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8/48)

27

탈출 준비

‘마력이 잘 보충이 될지는 모르겠느니. 예전보다 공기도 탁하고…….’

식물의 생기를 이용하여 마력을 보충하려는 의도였다.

마력을 보충한다는 것.

통로가 뚫린 듯 자연과 육체가 일체화되어 늘 마력이 넘쳤던 그녀에겐 낯선 개념이다.

지금의 밀라니아는 그런 상태였다.

마력 충전기가 커다란 통로를 연결시켜 놓았는데 문제가 생겨 통로가 아주 작아진 상황.

당연하게도 육신에 흐르는 마력의 양도 희박해졌다.

몸에 흐르는 마력이 줄어들었으니 마법사나 검사처럼 수련을 통해 마력의 양을 늘리려는 것이다.

‘마법사들이 마력을 모으는 것보다야 효율이 좋겠지만 자연의 공기가 이리 탁하면 생각보다 큰 효과는 보지 못하겠구먼.’

밀라니아는 내심 혀를 쯧쯧 찼다.

과거에는 손을 휘저으면 손에 잡힐 만큼 대자연의 기운이 사방에 풍부했는데 지금은 땅에 점점이 뿌려진 밀알만큼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100년 동안 친구들이 많이 죽었다고 슬퍼하는 느티나무의 말을 들어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은 갔다.

밀라니아는 다시금 혀를 차고 눈을 감아 정신을 집중했다.

예전처럼 막대한 마력을 모으려고 하는 건 아니라서 마음의 부담을 덜었다.

몸 주변에 흐르는 대자연의 기운과 의지를 일체화시켰다.

몸에 있는 모든 구멍이 확장되어 대자연과 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마력이 흐르는 통로가 하나에서 순간적으로 여러 개로 늘어났다.

늘어난 통로를 통해 밀라니아는 대자연의 기운, 즉 마력을 흡수했다.

몸에 들어온 마력은 별다른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고 밀라니아의 내부를 활기차게 돌아다녔다.

육신 그 자체가 자연의 결과물인 밀라니아의 몸은 대자연의 섭리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흡수된 마력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녀의 몸에 안착했다.

‘염려했던 것보다 마력이 수월히 모이는구나.’

꼭 환영이라도 하는 것처럼 몸 안에 풍부해진 마력을 느끼며 밀라니아는 눈을 번쩍 떴다.

신비한 금색 눈동자에서 따뜻한 빛이 폭사되었다.

흡수된 마력 일부분이 눈동자를 통해 새어 나온 것이었다.

‘이 정도면 이곳을 떠날 수 있을 만큼은 될 것 같구나.’

무기력하게 갇혀 있던 며칠의 기억이 지긋지긋했던 밀라니아는 오랜만에 느낀 상쾌함과 성취감에 고양되었다.

마법을 펼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몸을 띄웠다.

육체의 내부에서 순환하던 마력이 그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마법사들이 소위 ‘기적’이라 말하는 마법이 발휘되었다.

마법은 의지를 발현하는 것.

밀라니아에겐 그녀의 뜻이 곧 대자연의 의지였다.

스펠링이나 수결을 맺는 여타의 절차가 필요 없는 그녀의 발이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다.

앉아 있던 자세를 풀자 자연스럽게 서 있는 형태가 되었다.

바닥과 이별한 발이 장난스럽게 까딱였다.

미소를 짓고 밀라니아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지를 느낀 마력이 움직여 몸을 하늘로 띄웠다.

플라잉 마법이었다.

‘아아, 기분이 좋구나.’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로운 부유감.

밀라니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환희에 가늘게 떨었다.

육신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점점 더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1대륙까지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 모은 마력으로는 오랜 체공은 힘들겠지만, 마력이 부족하면 중간에 땅으로 내려와 충전하면 될 일.

아무것도 문제될 것 없다.

지금 밀라니아의 마음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력이 희박한 몸으로 다시 깨어났을 때 느꼈던 아득한 막막함이 흐려진다.

예전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마음 상태.

밀라니아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몸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기쁘게 만끽했다.

그녀의 몸은 황궁의 높다란 담장을 넘을 수 있을 만큼 높이 올라갔다.

‘이제 가자꾸나.’

황궁 밖으로 날아가기 위해 비행의 속도를 높이려는 순간이었다.

살랑거리며 그녀를 기분 좋게 휘감았던 바람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대자연의 마력에 감화되어 부드러워졌던 공기가 경직되었다.

‘어?’

편안한 공기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딱딱해진 분위기에 놀란 밀라니아는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사냥꾼이 던진 그물에 사슴이 잡히듯 강인한 팔에 단단히 붙들리고 말았다.

“뭐 해, 밀라니아.”

낮게 그릉대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소름이 끼칠 만큼 거친 숨소리가 헐떡인다.

밀라니아는 등골이 오싹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쾌감, 충만감, 자유로움, 편안함.

그 모든 기분 좋은 감정들이 일시에 박살이 나고 찾아온 것은 몸을 강하게 압박하는 완력의 위압이었다.

“어디 가려고?”

딱딱하고 스산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멍해졌던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상실감에 분이 머리끝까지 뻗치고, 열이 받아서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이……, 이 무례하고 건방진 자식 같으니.”

그녀답지 않게 흥분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자, 그녀를 부둥켜안은 그레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올가미가 조여드는 것처럼 밀라니아는 답답해졌다.

