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48)

24

성큼 다가온 끝

“사람이, 사람이 너무 많네요.”

앨리지가 수심 어린 눈으로 마차를 둘러싼 이들을 살폈다.

“저들이 네 연인을 건드릴 일은 없을 거다.”

속내를 들킨 앨리지는 잠시 침묵했다.

“감사하고 또…… 죄송해요.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그런 말은 할 것 없느니.”

밀라니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군대의 총공세에 인상을 찡그렸다.

‘몸이 언제 또 나빠질지 모르니, 그 전에 끝내야 해.’

마법은 의지를 발휘하는 일.

대마녀와 인간이 다른 점은 대마녀는 자연의 의지를 그녀의 의지가 되게끔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저주의 마녀 이전에, 그녀는 자연의 대마녀였다.

밀라니아는 손에 의지를 모았다. 

하늘을 향해 그 손을 휘젓자, 까만 밤하늘에 총총 박힌 별들이 삽시간에 가려졌다. 

그야말로 마법처럼.

달빛마저 사라져 어두워진 사위에 인간들이 당황하며 웅성거렸다.

“놀라지 마라! 단지 시야를 가리기 위한 하찮은 수작……!”

톡.

어두운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에 침착하게 외쳤던 기사의 말이 끊겼다.

마법사들은 이미 경악 어린 얼굴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투두둑.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아도 어두웠던 하늘이 한층 더 어두워지고, 병사들이 꺼낸 횃불이 하나둘 빠르게 꺼져 나갔다.

마법사들이 뒤늦게 마법을 부려 빛을 불러왔지만, 그 정도로는 역병처럼 퍼져 나가는 병사들의 혼란을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다 하나 마법이나 기술로 비를 내리게 하는 건 생각도 하지 못한 인간들에게 자연을 움직이는 건 신의 영역이었다.

“어떻게 이종족 따위가 비를 내리지?”

“그냥 이종족이 아니야. 대마녀라고, 대마녀! 잊고 있었어. 대마법사 아덴샤와 필적한다고 했잖아. 맞지? 맞아. 날씨를 부리는 거면……. 내가 꿈꾸고 있는 건 아니지? 오, 맙소사.”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우리가 잡을 수 있는 거야?”

웅성거리는 소리에 섞여 든 두려움과 경외심을 눈치챈 수뇌부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병사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군대를 지휘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병사들의 사기였다.

임무의 완수, 황태자의 밀명이 목전에 다가온 이 시점에 군대가 와해될 수는 없는 일.

총사령관. 이제 외팔이가 된 남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하아. 

밀라니아의 입술 사이로 작은 기침이 터져 나왔다. 숨이 하얗게 흩어졌다.

잇새로 빠져나오는 것은 공기가 아니라 생기였다. 

하아.

‘무리했어.’

더는 자연의 의지를 그녀의 것으로 만들기에는, 몸이 버티질 못한다.

그녀가 스러지고 나면 젊고 새로운 대마녀가 탄생할 것이다.

‘얼른 성으로 돌아가야 하는도다. 저들이 내 상태를 눈치채기 전에.’

빗자루를 세게 잡는 순간 또 한 번 마른기침이 터졌다.

“괜찮으세요?”

앨리지의 걱정스러운 속삭임에 밀라니아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으나, 그녀를 하나하나 살펴보던 적들은 눈을 빛내며 시선을 교환했다.

‘기침에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노괴의 몸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어요.’

‘공격할 때는 지금뿐이다.’

수뇌부들의 무리 사이에서 날카로운 빛이 폭사되었다.

심상찮은 기의 흐름이 밀라니아, 아니 정확히는 앨리지를 향했다.

밀라니아는 반사적으로 방어의 술을 펼치며 앨리지를 감쌌다.

이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앨리지를 살려야 한다고 곱씹어 온 탓에 습관적으로 행동한 것이었다.

그녀가 움직임과 동시에 탑주는 그가 펼칠 수 있는 가장 강한 마법을 펼쳤다.

맹렬하게 쏘아지는 사령관의 푸른 오러 소드에 붉은 화염이 회오리치듯 휘감겼다.

고오오오오!

그들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한 수가 밀라니아와 앨리지를 파고들었다.

‘이건 위험하느니!’

밀라니아가 급하게 펼친 방어의 술이 검의 진로를 방해했으나 파고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쨍그랑!

기이한 소리와 함께, 심장에 뜨거운 격통이 찾아들었다. 

밀라니아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컥!”

앨리지가 빗자루 이래로 떨어지는데도 밀라니아는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통제를 벗어난 육체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영면의 때가 왔다는 징조였다.

밀라니아는 곧이어 벌어질 일을 예감할 수 있었다.

이제 곧 먼지가 돼서 사라질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빠르다. 예상보다도 지나치게 빨라.’

밀라니아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내기 위해서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위치한 가슴 부근에 날카로운 조각이 꽂혀 있었다. 늑골 사이를 정확하게 찌르고 있다.

문득 인간들의 공격을 받은 직후, 유리가 깨지는 듯 이질적 소리가 났던 것을 밀라니아는 기억해 냈다.

‘그때 깨어진 조각이었는가.’

비가 그치고, 구름이 흩어지고, 찬란한 별빛과 달빛이 그녀를 비추었다.

