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6/48)

25

잊혀진 대마녀

백 년 전에 재상의 위치에 이른 자가 사용했다던 화려한 고급 저택은 황궁의 현 실세가 사용하고 있었다.

“반란 종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날뛰고 있네요.”

저택의 테라스에는 소소한 티타임이 펼쳐져 있었다.

노인처럼 하얀 머리에 청년의 얼굴을 한, 독특한 분위기의 남자는 신중한 표정으로 팔뚝에 난 깃털을 뽑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 따가워. 뭐라고 했어?”

그의 보좌관은 남자의 맹한 시선에 미간을 좁혔다.

“반란 종자들이 조용해질 기미가 없다고요.”

“아아, 그거? 냅둬. 그래 봤자지.”

걱정스러워하는 보좌관에 비해 남자, 100년 전 제국의 실세가 재상이었다면 새로이 황궁의 실세가 된 그는 대수롭잖은 표정으로 팔뚝에 남아 있는 깃털을 잡아 뽑았다.

“아, 따거!”

보는 것만으로도 아프다는 듯 맞은편 남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굳이 뽑으실 필요 없지 않나요?”

남자의 보좌관.

눈썹 사이, 목 뒤, 쇄골 부위. 군데군데 뱀의 비늘 같은 게 올라온 남자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렸지만 남자는 아랑곳 않고 깃털을 뽑아냈다.

“지저분하잖아.”

보좌관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했다.

탈태하기는 했으나 본래 저런 것들이 그들 본연의 특성인데 뭘 저렇게 싫어한단 말인가.

인간형으로 탈태하여도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조인족은 본체의 깃털 색이, 거미족은 이마에 제3의 눈이, 인어족은 아가미나 물고기 비늘 따위가 드러나게 되지. 당연한 것 가지고 뭘 저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그는 파충류 계열의 이종족, 그리고 흰머리 남자는 인간들에 의해 멸족할 뻔했지만 지금은 도리어 그 인간들을 부리는 조인족이었다.

‘트라우마 때문인가.’

보좌관이 알기로 남자는 인간들의 노예로 살던 조인족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역시 노예처럼 살았다고 했다.

수인의 특성이 드러나면 박해받던 환경에서 지냈던 것이다.

그때 자리 잡았던 습관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반란군은 걱정 마. 아직도 모르겠어? 어느 정도는 의도한 거라는 거.”

“의도했다고요?”

“하이로드의 유희거리 삼아 남겨 두는 거지. 파괴할 게 하나도 없으면 그분도 심심하지 않겠어? 장난감이라고 생각해.”

태연한 설명에 보좌관은 질려 버렸다.

‘나도 인간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멀쩡히 살아 움직이는 인간을 장난감 취급하지는 못하는데. 그것도 그냥 장난감이 아니라 팔다리가 떨어지는 게 예사인 장난감이잖아.’

언젠가 호기심에 하이로드의 뒤를 쫓다가 학살 장면을 목격한 적 있던 보좌관의 얼굴이 불편하게 어두워졌다.

‘그래. 하칸의 이런 면 덕분에 그분의 수족이 될 수 있었던 걸지도.’

수완이 좋고 처세술이 훌륭하다는 점도 물론 있겠지만.

끔찍한 학살 장면에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잔인한 담대함이 없었더라면 심장이 떨려서 하이로드를 보필하지 못했을 것이다.

황궁의 실세.

그건 인간 황제를 허수아비처럼 부리고 있는 작금의 세상의 진정한 주인을 이르는 게 아니었다.

그의 손발이 되어 입 안의 혀처럼 구는 하인.

눈앞의 흰머리 조인족 남자가 황궁의 실세였다.

‘수족이 되고 싶다면 누구든지 나서도 돼. 예전 인간 세상과 달리 가문이나 출신은 하등 중요하지 않으니까. 하이로드는 파괴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지. 그분의 신경 거슬리는 일 없도록 눈치 빠르게 움직이면 되는 거잖아. 하칸이 하는 일이 그런 거니까.’

보좌관은 하칸을 우습게 보았지만, 하이로드의 수족이 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부귀영화와 권력이 좋아도 수틀리면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사지에서 줄타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 면에선 하칸이 대단하긴 해. 말이 입 안의 혀처럼 구는 거지. 그게 말처럼 쉬워?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데……. 난 못 하는 일이야.’