화가 나지도 않는지 태연한 응답이 돌아왔다.

“응. 무례하고 건방진 그레칸이야.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뭐라? 황당해진 밀라니아가 눈을 깜박이자 그녀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꽉 안아든 그레칸이 땅으로 내려왔다.

“이런 짓을 하면 어떡해.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산책 시간은 이걸로 끝이야. 이해하지?”

저벅저벅 황궁으로 걸어가며 그레칸이 말했다.

약간의 분노가 어린 건조한 목소리였다.

밀라니아는 황당해서 잠시 가라앉혀진 분노가 다시 치솟았다.

“뭐라? 산책 시간은 이걸로 끝이다? 내가 네 애완용 다람쥐인 줄 아느냐, 이 고얀 놈 같으니.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이놈, 그레칸!”

역정을 내며 버둥거리는 그녀를 그레칸이 꼭 안아들었다.

그 바람에 밀라니아의 몸이 위로 올라가 이마에 그레칸의 턱이 낳을 듯 말 듯 했다.

그레칸의 살짝 거친 숨결이 느껴지자 밀라니아는 다소 진정이 됐지만 여전히 씩씩거렸다.

그레칸의 두터운 팔이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레칸의 가슴에 바싹 안겨진 그녀는 불쾌해져서 손으로 그를 밀어냈으나, 짐승이 버둥거릴수록 조여드는 덫처럼 그레칸은 그녀를 한층 강하게 끌어안을 뿐이었다.

벌컥.

크리스털 방문을 열어젖힌 그레칸은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가 부드러운 침대보 위에 그녀를 눕혔다. 퍽 얌전히.

이미 심사가 뒤틀린 밀라니아는 냉랭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멀어지는 그레칸을 노려보았다.

눈빛 하나로 벼락을 내리칠 수 있을 만큼 격한 눈초리.

허나 그녀는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이 몸이 손 하나 깜짝하지 못하다니,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냐.’

침묵의 술을 손짓 하나로 무산시켰던 그레칸이라지만 그때는 자신조차도 막막했을 정도로 마력이 일천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플라잉 마법을 일정 시간 전개할 정도로 마력을 모은 지금도 그레칸에게 조금의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밀라니아가 그레칸에게 얌전히 안겨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손가락을 연속해서 튕기며 그녀가 아는 모든 저주의 술을 걸어 댔지만 그레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를 안고 있는 상태라 손짓도 안 했는데도 그랬다.

손끝에서 쏘아 낸 마력은 그레칸의 몸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허공에서 힘없이 흩어졌다.

‘이게 대체…….’

마력의 움직임을 느낀 밀라니아는 기가 막혀 입을 떡 하고 벌렸다.

전의를 잃어버린 채 침대에 얌전히 누운 밀라니아의 마음은 풀어지지 못한 분노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 평생 이렇게 수치스러운 일은 처음 당하느니.”

냉랭하게 쏘아붙이자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레칸이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유쾌한 미소는 아니어서 밀라니아는 분노를 삼켰다.

“이 무례하고 건방진 놈.”

“뭐라고 해도 좋아. 같은 일이 벌어져도 똑같이 할 거니까.”

그레칸은 조용히 대꾸했다.

태도를 바꿀 일 없다는 그 일관성 있는 말씨가 짜증스러워 밀라니아는 반대쪽으로 홱 몸을 돌렸다.

“꺼지거라.”

힘없는 자의 설움이 이런 것인가.

이런 무력감을 처음 느껴 보는 밀라니아의 마음은 의기소침해졌다.

그레칸을 아끼고 있지만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미웠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밀라니아의 싸늘한 축객령에도 그레칸은 나가지 않았다.

도리어 침대를 손으로 받치고 그녀의 위로 몸을 드리워 희게 질린 창백한 뺨에 입을 맞추었다.

밀라니아는 열이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그대로 머리 가죽을 뚫고 나가는 기분이었다.

“당장 꺼지지 못하겠느냐!”

덥석 베개를 잡고 그레칸에게 휘둘렀다.

싫다는 자신을 이곳에 억류하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을 이런 식으로 대할 거면 그레칸은 자신에게 애정을 기대하지도 말아야 했다.

‘이놈이 대체 날 무엇으로 보기에 이런 무례한 짓을 하는 것이야.’

의기소침한 마음에 무시받은 기분까지 합쳐지니 밀라니아는 그레칸과 상종하기도 싫었다.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분노를 피하지 않았다.

퍽! 베개는 그레칸의 얼굴을 정면으로 후려치고 떨어졌다.

베개를 맞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은 삭막하고 건조했다.

밀라니아는 그 얼굴을 보면서도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냉랭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밀라니아는 말했다.

“네가 이렇게 일방적인 놈인 줄 알았으면, 내게 이렇게 대할 줄 알았으면 너를 아끼게 될 일도 없었을 것이야!”

그레칸은 고얀 놈이었다.

전생에는 숱하게 자신의 심장을 탈취하여 편안한 영면에 이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모든 행동을 용서하고 마음으로 품으려고 했으나, 끝까지 저를 괴롭힌다.

이제는 이렇게 자존심을 뭉개는 방식으로.

씩씩거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레칸이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였다.

“슬프네. 난 밀라니아를 정말 많이 아끼는데. 내 목숨보다 더.”

“…….”

