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밀라니아의 새로운 결심
“그놈의 탑주 타령.”
말란도르는 다시 혀를 쯧쯧 찼다.
“인간이 수명 연장의 비기를 알고 있다면 지금까지 쓰지 않을 이유가 있겠어? 고작 100년도 안 되는 시간을 사는 필멸자만큼 삶이 간절한 존재가 또 있을까! 그런데도 없다고 그들에겐.”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
말란도르는 순간적으로 자신만만히 고개를 끄덕일 뻔하였다가 밀라니아의 시선에 간신히 참아 냈다.
‘방법이 있냐고?’
있다. 아무렴, 지금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바로 천 명의 생명을 바쳐 시간을 버는 방법이지. 그거면 일 년 즈음은 밀라니아를 더 살게 할 수 있어.’
말란도르가 지금까지 해맑게 르베리안즈와 그레칸을 놀려 먹은 것도, 자신에겐 방법이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레칸은 여유로운 말란도르를 보며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너, 찝찝하군.”
말란도르는 뒤늦게 표정 관리를 했다.
‘이놈들이 내 속내를 알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지만, 이 자리에 밀라니아가 있다는 건 중요하지.’
그녀가 자신의 속셈을 안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자신을 보지 않을지도 몰랐다.
황급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르베리안즈가 비웃는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제 놈도 방법이 없으면서 뭘 시시덕대고 있어?”
신경을 긁는 말투에 말란도르의 이마에 푸른 핏줄이 곤두섰다.
뭘 모르는 놈의 뭘 모르는 말이니 무시하자 싶으면서도, 그렇게 이상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면 말란도르는 말란도르가 아니었을 것이다.
냉철한 말란도르, 차가운 이성의 지혜로운 말란도르가 됐겠지.
“실패자가 할 말은 아니지?”
“입을 찢어 버려도 계속 그렇게 말할 수 있을는지도 궁금해지네.”
“한번 해 볼래?”
한편 밀라니아는 옥신각신하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안 되는 일에 아등바등하며 어떻게 하려는 그들의 모습이 망막에 맺혀 쉬이 지워지질 않았다.
처음에는 이 셋이 이러는 게, 그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이 아쉬워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이거 지금 보니 한바탕하고 가라앉을 분위기가 아니지 않누.’
별거 아니겠거니 생각하고 쉬이 넘기면 단단히 실수하게 되리라는 예감이었다.
‘과민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느니. 막상 이 몸이 죽으면 뿔뿔이 흩어져 나름대로 잘 살아갈 수도 있고.’
그러나 마음 한편에 불쑥불쑥 치켜드는 불안에 자꾸만 과민 반응하게 된다.
‘지금도 통제 불능인 것들을.’
자신이 죽은 뒤 문제가 생긴다면 난리가 나도 단단히 날 것이었다.
별거 아닌 이들이 아등바등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저 셋은 이미, 혹은 가까운 미래에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일족의 수장이 된다.
강대한 힘의 수장 셋이 날뛴다면 세상은 풍비박산의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사후를 이다지도 걱정하게 될지는 몰랐느니.’
과민 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대비를 해 둬야 하지 않겠는가.
밀라니아는 깊은 생각에 잠기었다. 자연스럽게 기사년이 가지는 의미를 떠올렸다.
‘영면에 드는 대마녀는 끝을 예감할 때 기사년을 가지지.’
기사년.
죽음을 대비하는 시기로, 그 시간은 대략 1년 남짓이었다.
이 시점에 대마녀는 마녀족의 일원들과 조용히 마지막을 함께하는 시간을 지내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게 태어나는 대마녀는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은 같으나 결코 이전의 대마녀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없었다.
‘이 이름을 갖고 이 정체성을 갖고, 이 생각을 가진 나는 이번 생이 마지막이니라.’
999년의 삶. 그리고 마지막 1년의 삶.
대마녀는 이 마지막 안식의 시간을 이제껏 다스려 온 마녀족의 품에서 보낸다.
기사년은 대마녀의 안식을 기리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남겨질 마녀족을 위안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남은 일족들은 마지막 1년을 통해 천 년 동안 그들을 품어 온 어미와 같은 존재인 대마녀를 떠나보내는 슬픔과 그리움을 추스르는 것이다.
그 소중한 마지막을 밀라니아는 이 셋에게 할애하는 게 어떨까 고민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사후에 있을 이들의 통제 불능 상태를 염려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용없다 했는데도 저를 위해 이렇게 아등바등 노력하는 것이 왜인지 기특하기도 하고 마음이 쓰인다.
‘이대로라면 마지막 가는 길에도 눈에 밟힐 것 같으이.’
마녀성으로 돌아가면 마지막 시간을 보낼 공간을 찾아야겠다.
마지막까지 공을 들일 앨리지와 그녀의 연인, 말란도르, 르베리안즈, 그리고 그레칸까지.
많다면 많은 인원이니 꽤 큰 부지가 필요할 것이다.
말란도르의 저택 정도면 괜찮겠지만.
‘그 사기 가득한 곳에 살았다간 얼마 남지 않은 수명도 대폭 줄게 될 것이야.’
어쨌든 그녀는 마녀족과 같이 이 세 사람을 위한 안식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막 회귀했을 당시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죽은 자의 망령과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는 필히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니 괜한 말을 하는 건 아닐 것이야.’
겸연쩍어진 밀라니아는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큼, 헛기침을 했다.
“이쪽을 보거라.”
낯간지러운 기분. 밀라니아는 머쓱해져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녀의 사소한 몸짓 하나에도 시선이 따라붙었다.
“다들 이쯤 되면 이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니. 보다 솔직히 말하면, 내게 남은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으이. 어쩌면 1년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
낮으면서도 청아하기도 한, 독특한 목소리는 모두의 집중을 끌어들였다.
밀라니아는 얌전히 저를 응시하는 그레칸, 르베리안즈, 말란도르를 차례차례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에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그들의 위로 아슬아슬하게 매어진 고삐가 보이는 것 같았다.
다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다. 자신이 잡고 있는 수밖에는.
옅은 한숨이 그림 같은 입술 사이로 빠져나갔으나, 정작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다.
집중하고 있던 세 사람은 그 한숨과 미소의 의미를 몰라 두 눈에 의구심을 떠올렸다.