원피스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심장이 출혈하고 있었다.

다리에서도 힘이 빠지며, 추락하는 밀라니아는 한 가지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아덴샤의 거울이 왜……?’

심장을 찌른 유리 조각은 아덴샤의 거울 조각이었다.

그녀는 곧 바닥과 강하게 충돌했다.

쿵!

다행인지 불행인지, 먼저 찾아든 심장의 격통이 땅에 떨어진 충격을 집어삼켰다.

인간들은 그녀를 곧장 공격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상황에 밀라니아는 마지막 남은 집중력을 끌어올려 기회를 잡았다.

귀가 먹어 가고 눈이 침침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기절했는지 아무 미동 없는 앨리지의 여린 몸이 보였다.

손끝이 흩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밀라니아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이 상황에 자신 근처에 앨리지가 있어서.

‘네가 이번 생 내 마지막 목표였느니라, 앨리지.’

한 가지 불안한 건, 죽은 듯 엎어진 앨리지에게서 생기가 느껴질 듯 말 듯 하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죽은 게 아니기를 바라면서, 밀라니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힘을 끌어올리자마자 심장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으나 그녀는 입술의 피를 삼키며 참아 냈다.

‘마지막으로 움직여다오. 곧 편히 쉬게 해 줄 터이니.’

덥석, 곁에 떨어진 빗자루를 잡아채고 올라탄 밀라니아는 앨리지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앞으로 짓쳐 들었다.

“마, 막아!”

뒤늦게 병사들이 움직였지만 마지막 힘을 내는 밀라니아를 잡기엔 한발 늦은 감이 있었다.

밀라니아는 벌써부터 하얀 모래가 되어 바람에 날리는 손가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평원의 끝으로 날아갔다.

협곡 다리와 이어져 있는 평원의 끝은 절벽 지대였다.

밀라니아는 그 아래로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빗자루와 앨리지를 움켜쥔 채 떨어지며, 아득바득 붙잡고 있던 정신의 끈을 놓쳤다.

그리고 숨 한 번 돌릴 틈도 없었다.

검은 날개를 펼친 르베리안즈가 그녀를 따라 하강했다.

말란도르는 공간을 접어 이동했다.

그레칸은 그 앞이 절벽이 아닌 것처럼 돌진했다. 절벽이 그를 집어삼켰다.

* * *

밀라니아가 놓쳤던 정신 줄을 다시 잡았을 때, 그녀는 남은 시간이 손가락 한 마디 꼬마 양초의 지속 시간보다 짧을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눈을 뜨자 잡초가 가득한 초원 위였다.

‘협곡 아래구나.’

몸이 부서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가, 르베리안즈를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아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거의 끄덕여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끄덕였다고 착각했다.

르베리안즈가 정신을 잃고 낙하하는 몸을 낚아채어 이곳으로 옮긴 듯했다.

흐끅.

눈물을 참는 소리가 났다. 품속에서였다. 

밀라니아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몸을 웅크린 앨리지의 어깨가 안쓰러울 만큼 바들바들 떨렸다.

앨리지는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고 있었다.

밀라니아는 그녀를 끌어안고 떨어졌던 순간을 떠올렸다.

다행히 앨리지는 죽지 않았다. 기절한 것뿐이었고, 이젠 정신을 차린 듯하다.

‘정말 다행이로고.’

안도감 섞인 옅은 한숨이 새어 나갔다.

숨과 함께 빠져나가던 생기는 빠질 만큼 빠졌는지, 몸에 느껴지는 생명력은 거의 없었다.

앨리지가 울먹거렸다.

“제가 해 볼게요…….”

“해 볼게요가 아니야. 무조건이라고.”

덜덜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문 앨리지는 라베리안즈의 초조한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자꾸 꿈지럭거린다.

‘뭐 하는 거지?’

앨리지는 손목을 갈라 피를 짜내고 있었다.

이미 손목 주변의 피부는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밀라니아는 상황을 깨닫고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죽어 가는 자신을 살리려고 하는 거다.

‘소용없는 짓이거늘.’

잊지 말아야 할 건 앨리지 역시 죽어 가고 있다는 거였다.

그녀의 병마는 밀라니아로 인해 잠시 멈춘 상태일 뿐 치유된 게 아니었다.

무리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죽으면 안 돼요.”

르베리안즈는 절대 명제를 말하듯 되풀이했다.

“당신이 이런 데서 죽을 리 없어요.”

‘글쎄. 죽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객이지. 모든 건 죽음으로 돌아가느니라. 그것이 순리이며 이제는 내가 가야 할 길이야.’

꿈지럭대는 앨리지에게서 시선을 뗀 밀라니아는 느릿하게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혼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르베리안즈.

말란도르는 핏기가 빠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감정은 보는 것만으로도 새카맣고 막막했다. 절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밀라니아와 상극인 그는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뭔가를 하는 게 밀라니아를 더 빠른 죽음으로 내모는 일일 터였다.

가까이 있기도 두려운 듯 위치도 이 중에서 가장 멀다.

‘그런 표정 할 필요 없도다.’

외마디 말소리 하나도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쯧, 내심 혀를 찬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찾았다.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바로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나마 개중 제일 멀쩡한 얼굴이다.

‘기운을 보니 각성은 끝났구나.’

