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황궁 밖은
툭, 데구루루루.
신발 앞코에 치인 맥주병이 저 앞으로 굴러갔다.
사방에 즐비한 술병. 그중 몇 병은 깨져 있었다. 밟으면 발바닥에 상처를 낼 만큼 조각은 날카로웠다.
‘맨발로는 걷지 못하겠구나.’
아무렇게나 버려진 건 맥주병만이 아니었다.
찢어진 옷가지, 먹다 남은 콘스프 통조림, 반쯤 탄 종이 뭉치, 싸구려 담뱃갑 등 온갖 것으로 너저분했다.
버려진 거리.
과거의 찬란한 영광은 깨진 조각처럼 편린만 보이는 도시.
짜륵, 짜륵.
신발에 밟힌 유리 조각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지른다.
산책을 나온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것은 듬성듬성 벽돌이 빠진 저택이었다.
한때는 화려했을 저택은 붉은 기와가 뭉텅이로 빠져 안쪽을 흉물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평민들과 같은 시야를 공유하고 싶지 않다는 오만한 가문들의 집이었을 층 높은 탑상형 주택은 뾰족한 굴뚝이 허물어져 한겨울에도 불을 떼기 힘든 몰골이었다.
날짐승과 들짐승이 아무데나 싸지른 하얗고 노란 똥은 좁다란 골목길이든 마차가 지나다니는 대로든 상관없이 바닥에 눌어붙어 있다.
‘짐작은 했지만 생각보다 엉망이로다.’
막 반쯤 허물어진 저택을 지나쳐 갈림길로 들어서던 밀라니아는 물컹한 감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벌써 세 번이나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보지 않아도 신발 밑창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자연스레 따라오는 깨달음 하나.
표면적으로는 청소부의 부재,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질서의 부재가 이런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기억에 남은 이 거리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100여 년 전 인간들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황도 길바닥은 썩 깨끗했다.
간혹 토사물이나 오물이 쏟아져 있기는 했지만 다음 날이면 깨끗한 길바닥을 볼 수 있었다.
청소를 담당하는 인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물건을 파는 상인.
도시 화단을 가꾸는 정원사.
부서진 건물을 보수하는 목수.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깨끗하게 유지되는 인간의 거리와 그것을 신기하게 여겼던 순간의 감상이 그녀의 머릿속을 흐릿하게 스쳤다.
무질서 속의 질서.
모순 속의 일관성.
……그러했던 도시.
이미 시커멓게 변해 악취를 뿜어내는 길바닥을 보는 눈빛이 복잡해졌다.
이 모든 참람한 풍경을 그레칸과 연결시키니, 마음이 지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네가 이 인과를 어찌 감당하려고.”
묵묵히 닫혀 있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은 염려였다.
그녀는 그나마 깨끗한 바닥에 신발을 벅벅 문지르고 걷기를 계속했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걸음은 아니었다.
‘그레칸 보기 답답하여 택한 외출이거늘, 이 또한 마음 답답하게 하는구나.’
밀라니아의 얼굴은 산책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어두워졌다.
황폐화된 땅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 자연의 생기 또한 줄어들었음은 익히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이로드는 무서운 분이세요.]
[눈에 보이는 게 없어, 지금 그레칸은.]
[밀라니아 님은 1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지 못하실 거예요.]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웃을 수 없었다.
더 둘러보려는 마음이 뚝 떨어졌다. 온 길을 따라 무거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오늘은 양동이 두 통이야.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집에 못 들어올 줄 알아!”
밀라니아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수로였다. 비린 물 냄새가 코끝에 감돌았다.
돌아가려는 걸음을 돌려 다리에 오르며 그녀는 저 멀리 맞은편 강둑에 구부정하니 앉은 사내를 발견했다.
‘인간?’
소매가 다 닳아 버린 허름한 옷차림.
남자는 주섬주섬 찌그러진 의자를 세우더니 엉덩이를 붙이고 낚싯대를 꺼냈다.
낚시찌와 미끼를 끼우고는 멀리 던진다. 일련의 행동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지만 빠르진 않았다.
“으악, 느려 터졌어!”
그 뒤에서 불평하는 남자 역시 차림새가 썩 좋지 않았다.
앞선 남자보다야 깔끔했지만 소매가 닳아 있었고 먹지 못했는지 양 뺨이 홀쭉했다. 턱에는 길게 찢어진 상처까지 나 있었다.
수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미성숙한 변태의 증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들려오는 목소리도 커졌다.
“바로는 못 잡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양동이 두 통도 무리고요. 그럴 능력도 없고, 그렇게 잡아들였다간 인어족이 삼지창을 들고 올걸요.”
“나도 인어족이야.”
“예에.”
“그래도 반 통은 잡아야 해. 상납금을 바치고 남은 게 조금이라도 있어야 배를 채울 거 아니야.”
인어족 남자는 힘이 빠진 듯 인간 남자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얼굴이 시무룩했다.
“내가 물질만 할 수 있었어도…….”
“영양가 있는 걸 잘 먹으면 아가미도 회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물에도 들어가실 수 있을 거고요.”
“그러기 위해선 잘 먹어야 하잖아. 그만 말하고 낚시에나 집중해! 애초에 네가 물질 잘하는 노예였으면 이런 허접한 도구에 의지할 필요도 없었어!”
“자꾸 치지 마세요. 낚싯대 흔들려요. 그리고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아무것도 없으면 그나마 잡는 것도 못 잡거든요.”
“…….”
할 말을 찾지 못한 인어족 남자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밀라니아는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걸음소리에 고개를 든 인어족 남자의 얼굴에 경계심이 떠올랐다.
인어족.
그들은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존재하기에 그 수가 가장 많은 종족이었다.
밀라니아도 1대륙 근처 바위바다 부근에 자리 잡은 인어족과 주기적으로 교류하곤 했다.
바다와 민물의 지배종으로서 물고기를 잡는 건 인간들이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었다.
그들이 잡아 오는 물고기는 씨알이 통통한 상등품이라 일족의 주방장에게 인기가 많았다.
‘인어족은 2대륙에서 모습을 감춘 줄 알았거늘.’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있는 인어족이라지만 인간들의 땅은 예외였다.
바다와 민물의 기를 품고 산 인어족의 심장은 천해의 명약으로, 몸에 좋은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간들이 눈에 불을 켜는 대상.
한때는 멸족 직전까지 갔던 종족이다.
