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5권) (3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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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봐, 거기가 아니라 여기야

“남은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웃을 수 있는 날이 되겠죠. 이건 다른 의미 없이, 순수한 친애의 의미로 권하는 거예요.”

밀라니아는 그러니까 받아들이란 눈빛을 하고 있는 체라와 르베리안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밀라니아의 고민을 알아챘는지 르베리안즈가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채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감동적이네.”

“……꺄악!”

멍하니 있던 바넷사가 돌연 비명을 질렀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창가에 꽂혔다.

창틀에 그레칸이 앉아 있었다. 검은 옷 때문에 언뜻 어둠에 동화된 것처럼 보였다.

그가 입을 열기까지, 그의 기척을 조금도 감지하지 못한 셋은 얼굴을 굳혔다.

“와, 감동적이야.”

그레칸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만 달싹였다.

두 번이나 말하니 조롱 같았다.

“끝났으면 그만 데려가도 되겠지?”

“…….”

“밀라니아.”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걸까?

공통적인 의문이 얼어붙은 머릿속에 떠올랐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제멋대로인 행동을 보자 다시 눈을 떴던 그때처럼 기분이 나빠졌다.

예의가 없는 것도 싫었고, 무표정한 얼굴이나 비린내가 날 것처럼 반질반질한 검은 눈동자도 못마땅했다.

‘저, 저 무슨 건방진 꼴이로고.’

그레칸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밀라니아를 응시했다.

눈빛을 통해 그녀의 거절을 감지한 그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뭐가 생각났는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입을 다문다.

‘무슨 생각을 하는고. 속상하기라도 한 게냐.’ 생각하려는 참에, 그레칸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잡으라는 듯이.

“이리 와, 밀라니아.”

“…….”

“거기가 아니라 여기잖아.”

“…….”

“여기, 내 곁에.”

그레칸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건조했지만 여기 있는 누구도 그의 마음까지 무덤덤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까만 눈동자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격정을 참는 듯 넘실거렸다.

밀라니아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아무런 행동도, 반응도 없는 그녀를 보며 그레칸은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네가 여기 있는 것이야?”

질책처럼 흘러나온 못마땅한 목소리에 그레칸은 딱딱하게 대꾸했다.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밀라니아.”

“…….”

“많이 참았거든. 신부 운운하는 소리가 나올 때부터.”

계속 뒤를 쫓고 있었던 건가.

밀라니아가 눈빛으로 비난하자, 그레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달싹이는 입술이 파르르 경련했다.

함께 가 달라고, 금방이라도 애원하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으나 정작 새어 나온 숨소리는 분위기와 달리 사뭇 거칠었다.

“……다 죽여 버릴까?”

쩌정, 하고 얼음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머릿속에서만 울리는 소리였으나 너무도 생생해서 그레칸의 스산한 말이 주는 충격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밀라니아의 충격이 컸다.

다른 이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인데 반해, 그녀는 그레칸을 거의 제정신 아닌 사람을 쳐다보듯 했다.

그레칸이 눈동자를 굴렸다. 그냥 하는 위협이 아니라는 건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그러면 어떨까, 고민하는 눈빛이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는 듯 그레칸이 밀라니아에게 말했다.

“어서, 여기로 와.”

조금 초조한 기색.

그레칸은 살심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손을 쥐락펴락했다.

얼른 잡아 주길 바라면서 안달복달하는 손. 밀라니아는 결국 참지 못했다.

“천방지축으로 구는 게 참으로 못 볼 꼴이구나.”

“뭐?”

“다 죽여 버린다 했느냐? 허허, 재밌는 말이로구나. 참으로 방자하고 오만하다. 내 살면서 감히 내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느니.”

싸늘한 눈으로 밀라니아가 말했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지 그러누?”

밀라니아는 매끈한 눈썹을 위로 치켜뜬 채 팔짱을 단단히 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 매서운 기세가 새어 나왔다.

마력을 잃고 마녀족을 이끌어 가는 수장의 위치도 잃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대마녀였다.

그레칸은 손가락을 오므렸다.

“왜 그러지? 한번 해 보거라. 어디 나도 한번 죽여 봐.”

“…….”

“왜 가만히 있느냐?”

밀라니아가 진정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굳어졌던 그레칸은 완전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울 듯 말 듯 일그러진 눈매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조마조마하며 지켜보던 체라와 르베리안즈는 얼굴을 구겼다.

“……가식을 저 따위로 떨다니. 토할 것 같게.”

“토하지 마. 내가 먼저 올라올 것 같으니까.”

르베리안즈와 체라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밀라니아의 귓등을 스쳤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질색하는 둘의 반응에 내심으로는 혀를 쯧쯧 찼지만 겉으로는 그레칸을 쏘아볼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레칸은 입술을 깨물고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화가 나는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안절부절못했다.

‘저리 굴 것을 뭐 하러 못되게 구는지.’

노기가 누그러질 것 같았지만 밀라니아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저 나쁜 버릇은 단단히 고쳐 놔야 하느니.’

그가 세상에 미친 악영향도 알고, 힘센 미친놈은 존재만으로도 죄악이라는 걸 알지만 상대는 그레칸이었다.