기억을 뒤져 보자면, 각성한 그레칸은 넘쳐 대는 힘이 굉장히 부담스럽고도 난처한 놈이었다.

이제 어디 가서 맞고 다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

약간 안심했다가, 밀라니아는 의아해졌다.

그레칸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눈꼬리가 휜다.

‘왜 웃는고?’

설마 각성을 하더니 미쳐 버린 건 아니겠지?

그녀는 불현듯 조마조마해졌다.

‘마지막까지 내게 시름을 안겨 줄 참이냐.’

그레칸이 말했다.

“밀라니아는 죽지 않을 거다.”

밀라니아는 눈을 크게 뜨고, 이내 찡그리듯이 웃었다.

다행히 미친 건 아니다.

그레칸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였다.

생물이 죽음을 대면하는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무시. 극복. 외면.

그레칸은 외면에 속한다.

밀라니아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곧 죽을 것이야.”

“아니야.”

그레칸이 곧바로 반박했다.

필멸자의 죽음.

밀라니아는 이 심오하기 그지없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를 포기했다. 그러기엔 남은 시간이 촉박했다.

“앨리지를 나라고 생각하고 살아 보거라.”

힘없이 중얼거리니 돌아오는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미친 소리.”

“미친 소리네요.”

“미친 소리야.”

“미친 소리시네요, 흐윽.”

도미노처럼 말이 이어진다. 밀라니아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샜다.

원수들과 악우였지만 마지막 가는 길, 그들의 배웅을 받는 기분도 썩 나쁘지 않았다.

이런 마무리도 괜찮은 것 같다.

그래. 이제 끝이 다 와 간다.

‘……내 존재가 사라지고 있는 게 느껴지느니라.’

밀라니아는 하얗게 흩어지는 손을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마지막 남은 힘을 쓰면 영면이야 빨라지겠지만, 이대로 시간을 유야무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언 같은 말도 남겼으니 지체할 수 없다.

밀라니아는 숨을 들이마시고, 곧장 손을 움직여 심장에 박힌 아덴샤의 거울 조각을 비틀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문드러져 조각을 잘 잡을 수 없어, 손가락 사이에 조각을 끼워 빼내었다.

다소 잦아들었던 피가 분수처럼 퐁퐁 솟아올랐다.

“무슨 짓이야!”

말란도르의 비명을 무시하며 밀라니아는 손가락으로 피를 담아 경악한 앨리지의 입에 쑤셔 넣었다.

“욱!”

“다 핥아 먹으려무나. 그리고 네 심장에 흡수해. 뱉으면 허사가 되니.”

깨져 버린 아덴샤의 거울 조각은 그녀의 심장을 찔렀고, 그녀를 구성하는 진원이 그 틈으로 빠져나오고 있다.

이 진원이 앨리지를 살리는 묘약이 될 터였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내 계획대로는 되는구나.’

영면의 때에 심장에서 피를 내어 앨리지를 살리는 것.

작정한 것도 아닌데 묘하게도 일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밀라니아는 허탈함이 담긴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이렇게 되어야 했던 건가.’

역시 의심했던 대로, 그녀의 역할은 앨리지를 살리는 거였다.

열 번의 회귀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다행인 것은, 이번에는 드디어 이 지겨운 회귀를 끝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거다.

밀라니아는 놀라서 창백해진 앨리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눈물 젖은 얼굴과 핏자국이 길게 이어진 입술.

괴기스러웠지만 밀라니아는 생기가 꺼져 가던 그녀의 초록빛 눈에 생명력이 들어차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밀라니아가 작게 속삭였다.

“마녀성으로 가거라. 내 땅에 가면 네 연인의 숨을 조금이나마 붙일 수 있을 것이야.”

“……대, 대마녀님. 말하지 마세요. 쉬, 쉬셔야 해요.”

“넌 내게 수없이 많은 빚을 졌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빚도 있지만.

앨리지는 의문을 떠올릴 여유도 없는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 빚은 모두 마녀족에게 갚도록 하려무나.”

‘이제 끝이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마녀족을 도닥이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특히 체라에게 자세히 말을 남기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곧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그래도 새로운 대마녀가 태어날 테니, 체라는 혼란을 훌륭하게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미련은…….’

한 가지 좀 더 바라자면 그레칸과 르베리안즈, 말란도르에게도 한마디 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거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하느니.’

일말의 아쉬움을 접은 밀라니아는 흡족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평온이 찾아오길 기다렸다.

“아니, 밀라니아가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을 거다.”

잔잔한 마음에 돌을 던지는 그레칸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마지막까지 떼를 쓰다니. 사실 가장 걱정되는 놈은 너였느니라, 이 골칫덩이 같으니.’

그 말을 할 힘이 없는 게 아쉬웠다.

“내내 이 순간을 기다려 왔던 거야, 밀라니아는. 그러니까 이렇게 쉽게 날 떠날 수 있는 거다. 비겁해. 비겁하다. 당신이 날 불러들였으니, 떠나는 건 내가 허락해야 공평해. 그러기 전에 당신은 내 곁을 떠날 수 없어.”

각성을 하더니 건방짐까지 물이 올랐구나.

한탄한 밀라니아는 눈빛으로라도 말을 전하기 위해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이미 목 아래부터는 감각이 없었다. 유언을 남길 시간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눈짓 정도는 해 봐야지.