“할 일이 많거늘 너희 때문에 머리가 아프도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어 봤느니.”
눈치 빠른 말란도르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아직까지도 내 나름대로 생각이 많아 머리가 지끈거리니라. 노인 공경이라고는 조금도 고려 않는 것들 같으니라고.”
르베리안즈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건 인간들에게나 통하는 거잖아요. 여기 얼마나 오래 있었다고 ‘노인’, ‘공경’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거예요.”
“시끄러워.”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말이 끊겨 짜증 난다는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맞대응하려던 말란도르와 르베리안즈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밀라니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알아서 정리된 분위기에 밀라니아는 맥이 빠진 얼굴로 한숨을 삼켰다.
“난 기다리고 있다.”
눈을 진지하게 반짝이는 그레칸을 보고, 그녀의 잇새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 부슬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
“남은 시간은 많지 않겠지만, 너희들만 괜찮다면 함께 지내자꾸나.”
“……뭐?”
르베리안즈와 그레칸도 별다를 것 없는 표정이었다.
아무도 지금도 함께 지내고 있지 않냐며 멍청히 굴지 않았다.
“알고 있었어요. 지금까지는 내가 억지로 당신 곁에 붙어 있었다는 거.”
르베리안즈의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건 말란도르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곁에 있길 허락하겠다는 맥락으로 그녀가 지금 한 말은, 그래서 세 사람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내 기꺼이, 마지막을 너희와 보내려고 하느니.”
“…….”
“괜찮겠느냐?”
밀라니아는 조심스러운 질문으로 말을 맺었다.
사뭇 건조하게 들리는 목소리였으나, 아침 햇살이 포근히 내려앉는 것처럼 따뜻한 감촉이었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로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에 손을 넣은 기분.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세 사람을 보고 있으려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사랑을 알지는 못한다.
천 년이란 시간 동안 어지간한 오욕 칠정을 경험했음에도 그 강렬한 감정을 접하지 못한 게 아쉬울 만도 했지만, 그녀는 딱히 그 점이 아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약간의 두려움을 동반한 미지의 개념이었다.
사랑은 모르지만, 애정은 알고 있다.
천성적인 게으름 탓에 밀라니아는 타인의 기분을 읽는 데 재능이 없었다.
르베리안즈가 불평했던 것처럼 공감 능력도 미천했다.
눈치가 빠른 편도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죽으면 살 수 없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까지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밀라니아의 차분한 시선이 말란도르와 르베리안즈를 지나쳐 그레칸에게 머물렀다가 아래로 가라앉았다.
“밀라니아.”
장난기가 쏙 빠진 말란도르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진지했다.
그의 옅은 홍안이 밀라니아를 직시했다.
“지금 네 마지막 시간을 나한테 주겠다는 거야?”
“나는 네가 얼마나 네 일족을 아끼는지 알고 있어.”
불신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말란도르는 믿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 표정은 아무 말 않는 밀라니아를 보고는 이내 가볍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믿어지지가 않는군. 지금 네 말은, 네가 죽기 전까지의 1분 1초를 나와 공유한다는 뜻이 맞아?”
“같은 숨을 마시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이 책을 읽고 같이 술을 마시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개소리도 참 정성스럽게 하네. 쓸데없이.”
말란도르가 미소를 띠었다. 형태만 미소였지, 죽음을 뿌릴 듯한 스산한 모습이었다.
“…….”
밀라니아는 말란도르의 말을 생각했다.
그의 사심을 담은 장황하도록 긴 말을 고려하는 건 물론 아니었다.
이제까지 그녀는 그녀의 사후에 대해 마녀족의 안위만을 걱정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지금, 거슬리는 건 마녀족뿐만이 아니었다.
눈앞의 골칫덩이들도 눈에 밟힌다.
“이해했어요. 당신은 지금 우리와 함께 마녀성으로 돌아가서, 마지막까지 같이 있겠다는 거예요. 맞죠?”
말란도르를 향해 싸늘한 눈빛을 보낸 르베리안즈가 아름다운 미소를 띠웠다.
퇴폐적인 외모와 여유로운 미소와 달리 빨간 눈동자는 잔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견 애절하게까지 느껴지는 눈동자의 흔들림에서 그의 애틋한 마음이 흘러나왔다.
예상보다 큰 반응에 밀라니아는 가느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내 전생에 비하면야 그다지 길지 않은 세월이거늘. 그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고?’
어릴 때부터 가까이 두고 키워, 원수라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마녀족의 일원처럼 애틋한 마음이 드는 어린아이 둘.
그리고 끝을 함께하겠다는 일념 하에 여기까지 따라온 악우.
마지막 안식인 기사년을 보낼 동반자로 부족하지 않았다. 아주 의외롭게도.
열 번째 회귀 후, 내내 앞으로의 일과 운명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밀라니아는 끝에 와서야 그녀의 관심을 그들에게 살포시 옮겨 왔다.
그건 사소하다면 사소했지만, 운명을 뒤트는 변화였다.
“그래. 마녀성으로 갈 것이야. 하지만 거기서 지낼 거라는 의미는 아니리라.”
“그럼?”
“우리끼리 지낼 거처를 따로 마련할 것이야.”
“…….”
“그게 더 편하지 않겠느냐? 물론 마녀성에서 많이 멀어지면 안 되겠다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마치 마지막을 남겨 둔 노인이 떠오르는 해를 대하는 것처럼.
밀라니아의 다정함이 그들로 하여금 마지막을 실감하게 했다.
“편한 것만이 아니야. 최고라고. 그걸 말이라고 해?”
처음부터 이걸 바랐던 말란도르는 흥분한 얼굴이었다.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실실 웃기까지 했다.
더러운 것이라도 보는 듯 냉랭한 눈빛으로 말란도르를 흘끗한 르베리안즈는 비교적 낙담한 모습으로 힘이 없었다.
“수장의 힘을 얻어 자신만만했는데, 죽음이란 거대한 바다와 같네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깨닫게 하니까요.”
“…….”
“당신의 죽음을 돌이킬 방법은…… 정말 없는 거겠죠. 하지만 밀라니아가 그렇게 말해 줘서 정말로 기쁘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귀찮은 수장 의식 따위, 더 미뤄 둘 걸 그랬어요.”