“당신이 아무리 화를 내고 나를 때리고 나를 욕해도, 나는 화나지 않아. 그러니까 괜히 힘 빼지 마. 당신 기력만 축나니까. 기껏 찌운 살 도로 빠지면 안 되잖아.”

“뭐라?”

말문이 막힌 밀라니아는 빙그레 웃은 그레칸이 방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입술만 바르르 떨었다.

‘내 이 나이가 되어서 이렇게 화를 낼 수 있을 줄 몰랐느니라!’

홱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가, 무심코 흰 손등을 바라보았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비쩍 말랐던 손은 어느새 살이 올라 예전처럼 적당히 살이 올라 매끄러운 모습이었다.

매 끼니마다 버터와 다진 베이컨이 들어간 기름진 스프가 올라왔던 것을 기억했다.

그다지 고기를 즐기지 않는 그녀가 유일하게 잘 먹는 것이 베이컨이었는데, 식사 때마다 베이컨도 꼭 빠지지 않았다.

영양가 높은 식사와 살찐 손등.

그레칸의 마지막 말이 떠올라 밀라니아는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 * *

다음 날, 크리스털 방의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작은 동물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넓은 방이 지저귀는 소리와 찍찍대는 소리, 날개 비벼 대는 소리로 가득 차자 창문을 닫은 밀라니아는 팔짱을 끼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흰색 쥐가 다섯 마리, 회색 쥐가 열 마리. 곤충이 서른. 새가 열 마리…….”

대략 쉰이 넘는 짐승들이 저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밀라니아를 보고 있었다.

일전의 치욕스러운 실패를 겪은 밀라니아의 마음엔 탈출을 향한 일념이 한층 날카롭게 불타올랐다.

‘플라잉 마법은 너무 눈에 띄는도다. 은밀히 탈출하기엔 조력자의 도움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니라.’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바로 그녀를 도와줄 존재들을 찾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이들은 그녀의 시중을 드는 하인들.

‘그들은 탈락이니라. 어찌 그리 심지가 약한지 쯧쯧. 그레칸이 기침 한 번 해도 납작 엎드릴 놈들을 쓴다는 건 섶을 지고 불덩이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게 없도다.’

찍찍, 찌지직.

쉬익, 쉬이이익.

짹짹. 째재재재잭! 재―액!

각종 소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은 조력자들에게 시선을 돌린 밀라니아가 짧게 명령했다.

“조용.”

찍……. 마지막 쥐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좌중이 고요해졌다.

곧이어 밀라니아의 앞으로 쥐와 새와 곤충들이 한 줄로 죽 늘어서 순번을 기다렸다.

밀라니아는 황궁을 거처로 삼은 그들의 생활감 넘치는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탈출 경로를 짰다.

잠시 후, 밀라니아는 작은 조력자들을 앞세우고 크리스털 방을 빠져나갔다. 산책 시간인지라 방문 앞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인들이 차지한 황궁은 과거의 황궁과는 다르구먼.’

밀라니아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종족과 인간들은 겉모습은 비슷하게 꾸밀 수 있다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인간을 향해 모여 살지 못하면 힘을 쓰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라고 비난하는 수인들의 말은, 바꿔 뒤집으면 모이면 강한 존재라는 뜻이다.

인간들은 모이면 모일수록 강해진다.

특히나 황궁은 개개인의 역량이 뛰어난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인간들이 만들었던 황궁의 지배 체제, 경비 체제, 보안 시스템, 유기적인 시스템 등등.

다양한 체제와 시스템은 구멍이 거의 없을 만큼 촘촘하고 뛰어났다.

‘반면 수인들의 체제는 단순하기 그지없도다.’

본래 황궁은 이들이 사는 환경이 아니었고, 필요에 의해 서로 협력하는 인간들과 달리 수인들은 각기 다른 종족이 모여 서로 협력하지 않았다. 협력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수인들의 종족 특성에 맞게, 그들의 능력에 맞게 인재를 배치하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그렇게 해도 황궁은 그럭저럭 돌아갔을 테니 바꿀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야.’

만약 황궁을 적군이 침략한다면 인간들은 역할에 맞는 군대를 순차적으로 보냈을 것이고, 수인들은 일족 중 가장 강한 전사를 일제히 내보내게 될 것이다.

‘각기 다른 장점이 있으니 화합하면 좋을 것을. 어이하여 서로를 지배하려고만 하느냐.’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밀라니아는 혀를 쯧쯧 찼다.

인간의 복잡한 체제에 비해 수인들은 단순하다. 그 점이 밀라니아에겐 장점으로 작용했다.

{이쪽이에요, 마녀님!}

작은 조력자들은 어디가 가장 사람이 없는 구역인지 잘 알고 있었고, 단순한 보안 체제를 가진 황궁은 작은 조력자들의 안내에 의해 허무하게 뚫렸다.

벌써 몇 개의 별궁을 통과한 밀라니아는 크리스털 방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대로라면 곧 이 지겨운 황궁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게야.’

{마녀님, 저기가 황궁의 입구, 입구, 입구예요!}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간 회색 쥐가 앞발로 황궁의 거대한 황금문을 가리키며 찍찍거렸다.

밀라니아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칭찬, 칭찬받았다. 칭찬!}

의욕 충만한 회색 쥐가 앞으로 빠져나가고, 자극받은 다른 동물들도 속도를 높였다.

황궁의 거대한 대문은 동체 시력이 좋은 묘족 전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작은 조력자들은 익숙하게 그들의 눈을 피해서 옆으로 돌아갔다.

