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9/48)

28

탈출

‘갇혀 있는 동안 다방면으로 능력을 확인해 보았지만, 실망스럽게도 형편없기 짝이 없다는 결론만 얻었도다.’

예전에는 마력을 활용해 구름을 몰고 비를 내리는 게 가능했다면 지금은 마실 물을 만들어 내는 것도 겨우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내내 혀를 찼던 밀라니아였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모든 능력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마력량이 줄어 마녀의 술은 제한되어 있느니라. 그래도 대마녀 고유 힘인 자연 교감 능력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로고.’

그리고 지금, 그 고유 능력이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자연 교감 능력의 세부 효능 중 하나는 자연 동화술이었다.

자연 동화술.

자연물에 섞이면 저게 나무인지 내가 나무인지, 저게 돌인지 내가 돌인지 모르게 되는 마법의 술.

‘움직이면 들킨다는 치명적인 단점만 주의하면 되는 것인데…… 이런.’

자연 동화술을 사용하여 필요할 땐 돌벽에, 또는 나무 등걸에 쭈그려 앉는 등 들킬 위기를 여러 번 넘겼던 밀라니아는 황도를 벗어나자마자 예상하지 못한 위기에 직면했다.

‘숨을 곳이 없구나. 어째서 이런 일이.’

분명 기억 속에서는 이쪽에 산으로 통하는 소로가 있었던 것 같은데 허허벌판이었다.

산이 있던 자리는 대형 폭약이라도 쓸고 간 듯, 둥그스름하고 뾰족한 모양은 간데없이 평평하고, 신록이 푸르렀던 초목도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있는 거라고는 여기저기 쌓아 올린 돌 무더기와 왜 있는지 모르겠는 사람들이었다.

그 수가 거의 스물에 이르렀다.

사람들의 수를 세 본 밀라니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잘못하다간 목격자가 생기게 되는 꼴이야. 좋지 않구먼.’

그때였다.

부르릉부르릉.

이상하게 생긴 철 마차가 밀라니아가 보고 있는 땅을 가로질러 멈추었다.

연달아 멈춘 철 마차는 무려 열 대가 넘었다.

밀라니아는 돌무더기 뒤에 몸을 숨겼다.

마차문을 열고 나온 하얀 머리의 남자가 날개를 펼쳤다.

‘저 날개는 조인족이 아니냐?’

앨리지처럼 멸종 위기에 몰린 희귀 종족이라 밀라니아조차 몇 번 보지 못한 일족이었다.

하늘로 날아오른 조인족은 확성기를 입에 대고 남자치고는 비교적 높은 목소리로 시원하게 명령을 내렸다.

“자, 여기도 숲을 만들려고 한다. 이제 몇 번 해 봐서 설명 안 해도 알겠지? 묘목을 땅속에 콱콱 박아 심는 거야!”

익숙하게 명령하는 모습을 보자 밀라니아는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전 하칸 님에게 발탁되었어요. 하칸 님은 주인님을 곁에서 보필하는 심복입니다. 조인족이세요. 대부분의 하인들을 통솔하시고 모르는 일이 없으시죠. 다들 그분의 말을 잘 들어야 해요.]

‘혹시 저자가 하칸인가?’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땅에 뭘 심으려는 걸까.

‘다시 도시를 재건하려는 건가?’

파괴의 흔적이 가득한 땅을 보며 밀라니아의 얼굴이 의구심으로 물들었다.

“저기엔 꽃도 심고, 나무도 많이 많이 심어야 한다!”

도시를 재건하려는 게 맞는 모양이다. 밀라니아는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쯧쯧 찼다.

‘한번 파괴하기는 쉽지만 다시 되돌리기는 어려운 것이 자연인 법. 쉽지는 않겠지만 어쨌거나 잘된 일이구나.’

애초에 안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다니 다행이다.

알게 모르게 망가진 자연의 정경에 측은하고 언짢았던 밀라니아는 아주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읏챠!”

일꾼 하나가 구덩이에 묘목을 심고 있었다. 그 크기가 꽤 컸다.

‘옳거니.’