보좌관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런 생각으로 하칸을 대하고 있었다.

하칸이 지랄 맞게 굴어 짜증이 나고 화가 울컥 치솟아도 하이로드를 보며 참는다.

그가 없으면 하이로드에게 의견을 전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원래 예부터 종복들에 관심 없는 귀족보다는 종복들의 생사 여탈권을 손에 쥔 집사가 더 성가신 존재인 법.

그러나 집사가 성가시다고 주인에게 곧바로 달려가는 하인은 없다.

세상의 하늘이 뒤바뀌었다.

인간들이 배척하던 대부분의 이종족은 이제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었다.

양지에선 노예로, 음지에선 반란 종자로 소동을 일으키는 인간들은 지금의 시기를 2대륙의 암흑기라 불렀다.

시작은 라즈흘 평원의 참사였다고 기록된다.

역사상 최초로 하이로드라 불리는 주인이 처음으로 태동한 시점이라고도 알려졌다.

이종족을 몰아내려던 인간 군대를 단신으로 몰살시킨 일화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주 유명했다.

이 모든 건 모든 이종족의 로드, 즉 하이로드가 인간을 증오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반란 종자들은 정말 걱정할 것 없어. 그런 것 또한 오만했던 그들의 업보 아니겠니.”

조인족 남자, 하칸의 목소리엔 일말의 동정심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이로드께서 인간들에게 그렇게 가혹한 것도 그들의 업보겠죠.”

“당연하지.”

“인간들이 그분의 소중한 분을 공격해서 그런 거 맞죠?”

보좌관이 무심코 한 질문에 하칸이 눈을 치켜떴다.

새침한 황조롱이처럼 생긴 얼굴이 매섭게 변하자 보좌관이 움찔 몸을 굳혔다.

불호령을 예상했지만 의외로 하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눈치 없는 건 알지만 말이야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주인님 앞에서 그 얘기는 꺼내지 않을 거야. 그렇지? 죽으려면 혼자 죽어야지 나까지 끌어들이진 않을 테니까. 그렇지?”

“그, 그럼요.”

“하기만 해 봐, 확!”

눈을 부라리는 하칸에게 쩔쩔 매며 보좌관은 속으로 땀을 닦아 냈다.

하칸이 엄포를 놓기는 했지만 명확히 깨달은 건 있었다.

‘과거의 일이 하이로드의 역린인 건 확실하구나. 다신,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아야지.’

이 시기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의 주인이자 모든 수인의 수장인 하이로드의 눈 밖에 나지 않는 것이다.

성질 까칠한 하칸이 실세로서 힘을 발휘한다 치더라도 하이로드의 두려움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나 다름없었다.

보좌관이 겁에 질린 얼굴로 이마를 훔치자 그걸 짜증스럽게 바라보던 하칸이 몸을 일으켰다.

“난 이만 주인님께 가 봐야겠다.”

“그럼 저도…….”

“아, 됐어. 너는 남아서 내 컬렉션들을 살펴보고 있어. 요즘 먼지가 끼는 것 같단 말이지. 노예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도 확인해!”

눈을 부라리는 하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콧노래를 부르며 하칸이 사라지자 힘을 빼고 의자에 기댄 보좌관이 고개를 틀었다.

저택 안쪽으로 시체 같은 얼굴을 한 인간들이 쓱싹쓱싹 매가리 없는 비질을 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을 처지게 하는 얼굴들이다.

“하아.”

의욕 없는 얼굴로 보좌관이 몸을 일으켰다.

온갖 귀한 걸 모아 둔 하칸의 컬렉션을 관리해야 한다.

말을 흘려 뒀으니 먼지 한 톨 보인다면 인간 노예는 물론이고 자신까지 곤욕을 치룰 터였다.

* * *

옛 르안나 제국의 황궁은 대체로 정적인 편이었지만, 오늘은 구름이 한 겹 가신 듯 밝은 기운이 연기처럼 퍼져 있었다.

이유는 황궁을 돌아다니는 자들의 밝은 표정 때문이었다.

그들은 거의라고 할 정도로 대부분, 이종족이었다.

간혹 이종족과 인간 사이의 혼혈도 존재했지만 수가 많은 편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인간과 다름없이 생겼어도 탈태를 풀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수인. 특히 근위병들은 대개 늑대족이었다.