눈앞의 남자는 얼굴의 비늘이 흐릿하고 탁하긴 했으나 인어족이 틀림없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인어족이 이 땅을 대놓고 활보하는 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
인어족은 그들 중 하나이리라.
“……이쪽에 볼일 있어요?”
눈치를 보는 남자였다.
“예?”
‘그렇게 수상한데 무슨 행인이요.’
멍청한 표정의 남자와 달리 밀라니아는 유람이라도 나온 듯 여유로웠다.
“대놓고 듣던 것 같은데…….”
꿍얼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그녀는 태연히 낚싯대를 가리켰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
덕분에 밀라니아는 몇 가지를 알아냈다.
이들은 이 거리에 사는 부랑자들로, 낚시로 근근이 먹고 살았다.
“도니는 제가 부리는 노예예요. 주종 관계가 희박하기는 하지만.”
그때였다.
“도나티!”
수로 건너편에서 누군가 고함을 쳤다. 도나티가 벌떡 일어났다.
“오늘 대장이 물고기찜을 먹고 싶다 하신다! 오늘도 허탕 치면 온 몸의 비늘을 다 뜯어 버릴 테니 그럴 줄 알아!”
“예, 예이!”
새된 목소리로 소리친 도나티는 남자가 지나가자 가식적인 표정을 지우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인간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비늘을 다 뜯어 버린다니. 말 한번 기분 나쁘게 하네요.”
“저 패거리가 다 그렇지 뭐.”
분위기가 좀 전보다 어두워졌다.
“낚은 고기는 시장에 나가 파는 게냐?”
아직도 거기 있었냐는 표정으로, 도나티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여긴 그런 거 없어요.”
“그럼?”
도나티는 갑자기 어깨를 움츠리더니 주변을 홰홰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하는 소린데요. 얼른 도망가는 게 좋을걸요.”
“응?”
“이 근처에서 못된 놈들이 패악을 부리고 있거든요. 외부인은 재수 없으면 속옷까지 탈탈 털려요. 우리가 낚시하는 거 있죠? 수확물이 생겨도 그놈들에게 줄 게 대부분이에요.”
“왜?”
“뭐가 왜예요?”
“왜 그들에게 고기를 주냐는 말이다.”
“아, 그건 여기서 살기 위해서죠. 이 근처 집들은 그놈들이 꽉 잡고 있어요. 집에서 살려면 상납금을 바쳐야 하는데, 보통 일주일에 물고기 스무 마리고요. 그거 주고 나면 우리가 배불리 먹을 것도 없어요. 근데 젠장, 고기 한번 더럽게 안 잡히네.”
“관리가 그것을 가만두고 보느냐?”
“관리요?”
“그러니까 이를테면…… 영주의 대리인 같은 자들 말이다. 세금을 걷거나 범죄자를 재판하는 사람이라든지.”
“…….”
“그런 자가 있다면…… 없는 게냐?”
인어족 남자가 눈을 끔벅였다. 그 모습이 더없이 멍청해 보여서, 밀라니아는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일단 제가 아는 한 그런 자들은 없는데요.”
‘시골 지역도 아니고 황도인데. 이렇게 무법 지대가 되어 버렸다고?’
“황궁은. 그들은 관여하지 않느냐?”
“황궁이 여기를 왜 관여해요? 황궁은 여기에 관심 없어요.”
도나티는 밀라니아가 왜 한숨을 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도나티 님.”
“왜?”
“그거부터 물어보셔야죠. 누구신지부터요.”
“아,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그랬어.”
도니에게 신경질을 낸 도나티가 밀라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지나가는 행인이라 했잖누.”
“어디서 오셨는데요?”
“황궁.”
“예?”
두 사람의 반응은 극적으로 갈렸다.
도니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고 도나티는.
“우왓! 황궁에서 왔다면 하이로드도 알겠네요?”
본신이 날치였던 걸까?
밀라니아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누구?”
“하이로드 님이요! 늑대족의 위대한 수장 그레칸 님 말이에요!”
옆구리에 대고 주먹을 꽉 쥐었다. 흥분한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는데, 홀쭉해서 볼품없는 뺨이 더욱 도드라졌다.
“……아는 사이지.”
황궁을 나서는 그녀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쫓던 얼굴.
[어디 가는 거야?]
속이 잠시간 답답해졌다.
그녀의 기분이 저조해진 반면 도나티는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눈빛은 기사들이 마스터를 대하는 것처럼 존경스러웠고, 신관들이 성녀를 대하는 것처럼 경외에 차 있었다.
“우와, 우와. 그분은 듣던 것처럼 용맹하신가요? 힘은 무진장 세시고요?”
“힘이 세기는 하다만…….”
밀라니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요!”
“왜?”
“예?”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세상을 이 꼴로 만든 것이 그레칸인데 왜 그를 존경하냐고 묻는 것이야.”
도나티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야…… 그분은 모든 수인들 중 최강이니까요.”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렸던 도나티는 갑자기 인상을 팍 썼다.
“그분은 그저 수인들이 인간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으로 넘어올 수 있도록 물꼬를 틀어 주셨을 뿐이에요.”
“황궁에서 오신 거 맞아요? 거짓말하는 것 같은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난다.
“도니, 사칭범을 신고하면 포상금이 있을까?”
도니는 그녀를 빤히 바라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시선을 덤덤히 받아 내며 밀라니아는 도니를 살펴보았다.
영양 부족으로 깡마르지만 다리가 길고 잘생긴 소년이었다.
일순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인간들의 사고방식에 익숙하시네요.”
“인간들의 사고방식?”
도니는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
“저는 좋아해요.”
도니가 씨익 웃었다.
“특히 100년 전의 시대를 기록한 책을 많이 읽었죠. 지금 당신께서 말한 영주의 대리인, 관리, 세금을 징수하거나 범죄를 재판하는 건 모두 라즈흘 평원 참사 이전 인간 시대의 규칙.”
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럼 수상한 사람이라는 거야?”
도나티는 찝찝한 눈으로 밀라니아를 훑어보았다.
“수인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황궁의 노예……예요? 그레칸 님의?”
그레칸의 노예.
밀라니아는 머리가 띵했다.
‘살다 살다 별말을 다 들어 보는군.’
“방정맞은 놈이로다.”
노성을 터뜨렸다.
찔끔 놀란 도나티의 표정이 혼란스러워졌다.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어 하는 얼굴.