밀라니아는 일꾼들의 시선이 딴 데 가 있을 때 재빨리 묘목에 달라붙었다.

“응?”

지친 표정의 일꾼이 고개를 돌려 나무를 바라보고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바람이 불자 나무 잎사귀가 흔들렸다. 밀라니아의 몸은 잎사귀가 흔들림에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움직임의 의지를 가지면 동화술은 깨진다.

동화의 의지를 가진 몸이 주변 환경에 맞춰 움직이면서 환경과 동화된다.

그게 자연 동화술의 요체였다.

역시 일꾼은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묘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늘 위에서 일꾼들을 지켜보던 하칸은 어느새 내려와 사과를 씹어 먹고 있었다.

하필 그가 서 있는 곳이 밀라니아가 목표로 하는 곳이었다.

밀라니아는 하칸의 텅 빈 뒤를 곁눈질하며 기회를 노렸다.

마침 누군가 묘목을 옮기다 넘어졌다.

“야! 그거 제대로 안 하니? 그 나무 한 그루 가지고 오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망가지면 네가 다시 갖고 올래?”

시선이 일꾼에게 쏠린 사이 밀라니아는 재빨리 하칸의 뒤로 이동했다.

숨어든 묘목이 작아 은근히 불안해졌지만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한숨을 쉬는 밀라니아의 귀로 사과를 아삭아삭 씹어 대며 불만을 중얼거리는 하칸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가신 일은 잘되셨으려나. 내가 곁에서 보필해야 하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다니.”

혼잣말하는 그를 두고 걸음을 옮기려던 밀라니아의 귀로 거슬리는 한마디가 꽂혀 들었다.

“모르겠단 말씀이야, 그 여자. 크리스털 방에서 황후처럼 지내고 있다는데……. 도대체 주인님과는 무슨 사이인 거야?”

하칸이 고개를 돌렸다. 하필이면 밀라니아가 숨은 묘목 쪽이었다.

본의 아니게 작은 묘목에 딱 붙은 그녀는 묘목의 잎사귀 움직임에 따라 몸을 미약하게 흔들어 댔다.

{마음이 청량해지는 이 향기……. 혹시 대마녀님이신가요?}

어린 나무는 그녀의 사정도 모르고 반가워했다.

{근데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

{춤 추시는 걸까요?}

인간형이었다면 고개를 심각하게 기울였을 듯한 어투였다.

밀라니아는 애써 못 들은 척했다. 대화에 집중했다간 동화술이 깨질 것 같았다.

밀라니아가 그런 고초를 겪고 있는 사이 하칸은 심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말로 전대 대마녀인가?”

갑작스러운 호명에 흠칫한 밀라니아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하칸을 살폈다.

“하지만 그 대마녀는 라즈흘 평원 전투 이후 사라졌다고 했는데…….”

“…….”

“이렇게는 모르겠어. 황궁에 돌아가면 자세히 살펴보는 수밖에.”

밀라니아는 인상을 썼다.

‘그레칸 하나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이건 또 무엇인고.’

하칸은 눈앞에 그 대상이 있는 줄도 모르고 심각하게 미간을 문지르다가 혀를 찼다.

“하필이면 이상한 여자가 들러붙어서 신경 쓰이게 만들어.”

짜증스럽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돌린다. 금색 눈동자에 불길이 치솟았다.

‘건방진 새로다.’

밀라니아는 이런 상황이 정말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던가.

세상에는 많은 이종족이 있고 또 그들을 통제하는 수장이 있지만, 가장 영향력 있는 수장을 뽑는다면 단연 상위에 뽑힐 존재였다.

어딜 가든 존중을 받았던 자신이, 심지어 성질 더럽고 무식한 발칸도 눈치를 보게 만들었던 자신이 여기선 이리저리 치이는 신세인 것이다.

‘어째서 제때 숨이 끊어지질 않아서 이런 수모를 겪는고.’

이게 바로 죽을 때를 놓친 이의 말로인가.

밀라니아는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감상에 빠질 시간은 길지 않았다.

머리 위의 태양은 조금씩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황궁을 빠져나온 지 두 시간 남짓 되었으므로 더 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다.

