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48)

29

변해 버린 것

[미일라니아아아아아!]

격렬한 환대의 기억을 떠올린 밀라니아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지금이 무척이나 이상했다.

주변에 깔린 음산한 기운을 떨치듯 머리를 쓸어내린 그녀는 잠시 느려졌던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한참을 걸은 것 같지만, 여전히 말란도르는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비웠을 수도 있겠느니.’

주인인 말란도르가 없으면 이곳까지 올 필요도 없었다.

‘이쯤에서 돌아가야겠구나.’

몸을 돌리려던 밀라니아는 어렴풋이 드러나는 저택의 풍경에 걸음을 멈추었다.

줄곧 느껴 왔던 이질감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

말란도르의 영역엔 그가 펼친 결계가 있다.

주인인 그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리 걸어도 저택에 당도할 수 없었을 거다.

그러나 저택은 밀라니아의 눈앞에 나타났다. 폭발이라도 난 것처럼, 엉망이 된 꼴로.

지붕은 어디로 갔는지 날아가 있고, 멀쩡한 벽을 찾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벽을 찾는 게 쉬울 만큼 제대로 된 구석이 없었다.

저택에 달라붙은 새카만 그을음.

1대륙을 감싸던 숲을 태우고 지나간 화마가 이곳을 덮쳤는지 나무 목재는 새카맣게 타 흔적만 남아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밀라니아는 참았던 목소리를 냈다. 어찌나 놀랐는지 목소리가 짓눌리듯 튀어나왔다.

저택이 저 꼴이 된 걸 둘째 치더라도, 어딜 봐도 말란도르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결계로 인해 느끼지 못하는 줄 알았더니만 이제 보니 결계도 깨진지 오래된 것 같다.

그야말로 황망한 상태가 된 밀라니아는 가장 현실성 있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전쟁이 났는고?’

근데.

‘어째서 이 꼴로?’

다른 구역은 멀쩡했는데 왜 여기만 이 꼴이 되었단 말인가.

놀란 감정을 수습한 밀라니아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까 싶어 저택과 그 근처를 수색했다.

한 시간가량을 뒤집어 봤지만 어디에서도 말란도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 화풀이를 하고 간 꼴이로구나. 그것도 꽤 오래전에.’

짓밟은 것처럼 산산조각 난 저택을 바라보는 밀라니아의 눈이 흐려졌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왜 그레칸이 생각나는 것이야?’

딱히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직감이 맞다고 대꾸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예전과 다른 흔적의 중심엔 그레칸이 있음을 깨닫게 된 밀라니아는 상식 밖의 일 역시 그레칸과 연결 지을 수밖에 없었다.

구시대의 흔적을 찾아볼수록 어찌 된 일인지 그레칸이 100년 동안 벌인 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뭐가 또 나올지 두려울 지경이누.’

한숨을 쉰 밀라니아는 가슴이 답답하여, 사기가 넘실거리는 말란도르의 영역에서 벗어나 바위에 앉았다.

옆에 기대둔 빗자루 손걸이에 손을 올리고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흑계에 가 봐야 하는고?”

말란도르를 꼭 만나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됐는지 이유를 들어야겠다.

다른 이도 아니고 말란도르였다.

그녀가 승부를 점치지 못하는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

말란도르가 손도 못 쓰고 이렇게 당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필히 무슨 감춰진 사연이 있을 게야.’

어찌 됐든 여기 없다면 말란도르는 흑계에 있을 것이다.

말란도르와 달리 공간을 격하는 술법은 모르는 밀라니아는 정석대로 입구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밀라니아는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저택의 지하였다.

[흑계의 입구는 내 집 지하에 얌전히 있지. 내가 막지 않았으면 허구한 날 마물이 튀어나왔을 걸? 평범한 놈들은 얼씬도 하지 못할 위험한 곳이라고.]

그 위험한 입구를 마주한 밀라니아는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어 격하게 소리쳤다.

“도대체!”

매섭게 외침이 향한 곳에는 입구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유황불로 넘실거려야 할 입구가 아닌, 불길할 정도로 새카만 바위로 틀어막힌 입구가 있었다.

사기가 몸을 침범하여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밀라니아는 입구로 다가갔다.

흑계로 가려면 입구를 통해야 한다는 건 정설이다.