그리해서 도착한 곳은 황금빛이 번쩍거리는 대문이 아니라 대문에서 멀리 떨어진 회색빛 칙칙한 돌담이었다.

{마녀님, 이리로 가야 해요. 여기로 가면 아무도 모르게 나갈 수 있어요!}

새 머리 위에 올라탄 노래기가 머리를 꿈틀거리며 벽에 난 구멍을 가리켰다.

밀라니아는 주먹 하나 넣으면 족할 그 작은 구멍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마녀님? 안 가세요? 곧 있으면 사람이 와요!}

밀라니아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나가기엔 구멍이 너무 작도다.”

다른 곳은 없는지 찾는 밀라니아에게 이번에는 일개미가 더듬이를 붕붕 흔들었다.

{아니 아니 아니. 벽 약해. 벽 약하다요. 툭 치면 깨져, 깨져.}

{응응. 여기에요, 여기에요. 이 벽, 이 벽에서 많이들 죽었어. 우리도 이제 여기 안 써요.}

다른 곤충들도 맞다며 한두 마디를 보태었다.

벽에 구멍을 뚫고 살거나 벽을 타고 기어 다니는 곤충들이 확신을 가지며 구멍 뚫린 벽을 가리키자 밀라니아는 반신반의하며 손으로 구멍 주변을 툭 쳤다.

{한 번 더요, 한 번 더.}

주먹에 조금 더 힘을 주고 쳤다. 그러자 거미줄처럼 벽에 가 있던 금이 영역을 확장했다.

밀라니아가 다시 한번 주먹으로 치는 순간.

와르르.

구멍 주변의 돌담이 무너졌다. 작은 조력자들이 자기 일처럼 환호했다.

{와, 무너졌다. 무너졌어. 마녀님이 나갈 수 있는 구멍이 생겼어요!}

밀라니아는 어이가 없어서 무너진 돌담을 바라보았다.

“이놈들은 자기들 사는 곳 보수도 안 하고 지내는가 보구나.”

황궁은 겉보기에는 예전과 다름없었지만 세세히 따져 보면 망가진 곳투성이었다.

황당하기는 했지만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수인들의 무신경함에 감사하며 밀라니아는 구멍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드디어 빠져나왔도다.’

감격한 밀라니아가 그대로 달아나려는 순간이었다.

{꺄아아아아악!}

{살려 줘, 살려 줘!}

두려움에 찬 비명에 밀라니아는 달려 나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그레칸과 눈이 마주쳤다.

무미건조한 눈.

그녀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아아아아, 아파, 무서워, 아파!}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을 듣고 밀라니아는 정신을 차렸다.

그레칸의 주변에서 그녀를 도와줬던 작은 조력자들이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은 바닥에 떨어져서 날개로 머리를 가렸고 작은 곤충들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렸다.

밀라니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레칸이 대체 어떻게 알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손가락으로 툭 쳐도 죽을 것 같은 작은 조력자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화내지 말거라, 그레칸. 그 애들이 힘들어하고 있지 않느냐.”

그레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한텐 안 들려.”

무표정하게 중얼거리는 얼굴에 밀라니아는 짙은 낭패감을 느꼈다.

그레칸에게서 새어 나오는 기운에 얽매인 동물들이 느끼는 극도의 공포감이 그녀에게도 느껴졌다.

까딱하다간 그대로 죽을 것 같았다. 입가에 거품을 문 회색 쥐를 발견한 밀라니아가 얼굴을 굳혔다.

“기운을 거두지 못하겠느냐!”

성난 목소리로 외치자 그레칸의 미간이 혼란스럽게 찌푸려졌다.

“왜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어.”

“그걸 말이라고 해! 네 기운이 그 아이들이 죽어 가는 게 보이지 않는 게야?”

그레칸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떨어진 작은 생물들이 살겠다고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그레칸은 묵묵히 그 가련한 죽음과 삶의 현장을 응시하고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 이것들. 죽이고 싶은데.”

“…….”

“안 되는 거야?”

‘이러다 다 죽어 버리겠구나.’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죄밖에 없는 무구한 생명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밀라니아는 몸 안에서 휘도는 마력을 모두 끌어모아 그레칸에게로 뿜어내었다.

공격의 의지를 담은 마력이 아니었다. 그레칸에게 닿아 봤자 허무하게 흩어지고 말 것이다.

그녀의 마력은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 죽어 가는 작은 생명체들의 방패가 되었다.

게거품을 물던 새들이 몸에서 힘을 뺐다.

숨이 잦아들던 쥐들도 헐떡이며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기운을 얻은 곤충들은 필사적으로 땅을 파 지하로 숨어들려고 애를 썼다.

저승길로 떠나려는 동물들의 숨통을 이어 주는 밀라니아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동물들은 하나하나가 작고 미약했지만 그 수가 쉰이 넘어갔다.

마력을 길고 가늘게 뽑아내어 하나의 동물도 놓치지 않고 보호하는 건 밀라니아의 능력으로도 버거울 만큼 섬세한 제어력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이 몸은 예전 한창때의 그 몸이 아니니라.’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밀라니아는 금세 지쳐 버렸다.

무리한 마력의 운용으로 목구멍에서 비릿한 피 내음이 올라왔다.

“뭐 하는 거야. 그만해, 밀라니아.”

그레칸이 초조히 만류했다. 밀라니아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레칸이 모든 기운을 거둬 버렸다.