“거기!”

하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자, 밀라니아는 때를 놓치지 않고 뒤로 훌쩍 빠졌다.

그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난 밀라니아는 그제야 속도를 높여 환경 정비가 한참 진행 중인 숲터를 빠져나갔다.

항구에 도착한 밀라니아는 또 한 번 난관에 도착했다.

“배를 운영하지 않나 보이. 워터드래곤의 구역 이전까지는 배를 타려고 했거늘, 난감하구나.”

100년 전, 1대륙과 2대륙은 철저히 서로를 향해 선을 그었지만 그래도 필요에 의해 양 대륙을 넘나드는 선박이 있었다.

지금도 선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예전보다 선박이 더 많은 듯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운행하는 배는 하나도 없었다.

밀라니아는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1대륙까지 플라잉 마법을 썼다가는 도중에 추락하여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니라. 어떻게 방법이 없을꼬.’

이 상황에서 필요한 물건은 빗자루였다.

그러나 2대륙에서 눈을 뜬 다음부터 빗자루란 청소할 때의 그 빗자루밖에 보지 못했던 지금의 밀라니아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아, 그렇지!’

무슨 다른 길이 없을까 기억을 뒤졌던 밀라니아는 환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군데군데 낯선 건물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기억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비록 수백 년 전의 기억이기는 하지만, 운이 좋다면 아직도 빗자루를 파는 공방이 있을 것이야.”

* * *

기억을 더듬어 낡은 가게 앞에 당도한 밀라니아는 고개를 들어 가게의 간판을 살폈다.

“흠.”

어째 때가 껴서 글씨도 잘 보이지 않는 게 운영을 하기는 하는 건가 싶기는 하지만, 가만히 주의를 기울이면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일단 들어가 보자꾸나.”

밀라니아는 딱히 특별한 점이 없어 보이는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안쪽은 역시나 평범한 술집 같은 모습이었다.

의욕 없어 보이는 남자 종업원의 인사를 코끝으로 받아 내며 그녀는 천천히 더 깊은 안쪽으로 걸어갔다.

‘예전에 2대륙행을 하겠다는 일족과 함께 이곳에 온 적이 있었지. 그때는 잡화점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술을 파는 모양이구나. 손님은 수인뿐이고……. 이거, 잘 찾아왔는지 모르겠느니.’

<직원 휴게 구역>이라 적힌 문 앞에 다다른 밀라니아의 걸음은 약간 느려졌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마침내 몸과 문이 충돌했다.

다행히도 꼴사납게 뒤로 나동그라지는 추태는 보이지 않아도 됐다.

밀라니아는 고개를 들었다. 낡은 술집이었던 주변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문 안 쪽은 밀라니아의 기억대로 마법 도구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공방이었다.

언뜻 평범한 잡화점처럼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았다.

벽에 아무렇게나 걸린 단도에서도 희미한 마력이 풍겨 왔다.

밀라니아는 왼쪽 좌판에 줄줄이 늘어선 빗자루를 보고 반색한 얼굴로 다가갔다.

‘음, 딱히 질이 좋아 보이진 않느니라.’

그녀가 애용했던 빗자루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급품이었다.

“뭘 구매하러 오셨나요……?”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밀라니아의 뒤로 유령처럼 나타난 남자가 매가리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밀라니아가 돌아보자 이 공방의 종업원인 듯 다 죽어 가는 얼굴의 어린 청년이 구부정한 자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아무런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

“주인은?”

“주인님은 바쁘셔서…….”

밀라니아는 허수아비에게 거적때기를 입혀 놓은 듯한 청년의 헐렁한 긴팔 옷 아래로 드러나는 보랏빛 멍을 발견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못 본 척 좌판을 향해 턱짓을 했다.

“빗자루를 좀 보고 싶은데, 설명을 해 주련?”

“어……. 보통 날개를 가지고 있지 않은 분들이 즐겨 찾으시는 거예요…….”

“어느 정도로 날 수 있지?”

“일반 가정집 지붕 높이만큼은…….”

