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48)

26

조우

대대로 르안나 제국의 황후가 사용했던 크리스털 방은 밀라니아의 차지가 되었다.

그레칸은 밀라니아가 얼른 그 아름다운 눈을 드러내어 자신을 바라봐 주길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그레칸이 그녀를 데리고 귀환한지 일주일이 지나도, 알음알음 그녀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레칸은 반란 종자들을 제거하는 일도 뒤로하고 밀라니아의 곁에 붙어 있었다.

그녀의 옆에 의자를 끌어와 앉아 재미난 거라도 본다는 양 그녀를 구경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그것이 기꺼워 활짝 웃었다.

이렇게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그 자연스럽지 않은 통증도 즐겁게 여길 만큼 그레칸은 행복했다.

하지만 밀라니아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상황은 달갑지 않았다.

자는 것뿐이라고, 이런 상황에서 음식을 먹이면 목이 막혀 죽을 수 있다는 거북 일족의 충언이 아니었으면 진즉 뭐라도 먹였을 터였다.

다행히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밀라니아는 변하지 않았다. 잠든 채로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다.

“언제까지 잠만 잘 거야, 밀라니아.”

불만스럽게 칭얼거린 그레칸은 그녀가 눈을 뜬 후 불편하게 느끼는 게 하나도 없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레칸은 밀라니아를 살뜰히 보살폈다.

하인들이 하겠다는 걸 매섭게 내치고 그녀를 손수 씻겼으며, 매일 볕이 잘 드는 시간마다 그녀를 품에 안고 햇볕을 쏘였다.

다른 곳은 건물이 무너지고 땅이 황폐해졌다 하지만 황궁의 화원만큼은 건재했다.

만발한 꽃과 나무에서 밀라니아가 생각나 그대로 두었던 그때의 결정이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하칸!”

뒤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레칸은 상관하지 않았다.

“부르셨어요, 주인님?”

답변은 지체 없이 돌아왔다.

하늘에서 내려온 하칸은 부름에 기쁘게 응답하고 그레칸의 뒤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화원을, 아니, 숲을 조성해라.”

그레칸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던 하칸이지만 이 뜻밖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잔혹한 파괴의 왕으로 군림하던 그의 입에서 화원이라니? 꽃이라니?

그러나 오랜 시간 그레칸의 바로 옆에서 죽지 않고 목숨을 보전한 그답게 더는 늦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바로 돌아가려던 그는 그레칸의 품 안에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저 여자가 소문의 그 여자구나!’

그는 일처리가 빠르고 눈치도 있는 편이었으나 호기심을 억누르지는 못했다.

하이로드가 데려온 여자.

그녀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는데 그의 심복인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 약간 자존심이 상한 것도 있었다.

“한데 그분은 누구…….”

하칸은 긴장했다.

‘괜한 질문을 한 건가?’

그레칸이 인간을 억압하고 억압받던 이종족을 등용하긴 했으나 딱히 이종족이 좋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는 걸, 하칸은 알고 있었다.

이 거대한 황궁을 유지하기 위해선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났다면 우리들조차 파멸의 마수에 휩쓸렸을지 몰라. 나라고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들지 않아. 하지만 그러지 않게 할 거야. 내가 더 필요한 자가 되면, 언제까지고 옆에 두시고 쓰시겠지.’

다른 수인들보다야 신임받고 있는 스스로를 믿으며 하칸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자신은 그의 손발로써, 말하지 않아도 행동하는 쓰기 편한 도구였다.

“알고 싶어?”

하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쓸데없는 말을 한다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도리어 질문하신다.

‘이 모습부터가 바로 나를 신임한다는 뜻이 아니겠어?’

하칸은 그렇다고 공손히 대꾸했다.

그레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연인.”

자랑하는 것처럼 들리는 건 착각일까?

하칸은 당황해서 곧바로 대답을 못 했다가 억지로 큰 웃음을 띠웠다.

“반려를 맞으셨군요. 경하드려요, 주인님.”

머릿속은 공황 상태였지만 다행히 말은 잘 나왔다.

그레칸은 다시 품속의 여자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저는 신경도 쓰지 않는 그에게 더는 말을 붙일 수 없다고 판단한 하칸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설마 그 여자인가?’

밤마다 고통에 겨워하던 그레칸이 지치지도 않고 부르짖던 그 이름.