싫다 귀찮다 밀어내도 졸졸 쫓아오고, 모진 말을 들어도 한쪽 귀를 막고 다시 쫓아오는 그런 놈.

밀라니아에게 그레칸은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해 마음이 허해서, 그래서 어릴 적 거둬 준 그녀에게 애정을 느끼는 아이였다.

다섯 손가락 중에서 제일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

‘저렇게 약해질 줄은 몰랐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에서는 이를 드러내고 손 한 짝은 뜯어먹을 것처럼 굴던 포악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 꼴을 보고도 다들 저 아이를 위험한 존재라고 경계하는 것이냐.’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말란도르와 르베리안즈의 흉측한 상흔은 거짓이 아니었으므로, 밀라니아는 의아한 한편 의구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레칸의 눈가에 고였던 눈물은 결국 흘러내리지 않고 말라 버렸다.

애잔한 표정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반성하고 있다면, 앞으론 안 그러겠다고 해야 하느니라.’

그레칸이 할 말을 예상하며 밀라니아는 냉랭한 표정을 유지했다.

시간이 지나도 그레칸은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입을 앙다문다.

“그레칸이 왜 저러고 가만히 있는 거지?”

“조심해요. 무슨 짓을 할 줄 모르니까.”

르베리안즈와 체라의 속닥거림도 오래가지 못했다. 뒤에서부터 시작된 이상 반응 때문에.

털썩.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쓰러진 바넷사를 확인한 르베리안즈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바넷사!”

날개를 펼쳐 바넷사에게 간 그가 바넷사를 안아들었다.

힘없이 늘어진 바넷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르베리안즈의 품에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파리하게 질린 안색은 박쥐족임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추워 보였다.

르베리안즈가 분노한 눈으로 그레칸을 노려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가장 놀란 건 밀라니아였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밀라니아에게 그레칸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죽었어.”

“…….”

르베리안즈가 바넷사의 손목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보다 앞서 바넷사의 가슴에 귀를 대고, 코에서 새어 나오는 숨결을 확인한 체라가 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정신을 잃은 것뿐이야.”

“안 죽었다고 했잖아.”

그레칸은 그들이 한심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밀라니아가 싫어할 테니까.”

“…….”

“싫어하는 짓은 안 해.”

크리스털 방에서 눈을 뜬 후 들었던 가장 어이없었던 말에 대해 묻는다면, 밀라니아는 지금이 두 번째라고 말했을 터였다.

첫 번째는 제 아이를 낳아 달라는 말이었고.

“개라서 개소리를 하는 거예요.”

바넷사에게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르베리안즈는 다소 안심한 얼굴로 빈정거렸다.

그레칸은 밀라니아와 르베리안즈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심기가 몹시 불편한 기색이었다.

“너무 가까워. 마음에 안 들어.”

속삭이는 말을 용케 들은 밀라니아는 설마 싶어서 르베리안즈와 그녀의 거리를 눈대중으로 가늠했다.

그다지 가깝지 않았다.

물론 그레칸과의 거리보다야 가까웠지만.

“거기가 아니라 여기라고 했어.”

“…….”

“이제 원하는 건 다 해 봤잖아, 밀라니아. 손, 잡아 줘.”

“…….”

“나 팔 아파.”

퍽이나 그렇겠다.

밀라니아는 슬슬 그레칸이 믿어지지 않기 시작했다.

예전이라고 그를 믿었던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때와 궤를 달리할 정도로 신뢰가 바닥을 쳤다.

불쌍한 척, 슬픈 척, 아픈 척.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척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이대론 안 통하겠다 싶었는지 그레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 모습보다 훨씬 요사스러웠다.

“나.”

“…….”

“밀라니아가 싫어하는 짓을 할 수도 있어.”

“…….”

“어쩔 수 없으니까.”

“그 말은 네게만 해당되는 것 같구나.”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나와는 무관하다고 말하는 밀라니아에게 그레칸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털썩.

불길한 더듬이가 등을 덮어 대는 기분.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체라와 르베리안즈 역시 바넷사처럼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밀라니아는 눈을 끔벅였다.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다. 한 번은 당황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두 번이나 그레칸이 어떻게 힘을 썼는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그녀는 알아챌 수 없었다.

뒤늦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형언할 수 없이 거대한 그림자가 뒤에 드리워져 있는 듯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강하구나.’

그것도 너무 강했다.

당혹스러운 걸 넘어 막막해질 만큼.

그레칸에게 절망을 느낀다는 게 그녀는 믿기지가 않았지만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절망이라 해도 크게 해될 건 없으리라.

그레칸을 제지할 방법이 없다는 걸 창졸간에 깨달아 버렸으니 막막함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 터였다.

등 뒤로 그레칸의 덤덤한 목소리가 밀려들어왔다.

“이제 밀라니아도 어쩔 수 없잖아.”

밀라니아의 얇은 입술이 꽉 다물렸다.

* * *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내.

아니, 세상에서 제일 강한 골칫덩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미친 늑대.

흔들거리는 말 위에서 밀라니아는 속으로 그레칸을 정의할 수 있는 말을 추려 보다가 무슨 쓸데없는 짓인가 싶어 집어치웠다.