말을 하면서 서서히 마음을 정리했는지 르베리안즈는 슬픈 눈으로 웃었다.
“더 미루었다간 늙어 버린 스칼렛이 찾아왔을 게야.”
밀라니아는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써늘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레칸이었다.
그는 묘하게 일그러진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미간의 주름에 따라 휘어진 짙은 눈썹이 화가 난 듯 올올이 올라서 있었다.
꼭 억울하고 서글픈데 울고 싶은 걸 참는 어린애 같은 얼굴이라, 왜 그렇게 쳐다보냐고 탓하기도 애매했다.
‘다들 좋아하고 있거늘. 넌 또 뭐에 마음이 상한 것인고?’
그레칸의 사고방식은 의외의 순간에 어긋나기 때문에 밀라니아는 왜 그러냐며 물어보려고 했다.
똑똑.
1층의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계십니까?”
말란도르가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혔다. 대문 앞에 백마 네 마리가 끄는 사두마차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열린 마차 안에는 지난번에도 본 적 있는 낯익은 얼굴의 재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그의 수행 비서인 듯했다.
“계십니까!”
인기척이 없자 크게 소리친 수행 비서를 확인한 말란도르가 밀라니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인간인데? 여기 처음 왔을 때 만난 인간. 인간의 작위로는 재상이라고 하던 놈.”
“음.”
‘무슨 일인고?’
의문을 뒤로한 밀라니아는 몸을 일으켰다가, 문득 엉망이 된 저택 내부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기절한 채 찌그러져 있는 마탑의 2인자 란데스와 연금술사 탑주까지 눈에 들어와서, 약간 곤란한 기분이 되었다.
“음.”
그녀는 보다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그래도 빌린 공간인데 이 꼴을 보여 주긴 면이 서지 않느니라.’
밀라니아는 1층 문을 열어 주는 대신 창문으로 다가갔다가 빗자루에 올라탔다.
“으악!”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밀라니아를 보고 점잖은 얼굴의 수행 비서는 체면도 잊고 비명을 질러 버렸다.
보통 인간들의 평범한 반응인지라 밀라니아는 덤덤한 얼굴로 마차에 앉아 있는 재상에게 다가갔다.
재상은 멀쩡한 문이 있는데 왜 위에서 내려오냐며 의문이 어린 눈으로 창문과 현관을 번갈아 응시하다, 밀라니아가 다가오자 정숙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이제 더는 볼일 없을 줄 알았거늘. 무슨 일로 예까지 찾아왔느냐?”
재상은 다른 때보다도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저도 더는 대마녀님을 귀찮게 굴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제 마음대로 되지가 않는군요.”
“무슨 일이 있는고?”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거절하기에 곤란한 분의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직접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재상은 쓴웃음을 짓고는 양해 부탁드린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황후 폐하께서 보기를 청하십니다.”
‘하긴 날 이런 식으로 보자 하는 건 그 여인밖에 없을 테지.’
밀라니아는 일전에 있었던 그녀와의 짧은 만남을 떠올렸다.
황제를 사랑하는 인간.
질투에 휩싸인 인간.
사랑의 파괴적인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껄끄러운 인간.
회상을 마친 밀라니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천 년을 살아온 그녀에게, 요 근래만큼 가치 있는 시간은 없었다.
1분 1초가 소중한 상황이니 다른 데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재상의 방문이 반갑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에게 곤란한 사람인고.”
“마음적으로는, 곤란한 분이시죠. 전 그분이 실의에 빠지는 모습은 더 보기 힘들어서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그건 그대의 마음이고 내가 어울려 줄 필요는 없을 것 같구먼.”
“…….”
“마지막 청이니 부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시길. 참고로 황후께서는 저번에 드린 부탁은 이제 생각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일로 보고 싶다는 말이냐?”
“그것까진 저도 알지 못해서요.”
여느 때보다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재상의 태도를 보니 거절하기 난감한 상황인 듯싶어 밀라니아는 ‘흐음’ 미간을 좁혔다.
‘2대륙에 있는 이상 황제 일가의 말을 무턱대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곧 떠날 참이니 듣지 않아도 상관은 없느니라.’
방금 막 세 골칫덩이에게 ‘이제부터 너희들과 시간을 보내겠다.’고 낯간지럽게 약속한 터라 머쓱하기는 하지만 밀라니아는 마지막으로 황궁에 들르기로 했다.
‘좋아. 가는 김에 앨리지도 데려와야겠구나.’
밀라니아는 말란도르와 그레칸, 르베리안즈에게 상황을 간략히 설명한 후 재상의 마차에 올라탔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금방 돌아올 테니 너흰 마녀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으려무나.”
* * *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려 나가 예상보다 빠르게 황궁에 도착했다.
달칵.
누가 다가올 새도 없이 마차에서 뛰어내린 밀라니아는 우뚝 선 황궁을 보고 이채를 띠었다.
‘그나저나 황궁으로 불러들인 것이 의외로구나. 거처를 다시 황후궁으로 옮긴 모양인가 보이.’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타닥!
이질적인 소리에 무심코 뒤를 돌아본 밀라니아는 마차 앞에서 무릎의 먼지를 털어 내는 그레칸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넌 왜 거기서 나오는 게냐?”
옆으로 다가온 그레칸이 태연히 황궁을 가리키자 밀라니아는 얼굴을 미묘하게 구겼다.
기가 막혀 한탄하듯 말하니, 그레칸은 도리어 그런 그녀가 이상하다는 눈빛을 되돌렸다.
“기억력이 나쁘다.”
“…….”
“난 밀라니아에게서 떨어지면 안 된다고 올해만 10번 말했다.”
왠지 왜냐고 물어보고 싶지가 않다.
“약하니까, 내가 지켜야 해.”
역시나.
끄응, 신음을 흘리는 밀라니아를 살핀 그레칸이 눈치를 보며 손을 맞잡았다.
이미 허망감에 빠진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뭘 하든 내버려 두었다.
‘예전과 달라진 게 없잖느냐. 역시 고집스러운 걸 따지자면 그레칸을 따를 자가 없다는 것을 잊었느니.’
* * *
밀라니아와, 그녀를 껌딱지처럼 따라붙은 그레칸이 황궁에 도착한 그때.
수도의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마탑에서는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대마녀가 인간의 땅에 숨어들어 와 감히 마탑의 일원을 납치하다니! 이건 심각하게 중대한 사안이오!”