밀라니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고작?”

“좋은 건 다 가져갔어요…….”

“…….”

“황궁 사람들이…….”

어물거리는 종업원은 제 잘못도 아닌데 대단한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눈치를 보며 쩔쩔맸다.

불평하는 것도 괜히 미안해지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밀라니아는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구먼.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만, 깨어난 후로는 인간을 한 번도 보지 못해서 말이야.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느이.”

종업원은 사색이 되었다가, 이내 체념한 듯 힘이 빠졌다.

‘단순히 인간이냐는 말만 했을 뿐인데 죄를 들킨 것 같이 구는구먼. 인간 취급이 예전과 같지 않다더니 사실인 듯하구나.’

“긴장할 필요 없느니라. 난 단지 빗자루를 사러 온 손님일 뿐이로다.”

“가, 감사합니다. 무, 물을 좀 마셔도 될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종업원은 어지간히 목이 탄 게 아니었던지 곧장 물병에 입을 가져다 댔다.

허겁지겁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 밀라니아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측은지심이 든 탓이다.

인간과 큰 마찰이 있었던 건 100년 전.

마지막이 안 좋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녀는 누군가를 싫어하는 성품이 못 되었다.

그렇게 태어나도록 정해진 대마녀라 그런지 관대한 편이다.

‘세상 만물이 모두 제 것인 양 여유롭고 오만했던 모습도 눈에 거슬렸지만 노예 같은 꼴이 되어 빌빌거리는 모습도 보기 썩 좋지 않느니라.’

그래도 발등에 불 떨어진 처지에 오지랖을 부리는 건 사치였다.

‘이 몸으로 해 줄 수 있는 게 없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외면하려던 밀라니아의 눈에 청년이 마시던 물이 들어왔다.

아래에 탁한 침전물이 깔려 불결해 보였다.

‘어이구, 쯧쯧.’

“그거 줘 보거라.”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다른 손을 내밀자 종업원은 두려워하면서도 얌전히 물병을 건넸다.

밀라니아는 침전물이 부유하는 게 눈에 보이는 물병을 꼭 붙들고 힘을 썼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능력이었다.

잠시 후, 더러웠던 물이 깨끗해졌다.

성공이라며 내심 한숨을 쉰 밀라니아는 과거 비를 내리던 스스로의 모습이 비교되어 다시금 우울해졌다.

고개를 저음으로써 우울감을 가볍게 떨쳐 낸 그녀는 얼이 빠진 종업원에게 물병을 건넸다.

“고, 고, 고, 고맙습니다….”

“무얼.”

반신반의하며 물을 마신 종업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피식 웃으며 빗자루를 구경하던 밀라니아가 입을 벌렸다.

“도움이 필요하누?”

무덤덤하지만 부드럽게 감겨 오는 목소리에 청년은 얼어붙은 듯 굳어졌다.

밀라니아는 가운데 빗자루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게 그나마 좀 괜찮구나.”

“…….”

“내가 지금 여행을 떠나는데 빗자루가 꽤 길어 너도 데리고 갈 수 있을 것 같느니라. 그곳이 여기보다 없는 건 많을 테지만 살기엔 썩 나쁘지 않을 것이야.”

빗자루를 눈높이까지 들고 품질을 확인하며 밀라니아는 내심 ‘끄응’ 신음을 흘렸다.

빗자루를 사긴 사야 하는데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황궁에서 뭐라도 들고 오는 것이었는데, 후회해 봤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아, 그렇지. 저 아이를 도와주는 대가로 이 빗자루를 받으면 딱 좋지 않겠느냐. 물론 빗자루가 필요해서 도와주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종업원은 멍하니 있었고, 정신을 차린 후에 한 말은 의외로 거절이었다.

“마,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여기도 사는 게 나쁘지는 않아서…….”

저 어물어물 말 흐리는 습관은 원래 그런 건가?

‘역시 오지랖이었구먼.’

하지만 다시 되짚자면, 그녀 역시 발등에 불 떨어진 처지다.

‘그럼 이걸 어찌한다?’