‘바위를 치워 봐야겠느니.’

검은 바위에 손을 올리는 순간.

수욱!

흠칫.

재빨리 손을 뒤로 물린 밀라니아는 부릅뜬 눈으로 검은 돌을 노려보았다.

“평범한 돌이 아니구나.”

바위에 손을 대는 순간, 어마어마한 죽음의 기운이 손바닥을 뚫고 침범하려고 했다.

파괴적이고도 아릿한 기운이었다.

꼭 생명이라도 가진 것처럼 짧은 시간동안 그녀를 뒤흔든 검은 돌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며 밀라니아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정말 이상한 일이로고.’

이게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누군가 흑계의 입구를 막았다. 그것도 명백한 의도를 품고.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게 하려는 것이야. 뭐가 더 우선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슨 원한을 가져 이런 짓을 했어.’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가.

밀라니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 상황에서 가장 유용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여기 입구는 인간의 저택으로 따지자면 정문이라고 해야 하나. 드나들기엔 이목이 집중되어 있어서 귀찮아. 그래서 개구멍을 만들어 놨지.]

밀라니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입구는 하나가 아니다.”

다음 행선지를 정한 밀라니아는 지체 없이 빗자루에 올라탔다.

잠시 후, 폐허가 된 저택 위로 모습을 드러낸 밀라니아는 말란도르의 영역을 지나 숲속으로 날아들었다.

혹여 다른 이들의 눈에 띌까 봐 나무 사이로, 가지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언덕 위 버려진 사냥꾼의 집이었다.

오래전부터 그저 사냥꾼의 집으로 불린 곳이다.

버려진 지 수백 년이 되었으나, 수백 년 전이나 수백 년이 흐른 지금이나, 낡은 모습 그대로 변한 게 없다.

이상할 거 없는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이상했다. 더 낡지도 않았다는 의미니까.

밀라니아는 사람이 머문 지 오래 되어 한쪽 벽이 허물어지고 창문이 여기저기 깨져 있는 사냥꾼의 집 앞에 내려섰다.

‘말란도르가 말한 건…….’

기억을 더듬어 그녀가 걸어간 곳은 사냥꾼의 집 후미의 벽이었다.

삭은 목재로 쌓아 올린 나무 벽 아래쪽에는 누군가 술에 취해 실수한 듯 뻥 뚫린 구멍이 있었다.

쪼르륵, 구멍에서 굴러 나온 다람쥐가 그녀를 발견하고 경계하여 꼬리의 털을 부풀렸다.

‘작은 짐승들이 먹이 저장소로 사용하는 모양이로고.’

다시 안쪽으로 도망치려는 듯 움찔했던 다람쥐는 갑자기 밀라니아를 향해 머리를 기웃거렸다.

“삐룩?”

머뭇거리며 다가오더니 냄새를 맡고,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로 펄쩍 뛰었다.

다람쥐는 밀라니아의 발등을 좋다고 머리로 비비적댔다.

안쪽 구멍을 살피며 밀라니아는 다람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거참, 신기하네. 키우는 덴 재능이 없으신데, 동물들은 밀라니아 님이 그냥 좋은가 봐요.]

문득 체라가 생각이 나 밀라니아는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자 다람쥐는 웃는 것처럼 삑삑대더니 숲속으로 사라진다.

작은 숲속 친구를 보낸 밀라니아는 머리를 숙이고 개구멍을 들여다보았다. 다리 하나가 부러진 상이 눈에 띌 뿐이다.

‘그가 말한 건 여기가 맞는데…….’

밀라니아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때는 말란도르의 저택 아래에 위치한 입구가 닫혀 있던 시점.

꺼지지 않는 화염의 바다에 밀라니아를 떨어뜨린 말란도르는 낄낄거리며 놀이의 대가랍시고 지껄인 적이 있었다.

[복수하고 싶으면 사냥꾼의 집에서 개구멍을 찾아! 난 그 건너편에 있을 테니까.]

그러더니 선심 쓰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내가 허락해 준 흑계인이 아니라면 사용할 수 없는 개구멍이지만 밀라니아 넌 특별히 허락해 줄게.]

물론 고맙기는커녕 짜증이 치밀었지만.