그의 기운에 대응하던 밀라니아의 마력도 흩어졌다.

밀라니아는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동물들을 확인하고, 끝내 도망가지 못한 동물들도 확인했다.

그녀가 마력으로 보호했음에도 결국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은 동물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아아, 미안하구나.’

힘이 빠져 비틀거리는 밀라니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득바득 긁어모은 마력으로 밀라니아의 몸은 텅 빈 그릇 같은 상태였다.

“밀라니아!”

단숨에 달려온 그레칸이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부축했다.

밀라니아는 가물가물한 눈으로 절박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는 작은 동물들을 볼 때에는 소름이 끼칠 만큼 냉정했던 얼굴이 지금은 표정만 봐도 안쓰러울 만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엄청난 간극에 밀라니아는 막막한 기분을 느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을 때의 그 막막함이었다.

“너…… 대체 왜 그렇게 됐느냐.”

왜 이 지경이 되어 버렸어.

아스라하게 중얼거린 밀라니아는 눈을 크게 뜨는 그레칸을 마지막으로 시야에 담고, 정신을 잃었다.

마력이 바닥나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난 그녀의 몸을 부여안은 그레칸은 겁이 나서 미칠 것 같았지만, 천천하고도 조심스럽게 그녀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댔다.

쿵쿵.

쿵쿵.

쿵쿵.

미약하게 뛰는 심장의 고동 소리.

왈칵 눈물이 터져서 그레칸은 밀라니아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밀라니아가 눈을 감았을 때는 심장이 멈출 만큼 두려웠고, 안정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는 너무나도 안도해서 심장이 터져 버리는 줄 알았다.

“당신 때문에 죽을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돌아왔을 땐 이제 되었다 싶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밀라니아의 뺨을 어루만지며 질문했지만 정신을 잃은 밀라니아는 답을 주지 않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일어난 그레칸은 밀라니아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바삭.

발밑에서 뭔가 바스라지는 소리가 났다.

멈칫한 그레칸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발을 떼자 으깨진 곤충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레칸은 무표정하게 하잘 것 없는 그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죄 없는 생명을 죽였지만 마음엔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그가 그대로 지나치지 않은 것은 밀라니아가 한 말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너 대체 왜 그렇게 됐느냐. 왜 이 지경이 되어 버렸어.]

예전은 어땠더라?

그레칸은 기억도 흐릿한 예전 일을 생각하려고 노력했지만,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100년 전, 그가 각성하고 밀라니아가 사라진 일 이후 그의 머릿속은 깡그리 비워졌다.

예전의 기억 중 뚜렷하게 떠오르는 건 오로지 밀라니아의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품과 다정한 미소와, 그녀가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던 순간의 눈물 나도록 아련한 느낌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그리고 바라는 자신의 모습이 지금과 다른 모습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행동해 줄 용의가 있었다.

그레칸은 손을 바깥쪽으로 가볍게 휘저었다.

바람이 불었다. 흙을 끌어온 바람이 죽은 사체 위로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완성된 봉분을 뒤로 하고 황궁으로 들어서는 그레칸의 뒤로 새카만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 * *

눈을 뜬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없음에 기분이 미묘해졌다.

당연히 그레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다시 돌아온 크리스털 방은 여전히 깨끗하고 화려했다.

침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밀라니아는 착잡한 마음이었다.

동물들을 끌어들이는 결정은 최악의 수였다. 피해가 다른 이들에게 갈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레칸이 그 정도로까지 타락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게 실책이었느니라.’

골똘히 생각에 잠긴 밀라니아는 일어나서 서랍으로 걸어갔다.

맨 위 칸을 열자 씁쓸하면서도 향긋한 말린 풀이 드러났다.

말린 풀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밀라니아는 ‘흐음’ 하고 목을 울렸다.

아마도 의도해서 키운 건 아니었을 게 분명한 이 풀을 뒤뜰에서 우연히 발견했을 때, 산책을 나갈 때마다 정성들여 키우고 재배했던 것은 혹여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똑똑.

문이 열리자 밀라니아는 풀을 집어넣고 서랍을 닫은 뒤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하인이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다.

“맛있게 드세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힐끗거리는 하인이 음식을 세팅하고 나가자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밀라니아는 탁자로 바싹 다가갔다.

“오렌지주스, 초콜라떼, 생선구이, 양파베이컨스프라…….”

음식을 보니 허기가 졌다.

마력이 바닥난 몸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회복이 되겠지만 그 부족한 마력은 영양가 높은 음식으로도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밀라니아는 세팅된 음식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초콜라떼만 쭉 들이켜고 다른 음식은 손대지 않았다.

대신 서랍에서 아까 살펴보았던 말린 풀을 가져와 잘게 빻아 가루를 내고, 음식에 뿌려 섞었다.

벌컥.

문을 열고 나가자 경비를 서고 있던 전사들이 재깍 고개를 돌렸다.

끄트머리가 뾰족한 귀와 세로로 늘어진 아몬드형의 눈동자가 눈에 띄는 이들은 묘족 전사들이었다.

“산책 시간이 아닌데,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가요?”

하인이 음식을 가져왔을 때 일찍이 이들의 소속을 확인한 바 있던 밀라니아는 묘족 전사 하나에게 쟁반을 넘겼다.

어리둥절한 묘족 전사가 쟁반을 내려다보았다.

“다 드신 건가요? 음식이 많이 남았는데요.”