밀라니아는 그림 속 떡을 보는 듯 아쉬운 눈으로 빗자루를 내려다보았다.

빗자루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마력을 모아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내 체면에 물건을 훔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찌할 수 없구나.’

“얼마인고?”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심정으로 물었다.

“가, 가격표는 안에 있어요. 보고 올게요.”

종업원이 커튼이 쳐진 가게 뒤편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밀라니아는 팔짱을 끼고 종업원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5분 쯤 되었을까?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이상하구먼. 화장실을 간 것도 아닐 테고.’

설마 도망을 갔나. 직감이 경고성을 울린다.

밀라니아는 걸음 소리를 죽이고 종업원이 달려간 곳으로 걸어가 얇은 검은색 커튼을 젖혔다.

촤르륵.

“!”

웬 이상한 타원형 구슬을 귀에 대고 손톱을 뜯던 종업원이 헉하고 굳어졌다.

밀라니아는 그의 손에서 구슬을 빼내어 귀에 댔다.

「아아, 이제 잘 들리네. 스미스, 다시 말해 봐라. 가게에 이상한 사람이 찾아왔다고?」

밀라니아는 말없이 툭 튀어나온 버튼을 눌렀다.

띠띠띠띠.

더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는다.

“…….”

“…….”

싸늘한 침묵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밀라니아는 약간의 어이없음을 담아 말했다.

“은혜를 베풀려 했는데 원수로 갚으려 드누.”

사색이 된 종업원이 밀라니아의 앞에 바짝 엎드렸다.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보고를 해야 해서……. 아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마치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 세뇌된 것처럼 같은 말만 반복한다.

그 비굴한 모습을 보니 밀라니아는 화내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따져 보면 종업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약간 머쓱해져 있는데 엉금엉금 다가온 종업원이 그녀의 발등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가장 최하위 계층이 보내는 극도의 사과 표시였다.

불쾌해진 밀라니아는 눈살을 찌푸리고 발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어째선지 종업원은 한층 더 몸을 떨어 댔다.

“더, 더러운 손으로 죄, 죄송, 죄송합니다.”

하아, 한숨을 쉰 밀라니아는 무릎을 굽히고 종업원의 턱을 잡아 들었다.

흔해 빠진 갈색 눈동자와 밀라니아의 금빛 눈이 마주쳤다.

밀라니아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눈썹을 꿈틀했다.

“심란하여 한숨이 절로 나오는구나. 인간들이 이렇게까지 추락했다는 것이야? 그거 아느냐? 이 공방도 수백 년 전에는 인간의 것이었다.”

흔들리던 갈색 눈동자가 부릅뜨였다.

“너희 인간들이 수인들을 잡아 노예로 부렸던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느니라. 그레칸 그 아이가 무슨 짓을 저질렀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말이다……. 모든 생명체는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느니라.”

불현듯 발칸의 냉대 아래에서 빌빌거리던 새끼 그레칸이 생각이 나서, 밀라니아는 침음을 삼켰다.

그레칸과 닮은 곳은 전혀 없는데도 밀라니아는 종업원에게 비슷한 연민을 느꼈다.

종업원에겐 세상이 그레칸에게 있어 발칸과 같은 존재이리라.

“힘들면 도망치거라. 아니면 저항하든가.”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종업원을 보며 이 모든 게 그레칸 때문이라는 걸 상기한 밀라니아는 마음이 약간 찔려서 나머지 말을 속으로 삼켰다.

‘난 그레칸을 이렇게 키우지 않았느니라. 하지만 영 관련이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애매하구나.’

마음이 혼란스러워 한숨을 쉬는 그녀를 보며 눈을 깜박이던 종업원이 불쑥 말했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종업원은 이번엔 말을 끌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그 말이 앞선 사과와는 결이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공포에 질려 쏟아 내는 말에 지나지 않았던 좀 전과 달리 지금은 그의 자유 의지대로 비롯된 사죄.

‘이거면 됐느니라.’

“괜찮으니. 인간들의 형편이 이다지도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대신.”

무릎을 편 밀라니아가 뒤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빗자루가 진열된 진열대에서 그녀가 유심히 살펴보던 빗자루가 그녀의 손에 빨려 들어왔다.

