요.”
저택 응접실에 자리한 위제니아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런 곳이 있었소?”
꽤나 멀쩡한, 아니, 지나치게 번듯한 저택 내부 정경에 호루스도 놀란 얼굴이었다.
미넬라와 트루크는 눈을 빛냈다. 그레칸이 거만하게 말했다.
“여기 눌러앉을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말아라.”
그릉거림이 섞인 으름장에 생각을 들킨 두 사람은 뜨끔했다.
“치사하긴…….”
밀라니아가 호루스를 응시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왔느냐.”
집 안 구경에 정신이 팔렸던 호루스는 허흠, 헛기침을 했다. 언제 그랬냐 싶게 눈빛이 진중해졌다.
“긴히 할 말이 있어 왔소. 자네들은 나가 있게나.”
호루스가 옆을 돌아보고 미넬라에게 눈짓을 하자, 미넬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위제니아와 데릭 등의 선생들도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셋만 남자 호루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최근 자리를 자주 비운 이유를 알고 있소?”
“아는 바 없느니라.”
“윗선과의 잦은 회동 때문이오. 회의의 안건은 당신.”
밀라니아가 손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호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그렘의 창설은 내가 홀로 감당하기엔 무리가 따르는 문제였지. 윗선과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는.”
“쉬이 따르기에 용납하고 있는 줄 알았다만.”
“나는 그렇지만, 다른 동료들의 의견을 들어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오. 아무리 의도가 선하고 좋다 할지라도 한 단체에서 뻗어 나온 가지 하나가 제멋대로 자라나 버리면 전체적인 흐름을 망치기 마련이니.”
밀라니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결과가 나왔는가.”
“그렇소. 회의 결과를 알려 드리려 왔소.”
밀라니아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와 눈빛을 교환했다.
후우, 숨을 들이마신 호루스가 빠르게 뱉었다.
“레지스탕스의 정식 가입을 권유드리오.”
“거절이니라.”
중차대한 문제라는 듯 신중했던 호루스와 달리 1초의 고민도 없는 거절이었다.
호루스는 당황하는 빛을 숨기지 못했다.
“가입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진정 우리 편인지 믿을 수 없소. 당신을 우리 편으로 받아들였다가, 혹여 수인들 편에 서기라도 한다면.”
밀라니아는 피식 웃었다.
“어째서 그렇소?”
“내가 수인들 편을 든다면 너희를 도왔을 리 없으니 기각. 너희들을 돕는 건 내 개인적인 죄책감 때문일 뿐. 정확히 말하면 난 온전히 너희들의 편도, 수인들의 편도 아니야. 그저 살기 좋은 세상을 원할 뿐이지.”
밀라니아를 잠시 바라본 호루스가 깊은 날숨을 흘려보냈다.
“일단은 알겠소. 하지만 윗선에선 당신에게 관심이 많은 상황. 그건 알고 있는 게 좋을 것이오.”
“이대로 끝내지는 않겠다는 말로 들리는구먼.”
“틀리지 않소.”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미 거절했잖아. 내 생각이 필요해?”
“그래.”
그레칸은 그녀의 말이 기뻐 빙긋 웃었다가 호루스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방금과 달리 표정이 싸늘히 식어 내렸다.
“난 아직 인간을 완전히 믿지 않아.”
밀라니아는 한숨처럼 대꾸했다.
“그러하냐.”
“그들이 터전을 복구하는 걸 막을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내가 그들을 신뢰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야. 그들은 지나치게 교활하고, 남을 해하는 데 능숙한 자들이니.”
인간을 향한 그레칸의 증오는 100년이란 단순한 수치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뿌리가 깊고 짙었다.
‘그레칸에게 마음을 달리 먹으라고 할 수는 없느니라.’
책상 위에 올라가 있는 그레칸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려 두었다.
깜짝 놀란 그레칸이 그녀의 손을 흘끔거렸다가, 손을 뒤집어 손깍지를 꼈다.
“전에도 말했던 적 있을 것이다. 인간들에겐 단점만큼 많은 장점이 있다고.”
“…….”
“너는 나 때문에 인간을 증오하지. 하지만 나는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건 알아두고 있거라.”
엄지로 밀라니아의 손가락을 쓰다듬은 그레칸이 그녀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단단히 얽었다.
“알아둘게.”
* * *
다음 날, 호루스는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학교의 일행들을 대동하지 않은 채였다. 대신 다른 사람이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구먼?”
밀라니아는 호루스의 옆을 눈으로 가리켰다.
“말씀드렸잖소. 윗선에서 당신에게 관심이 많으시다고.”
응접실로 그들을 안내한 밀라니아는 아무 말 없이 새로운 손님들을 살폈다.
호루스와 함께 온 새로운 손님은 두 명이었고, 하나는 아는 얼굴이다.
오랜만에 본 스미스는 어디 다쳤는지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다른 남자는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호루스가 말한 윗선이 스미스일 리는 없고 이 남자일 텐데, 그런 것치고 굉장히 젊었다. 30대가량 되었을까?