“내가 먹기엔 너무 많구나. 손도 대지 않았는데 버리려니 아까워서 말이야. 싫어하는 음식이 아니라면 한번 잡숴 보거라.”

싫어할 리가 없었다.

특히 최고급 생선구이는 묘족들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음식.

권유받은 전사는 난감한 기색으로 일단 거부했다.

“경비를 설 때는 음식을 입에 댈 수 없습니다. 거둬 주세요.”

“아까워서 그러느니라. 늙은이가 주는 건 거절하는 게 아니야. 내 너희들이 마음에 쓰여서 그러느니.”

“……예?”

밀라니아의 정체를 모르는 전사들은 ‘늙은이’ 운운하는 말이 당황스러워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제 실수를 깨달은 밀라니아가 험험 헛기침을 했다.

“하여튼 나는 다 먹었으니 너희들끼리 나눠 먹거라. 다 먹으면 주방에 갖다주는 거 잊지 말고.”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쟁반을 떠넘기고 다시 방에 들어온 밀라니아는 바깥의 동태에 귀를 기울였다.

“어떡하지?”

“아깝긴 하잖아. 그냥 빨리 먹어치우고 정리하자.”

‘그래그래.’ 밀라니아는 흐뭇한 마음으로 그들이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슬쩍 문을 열었다.

묘족 전사들이 헤롱거리는 눈으로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바닥에는 바닥을 비우고 있는 그릇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눈이 풀린 묘족 전사가 벽에다 대고 얼굴을 비벼 댔다.

“야오―옹.”

밀라니아가 음식에 섞은 건 개박하로, 네페탈락톤이라는 물질이 포함되어 고양이들의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식물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재배되어 효과가 극대화된 잎은 묘족 전사들의 몸에 들어가 흡사 마약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었다.

밀라니아는 그들의 얼굴 위로 남은 개박하잎 가루를 쫙쫙 뿌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 게야.’

작은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어느 구역이 경비 체제의 구멍인지 짐작한 상황이었으므로 밀라니아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가끔 플라잉 마법과 자연 동화술을 쓰며 들킬 위기를 모면한 밀라니아가 황궁의 정문으로 가기 전 마지막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산책 가는 거야?”

태연하게 걸어오는 그레칸을 마주한 밀라니아는 얼굴을 구겼다.

‘천연덕스럽게 물어보누.’

다 알고 있다는 눈을 하는 주제에 말이다. 건방지고 고얀 놈 같으니.

밀라니아는 팔짱을 끼고 저를 바라보는 그레칸을 싸늘히 응시했다.

“그래. 산책 갔다 오련다.”

모르는 척을 하는 거면 이쪽도 모르는 척 대꾸하는 수밖에.

“어디로?”

그레칸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밖에도 좀 나가 보고 겸사겸사 다녀오려고 그러느니라.”

퉁명스러운 그녀의 대답에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미소를 지었다.

“……1대륙까지?”

정곡을 찔러 들어오는 질문에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노려보았다.

“날 숨 막히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그레칸은 우울한 얼굴로 밀라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해?”

“네가 지금 날 네 휘하에 있는 일족인 양 강제하고 있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느니라. 그런데도 이리 날 위압하는 건 내 숨통을 틀어막으려고 그러는 게 틀림없다.”

“…….”

“시간이 이만큼 흘렀음에도 오히려 넌 발전이 없이 퇴보만 하고 있으니, 내가 네게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혀를 차며 말하는 밀라니아의 냉랭한 눈빛에 그레칸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이를 갈았다.

“나라고 당신을 이렇게 두는 게 마음 편한 건 아니야.”

“…….”

“하지만 내가 예전처럼 당신의 말을 존중하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따른다 한들 뭐가 달라지지?”

“…….”

“당신 말대로 다 따랐을 때! 그때 결과가 어떻게 됐지?”

그레칸의 눈빛이 풍랑이 이는 바다처럼 거칠어졌다.

“완전히, 뭐 하나 제대로 된 것 없이 다 망가졌어. 돌이키고 싶어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 버렸다.”

“…….”

“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밀라니아.”

그레칸은 딱딱하고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냥 당신이 포기해.”

“…….”

“그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 새끼들. 르베리안즈, 말란도르, 앨리지, 또는 마녀족……. 그들이 과거에도 모자라 아직까지 당신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상상만 해도 심장이 타들어 가 버리는 것 같아.”

심장 부근을 가벼이 훑는 그레칸의 눈빛이 매우 어둡게 가라앉았다.

밀라니아는 갑자기 어깨가 오싹해져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레칸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새어 나오는 위험한 기운은 휘말리는 모든 걸 갈가리 찢어 없애 버릴 만큼 파괴적이고 위협적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아연한 밀라니아는 그녀의 어깨를 감싼 그레칸과 함께 크리스털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어안이 벙벙했다.

“잘 자, 밀라니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뺨에 입을 맞춘 그레칸은 굳어 있는 그녀의 입에도 입을 맞추었다.

정신을 차린 밀라니아는 진저리를 치면서 그를 밀어냈다.

“제발 이딴 짓 좀 하지 말거라, 징그러운 놈!”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복잡한데 태연한 그레칸이 미워서 한 소리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레칸의 표정이 일순 고통스럽게 변했다.

밀라니아는 그 표정에 놀라서, 서둘러 방으로 들어와 문을 쾅 닫았다.