‘밀라니아?’

백 년 전 죽었다는 그 여자일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아예 아니리고 단정할 수도 없다.

오늘의 상황을 머릿속에 각인시킨 하칸은 완전히 물러났다.

홀로 남은 그레칸은 아무 방해 없이 밀라니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드러난 피부에 보드라운 햇빛을 쬐였다.

잔잔한 평화와 극심한 행복. 또다시 심장이 아파 왔다.

그레칸의 그런 모습은 화원을 지나치던 몇몇 하인들의 눈에 띠었다.

아무 움직임 없는 여자를 소중하게 대하는 모습을 목격한 하인들은 입을 다물었지만 말이 새어 나가지 않을 리 없었다.

은밀하게 퍼지던 소문에 한 가지가 더해졌다.

“로드께서 시체를 사랑하고 계신다나 봐.”

“인형이라는 말이 있던데?”

“어느 쪽이든 큰일이군, 큰일이야.”

* * *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다.

천천히 눈을 뜬 밀라니아는 지나치게 환한 시야에 눈을 깜박였다.

빛에 적응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밀라니아는 한참 말이 없다가, 눈을 굴려 몸을 내려다보았다. 손도 둘러보았다.

‘무엇인고?’

자신의 몸인데도 자신의 것 같지가 않다.

이유를 골몰하던 밀라니아는, 그녀가 기억하는 것보다 마른 느낌이 들어서 그런가 보다고 결론을 내렸다.

피죽 하나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깡마른 손이었다.

‘아, 그래서였느니.’

의문이 풀려 상쾌해진 그녀는 미소를 짓다 입을 꽉 다물었다.

좋아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뭔가 이상하구먼.’

그녀는 재차 이 찝찝한 느낌의 원인이 무엇인지 골몰했다.

눈을 감고 몸 안을 관조하고, 이내 경악했다.

‘이게 무엇인고?’

원인은 연약한 신체뿐만이 아니었다. 턱없이 적은 체내 마력양이 진정한 이유였다.

잠을 잤을 뿐인데 누군가 뭔가를 훔쳐 간 상황에 처한 듯했다.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밀라니아는 허허, 헛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자신이 멍청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꿈을 꾼 것 같은데, 희미한 영상만 희끄무레 떠오를 뿐이었다.

답답하게.

‘꿈을 꾼 건 확실한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는구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추락하는 감각이 생생했다.

‘아직도 떨어지고 있는 것 같으니.’

이번에는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밀라니아는 또다시 이유를 골몰해 보았다.

그러기 위해 기억을 더듬었다.

가장 최근의 기억은, 그레칸이 넘긴 붉은 꽃 용액을 삼키고 정신이 몽롱해질 때였다. 그리고 태풍이 불었는데…….

‘옳거니, 그래서였구먼!’

이 기이한 감각은 태풍에 휘말려 떨어졌던 때의 느낌일 것이다.

완전히 의문이 풀린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만족스럽다.

‘그나저나 이 몸이 어떻게 숨을 쉬고 있는 것인고?’

호흡은 살아 있는 생명의 특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 있다는 건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건가? 혹시 그레칸의 붉은 꽃이 효과를 본 건가?

“맙소사.”

밀라니아는 당혹하며 벌떡 일어났다. 숨소리가 가팔라졌다.

‘무엇인고?’

밀라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자신의 숨소리가 아니었다.

의문을 품고 눈을 깜박인 밀라니아는 마침내 누군가 침대 옆에 바싹 붙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처음, 밀라니아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그 아이와 연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에서보다 깊어지고, 성숙해진 한편 어딘지 어두워진 남자의 눈.

밀라니아의 낯빛이 흐려졌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약간 미심쩍은 투로.

“그레칸?”

하아, 짙고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격정을 참는 듯 하릴없이 흔들리는 목소리. 말을, 또는 감정을 삼키는 듯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일어났네.”

그녀의 하얀 손 위로 뜨거운 숨이 흩어졌다.

밀라니아는 자신의 손등을 한 번에 덮어 버리는 남자의 큰 손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의 손등에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거친 흉터들이 여기저기 나 있었다.

“배고프지?”

일상적인 말. 허나 지금 나올 말은 아니다.

밀라니아는 궁금증으로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아 얼굴을 찌푸렸다.