그 순간 낚싯줄이 팽팽해졌다.
“앗, 입질이다.”
언제 그녀를 경계했냐는 듯 고개를 홱 돌린 도나티가 신이 나서 도니를 재촉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며 도니가 낚싯대를 위로 올렸다.
도나티가 팔짝팔짝 뛰었다.
“아싸!”
고작 물고기 한 마리에 기뻐하는 둘을 보자니 밀라니아는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제법 어른스러운 태도를 갖추고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어른이라기엔 미성숙했다.
물고기와 낚싯바늘을 분리한 도니는 양동이에 잡은 고기를 넣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황궁에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으신가 보죠? 그럼 뭣 모르는 소리를 할 수도 있겠네요. 지금은 영역 다툼의 시대예요.”
“…….”
“산책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만난 적 없고요?”
밀라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네요. 수인들 눈에 띄었다면 끌려갔을지도 몰라요. 이 거리엔 위험한 사람들이 많아서 알아서 몸을 사려야 하거든요.”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거냐?”
“약육강식이니까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거요. 그게 이 땅의 규칙이거든요.”
“약육강식이라…….”
밀라니아는 이 땅의 새로운 질서를 입 속으로 읊조려 보았다.
어불성설.
‘역사적으로 약육강식을 이념으로 삼은 곳은 질서를 찾아볼 수 없었느니라.’
그건 자연의 섭리일 뿐, 사회의 질서는 아니었다.
지성체가 모여 살고 있는 세상이 오로지 약육강식으로만 돌아가고 있다는 건, 무질서한 혼돈 상태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도나티와 도니는 더는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계속 입질이 없자 도나티는 초조해했다.
“집으로 들어가서 기다리세요. 몸도 안 좋으신 분이.”
“네가 농땡이 피울까 봐 감시하는 거 아니야. 양동이 두 통 못 채우면 집에 못 들어갈 줄 알라고 했지. 그 말 농담 아니거든.”
“아무리 그래도 양동이 두 통은 못 채운다니까요.”
원숭이처럼 끽끽대며 을러대는 도나티의 말에 도니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저만 못 들어가는 게 아니라 도나티 님도 못 들어가시잖아요.”
“뭐?”
“깡치 패거리들이 하는 말 저도 들었어요. 상납금 부족하면 쫓아낼 거라고요.”
흠칫한 도나티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들었냐?”
“저야 산으로 들어가서 어찌저찌 살면 된다지만, 도나티 님은요.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고향은 못 가!”
고개를 절레절레 세게 저은 도나티는 쭈그려 앉은 채 무릎을 모았다.
“이미 다른 분파의 일족이 차지하고 있단 말이야. 우리 일족은 모두 2대륙에 가까운 이곳으로 내려온 거고…… 이젠 나밖에 남지 않았어.”
도나티와 도니는 어두운 얼굴로 잔잔한 수면만 바라보았다.
“고기 정말 더럽게 안 잡히네…….”
도나티는 흐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할까.
밀라니아는 비틀어지기 일보 직전인 도나티의 팔다리를 보고 혀를 찼다.
“낚싯대를 저기로 드리워 보거라.”
“에?”
도나티가 눈을 끔벅이며 밀라니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것도 아세요?”
도니가 물었다. 밀라니아는 눈썹을 까딱이기만 했다.
“낚시 좀 하시나 봐요?”
긴가민가하면서도 도나티와 도니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밀라니아가 말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어차피 고기도 안 잡히는데.”
큰 기대는 하지 않는 듯 도나티가 꿍얼거렸다. 반면 막 자리를 잡은 도니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왜?”
낚싯줄이 팽팽해졌다. 심드렁히 고개를 돌린 도나티가 벌떡 일어났다.
“당겨!”
도니는 반사적으로 팔에 힘을 주고 낚싯대를 뒤로 당겼다.
물고기 힘이 센 건지 도니의 힘이 약한 건지, 앙상한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결국 도나티까지 달려들었다.
촤악!
곧 통통한 물고기가 수면 위로 튕겨져 올라왔다. 잽싸게 고기를 붙든 도니가 얼른 낚싯바늘을 고기에서 빼내었다.
팔딱팔딱.
도나티와 도니는 바닥에서 팔딱거리는 고기를 보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야, 양동이에 넣어!”
도니가 물고기를 덥석 잡아 양동이에 넣었다. 곧이어 두 사람의 시선이 밀라니아에게 꽂혔다.
밀라니아는 손가락을 공중에서 뱅글뱅글 돌리다가 수면을 가리켰다.
“뭐 하느냐. 더 안 잡고?”
“자, 잡아야죠.”
도니가 미끼를 끼운 낚싯바늘을 수면으로 던지고, 도나티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연인가?”
“어?”
“뭐야, 또!”
“입질이!”
“당겨!”
순식간에 고기가 다섯이나 잡혀서, 양동이 하나가 거의 꽉 찼다.
“우와…….”
도나티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밀라니아를 계속 힐끗거렸다.
고기를 많이 잡은 게 어지간히 좋은지 의심하던 표정은 싹 자취를 감추었다.
도니가 또 두 마리의 물고기를 낚았을 때 도나티는 거의 그녀를 숭배하는 눈이 되었다.
“내가 좀, 감이 좋은 편이니라.”
“오오.”
대단하다며 도나티가 감탄했다. 제법 순진한 반응에 밀라니아는 피식 웃었다.
‘이 정도 가지고.’
“……진짜 양동이 두 통을 채웠네요?”
한 시간 후, 도니는 묵직해진 양동이 두 통을 들고 떨떠름하게 눈을 끔벅였다.
* * *
밀라니아는 낚시의 신이라며 추켜세우는 도나티의 숭배를 받으며 호의 가득한 초대를 받았다.
이 골목에서 두 번째로 작은 집이라는 도나티의 저택은 겉보기와 달리 나름대로 깔끔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깨진 솥이라든지 이가 나간 스푼이라든지 정리하는 도니의 태도를 보면 정돈된 집 안의 풍경이 누구 덕분인지는 쉬이 알 수 있었다.
지푸라기로 엮은 다섯 마리의 물고기를 갖고, 도나티는 비늘이 뜯길 일은 없겠다며 신이 나서 집을 나섰다.
“오늘 치 상납금은 다섯 마리네요. 나머지는 저장을 하고…….”
도니는 남은 생선을 다듬는 역할이었다.