‘……고얀 놈. 왜 갑자기 약한 척을 하는 것이야?’

두근두근 뛰는 심장에 손을 올린 밀라니아는 단단히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긴장했지만 문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문을 흘끗거리며 침대로 돌아온 밀라니아는 이상하게 마음이 심란하여 침대에 벌러덩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한편 그레칸은 냉정히 닫힌 문 앞에서 굳어 있었다. 목전에서 쾅 닫힌 문은 열면 열리겠지만 도저히 아무렇지 않게 열 자신이 없어서, 문고리 위에 손을 올리기만 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무정한 문을 바라보며 그레칸은 문고리를 만지작거렸다.

밀라니아가 분개하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징그러운 놈!]

머릿속에 콱 박힌 말.

석상처럼 굳어 버린 그의 얼굴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내가 징그럽구나.

나는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은데…….

다른 사람은 다 필요 없이 밀라니아만 있으면 되는데.

당신만 날 예뻐해 주면 되는데.

징그러우면 어떡하나.

당신은 징그러운 날 사랑해 주진 않을 텐데.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공포감이 엄습했다.

그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툭, 차가운 문에 이마를 기대었다.

씁쓸한 목소리가 잇새로 새어 나왔다.

“그래도 어떡해. 당신만 내 곁에 있으면 되는 걸. 그러니까…… 징그럽든 괴물이든 난 상관 안 해.”

근데 왜 이렇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플까.

그레칸은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평범한 인간들이, 수인들이 하는 것처럼 밀라니아와 사랑을 하고 싶을 뿐인데.

그녀에게 마음을 전하고 그녀의 마음 한 자락 얻고 싶을 뿐인데.

어쩐지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과거에 비해 한층 두꺼워진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전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줘, 밀라니아.”

* * *

밀라니아는 근 한 달간 크리스털 방에 박혀 죽은 듯이 지냈다.

그레칸과는 그 이후로 보지를 못했다. 그게 신경 쓰였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했다.

그래도 왜인지 찝찝하기는 해서 산책을 제외하고는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 또 그레칸이 나타나면. 그 답 안 나오는 가정 때문에 의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화려하지만 단조로운 황궁의 일상에 익숙해졌을 즈음엔 그녀는 누가 봐도 황궁에 완벽히 적응해 눌러 살고 있는 모습이 되었다.

달칵, 문이 열린다. 곧이어 탁탁, 빗방울이 튀기는 듯 가벼운 걸음 소리가 울렸다.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오는구나.’

익숙한 걸음 소리가 근처에서 멈추자 안대를 쓴 채 침대에 누워 있던 밀라니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얘야, 초콜라떼 좀 갖다주려무나.”

“그러실 줄 알고 미리 대령해 왔지요.”

뿌듯함이 깃든 발랄한 목소리가 화답해 왔다.

투명한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안대를 이마로 올린 밀라니아의 눈앞으로 보기만 해도 다디단 초콜라떼 한 잔이 성큼 다가왔다.

‘이렇게 빨리?’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거미 수인이 씨익 웃었다.

“이 시간만 되면 초콜라떼를 찾으시잖아요. 저 눈치가 꽤 빠르지요?”

그녀를 바라보는 눈이 반짝거렸다. 완전히 탈태하지 못해 이마에 드러난 세 번째 눈도 덩달아 반짝이고 있었다.

쯧쯧, 밀라니아는 입술을 작게 오물거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이렇게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인고. 정에 굶주린 놈들만 모였나.”

“네?”

“아무것도 아니니라.”

고개를 절레 저은 밀라니아가 손을 뻗었다.

길고 매끄러운 손가락에 감탄하느라 시간을 잡아먹었던 하인은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재빨리 초콜라떼를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먹기 편하게 빨대까지 넣어져 있다.

“덕분에 참 편하구나. 잘했느니.”

보상으로 칭찬을 던져 준 밀라니아가 하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주근깨 박힌 얼굴이 빨개졌다.

“가, 감사합니다.”

“눈치가 빠르니 큰 장점이로고.”

하인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퍽 만족스럽게 초콜라떼를 마시는 밀라니아를 올려다보았다.

“아가씨가…….”

“쯧.”

“아, 밀라니아 님이 이렇게 머리 쓰다듬어 주시는 거, 너무 좋아요.”

빨대로 초콜라떼를 쭉 빨아마시며 안대를 다시 쓰려던 밀라니아가 하인을 흘끗했다.

하인이 부끄러운 기색으로 손가락을 얽어 댔다.

“자꾸 생각나서 밤에는 잠도 못 잤어요. 이 방에 올 일 있으면 다른 하인들 일거리도 뺏어서 와요, 저. 헤헤. 그건 모르셨죠? 밀라니아 님이 뭘 좋아하는지도 이제 다 안답니다.”

자랑스럽게 가슴을 피고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는다.

“일단 귀찮은 걸 가장 싫어하시죠. 침대에 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하시고요. 할 수 있으면 누워서 음식 먹고 싶어 하시는 것도 알아요. 지난번에 밀라니아 님이 귀찮아 하셔서 제가 대신 이를 닦아 드렸을 때도, 행복한 얼굴을 하셨잖아요.”

뜨끔한 밀라니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누가 들으면 내가 아주 대단한 게으름뱅이인 줄 알겠느니라.”

“어, 그건…….”

‘그럼 아닌가요?’ 하는 듯했던 하인은 밀라니아의 가느스름한 눈과 마주치자 당황한 얼굴로 말을 돌렸다.