턱수염을 발치에 닿을 정도로 기른 노인이 부들부들 떨자 원탁에 둘러앉은 마법사들이 염려하는 얼굴을 했다.
“진정하세요, 교육부장님.”
청년에서부터 중년 마법사들의 간청에도 노인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아서 지팡이로 쿵, 땅을 찍었다.
그는 이곳에 모인 마탑의 중역 중 가장 나이가 많았으며, 마탑에서 가장 존경받는 마법사 중 1인으로 손꼽혔다.
마법 연구에만 매진하던 평소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렇게 분노하는 태도는 굉장히 낯선 것이었다.
명철한 이성을 견지해야 하는 마법사답게 눈에선 맑은 청광이 뿜어져 나왔고, 분노하는 눈빛은 젊은이처럼 번뜩였다.
“설마 하니 그들이 고대의 맹약을 깨려 하는가!”
2대륙과 1대륙의 맹약. 천 년 전에 맺어진 맹약은 상호 불가침 협약의 내용을 따르고 있었다.
다른 젊은 마법사들보다 맹약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아르테논은 마탑 정보부장의 보고를 예사로 넘길 수 없었다.
심각한 얼굴로 지팡이를 흔들던 그는 돌연 고개를 돌려 정보부장을 강렬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정말로 탑주가 그렇게 말했는가? 란데스와 연금술사 탑주의 납치가 그들의 소행이라고, 정녕 그렇게 말했어?”
육체적 능력이 취약한 마법사들 중에서도 어깨가 좁고 생김새가 쥐와 닮은 정보부장은 잡아먹을 듯한 아르테논의 기세에 턱을 수그렸다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탑주께서 이르시길 란데스의 납치는 대마녀의 졸개 소행이 맞다고 합니다. 황태자께서 보증하셨습니다.”
“허어!”
설마설마하던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탄식을 쏟아 냈다.
요 근래 들어 잦아진 황태자와 탑주의 회동은 마탑에서 공공연한 비밀.
황제의 힘이 쇠해짐에 따라 황태자와 황후의 세력 싸움이 본격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립을 지켜야 하는 우리를 세력 다툼에 이용하는 게 아닌가 하여 탑주의 거동이 불편했는데, 황태자와의 만남이 이종족의 침입 때문이라면 말이 달라지죠.”
1대륙의 거주민. 초인과 다름없는 이종족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초인에 이른 마법사와 검사뿐이다.
“2대륙의 수호를 위해 우리 마법사들은 1대륙의 움직임을 내내 감시해 왔다. 그 평화가 이제 깨지려 하는 것인가?”
소란스럽던 흥분이 가라앉고 분위기가 정돈되자 정보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황태자께서는 대마녀와 그 졸개들을 처단하고자 하십니다.”
“그들이 어떤 사악한 일을 꾸밀지 모르는 일이야. 란데스까지 끌고 갔으니……. 만약 그들이 마탑을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이라면 시간을 오래 끌 수 없는 일. 황태자 전하의 계획은 무엇이라 하시냐?”
아직까지도 신중한 아르테논의 질문에 정보부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까지 침착하게 잘 설명한 그의 심상찮은 태도. 마법사들이 의문을 가질 때, 정보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은 황궁 내에서 대마녀에게 결탁한 배신자를 쫓아야 한다고 합니다.”
“쫓으면 되지, 뭐가 문제인가? 설마 그 배신자가 경지에 이른 검사인 건 아니겠지?”
아르테논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마법사에게 있어 마나를 유형화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검사는 꽤 곤란한 존재였다.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추적과 탐색의 대가 마법사가 쫓는데 검사 한 명 정도는 문제될 게 없었다.
대수롭잖은 표장의 마법사들에게 정보부장이 그런 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심각하죠. 그 배신자가 아덴샤의 거울을 훔쳐 달아났다고 합니다!”
마법사들의 얼굴에 경악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심지어 아르테논의 길고 하얀 수염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1대륙의 이종족이 침입했다는 보고만큼이나 격렬한 반응이었다.
“그, 그런…….”
제일 먼저 입을 열었던 젊은 마법사도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떨었다.
아덴샤의 유물이 탈취당했다.
마법사인 이상 그 말에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비추는 것만으로도 뭐든 갈취할 수 있는, 모든 마법의 역학을 무시하여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신물이라 불리는 대마법사 아덴샤의 유물!
어느새 마법사들은 벌떡 일어나 있어서, 이제 점잖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걸 왜 이제 말하는 것이오!”
누군가 분통을 터뜨렸다.
“쯧, 대체 어떻게 보관했으면 탈취를 당해!”
아덴샤의 유물은 마법사들의 신성화된 귀물로, 황궁과의 계약에 의해 황궁이 보관하고 있었다.
‘황궁은 그렇게 허술한 곳이 아니다. 이번 일에는 황태자의 입김이 닿아 있을 거다. 알지만, 아덴샤의 유물이 관련된 이상은 알고도 나서야 해. 태자여, 머리를 참으로 교활하게도 쓰셨소.’
회색빛으로 바란 눈동자가 매섭게 번뜩였다.
‘무사히 회수하기만 한다면, 그 후에는 태자 역시 신물을 함부로 취급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분노를 삼키며 아르테논은 말했다.
“배신자에게서 유물을 회수하여 마탑으로 가지고 와야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큼은 황태자를 도와 그의 검이 된다.”
“그 대가로 아덴샤의 유물은 황궁과의 계약에서 풀려나 마탑으로 돌아오게 될 테죠.”
침묵은 동의의 뜻.
곧 그들은 자리를 떠났다.
마법사들이 마탑의 입구를 벗어나는 순간.
따그닥따그닥!
휘이이잉!
흙먼지를 일으키며 긴박하게 달려온 말 두 마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저자는 정보부장의 수행 시종이 아닙니까?”
“뒤에 있는 자는 가슴팍을 모십시오. 황태자의 표식을 달고 있어요. 그의 부관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탑의 문지기가 절차대로 용건을 묻자 정보부장의 심복이 재빨리 말에서 내려 정보부장에게로 다가왔다.
“큰일입니다, 스승님.”
“무슨 일인데 너답지 않게 이리 경박하게 굴어?”