평탄하게 살아오면서 뜻대로 되지 않은 건 그레칸에 관련된 것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르베리안즈는 그레칸에 비하면 얌전한 축이었느니. 말란도르는 제멋대로였지만, 노예들과 노는 데 빠져 있느라 나를 귀찮게 구는 날이 많지 않았고.’

그런데 그레칸은 놀이 상대도 밀라니아, 취미 상대도 밀라니아, 밥 주는 사람도 밀라니아, 밀라니아, 밀라니아.

전생에선 심장을 달라고 귀찮게 하고 이번 생에선 주구장창 불러 대며 귀찮게 하더니 죽다 살아난 지금은 애를 낳아 달라고 귀찮게 한다.

그리고 이제는 하다 하다, 협박까지 하는 것이다.

기가 차고 황당해서 그녀는 말문이 턱 막혔다.

‘이런 악연이 또 있을런가.’

밀라니아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어 이렇게 됐는지, 인간식 사고로 탐구할 만큼 한탄스러웠다.

순수한 자연의 힘으로 태어난 자신에게 업보란 게 있을 리 없는데도.

밀라니아가 심각하게 사색에 빠져 있는 그때, 돌아가는 길은 매우 적막하고 고요했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옆에서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내는 것도 몰랐다.

반쯤은 생각에 골몰해서였고 반쯤은 일방적인 무시였다.

“화났어?”

“…….”

“화났어, 밀라니아?”

“…….”

“걔들 다 무사해. 뇌에 약간 충격을 준 것뿐이야. 이미 일어나 있을걸?”

“…….”

“별거 아닌데…….”

“…….”

“화났어?”

그는 정확히 132번째 화났냐고 물어보는 중이었고 밀라니아는 132번째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그레칸은 어쩔 줄 몰라 했고 삐진 티를 내기도 했고 화를 내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등, 온갖 감정적인 모습을 보여 줬지만 강철 방패처럼 튕겨 내는 밀라니아의 무심한 모습에 마침내 입을 닫았다.

밀라니아는 이제 좀 조용해지겠거니 생각했다.

약 10분 후.

“화났어?”

“…….”

“화났어, 화났어, 화났어?”

이쯤 되면 놀리는 거 아닌가.

밀라니아는 한쪽 귀는 닫고 한쪽 귀만 열어 둔 상태로 그레칸에게 주의를 기울였지만, 끝끝내 원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게 그녀를 화나게 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구나.”

“미안해.”

“나 말고, 그들에게.”

“……안 미안해.”

어이가 없어진 밀라니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귀 처진 새끼 늑대처럼 시무룩해하던 그레칸이 시선을 받아 좋은 듯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 웃을 때인가.

밀라니아가 냉랭히 쳐다보니 그레칸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미안해. 걔들에게도.”

마지못하다는 표정으로 툭 뱉는다.

밀라니아는 도대체 이걸 어찌해야 하나 하는 심정으로 그레칸을 딱하게 응시했다.

말은 미안하다지만 억지로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진심은 한 자락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안하지 않은 이에게 어떻게 억지로 미안한 마음을 쑤셔 넣을 수 있겠는가.

마음은 그렇게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정말 답답한 일이로고. 100년이란 시간이 어찌했을진데 네가 이렇게 변해 버린 거누?”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를 그레칸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는다.

“밀라니아가 고쳐 주면 되잖아.”

“…….”

“밀라니아가 없을 때 그랬으니까, 이제 밀라니아가 고쳐 줘.”

“참 궁색하고도 뻔뻔한 말이로다.”

“…….”

“대체 넌 무슨 일을 겪었기에.”

“아팠어서.”

그레칸은 눈치를 보다가 냉큼 대꾸했다.

“뭐라?”

“아팠어서 그래.”

“…….”

“밀라니아가 없을 때, 너무 아파서.”

밀라니아는 말문이 막혀서 그레칸의 미소 띤 얼굴을 응시했다.

그는 밀라니아가 아무리 타박을 주어도 이렇게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듯 슬슬 미소가 일어나고 있었다.

“기가 막히는구나. 뭐가 그렇게 좋으냐?”

그런 짓을 한 주제에.

비난을 담은 질문으로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것이 아니었다.

“응. 밀라니아가 좋아.”

동문서답이 따로 없다.

“돌아 버렸구나.”

“응. 밀라…….”

“그만.”

그레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여전히 싱글벙글한 얼굴이다.

뭘 해도 좋단다.

“역시 밀라니아가 있어야 해.”

“…….”

“아니, 내가 밀라니아 곁에 있어야 해. 다행이다. 나, 그때 죽지 않아서. 미칠 것처럼 죽고 싶어도, 꾸역꾸역 참아 내서.”

그녀는 약간, 그레칸의 100년은 어떤 시간이었는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이들의 100년은 평탄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그레칸의 100년은.

밀라니아는 한숨을 삼켰다.

‘왜 내가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느니.’

아무리 그레칸이 힘들었어도 그가 한 짓이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밀라니아는 고개를 돌렸다.

1대륙의 숲길 끝에 다다르자 검푸른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푸르고 아름다운 바다 건너편의 2대륙은 여전히 망가진 모습일 것이다.

그레칸의 분노를 그대로 받아 예전 모습일랑 위풍당당한 건물 몇 채 정도밖에 없는 황량함만 남아.

