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라즈흘 평원
마차는 평야의 경계를 넘어가려는 중이었다.
말란도르는 그의 노예가 신호를 보낸 이유를 금방 깨달았다.
마차의 뒤로 인간들이 따라붙어 있었다.
고작 열 명 남짓이었지만 추적에 일가견이 있는 무리인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차를 추적한다.
마차를 가로막기보다는 쫓는 게 목적인 듯 신중했다. 그 순간 하늘로 붉은 신호탄이 쏘아졌다.
추적자들이 서로를 향해 크게 외쳤다.
그 말이 신호가 되어 추적자들의 속도가 높아졌다.
쏜살같이 달려 나간 인간들이 마차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의 뜻입니까?”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감히 국보를 가지고 도주했으니 죽기를 각오했을 터. 아덴샤의 거울을 내놓아라.”
“황태자가 군대를 끄는 것을 가만둘 황후가 아니니……. 황태자와 황후가 손을 잡았군요.”
“곧 죽을 죄인이 그걸 알았다고 뭐가 달라지지?”
말란도르는 그제야 마차를 끌던 마부가 앨리지임을 알아챘다.
‘밀라니아는 어디 있는 거지? 여기 있는 게 아니었나?’
그의 모든 관심은 밀라니아에게 있었기 때문에 앨리지 따위, 희귀한 노예로서의 흥미는 있지만 그뿐이었다.
‘밀라니아의 기운이 느껴져.’
말란도르는 마차를 중심에 두고, 시야를 확장하여 너른 공간 전체를 관조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이 밀라니아를 찾아 빠르게 움직인다.
앨리지를 가로막은 인간과, 대치하는 마차와, 빠른 속도로 다가와 마차 주변을 몇 겹으로 감싸는 인간의 군대가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곧, 공기가 뒤틀리는 지점을 찾아냈다.
쾅!
거대한 굉음이 울리자, 대지에 내려앉은 긴장이 깨진 유리처럼 조각났다.
말란도르는 날카로운 시선을 소란이 일어난 곳에 던졌다.
군대의 후미, 기사를 지원하고 있는 마법사가 있는 쪽이었다.
* * *
말란도르가 찾아오기 전, 밀라니아는 라즈흘 평원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이미 쫓기는 토끼처럼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앨리지의 마차를 발견한 후였다.
마찬가지로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신속하게 움직이는 군대 역시 보았다.
‘단단히 칼을 갈았구먼.’
노란 카나리아에게 들은 건 앨리지가 쫓기고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지만, 그걸로도 이 상황을 이해하는 덴 충분했다.
아덴샤의 거울이 황태자를 끌어들이고, 황제에 대한 분노가 황후를 끌어들이고, 두 사람의 협의가 군대를 일으켰다.
단 하나, 앨리지가 왜 아덴샤의 거울을 들고 도망간 건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녀를 움직이는 건 연인인 황자의 삶의 구명이라는 걸 생각하면 유추하기는 쉬웠다.
‘아덴샤의 거울이 구명줄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지느냐.’
밀라니아는 혀를 찼다.
‘어리석게도.’
다 죽자는 것이나 다름없는 선택.
자신을 위험 속에 빠뜨리는 선택을 하면서도 연인을 살리고 싶어 하는 의지가 한 손에 잡힐 듯했다.
‘이렇게 멍청한 요정족은 처음이니라.’
신랄하게 말했지만 앨리지를 탓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도 많이 너그러워졌느니. 그리 간절히 원하는 소원, 들어주고 싶은 걸 보면.’
가능하다면, 아마도 기력이 남아 있어야 하겠지만, 앨리지의 연인 에반도 봐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밀라니아는 가슴께를 두드리며 ‘으음’ 침음을 삼켰다.
느낄 수 있었다.
‘영면이 다가오고 있다.’
그녀는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야 되겠다. 당장 앨리지를 데리고 귀환해야 돼.’
마차와 인간 군대의 대치 상태가 깨어지려 했다. 밀라니아는 빗자루를 고쳐 잡았다.
“…….”
“?”
대답이 없다.
“그레칸?”
뒤를 돌아본 밀라니아는 발간 얼굴로 숨만 내쉬는 그레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서 있는 것도 힘에 부치는 것처럼 그레칸의 몸이 구부정해졌다.
워낙 장신이라 그 모습이 허리 꺾인 허수아비 같았지만, 우습게 볼 수 없게도 붉게 달아오른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생생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레칸? 갑자기 왜 그러는 것이냐?”
밀라니아는 당황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손이 델 것처럼 뜨거웠다.
잘 먹고 잘 먹인 그레칸은 어릴 때와 달리 튼튼하기가 이를 데 없는 몸을 가져, 잔병치레도 하지 않았다.
낯선 곳을 헤매어 몸살이라도 난 게 아닌가 싶었던 밀라니아는 그를 꼼꼼히 살피고 나서야 원인을 깨달았다.
마음에 놀라움이 번져 나갔다.
‘병이 난 게 아니구나.’
복부 근처에 똬리를 틀고 있는 기이한 힘.
감각으로 그 부근을 더듬던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구부렸다.
‘탈 것처럼 뜨거우이.’
밀라니아는 다시 그레칸의 얼굴을 살폈다.
발갛게 열꽃이 오른 그레칸이 헐떡거리다 밀라니아와 눈을 마주치고는 머리를 털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왜 이러지?”
“…….”
“몸이 이상하다.”
평소보다 눅진거리는 목소리는 득실득실 끓는 용암의 기포 터지는 소리 같았다.
의아한 듯 쳐다보는 눈을 보며 밀라니아는 혀를 찼다.
곤란하다. 정말 곤란하다.
“각성?”
그레칸이 혼탁하게 변한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밀라니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서 말문이 막혔다.
인간을 제외한 이종족들에게 각성은 드물진 않지만 흔하지도 않은 개념이었다.
게다가 기억에 의하면 그레칸이 각성함으로써 얻은 힘은 무지막지하다.
전조만 보이는데도 벌써 온몸이 후끈한 걸 보면 오늘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게 분명했다.
원래라면 이미 몇 년 전에 맞이했어야 할 각성이 잠잠하여 이상하다 했는데, 하필 이 시점에 각성할 게 뭐란 말인가.
밀라니아의 마음은 한층 더 급해졌다. 할 일이 추가된 탓이었다.