심복이 해쓱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크지 않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그 자리의 모든 마법사가 들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딱딱해졌다.
혈기 왕성하게 아랫도리를 놀리고 다닌 건 젊을 적의 황제다.
세월엔 황제도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라 노인인 그가 오늘내일 하는 건 대수로울 것 없는 얘기였다.
그러나 작금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의 변고는 제국의 대격변을 몰고 올 것이었다.
‘후계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폐하께서 쓰러지셨다.’
정세가 급변할 것을 직감한 마법사들이 그들의 뛰어난 머리를 가열차게 돌리고 있을 때, 한발 늦게 도착한 황태자의 부관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의 전언입니다.”
‘빠르기도 하군.’
황제가 쓰러졌다는 소식 뒤로 황태자의 전언이 따라붙는다.
어쩐지 상황이 묘하다. 몇몇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혹여 누군가 더 올까 봐 뒤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황태자와 황후가 황위를 사이에 두고 반목하고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황.
‘황태자는 움직이는데 황후는 잠잠하다?’
눈치 빠른 이들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략 감을 잡았다.
마탑에 완전히 적을 둔 마법사들은 아덴샤의 거울의 행방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가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정세에서 자유롭지 못한 마법사들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성질 급한 어떤 마법사는 부관을 재촉했다.
“뭐라 하시던가?”
“당장 위독하신 황제 폐하를 뵙는 게 맞으나 배신자가 도주하고 있습니다. 황궁의 배신자는 1대륙의 이종족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니, 뜻이 있으신 마법사들께서 서둘러 뒤를 쫓아 움직여 주기를 바라십니다.”
“어서 가 봐야겠군!”
“잠깐, 배신자는 누구라고 하던가?”
“앨리지 에버리젠입니다.”
잠시 후, 마법사들은 저마다의 이동 방식으로 부관이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 * *
밀라니아의 인내심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살아온 시간이 길다지만 인내심은 그만큼 자라나지 못했다.
[대마녀님? 역시 위치가 위치시다 보니 굉장히 점잖으시고 참을성 강하시던 걸.]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증언은 오류가 있었다.
그들이 그녀와 비교하는 이종족 수장 중엔 발칸이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누구라도 발칸과 나란히 있게 된다면 인내심이 뛰어나 보일 테니까.
오류 한 가지 더.
밀라니아는 인내심이 긴 게 아니라 눈앞의 대상에게 집중하지 않을 뿐이었다.
‘지루하구나.’
무한 회귀의 굴레에 빠지기 전의 밀라니아는 게으른 데다가 귀찮은 것을 싫어하여, 사람들이 앞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반쯤 숙면에 빠진 상태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물론 듣는 시늉만 하는 것뿐이라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 탓에 체라는 밀라니아와 대화할 때 핵심만 말하는 기술을 시전하곤 했으니,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를 만나기 전에 밀라니아에겐 인내심을 시험할 일이 많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밀라니아의 인내심을 대폭 상승하게 해 준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나름 좋게 생각해 보려 했으나.’
“……심장이 터져 버리는 줄 알았지요. 대마녀님은 연인이 없으신가요? 없으시겠죠. 만약 있다면, 그렇게 무미건조한 눈은 하실 수 없을 테니까요.”
황후의 신세 한탄이 10분을 넘어가자 밀라니아는 자신의 참을성이 매끈한 흰 양초의 심지보다 짧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애초에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목적을 위해 참아 내야 하는 인물들이었다면, 황후는 그런 관대함을 베풀 필요 없는 대상이 아닌가.
당위성을 느끼지 못하니 그나마 있는 인내심도 동원하기 힘들었다.
“평생 같이하리라 생각했던 상대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다면요. 그것도 늙고 추해져서 저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에게요. 정말로 세상을 증오하게 된답니다.”
“그 늙고 추한 남자는 그럼에도 황제이니라.”
“안타까운 일이죠.”
밀라니아는 복잡한 인간의, 그중에서도 더 복잡한 황궁에서 감정 하나에 울고불고하는 황후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납득이 되었다.
냉철한 이성과 계산과 합리적인 논리로 점철될 것 같은 복잡한 황궁도, 한낱 감정이 발단이 되어 파탄이 날 뻔했던 적이 지난 천 년의 세월 동안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황태자와 대립각을 세운다더니.
‘저 시간에 황태자를 견제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이미 황후의 얘기에 흥미를 잃은 밀라니아의 머릿속은 합리적인 논리로 굴러가고 있었다.
어쨌든 황후는 밀라니아의 인내심이 양초의 심지처럼 짧아지는 동안에도 황제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어떻게 배신당했는지를 줄줄이 읊어 댔다.
부득불 밀라니아를 따라 들어온 그레칸은 이미 황후의 말쯤은 지나가는 소음으로 생각하는지 밀라니아의 옆에 바싹 달라붙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정 힘들면 다르게 생각해 볼 수는 없겠느냐?”
“다르게 생각하다뇨? 어떤 식으로요?”
처음을 제외하고는 몇 번 입을 열지 않은 밀라니아의 조언에 황후는 큰 관심을 보이는 얼굴이었다.
“1대륙에는 루던트라는 소수 종족이 산다. 매우 본능적인 일족이지.”
“……네?”
“이들은 번식을 위해 서로 더 어린 개체를 찾는다. 여성체는 갓 성인이 된 남성체를, 남성체 또한 건강하고 어린 여성체를 찾아. 번식이라는 몸에 각인된 자연의 본능을 따르는 것이니라.”
“잠깐만요, 대마녀님.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너희 인간들이 자연을 한낱 광물 따위를 캐낼 광산으로 보고 있는 건 안다만, 자연의 진리에서 벗어난 건 아니지 않느냐. 모든 생명체는 후손을 남기기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이느니라. 인간으로 따지자면 여인은 새끼를 낳고 키우기 합당한 사내를 짝으로 선호하고, 사내는 보다 건강한 새끼를 낳고 키우는 데 합당한 여인을 선호하지. 모든 건 그렇게 흘러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네 마음도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먼.”
‘당사자가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으니 말해 줄 수는 없으나. 쯧, 참으로 답답한 인사로다.’