각자 태연히 할 일을 하러 가는 데 비해 밀라니아는 어디 앉지도 않고 주변을 둘러보기만 했다.
‘밖에서는 영락없이 폐허였는데, 안은 좀 낫구먼.’
물론 조금 낫다 뿐이지 멀쩡하다는 건 아니었다.
입구가 좀 깨진 솥과 다리 한 쪽이 짧아 삐거덕거리는 의자, 연기가 잘 빠지지 않는 화덕 같은 것을 둘러보았다가 그나마 좀 깨끗한 의자를 빼내었다.
식탁은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아 있어서, 대충 행주 같아 보이는 것으로 먼지를 훔쳐 냈다.
균형을 잃은 의자가 오른쪽으로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이 의자도 다리가 짝짝이였나 보다.
“식사 바로 하시겠어요?”
부싯돌을 부딪쳐 불을 붙인 도니는 꼬챙이에 꿴 물고기를 불 위에 올려 두었다.
생선이 익기를 기다리며 불현듯 밀라니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일이 생각나는구나.”
“옛날 일이요?”
“이런 식으로 모닥불을 피워서 음식을 해 먹은 적이 있었지. 아주…… 예전에.”
희미한 그리움이 스며든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잦아들었다.
식사를 하면서도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는 쉼 없이 투닥거렸지.
“정말로 예전인가 봐요?”
꼬챙이를 뒤집으며 도니가 물었다. 밀라니아는 어깨만 으쓱였다.
“아, 생선도 마찬가지예요. 소금을 쳐야 좀 맛있죠.”
발딱 일어난 도니가 서랍 깊은 곳에서 웬 검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왔다.
입구를 열어젖히고 투박한 소금 알갱이를 생선 위에다 뿌렸다.
황궁에서 보았던 고운 소금보다 굵고 윤기도 없는 소금이었지만 이들에겐 이보다 귀한 향신료가 없을 터였다.
“다 된 것 같아요.”
도니가 겉이 노릇하게 익은 생선을 밀라니아에게 건넸다.
“손님 먼저.”
손으로 살을 조금 떼어 보니, 안쪽 가장 깊숙한 살이 투명했다.
“다 안 익은 듯하구나.”
“그 정도는 괜찮아요. 불이 약해서 그런 거라……. 맛은 있어요.”
도니가 여봐란듯이 앞니를 드러내고 생선을 물었다. 오물오물 씹더니 퉤퉤 하고 가시를 뱉어 낸다.
그래도 맛있다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를 따라 생선 살점을 조금 뜯어 맛을 본 밀라니아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입맛에 안 맞으세요?”
밀라니아는 꼬챙이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도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줘 보거라.”
“네?”
“어서.”
눈을 깜박이며 도니는 깨물려던 생선 꼬챙이를 밀라니아에게 건네었다.
밀라니아는 양손에 꼬챙이를 든 채 불길을 일으켰다.
마법사들끼리는 원소 마법이라 하는 이 마법은 밀라니아에겐 쉬운 일이라, 눈 깜짝할 사이에 생선은 바삭하게 익었다.
밀라니아가 검지를 까딱였다. 도니가 눈치 빠르게 소금이 든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녀는 소금 알갱이를 잘게 부수고, 곱게 갈린 소금을 생선 위에 뿌렸다.
짭짜름하니 고소한 냄새가 나는 꼬챙이를 내밀자 도니가 허둥지둥 받아들었다.
“먹어 보거라.”
그는 멍하니 생선을 내려다보았다.
“마법사세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비슷해.”
도니가 조심스럽게 생선을 깨물었다. 살점이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오물오물 씹는 도니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응? 뭐야, 이 냄새?”
도나티였다.
“이 배신자!”
한달음에 달려와 자리를 잡고는 이를 드러냈다.
“하여간 인간들은 의리가 없어요. 그거 좀 못 기다리냐?”
도니를 노려보면서도 재빠르게 손을 놀려 금세 두 개의 꼬챙이를 든 도나티가 투덜거렸다.
“깡치 패거리에게 시달렸더니 배고파 죽겠다.”
“먹고 있는 거 다 봤거든?”
“익었는지 확인만 한 거예요.”
“그, 그래?”
생선을 깨문 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이게 무슨 맛이야? 짭짜름하고…… 엄청 고소하잖아!”
연신 감탄하는 와중에도 먹는 속도는 느려지지 않았다.
세 사람은 각자의 생선 꼬챙이를 손에 들었고, 자기 몫의 생선을 말끔히 먹어 치웠다.
식사를 마치고 오래지 않아 해가 떨어졌다. 등불을 피울 기름이 부족한 저택에는 밤이 빨리 찾아왔다.
나름대로 배려해 준 도니의 말에 따라 구석에 있는 침대에 누운 밀라니아는 코밑까지 확 올라오는 먼지 냄새에 눈을 깜박였다.
그래도 좀 있자 먼지가 가라앉아서,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입 안이 찝찝하구먼.’
물로만 헹군 입 안에서 생선 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열악한 환경이었다.
낡은 지푸라기로 속을 채운 침대는 푹신하지 않았고 받침 나무의 딱딱한 감촉에는 등이 배겼다.
황궁의 편안한 잠자리가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어 신경을 돌렸다.
작은 창문 밖으로 보름달이 높이 떠올라 있었다.
밀라니아는 창문 쪽으로 돌아누워 누렇게 뜬 달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뒤에서 뒤척거리는 인기척이 났다. 도니가 누워 있는 자리였다.
도니타는 가장 넓은 침대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쪽에서부터 도로롱도로롱 코 고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작은 들썩임.
“…….”
밀라니아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도니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시선이 와닿는 것 같아서 밀라니아는 미동 없이 신경만 곤두세웠다.
도나티의 코고는 소리가 적막을 깨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모두 잠에 취해 있다는 확신을 얻었는지, 도니는 은밀하게 움직였다. 바스락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탁.
문이 닫히자 밀라니아는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달빛만이 스며드는 어두운 집 안은 도나티가 약하게 팔을 휘젓는 것 말고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스륵, 미끄러지듯 내려간 밀라니아는 문까지 걸어갔다.
커어, 크으.
도나티의 태평한 얼굴을 보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폐허가 된 도시는 밤이 되어도 별다를 게 없었고, 오히려 더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이 달빛을 받아 아주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어찌나 재빠르게 움직였는지 이미 도니는 흔적도 없었다.