하이로드의 방이 위치한 3층은 다른 층보다도 조용하고 경계가 삼엄했다.

날카로운 눈빛의 늑대족 수인 앞으로 몸을 수그린 하인들이 종종걸음으로 지나갔다.

시중을 드는 하인들을 높은 비중으로 차지하는 종족은 거미 수인과 조인족이었다.

섬세한 손길로 이름 높은 그들은 대부분의 이종족들이 그렇듯 새로운 시대를 흡족하게 살아가는 편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그들은 늑대족 전사에게서 벗어나자 긴장이 풀린 듯 입술을 빠르게 달싹거렸다.

“오늘은 주인님께서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

주인님. 또는 하이로드.

이종족이 뱉는 이 단어는 십중팔구 한 존재를 가리켰다.

옛 시대의 체제를 단신의 힘으로 뒤엎고 현재를 만든 늑대족의 수장.

긴장이 되고 눈 밖에 날까 봐 두렵긴 하지만, 그럼에도 전으로 돌아가겠냐 하면 그러마라고 대꾸할 이종족은 거의 없을 터였다.

인간들의 영역을 차지하고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랑 예전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과거엔 인간으로 가득하여 발 하나 들이기 어려웠던 2대륙을 편안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만 해도 만족스러워하는 수인들이 상당했다.

“아무래도 그 여자 때문인가?”

대대로 거미의 특성을 이어받아왔지만 혈통이 약해 거의 사람처럼 보이는 하인이 목소리를 확 낮추어 소곤거렸다.

“누구?”

입술이 부리처럼 톡 튀어나와 있는 하인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왜 있잖아, 크리스털 방에 들어와 있는 그 여자.”

“아, 계속 침대에 누워 있다는 그 여자? 여자가 아니라 인형이란 소리도 있던데.”

“뭐? 무슨 소리야. 여자가 맞아.”

“살아 있는 여자 말이야?”

“그래! 어디가 아픈지 일어나고 있지 않을 뿐이야. 시체니 인형이니 하는 건 헛소문이고.”

“흠, 설마 인간은 아니겠지?”

하인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하이로드가 인간을 싫어한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일에 무관심한 하이로드가 유독 격렬한 반응을 보일 때는 인간, 박쥐족, 그리고 원래도 교류가 끊겼지만 이제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흑계가 관련되어 있을 때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인간 여자를 데려왔다면 못 믿을 자가 많을 것이다.

“글쎄. 아닐 걸.”

거미 수인이 자신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얼핏 봤을 때는 수인의 특성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몇몇 탈태가 완벽한 수인은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는 인간처럼 보이니 단언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주인님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야.”

“그런 모습?”

“뭐…… 기분 좋은 모습?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기분이 나빠 보이시진 않았는데.”

“그러니까 넌 그게 그 여자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크리스털 방의 여자.”

“그렇지 않겠어? 다들 긴장이 풀려 있잖아.”

사실 아는 척 떠벌리기는 했지만 주인을 볼 때마다 익은 벼처럼 고개를 숙이고만 있는 말단 하인인 그가 아는 바는 그리 많지 않았다.

자신의 빈약한 정보가 들통날까 봐 거미 수인은 걸음을 재촉했다.

“얼른 가자. 이러다 하칸 님에게 혼나겠어.”

더 묻고 싶은 게 많았던 조인족 하인이 아쉬운 얼굴로 그의 뒤를 총총 따랐다.

은연중 황궁의 모든 이들이 주시하고 있는 화제의 크리스털 방.

정작 그 방 주변은 바깥의 수군거림과 관계없다는 양 적막했다.

“…….”

“…….”

두 남자가 방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기골이 장대한 몸과 날카로운 눈.

그들은 하이로드의 신변을 책임지는 늑대족 전사들이었다.

충성심이 높은 그들은 평소엔 잡생각을 거의 하지 않지만 오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념에 잠긴 눈빛이었다.

‘도대체 뭘 하고 계시는 거지?’