황후는 그녀가 관용을 베풀 대상은 아니었지만 이 대화를 끝내기 위해서라도 적당한 조언을 던져 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큰마음 먹고 기껏 길게 말을 해 주었건만 황후의 얼굴은 마치 썩어 들어가기 일보 직전인 사과와 같은 꼴이었다.
“왜 그런 얼굴이누?”
‘그걸 지금 조언이라고…….’
질렸다는 표정을 숨긴 황후가 억지 미소를 지었다.
“대마녀님이 인간이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랍니다.”
“…….”
“당신께 연인이 있었다면, 심심한 애도를 표하고도 싶고요. 마음고생을 좀 하겠어요.”
“아니에요. 아무 문제 없어요. 갑자기 지금까지 한 얘기가 모두 허무하게 느껴지는 게 문제라면 문제네요. 상대에 따라 적당한 얘기를 했어야 하는 건데 말이에요. 제 실수네요.”
황후는 열성적으로 제 한을 풀어냈던 모습과는 달리 터진 풍선처럼 팍 사그라들어 있었다.
밀라니아는 기분이 썩 탐탁하지는 않았지만 황후가 더 얘기를 꺼낼 기색은 아닌 듯하다는 것만은 반가웠다.
“기분이 매우 이상하지만 말이에요. 어쨌든, 대마녀님께 얘기를 하니 마음이 편하네요. 다음에 대마녀님에게도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제게 꼭 말씀을…….”
“그런데 말이야. 나도 궁금한 게 있구나.”
갑작스러운 밀라니아의 말에 황후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매끄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이렇게 시간을 끄는 이유가 무엇인고?”
‘재상의 말에 따르면, 꽤 명석하다는 여자가 굳이 나를 불러내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를 주절주절 꺼내는 이유가 있을 것 같구나.’
황후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로 밀라니아를 응시했다.
짜디짠 눈물을 흘려 발갛게 변한 눈으로 물끄러미. 이내 싱긋 웃는다.
분위기가 급변했다.
친한 지인과 신변잡기적인 얘기를 나누는 평범한 여인의 모습에서 본모습으로 돌아간 그녀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아덴샤의 거울을 훔쳐 도망갔다는군요.”
“…….”
“그 여자가 아덴샤의 거울을 지닌 것, 이미 알고 계셨겠지요? 인세가 낯선 분이니 설명해 드리자면 마법사의 유물은, 그 국보를 훔쳤다는 건 즉결 처형 사유로 충분하답니다.”
“…….”
“이제 보니 대마녀님께서도 모르셨던 사실인가 봐요? 간도 크군요, 그 여자.”
깔깔 웃는 황후를 보며 밀라니아는 눈살을 옅게 찌푸렸다.
앨리지가 부셔 달라고 요청했던 인간들의 귀물.
‘미련이 많아 보이긴 했거늘, 되돌려 놓지 않았구나.’
앨리지가 어리석은 짓을 하긴 했지만, 황후의 득의양양한 얼굴을 보니 자연스럽게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기다렸던 것이냐?”
“무슨 말씀이시죠?”
“앨리지가 아덴샤의 거울을 갖고 도망가기를 기다렸던 것이냐고 물었다.”
눈을 깜박인 황후는 붉어진 눈시울을 접으며 웃었다.
“모르진 않았죠.”
“그 이유는 방금 말한 ‘즉결 처형 사유’ 때문이겠고?”
“이제 와서 숨길 일은 아니네요.”
모든 심력을 앨리지에게 쏟는 듯한 황후를 보고 있자니 밀라니아는 그녀가 어떤 인간인지 궁금해졌다.
“너희 인간들을 온전히 이해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너만큼 네 위치를 망각한 자도 처음이로고. 황태자가 신경 쓰이지는 않느냐?”
이 거대한 제국의 황위 쟁탈전은 인간의 피륙 정도는 가볍게 찢겨 나가는 지옥도가 되어,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올가미에 목이 조여질 텐데.
‘네가 지금 앨리지를 죽이니 살리니 하고 있을 때냐.’ 하고 밀라니아가 은근한 눈빛을 보내자 황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눈꼬리를 살짝 휘었다.
“…….”
“그의 등극에 힘을 실어 주기로 했습니다. 다음 대 황위 계승자로 내 아들을 지정하겠다는 조건으로요.”
“……그걸 믿느냐?”
황제위를 갖기 위해서라면 모든지, 음모, 배신, 살인 등 상상하는 온갖 것을 동원할 수 있는 종족이 인간이다.
살살거리며 거짓말을 하는 정도는 뭐 어렵겠는가.
그런데 의외로 황후의 답은 선선했다.
“믿어요.”
“…….”
“호호, 제가 천치라서 믿는 건 아니에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황태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랍니다.”
황후는 새어 나간다면 나라가 뒤집어질 얘기를 제 사랑 얘기를 할 때와는 달리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는 듯 덤덤히 얘기했다.
“이 일이 탄로 난다면 황태자는 감히 황제위를 욕심 내지 못하겠지만, 제가 당분간 눈 감아 주기로 약조했습니다.”
이해했다는 양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황후의 말은 어딘지 이질감이 느껴졌다.
황후가 황태자의 결함을 시의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이 승부에서 이기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치명적인 약점을 틀어쥔 셈이니까.
“그 대가로 황태자가 네게 약속한 건 무엇인고.”
황후가 미소를 지었다.
“인간들의 생리에 대해서 그만큼이나 잘 아시다니, 꽤 똑똑하시네요. 대마녀님이 전대 대마녀처럼 호전적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드네요. 어째서 남녀 관계는 그렇게 문외한인지 모르겠지만요.”
밀라니아는 이 영양가 없는 지겨운 대화를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 여자와 대화하는 건 어쩐지 축축하고 진득거리는 늪지대를 헤매는 기분이라 더 그랬다.
밀라니아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황후는 아랫입술을 삐죽거리고는 스스럼없이 말했다.
“짐작하시는 대로 황태자와 관련해서는 생각하시는 대로, 거래가 있었죠.”
“…….”
“죽여 주기로 했답니다.”
말의 내용과 달리 목소리는 산뜻했다.
“앨리지 그 계집이요. 애인이랑 같이 도망쳤잖아요, 지금? 주제도 모르고 아덴샤의 거울을 들고서 말이죠. 과연 순진한 얼굴로 남의 남자를 홀리는 여우다워요.”