‘그레칸은 지금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일 것이니.’
그레칸의 지금 상태는, 예를 들자면 인간 병사가 발견하고 창으로 찌르면 말랑한 푸딩처럼 꿰뚫릴지도 모를 정도로 외부의 자극에 취약한 상태였다.
물론 신의 사랑을 받는 남주인 그레칸이 그렇게 쉽게 죽는다는 건 우습지도 않은 농담이지만.
‘어찌해야 하누. 이대로 움직일 수는 없느니.’
짧게 고민한 밀라니아는 비틀거리며 빗자루 뒤에 올라타려는 그레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옷 위로 접촉한 것임에도 손바닥이 후끈거린다.
그레칸이 인상을 찡그리며 머리를 털고 밀라니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열 때문에 초점이 맞지 않는 모양이다.
“왜?”
열에 들뜬 목소리에다 고개를 갸웃거린다. 실제로는 목에 힘이 빠진 것이었지만 어찌 됐든 꽤 어린애처럼 보였다.
멍청하게 쳐다보는 검은 눈동자에 다시금 혀를 찬 밀라니아는 그러나 마음이 묘하게 부드러워졌다.
이종족의 각성은 인간들의 성인식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다른 때 같았으면 무사히 각성을 치룰 수 있도록 돌보았을 터인데, 상황이 이러니 안타깝구나.’
빗자루를 아래에 떨군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감고 그를 부축했다.
‘윽.’
무거워서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레칸의 뜨거운 체온에 힘을 끌어올렸다.
그레칸은 고개를 흔들면서도 밀라니아의 손길에 따라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쓸데없이 고집을 피우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그레칸은 밀라니아가 하자는 대로 다 하는 편이었다.
나무 아래 기대앉게 한 밀라니아는 이번에는 나무에 손을 올렸다.
이 땅의 자연과 가장 가까운 존재 중 하나의 손길에 나무가 몸을 떠는 것처럼 잎사귀를 흔들어 기쁨을 표현했다.
푸스스스.
밀라니아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나무를 매만지며 몇 마디 말을 속삭였다.
{이 아이를 보호해 주련?}
비눗방울이 톡톡 터지는 것처럼 상쾌하고 몽글거리는 목소리였다.
파슷, 파스스.
나무를 통해 보호용 마녀 결계를 펼친 밀라니아가 무릎을 살짝 접었다.
나무 밑동에 주저앉은 그레칸은 밀라니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꼭 갓 세상에 눈뜬 새끼 새가 어미 새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 같구나.’
각성 시에는 방금 막 태어난 새끼처럼 연약한 상태이니 그레칸은 본능적으로 저를 보호해 줄 상대에게 기대려는 마음일 것이다.
밀라니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기이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한 한편, 다시금 아쉬워졌다.
“네게 있어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건이거늘,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인간들과 불유쾌한 다툼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목전에 두고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머리를 헤집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까치집처럼 변했지만 그레칸은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저 기분이 좋다는 듯 발그스름해진 눈가를 반쯤 접고 으르릉거렸다.
밀라니아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서늘한 기운을 그레칸에게 쏟아부었다.
각성 열에 들뜬 몸을 완전히 식히지는 못하지만 기분은 편안하게 만들 수 있을 터였다.
그레칸은 가늘게 눈을 뜨고, 열에 들떠 갈라진 입술로 속삭였다.
“기분, 좋다.”
아주 약간 미지근해진 그레칸의 이마에 손등을 대며 그와 눈을 맞춘 그녀가 속삭였다.
“여기 얌전히 있으려무나. 곧 돌아와서 네 곁을 지켜 줄 터이니.”
‘아가야’ 하는 낯간지러운 호칭이 따라붙을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였다.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는 그레칸을 보자 밀라니아는 조금 머쓱해졌다.
답지 않은 짓을 했다.
지금의 그레칸이 덩치 크고 성질 더러운 늑대족 개체보다는 약하디약한 새끼 늑대처럼 느껴지기 때문일까.
꼭 그를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듯해서, 밀라니아의 힘 빠진 어깨가 부드러운 선을 그렸다.
‘옛날 생각이 자꾸 나는 걸 보면 정말 끝이 머지않았나 보이.’
밀라니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레칸은 말간 웃음을 머금고 밀라니아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그러나 밀라니아가 손을 떼자 보물을 빼앗긴 아이처럼 눈을 크게 떴다.
“왜?”
“어?”
“기다리고 있어.”
그제야 밀라니아의 말뜻을 이해한 그레칸은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싫다.”
사실 새끼 새라고 표현했지만, 평소에도 그레칸은 어미 새를 쫓는 새끼 새보다 심한 편이었다.
다급한 상황에서 고집을 피우는 그레칸을 보면서도 밀라니아는 화내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느니.”
그레칸이 기쁘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밀라니아의 말뜻은 그레칸을 데려간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어깨를 으쓱인 그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기대 반 의심 반으로 일어나려던 그레칸의 눈동자가 탁, 하고 게게하게 풀렸다. 졸음이 폭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밀, 라니아!”
그레칸이 눈에 힘을 주고 밀라니아를 노려봤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다시금 힘이 풀려 그의 눈이 가물가물해진다.
밀라니아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손길로 뒷머리를 나무에 기대게 했다.
“안……돼. 날, 놓고…… 가지, 마.”
“…….”
“제, 발…….”
그의 머리가 나무에 닿았다. 간신히 막아 내던 졸음이 형언할 수없이 밀려왔다.
뚫린 구멍에서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그레칸은 잠기운에 잠식되었다.
수초 후, 완전히 잠에 빠져 새근거리는 그레칸의 뜨거운 몸을 쓰러지지 않게 보듬어 준 밀라니아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무릎을 폈다.
“차라리 자고 있는 게 낫느니라.”
얌전히 있으라 말했다고 들어먹었다면 20년 가까운 시간 그레칸 때문에 골머리를 썩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내 예측에서 벗어난 인사인지라, 이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구먼. 그래도 날 따라오겠답시고 결계에서 빠져나와 눈 먼 칼에 어깻죽지를 맞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누.’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 듯했다.
밀라니아는 고개를 들었다. 인간의 군대가 앨리지를 감싸고 있었다.
“인간들의 기세가 영 심상치가 않으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오르며, 밀라니아는 그레칸에게 찾아온 각성의 순간을 생각했다.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전생에도 그레칸은 발칸의 죽음과 동시에 늑대족의 수장이 되었다.