슬쩍, 눈을 떴다. 그리고 보았다.

이제는 퍽 익숙해진 붉은 액체를 제 입에 들이붓는 그레칸을.

‘붉은 꽃!’

뭘 하는지 바로 알아챘다는 듯 흔들리는 밀라니아의 눈동자를 보며 그레칸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러고는 곧장 고개를 숙여 밀라니아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미약해진 감각에 피 냄새가 나는, 그러나 부드러운 입술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건조하게 말라붙은 입 안으로 시원한 액체가 침범했다.

달콤하면서도 거북스러운 상반된 느낌에 끙, 앓는 소리가 흘렀다.

입 안에서 그레칸의 혀가 사방팔방으로 움직였다.

말라 가는 혀와 입천장을 핥아 대는 그레칸의 혀 놀림은 딱할 만큼 필사적이라 밀라니아는 애잔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만하거라.’

어차피 이런 건 소용없어.

마음으로는 냉랭하게 거부하지만 힘없는 몸은 꼼짝 않고 그레칸을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붉은 꽃 용액을 밀라니아에게 넘겨주는 데 집중했던 그레칸의 고개는 점점 더 기울여져서, 종내에는 밀라니아의 입을 정신없이 탐하기에 이르렀다.

괜한 짓을 한다는 밀라니아의 꺼림칙한 마음과 달리 그레칸은 확신이 있었다.

‘지금이라면 분명 붉은 꽃을 소화할 수 있다.’

자격이 있다면 사용법을 알게 될 거라는 말란도르의 말은 정확했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건만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사악한 기운의 붉은 꽃은 모조리 밀라니아에게 넘겨주었지만 그레칸은 입을 떼지 않았다.

밀라니아의 숨은 짜릿할 만큼 달콤했고 그만큼 그는 갈급했다.

그에겐 진정한 첫 키스였다.

밀라니아는 첫 키스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에겐 그녀와의 입맞춤이 첫 키스였고 그가 경험한 모든 것이었다.

르베리안즈와 말란도르와 달리 성적으로 늦된 감이 있던 그레칸은 언제 성에 눈을 떴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지금이라고 답할 수 있었다.

첫 키스의 설렘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를 살려야 한다는 필사적인 목적에 초조한데도, 심장이 격렬하게 두방망이질을 쳐 댔다.

‘너무 좋아……. 달콤하다. 달콤해.’

뇌가 뒤흔들렸다. 심장이 뭍 위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펄떡였다.

르베리안즈의 난봉꾼 기질이 모두 이해될 만큼 그레칸은 그녀의 입 안이 미치도록 좋았다.

타액을 잔뜩 머금은 혀가 밀라니아의 마른 혀를 휘감았다.

혀끝이 스치자 그레칸은 등줄기가 오싹했다.

욕구에 충실해진 그는 상체를 밀라니아에게 바싹 붙였다. 이상하게 하체가 뻐근하고 불편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심장이 꽈악 묶이는 이질적인 통증이 찾아들었다.

결코 끊어 내거나 풀어낼 수 없는 튼튼한 실로 심장을 칭칭 동여매는 기분이었다. 뻐근하고 아릿했다.

결코 정상적인 감각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그레칸은 밀라니아와의 키스에 빠져들어 있었다.

정신없이 몰두하던 와중 돌연 그레칸은 어깨가 잡혀 몸을 뒤로 젖혔다.

“그레칸, 그만해!”

르베리안즈는 그레칸 너머로 밀라니아를 살폈다.

그 사이에 그레칸이 어찌나 물고 빨았는지 그녀의 입술은 물에 푹 젖은 것처럼 축축하고 부풀어 있었다.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어깨를 꼭 잡은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르베리안즈와 말란도르가 땀을 뻘뻘 흘리며 그를 밀라니아에게서 떼어 놓고 있었다.

밀라니아의 입맞춤에 빠져 시간과 공간을 모두 잊었던 그레칸은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도 잊어버렸다.

‘……?’

머릿속을 온통 뒤흔들었던, 난생처음 느낀 황홀하고 중독적인 감각.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멍해있던 그레칸은 차차 상황을 확인했다.

잘생긴 눈매가 무섭게 일그러졌다.

‘또 너희인가?’

그래. 또.

또 방해받았다. 이 둘에게.

그레칸은 분노로 머릿속이 타 버릴 것 같았다.

수그러든 줄 알았던 방해하는 자들에 대한 증오.

미처 태워 버리지 못한 증오가 기름 부어진 화마처럼 매섭게 솟구쳤다.

모조리 죽이고 싶은 살심이 산불처럼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근육이 맹렬히 팽창했다.

“크르르…….”

방금 자신은 천국에 있었다. 황홀했던 천국에서 추방당했다.

또, 이 둘 때문에.

이를 드러내며 눈을 번뜩이는 그레칸에게 르베리안즈가 바락 외쳤다.

“미친놈아! 지금이 그럴 때냐고! 주변을 똑바로 봐!”

짜증스럽게 눈을 치켜뜬 그레칸이었지만, 곧 르베리안즈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의 표정도 일변했다.

“바람이.”

바람이 불고 있다. 근원은 밀라니아였다. 그레칸은 홱 고개를 돌렸다.