지금, 독한 미소를 지으며 칼을 가는 황후는 앨리지의 애인이 남편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건 모른다.
헛된 증오를 쏟고 있다.
‘정말로 까맣게 모르고 있구나.’
가장 나쁜 건 황제가 아닌가. 제 죄책감과 그리움 때문에 주변을 이다지도 방치하다니.
밀라니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신임받지 못하는 황후가 아주 조금 측은해졌다.
‘물론 알았으면 죽였을 테지.’
황태자는 어쩔 수 없이 내버려 둔다고 해도 다른 힘없는 황자까지 가만히 봐줄 여자가 아니다.
황제가 이 인간 여자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원망을 받으면서까지 모든 걸 비밀에 부쳤는지는 납득이 갔다.
궁금증이 풀린 밀라니아는 떠날 차비를 했다.
이제까지 황후가 이렇게까지 순순히 대답하는 이유가 있을 터.
‘이미 충분히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한 것이겠느니.’
밀라니아는 머릿속으로 앨리지가 왜 도망갔는지, 그리고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를 생각했다.
황태자의 협조를 구한 대로, 황태자가 그녀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첫 번째로 떠오른 건 황제.
하지만 이리 간 크게 일을 벌인 황후가 황제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으니 황제는 앨리지를 도와주지 못하는 상황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나밖에 없구나.’
현재 2대륙에서 제국 황실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무리는 그녀의 일행밖에 없었다.
밀라니아는 지체 않고 일어났다.
‘내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 게야.’
그레칸을 툭 치니 그는 지체 않고 일어나 밀라니아의 옆에 붙었다.
말없이 일어난 그녀를 불긋한 눈으로 올려다본 황후가 말갛게 웃었다.
“찾으러 가시는 거라면, 늦었어요.”
“…….”
“국보를 들고 도망간 자를 처형하러 갔으니까요. 황실 군대가요.”
그런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은 얇은 얼음이 낀 듯 서늘했고 일견 오만하기까지 하여 내심을 짐작하지 못하게 했다.
황후는 밀라니아의 생각을 알아내겠다는 듯 그녀의 금빛 눈을 들여다보다가, 무심한 눈빛이 변하지 않자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부탁드린 거 기억하시나요? 그 여자를 살리지 말아 달라는 거요. 물리겠습니다. 그녀를 살리셔도 되어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자 단련하지 않아 연약한 여인의 몸인데도 황후는, 잘 벼린 검 같은 살기를 풍겼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요. 남의 손에 맡겨 놓기만 하다니, 안 될 일이죠. 뭐든지 확실히 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제까지 하시던 대로 그 여자를 치료하고, 살려 보려고 노력하세요.”
“…….”
“저는 직접, 제 손으로 안 된다면 황태자가 명령한 황실의 군대가, 명령을 받은 마법사가, 그 여자를 죽이려고 할 테니까요.”
소환된 빗자루가 제자리인 양 밀라니아의 손바닥에 끈끈하게 달라붙었다.
“너희들은 나를 한낱 인간 수준으로 생각하지 말지어다.”
떠나기 전,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황후와 눈이 마주쳤다. 사랑의 고통으로 짓무른 눈가.
긴긴밤을 홀로 보내며 배신에 몸부림치며 자신이 뭘 잘못했나 곱씹고 매달리고 싶어지다가 분노하며 마침내는 증오하게 되는.
‘그 아이가 생각나느니.’
밀라니아는 말란도르에게 노리개 취급을 당하다 마침내 포기한 어린 마녀가 했던 얘기를 곱씹었다.
은빛 달 아래 처연히 주저앉은 그녀와 침묵하는 황후가 겹쳐 보였다.
그녀에게서 기인한 측은함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황후는 미소를 짓는 것처럼 입술을 실룩거렸다.
반면 기쁨이 깃들지 않은 눈은 축축하고 서늘하다.
말란도르 때문에 아파하는 어린 마녀를 보며 약간의 슬픔과 분노를 느꼈던 때와 달리, 지금은 크게 감흥이 없었다.
애초에 그녀의 일족인 마녀와 관계없는 인간을 비교할 수는 없는 일.
밀라니아는 결코 황후를 동정하지 않았다.
‘인간들의 어리석은 사랑이 파멸을 향해 내달리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니라.’
다만 이번은 그 집착적인 사랑이 그녀의 일에 방해가 되어 조금 더, 신경이 쓰일 뿐.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며 밀라니아는 빗자루에 올라탔다.
그레칸이 그녀를 따라 뒤에 타자, 따뜻한 체온이 그녀의 서늘한 등을 감쌌다.
그레칸이 안정적으로 자세를 잡는 걸 확인한 밀라니아는 곧장 비행하려다가 멈칫했다.
망설인 밀라니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마른 입술에서 독특한 음률의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앞을 가리는 눈가리개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눈가리개를 하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와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될 게다.”
“제가 목표만 보고 달린다는 말씀이신가요?”
“네게 목표가 있기는 한 것이냐. 내 눈에 넌 경주마보다도 못한 것 같으이.”
“…….”
“어리석은 것. 잘 보아라. 앨리지는 네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없느니라.”
표정이 오묘하게 변해 가는 황후에게서 밀라니아는 고개를 돌렸다.
동정하지 않는다. 불쌍하지도 않다.
그래도, 있지도 않는 배신으로 고통스러워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사랑은 모르지만, 그게 때때로 독약보다 더한 감정이 된다는 걸 아느니라.’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
2대륙으로 여행을 갔다가 그곳의 지체 높은 귀족 청년과 사랑에 빠진 어리고 순진한 마녀의 이야기다.
열렬한 사랑에 빠졌으나 마녀로서는 납득하지 못할 신분 차이의 문제로 헤어지고 실의에 빠진 채 마녀성으로 귀환한 어린 마녀.
아무리 자신이 보듬고 위로해 주어도 그녀의 괴로움을 덜어 줄 수 없었다.
결국 고통에 몸부림치다 마침내 극단으로 치달은 그녀의 일을 기억하며, 씁쓸해진 밀라니아는 지체 없이 푸른 상공을 날아올랐다.
저 멀리서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로 날아든 체라의 노란 카나리아가 초로롱 초로롱 맑은 울음소리를 뿜어냈다.
급한 기색으로 앨리지의 행방을 속삭이는 노란 새에게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여 주며 빠르게 화답했다.