자유를 누리던 인간들은 노예처럼 부려지며 하루하루 삶의 의욕 없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선조의 죄과를 받았다기엔 너무 가혹한 일이로다.’

“밀라니아.”

“…….”

“밀라니아?”

2대륙을 생각하니 다시 심란하고 그레칸이 꺼림칙해서 밀라니아는 계속된 부름을 무시했다.

이전과 다른 무시라는 것을 알았는지 그레칸은 다시 안절부절못했다.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밀라니아의 금빛 눈은 그레칸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무심하기만 했다.

그레칸의 감정이 다시금 넘실거린다.

싱글벙글 웃음은 쏙 들어가고 분노와 두려움이 스멀스멀 새어 나가 주변 공기가 묵직해졌다.

히이이잉…….

밀라니아는 측면을 힐끗했다. 그레칸을 태운 말의 까만 눈이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레칸의 새카만 눈과 달리 순박한 눈이다.

말의 두려움이 전해져, 밀라니아는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그만하거라.”

“…….”

“네 말이 무서워하잖느냐.”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말머리 위로 사뿐히 떨어졌다.

그대로 스윽스윽 매만지자 맹수의 흉포한 기운에 바들바들 떨던 말이 안정을 찾아갔다.

그레칸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크고 두꺼운 손으로 밀라니아의 손을 턱 잡아서 자기 머리 위로 올렸다.

“뭐 하는 거냐?”

“나도.”

“…….”

“나도 무서우니 쓰다듬어 줘.”

밀라니아는 잇새로 새는 바람 같은 웃음을 흘렸다.

“모두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네가 무서워하는 게 있느냐?”

역시 빈정거림이었으나 상대방은 진지하게만 굴었다.

“응. 무서워. 밀라니아가 또 이런 짓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무섭고 다 죽이고 싶고 슬프고 화가 나는데,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밀라니아가 사라진 며칠 동안 참는 게 너무 힘들었는데, 이렇게 내가 밀라니아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화난 걸 다 까먹게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싶어서. 또 밀라니아가 내 곁을 떠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걸 생각하면 많이 무서워져.”

길게 줄줄 말했지만 요지는 하나였다.

당신의 부재가 내 두려움이오.

시간을 허투루 보낸 건 아닌지 예전보다 제법 매끄럽게 말을 한다 했더니, 다시금 예전의 그레칸처럼 어색하게 말하는 그가 묘하여 밀라니아는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그레칸은 까만 눈에 슬픔을 아롱다롱 달고 밀라니아의 눈앞에 제 손을 보여 주었다.

“봐,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잖아.”

어디서 자꾸 어린애처럼 구느냐, 하고 비웃어 주려던 밀라니아는 정말 달달 떨고 있는 그레칸의 손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려 앞으로 나갔다. 그레칸은 진정된 말을 끌고 밀라니아의 옆으로 다가섰다.

말들이 부딪칠 듯 말 듯 하는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솔직히 말해 보렴.”

“무엇이든 얘기해 줄게.”

“여기저기서 얘기를 들어 보니 그레칸, 넌 내가 기억하는 것과 많이 달라졌더구나. 그런 네가, 내가 떠나는 걸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한 줄기 의문으로 품고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 크기를 불려 강렬해졌던 의구심.

자신은 멀쩡히 황궁을 빠져나갔고 멀쩡히 1대륙에 당도하여 아는 이들을 만났다.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 그레칸을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더더군다나 자신의 힘이 약해진 이 상황에서. 적어도 마법 공방에서의 일은 그의 귀에 알려졌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레칸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1대륙에서 볼일을 다 끝마칠 때까지.

혹시나.

아주 혹시나.

‘배려한 것인고?’

그렇다면 그레칸의 심성이 아주 완전히 망가졌다고는 볼 수 없을 터.

차라리 그렇다면 마음이 한결 나아질 텐데, 내심 중얼거린 밀라니아가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누?”

밀라니아의 기세가 진지해서 그레칸은 순순히 대꾸했다.

“처음부터. 밀라니아가 황궁의 담벼락을 넘는 것도 보고 있었지. 도둑고양이인 줄 알았어. 잘 넘던데. 몸도 약하면서.”

정문으로 나가지 못했던 밀라니아는 마음이 뜨끔했다.

“밀라니아가 나갈 수 있게 일부러 모른 척한 거야.”

그레칸은 조바심이 나서 성마르게 굴었다.

“……징그럽다고 했잖아.”

“…….”

“그런 말 듣는 거 싫어서, 정말 싫은데 모른 척했어.”

“…….”

“밀라니아가 원했잖아.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며. 그게 떨거지들을 보러 간다는 뜻이었던 거 알아. 그래서 싫었는데…….”

“떨거지라니?”

그게 설마 체라와 르베리안즈, 말란도르를 칭하는 말인가?

그레칸은 그녀의 황당한 눈빛에도 어깨만 으쓱였다.

“……물론 진정으로 원하는 건 죽음이겠지만 그건 아무리 그래도 안 돼. 나를 징그럽다고 수백 번 해도, 안 되는 일이야. 방법은 없고, 있어서도 안 돼.”

“…….”

“하지만 나머진 다 됐지? 다들 잘 살고 있는 거 확인했으니까.”