밀라니아는 느긋하게 움직였다.
마력을 묻혀 둔 터라, 사위는 어두웠지만 도니의 이동 길은 불을 환하게 켜 놓은 것처럼 선명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마법사세요?]
책을 읽었다고 했으니, 마법사의 존재를 알고 있을 수는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괴물이나 천사의 존재를 믿는 것처럼.
그러나 흔들리는 도니의 눈동자는 일말의 의구심을 갖게 했다.
막연한 환상의 존재를 믿는다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인 눈빛.
도니는 말 그대로 묻고 있었다. 인간 마법사냐고. 100년 전에 실제로 존재했던 ‘마법사’의 존재를 물었다.
뭔가 알고 있지 않다면 취할 수 없는 태도였다.
[전 15살이에요.]
그 어린 나이에, 100여 년 전의 세상을 알고 있다?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있나.
‘책을 좋아한다고?’
밀라니아는 낮게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망가진 세상에서 100여 년 전의 세상을 기록한 책이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책은 발달된 인간 문명의 기록. 인간족의 몰락과 화마에 뒤덮인 세상에서 흔한 물건은 아닐 터.
곤궁하기 짝이 없는 처지에 하루 종일 반응 없는 낚싯대만 붙드는 소년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마법도 마찬가지.’
마법사가 사라졌다고 알려진 시대인 것을.
키 크고 마른 뒷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밀라니아는 미끄러지는 걸음에 속도를 냈다.
저장용 물고기 두 마리를 챙긴 도니는 한 사람 드나들기도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타닥. 탁.
통통 튀는 도니의 발소리를 따라 밀라니아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곧이어 허름한 창고 같은 곳이 나타났다.
지푸라기로 지붕을 엮은 집은 외양만 보면 주변에 늘어선 폐가처럼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입구 밖에 멈춰 선 도니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연 동화술을 펼쳐 도니의 어설픈 탐색을 피해 냈다.
곧 도니가 움직였다. 멈추었던 그녀도 그 뒤를 따라붙었다.
폐가 속으로 들어가자 곳곳에서 불편한 기의 흐름이 감지되었다.
‘적잖은 수가 예 숨어 있구나.’
폐가는 겉보기보다 규모가 넓고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물이끼가 낀 분수가 조경된 정원을 지난 도니는 현관으로 뛰어올라 가 문고리로 문을 두어 번 쳤다.
안에서 누군가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꿍얼댔다. 도니도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대꾸했다.
“……저예요, 선생님.”
끼익.
문이 열렸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머리가 하얗게 센 중년 남자였다.
노인처럼 변한 머리에 비해 얼굴은 자잘한 주름밖에 없어서, 묘한 부조화를 자아냈다.
인자한 인상에 눈빛은 매서운 남자는 도니의 주변을 확인하고는 문을 좀 더 열어젖혔다.
“왔느냐, 도니. 오늘은 좀 늦었구나.”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늦었어요. 그래도 생선을 좀 가져왔어요. 두 마리밖에 안 되지만. 위제니아 선생님이 좋아하시겠죠?”
“좋아할 테지만 그래도, 너희 먹을 것도 부족할 텐데.”
“괜찮아요. 오늘은 귀인이 있어 평소보다 많이 잡았거든요.”
도니가 집 안쪽으로 걸음을 옮길 찰나, 밀라니아도 움직였다.
동시에 중년 남자가 홱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호오.’
밀라니아는 잠깐 고민하다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도니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마, 마녀님?”
중년 남자는 경계심이 오른 날카로운 눈으로 밀라니아를 쏘아보았다.
“아는 사람이냐?”
도니는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린 귀인이에요. 오늘 만났고요. 어, 어째서 여기까지…….”
중년 남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밭고랑처럼 깊이 팬 주름이 몇 개 더 늘어나서, 인상이 다소 험악해졌다.
“수상한 사람은 어떡하라 했지?”
도니는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경계하고 의심하라.”
“잊지 말거라. 나머진 나중에 얘기하자꾸나.”
“수상한 자부터 처리하고.”
밀라니아는 누렇게 뜬 잡초가 가득한 정원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었다.
애초 움직이기가 곤란한 것이, 그녀가 있는 공간이 창칼의 범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둘러싸고 일정 간격을 두고 창칼이 겨눠지고 있었다.
‘경계가 삼엄하구먼.’
중년 사내가 그녀를 경계함과 동시에 정원 곳곳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빠르게 움직였다.
밀라니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가처럼 보였고, 내부도 썩 깨끗하진 않았으나 보안만큼은 신경 쓰는 듯했다.
가정집이라기보단 은신처 같은 곳이다.
끼익.
아까 빠져나갔던 인간 둘이 들어왔다.
“샅샅이 뒤졌습니다. 뒤따라오는 자는 없습니다. 숨어 있는 놈도 없고요.”
유유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밀라니아가 툭 뱉었다.
“여긴 뭐 하는 곳이냐?”
“…….”
밀라니아는 그에게서 대답을 듣는 대신 미풍을 일으켰다.
‘소리를 불러오는 온유한 바람이여.’
밀라니아는 바람이 쏟아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
[……신경 쓰지 말고 책을 보렴.]
[오늘 공부할 건…….]
신비스러운 금안에 이채가 스쳤다.
“오호라, 학문을 가르치는 모양이지?”
공기가 급변했다.
즉각 살기를 드러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중년 남자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도니가 험악한 분위기에 급히 끼어들었다.
“이, 인간일지도 몰라요.”
눈치를 보다 덧붙였다.
“황궁!”
누군가 놀란 어투로 외쳤다. 중년 사내도 표정이 변해서 낮은 침음을 삼켰다.
도니의 말이 불러온 파급력은 굉장했다.
“그럴 리 없어. 황궁에 저런 인간 노예가 있다면 진작 정보가 내려왔을 거야.”
칼을 겨누던 누군가 말했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랬다면 귀찮게 사람을 보낼 필요 없이 수인군이 쳐들어왔을 테지.”
“정보를 캐려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적들이 수장님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 서북부를 이 잡듯 뒤지고 있다고 했잖아요.”
“세작을 보내는 건 그놈들답지 않아.”
그가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곧 접선일이다. 그때 여쭤보면 돼.”
“하지만 한 달 뒤잖아요. 당장 이 사람은 어쩌고요?”
“묶어 둬.”