르베리안즈 때와는 다르다.
혈족 중심 체제인 박쥐족은 고귀한 피를 가진 수장이 의식을 통해 박쥐족의 힘을 계승받으나, 늑대족은 수장의 자식이 아니더라도 수장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늑대족의 수장 의식은 힘의 계승보다 종족을 하나로 모으는 의미로써의 효과가 더 큰 편이었다.
‘그레칸은 수장이 될 터.’
가장 강한 늑대가 수장이 되는 법칙에 따라, 그레칸은 역사상 가장 강한 늑대족의 수장이 될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전생이 생각나는구먼.’
그레칸은 천 년에 한 번 나오는 늑대족의 수장이었다. 아니 천 년에 한 번이라도 나올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탄생한 후로, 그레칸 같은 존재는 처음이었으니까.’
각성이라는 형태로 또 한 번 힘을 얻은 그레칸이다.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천 년 동안 가장 강력한 늑대족 수장이라는 뜻이었다.
‘마녀족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해 둬야 했나?’
나고 자란 곳이니 양심이 있다면 마녀족을 보듬겠지만.
‘양심을 기대하기 힘들 놈이지 않누. 옛정을 생각하여 건드리지만 않아도 좋을 텐데.’
밀라니아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결국 이번 일이 끝나면 신신당부를 해야겠다는 판단을 하고 그레칸에 대한 생각은 미뤄 두었다.
아래에선 인간들이 득시글거렸다.
‘시간이 여유롭지 않으니, 단번에 끝내고 가야겠구먼.’
문득 인간 무리에서 갑옷을 차려 입은 중년 사내가 뒤로 빠지는 게 보였다.
그가 뒤에 있는 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탑주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염려 마시게. 대마녀가 오면 그 상대는 우리가 맡지.”
그들은 머리 위에 밀라니아가 있는 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대마녀?’
밀라니아는 슬쩍 눈을 찌푸렸다. 노인에게서 마력이, 인간들은 마나라고 부르는 힘이 느껴졌다.
‘탑주. 마법사의 탑을 책임지는 수장이로구먼.’
빠르게 끝내려면 머리부터 친다.
밀라니아는 아직 무사한 앨리지와 마차를 흘끗하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라즈흘 평원은 아무것도 없는 평야지만, 인간들의 눈에서나 그럴 뿐이다.
밀라니아는 이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도 얼마든지 무기를 동원할 수 있었다.
사방에서 솟구친 거대한 돌덩어리가 캐스팅을 외우고 있는 마법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이 기운은? 헛! 피해라! 적이 왔다!”
뒤늦게 매서운 기운을 눈치챈 마법사들이 가까워지는 돌덩어리를 보고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러는 사이에도 무섭게 날아든 돌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 사납게 비산했다.
쾅!
* * *
사실 인간들과 대치할 때만 해도, 밀라니아는 빠르게 정리하고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기억하는 몇백 년 전 인간들은 대마법사 아덴샤의 진전을 이었다기엔 너무나도 나약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뛰어난 점은 손재주와 편의품들을 잘 만들어 낸다 정도지, 무력은 그녀에 비해 일천한 편이었다.
죽이지는 않겠지만 모조리 기절시키는 정도로는 하려 했던 밀라니아는, 희뿌연 먼지가 가라앉고 드러나는 광경에 눈썹을 치켜떴다.
‘허어.’
놀랍게도 마법사들은 모두 멀쩡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지만 기절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 일격에 여유를 잃고 해쓱해진 마탑주가 뒤를 향해 다급이 외쳤다.
“캐, 캐스팅을 준비해 놓거라!”
‘미리 대비를 해 놓아서였군.’
그녀는 타고난 힘을 과시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보다 현저히 약한 인간에게 막혔다는 데 관대할 정도로 자존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총사령관이 침착한 목소리로 경종을 울렸다.
밀라니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지식하게 생긴 책임자의 명령에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어떻게 할까. 일단 인간이 너무 많다. 이 상황에서 손 가는 대로 쏘아 내다 앨리지가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일단은 앨리지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는 게 우선이니라.’
밀라니아는 이게 맞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이들과 싸워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레칸이 이동할 수 있을 때까지만 시간을 끈다.
그 후에는 앨리지와, 덤으로 황자까지 집어 들어 마녀성으로 날아가면 되는 일.
‘워터드래곤은 좀 조심해야 하겠지만.’
마차 쪽으로 이동하려는 순간이었다.
화악!
눈앞으로 시뻘건 불덩이가 다가왔다.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빗자루를 확 위로 꺾어 불덩이를 피한 밀라니아가 마법사 쪽을 돌아보았다.
대략 스무 명 쯤 되는 노인들이 일렬로 늘어선 채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허공에서 생성된 불덩어리들이 밀라니아에게 쏟아졌다.
고작 어른 주먹만 한 크기였지만 만만히 볼 수 없었다.
‘불덩어리에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살짝살짝 빗자루를 움직이며 피했던 밀라니아의 원피스 밑단에 불덩어리가 스쳤다.
원피스로 옮겨붙은 불이 삽시간에 검붉은색 덩치를 키웠다.
얼굴을 굳힌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불덩이는 연기를 남기고 사그라졌다.
안도할 시간도 없이, 또 다른 공격이 이어졌다.
따악!
쉴 틈을 주지 않고 밀어닥치는 불덩어리들을 향해 밀라니아는 손가락을 튕겼다.
밀라니아로부터 시작된 바람이 거칠게 불기 시작했다.
바람의 막에 막힌 불덩어리는 나뭇잎 위에 올라탄 개미처럼 밀라니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 위력과 끈질김에 그녀는 다소 놀랐다.
불을 일으키는 마법 자체는 별거 아니지만 이 작은 불덩어리를 이루는 물질이 문제였다.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불이 아니라, 흑계의 화염이 섞인 불이었다.
그 의미는 죽음의 불. 밀라니아는 그녀와 상극인 기운이 꺼림칙했다.
‘아무리 불을 쏘아도 맞지 않으면 그만이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 낸 공격이 밀라니아만 만나면 휙 방향을 틀어 사라져 버리자, 마법사는 거친 숨을 내쉬며 마법을 멈추었다.
“효과가 있다! 계속 몰아쳐!”