두 시간 전, 수장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맡은 일만 열심히 하는 충직한 전사인 그들도 이 즈음 되자 안으로 들어간 수장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풍문으로 떠돌아다니는 소문이 신빙성이 떨어지는 데 반해, 비교적 소문에 접근하기 용이한 그들은 꽤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갑자기 소리 없이 사라지셔서 놀라게 만드시더니 웬 여자를 데려오시고……. 전에 없는 행동을 하시니까 자꾸 신경이 쓰이는군.’

사실 품에 안겨 있는 게 ‘여자’란 걸 알았을 때 전사는 눈을 의심했다.

무시무시하게 학살과 파괴만을 일삼던 수장과 가장 어울리지 않은 걸 꼽으라면 여자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목적이 있으신가, 싶었지만 여자를 방에 둔 것 말고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한 가지, 거의 모든 시간을 이 방에서 보내는 게 변하긴 했다.

‘사실 이게 가장 큰 변화지.’

전사는 궁금했고, 의문을 풀 수 없어 답답했다.

역대 가장 강력한 수장이지만 친근감을 느낄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불경한 말이나 그는 수장이 이 세상에서 아끼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 일족 역시도.

‘누굴까?’

의문은 자연스럽게 수장이 안고 온 여자에게 향했다.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정신을 잃은 듯했고, 창백한 피부는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않은 것 같았다.

멍하니 그 순간을 회상했던 전사는 눈을 깜박거렸다.

‘아름다웠지.’

그가 본 모든 미인들 중에 가장, 신비스럽게 아름다운 여자였다.

문득 이렇게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 수장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아니라 그 여자 때문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전사는 몸을 꼿꼿이 세웠다.

‘여기서 더 나아갔다가는 결코 좋지 않을 거야. 관심 끄자. 수장의 여자라면 더더욱.’

전사는 이내 모든 상념을 지우고 주변을 경계하는 일에 집중했다.

전사는 여자의 정체를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는 경력이 적은 청년 전사였고, 100년 전의 구시대에 대해선 알지도 못했다.

원로라 할 수 있는 나이 든 일족은 모두 1대륙에 있으니, 물어보기도 힘들었다.

물론 여자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하는 건 그만이 아니었다.

현재의 2대륙에선 그녀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이가 거의 없었으므로.

* * *

작금의 시대는 수십 년간 이어졌던 혼란스러운 세상이, 그 혼란 가운데 질서를 찾아가는 시기였다.

또한 하이로드 그레칸이 끝없는 분노를 쏟아 내고 진정기에 들어가는 시기였으며, 강한 직감을 느낀 때이기도 했다.

며칠 전, 끝없는 상실감과 가슴 통증으로 뒹굴던 그레칸은 모든 움직임을 정지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갑자기 그녀의 향기가 느껴졌다. 꿈에서도 바랐던 한시도 잊은 적 없는 향기.

그는 홀린 듯이 움직여 황성을 빠져나왔다.

[어디 가십니까, 하이로드?]

[따르지 마라. 따라오면 죽인다.]

얼어붙은 전사들을 내치고 그레칸은 홀로 걸었다.

묵묵히 길을 걷는 그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막기는커녕 그를 본 모든 지성체가 꽁지에 불붙은 것처럼 놀라 머리를 숨겨 댔다.

어떤 이들은 경배를 바치고, 어떤 이들은 공포에 질린 가운데 그레칸은 걷고 또 걸었다.

그의 걸음은 지옥의 시작점이라 일컬어지는 라즈흘 평원으로 향했다.

100년 전.

거대한 태풍에 휘말려 먼 곳에 떨어진 후 정신없이 달려온 평원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비탄에 잠긴 그의 힘은 그들을 잡기 위해 몰려왔던 군대를 휩쓸었고, 황태자의 힘이었으며 르안나 황실 군대가 되었을 사병들도 몰살시켰다.

그러고도 그레칸은 멈추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없어진 후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희미하다.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어디서도 그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영면에 든 대마녀는 먼지와 모래가 되어 시체를 남기지 않아. 밀라니아 님은 영면에 드셨어, 그레칸. 그러니 너도 이제 그만하고 늑대족으로 돌아가. 밀라니아 님은 네가 이러고 있는 걸 원하시지 않을 거야.]

그레칸은 죽을 것처럼 절망했다.

그 어떤 땅보다 먼저 황폐화되었던 라즈흘 평원이다.

100년 전의 끔찍했던 절망을 상기시키는 평원의 풍경에 멈칫한 그레칸의 걸음이 느려졌다.