놀란 시선이 얽혔다.
“교수님! 위험하니 죽이는 것이…….”
“……만약 세작이라면 우리 쪽에서 이용할 수도 있지. 처음 있는 일 아니냐? 일단 단단히 결박해 놔.”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대검을 허리춤에 차며 으르렁댔다.
“허튼짓할 생각 말아라.”
밀라니아는 그가 허리춤에 멘 투박한 동아줄을 풀러 손목을 묶을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통신구나 마법 도구가 있는 것 같으면 모두 수거해.”
지켜보던 중년 사내가 명령했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인이 나섰다.
호리호리하고 낭창한 몸매의 여인은 특이하게도 허리춤에 쌍검을 찬 상태였다.
밀라니아는 그녀의 손이 몸에 닿는 것을 허락했다.
‘포로 취급이 익숙하군.’
몸수색은 금방 끝났다.
몸에 걸친 건 얇은 드레스뿐. 그 외의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는 없었다.
여인은 드레스를 만지작거리고는 조금 놀란 투로 말했다.
“다른 건 별거 없어요. 그런데 이 옷감, 여기서는 구하기 힘든 거네요.”
“그게 무슨 소리지?”
여인이 중년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거미족이 짜 낸 실로 만든 옷이에요. 그것도 최상품.”
거미족은 손놀림이 섬세한 종족이지만 그중 가장 특별한 건 실을 짜내는 능력이었다.
거미족의 실은 튼튼하고 윤기가 흘러 예로부터 일족의 수장이나 지위 높은 귀족들이 예복용 옷감으로 즐겨 사용했다. 그만큼 값비쌌다.
“그런 옷감을 사용하는 곳은 작금의 상황에 한 곳밖에 없지. 황궁에서 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란 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 여인이 뒤로 물러났다.
“그 외에 마도구는 없어요.”
“데리고 들어와. 데릭, 카닛트 너희 둘은 주변을 다시 한번 수색하고 오거라.”
“예써!”
여인이 뒤에 딱 붙고, 나머지 두 사람을 양옆에 대동한 채로 밀라니아는 허름한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검은 천으로 틀어막은 안은 어두웠지만 군데군데 켜 둔 촛불로 인해 사물은 식별 가능했다.
1층에는 방이 세 개 정도 있는 듯했고, 도나티의 집보다 넓었다.
안쪽에는 몇 개의 책상이 놓여 있었는데 책상 주변에 둘러앉은 인간들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녀를 경계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허름하고 남루한 옷. 특별히 눈여겨볼 건 없으나.
‘어린 인간이 많군.’
여인은 밀라니아를 다이닝룸의 가장 구석 자리로 밀고 갔다.
식사를 마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지 희미하게 삶은 콩 냄새가 났다.
구석에는 어른 한 명이 다리를 펴고 눕지 못할 만큼 작은 나무 우리가 있었다.
높이 역시 고작해야 성인 남성의 가슴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가두는 용도처럼 보이는 우리에선 역시나 바닥 군데군데 털 뭉치가 굴러다녔다.
뿌슷.
낡은 나무 우리의 입구를 연 여인이 밀라니아의 등을 툭 쳤다.
“안으로 들어가라.”
벌써부터 코가 간질간질한 것 같아 밀라니아는 옅게 인상을 찡그렸다.
구부정하게 선 것이 불편해 자리에 앉자 우리 입구에 자물쇠를 채운 여인이 돌아갔다.
“신경 쓰지 말고 할 일들 하시오.”
중년 남자의 말에 수런거리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밀라니아의 존재에 호기심과 두려움을 보이던 사람들은 곧 원래 하던 일에 몰두했다.
다소 어수선해도 질서는 꽤 잘 잡혀 있다.
“검을 그렇게 쥐었다가는 몇 번 휘두르기도 전에 손에 쥐가 올 거야.”
“어제 외우라 했던 숫자와 문자를 써 보렴. 오늘은 몇 개나 암기했는지 보자.”
‘그렇구나. 이제 알겠어.’
이곳은 학교였다.
“도니, 왜 그러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위제니아 선생님, 혹시 저번에 부탁드린 책은…….”
“안 그래도 얘기해 주려고 했어. 마법과 관련된 책은 도서관에도 몇 권 남지 않아서 오래 빌려주는 건 힘들다고 해.”
“아…….”
“미안해.”
“선생님이 왜요.”
“그래도 오늘 누가 올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기다리면 책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나직한 대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밀라니아는 중년 남자가 다가오자 시선을 돌렸다.
끼익, 의자를 끌고 와 우리 앞에 둔 중년 남자가 의자에 앉고 손을 마주 잡아 깍지를 꼈다.
날카로운 눈빛이 번뜩였지만 밀라니아는 담담했다.
마치 제 집에 있는 것처럼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하다.
“이제부터 질문하겠소. 심문이라고 봐도 무방하오. 제대로 된 포로 대우는 기대하지 마시오. 그 어떤 것보다 우선되는 건 이곳의 보안과 안전. 수상한 기색이 보이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소.”
명백한 협박.
밀라니아는 벽에 등을 기대고 중년 남자를 응시했다.
“질문은 나만 하오.”
밀라니아는 느긋하게 대꾸했다.
“이건 어떠냐. 그대가 질문하면 나도 질문한다. 등가 교환의 법칙이란다.”
“제안할 자격이 있다 보시오?”
“내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오묘한 금안이 투박한 우리를 훑어보았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시선에 어린 비웃음.
중년 남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사의 기세가 흉흉히 뿜어져 나왔지만 밀라니아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느긋했다.
“100년 전에 인간들의 교육 기관 아카데미아. 거기서 가르치는 역할의 인간을 교수라 했지. 기억이 나느니.”
“정체가 무엇이오?”
“도니가 말해 줬지 않누.”
“인간이란 거짓말은 하지 마시오. 인간은 당신처럼 몸에 마나를 품고 있지 않아.”
“마법사는 아닌 것 같고, 경지에 이른 검사인 게냐?”
“오러를 만들 수는 있소. 선천적으로 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난 편이오.”
“나는 마녀이니라.”
“마녀?”
미간을 좁힌 중년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
문득 뭔가 떠오른 듯 그가 눈을 깜박였다. 목소리가 다소 떨려 나왔다.
“아니면…… 1대륙을 거주지로 두고 있는 그 마녀족을 말하는 것이오?”
