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48)

21

저주받은 붉은 꽃

그가 연구하고 있는 분야는 시전자의 생명이 아닌, 절대다수의 인간의 생명을 그러모아 대상의 수명을 늘리는 것. 혹은 죽은 자의 부활 가능성이었다.

연구는 어느 정도 진척이 되었지만 임상 실험을 할 기회가 없는 상황에 지지부진해진 답답한 상황이었다.

돌파구는 명확했다. 실험할 재료만 준비되면 된다.

명확한 것과 별개로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어려운 게 문제였다.

필요한 건 천 명에 달하는 인간과 죽어 가는 사람 하나.

후자는 몰라도 전자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니다.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전전긍긍하던 중이었다.

그때 그가 나타났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들고.

[네가 원하는 걸 안다. 인간의 발명가야. 네가 원하는 실험을 양껏 할 수 있게 해 주겠어.]

자신의 머리를 두 번 툭툭하고는 몸이 떨릴 정도로 오싹한 미소를 짓는 인간 같지 않은 사내를 보며, 탑주는 악마의 속삭임을 떠올렸다.

[너의 꽤 쓸 만한 연구와 나의 천재적인 두뇌를 이용하여.]

저주받은 붉은 꽃을 연구하는 건 걸리는 즉시 즉결 처형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행위.

그렇기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말란도르를 경계하던 탑주였지만, 그가 내미는 붉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붉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 그건 다름 아닌 순도 높게 정제된 붉은 꽃 용액이었다.

붉은 꽃은 그냥 만지면 생기를 빨려 죽을 수 있는 끔찍한 꽃이었다.

그런 특성 덕분에 시체들의 생기까지 빨아들일 수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호기심은 고양이도 죽인다고 했던가.

그 호기심의 극을 추구할 수 있는 이들만이 연금술사란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

탑주는 호기심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도 들어갈 수 있는 인종이었고, 그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란도르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몰래 탑을 빠져나오다 그레칸과 만나게 된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그렇게 된 거야. 이해했어?”

겁을 먹은 탑주를 대신하여 말란도르가 늘어놓은 설명을 들은 그레칸은 묘한 눈으로 연금술사 탑주를 바라보았다.

탑주는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추어올렸다.

‘왜, 왜 저렇게 보는 거지?’

꼭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보는 눈이다.

탑주는 그가 늑대족 수인이라는 걸 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 같은 눈빛에 도사린 위험성은 피부로 느껴졌다.

연금술사를 대표하는 탑주라지만 무력은 무척이나 달리는 탑주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낑낑거렸다.

그 분위기를 눈치 빠른 말란도르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레칸의 눈에 어린 탐욕을 확인한 말란도르가 낄낄거렸다.

“울프 보이, 이자에게 눈독 들일 필요 없어. 네가 데려가 봤자 쓸모가 없을 테니까.”

“왜?”

“붉은 꽃에 대해 이만큼도 모르는 네가 달랑 탑주만 데려가서 뭘 하려고?”

말란도르는 새끼손가락을 가리키며 그레칸을 신랄하게 비웃었다.

그는 붉은 꽃에 대해 그레칸에게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어찌 보면 밀라니아를 위한 그만의 비장의 한 수라고 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건 그레칸도 마찬가지였다.

“인간 마법사는 뭣 하러 데려가?”

“밀라니아를 치료시킬 거다.”

그레칸도 마법사를 납치한 이유를 순순히 말해 주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좋은 꼴을 못 봐주는 으르렁대는 사이였지만, 밀라니아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난제 앞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손을 잡은 기묘한 상태였다.

붉은 꽃이란 말에 입을 헉, 벌린 란데스의 눈빛을 탑주가 슬그머니 피했다.

여전히 아쉬워하는 눈으로 탑주를 바라보던 그레칸이 입을 열었다.

“넌 그걸 이미 밀라니아에게 써 봤다고 했다. 효과는 없었어. 뭘 더 하려는 거지?”

겁을 먹고 움츠리고 있던 탑주였지만 그레칸의 질문은 그의 연구 결과의 핵심과 연관되어 있기에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 그건…….”

“잠깐.”

연금술사 탑주의 말을 가로막은 말란도르가 의아해하는 그레칸의 시선을 받고 싱긋 웃었다.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닌 탑주는 말란도르를 흘끗하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탑주가 말하려는 건 이거였다.

‘시전자의 수명이 아닌 천 명의 수명을 이용하려고 한다.’

이는 이제껏 없던 획기적인 계획이었다.

지금까지 붉은 꽃은 시전자의 수명을 매개로 하여 효력을 발휘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금술사 탑주는 연구 끝에 개발했다.

이름 하야 꽃반지.

예쁜 이름과 달리 깨지지 않는 금속인 오르하르켄에 그가 개발한 마법진을 그려 넣은 반지다.

이 반지를 착용하고 용액을 복용한다면, 반지를 매개로 인간 수명을 빨아들여 대상자에게 건네줄 수 있을 터였다.

‘만약 성과가 확실하다면 혁명이 될 것이고, 나는 역사서에 실릴 명예와 막대한 돈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을 거야.’

붉은 꽃이 아무리 저주받았다지만, 권력자 중엔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는 이들이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그의 후원자가 될 것이었다.