눈 감은 밀라니아로부터,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레칸은 반사적으로 밀라니아를 부둥켜안았으나 거세지는 바람은 그레칸과 밀라니아의 틈을 끈질기게 벌려 대어, 결국 몸이 떨어져 나갔다.

그레칸이 절망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안 돼!”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바둥거렸지만, 태풍이 된 바람은 야속할 만큼 매정하게 그를 그녀에게서 떨쳐 냈다.

“꺄아악!”

이미 멀리 날아간 앨리지가 비명을 질렀다.

모든 것을 날려 버릴 만큼 강력한 태풍이 불어닥쳤다.

깜박깜박. 밀라니아는 ‘눈꺼풀’을 움직이다가, 영 시원치 않아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일인고. 방금 웬 이상한 태풍이…….”

밀라니아는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변한 건 없었다.

그녀는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풍경에 말을 잃었다.

사실 풍경이라고 할 수도 없다.

눈앞엔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

“…….”

온통 검은 세상에 밀라니아는 자신이 누워 있는지 서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인고?”

뭐가 어떻게 된 일이냐. 난 지금 누워 있는 것이냐 앉아 있는 것이냐 아니면 서 있는 것이냐.

분명 그레칸이 붉은 꽃을 입으로 넘겨주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을 했을 때만 해도, 누워 있었기에 지금도 당연히 누운 상태라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확신할 수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 또한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손을 올렸다. 올렸다는 감각은 있지만 볼 수가 없어서, 올렸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감각의 혼란이 극심했다. 밀라니아는 섬광처럼 깨달았다.

‘이계구나.’

이곳은 그녀가 살던 세상이 아닌 다른 곳이다.

그녀가 아는 땅 어느 곳도 이런 기사를 일으킬 순 없었다.

‘죽은 것이야?’

가장 신빙성 높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또한 끔찍한 가정이기도 했다.

이제껏 영면을 맞으면 먼지와 모래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나무의 거름이 되고 그 나무를 통해 세상에 돌아다닐 거라고.

‘내가 알고 있던 게 틀렸던가? 아니야. 그게 맞느니라. 이런 이상한 공간에 놓여 제 몸도 볼 수 있는 상황은 듣도 보도 못했느이.’

답은 하나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내가 했다, 태풍. 운명에 손댈 수는 없지만 태풍 정도는 가능하지. 아무렴.”

흉터 가득한 성대로 억지 소리를 내는 것처럼 잔뜩 쉬었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공간을 쩌렁쩌렁하니 울렸다.

밀라니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귀를 바짝 곤두세웠다.

“아니야, 내가 손댈 수 있는 건 그 정도밖에 없으니까. 시간이나 좀 벌려고.”

이어진 목소리는 어쩐지 의기소침했다.

“누구지?”

혹시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까 했었는데, 다행히 잘 나온다.

밀라니아는 다시금 이곳이 이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면을 목전에 두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 때처럼 생생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엉망진창! 도대체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모르겠어. 아니지, 이제는 달라지겠지만 그게 내가 원하는 방향일지는 모르겠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몰라?”

“알 리가 있나. 당신은 누구인고?”

상대의 정체는 모르지만 이렇게 나타난 이가 평범할 리 없다.

밀라니아는 목소리에서부터 느껴지는 기이함에 유의하며 침착하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네가 만나길 바라 왔던 존재다.”

“내가 만나길 바라 왔던?”

문득 밀라니아는 눈앞에 나타난 노파에 눈을 크게 떴다.

혹시나 싶어 손을 내려다보았지만 그녀의 손은 여전히 어둠에 파묻힌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시 노파를 바라보았다. 노파는 희미하게 빛이 났다. 하얀 막이 몸 위를 감싼 것처럼 말이다.

밀라니아는 노파의 기이한 모습보다는 말 내용에 집중했다.

“로드 골드드래곤. 지혜의 용인가?”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회귀의 이유를 찾기 위해 그를 찾았던 적이 있지 않은가.

노파는 귀찮은 듯이 대꾸했다.

“그놈은 내 전달자고.”

“…….”

용을 전달자로 쓰는 존재. 하나밖에 없다.

밀라니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 당신이 이 세계를 만든 자라는 것이야?”

“…….”

“날 이 꼴로 만들고?”

미심쩍은 목소리에 노파가 혀를 차며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정확히 묻고 싶은 게 뭐냐?”

“이 세상은 그 흐름이 정해져 있는 것이냐? 마치 소설처럼…….”

자신이 내내 품어 왔던 의문처럼. 몇 번의 회귀를 통해 자연스럽게 깨달았던 점이 있다.

이 세상은 몇몇 특정한 인물 위주로 돌아간다.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건 그레칸과 르베리안즈, 그리고 앨리지.

대마녀로서 밀라니아는 자신이 그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예상이 맞다면 노파는 궁금했던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으리라.

“이 변수 많고 복잡하고 심오한 세상을 단지 소설이라고만 표현할 수는 없지.”

“…….”

“그럼 너무 경박해지지 않느냐.”

밀라니아는 딱히 동의할 수 없었다.

경박하든 아니든 그녀의 인생이 이리저리 부자연스럽게 휘둘렸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우리는 창조물들의 운명을 기록한 것이다.”