마녀란 명칭은 보통 두 가지 뜻을 가진다.
하나는 마녀족과는 관련이 없지만 정통 마법이 아닌 역천의 마도를 수련하는 모든 마법사.
또 다른 하나는 늑대족이나 곰족처럼 일족을 이루는 마녀족의 구성원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간들은 둘을 하나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마녀족을 아는 이들은 이를 전설이나 신화처럼 생각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재능 있는 여아를 거두어 숲 깊은 곳에 모여 산다는 미지의 일족은 전설로 치부되기에 십상이므로.
마녀족의 정체와 힘을 정확히 아는 누군가는 마녀를 인간의 적처럼 경계하는데, 100여 년 전 마탑의 마법사들이 이 경우에 속했다.
“2대륙에서 마녀는 대체로 사악한 악의 무리. 하지만 당신에게서 불길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소. 오히려 그 반대야.”
혼란스러운지 표정이 흐려졌다.
“마녀족이 2대륙에 남아 있을 줄이야. 아니, 잠깐. 마녀족은 총통과 묘한 관계라고 알고 있소만? 그래서 이제껏 1대륙에만 거주했던 것 아니오. 그런 마녀족이 왜 황성에?”
의문 어린 시선을 받았지만 밀라니아는 도리어 질문을 던졌다.
“총통?”
남자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아, 수인들의 수장 말이오. 황궁 사람들은 하이로드라고 부르지 않소.”
‘그레칸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하긴 당연한 일인가.’
도나티가 특이한 것이겠지. 수인과 인간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남자가 굳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얘기해 보시오. 마녀족인 당신이 왜 황궁에 있으며 총통과는 무슨 관계인 거요?”
“…….”
“대답하는 게 좋을 거요. 수상하다고 판단할 시 즉결 처형 할 테니.”
빈말이 아니라는 듯 가라앉은 중년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고 밀라니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손목이 꽉 묶여 있어 움직이는 게 불편했다.
“아이들의 수에 비해 선생이 부족해 보이는데 내가 도와줘도 되겠느냐?”
태연하게 딴소리를 하는 그녀를 향해 중년 남자가 눈을 부릅떠 보였다.
“내가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시오?”
이를 악문 중년 남자의 턱에 힘이 단단히 들어갔다. 밀라니아는 그를 물끄러미 보고, 툭 대꾸했다.
“마녀족이 왜 2대륙에 나타났냐고? 질문에 대답하는 건 어렵지 않지.”
“…….”
“대마녀가 돌아왔기 때문이니라.”
잔뜩 긴장했던 중년 남자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대, 대마녀?”
“…….”
“마녀족의 수장을 말하는 것이오? 총통과 함께 있다니, 이건 마녀족이 2대륙의 일에 관여하겠단 뜻인가?”
대답을 요구하는 시선에 밀라니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년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평정을 잃었던 것이 뒤늦게 낭패스러운 듯 표정을 굳혔다.
“그럼 무슨 뜻이오?”
“내가 말하는 건 전대 대마녀다.”
“점점 더 믿을 수 없을 말을 하는군.”
“너희 인간들은 라즈흘 평원 참사라고 부른다지? 그날 사라졌던 대마녀가 돌아왔느니라. 나는 그 때문에 황궁에 있었던 것이고.”
밀라니아는 자신이 그 대마녀를 모시는 시종 마녀인 것처럼 교묘히 말했다.
이렇게만 말해도 알아서 추측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그녀가 대마녀라는 것보단 대마녀를 모시는 마녀라는 게 훨씬 받아들이기 쉬울 테니까.
과연 남자는 대마녀의 등장에 정신이 팔려 더는 그녀의 정체를 캐묻지 않았다.
“황궁의 기밀이라고 하면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하지 못할 것 같소? 그래서 아무렇게나 주워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오. 당신의 그 말의 사실 여부를 알아내는 건 내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오.”
“거짓말이 아니다. 딱히 기밀도 아니지. 그렇게 자신만만하면 직접 알아보면 되겠군. 뭐가 문제지?”
핀잔을 받은 남자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밀라니아의 태도가 못마땅한 눈치였다.
“좋소. 당신 말의 사실 여부는 일단 보류하지.”
처음보다 신중하고 진지해진 눈빛으로 그가 밀라니아를 쏘아보았다.
“도니를 미행한 목적을 밝히시오. 왜 여기 나타난 것이오. 총통의 명령을 받았소? 아니면 사악한 새 하칸의?”
“내가 이곳까지 온 건 우연이었느니라. 2대륙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실태 파악을 위해 황궁을 나온 것뿐이로다.”
“내내 1대륙에 있었다면 2대륙의 상황을 모를 만하지.”
짐짓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중년 남자가 돌연 피식 웃었다.
“증명할 수 없으니 둘러대기도 쉬운 핑계요.”
“마음의 벽이 금강석보다 단단한 자로다. 네 입으로 그러지 않았느냐. 황궁이 이곳을 알고 있다면 세작이 아닌 군대를 보냈을 거라고.”
중년 남자는 입을 닫았다.
“내가 마녀임은 자연과 통하는 내 능력을 통해 증명할 수 있고, 유해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글쎄, 어떻게 보여야 할지 모르겠구나.”
“내밀한 속마음을 얘기해 주면 도움이 될까.”
“무엇이오.”
“내가 이곳까지 온 건, 물론 그저 심심해서만은 아니야. 대마녀의 생환으로 황궁에 머물고 있기는 하나 답답해서 숨이 막히더군.”
“답답하다고.”
“그래. 마녀가 자연에 속한 일족이라는 건 알고 있는고?”
“들어 본 적은 있소.”
“안다면 설명이 쉬워지겠군. 자연 친화적인 우리에게 지금의 2대륙은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게다가 그…… 하이로드는 어떻고. 살겁을 쌓아 피 냄새가 그득한 그가 마녀들에게 얼마나 거북한 존재인지 아느냐.”
밀라니아는 마음이 묘해졌다.
그레칸에게서 나던 피비린내.
모든 생명을 발밑에 두겠다는 오만하고 위험한 사상에 물든 그 아이.
남자를 적당히 속여 넘기기 위해 한 말이 어쩐지 진심처럼 느껴졌다.
‘설마 나, 그래서 그가 거북살스러웠던가?’
“끄응, 순진하게 믿을 수도, 거짓부렁이라 무시할 수도 없고 난감하군.”