눈앞의 ‘그레칸’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여기는 어디인고?”

“……내 집.”

“네 집? 여긴 늑대족의 영역이 아닌데.”

밀라니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닌 게 분명하군. 말란도르는 어디 갔지? 르베리안즈랑, 앨리지도. 앨리지는 무사하느냐? 내 진원의 피를 마셨으니 병은 나았을 터이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

“그만, 밀라니아.”

정신없이 말을 늘어놓았던 밀라니아가 뚝 멈추었다.

그레칸이 서운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밀라니아는 의아했다.

‘그런 말이라니?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냐.’

그러나 그레칸이 정말로 싫은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어 그녀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었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

“상상도 못 할 거야. 밀라니아가 눈을 뜨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레칸의 까만 눈이 축축해졌다.

약한 개체처럼 울 것 같은 얼굴이지만 역설적으로 수컷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어울리지 않는 약한 눈빛. 꼭 억지로 약한 척하는 맹수처럼.

밀라니아는 그 모습에 약간의 익숙함과, 그 느낌을 덮어 버리는 이질감을 느꼈다.

그레칸의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떡 벌어진 어깨와 한층 거대해진 몸.

자신이 사육하고 영면에 들기 전까지 보살폈던 새끼 늑대는 완연한 성체 늑대가 되어 있었다.

‘전성기 때의 발칸보다 강대한 기운이구나.’

이 정도는 예상한 일이다.

궁금한 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영면에 든 후 하루 이틀이 지난 게 아닌 것 같았다.

거의 울 것 같은 그레칸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에게 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침착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다행히 금세 평정심을 찾았다.

“미안하지만, 그래도 들어야겠구나. 어떻게 된 것이냐?”

그레칸을 낯설게 느꼈던 탓인지 밀라니아의 말투는 예전과 달리 약간 어색하고 딱딱했다.

자신의 말투를 깨닫지 못한 밀라니아의 금빛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뭘?”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되물었다.

어린 마녀의 뽀뽀에도 펄펄 뛰었던 과거의 그레칸이 생각나서, 밀라니아는 다시금 괴리감을 느꼈다.

‘네가 너무 낯설게 느껴지는구나.’

어딘지 르베리안즈의 능숙한 면모가 엿보이는 그레칸의 행동이 어색해진 밀라니아는 얼른 손을 빼고는 한발 늦게 대꾸했다.

“죽었어야 할 내가 왜 이렇게 약해진 상태로 존재하는 거냐고 묻는 거다.”

그레칸은 텅 빈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아무렇지 않게 밀라니아의 손 하나를 다시 가져갔다.

밀라니아는 그의 손길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대답이 중요했으므로 사소한 문제는 덮고, 그레칸의 입술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래. 존재가 거의 사라질 뻔했지. 난 정말로, 밀라니아가 죽었다고 생각했어. 당신이 없는데 내가 죽지 않은 게 이상하더라고.”

‘조금만 더 늦었으면 나도 죽었을지 몰라.’ 하고 중얼거리는 그레칸은 아주 끔찍한 일이었다는 듯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겼다.

그늘진 얼굴에서 형언할 수 없는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다.

‘인상이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느니라.’

밀라니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전생의 그레칸과 비교하더라도 훨씬 음습한 기색이 그레칸 위로 언뜻언뜻 드러나고 있었다.

천성적으로 평화로움을 사랑하는 밀라니아는 본능적으로 불쾌해졌다.

그녀의 긴장감을 기민하게 눈치챈 그레칸은 금세 표정을 바꾸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분홍빛 입술이 길게 찢어진 듯한 그 미소는 밀라니아를 전혀 안심시키지 못했다.

몇 년 동안 웃지 않은 사람 같이 어색한 미소였다.

“한편으론 밀라니아가 이대로 사라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나 봐.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

“나 잘했지? 칭찬해 줘.”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비볐다.

당황한 밀라니아는 손가락을 오므렸다.

상황에 맞지 않게, 아주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레칸이 떼를 쓰고, 쫓아다니고, 뚱해지고 그랬던 예전과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레칸이 자아내는 미묘한 분위기에 알게 모르게 긴장했던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전과 달리 하나하나, 신경에 거슬리지 않는 게 없느니.’

그래도 현 상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아까부터 가슴이 콱 막힌 것처럼 답답하여, 생각에 골몰한 밀라니아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갔다.