‘날 놀리기 위해 한 말이라 생각하여 진지하게 듣지는 않았다만 이 수밖에 떠오르는 방법이 없느니라.’

장난이기만 해 보거라, 말란도르.

만약 목을 집어넣었는데 먼지 쌓인 사냥꾼의 내부만 나타난다면, 안 그래도 화가 나는 상황에 참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밀라니아는 조심스럽게 몸을 숙였다.

하필이면 개구멍이 바닥에 붙어 있어서 몸을 한참 숙여야 했다.

꺼림칙한 마음을 접고 결심한 밀라니아는 개구멍 안쪽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 수치스러운 자세를 아무도 못 보는 게 다행이도다.’

감았던 눈을 뜨는 순간, 더운 열기가 얼굴에 훅 끼쳐 왔다.

자신의 기운이 영역을 떨치지 못하고 잦아드는 것이 느껴진다.

성공이다.

눈을 뜨자 그녀는 바위 사이에 끼어 있었다.

“허어, 악취미로고.”

투덜대며 몸을 온전히 빼내고 뒤를 돌아보았다.

몸이 끼었던 바위 사이는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맣다.

‘말란도르의 말대로라면 허락을 받지 않은 이에겐 그저 검은 틈에 지나지 않을 것이리라.’

돌아갈 때를 생각하여 바위의 위치를 잘 확인한 밀라니아는 조금 긴장이 되었다.

‘흑계의 존재는 알고 있지만 들어온 적은 처음인 것을.’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영원히 들어올 일 없었을 거다.

벌써부터 숨이 막혀 온다.

‘오래 있을 수는 없겠느니라.’

말란도르는 바로 만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염려를 품고 고개를 돌린 밀라니아는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우뚝 굳어졌다.

“……허어.”

밀라니아의 시선은 눈앞을 온통 물들이고 있는 검은 형체에 못 박혀 있었다.

가까스로 그 검은 형태가 사람, 또는 몬스터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언뜻 검은 형체로만 보였던 것이다.

그런 검은 형체들이 무려 수백에 달했다.

그러나 밀라니아가 놀란 건 기괴한 존재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이 아니었다.

“흐으으으…… 흐흐으으…….”

멀쩡히 서 있는 검은 형체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 모두는 검붉은 땅을 기어 다니며 기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고막을 긁어내리는 소리였다. 자세히 들어 보면 흐느끼는 것도 같았다.

해가 없는데도 검게 보이는 존재들.

밀라니아는 그들이 흑계인이라는 것을 간신히 눈치챘다.

‘내 흑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나, 저런 꼴을 하고 있다고는 듣지 못했느니.’

[흑계는 솔직히 재미없는 곳이지. 음식도 맛없고, 볼 것도 마땅치 않아. 그래도 거기서 나고 자란 애들은 재밌게 살거든. 자기들끼리 투닥대면서 살아간다고. 지켜보면 나름대로 귀여워.]

애정이 어린 눈으로 말란도르는 그렇게 말했다. 풍족하게 살기는 힘들겠지만, 살 만한 곳이라고.

[똑같아. 마물과 어울려 살긴 하지만, 여기에도 특이한 이종족들이 많잖아? 생김새는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인간이나 평범한 수인보다 괴이하기는 해도 평범해.]

‘그러나 말란도르, 누가 봐도 그들을 멀쩡한 생명으로 여기지 못할 게다.’

밀라니아의 시선이 닿은 곳에선 흑계인들이 애벌레처럼 땅에 붙어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흑계인들은 땅에서 새어 나오는 검은 기운을 움켜쥐려고 안간힘을 쓴다.

손에 가두었다 싶은 검은 기운은 가둬지지 못하고 허무히 흩어졌다.

“흐어어어! 흐어어어어!”

비명 같은 울음소리를 흘리며 거대한 마물이 기운을 품 안에 가두었다.

검은 기운은 다시 흩어지고, 마물은 다시금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이상한 모습이 반복되었고, 그렇게 하고 있는 건 한둘이 아니었다.

사방이 똑같았다.

광기가 휘몰아치고 있다.

오싹, 소름이 끼친 밀라니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밀라니아는 검붉은 하늘을 지나 멀리 시선을 던졌다.

흑계의 불길한 하늘을 꿰뚫을 듯 뾰족한 탑이 외로이 서 있었다.