설명이 미진하다고 느꼈는지 노파가 덧붙였다.

“더 중요한 창조물이 있고 덜 중요한 창조물이 있기는 하지. 그런 의미에서 네 식대로 표현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구나.”

“……그게 끝이냐?”

“뭐가 더 필요하누?”

고개를 갸웃한 밀라니아는 무덤덤하게 물었다.

“그래. 그럼 내 운명은 왜 여러 번 반복된 것이냐? 기록이 되어 있다면 그렇게 흘러가면 될 것을. 어째서 이번 생은 전생과 여러모로 달라진 건지도…….”

대표적으로 이번 생에선 앨리지와 그레칸, 르베리안즈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표정 변화를 보이진 않았지만 약간 불만스러웠다.

회귀했던 생을 다 합한다면 오랜 시간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았다.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녀의 불만을 눈치챈 노파가 못마땅하게 얼굴을 구겼다.

“그게 문제야. 기록된 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것.”

“무슨 뜻인지 모르겠구나.”

“원래 이 세상은 네 죽음을 기점으로 더 번성해야 한다. 죽음을 극복한 앨리지가 세상을 정화하고, 더 튼튼하게 만들 예정이었지.”

“그런데?”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었는데, 그리 되지 않았다.”

‘예정이었다.’니까 문제가 생겼음은 눈치챘다. 밀라니아는 잠자코 노파의 설명을 기다렸다.

“세상은 오히려 파멸했지.”

“…….”

“여러 번. 그래. 무려 아홉 번이나.”

밀라니아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처음에는 우리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여러 번 시간을 돌려 실험함으로써, 원인이 네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노파가 노려보자 밀라니아는 황당해졌다. 동시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예정되었든 어쨌든 자신은 앨리지를 위해 여러 번 희생했다.

문제가 생겼다면 그 피해자는 자신이 아닌가?

“그래. 네 탓을 하는 건 네게 조금 불합리할 수도 있겠지. 정확히 말하면 한계를 벗어난 존재가 널 사랑했기 때문이다.”

“…….”

“맞아. 그게 정확한 문제야.”

스스로에게 말하듯 노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그녀 스스로는 이해했을망정 밀라니아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기에 표정이 불만스럽게 찌푸려졌다.

만약 얼굴이 그대로 존재한다면 그런 표정을 지었을 거다.

“직접 보여 주는 게 좋겠어.”

쯧쯧 혀를 찬 노파가 손을 휘적거리자 드디어 검은 공간에 풍경이라고 할 만한 게 나타났다. 그러나 그 역시 풍경이라 부르기엔 어폐가 있었다.

나타난 장면에서 하늘은 검은 연기로 뒤덮였고 짐승이 파헤친 듯 황폐한 땅은 어떤 생물도 살지 못했으며 살아남은 생물들은 서로를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그 어디에서도 밀라니아가 기억하는 세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장면이 끝나고 새로운 장면이 시작되었다.

이 역시 앞선 장면과 다를 게 없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새카만 불길이 세상을 활활 불태우고 있단 점이었다.

다른 장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떤 장면에선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어떤 장면에서는 신체가 갈기갈기 찢긴 마녀족이 숲을 피로 물들였다.

모든 장면이 끔찍하기 그지없었지만 특히 마녀족이 나올 때 밀라니아는 평정을 찾기 힘들었다.

그들 역시 앞선 장면과 다름없이 잔혹하게 죽어 나갔다.

그렇게 아홉 번의 잔인한 장면이 지나갔다.

“도대체 왜 이런 괴이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이냐.”

참았던 숨을 길게 뱉으며 눈을 깜박인 밀라니아는 아직 끝나지 않은 장면을 확인하고는 눈을 깜박였다.

“……?”

황폐한 땅에 홀로 살아남아 서 있는 자가 있었다.

밀라니아는 그를 확인하고 당혹을 금치 못했다.

장면들이 뒤로 돌아간다.

왜 여태껏 깨닫지 못했는지.

모든 끔찍한 장면의 한가운데는 그가 있었다.

텅 빈 눈으로 눈물을 불길이 치솟는 산에 멍하니 앉아 있는 사내.

또 다른 장면에서는, 피로 범벅된 몸으로 황폐화된 대지를 방황하는 사내.

학살하고, 부수고, 스스로를 학대하고, 울고, 심장을 꺼내려는 듯 가슴을 피가 날 정도로 긁어 대는 사내.

그만. 밀라니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만해. 그만하거라, 제발.

입술 안쪽에서 되뇌던 그녀는 이쪽을 쳐다보는 표정 없는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유리알처럼 새카맣던 눈동자가 불에 탄 듯 혼탁했다.

그만.

“그레칸.”

저도 모르게 속삭였다가, 눈을 홉뜨며 밀라니아는 크게 외쳤다.

“말도 안 되느니!”

“왜 말이 안 되느냐?”

코웃음을 친 노파는 목소리와 달리 어두운 얼굴이었다.

밀라니아는 흥분해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레칸이 저 참상들의 범인이라는 것이냐? 그런 의미로 내게 보여 준 게야?”

“그렇다.”

“그건 말이 되지 않느니라.”

“그러니까 왜?”