“붉은 꽃……. 그것 때문인가?”

“…….”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이냐.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건 붉은 꽃밖에 없었다.

그 저주받을 귀물이 죽어야 할 자신을 되살려 냈다.

그러자 생각이 미치는 건 저주받은 붉은 꽃의 대가.

마음이 다소 조급해져서 그녀는 더 심란해졌다.

“어디 가는 거야?”

밀라니아가 이불을 걷어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자, 그레칸이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밀라니아는 살짝 아플 정도로 잡힌 손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레칸.”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레칸이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느낌상,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으니라. 그래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레칸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칭찬을 바랐던 어린 그레칸에게 했던 것처럼.

앳되었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처음 본 사이라면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어도, 어릴 때의 그레칸이 조금은 남아 있는지 그는 눈을 감고 목을 으르릉 울렸다.

기분이 좋다는 표시.

마음을 놓은 밀라니아는 본격 ‘다 큰 늑대 그레칸 달래기’를 시작했다.

“도와주겠느냐? 내 할 일을 마쳐야 하느니.”

“할 일?”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고 마무리가 안 됐다면 끝맺음을 지어야지.”

밀라니아의 손길을 즐기고 있던 그레칸이 눈을 번쩍 떴다.

“쉽게 말하면 죽고 싶다는 거잖아.”

“…….”

“왜?”

그가 나직이 물었다. 베일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당황한 밀라니아는 응답하지 못했다.

“왜 죽기를 그렇게 바라는 거야.”

불만스러운 아이 같은 말.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그것이 순리니까.”

“궤변이야. 그게 세상의 순리일지언정, 죽고 싶어 하는 생명은 없어.”

단호한 말에 밀라니아는 스스럼없이 대꾸했다.

“나는 그러느니.”

“그건…….”

그레칸이 머뭇거렸다. 그녀는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지쳐서 그래?”

예상 밖의 질문.

“뭐?”

“더는 살고 싶지 않은 건 그 이유밖에 없지. 지쳐서. 그래서 삶에 욕심이 없는 거야. 그렇지?”

그레칸이 씹어뱉듯 다소 거칠게 말하자 밀라니아는 굳어졌다.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그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건, 내가 밀라니아를…… 몇 번이고 다치게 해서? 그래서야?”

“…….”

“내가 당신을, 그렇게 많이…… 죽게 해서?”

그레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밀라니아는 놀라기도 했고 혼란스럽기도 해서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그건 어떻게 알았느냐.”

몇 번에 걸친 전생과 관련된 일은 이제까지 밀라니아만 기억하는 일이었다.

그레칸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태풍에 휘둘리고 나니 다 생각이 나던 걸.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까?”

“아니, 됐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라.”

그레칸은 침묵을 지켰다.

밀라니아는 이불을 옆으로 젖히고 몸을 일으켜 그레칸을 흘끗했다.

저렇게 풀 죽은 얼굴을 보니 마음이 또 좋지 않았다.

“그건 너희와 지내면서 다 잊어버렸느니라. 그러니 너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지 말거라.”

“…….”

“나는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하는 존재이니라.”

손에 가해지는 힘이 거세졌다. 밀라니아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그레칸이라면, 결국 물러날 테니까.

그녀의 생각대로 그레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밀라니아는 조심스럽게 그에게서 손을 빼내고 몸을 일으켰다.

다른 이들의 안위가 궁금하다.

‘말란도르는 아직 마녀숲의 경계에있을는지.’

자신은 분명히 영면에 들었는데 이렇게 살아 있다.

전대 대마녀가 죽어야 새로운 대마녀가 태어나는 마녀성이 어떤 상황일지, 그녀로서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끄응. 결국 직접 보고 오는 수밖에 없겠느니. 여력이 된다면 르베리안즈와 앨리지도 보고 와야겠구나.’

슥, 그레칸을 지나치려는 찰나였다.

손목이 잡혔다.

“……?”

그레칸이 천천히 일어났다.

밀라니아는 자신을 온통 덮어버리는 검은 그림자에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났다.

‘언제 이렇게 키가 큰 것인고?’

과거에도 큰 편이었는데 그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것 같았다.

그레칸의 뒤에 서면 자신의 모습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으리라.

놀라울 따름이다.