“그게 잘 살고 있다고?”

“……살아는 있잖아.”

그레칸이 불만스럽게 읊조렸다.

밀라니아의 표정이 무덤덤하게 변하자 슬쩍 손을 뻗어 손가락을 잡는다.

그녀는 탁, 하고 손을 쳐내었다.

“……아야.”

“용케 얌전히 따라왔구나.”

“중간에 나타나면 밀라니아가 싫어할 테고, 참을 자신도 없었어. 말란도르 때문에 밀라니아가 쓰러졌을 땐 정말 튀어 나갈 뻔했으니까, 참느라 많이 힘들었어. 그리고 또…… 밀라니아의 반응도 궁금했어. 지금, 밀라니아가 소중하게 여기는 건 뭘까. 그게 궁금해서.”

“…….”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냐며 그레칸은 까만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늑대의 모습이었다면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을 듯한 눈빛이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칭찬해 주고 싶기는커녕 소름이 돋아났다.

‘그걸 알아서 뭘 하려고?’

어리숙한 새끼 늑대가 음흉한 늑대 새끼로 훌쩍 커 버린 꼴이었다.

그 사실을 또 한 번 인식한 건 그다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밀라니아는 그레칸과 같은 말을 타고 있었다.

묵직한 무게감에 고개를 뒤로 돌리자 그레칸이 왜 그러냐는 듯 순진하게 눈을 깜박였다.

“네 말로 돌아가거라.”

“그게, 힘들어. 내 말이 날 무서워해서.”

옆으로 시선을 옮기자 그레칸에게서 벗어난 말이 신이 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바싹 닿아 있으려니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렇게 얘기해 봤자 들어먹을 놈이 아니라 밀라니아는 모른 척, 고개를 원위치로 되돌렸다.

말이 움직일 때마다 안장이 들썩였다.

얼마 안 있어 밀라니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둘을 모두 태운 말이 헐떡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려라. 이러다 내 말이 탈진하겠느니.”

그녀가 한 손으로 말의 주둥이를 쓰다듬자 말이 거친 숨을 흘리며 투레질을 했다.

밀라니아의 관심이 기분 좋은 듯 스스로 머리를 좌우로 움직여 밀라니아의 손에 머리를 비빈다.

그레칸의 눈이 서늘해졌다.

“그 손은 인기가 너무 많아.”

“또 무용한 트집을 잡는구…….”

손이 덥썩 잡히고, 몸이 위로 솟구친다. 밀라니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바닥은 금세 저 아래로 내려갔다. 놀란 마음을 진정한 밀라니아는 눈을 끔벅거렸다.

“?”

그들은 하늘에 체공 중이었다.

그레칸은 밀라니아를 단단히 안은 뒤,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법……. 비행 마법을 쓰는구나.’

이럴 리가 있나. 분명 그레칸의 마법적 능력은 제로에 수렴했는데. 어찌 이리 능숙하게.

밀라니아가 계속해서 바닥을 쳐다보고 있자 말들이 걱정되어서라고 오해했는지 그레칸이 투덜거렸다.

“쟤들은 알아서 가라고 해. 하칸이 붙여 준 거니 길 찾아 가겠지.”

길이라니. 대륙 사이엔 바다가 있다. 아니, 말의 입장에선 황폐화된 2대륙보단 1대륙이 살기 좋을지도…….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니라.’

그레칸은 바다 위를 날아갔다. 곧 워터드래곤의 영역이다.

워터드래곤은 어떻게 할 참일까.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어찌 힘을 쓰는지 똑똑히 봐 둬야겠다는 마음으로 눈에 힘을 주었다.

아직까지는 잔잔한 바다를 살펴보다 불현듯 안정적인 비행 솜씨를 인식했다.

흥미롭다.

“마법은 언제부터 하게 됐느냐?”

그녀가 기억하기로 그레칸은 마력이 없었다.

“뭔가를 박살 내기 위해선 그놈들이 귀히 여기는 힘부터 쓸 줄 알아야 하잖아.”

그레칸의 입가에 시린 비소가 맺혔다.

인간을 향한 증오가 금강석처럼 단단한 모습.

“그렇게 대단하다 소중하다 법석을 떨더니. 어렵지 않더라고.”

밀라니아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놀라워서.

마법을 배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므로, 그레칸의 말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의 감정을 눈치챈 그레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 오러도 쓸 줄 알아.”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만 바다 위 허공에서 칼이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빗자루를 검처럼 움켜쥐었다.

장대 같은 빗자루 손잡이가 달빛이 내려오는 하늘을 향했다.

검은색 기운이 줄기줄기 뻗어 나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검의 형상을 갖추었다.

믿을 수 없이 선명한 오러블레이드.

30년을 고련한 검사들도 도달하지 못한다는 경지였다.

“…….”

“…….”

그레칸이 어떠냐는 눈으로 밀라니아를 쳐다보았다.

인간들이 가진 세 가지 커다란 힘. 마법. 검술. 기술.

마법과 검술은 자신이 취했고 기술은 이종족으로 대체하게 만들었다.

그레칸이 대륙을 어떤 식으로 손아귀에 넣고 주물렀는지, 밀라니아는 완벽하게 이해했다.

어느새 두 사람은 바다를 한참 날아와 있었다.