“이것 좀 빌려 가마. 내가 지금 사정이 있어서, 돌려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만 언젠가 돌아와 값을 치르겠노라.”

태연한 말에 종업원은 저도 모르게 귀를 후볐다.

“대가라고 하긴 뭣하지만, 나머지 빗자루에 마법을 걸어 놨느니라. 꼬랑지에서 물을 뿜을 수 있을 거야.”

종업원의 얼굴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런 능력은 어디다 써야 하지?’

가게에서 벗어난 밀라니아는 낡은 외관의 가게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 정도면 주인장에게 혼나진 않겠지.”

중얼거린 밀라니아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빗자루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바람을 일으키며 빗자루는 바다로 향했다.

가게 안에 홀로 남은 종업원은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은 채 눈을 비볐다.

밀라니아의 뒷모습이 망막에 잔상처럼 맺혀 아른거리고 있었다.

복잡한 심경의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정체가 뭐지?”

처음 표정을 봤을 땐 차갑고 무심해서 저를 무시하는 다른 이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온 줄 알았다.

종업원은 조용히 심장에 손을 올렸다. 근 십 년 만에 미칠 듯이 펄떡거린다. 고통이 아니라 간질거리는 느낌으로.

방금 선물처럼 왔다 간 손님은 너무 아름답고도 다정해서, 낡은 빗자루 말고 다른 것도 훔쳐 가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말했다면 ‘어허, 훔쳐 가는 게 아니거늘.’라는 대답이 돌아왔겠지만.

삐삐삐삐삐.

강제로 끊어진 통신구가 붉은 빛으로 깜박였다.

정신을 차린 종업원의 얼굴에 먹구름처럼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사장이다.’

이런 일이 생겼다는 걸 알면 돌아온 사장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을 터였다.

곰수인인 사장은 손이 솥뚜껑만 해서 한 대만 맞아도 피가 터져 나왔다.

자신의 모든 것인 공방을 강탈한,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아래서, 공방에 대한 미련으로 비굴하게 엎드려 기다린 세월이 벌써 십 년.

초기에 품었던 분노와 저항에의 의지가 희미해지기 충분한 시간이다.

[힘들면 도망치거라. 아니면 저항하든가.]

마법 공방의 원래 주인.

주인에서 종업원으로 추락한 스미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비쩍 마른 몸으로 덤볐다가는 맞아 죽을 게 자명했다.

그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바지 뒷주머니에서 구겨진 쪽지를 꺼내었다.

<뜻이 있는 동지들이여.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이곳으로 모여라.>

쪽지를 받은 후로 한 번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지만, 두려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문구였다.

인간답게, 존엄을 지키며 살라는 문구는 매력적이었지만 레지스탕스에 가입하는 것은 목숨을 몸 밖에 두고 사는 셈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끊어졌던 통신구가 다시금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힘들면 도망치거라. 아니면 저항하든가.]

이도저도 못하던 스미스는 눈을 질끈 감고 벌떡 일어났다.

그가 달려간 곳은 빨갛게 깜박이는 통신구가 아니라 가게의 뒷문이었다.

* * *

빗자루를 얻은 밀라니아는 인적 드문 협곡에서 빗자루를 타고 떨어지듯 출발했다.

왜 올라가지 않고 떨어졌냐면 빗자루의 성능이 정말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체라가 대충 만든 빗자루도 이것보다는 백만 배 더 뛰어나겠구먼.’

다행히도 수면은 잔잔했고, 밀라니아는 정말 여행하는 기분으로 바다 위를 날아갔다.

‘내 기억으로는 여기부터 워터드래곤의 영역인데 왜 이렇게 조용하누?’

밀라니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비행을 계속했다. 바다의 중간까지 가도 수면은 여전히 잠잠했다.

그러나 1대륙에 가까워지자 거짓말처럼 포말이 거칠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는구먼.’

거센 바람이라도 만난 듯 매섭게 일어나는 파도 아래에 거대한 고래 지느러미 같은 물체가 언뜻언뜻 보였다.