‘내 의문의 답은 네게 물으마, 말란도르.’

울면서 꿈틀대는 흑계인들을 뒤로 하고 밀라니아는 탑으로 걸음을 옮겼다.

휘이이이잉―.

피부가 따끔거리는 건조한 바람이 몰아치는 구간을 지나 탑 안으로 들어가자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은 계단이 드러났다.

체력이 약한 밀라니아는 족히 수천 개는 되어 보이는 계단을 오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빗자루를 타고 수월히 날아간 밀라니아는 탑의 상층부 문 앞을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갔다.

웬만한 장정의 신장의 두 배 높이. 너비는 성인 셋이 팔을 펼친 듯한 큰 문은 담쟁이 넝쿨처럼 기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밀라니아는 침잠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에 있었느냐.”

말란도르의 기운을 제법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그녀는, 이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길한 죽음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진득한 시럽처럼 끈끈한 흑계의 대기 사이로 말란도르의 기운이 찌를 듯 강하게 느껴진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간 밀라니아는 강력한 죽음의 기운에 굳어 가는 손을 풀며 신중히 걸음을 옮겼다.

방은 매우 넓었지만 금세 말란도르를 찾을 수 있었다.

“…….”

그는 침대 위에 옆으로 누워 있는 채였다.

약간 구부러진 몸에선 방황하는 방랑자에게서나 날 법한 건조하고 쓸쓸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발랄한 말란도르를 기억하고 있는 밀라니아는 그런 그가 낯설어 걸음을 멈추고 침대 위를 주시했다.

말란도르는 지쳐 보였다. 누가 봐도.

그를 잘 알고 있는 밀라니아가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지쳐 있구나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만지면 서걱거리는 소리가 날 듯하이.’

밀라니아는 머뭇거리면서 그의 얼굴을 시선으로 훑었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표정 없이 눈 감은 얼굴은 말라붙은 가면처럼 조용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노쇠한 노인이 연상되어 밀라니아는 정말로 당황하고 말았다.

말란도르가 누구던가.

지닌 힘이 강력하여 늘 여유로운 웃음기가 가득했던 그였다.

젊은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를 한 손가락으로 놀려 먹을 정도로 정력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껍데기만 남아 버린 것 같다.

‘으음.’

밀라니아는 왜인지 소리를 낼 수 없어 계속해서 망설였다.

‘이 탑에서 느껴지는 생명체의 기운은 전무하도다.’

오직 말란도르밖에는.

말란도르가 취미 삼아 데리고 놀던 그의 수많은 노예들도 보이지 않는다.

이 넓은 공간에 존재하는 건 말란도르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홀로 살아온 노인처럼 축 처진 말란도르의 외로운 어깨가 눈에 띄어, 밀라니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주인을 잃어버려 폐허가 된 탑. 풍화되어 바랜 탑의 주인, 말란도르.

말란도르는 탑을 관리하는 일 따위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양 무기력했다.

‘심각한지고.’

기묘한 흑계의 상황도 그렇고 눈앞의 말란도르도 그렇고.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난 게지.’

마음이 흔들려서인지 자연 동화술이 깨져 버렸다.

밀라니아의 신형이 흔들리며 틈으로부터 숲의 향기처럼 청량한 기운이 새어 나갔다.

당황한 밀라니아가 얼른 자연 동화술을 새로 펼쳤다.

“…….”

말란도르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오래되어 바래진 붉은빛 스피넬의 탁한 빛처럼 쇠락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누가…… 들어왔느냐.”

느릿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침입자를 감지했는데도 아무 생각 없어 보였다.

돌연 말란도르가 비소를 머금었다.

“그놈인가.”

“…….”

“아예 날 죽여 버리려고 온 거야?”

돌아오는 반응을 확인하려는 듯 잠시 침묵한 말란도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데.”

“…….”

“이 기운은…….”

서서히, 말란도르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당황한 사람처럼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란도르가 몸을 일으키고 밀라니아가 자연 동화술을 펼치고 있는 부근에 시선을 던졌다.

홍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럴 리가 없지만.”

“…….”

망설인 말란도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밀라니아?”

기대가 배반당할까 봐 두렵다는 듯 조심스럽게 흘러나온 이름.