밀라니아는 한발 늦게, 워터드래곤이 기이할 정도로 잠잠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식지를 바꾸었나?

워터드래곤이 어디 간 게 아니라는 건 곧 알 수 있었다.

침입자를 발견하고 주둥이를 벌리려던 워터드래곤이 수면 밖으로 코를 내민 채 멈칫했다.

거대한 코가 실룩거린다. 흠칫하는 기색.

촤아아아!

워터드래곤은 꽁지에 불붙은 닭처럼 버둥거리더니 머리부터 수면 깊숙한 곳으로 처박았다.

꼭 그레칸이 두려워 도망치는 듯했다. 바다의 파수꾼, 신수 워터드래곤이 말이다.

밀라니아는 기가 막혔다.

‘허어?’

나 잘 컸지 않냐고, 대답을 기대하는 그레칸에게 그녀는 딱 한마디를 해 주었다.

“괴물이 다 됐구나.”

* * *

황궁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고즈넉한 황궁은 아침부터 밀라니아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참으로 오만방자하구나. 이래서야 망나니와 다름이 없어!”

밀라니아는 크리스털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자신이 황궁을 빠져나간 이후 죽어 나간 수가 무려 열이 넘어갔다는 걸 알게 된 탓이었다.

그중에는 곰살맞게 구는 게 보기 좋아 심심파적으로 100여 년 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하인도 있었다.

그레칸이 아무리 귀여운 척이나 화가 난 척이나 불쌍한 척을 해도 그녀는 본 체도 하지 않았다.

‘체라나 르베리안즈, 그리고 바넷사에게 한 짓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을 때에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았느니라. 그건 그 일을 대수롭잖게 넘겨서가 아니야. 그레칸이 그들을 진정으로 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을.’

하지만 그가 저지른 이번의 만행에, 실제로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다.

여섯 시간 전의 일이었다.

[죽었다고 했느냐?]

눈에 익은 하인이 아니라, 새로운 시종이 들어오기에 밀라니아는 별다른 의심 없이 물었다.

이전의 아이는 어디 갔냐고. 시종은 무심코 대꾸했다. 죽었다고.

[그, 그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종은 밀라니아의 서릿발 같은 추궁에 당혹스러워하는 한편 이 일이 그에게 어떤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는 기색을 풍겼다.

밀라니아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자초지종을 듣는 것에 성공했다.

[맡은 바 소임을 수행하지 못한 방종의 대가로 목숨을 잃은 거예요.]

[밀라니아 님이 황궁을 나가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잖아요. 그것만큼 방종한 건 없어요.]

그녀가 황궁을 나가 1대륙으로 향하는 동안, 크리스털 방을 지키던 경비병을 포함하여 그날 그 시간 황궁 경비를 서던 병사들과 하인이 죽었다.

그녀의 수발을 들며 해 주는 얘기 하나하나가 재밌다고 감탄하던 살가운 하인이, 죽어 나갔다고 한다.

밀라니아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죽음이란 결과보다도 ‘왜?’였다.

왜 죽었는가?

그레칸은 그들을 왜 죽였는가?

밀라니아는 숲을 사랑했고 생명 하나하나의 가치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였다.

그녀에게 아무리 무례하게 굴었던 자일지라도 생명을 빼앗는 일은 드물었다.

그녀 평생에 가장 강렬히 살의를 품었던 이는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로, 결국 그들을 죽이는 데도 실패했다.

그런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밀라니아가 황궁의 담벼락을 넘는 것도 보고 있었지. 도둑고양이인 줄 알았어. 잘 넘던데. 몸도 약하면서.]

[밀라니아가 나갈 수 있게 일부러 모른 척한 거야.]

마녀성에서 돌아오며 그레칸이 했던 말은 그녀를 더더욱 미궁 속으로 빠뜨렸다.

‘그레칸은 내가 나가는 걸 알고 있었느니. 그런데 왜 날 막지 못했다는 빌미로 수인들을 죽였는고.’

결론은 하나.

‘단지 화가 나서 그랬다는 말이렷다.’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생명을 무가치하게 대하는 그의 심성이 대체 어디까지 망가졌는가.

막막함과 두려움이 혼재되어 머릿속을 엉킨 실타래보다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디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모르겠도다.’

그녀의 복잡한 심경은 그레칸을 향한 냉대가 되었다.

그레칸의 얼굴을 보고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기엔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그레칸은, 그녀가 아무리 냉정하게 굴어도 엉뚱한 언행으로 헛웃음이나마 짓게 할 것이기에 아예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탕탕!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아예 문에서 등을 보이고 돌아앉았다.

“밀라니아, 왜 그래 갑자기?”

“…….”

“밀라니아?”

“…….”

“밀라니아, 밀라니아, 밀라니아.”

벌써 다섯 시간째 그레칸은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몇 번이고 밀라니아로부터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 그레칸은 처음에는 당황했고, 다음에는 애원했으며 그다음으로는 혼자 화가 나서 얼굴을 굳히고 냉랭한 기운을 뿜어 댔다.

그러고는 다시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린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끝까지 무시했다.

허락 없이 방에 들어온다면 평생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엄포를 둔 상황이었다.

극심하게 불편해진 분위기는 변하지 않은 채, 이틀이 지났다.