“어쨌든 저는 밀라니아 님이 귀찮은 일 없게 편히 지낼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

“왜냐하면 밀라니아 님은 제가 본 모든 존재 중에 가장 아름다우시고, 다정하시고, 손도 예쁘시고.”

“…….”

“계속 밀라니아 님을 모시고 싶으니까요. 주인님이 왜 밀라니아 님을 아끼시는 줄 알겠어요. 헤헤.”

“그 말은 거북한지고. 원래는 그놈이 아니라 내가 그놈을 아꼈느니라.”

이 생활이 익숙해지긴 했나 보다.

그레칸이 자신을 ‘아낀다’는 기가 막힌 말을 들었는데도 부아가 치밀지 않고 심드렁한 기분이 드는 걸 보면.

“네?”

“나 너무 좋아하지 말거라. 그러나 그놈 꼴 날라.”

미친놈은 하나로 족하다. 아니, 차고 넘친다.

하인은 이해하지 못한 듯했지만 멍청한 얼굴로 웃는다. 그저 좋은 모양이다.

밀라니아는 빨대를 이로 살짝 깨물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행동을 다른 뜻으로 이해한 하인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주인님은 오늘 늦게 오실 거래요. 반란 종자가 크게 일어났거든요. 북쪽에서 노예들이 대거 탈출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노예들이 반란 종자가 됐나 봐요. 근래 들어 가장 큰일이라 주인님께서 친히 움직이셨대요.”

“…….”

“그래도 걱정은 안 돼요. 금방 해결하고 오실 테니까요.”

그 말에 밀라니아는 하인을 흘끗했다. 앳된 티가 나는 얼굴은 자신이 한 말을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하인은 지체 없이 대꾸했다.

“주인님은 최강이시니까요! 인간들이 그렇게 부르짖는 아덴샤가 살아 돌아와도 주인님껜 상대가 안 될 걸요?”

“…….”

“지금도 봐요. 누가 세상이 이렇게 될지 상상이나 했겠어요? 전 이런 식으로 종족 통일이 이루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이게 한 존재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라는 게 아직도 신기해서 깜짝깜짝 놀란다니까요.”

“……흐음.”

“주인님은 정말…… 무섭고 대단하신 분이세요.”

성체가 된지 5년도 되지 않은 어린 하인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밀라니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놈의 무섭다는 수식어는 빠지지를 않는구먼.”

도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건지.

“네?”

“아무것도 아니다.”

밀라니아가 눈을 부라리자 하인은 어리둥절해하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쪼륵. 쪼르륵.

어느새 초콜라떼를 다 마셔 음료잔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밀라니아는 입맛을 다셨다.

황궁은 지겹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 초콜라떼만큼은 진심이 되어 버렸다.

‘요상하구나. 이 맛난 건 대체 어떻게 만드는 것인고?’

단 맛이 남은 입술을 혀로 핥은 밀라니아는 하인에게 빈 음료 잔을 넘겼다.

“그만 나가 보거라. 자야겠다.”

어느 날 그레칸이 두고 간 보석 잔뜩 달린 안대를 다시 쓴 밀라니아가 침대에 누웠다.

“저녁은 밀라니아 님이 잘 드시던 베이컨치즈스프를 준비할게요.”

“그래라.”

탁.

문이 닫히자마자 밀라니아는 안대 속에서 눈을 번쩍 떴다. 안대를 벗어던지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은 활짝 열린 창문 밖을 향해 있었다.

하인이 말할 때는 관심 없는 척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그레칸이 오늘 늦게 온다.’는 정보가 내내 붉은 글씨로 깜박거리고 있었다.

요 며칠 데면데면하게 군다 싶었는데 드디어 황궁을 떠난 거다.

혹시 몰라 슬쩍 방문 고리를 돌려 보았다.

스륵.

턱.

‘닫혀 있구먼.’

쯧, 혀를 찼다. 일단 한번 닫힌 문은 열쇠를 가진 시종이 열어 주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

갖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의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어디 출구가 문만 있던가?

스윽.

밀라니아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했다.

휘이이잉!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고 있었다. 고개를 내민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결대로 흩날렸다.

그레칸이 자리를 비워서인지 인적이 드물었다.

밀라니아는 지체하지 않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바람이 발 아래 모여들었다.

사뿐히 바닥에 발을 내린 밀라니아는 흐음, 하고 뒷짐을 지었다.

주변을 둘러보고는 슬쩍 걸음을 옮긴다.

수인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을 찾아들었다.

마음은 급했지만 걸음은 나긋했다.

그때였다.

뚜벅뚜벅.

지나가던 하인이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라?”

뜨끔.

밀라니아는 태연히 그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밀라니아 님. 산책 가시는 건가요?”

“그래.”

“제가 뫼실까요?”

“목적지 없이 그저 걸어 다니는 것뿐이니, 너는 네 일을 보거라.”

하인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녀에게 꾸벅 인사하고 지나갔다.

혹시 그레칸이 나타날까 봐 마지막까지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정말 멀리 떠나 버린 것인지 황궁의 마지막 담장을 넘을 때까지도 그레칸은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그 길로 황궁을 벗어나 줄행랑을 쳤다.

떠나면서도, 그녀는 결코 도망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전략적으로 후퇴하는 것이니라.’

무엇보다도 불편한 그레칸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뻐하는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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