진중한 분위기에 샤프한 생김새. 햇볕에 탔는지 조금 얼룩덜룩하기는 하나 피부도 꽤 흰 편이었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짐짓 점잖게 미소 지었다. 관찰하는 시선을 거둔 밀라니아가 빈 책상을 눈짓했다.
“미안하구먼. 차 한잔 대접하지 못해서. 나도 낯선 집이라 차가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으이.”
윗선이라는 젊은 남자가 밀라니아의 옆에 앉아 있는 그레칸을 응시했다. 두 눈에 이채가 떠오르는 걸 밀라니아는 놓치지 않았다.
“옆의 분이 칸 씨입니까? 듣던 대로 강해 보이시는군요.”
두 손을 맞잡아 비빈 젊은 남자가 입맛을 다셨다. 호루스보다 지위가 높기는 한 듯 대화를 주도하는 게 익숙했다.
“아, 저는 레지스탕스 총수님의 수행원입니다. 두 분 이야기는 호루스 님께 미리 들었고요.”
친근하게 웃으며 남자는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이미 예상하셨겠지만, 다시 한번 권유드리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헛걸음을 했구먼. 생각이 바뀔 일은 없네. 레지스탕스는 자네들의 문제야. 거기 속할 생각은 없어.”
남자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표정이 점토처럼 능란하게 바뀌었지만, 어쩐지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황도의 상황이 점점 좋아지고 있더군요. 그런 도움을 주신 분이 저희만의 문제라 하니 섭섭합니다. 저희를 돕는 건 2대륙의 모두를 돕는 일이 될 텐데요.”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설득력이 높았지만 밀라니아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글쎄. 레지스탕스는 인간이 주축이 되는 단체지. 나는 밀그렘의 이름하에 세상을 돕고 싶은 것뿐, 레지스탕스를 도와 인간의 편에 서고 싶은 게 아니야. 게다가 황궁에 머물렀던 내가 레지스탕스에 가입한다면 그 상징적 의미도 클 터. 그걸 노리는 게 아닌고?”
굳은 표정의 젊은 남자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수인이라고 무작정 배척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긴 합니다. 아니라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
“그러니 마녀님이 합류해 주십시오. 그런 사상과 이념을 가진 당신이라면, 서로 으르렁대는 사람들을 융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남자가 그레칸을 흘끗했다.
“게다가 두 분의 뛰어난 능력이 필요합니다. 부패한 황궁보다는 저희 레지스탕스에게요. 황궁만큼 많은 것을 내드릴 수는 없으나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
“이건 약소하지만 선물입니다.”
남자가 직사각형의 긴 상자를 꺼내 들었다.
처음으로 밀라니아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비웃음에 가까웠다.
“뇌물인 것이야? 과연 셈 빠른 인간인지고.”
“뭐, 간절한 마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남자는 머쓱한 기색도 없이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밀라니아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글쎄, 선물을 받는다고 달라질 건 없을 것 같구나. 이 몸은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니라.”
“이건 지금까지 해 주신 일에 대한 보답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마녀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밀라니아는 남자가 내민 선물을 응시했다.
보석함처럼 생긴 직사각형의 상자는 꽤 가격이 나갈 것처럼 생겼는데, 전형적인 아티팩트 보관 상자였다.
공격 마법이 저장된 아티팩트 같은 거겠지. 상자에 손을 가져가면서도 밀라니아는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상자가 열리기 전까지는.
“…….”
밀라니아의 눈동자가 경직되었다. 위험한 물건일까 주시하던 그레칸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변화된 분위기가 마음에 든 듯 남자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과거 저희 요원이 운 좋게 습득했던 지팡이입니다. 벼락 맞은 자작나무로 만든 것으로서, 마법을 다룰 줄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아티팩트죠.”
누구나 탐내는 아티팩트. 당연히 그럴 것이다.
이건 밀라니아, 그녀의 지팡이였으니까.
소기의 임무를 달성했다는 듯 젊은 남자는 더는 가입을 권유하지 않고 일어섰다.
밀라니아는 보석함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마력을 한층 강력하고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하는 마법완드.
쥐자마자 산들바람처럼 상쾌한 마력이 그녀를 휘감았다.
천 년 동안 사용했던 것이다. 손에 익은 물건이 손바닥에 착 달라붙는다.
사라진 퍼즐 조각이 돌아온 것처럼 마음 한쪽이 안정된 그녀와 다르게 그레칸은 사나운 기세를 풍겼다.
“……저자.”
그레칸이 으르렁거렸다. 날카로운 시선은 물러나는 세 사람의 뒷모습에 못 박혀 있었다.
밀라니아는 지팡이 손잡이를 부드럽게 쥐고 응접실의 문을 여는 젊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강한 결계가 느껴진다. 마력의 결계 틈을 찾아 들여다보자, 강한 마력이 똬리 튼 심장이 보인다.
100년 전 인간들의 기준으로 보면 대마법사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을 듯했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얼굴 생김. 머릿속에서 수많은 얼굴들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과거에 만났던 황족들의 얼굴. 황제. 황후. 황태자. 앨리지의 연인 에반…….
그래.
“에반이구나.”