바다의 파수꾼, 워터드래곤이다. 대부분의 선박이 이쯤에서 워터드래곤의 공격을 받거나 파도에 휘말려 침몰하곤 했다.

파도는 밀라니아가 떠 있는 하늘까지 침범했다.

철퍽!

뺨을 때리는 바닷물을 손등으로 쓱 문질러 털어 낸 밀라니아는 머리카락 한 줌을 잘라 포말이 일어나는 바다에 뿌렸다.

잠시 후, 길고 거대한 목이 쑥 일어나 입을 벌려 머리카락이 떨어진 바닷물을 집어삼켰다.

쿠오오오오―!

벌어진 입이 어찌나 큰지 떨어진 머리카락은 보이지도 않았고, 삼킨 바닷물의 양만 해도 어지간한 집 하나는 꽉 채울 수 있을 듯했다.

그래도 효과가 있어 파도는 곧 잠잠해졌다.

밀라니아는 배부른 사자처럼 잠잠해진 바다 위를 유유히 날아갔다.

1대륙에 도착한 밀라니아는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이종족의 1대륙은 인간들의 2대륙과 달리 자연 친화적인 성향이 강했다. 대륙 전체가 숲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째 온 사방이 쥐 파먹은 듯 변했단 말인고.’

어딜 봐도 푸르른 초목이 가득했던 땅이 듬성듬성 그을려 있는 꼴을 본 밀라니아는 절로 탄식했다.

‘황폐화된 땅……. 기이한 기시감이 드는구나. 꿈에서 보았던가?’

머릿속을 뒤져 보던 밀라니아는 여전히 흐릿한 물감처럼 흐린 기억에 한숨을 쉬었다.

심란해서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누가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겠으이. 하지만 그레칸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짓을 했단 말이냐.’

침울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해서 밀라니아는 서서히 끓기 시작하는 분노를 잠재우며 걸음을 옮겼다.

‘마녀숲은 멀쩡한지 걱정이 되는구먼.’

숲 안쪽으로 들어가자 인위적인 화마는 겉 부분만 태운 듯 다행히도 해변에서 보았을 때보다는 멀쩡했다.

그녀가 마녀숲의 영역으로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바삭, 바스락.

수풀 스치는 소리에 밀라니아는 재빨리 빗자루에서 내리고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딱 붙였다. 그리고 자연 동화술을 펼쳤다.

조금 있자, 두런두런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암, 졸려. 그것들은 안에 꽁꽁 틀어박혀서 움직이지 않는데 로드께선 왜 여기를 이렇게 감시하라 하신 걸까?”

밀라니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장한 늑대족 전사들이었다.

‘마녀숲과 가까운 이 구역은 일족 이외의 수인들은 출입하지 삼가는 곳이거늘, 어떻게?’

의문을 갖고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너 지금 로드의 명령을 의심하는 거냐?”

“의, 의심이라니. 이게 누구 목을 달아가게 하려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궁금해하지 마라.”

차가운 대꾸에 늑대 수인이 억울한 투로 투덜거렸다.

“물어보는 것도 안 되냐?”

“그분에게 뭔가를 당당히 물어볼 자격이 너한테 있냐?”

“……없지.”

“나도 없다. 그러니까 명령이나 잘 수행해. 개미 새끼 하나 지나가게 하지 말란 말이야.”

“쳇, 알았다, 알았어.”

더는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었다.

대신 사방을 경계하는 듯 날카로운 기운이 나무에 숨은 밀라니아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밀라니아는 혀를 찼다.

‘그레칸 휘하의 일족들이구먼.’

자신이 여기로 도망치라는 걸 미리 예상이라도 한 걸까.

하지만 기색을 보아하니 하루이틀 이곳을 경계한 게 아닌 듯싶은데.

‘자연 동화술로 저들을 뚫고 갈 수 있으련고.’

밀라니아는 잠깐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늑대족 하나는 살짝 느슨한 면이 있으니만큼 얼마든지 시선을 피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만, 다른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다른 입구를 찾아봐야겠느니.’