어째서 또다시 그녀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까.

왜 그녀가…… 여기 있는 것 같은 걸까.

평원에 들어선 그레칸은 가만히 서 있었다.

멀리서 불어온 바람이 그의 망토를 펄럭이고,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앳된 티를 완전히 벗어던진 그의 얼굴은 건조한 사막처럼 삭막했고, 잘 빚어진 얼굴은 마치 죽어 있는 조각 같았다.

그랬던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밀라니아.’

그레칸의 시선은 한군데 못 박혀 있었다.

몇 남지 않은 나무 중에서도 꼿꼿하게 서 있는 가장 거대한 느티나무.

그레칸은 보자마자 알아챘다.

느티나무는 100년 전, 마지막으로 밀라니아를 보았던 그 자리에 자리해 있었다.

바스락.

발밑에 밟힌 나뭇잎이 작은 소리를 냈다.

느릿하게 한 발을 내민 그레칸의 걸음은 곧이어 아주 빠르게 변했다.

느티나무는 주변의 말라비틀어진 느릅나무들에 비해서 튼튼하고 큼지막했다.

커다란 나무가 홀로 고고하게 서 있는 모습은 어딘지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그레칸은 전에는 관심도 없었던 이 식물이 굉장히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화염이 휩쓸고 간 대지처럼 버석하게 말라붙어 아무런 생물도 자라지 못하는 그의 마음에, 나무의 향이 촉촉하게 불어왔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그레칸이 거친 나무껍질에 손을 올렸다.

손등에 가득한 흉터는 홈이 마구 난 나무껍질 같아 징그러웠고 한편으론 가학적이었다.

그는 그 상태로 나무의 거친 단면을 쓸었다.

나무는 성인 남성이 온 팔을 뻗어도 손이 맞닿지 않을 것처럼 둘레가 컸다.

“…….”

사랑하는 여인을 대하듯 까칠한 나무껍질을 매만지던 그레칸이 돌연 손끝을 세웠다.

파슥.

서슬 퍼렇게 곤두선 손톱으로 나무를 파헤치자 단단한 나무가 두부처럼 으스러진다.

파스스.

나무의 잔해가 그레칸의 발치에 쌓여갔다.

불을 피워도 될 만큼 잔해가 쌓였을 무렵, 그레칸은 손을 멈추었다.

나무는 흰 속살을 살포시 드러내고 있었다.

꽁꽁 싸매었던 선물을 드러내듯 느티나무의 뽀얀 속살에는 인형이 파묻혀 있었다.

그레칸의 목울대가 거칠게 일렁였다.

넘실거리는 기운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격정에 찼으나, 다시 나무를 파헤치는 손놀림을 아기를 대하듯 조심스러웠다.

마침내 속이 모조리 파인 느티나무가 품고 있던 인영을 울컥 토해 냈다.

“아!”

그레칸은 그녀를 와락, 품에 안고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오래된 목재 냄새 가운데, 그가 기억하고 꿈에서도 잊지 못하던 향기가 났다.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레칸은 날카로운 이로 입술을 씹었다.

이대로 심장이 터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장이 기뻐서 날뛰어 댔다.

두근두근.

은빛이 도는 머리카락에 조심스럽게 얼굴을 묻었다.

두근두근.

서서히 실감이 났다.

두근두근.

‘내 밀라니아.’

두근두근.

‘드디어 내게 돌아왔구나.’

두근두근.

‘내가 완전히 미쳐 버리기 전에.’

황홀경에 잠긴 그레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더는 못 참을 것 같았는데. 내게 돌아와 줬다, 당신.’

그를 방해했던 자들은 모조리 몰락의 길을 걸었으며 또한 걷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레칸은 뛸 듯이 기뻐 미소를 지었다.

아름답게 피어난 미소는 어찌 된 일인지 퇴폐적이었으며 사악했다.

수없이 이어진 불면의 밤으로 창백했던 얼굴에는 지극한 기쁨에도 불구하고 가시지 않은 어둠이 밝은 날 드리워진 그늘처럼 내려와 있었다.

바로 그날, 모든 종족의 수장이 된 하이로드 그레칸은 백 년 전 죽었어야 할 구시대의 대마녀를 데리고 황궁에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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