밀라니아는 그들이 드디어 아덴샤의 마법에 있어 큰 진전을 이루었음을 깨달았다.
기실 흑계의 화염을 섞은 헬파이어는 아덴샤가 즐겨 쓰는 공격 방법이었다.
인간 군대의 책임자가 앞으로 나섰다. 독수리를 닮은 감색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오만한 이종족이여. 역시 아무런 계획 없이 혼자 나타났군.”
밀라니아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황제에게서도 공대를 받는 그녀에게 일개 인간이 하는 말 치고는 지나치게 오만하지 않은가.
“인간이 이종족과 맺은 맹약에 대해 모르는가, 건방진 기사여?”
“널 죽이려는 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밀라니아는 슬슬 열이 받았지만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하면?”
“우리는 널 포로로 잡을 생각이다. 그분께서 새로운 맹약을 맺길 원하시니, 간악한 대마녀라도 죽일 수야 없는 노릇.”
“누가 그런 우스운 계획을 세웠느냐? 황제는 아닐 것이고.”
“황제께서는 이미 대부분의 권리를 황태자 전하께 넘기셨고, 이제 제국엔 새로운 태양이 뜬다. 그 위대한 첫걸음은 1대륙 정벌이 될 것이다!”
밀라니아는 자신만만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경지에 이른 기사인 듯, 마나를 품고 있는 육체였다.
하지만 역시 그녀를 죽이니 살리니 할 만큼 강한 자는 아니었다.
작은 물웅덩이를 앞에 두고 이 물을 정복하겠다 발악하는 개미를 보는 듯 밀라니아는 측은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덴샤가 살아 돌아오면 모를까, 넌 안 되느니.”
그녀는 평화를 사랑하지만 무례함까지 용서하는 선인은 아니었다.
딱하다는 말투에 사령관은 자신만만한 얼굴을 구겼다.
저를 보고 있는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듯 검을 빼어든다.
밀라니아는 그가 입을 열기 직전에, 위에서 아래로 손가락을 튕겼다.
“각하!”
기감이 제일 발달한 탑주가 빠르게 외쳤지만, 그 소리는 캐스팅할 필요 없는 밀라니아의 마법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투둑.
거짓말처럼 팔 하나가 땅으로 떨어졌다.
푸슉!
잘린 단면으로부터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남자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피부색이 창백해졌지만 용케 비명을 삼킨다.
벌어지던 입술이 억지로 다물어지며 목에는 징그러운 핏대가 섰다.
밀라니아는 땀을 흘리며 꼿꼿이 선 남자를 오연하게 내려다보았다.
“나는 마녀족의 수장. 맹약에 대해선 새로운 인간의 수장과 얘기할 것이며, 너는 나와 대화하기엔 자격이 없도다.”
“거…… 건방진! 황태자께선 고작 이종족 수괴의 말에 귀를 기울이실 분이 아니시다!”
밀라니아는 증오로 불타는 총사령관의 시선을 받으며 빗자루를 돌렸다.
방어 마법으로 어떻게 막고는 있지만 오래 버티진 못할 듯했다.
“밀라니아!”
멀리서 르베리안즈가 날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의 뒤를 다수의 박쥐족이 따르고 있다.
고개를 돌리자 반대쪽에선 말란도르가 상황을 살피고 있다.
‘늦지 않게 왔구먼. 이렇게 되면 빠져나가기 어렵지는 않겠느니.’
앨리지를 데리고 빠져나가는 건 조금 곤란한 일이지만, 어렵지는 않다. 밀라니아는 그렇게 판단했다.
마법사들의 수준이 좀 높아진 것 같지만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대마녀인 밀라니아라도, 모든 일을 계획대로 진행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어떤 변수가 끼어들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밀라니아의 예상에서 벗어난 건 첫 번째, 인간 군대가 생각보다 강했다.
둘째는, 그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태였다.
‘황제가 황태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황태자가 아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망나니 인 건지 모르겠구먼.’
지금 황태자는 이종족들을, 손잡을 존재가 아니라 군림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황제라면 절대 보이지 않을 태도였다.
자신에게 팔이 잘린 사령관은 오만한 성품 같기는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제멋대로 일을 키울 권한은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이 모든 건 황태자의 뜻이라고 봐야 하느니.’
대화가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대감도 갖고 있다는 게 그의 뜻이다.
‘인상이 좋지 않더라니, 황태자가 문제였구나.’
셋째는, 수백 년 동안 적잖이 바뀐 인간 세상의 분위기였다.
[어린 마녀들이 2대륙행에 나서지 않겠다네요. 가면 기분만 나쁘다고요. 듣던 것과 달리 배타적이라서 위험할 뻔한 적도 많았던 것 같으니 당분간은 두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체라의 염려가 맞았다.
밀라니아는 과거에 친한 인간들이 꽤 많았지만 지금 그들은 무덤에 묻혀 백골이 되어 버렸다.
그때에 비해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대마녀의 이름은 퇴색되고 바래져서 인간들로 하여금 존중을 이끌어 내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날 존중하지 않는 걸 넘어서서 날 혐오하고 있는 것 같으이.’
천 년 전 대마녀의 배타적이면서 적대적인 외교 정책의 후유증으로 이종족의 위험성이 유행처럼 번져 나갔고, 특히 마녀들의 위험성을 서술한 책이 아카데미 교재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지만 밀라니아는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로 예상에서 벗어난 건, 그녀의 몸 상태였다.
밀라니아는 마차를 향해 날아가며 손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힘이 빠져 빗자루에서 떨어질 뻔해서, 심장이 발등까지 튀어 나갈 듯 쿵쾅거렸다.
‘설마 여기서…….’
그렇게 재수 없는 일이 벌어질까 싶지만 저릿하면서도 감각이 사라지는 손가락의 감각을 보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밀라니아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얼어붙은 시선이 그레칸을 보호하고 있을 나무로 향했다.
‘그레칸에게, 곧 돌아갈 거라고 말했거늘.’
그레칸이라면 철석같이 믿고 있을 것이다. 밀라니아가 돌아올 것을. 그리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었다.
차라리 앞으로 잘 살라고 덕담을 던졌으면 좋았을까?
‘그토록 바라던 영면의 시기를 미루고 싶어질 줄 정녕 몰랐느니.’
라즈흘 평원에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한 인물은 르베리안즈였다.