황폐한 2대륙에서 그 웅장한 아름다움을 위태위태하게 유지하는 황궁의 공기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그레칸이 내뿜는 기운 때문이었다.

황궁 주인의 심경 변화로 말미암아 황궁의 수인들만 죽을 맛이었다.

밀라니아는 애타게 바라보는 수인들의 시선도, 그레칸의 찌를 듯한 기운도 모두 무시했다.

그 툭, 하면 끊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긴장 관계는 삼 일이 채 되지 않아 펑, 하고 터져 버렸다.

콰앙!

크리스털 문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창밖을 보고 있던 밀라니아는 차디찬 얼굴을 그에게 돌렸다.

크리스털의 무늬가 아름답게 세공된 두꺼운 문은 금이 간 채 그레칸의 발 아래 뒹굴고 있었다.

“기어이 밀고 들어왔느냐.”

“…….”

“더는 날 보지 않겠다는 뜻으로 알겠다.”

냉랭히 중얼거린 밀라니아가 몸을 일으키자 그레칸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지 않았어.”

“…….”

“들어가진 않았다고. 얼굴만 보고 싶었을 뿐이니까.”

“그런 말장난이 통할 것 같더냐? 내 경고가 농으로 보였누.”

쯧, 혀를 찬 밀라니아의 표정은 단단히 얼어붙은 호수처럼 깨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그레칸을 등질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걸 깨달은 그레칸은 사색이 되었다.

털썩.

밀라니아는 고개를 돌렸다. 방문 앞에서 그레칸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용한 행동하지 말거라.”

싸늘한 목소리가 흐르자 그레칸은 어깨를 떨며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는 거야, 밀라니아? 도저히 못 참겠어. 날 괴롭혀서 말려 죽이고 싶은 거라면 계속 그렇게 해도 좋아.”

“…….”

“아니라면 말해 줘. 뭐든 들을 테니까, 나.”

이렇게 착하게 말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굴 수 있을까.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속을 엿볼 수 없었다.

연약하게 흔들리는 눈빛은 보이지만, 그가 보이는 것처럼 연약하지 않다는 걸 이제 안다.

단지 열이 넘는 목숨을 분풀이 삼아 죽인 것이었다. 밀라니아는 행위의 인과 관계에 주목했다.

‘지금 그레칸의 힘이라면 이보다 막대한 수의 생명도 한낱 먼지로 바꿀 수 있느니라.’

단지 화가 난다는 이유만으로 대륙의 절반이 넘는 생명체를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지금의 그레칸이었다.

‘너무 위험하도다.’

칼을 가진 자가 절제 없이 칼을 휘두르는 것만큼 최악은 없다.

그 최악이 눈앞에 있다.

온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어린 시절을 함께 지냈던 라베리안즈의 몸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말란도르는 세계에서 추방했다.

거기서 끝이었어야 했다.

그런대 또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여 버린 것이다.

단지 자신이 황궁을 말없이 빠져나가서, 잡을 수 없어서, 그래서 화가 난다는 이유만으로.

“……밀라니아, 제발. 그렇게 보지만 말고.”

애원하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는 눈앞의 위험한 존재를 양육했던 자로서 극심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레칸이 저지른 일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얼굴을 못 들 것 같았던 건 그래서였다.

조용히 물었다.

“네가 죽였느냐?”

“……무슨 소리야?”

“내가 궁을 빠져나가던 날, 번을 서던 경비병과 내 시중을 들던 아이를 죽였느냐?”

그레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밀라니아는 냉엄하게 물었다.

“죽였느냐?”

골칫덩이.

머릿속에 크게 떠오른 단어가 존재감을 발휘했다.

“그건…….”

골칫덩이.

망설이던 그레칸은 변명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명령을 수행하지 않아서였어. 내가 그냥 죽인 게 아니라…….”

“무슨 명령이었느냐?”

“…….”

“한 번만 물을 것이야. 무슨 명령이었느냐?”

재차 망설인 그레칸이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밀라니아를 잘 보필하라는 명령.”

밀라니아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끔찍한 골칫덩이다.

“너도 그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겠지. 네 그 명령과 그들의 생명은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지 않느니라.”

“다르지. 내 명령이 더 중하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밀라니아, 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밀라니아는 입구로 걸어갔다. 조용한 걸음은 정확히 입구의 경계선 전에 멈추었다.

그녀는 무릎 꿇고 있는 그레칸을 미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눈치를 보던 그레칸이 밀라니아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밀라니아는 슥 피해 버렸다.

그레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생명이 소중하다는 원론적인 얘기를 하는 것뿐이다.”

“……시종들은 매일 내 식탁 위에 오를 요리를 위해 짐승을 죽여.”

그레칸은 눈을 깜박였다.

“그건 자연의 섭리.”

“생명은 소중하다고 했잖아.”

“네가 분풀이를 위해 덧없이 죽인 그 생명들이 소중하다는 말이니라.”

그레칸은 더는 말꼬리를 붙잡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다 쓸모없는 방해꾼일 뿐인 것을.”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서 밀라니아는 번뜩이는 진심을 읽었다.

“있어 봤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밀라니아와 내 걸림돌밖에 되지 않을 거야.”

“…….”