“체라에게 전해 주려무나. 내가 곧 돌아가겠다고.”
눈을 끔벅거리는 새는 이내 거세게 날갯짓함으로써 알겠다고 응답한다.
더는 신경 쓸 게 없는 밀라니아는 추격전이 벌어지는 곳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
홀로 남은 황후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밀라니아가 빠져나간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
타다닥타닥!
그녀를 오랫동안 모셔온 시녀가 다급하게 들어와 그녀의 상념을 방해했다.
“황후 폐하!”
천방지축으로 구는 걸 싫어하는 황후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시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하는 말에 그녀는 안색이 급변하여 벌떡 일어났다.
“뭐라?”
“황제 폐하께서……. 폐하!”
황후는 비틀거리며 의자의 쿠션을 틀어쥐었다.
시녀가 그녀를 부축하니, 황후는 창백한 얼굴로도 시녀의 손길을 내치고 문밖으로 달음박질을 친다.
타닥, 타닥, 타닥.
미움과 증오. 슬픔과 사랑.
상반된 감정을 담은 발걸음은 느려졌다가 빨라졌다가 하며 한참을 정신없이 이어졌다.
* * *
현재 말란도르는 꽤 무리를 하고 있었다.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흑계에 갔다 오는 건데.”
기운이 달린 말란도르는 혀를 깨물며 공간을 열었다.
인세에서 암흑계로 통하는 길과 달리 인세의 공간을 찢어 이동하는 방식은 인간 대륙에 속하지 않은 그가 시도하기에는 꽤 심력과 마력의 소모가 많은 방식이었다.
그는 흑계의 유일무이한 존재지만 인간 대륙에서는 아니었다.
인간 대륙에도 다스리는 자가 있다. 황제를 말함이 아니었다.
인간 대륙을 다스리는 초월자의 개입이 말란도르가 움직이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한층 묵직해진 공기를 손가락으로 찢어 움직이는 말란도르의 표정이 버거워졌다.
‘물속을 걷는 것 같군.’
그렇지만 멈출 수도 속도를 늦출 수도 없었다.
‘별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불안하니 가 봐야겠어. 밀라니아, 무사한 거지?’
그가 그녀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녀를 기다리며 무료해진 르베리안즈가 심심풀이 삼아 란데스에게 던진 질문 덕분이었다.
[너희 탑주가 있다면 뭔가 달라지긴 할까. 아쉽긴 하네. 황궁에는 왜 가 있는 건데?]
무심코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의미심장했다.
어떻게든 이들에게서 벗어나 이 상황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란데스는 아주 중요한 상황적 단서를 제공했다.
[제국의 안위 때문이죠.]
란데스는 그들을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약간의 과장을 섞어 말했다.
[제국의 안위?]
[1대륙에서 위험한 존재가 들어왔음을 감지하셨기 때문에 이를 상의하러 황궁에 가신 겁니다.]
그 말에 따분하여 누워 있던 말란도르의 시선까지 그에게 꽂혔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당신들 실수하는 거예요. 탑주께서 당신들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까지 납치해 놓고서? 난 분명히 내가 마탑의 2인자라고 말했었어요.]
사실 2인자는 아르테논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젊은이들 중에서는 2인자로 꼽히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합리화하며 란데스는 눈을 부라렸다.
[탑주는 이미 날 구하기 위해 지원단을 보내 놨을 거예요. 늦기 전에 날 놓아줘야 할 겁니다. ……지금 내 얘기 듣고 있는 겁니까?]
란데스는 제 추측을 섞어 한 말이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그의 추측은 말란도르와 르베리안즈에게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갔다.
그들의 미심쩍음에 확신을 준 것은 체라의 패밀리어인 노란 카나리아였다.
카나리아는 1대륙으로 가기 전 그들에게 들렀고, 짹짹거리는 지저귐을 해석하진 못했지만 밀라니아에게 뭔가 일이 생겼다는 것은 깨달았다.
[밀라니아에게 문제가 생겼다.]
르베리안즈는 그 길로 날개를 펴 상공으로 날아올랐으며, 말란도르는 막대한 손해를 입으며 공간을 열었다.
2대륙의 수호자. 그건 인간을 지키고 구성하는 모든 힘이다.
경지에 오른 소드마스터. 대마법사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마법사들. 그리고 그들 밑에서 단체로 움직이는 어마어마한 수의 군대들.
인간들이 밀라니아의 존재를 위협으로 규정했다면 그들이 움직일 수도 있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고작 인간들이라며 무시하기엔 꺼림칙하다.
‘밀라니아.’
말란도르는 믿음이 있었다.
기실 그들이 얼마나 큰 힘이든 밀라니아에겐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대륙 간 맹약이 있으니 인간의 군대도 밀라니아에게 직접적인 해를 입히진 않을 테고.
‘언제 영면이 찾아올지 모르는 상황이라는 게 유일하게 불안한 일이야. 다른 때라면 걱정도 안 해.’
밀라니아의 현 상황은 오랜 시간 공기 중에 노출되어 있어 풍화된 고대 신의 신전과 다름없는 상태. 한 번의 폭풍으로도 무너질 것이다.
―그아악, 갸악!
그의 기에 반응하는 죽은 자의 영혼과 뼈가 날카롭게 울어 댔다. 말란도르는 힘이 미치는 모든 노예에게 명령했다.
‘밀라니아를 찾아라.’
소식은 금방 들려왔다.
숲과 경계를 이루는 라즈흘 평원.
거대한 초목이 펼쳐진 거름진 땅 아래,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을 느낀 노예들이 기뻐하며 말란도르를 불렀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억센 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라즈흘 평원.
산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 아래, 붉게 물든 공기가 종이가 찢어지는 것처럼 갈라졌다.
그 사이에서 빠져나온 말란도르의 표정은 다소 굳어 있었다.
힘 빠진 눈매에 피로가 묻어 나왔다.
‘이러다 기절하겠어.’
단기간에 평범한 마법사라면 심정지로 열 번은 죽었을 마력을 남발해 대자 마력의 흐름이 가뭄을 맞은 계곡처럼 말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흑계에 갔다 오면 언제 그랬다는 듯 회복될 것이므로 말란도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평야를 다급하게 가로지르는 마차에 꽂혔다.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