그는 밀라니아의 곁을 졸졸 따라다녔던 그레칸이나 인간의 생리에 능통한 말란도르에 비해 현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그가 굳이 파악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될 방향으로 명확한 그림을 그리며 흘러갔다.
르베리안즈는 함성을 지르는 군대 앞에서 악을 쓰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보병 1군, 2군, 전진!”
불시에 팔을 잃은 남자가 고통을 분노로 치환하여 내지르는 분노의 음성은 악에 받쳐 있었고 등골이 오싹한 데가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
그의 의기에 호응하듯 동서남북으로 또 다른 인간 군대가 나타났다.
목청이 터져라 내지르는 함성 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르베리안즈의 섬세한 얼굴에 질린 표정이 떠올랐다.
이미 모여 있던 군대만으로도 박쥐족의 수보다 많을 정도였는데 거기서 더 늘어나다니.
언젠가 스칼렛은 날지도 못하고 힘도 약하며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습성의 인간족을 하찮게 생각하는 르베리안즈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나하나는 미약하나, 모이면 강하다.]
[유일하게 신이 정한 한계가 없는 종족이다.]
그때는 와닿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꽤 신경 쓰이는 말이었다.
당황스럽던 감정이 가라앉고 무표정해진 르베리안즈는 어지러운 전황을 발아래 두며 검은 피막의 날개를 펄럭거렸다.
‘밀라니아를 괴롭히고 있다는 거. 그거 하나만 중요한 일.’
르베리안즈는 박쥐족을 이끌고 밀라니아에게 날아갔다.
그를 발견한 일단의 인간 군대가 창칼을 하늘로 날렸다.
득달같이 등장한 궁수가 화살을 쏘았다.
“으악!”
“한심한 것!”
신랄하게 비난하면서도 르베리안즈는 날개를 위로 쫙 펼치고 추락하는 일족에게로 향했다.
다행히 일족이 지면과 충돌하기 직전 구해 냈지만, 인간 병사들이 금세 주변을 둘러쌌다.
곧바로 날아오르려던 마음을 접고 그는 짜증 섞인 시선으로 철제 갑옷으로 몸을 감싼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징그럽다는 표정으로 르베리안즈는 손을 떨쳤다.
“으아아악!”
무형의 힘에 부닥친 세 명의 병사들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뒤로 날아갔다.
“로드. 엄호하겠습니다.”
일족의 보호를 받으며 르베리안즈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날개를 손발처럼 움직이고 인간들을 쳐내면서 박쥐족 전사들은 전진해 나갔다.
아무리 수가 많다지만 병사들은 거침없이 걸어가는 박쥐족 전사들을 제대로 저지하지 못하고 방어하기에만 급급했다.
그들은 그렇게 들판을 제 집처럼 누비다가 밀라니아에게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쿵!
쿵쿵!
그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쿠웅―!
발밑에서 전해져 오는 진동에 고개를 든 르베리안즈의 얼굴에 황당함이 번졌다.
“저 괴물은 뭐야?”
사방에서 갑옷과 창칼로 무장한 인간들이 들이닥치고 있다.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였지만 르베리안즈의 시선은 홍해와 같이 갈라진 인간들 사이를 누비는 거대한 괴물에게 꽂혔다.
은색의 광택이 흐르는 거대한 갑옷.
얼굴이 있어야 하는 부위는 투구로 가려졌지만 그 안에 인간의 얼굴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오백 년 묵은 아름드리나무보다 족히 두 배는 더 클 것 같은 그 괴물이 주먹을 들어 올리자 르베리안즈의 머릿속에 붉은 등이 켜졌다.
옆으로 몸을 날린 건 거의 본능적이었다.
콰직!
괴물이 주먹을 치운 자리엔 미처 피하지 못한 박쥐족 전사 하나가 피떡이 되어 있었다.
파르라니 놀랐던 르베리안즈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다시금 주먹을 들어 올리는 괴물에게 그의 신형이 쏜살같이 쏘아져 들어갔다.
노호성이 터지자 멀리서 인간들을 상대하던 말란도르가 르베리안즈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 격돌하는 갑옷 괴물을 발견했다.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괴물을 처음 본 르베리안즈와 달리 괴물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런 미친.”
“끄아아아악!”
그가 신경질적으로 휘두른 손에서 뿌려진 죽음의 기운에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진 인간이 단말마를 흩뿌렸다.
사령이 되어 버린 인간에게는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고, 말란도르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헛웃음을 흘렸다.
‘저게 여기에 나타나?’
말란도르는 저 괴물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밀라니아는 꽤 오랫동안 그를 그녀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착각’했지만 사실 살아온 시간을 셈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긴 시간을 살아온 말란도르였으니, 어지간한 건 대충 눈치로 때려 맞춰도 될 정도였다.
그는 만물의 많은 것을 본능적으로, 경험으로, 또는 직감으로 어림할 수 있었으나 저것의 정체에 관해선 특별히 깊이 탐닉한 바가 있었다.
그와는 일종의 천적 관계였으므로.
‘타이탄 골렘!’
아주 오래전에 아덴샤가 만들고자 했으나 기술력이 부족하여 실패했던 마법 생물.
그 위대한 마법사 아덴샤도 이론상으로만 구상했지, 환경적 제약으로 실제로 구현하지는 못한 괴물이었다.
아덴샤가 만들었다던, 보통의 튼튼한 골렘도 어지간한 기사는 열 합을 겨루지 못할 정도로 강한 마법 생물이었는데 심지어 저건 그 상위 생물체였다.
아덴샤가 위대한 마법으로 무생물을 움직였다 하여 존경과 경외의 의미로 인간들이 생물체라고 붙인 것이지, 실제로 저것이 숨을 쉬는 일반적인 생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타이탄 골렘은 생명의 근원이 없어 내 힘이 잘 통하지 않아. 인간들이 골치 아픈 걸 만들어 버렸네.’
생명력, 또는 생기 대신에 마력으로 움직이는 생물. 그게 마법 생물인 타이탄 골렘의 정체였다.
생기가 없으므로 생명체라고 할 수 없고, 그건 생명 그 자체에 절대적 힘을 발휘하는 그와는 상극인 마법.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말란도르는 타이탄 골렘의 공략법을 생각해 냈지만 찝찝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타이탄 골렘은 아덴샤가 구상한 역작 중의 역작이다.