그레칸이 한 발 다가왔다. 밀라니아는 그만큼 물러서고, 그런 스스로의 반응에 아연실색했다.

‘내가 왜?’

그레칸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대고 지그시 눌렀다.

그녀는 저항하려 했으나 힘을 주기도 전에 다리가 꺾였다.

그다지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무서운 힘이었다.

그레칸은 억지로 침대에 앉힌 밀라니아를 내려다보았다.

깊어진 눈 아래에 그늘이 지자, 그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

그녀가 굳은 얼굴로 화내려는 순간, 그레칸의 굳게 닫힌 입이 열렸다.

“또 날 버리려는 거야?”

“무슨 소리. 내가 널 왜 버리느냐?”

대번에 부정했지만 그레칸은 고개를 한 번 강하게 저었다.

“아니. 날 버리려는 거야. 밀라니아는 나 따위,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당신에게 중요한 건 결국 마녀성, 아니 대륙의 평온과…….”

그레칸의 까만 눈이 한순간 차갑게 변했다.

“당신의 영면을 위해서니까.”

만약 이런 말을 르베리안즈나 말란도르가 했다면 놀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레칸이라서, 밀라니아의 대처는 다소 굼떴다.

“원하는 건 뭐든 당신 발밑 아래 바칠 테니.”

소리가 귓가를 감싼다.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고.

“내 아이를 낳아 줘.”

금빛 눈에 의문이 번졌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이냐?’

그레칸의 말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짙은 눈빛을 보는 순간 밀라니아는 그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즉시 일어나려는 그녀의 행동은 그레칸이 힘을 주자 허무하게 무산되었다.

미치고 팔짝 뛴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

기가 막혔으나 밀라니아는 가까스로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진정하거라, 그레칸.”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레칸은 표정 변화 없이 예의 그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였다.

“인간들이 그러기를, 아이를 낳은 여자는 도망가지 못한다지.”

밀라니아의 입술이 벌어졌다.

‘진심이구나, 지금.’

평온했던 그녀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언뜻 불쌍해 보이지만 실은 태연한 얼굴로 그레칸은 중얼거렸다.

“밀라니아를 붙잡아 둘 수 있다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침묵의 술.’

그녀는 벼락같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레칸에게 마법을 쓰려던 그녀의 노력은 그가 손을 휘저음으로써 허무하게 무산되었다.

밀라니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렇게 쉽게 막아 내?’

어깨를 털어낸 그레칸이 놀라 굳어진 그녀를 보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밀라니아.”

자신의 마법이 그레칸에게 일말의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는 사실.

충격받은 밀라니아는 문을 여는 그레칸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눈이 마주쳤다.

성숙해져 한층 중후해진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가려고 해도 소용없어. 약해진 지금의 밀라니아로서는 혼자 나가지 못할 테니.”

개소리를 하는 주제에 말씨는 몹시도 다정했다.

밀라니아의 눈이 매섭에 뜨였다.

“허어, 정말 미친 것이냐?”

기어코 험한 말이 터져 나왔다. 자중해야 마땅할 그레칸은 도리어 눈웃음을 쳤다.

“그리웠어, 그 말투. 날 편하게 여겨서 하는 말이잖아.”

기가 막혀서 그녀는 입만 뻐끔거렸다.

“사랑해, 밀라니아.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낮은 목소리로, 차분한 그레칸은 그답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그가 아니었다.

‘얘가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돌아버린 것이냐?’

혹시나 싶어서 그녀는 닫힌 문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돌려보았다.

꼼짝도 하지 않는다.

황당함으로 물든 얼굴로 밀라니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로다.”

한참을 문고리와 씨름했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제풀에 지친 밀라니아는 시들시들하니 침대로 돌아왔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음에도 충격이 중첩된 탓인지 그녀는 금세 수마에 빠져들었다.

* * *

밀라니아는 상황 파악에 나섰다.

시중들러 오는 하인들은 그녀가 뭘 물어보든 성심성의껏 대꾸했다.

“그레칸은 왜 저렇게 되었누?”

위와 같이 은근한 질문에는 곤란한 기색으로 입을 꾹 다물었지만.

‘그래도 대략적으로나마 상황은 알겠느니.’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밀라니아는 놀라서 멍해졌다.

‘100년이 지난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세상이 그렇게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이 방에 들어온 하인 중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수인뿐이다.