무표정하게 묻는 노파의 질문에 말문이 턱 막힌 밀라니아는 더듬거리며 변론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약하고……. 저런 짓을 저지를 만한 성품이 못 돼.”

확실히 그렇느니라.

확신 어린 말투로 말 맺은 밀라니아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그레칸과는 원수처럼 싸워 댔기에 성품 운운하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이번 생에서 자신이 체라보다도 더 가까이 두었던 것이 그레칸이다.

밀라니아는 그녀가 알고 있는 그레칸을 떠올렸다.

자신을 지켜 주겠다고, 조그마한 몸으로 나서는 모습.

장난감 공을 물고 달려오던 모습.

졸졸 쫓아다니던 새끼 새 같은 모습까지…….

‘순박했으면 순박했지 저런 천인공노할 일을 벌일 아이가 아니니라.’

마음의 확신을 얻은 밀라니아는 노파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뭘 원하는 것이냐? 이런 말도 안 되는 것까지 보여 주면서.”

“뭔가 착각하고 있구나. 물론 네게 원하는 게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저건 거짓이 아니다.”

노파는 장면이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장면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이 닿자 지나치게 생생해서 괴로웠던 장면은 물감이 녹듯 흐려져서, 곧이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침묵이 감돌았다.

반응을 기다리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노파 앞에서 밀라니아는 지나갔던 장면을 곱씹었고, 그 각기 다른 장면이 총 아홉 개였음을 인지해 냈다.

덜컹, 심장이 떨어진다.

“설마.”

불안하게 흔들리는 미심쩍은 목소리에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건 네가 죽은 이후의 일들이다.”

단정적인 문장이 밀라니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밀라니아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만약 몸을 볼 수 있었다면 손을 떨었을 터였다.

여전히 믿기지는 않았지만 무표정한 노파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밀라니아는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레칸은 그럴 수 없느니. 내가 잘 안다. 그의 힘은 절대적이지 못해. 저런 짓을 벌이기에는 역량 부족이라는 말이야. 그의 성품과는…… 별개로.”

늑대족의 수장인 만큼 막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건 르베리안즈나 말란도르에 약간 밀릴 만큼의 힘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수로.

“저놈은 우리가 만든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분명한 사실이지. 그리고 그게 가능한 건…….”

짧게 한숨을 쉰 노파가 우울한 투로 말했다.

“그가 창조물의 한계를 벗어나서다.”

이건 한결 이해하기 쉽다.

밀라니아는 그들이 지닌 한계를 범인들보다 잘 이해하는 이 중 하나였다.

그녀가 자연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말란도르는 상극의 사기를 품고 있다는 것, 그리고 두 기운은 절대 융합되지 않다는 것 등.

한계는 규정되어 있고 그녀의 힘으론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에 순응하며 살았다.

한계.

그건 다른 말로 자연의 섭리였다.

‘그런데 그 한계를 벗어났다라.’

밀라니아의 마음은 불신을 품었다.

한계에 대해 말하는 건 쉽다. 벗어났다고 말하는 건 쉽다.

하지만 천 년 동안 살면서 그녀가 듣고 경험한 바로는 단 한 개체도 자연이 부과한 권한과 의무와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흔히 인간을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종족이라 하지? 하지만 인간들은 그것뿐이야.”

“…….”

“그들 종족이 가지는 한계가 워낙 일천하기 때문에 때로 엄청난 일을 벌일 뿐. 모든 생명은 우리가 기록한 길을 따른다. 천 년 전 인간 아덴샤가 이탈할 뻔하기는 했지. 이 세상의 변수라고 할 만했어. 하지만 그 역시 실패했지. 결국 죽었지 않느냐?”

밀라니아는 노파의 말에서 반박할 내용을 찾지 못했으므로 침묵했다.

“그레칸이 한계를 벗어나 날뛸 수 있는 건 이유가 있다.”

“…….”

꺼림칙한 표정의 노파는 곧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법칙에서 벗어난 물건 때문이야. 그게 없었어야 했어. 그것 때문에 모든 일이 벌어진 거야.”

“그게 무엇인데?”

“너라면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저주받았다고 천대받았고 한편으로는 경외받은 귀물.

밀라니아는 쥐어짜듯 답을 뱉었다.

“붉은 꽃.”

“그래. 그건 신의 영역에 속하는 물건이야. 이 세상의 법칙을 깨뜨리는 오점이고. 진작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내 실수고, 우리의 실수다.”

노파는 이를 가는 것처럼 쪼글쪼글한 입술을 비틀었다.

밀라니아는 붉은 꽃에서 느껴 왔던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아서 놀라웠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과 그레칸이 무슨 관련이 있지?”

“예전에 말이다. 늑대족의 수장이 제 반려를 살리기 위해 붉은 꽃을 복용케 했지. 그때 그 여자는 복중에 애를 배고 있었어. 애는 태어났고 여자는 죽었다. 그놈은 붉은 꽃이 효과가 없다고 낙담했지만 알지 못해서 그런 거였어. 사실 붉은 꽃은 제 역할을 다했던 것이지.”

“설마 살게 된 건 여자가 아니라…….”

노파는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붉은 꽃은 태아를 선택했고, 살렸다.”

“…….”

“원래 그레칸은 죽을 운명이었거든. 그리고 붉은 꽃의 부작용으로 그 모태가 죽었다.”