저건 천여 년간 마법과 함께 발전한 인간의 과학 기술이 절정에 달한 산물.
고작 스물도 안 되는 이종족을 저지하려고 꺼낸 물건으로는 과한 감이 있었다.
다 악명 높은 대마녀의 이름값 때문이었지만, 어찌 됐건 골치 아프게 되어 버렸다.
종횡무진 누비며 르베리안즈와 박쥐족 전사를 상대하는 타이탄 골렘을 보며 말란도르는 혀를 찼다.
“괴, 괴물…….”
“음?”
박쥐족의 르베리안즈와 달리 혼자인 그를 향해 개미떼처럼 달려들었던 병사들 때문에 공간이라곤 없었던 말란도르의 주변은 어느새 텅텅 비어 있었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병사들의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달달 떠는 손은 창을 놓치지 않는 게 용할 정도였다.
“이 악적! 무, 무슨 사술을 부리는 거냐!”
말란도르의 반경 3미터 안에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었던 것은 있었지만.
발밑에 가득한 백골을 발끝으로 툭 친 말란도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 이 괴물!”
제법 태평스러운 그 모습에 순식간에 동료 수십을 잃어버린 병사들이 이를 갈았지만 용감하게 앞으로 나서는 이는 없었다.
말란도르가 손을 내저었다. 손바닥과 손끝에서부터 뿌연 회색빛 연기와 불길하도록 새카만 연기가 새어 나왔다.
말란도르의 고유 기운 ‘죽음’이었다. 달려들던 병사들은 손쓸 틈도 없이 먼지로 화했다.
스아아아아.
연기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말라붙은 살점이 남은 흰 뼈뿐이었다.
“……!”
방금까지 정력을 뿜어 대며 투지를 불태우던 동료가 괴이한 연기에 휩싸여 억 소리도 못 내고 사라지는 광경은 인간 병사들 내면 깊숙이 숨겨진, 죽음에 반하는 본능을 자극했다.
생명체라면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명예나 부귀영화 같은 것보다도 훨씬 앞선 욕구인 ‘삶’에 대한 본능이었다.
병사들은 어느새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고 있었다.
삶을 추구하는 생명체의 가장 근원적 본능이 경고성을 울렸다.
흑계의 수장이며, 생기와 반대되는 죽음의 권능을 다루는 말란도르는 더는 인간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얼른 찾아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말란도르는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이며 생각했다.
극심한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다.
인간 백여 명에게 죽음을 내리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나, 흑계를 떠난 지 오래됐기도 했거니와 인세의 공간을 짧은 시간 내에 너무 자주 이동한 게 극심한 피로감의 원인이었다.
소모된 마력을 채우기 위해 흑계에 갔다 와야 하는데, 당장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몇이 달려들든 상관없지만.’
타이탄 골렘을 흘끗했다.
골치 아픈 타이탄 골렘은 르베리안즈가 막고 있었다.
밀라니아도 마법사들이랑 노닥거리고 있다.
일단 그녀가 무사한 걸 확인한 말란도르는 문득 그레칸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어라, 이런 상황에서 밀라니아 곁을 떠날 놈이 아닌데. 어딨지?’
그 시각, 그레칸은 피를 토하고 있었다. 무게를 가누지 못한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쿨럭.
벌어진 입으로 타액이 섞인 걸쭉한 핏물이 쏟아졌다.
손으로 땅을 짚은 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열기로 자글자글 끓는 목구멍은 살점이 쩍쩍 갈라지고 있었고, 배어 나온 비린 피가 타액과 함께 섞여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용케 두 손으로 땅을 받쳐 몸을 지탱한 그레칸은 손가락을 오므려 잡초를 움켜쥐었다.
잠시간 눈을 감고 구역감을 내리누른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수면 마법에서 벗어났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가?’
그레칸은 스스로의 몸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구릿빛 피부는 벌겋게 달아올라 열꽃이 피어 있었다.
아직 각성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고 피는 평소보다 빠르게 돌았다.
달뜬 각성 열로 인해 밀라니아의 마법이 원래의 효력을 발휘 못하고 깨어진 것이었다.
자세한 이유는 몰라도 마법에서 풀린 그레칸은 만족하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새액거리며 흐르는 숨에도 피가 섞여 나왔다.
거북한 고통에 그레칸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몸은 나른한 듯하면서도 기이한 힘이 넘쳐흘러 이상야릇했다.
한편으로는 뒷목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불쾌감도 느껴져서 그레칸은 손을 들어 뒷목을 박박 긁었다.
건조함에 가뭄 든 논밭처럼 쩍쩍 갈라지고 있던 뒷목에서 핏방울이 섞인 각질이 떨어졌다.
각질이 벗겨져 나간 뒷목은 매끈한 구릿빛 피부였다. 예사로 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무심코 제 몸 상태에 좀 더 집중하려던 그레칸은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느낌에 불현듯 초조함을 느꼈다.
‘이럴 때가 아니야.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그에게 있어 잘못된 것. 다름 아닌 밀라니아의 부재였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마도 발칸과 늑대족을 버리고 밀라니아를 그의 ‘있을 곳’으로 정했을 때부터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곁이 가장 편하게 느껴졌다.
예나 지금이나, 언제고 항상, 아마도 영원히. 그의 ‘있을 곳’은 밀라니아뿐이었다.
비척거리며 일어난 그의 귀로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혼재된 굉음이 파고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자 검은색 눈동자가 좁아들었다.
날은 어둑해져 밤이 되고 있는데 이상할 정도로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렴풋하게 강해질 거라는 직감이 들었지만, 그레칸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딱히 강해지길 원한 적은 없었다. 그는 밀라니아의 곁에 좀 더 수월히 있을 수 있게 되면 그걸로 족했다.
르베리안즈와 거슬리는 말란도르를 깔끔히 치울 수 있으면 더 좋고.
‘밀라니아가 안 보여.’
안력은 전보다 좋아졌지만 그래도 그녀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일단 인간이 너무 많다.
거대한 괴물이 쿵쿵대며 돌아다니는 데다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끔찍한 소음이 예민해진 청각을 송곳처럼 쑤셔 댔다.
얼굴이 일그러진 그레칸은 쿵쿵대며 뛰는 가슴 부근을 움켜쥐었다. 세찬 고동이 전해져 온다. 피가 빠르게 돌고 있는 탓이다.