황당하다. 이 단어 이상으로 그녀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녀가 멍하니 하인을 보고 있자 그 모습을 오해했는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아차, 싶어 그녀는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넌 언제부터 여기서 일했느냐?”

원래 약한 이들에게 너그러운 편이기도 했고, 눈앞의 하인이 하인들 중 설명을 제일 잘했기에 겁먹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인은 다소 안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성체가 되고 나서, 하칸 님에게 발탁되었습니다. 손재주가 좋아 시키는 일은 뭐든 잘하겠다고요.”

“하칸?”

고개를 갸웃하자 하인이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주인님을 곁에서 보필하는 심복입니다.”

“인간은 아니겠고?”

“당연하지요. 조인족이세요. 대부분의 하인들을 통솔하시고 모르는 일이 없으시죠. 다들 그분의 말을 잘 들어야 해요. 아, 물론 아가씨는 예외입니다! 주인님께서 귀애하시니 하칸 님도 아가씨를 따를 거예요.”

‘아가씨…….’

전에도, 그 전에도 듣지 않았고 들을 리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호칭에 밀라니아는 심란해졌다.

“주인님은 아주 무섭지만 대단한 분이세요.”

갑자기 왜 거기 꽂혔는지 하인은 그레칸의 찬양을 늘어놓았다.

“무섭지만 정말 대단히 잘생기셨고, 무섭지만 때리거나 이런 것도 없으세요.”

“…….”

“쉽게 죽이시기는 하지만…….”

밝은 얼굴로 주절거렸던 하인이 말꼬리를 흐리자 밀라니아는 혀를 찼다.

그간 그레칸이 무슨 미치광이 늑대 짓을 했는지, 여기 하인들은 하나같이 그레칸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밀라니아로서는 그레칸이 밤마다 하인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게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다행히도 그레칸은 꿀단지를 숨겨 둔 곰처럼 대부분 그녀의 방에 붙어 있어 의심은 종식되었다.

결론은 하나다.

‘애가 아주 이상해졌나 보구나.’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

밀라니아의 머릿속에 남은 그레칸은 성가시지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신경이 쓰이고 귀여운 아이였지, 이들이 벌벌 떠는 것처럼 무서운 존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레칸의 찬양을 듣는 게 거슬려서 그녀는 적당히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그만 나가 보려무나.”

“네, 모시는 시간 영롱한 거미줄의 신에 대고 영광이었습니다!”

괴상한 인삿말을 남기고 하인이 나갔다.

밀라니아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그녀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동안 세상은 땅과 하늘이 뒤바뀌었다 말해도 상관없을 만큼 완전히 변해 버렸다.

대충 이 세상의 상황에 대해서는 알게 되었지만 마음이 답답했다.

‘정작 중요한 건 알아내지 못했으이.’

예를 들어 박쥐족과 흑계, 마녀족과 요정족에 대해서가 그렇다.

[1대륙으로 쫓겨났다고 알고 있어요.]

[영역이 축소되었다고 하던데요?]

[흑계요? 들어 보지 못했는데요.]

영 소득이 없다.

‘결국 1대륙에 직접 가 봐야 한다는 건데.’

그레칸을 설득해 볼까?

아서라.

고개를 저었다. 하는 행동을 보면 온갖 딴소리를 꺼낼 것 같으니까.

‘새끼일 때도 비위를 맞춰 줬는데 커서도 그래야 한다니.’

허탈한 감상이 몰려왔지만 마력이 미약한 상황이니 어쩔 수가 없다.

아니, 사실 마력이 온전해도 그레칸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럴 수가 있는 것이야? 전생보다 더 괴물이 됐느니라.’

단신으로 모든 강력한 존재들을 무릎 꿇리고 정상에 섰다는 믿지 못할 말도 들었다.

게다가 지금의 인간 황제는 그레칸이 본보기용으로 세워 둔 허수아비 같은 황제라고 한다.

[무슨 원한이 있으신지는 모르겠지만 황족들을 아주 싫어하세요. 황제를 세워 둔 것도 명맥을 잇게 하려는 것보다는 괴롭히려는 의도이실 거예요.]

하인은 자신 없는 얼굴로 그리 말했었다.

[아주 예전에 인간 황족들이 주인님이 아끼는 여자를 괴롭혀서 그랬다는 말도 있지만 정확하게는 몰라요. 주인님께 간 크게 물어볼 자가 아무도 없으니까요.]