“내게서 약간의 빈틈을 본다면 다시 밀라니아에게 위해를 가하고 나한테서 당신을 빼앗아 가려고 할 거다.”

“…….”

“그런 놈들이야. 난 그들이 싫어.”

말이 이어질수록 밀라니아는 마음이 무너졌다.

이 아이에게 다른 이들의 생명은 큰 무게를 가지고 있지 않구나.

그녀는 탄식했다.

줄곧 흔들렸던 마음에 결심이 서고 있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그레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불안한 투로 물었다.

“무슨 생각 해?”

밀라니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뜨거운 차가 식어 갈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 잠긴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널 죽이는 게 내게 남겨진 마지막 사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느니.”

밀라니아는 그녀가 떠올린 생각을 솔직히 고백했다.

그레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나 곧 미소를 짓는다.

예상 못 한 반응에 밀라니아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렇게 해도 돼.”

“…….”

“밀라니아만이 그렇게 할 수 있어. 언제든 원할 때 내 목숨을 취해.”

밀라니아는 생각을 정정했다. 타인의 생명뿐만이 아니다. 그레칸에겐 그 자신의 생명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도 그날 밀라니아를 지키지 못한 건 똑같아. 쓸모가 없지.”

차갑게 말한 그레칸이 속삭였다.

“그러니 원한다면 거둬 가. 이 질기기만 한 목숨, 밀라니아를 위해선 하나도 아깝지 않으니까.”

밀라니아의 냉랭했던 눈빛이 흐려졌다.

‘무가치하고 비합리적이라 이런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가 없구먼.’

이 애가 이렇게 된 게 나 때문인가?

내 죽음이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나?

이 모든 건 자신의 의도와는 하등 상관없는, 그레칸의 자율 독단적 행위였다.

그 행위의 이유에 자신이 있다고 할지라도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비합리적이다.

그런데도 밀라니아는 그레칸만을 마냥 탓할 수가 없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면 홀로 발을 빼진 않을 것이다.

‘내 생에서 가장 최악의 골칫덩이일 것이다, 넌.’

책임을 져야 한다면.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지닌 마력이 미약하다지만 저항하지 않는 상대의 목숨을 앗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달라질 것이라느니, 다른 대안책이 있을 것이라느니, 근거 없는 희망을 갖고 망설이다가 내가 갑자기 죽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막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야.’

밀라니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누구도 그레칸을 막지 못하겠지.’

가슴이 아팠다. 실제로도 통증이 느껴질 만큼 안타까웠다.

그레칸은 그녀가 뭘 하든 받아들일 것처럼 덤덤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밀라니아는 한참 그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그레칸이 말했다.

“내 숨통을 조르기 전에, 뭣 좀 부탁해도 돼?”

“무엇인데.”

밀라이아는 꼿꼿한 허리의 힘을 풀고 다소 느슨한 자세로 눈을 내리깔았다.

날 죽여도 되오, 하며 목을 내미는 그레칸을 앞두니 태연한 척해도 마음이 엉망진창이었다.

“조금만 시간을 줘.”

“역시 죽기는 싫다는 게냐.”

“그게 아니라,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그레칸은 제 심장께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죽어도 되는지 모르겠어. 아무 문제 없는지.”

“무슨 문제를 말하는 것이야?”

그는 대답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리고 하나 더, 이것만 들어주면 죽어 줄게.”

“또 무엇을.”

“내 신부가 되어 줘.”

이마를 짚은 자세 그대로 밀라니아는 딱딱히 굳어졌다.

돌연 눈살을 찌푸린 그레칸이 다시 말했다.

“르베리안즈와 똑같은 말이라 거슬려……. 이건 취소하고 다시.”

“…….”

“내 아내가 되어 줘.”

얌전히 무릎 꿇은 자세로, 이번에는 미처 피할 틈도 없이 그녀의 손을 낚아챈 그레칸이 그녀의 흰 손등 위에 입술을 꾹 눌렀다.

“결혼해 주세요.”

“…….”

“내 목숨을 줄 테니까.”

밀라니아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레칸을 응시했다.

더없이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레칸이 있다.

그러나 그는 수백 수천을 죽인 절제 없는 칼.

자신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키워 냈던 전생의 원수.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100년간 미쳐 지냈던 나약한 놈.

문득, 그녀는 너저분한 그의 모습에서 불가해한 개념이 엿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사랑하는 놈들이 다 이리 미쳐 있었느니라.’

때로는 자기 파괴적이고 어떤 때는 놀라울 만큼 희생적인, 불가해한 개념의 사랑.

누군가는 세상이 검게 보인다 말하고, 누군가는 세상이 빨간색으로 보인다 말하고, 누군가는 찬란한 파스텔로 보인다는 그 감정.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무지갯빛 색깔의 감정.

그레칸이 표현하는 사랑. 몰이해에 알고 싶었고, 지긋지긋하기도 했던 그 사랑을 그녀가 키워 온 이 아이가 품고 있었다.

수천의 생명을 피비린내 풍기는 두 손으로 움켜쥔 이 아이가.

밀라니아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사각거리는 목소리가 단두대의 칼날처럼 떨어졌다.

“불가(不可).”

“밀라니아?”

당황하는 눈에 대고 선고했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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