그뿐일진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꼭 숲속에 사는 보이지 않는 괴물을 앞에 둔 듯했다.
눈뜬장님이 된 기분이라 그레칸의 준수한 눈매가 사납게 구겨졌다.
한가롭게 이유를 찾을 시간은 없었다. 밀라니아에게 가 봐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초조하게 울려 댔다.
슥, 그레칸은 전투에서 안전했던 나무의 영역에서 벗어났다.
조금 이상한 저항감이 있었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그레칸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마녀의 결계를 뚫고 나간 그레칸은 곧바로 인간 병사를 맞아들였다.
갑옷을 입고 있는 병사는 그레칸을 보고 주춤했지만, 이종족이라고 판단한 모양으로 칼을 쓰는 덴 주저함이 없었다.
“죽엇!”
아직 상황을 모르는 그레칸은 싸움이 벌어졌구나, 하고 곧바로 깨달았다. 싸움의 주체 중 하나가 밀라니아라는 것도 연달아 눈치챘다.
그렇다면 병사는 밀라니아의 적이었다.
그레칸의 분홍빛 입술이 벌어지자 날카로운 이가 드러났다. 병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콰직!
단번에 병사의 목덜미를 물어뜯은 그레칸은 비릿한 피 냄새에 정신이 혼몽해졌다.
빠르게 도는 피. 후끈거리는 열감. 쇠 냄새 나는 혈 향.
그는 점차 감각의 낭떠러지로 몰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평원의 가운데 그의 그녀가 있었다.
밀라니아를 발견하고 환해진 그레칸의 눈은 곧 흉하게 일그러졌다.
외팔이 검사가 하늘에 떠 있는 밀라니아에게 검을 던진 것이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으나, 그레칸은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했다.
그의 감정과 이성은 균형추를 잃어버린 저울처럼 제멋대로 움직였고, 평정을 찾는 건 평소보다 백배로 힘들었으며 감정은 들불처럼 쉬이 끓어올랐다.
“감히.”
씹어 먹을 듯 뇌까린 그레칸은 시기를 잘못 맞추고 달려드는 인간의 목덜미를 주저 없이 물어뜯었다.
그러나 역시 몸 상태가 문제였다. 게다가 달려드는 인간은 드글드글한 개미 떼처럼 무수히 많았다.
마음과 달리 좀체 앞으로 나가지 못하자 그레칸은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신체 내부에 모여드는 힘은 아직 잡힐 듯 말 듯 했고,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쓸 수 없는 힘의 생성은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였다.
쿠직!
힘 조절이 되지 않아 머리가 부스러진 병사의 시신을 옆으로 치우고 그레칸은 밀라니아를 살폈다.
마법사들이 밀라니아의 발을 묶고 기사가 검에 기운을 일으켜 밀라니아의 몸을 노리고 있다.
모든 정황이 집중하는 그에게는 한눈에 들어왔다.
그레칸은 마음이 급해졌다.
‘다소의 공격을 허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밀라니아에게 가야겠다.’
마음먹고 발에 힘을 주는 순간, 그물이 그레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미끄러진 그레칸의 몸을 칭칭 감은 그물은 그가 발버둥을 칠수록 조여들었다.
어리둥절한 그레칸의 귀로 환호성이 흘러들었다.
“내가 잡았어, 이 사악한 괴물의 새끼.”
그레칸을 둘러싼 병사들이 창으로 그를 겨누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신체 한 군데가 아니라 머리가 꿰뚫려 즉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뇌를 녹이는 듯한 열과 비릿한 혈 향에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억지로 생각을 이어 갔다.
빌어먹을.
날카로운 이빨로 입 안 살점을 물어뜯고 그는 다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빌어먹을 상황이다. 밀라니아가 위험에 처해 있다.
다른 이들이 아무리 그녀를 힘 센 대마녀라고 추앙한다지만 그레칸이 보기에는 불안하기만 했다.
자신이 가서 지켜 줘야 하는데, 빌어먹게도 방해하는 자들이 주변에 수두룩했다.
그게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이었다.
‘방해꾼.’
방금까지는 그와 관계없었던 인간들이, 지금은 씹어 삼켜도 부족한 방해물이 되었다.
그레칸의 검은 눈동자가 확장되며 길죽하게 뻗은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노란 홍채가 주홍빛으로 짙어졌다.
그르릉. 낮은 짐승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위협적으로 몸을 부풀린 그레칸은 그가 물어뜯었던 인간의 피로 피 칠갑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 모습으로 노려보는 눈은 영락없는 짐승의 것이라, 그를 경계하던 병사들은 오싹 소름이 끼쳤다.
“크르!”
흠칫, 저도 모르게 주춤한 병사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일그러졌다.
방금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과장된 노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노예 따위가!”
병사에게 이종족이란, 노예로 부리던 모습으로나 익숙했던 존재들이었다.
하찮고도 같잖은 것.
그런 존재에게 한순간이나마 겁을 집어먹었단 사실이 수치스러워,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안겨 준 눈앞의 이종족을 없애 버리고 싶었다.
‘윗선의 명령이 있었으니 죽이지는 않겠다만 동료들을 숱하게 죽인 개새끼니까. 팔다리 정도는 잘라도 문제없을 거야.’
그레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향해 짓쳐 드는 창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창이 몸을 꿰뚫려는 찰나 그레칸이 번개처럼 손을 움직여 창날을 움켜쥐었다.
의외의 상황에 남자는 당황했다.
끙끙 힘을 써도 창을 회수하지 못한 병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우습지도 않은 꼴을 바라보는 그레칸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병사를 보는 한편, 어떻게 하면 이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불행히도 지금의 불안정한 몸 상태로는 인간이 만든 도구 하나에도 벗어나기 힘들 것 같았다.
‘밀라니아가 저기 있는데. 저기서 공격을 받고 있는데.’
근데 그는 이런 곳에서 발목이나 잡혀 있다.
답답함에 마음이 초조해졌고, 분노가 거세게 일어났다.
그레칸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인간을 시야에 담았다.
전신 근육이 터질 것처럼 팽팽해졌다. 근육에 힘줄이 곤두선다.
피를 뒤집어쓴 몸이 높아진 체온으로 짙은 혈 향을 뿜어냈다.
‘몸이 풀리고 있다.’