뺀질거리는 놈들이 많으면 뚫고 들어가기 쉬워질 텐데 말이다.

밀라니아는 포위망에 구멍이 있기를 바라며 움직였다.

마녀성을 중심으로 두고 마녀숲을 한 바퀴 죽 둘러본 결과는 불행히도 좋지가 못했다.

대부분의 전사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낭패였다.

‘밤에 다시 시도해 봐야겠다.’

햇볕이 떠 있는 지금보다는 밤이 이목을 속이기 수월할 터였다.

결정한 밀라니아는 늑대족 전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경계를 서고 있는 곳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내 집에 가는 것임에도 입구조차 밟지 못하다니. 세상이 어찌하여 이렇게 바뀌었단 말이냐. 한탄스럽도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노인처럼 중얼거린 밀라니아는 마음에 또 한 움큼, 그레칸에 대한 분노가 솟아올랐다.

‘해가 떨어지기까지는 꽤 오래 기다려야 할 듯한데……. 이렇게 된 거 말란도르의 구역부터 먼저 들러 봐야겠구나.’

원래 일정은 마녀족의 안위를 확인한 후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시간이 남아 버렸으니 차선을 선택해야겠다.

밀라니아는 진행 경로를 틀어 움직였다.

‘말란도르라면 이곳 상황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겠지.’

그는 지금까지 만난 누구보다 더 자세히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을 터.

밀라니아의 움직임이 한층 빨라졌다.

마녀숲의 경계에 위치한 말란도르의 저택.

그 저택이 위치한 말란도르의 영역에 당도한 밀라니아는 소름이 돋아난 팔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여전하구먼. 밖은 따뜻하고 날도 좋은데, 이곳만 겨울이 온 것처럼 서늘한 것은.’

보통 사람들은 이상하게 싸늘하고 오싹하다고만 생각하는 이 구역은 밀라니아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피부에 찌릿찌릿하게 닿는 이 불쾌한 느낌.’

워터드래곤이 몸을 움직여 일으키는 파도보다도 더 강렬히 몸을 휘감아서, 가까이 가고 싶어지는 마음을 싹 사라지게 하는 이 느낌.

사기가 가득한 말란도르의 영역이라는 의미였다.

“다행히 여긴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

너무나도 변해 버린 세상에 밀라니아는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생리적인 불쾌감에도 도리어 안심한 얼굴로 미소를 짓던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상한 느낌에 멈칫했다.

‘이상하구나. 이 기운…… 예전과는 조금 다르지 않누.’

안력을 돋우어 주변을 세세히 살펴보았다.

착각인 줄 알았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착각한 게 아니다.

‘기운의 농도가 낮으이. 이질감은 이것 때문이었구먼.’

밀라니아는 아까와는 다른 관점으로 말란도르의 영역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본래 말란도르의 영역은 생명체를 강하게 배척하는 성질이 있었다. 사기를 품고 있으니 당연했다.

이 땅 아래엔 말란도르의 해골 노예병들이 잠들어 있을 터였다.

살아 있는 생명은 본능적인 거부감에 발을 들이지 않는 곳.

그곳에, 적은 수지만 벌레가 땅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생명체가 살고 있지 않누.’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이곳에선 있을 수 없는 현상.

가슴 한쪽에 불안감이 슬그머니 밀려든 밀라니아는 궁금증을 잠시 눌러두었다.

‘조급해하지 말지어다. 말란도르를 만나 보면 왜 이렇게 됐는지도 알 수 있을 터이니.’

밀라니아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어느 정도 걸어도 표지판이 나타나지 않았다.

[흉물스럽도다. 저런 표지판은 왜 만든 것이야?]

[이거? 왜? 귀엽지 않아? 방문객이 오면 친절히 안내해 줘야지. 내 친절한 마음을 곡해하면 나 서운해, 밀라니아.]

아무런 변화 없는 주변을 면밀히 훑으며 걸어가던 밀라니아는 또 하나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왜 안 나오누?’

그녀는 말란도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기운이 말란도르의 기감에 걸렸을 텐데.

진작에 튀어나오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음에도 말란도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사라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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