노파는 꽤 잔인한 내용을 태연하게 얘기했다.

이 말을 들었다면 발칸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레칸을 더 싫어하게 됐으려나.

발칸과 그레칸의 사이를 익히 알고 있는 밀라니아는 심란한 기분으로 그 얘기를 듣다가 고개를 저었다.

“잠깐, 그건 말이 되지 않느니라. 죽을 운명인데 어떻게 세상의 주역이 될 수가…….”

밀라니아가 멈칫하자 노파는 혀를 찼다.

“말했잖냐. 붉은 꽃은 세상의 법칙에 위배된다고. 그레칸은 살았고 붉은 꽃에게 선택되었다. 본래 예정된 르베리안즈의 운명에 그레칸이 끼어들게 된 게다.”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밀라니아에게 노파는 침중하게 단언했다.

“그레칸은 붉은 꽃을 품고 태어났다. 한계를 넘어설 수 있고, 창조주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게 됐지.”

“…….”

“그 힘으로 내 세상을 파멸했어. 고얀……. 그 고얀 놈! 고얀 놈 같으니!”

갑자기 발작하기 시작한 노파는 그러고도 한참이나 그레칸을 욕했다.

“감정에 휘말려 난장을 피우고. 섭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멍청이 주제에 감히, 감히, 감히!”

혼자 펄쩍펄쩍 뛰던 노파는 긴 한숨을 쉬었다.

밀라니아는 이랬다저랬다 기분이 널뛰는 듯한 노파를 의심스럽게 볼 수밖에 없었다.

저 존재가 창조주라니, 약간 막막해지면서도 그녀가 몇 번의 회귀를 반복하며 겪었던 고초의 이유를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밀라니아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창조주여, 이걸 내게 얘기해 준 이유가 있지 않겠누.”

“…….”

“내게 뭘 바라는 것이야?”

노파의 안광이 붉게 빛났다. 노파는 밀라니아 사후의 일을 설명할 때와는 다르게 격렬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인격이 바뀐 듯하다.

밀라니아는 노파가 반복해서 뱉던 ‘우리’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듣고 싶지 않아지는구먼.”

자그마한 불평에 노파가 비웃었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고 거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레칸이 세상을 파멸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 책임을 내게로 돌렸다. 그럼 뭘 원하는지 이해하기는 쉬워지느니.”

“그래? 내가 네게 뭘 원하는 것 같지?”

“……이 몸이 그레칸을 막아 주길 원하는 것 같구먼.”

뜸을 들였던 밀라니아는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전과 다른 ‘노파’가 스산하게 속삭였다.

“넌 살아야겠다. 내 세상이 망가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망가져서 시간이 돌려진 것이라면, 어차피 내가 죽으면 또 같은 운명이 반복될 게 아니냐. 나는 자신이 없느니라.”

이제 그만 쉬고 싶은 밀라니아가 변론하자 노파는 묘한 미소를 띠웠다.

어쩐지 음침하면서도 꿍꿍이가 있을 것 같은 얼굴이다.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밀라니아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던 참이었다. 노파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내가 할 말은 끝났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고, 내가 믿을 건 불행히도 너밖에 없어. 네가 잘해 주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망가져서 회생하지 못할 거다. 그렇다면 네가 좋아하는 나무와 풀과 동물과 각종 지성체들도 끝장나고 마는 거야. 그놈 때문에 너 역시 이제 나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됐으니, 부디 그놈과 달리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마.”

“그런 일방적인 말을…….”

“불만은 그만. 이제 돌아가.”

갑자기 발밑이 꺼지고, 밀라니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검은 공간으로 떨어져 내렸다.

까마득하게 깊은 곳으로 낙하하는 느낌에 당황했으나 이 이상한 이계에선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그녀는 몸에서 힘을 뺐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간.

시간도, 감각도 모두 허물어진 밀라니아는 한없이 떨어지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마음이 편안해지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어쩐지 바라 왔던 영면의 느낌이 꼭 이와 같을 것 같다.

노망난 창조주 같으니. 나보고 뭘 어찌하란 말이냐. 열 번이나 고생했으면 이제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늙은 몸을 또 고생시키려는 심보라니 대체 양심이 있는 게야 없는 게야.

모쪼록.

‘회귀할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다시 살아나는 일 없이 지금과 같았으면.

밀라니아는 귀찮은 일이 벌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몸은 바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는 아래로 끝없이 추락했다.

현실 시간으로는 무려 100년 동안이나.

* * *

천지개벽.

새로운 하늘이 열렸다. 푸른 하늘이 지고 붉은 하늘이 떠올랐다.

땅과 하늘이 뒤집히는 100년간, 르안나 제국은 연일 시끄러웠고,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천지개벽을 외치고 다니는 미치광이들과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반란 종자들이 매일같이 들고 일어나는 탓이었다.

인간의 세상은 무너지고, 이종족의 세상이 도래했다.

1대륙과 2대륙으로 갈라졌던 세상은 이종족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게 벌써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기존의 권력이 무너지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새로운 권력의 출현도 있는 법.

인간 귀족들이 눌러 살았던 우아하고 세련된 저택은 새롭게 황성을 점령한 이종족의 차지가 되었다.

바야흐로 노예 계급과 주인 계급이 뒤바뀐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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