그레칸은 점점 차오르는 힘을 느꼈다.
심장이 빠듯하게 아파 오고 근육과 관절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그는 몸에 힘을 주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레칸이 새로운 감각에 적응하는 그때. 같은 시각, 그가 태어나고 피를 공유한 이들이 있는 1대륙에선 늑대의 하울링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우우우우―.
그들은 방금 오랜 시간 집권한 수장을 잃었다.
그들의 하울링은 수장을 잃은 추모곡이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수장을 부르는 노래였다.
가장 강한 일족을 수장으로 추대하는 늑대족의 특성상, 그레칸은 이 순간 자동으로 늑대족의 수장이 되었다.
이미 오래전 각성해야 했으나 밀라니아의 곁에 있어 억눌러 둔 흉포한 힘이 그의 혈맥을 타고 흘러 마침내 폭발적으로 발현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가 태내에 있을 때부터 품어 왔고, 사악한 뱀처럼 피 안에 교묘히 숨어 있던 금지된 힘 역시 육체의 성장에 발맞추어 존재감을 드러냈다.
번쩍 뜬 눈에서 새카만 안광이 무섭게 뻗어 나왔다.
“크으으…….”
드디어 진정한 의미의 성체가 되는 순간, 그를 뒤흔드는 감정은 둘이었다.
하나는 밀라니아를 제외한 모든 방해하는 이들에 대한 증오.
그리고 밀라니아를 향한 갈급한 애절함이다.
금지된 힘은 저주로써 감정을 고정시켰다. 그는 이제 이 감정을 영원히 잊지 못할 터였다.
‘밀라니아에게 가고 싶다.’
인간을 향해서는 화풀이를.
‘방해하는 인간들을 죽여 버리고…… 싶다. 모두. 남김없이.’
그레칸은 자신에게 나타난 이상한 변화를 어렴풋하게 눈치챘다.
감정이 널뛰며 눈앞의 방해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싶은 살심이 해일같이 일렁거려,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손가락을 물어뜯는 심정으로 참아 냈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밀라니아가 싫어할 거야.’
죽이더라도 그녀에게 허락받은 뒤 해야 하지 않겠는가.
몸이 완전히 나았다는 것을 인지했다.
짐승이나 잡을 법한 그물을 가지고 저를 옭아매는 이들을 한 손에 뿌리칠 수 있으리라는 예감도 들었다.
그건 조금 이치에 맞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레칸의 힘은 인간들이 신력이라 생각할 만큼 강했으나, 어떻게 보면 고작 그뿐이었다.
강한 육체를 제외하고는 마력이 없고, 날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는 르베리안즈나 말란도르에 비해서도 약한 감이 있었다.
자만이든가 과신이든가 미욱함이든가. 그중 하나로 어리석어진 것이 아니라면 힘든 일이었다.
그레칸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팔을 들자, 그물이 찢어졌다.
손을 휘저었다.
“어어어?”
경악하는 인간들이 그물을 잡고 휘두르는 그의 힘에 버티지 못하고 낙엽처럼 쓰러졌다.
“뭐, 뭐야.”
병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경악한 눈으로 저를 경계하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그레칸은 눈을 깜박였다.
기이한 시선으로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자신의 손이 맞았다.
발로 땅을 굴러보았다. 그다지 힘을 준 것도 아닌데 삽으로 깊게 판 것처럼 흙이 팔팔 튀었다.
몸이 이상하다.
‘아, 이게 바로 각성.’
엄청난 힘을 얻었으나 그레칸의 감상은 길지 않았다.
이제는 그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
어쩌면, 수명을 늘릴 수 있을지도 몰라.
희망과 기대로 설레는 그의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툭.
이마에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에 그레칸은 고개를 들었다.
투두둑. 투둑.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쨍그랑!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잦아들고, 빗소리가 가득한 평원에서 울린 이질적인 소리.
그 이질감이 그레칸의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레칸은 귀신같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밀라니아를 찾았다.
그레칸만이 아니었다.
인간들을 잡아 두던 말란도르도, 타이탄 골렘을 파괴 직전으로 몰고 간 리베리안즈도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하늘에 가득했던 구름이 흩어지고, 나타난 달빛이 땅으로 쏟아져 내렸다.
가슴에 올린 손을 내린 밀라니아는 의문에 잠긴 얼굴로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흰 원피스의 가슴 부근에 붉은 색이 번져 나갔다. 꼭 화려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그 기이하고도 묘한 광경에 싸워 대던 인간들도 숨을 죽였다.
창백한 낯빛의 밀라니아가 버석하게 마른입을 벌렸다.
“아.”
탁한 외마디를 남기고, 밀라니아가 추락했다.
그레칸의 입에서 폐부가 짜부라지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 * *
10분 전.
밀라니아는 마법사들의 공격을 설렁설렁 피하며 방어에 치중했고, 몸을 회복할 시간을 벌었다.
대마녀가 영면 전 마지막 1년을 마녀족의 곁에서 머무는 건 첫째로, 남은 자들의 슬픔을 덜기 위해서이며 둘째로, 불안정한 육체를 보호하고자 함이다.
힘이 돌아오지 않는 몸이 회복되기를 바라며 밀라니아는 마법사가 난사하는 마법과 기사의 강력한 오러 소드를 피했다.
빗자루에 의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요리조리 도망만 다니기는!”
모시던 상관이 외팔이가 된 사태에 분노한 기사들이 이를 갈았다.
건방진 말에 약간 부아가 치밀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인정하므로 밀라니아는 어깨만 으쓱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몸의 저림이 사라지자 곧장 앨리지의 마차 천장으로 날아갔다.
“대마녀님!”
지쳐 있던 앨리지가 기쁜 얼굴로 외쳤다. 밀라니아는 그녀의 엉망인 꼴을 보고 혀를 찼다.
보호 마법으로 어찌어찌 병사들을 상대하고는 있으나 눈먼 칼에 찢겨 나간 옷엔 피가 말라붙어 있다.
앨리지는 마차를 지키느라 필사적이었고, 밀라니아는 우선 그녀의 부담을 덜기 위해 마차에 보호의 술을 걸었다.
“마차는 걱정 말거라. 당분간 허락 없이는 열리지 않을 것이니.”
밀라니아는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라 간단한 술을 거는 것도 힘에 부쳤다.
높아진 눈높이에 전황이 한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