밀라니아는 심란한 한숨을 쉬었다.

하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레칸의 이 모든 행동은 자신 때문이라는 걸까?

‘그렇게 나를 생각하는 놈이 이렇게 굴어? 고얀…….’

그레칸이 착잡하면서 안쓰럽다가도 부아가 치밀었다.

심란한 가슴을 다독이며 그녀가 침대 위를 뒹굴거리고 있을 때였다.

침대 끝까지 간 밀라니아가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달칵.

밀라니아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침대에 엎드린 상태로 그녀는 고개를 슬쩍 돌렸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그레칸을 보자 표정이 시큰둥해졌다.

속으로는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 당장 나를 밖으로 내보내라 등등 할 말이 많았지만 일단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그레칸은 밀라니아가 그러거나 말거나 의자에 앉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이 뺨으로 느껴진다.

태연한 척했던 밀라니아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참 심란하게 구는구먼.’

그레칸은 때때로, 아니 거의 대부분 이렇게 불쑥불쑥 들어왔다.

딱히 무슨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전용 의자에 앉아 쳐다보고 있기만 했다. 간혹 눈빛이 흔들리기도 한다.

밀라니아는 아주 소중한 걸 본다는 듯한 그 시선이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할 말 없으면 가거라.”

냉랭한 목소리에 그레칸의 기운이 시무룩해졌다.

“아직 화가 안 풀렸네.”

“…….”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기억해 줘. 기다렸어. 밀라니아가 다시 내게 올 때까지……. 기다려 왔어.”

“…….”

“밀라니아가 위험해질 일은 내가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그게 밀라니아여도 마찬가지야.”

“…….”

“……답답할까 봐, 문지기들에게 산책 시간을 일러뒀어. 시간에 맞춰 산책하면 될 거야.”

밀라니아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한숨을 쉰 그레칸은 머뭇거리며 일어나 느린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 * *

“내가 기르는 다람쥐도 아니고, 산책 시간이 따로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취급이란 말이야.”

허어, 허어 고개를 젓고 혀를 차고 탄식을 뱉기는 했지만 방 안에 있는 게 지겨워진 밀라니아는 한 가지 결심을 하고 크리스털 방을 빠져나왔다.

어쩔 수 없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레칸이 정한 시간대로 산책을 하는 게 못마땅해서 그녀의 불평불만은 끊임이 없었다.

제법 잘 꾸며진 뒤뜰에 도착하고 나서야 불평불만을 멈춘 밀라니아는 뒤뜰을 주욱 둘러보았다.

동물과 달리 식물은 소리 내지 않는다고 알려졌으나 실은 동물보다 더한 수다쟁이였다.

가볍게 부는 바람에도, 불어오는 꽃향기에도 오만 가지 얘기를 하는 식물들의 재잘거림.

밀라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사 온 곳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평가밖에 없구나. 화원으로 꾸며진 지 얼마 안 된 것 같으이.”

식물들의 수다는 끊어지지 않았다.

{목말라. 목말라요. 물은 언제 주는 거야. 비도 안 오고 물도 안 주고, 이럴 거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놔.}

{나를 이렇게 대충 꽂아 넣으면 어떡해. 뿌리가 자꾸 들썩거리잖아.}

{아우, 이놈의 진드기! 가려워 죽겠네, 정말.}

{뿌리 아래 두더지가 살고 있어. 뿌리를 자꾸 갉아먹는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밀라니아는 얼굴을 가볍게 찌푸렸다.

“화원 관리사가 썩 세심한 인사는 아닌 것 같구먼.”

기분 전환하러 온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기만 할 것 같았다.

결국 밀라니아는 다소의 시간을 할애하여 식물들의 불만을 해소시켜 주었다.

시종을 시켜 대량의 물을 가져와 목마른 식물들에게 흘려주고, 들썩거리는 나무는 꾹꾹 눌러 줬으며 진드기는 퇴치시키고 두더지는 타협하여 더는 뿌리를 갉아먹지 않도록 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마녀님.}

{이제 살 것 같아요. 자주 와 주세요.}

{저희는 조용히 있을 테니 편히 쉬세요.}

불만을 가라앉힌 밀라니아는 뒤뜰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크기가 큰 만큼 제일 생기가 넘치는 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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