이름의 주인 밀라니아는 어째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한참 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흔들렸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눈빛이 다시 탁해진 말란도르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

“…….”

“아아, 드디어 내가 미쳐가나 봐, 밀라니아.”

자신을 알아채고 한 말인 줄 알았던 밀라니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말란도르를 보며 마음을 놓고 혀를 찼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말란도르.’

기뻐했다가 실망했다가 혼잣말을 했다가.

못 봐주겠다.

밀라니아는 자연 동화술을 풀었다.

스으으―.

아무것도 없던 벽돌 앞에 밀라니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침침한 주변 풍경과 확연히 다른 색깔에 침대에 누우려던 말란도르는 딱딱하게 굳어졌다.

끔뻑끔뻑, 말없이 눈을 깜박이는 꼴이 더없이 멍청해 보여 밀라니아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정말 미친 것이야? 오랜만에 보는데 이 무슨 한심한 꼴인 게야.”

그래도 말이 없다.

“쯧쯧.”

혀를 찬 밀라니아를 멍하니 쳐다보는 말란도르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격정에 차 해일처럼 일렁이는 눈빛을 마주한 밀라니아는 괜히 머쓱하여 헛기침을 했다.

‘죽었다고 생각한 내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하도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란도르와 ‘살아 있었냐.’, ‘살아 있었다.’, ‘어떻게 지냈냐.’, ‘잘 지냈다.’, 이런 말을 나눌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낯간지러웠다.

말란도르와는 악우, 좋게 말해야 친우로 표현할 수 있는 사이.

낯 뜨거운 광경을 연출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그녀는 부러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밀라니아?”

이제 좀 정신이 들었는지 말란도르가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어허, 시간이 없느니라. 바깥세상이랑 너한테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설명을…….”

“밀라니아!”

시간 없다니까. 말이 끊긴 밀라니아가 한 소리를 하려는 찰나, 무지막지한 힘으로 끌어당겨졌다.

빠르게 뛰쳐나온 말란도르에게 끌어안긴 밀라니아는 ‘이 반응은 과하느니라.’ 하여 인상을 쓰는데, 이어진 말란도르의 반응에 힘을 풀었다.

“밀라니아…….”

울음기가 진득하게 스민 목소리.

말란도르가 홱, 어깨를 붙잡고 시선을 마주하자 밀라니아는 ‘과장된 반응은 사양할 것이니라.’는 말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살아 있었어……?”

“어흠, 그렇게 됐느니라.”

성의없는 답변에도 말란도르는 흔들리는 눈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나는 밀라니아가 죽은 줄 알고, 나를 용서하지 못했는데. 다 지겨워져서 죽고 싶었는데…….”

돌연 그가 밀라니아를 안고 훌쩍거렸다.

어깨가 젖어드는 것이 느껴져서, 그녀는 난감하게 눈을 깜박였다.

“안 죽어서 다행이야. 어차피 난 죽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죽었으면 밀라니아에에 키스하지도 못할 거 아니야.”

“뭐라? 이 몸은 너랑 키스할 생각 없느니라.”

“흐응, 듣기 싫어…….”

언제나 그렇듯이 불리한 말은 무시한 말란도르는 훌쩍이면서 정신없이 말했다.

그날, 라즈흘 평원에서 말란도르는 그녀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한낱 인간들에게 당할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녀는 아덴샤의 거울 조각에 심장을 꿰뚫렸고, 죽었고, 사라졌다.

“난 네가 먼지로 사라졌다고 생각했어. 설렁설렁 임했던 내가 용서할 수 없어졌어…….”

말란도르는 실의에 빠졌다.

“하지만 절망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지. 그레칸은 정말 미친놈처럼 굴었고…… 난 이곳에 틀어박혔어. 이렇게 무기력한 건 여러 이유가 겹쳐서.”

밀라니아가 죽었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그 상태에서 그레칸과 싸워서, 이곳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중복되는 말이 많아 알아듣기는 힘들지만 정리하자면 이렇게 되는구먼.’

말을 끝마칠 즈음 말란도르도 눈물을 그친 상태였다.

변하긴 했어도 기본적인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았는지 밀라니아를 찬찬히 살펴보곤 미간을 좁혔다.

“근데 밀라니아는 왜 그렇게 약골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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