밀라니아는 입속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문을 연 젊은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오늘은 아쉽지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찾아뵙지요.”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총수의 수행원이라 했던가?”
“그렇습니다만…….”
의아해하는 얼굴을 보는 순간, 눈앞에 병약한 얼굴이 떠올랐다. 밀라니아는 나직하게 탄성을 뱉었다.
“그렇군. 자네가 그란젤인가?”
우뚝.
남자는 표정 변화 없는 밀라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탐색하는 시선이 오갔다. 밀라니아의 눈빛에 어린 확신에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살짝 열린 잇새에서 흘러나오는 미심쩍은 목소리.
“어떻게 아셨습니까?”
‘호오.’
그르릉. 지하에서 올라오는 듯 거칠고 사나운 목울음이 들려왔다.
‘아차!’
밀라니아는 황급히 그레칸을 바라보았다.
벼락 맞은 자작나무 지팡이가 보석함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스멀스멀 새어 나오던 그레칸의 광포한 기운은 남자가 스스로 그란젤이라 시인하는 순간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이게 무슨!”
채앵!
대경한 호루스가 허리춤에서 검을 꺼냈다.
그레칸의 기운이 응접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므로 스미스 또한 긴장한 기색으로 수인을 맺었다.
“칸! 뭐 하는 것이오. 지금 당신은 무례를 저지르고 있소!”
“무례?”
그레칸의 잇새에서 삭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집중된 기운이 호루스에게로 폭사되었다.
“크윽.”
두 걸음 뒤로 물러난 호루스가 당황하는 얼굴을 했다.
“누가 누구에게?”
심상치 않게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건 예상 범위를 월등히 벗어났다.
“총수, 피하셔야 합니다.”
그란젤은 호루스의 다급한 말에도 밀라니아와 그레칸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밀라니아가 그레칸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날카로운 이빨처럼 사나웠던 기운이 일순 주춤했다.
밀라니아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분노로 혼탁해진 검은 눈동자와 금색의 눈동자가 맞부딪쳤다.
그의 눈에 밀라니아의 얼굴이 비쳤다.
“……밀.”
“나는 아무도 문제가 없어.”
“하지만 저자는 위험하다.”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지키고 있거늘, 그 누가 나를 위협한단 말이냐.”
분노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탁한 눈빛이 서서히 풀어지며 본래의 또렷한 검은 눈동자로 돌아온 그레칸은 눈을 깜박였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않누.’
밀라니아는 한숨을 쉬고, 잘했단 뜻으로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호루스와 스미스의 긴장으로 올라갔던 어깨도 서서히 내려왔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란젤은 전에 없이 신중하고 진지했다.
“네가 누군지 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마탑이 사라진 시대에 이런 마력을 이만큼 키울 수 있고, 르안나 제국 황실의 피를 이은 자라면 남은 인간들의 총수가 되고도 남을 일이지. 너 같은 인간이 있는데 다른 자가 총수가 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느냐.”
황실의 피와 관련된 건 아무래도 비밀이었던 듯 호루스의 표정이 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히 굳어졌다.
반면 젊은 남자, 그란젤의 표정은 기묘하게 변해 갔다.
놀라워하는 것도 같고 기가 막혀 하는 것도 같고,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스미스에게 인상착의를 전해 듣고 설마설마했는데.”
옅은 신음을 흘린 그란젤의 입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이었어요. 정말로, 100년 전의 대마녀가 다시 나타난 거였군요.”
그레칸이 으르렁거렸다.
황궁을 제외하고 그 말을 꺼낸 사람은 처음이었다.
르안나 제국 황실의 혈통을 이은 자라면 범인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터.
그녀의 정체를 알아채는 것 정도야 특이할 것 없었으므로 밀라니아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다만 그레칸은 그란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못마땅한 듯 사나운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칸에게 듣기를 네가 당시 황태자의 피를 이었다는데, 사실이냐?”
“…….”
“이상하구먼. 황태자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다.”
“그건 황궁의 기밀인데. 어떻게 그것까지 아십니까?”
“황후에게서 직접 들었느니라. 누구의 후손이냐?”
그란젤은 숨길 필요 없다고 판단했는지 침묵을 깨고 순순히 털어놓았다.
“황후 폐하. 정확히는 황후 폐하의 적자이신 2황자 전하의 2대손입니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손등을 툭툭 쳤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듣지 않고도 이해한 그레칸의 눈빛은 여전히 냉랭했다.
“황후 역시 황태자와 결탁하여 당신을 해하려 했지. 황태자의 핏줄이 아니라 할지라도 가만둘 수 없는 일.”
세 사람의 시선이 그레칸에게 쏟아졌다.
호루스와 스미스는 그레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의아함과 경계심이 뒤섞인 눈을 했다.
다만 그란젤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레칸을 살피고 있었다.
“왜 그쪽이 그런 말을…….”
의문을 참지 못한 호루스가 운을 띄웠다. 그레칸은 가늘어진 눈으로 그란젤과 두 사람을 훑었다.
밀라니아 때문에 가만히 있기는 하나 당장 처리하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