팔짱을 낀 남자가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가시처럼 돋았던 경계심이 누그러졌다.
“그럼 너는, 이곳은 황궁과 무슨 관계인 게냐?”
“질문은 나만 한다고 했소.”
“네가 한 위압처럼 내가 널 사형시키진 못하겠지만, 쉬이 대답을 하는 게 이득일 것이야.”
“그건 왜 그렇소?”
눈썹을 꿈틀거리는 중년 남자에게 밀라니아는 태평스럽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도와줄 수 있으니까.”
“하?”
“나는 지금의 대륙이 마음이 들지 않느니라. 이 몸은 100여 년 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 아마 너는 네놈의 선조에게 들은 것밖에 모를 테지?”
“…….”
“100여 년 전의 2대륙도 모든 게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렇게 참담해진 세상보다는 낫도다. 너희 무리가 과거의 성세를 회복하려는 것이라면 내 기꺼이 한 손을 보탤 용의가 있느니.”
“…….”
“그래서, 어디 말해 보거라. 네 목적은 무엇이고 그레칸과는 무슨 관계냐.”
남자는 어리둥절해했다. 어느새 입장이 바뀌었다.
그는 밀라니아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눈높이가 좀 더 높아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형상이었다.
“이곳은 학교요. 과거 아카데미아의 신념을 본떠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부할 수 있게 하는 곳. 우리의 희망. 미래. 그 모든 것이지.”
“누구나 공부할 수 있다는 과거 아카데미아의 신념? 잘못 알고 있구나. 아카데미아는 황궁에 충성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할 인재를 키우는 곳이었다. 즉 신분 높은 귀족들만 다닐 수 있었단 말이지.”
“…….”
밀라니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중년 사내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몰랐느냐?”
“……100년간 총통의 광기로 많은 자료가 소실되고, 그 이후엔 수인의 군대가 인간의 기록과 그 흔적을 지워 냈소. 지금에 와서 남은 건 근근이 이어져 온 문명의 기록뿐이지.”
“계속 얘기해 보거라.”
“……천대받는 일족을 모아 공부를 시키고 있소. 검술, 마법, 기술, 사는 데 필요한 덕목들을. 수인들의 힘에 짓눌려 허망히 죽는 이들의 수를 줄이는 게 우리의 목표요.”
“황궁에서는 반란 종자로 칭하는 인간들을 섬멸하는 걸 목적으로 하는 듯했느니라. 너희가 바로 반란 종자냐?”
그 어감이 좋지 않은 듯 중년 남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반란과는 상관없소.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반란이 아니라 체제 전복이오. 지금은 누가 봐도 정상적이지 않으니까.”
“적어도 너는 반란 종자인 듯하구나.”
“그렇소. 나는 레지스탕스요.”
“교수님.”
청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밀라니아는 고개를 돌렸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여자는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밀라니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도니와 대화를 나누던 그 여자였는데, 밀라니아가 주목한 건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였다.
하얀 피부가 돋보이는 청순한 미인상의 여자는 녹빛이 도는 푸른 비늘을 목덜미에 달고 있었다.
‘인어족? 아니, 혼혈이구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네가 갑자기 끼어들 리가 없으니 중요한 말이겠구나.”
“실은 도니가…….”
중년 남자가 시선을 보내자 도니의 눈빛이 긴장으로 흐려졌다.
“저분이요. 마법을 쓰실 줄 아는 것 같았어요.”
“교수님께서 전에 마법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잖아요.”
중년 남자는 두툼한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그래. 그렇게 말한 적 있다. 마법사를 양성하기 위해선 마법사가 필요하니…….”
그는 무심코 밀라니아를 응시했다. 미간에 주름이 갔다.
“네가 무슨 마음으로 그 말을 한 건지 안다. 도니, 마법사가 되고 싶은 네 마음은 알겠다만 이 자를 믿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걸려.”
“내가 한 말에 거짓은 없도다. 밀고를 걱정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다는 게야.”
시선이 모이자 그녀는 여유로이 미소를 지었다. 갇혀 있는 사람답지 않은 태도였다.
“그리고 내 제안은 유효하다.”
“…….”
“아무래도 이곳엔 마법 전수의 적임자가 없어 보이는구먼.”
그녀의 태연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중년 남자가 얼굴을 굳혔다.
“아이를 홀리려 들지 마시오. 우리에게 무엇보다 우선되는 건 신의. 당신은 믿을 수 없는 존재요.”
도니가 이를 악물었다. 살짝 달싹거리는 입술.
‘그러게 왜 따라왔어요. 위험하게.’
밀라니아는 눈을 휘었다.
마법에 대한 욕심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성품이 선하다.
이 또한 인간의 모순.
평생을 함께한 부모의 등에 칼을 꽂아 넣는 것도 인간.
고작 반나절 알게 된 이를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도 인간.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오래지 않아 발소리가 이어졌다.
“제가 너무 늦게 온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일이 바빠서 방문을 깜박했지 뭐예요.”
“늦게라도 오셔서 다행인걸요. 스미스 씨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학생이 있거든요.”
중년 사내가 의자에서 일어나 입구를 바라보았다.
밀라니아도 고개를 돌렸다.
구석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니 손목만 아파 와서 결국 밀라니아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자세를 편히 했다.
중년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새로 온 손님의 음성은 다소 매가리가 없었다.
“호루스 교수님. 한 달 만이네요.”
“늦은 시간에 오느라 고생했어요.”
“별일 없으셨죠?”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그쪽은 별일 없겠지?”
“예. 다행히 황궁 쪽에서 움직임이 없어서 각하께서도 운신하기 쉬운 상황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
찰나, 정적이 이어졌다.
“……저분은?”
한 톤 높아진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심드렁히 있던 밀라니아가 눈썹을 올렸다.
눈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목을 길게 빼고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가 귀신이라도 본 듯 홉뜨여 있었다.
흔하디흔한 갈색 눈동자.
‘내가 이이를 어디서 봤는고?’
“아는 자입니까?”
중년 남자가 의외라는 듯 밀라니아와 스미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스미스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제가 한 번 말씀드린 적 있지요. 수인에게 마법 공방을 뺏기고, 종업원으로 일했다고.”
“기억이 나오.”
“그때 절 도와주신 분입니다. 이 손님 덕분에 그란젤 님을 찾아갈 결심이 섰죠.”
호루스의 얼굴이 곤혹스러워졌다.
스미스가 기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