‘사실 시전자의 수명만 깎이는 것이라면 저주받은 붉은 꽃이라 불리지도 않았을 테지만.’

연금술사 탑주는 붉은 꽃에 대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전설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붉은 꽃을 사용하는 자는 반드시 저주를 받는다.

그 저주란 게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어쨌든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저주 유무에 상관없이, 수명만 늘면 OK라는 사람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탑주는 그를 찾아온 말란도르 역시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했었다. 처음에는.

‘이제 보니 다른 사람을 살리려는 거였군.’

“내가 용액을 사용하는 건 영 효과가 없는 것 같아서 시전자를 바꿔 보려고. 근데 내가 말하는 거, 이해는 하고 있는 거지, 울프 보이?”

놀리는 말투에 이를 드러내는 그레칸을 보고 말란도르는 그저 낄낄대며 웃기만 했다.

말란도르가 솔직하게 얘기하려는 탑주의 입을 막은 건 간단했다.

‘밀라니아가 좋아하지 않을 게 분명한데 뭐 하러 얘기해?’

붉은 꽃은 자연을 거스르는 힘.

자연 그 자체인 밀라니아가 기겁하고 진저리 칠 만한 물건이다.

그러나 새롭게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기려는 말란도르의 표정도 좋지는 않았다.

관계없는 천 명의 목숨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노예와 죽은 자들의 주인. 살아 있는 생명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는 그가 사용하는 붉은 꽃 용액의 기대 이하의 미미한 효력 때문이었다.

그는 일전에 밀라니아의 정신을 따돌리고, 그녀를 기절시켜 붉은 꽃 용액을 여러 번 먹인 바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자신의 수명이 깎이는 느낌을 확실히 받았건만,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효과가 없는 게 영 이상했다.

‘아무래도 밀라니아와 내 기운이 상극이라서 그럴 가능성이 커.’

그는 붉은 꽃의 저주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귀물의 저주가 끔찍하다지만, 그는 인간이 아닌 존재였다.

보통의 흑계인처럼 이종족이라 분류하기에도 애매하다.

생명을 가지고 있으나 그는 일종의 신이었다.

흑계라는 하나의 세계의 존망을 책임지는 위치.

그런 그가 고작 인세의 물건인 붉은 꽃에 영향받을 리 없다.

‘붉은 꽃의 효력만큼은 확실할 텐데.’

고민을 통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그 자신이 사용하는 붉은 꽃은 단순히 밀라니아의 생기를 한순간 북돋워 줄 뿐으로, 붉은 꽃의 경이로운 효능에 비해 일천한 수준의 효과밖에 얻지 못하는 것.

‘내가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지.’

그래서 생각한 게 자연에 거스르지 않는 인간의 수명을 짜내는 것이었다.

이미 연금술사 탑주가 만들어 놓은 꽃반지는 확보한 상태다.

굳이 탑주를 데려가는 건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한 대비책인 셈이었다.

“그런 이자가 그 붉은 꽃이란 걸 사용하려는 건가?”

말란도르의 급조한 변명에 그레칸은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다른 자를 위해 자신의 수명을 깎는 붉은 꽃을 사용하겠는가.

그레칸은 그 간단한 의문도 떠올리지 못했다.

밀라니아를 위해 수명을 깎는 건 조금도 머뭇거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탑주는 아니야.”

대충 얼버무리는 말란도르가 수상할 법도 했지만 생각에 잠긴 그레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들 제정신입니까? 붉은 꽃이라니, 당신들 그 꽃을 사용하는 건 반역에 준하는 중대 범죄…… 읍!”

란데스의 입을 솥뚜껑만 한 손으로 틀어막은 그레칸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거, 나한테도 한 병 줄 수 있나?”

“뭘 하려고?”

“내가 해 볼 수도 있잖아.”

말란도르가 풉, 하고 웃었다.

“아서라. 마력이 없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인간으로 따지면 고위 마법사의 마력 정도는 지녀야 하지.”

그레칸은 낙담했다.

손을 내저으며 비웃었던 말란도르가 그 지나친 실망에 당황할 만큼.

“울프 보이에겐 쓸모없을 거야. 뭘 실망하고 그래?”

울대를 문지르며 말란도르가 하는 말에 그레칸은 입을 꾹 다물고 대꾸하지 않았다.

무뚝뚝한 표정이지만 상심한 눈빛을 하는 그를 흘끗거리며 말란도르는 자신의 붉은 머리를 슥슥 헤집었다.

“갑자기 왜 불쌍한 척이냐. 어린 애 괴롭히는 것 같은 기분 들게. 네가 싫어서 안 된다 한 거 아니다. 네게 줘도 의미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

말란도르는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밀라니아와 달리 생기를 읽지는 못하지만 그도 생명체에 어린 마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마력이 빠져나간 몸의 동의어가 죽음이라는 건 곧 마력이 충만한 몸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레칸은 마력이 충만한 몸이었다.

허나 마법사들이 말하는, 마법을 사용하는 마력은 아니었다.

그의 마력은 충만한 생기에 가깝다.

르베리안즈에게선 생기와 같은 마력 말고도 마법적인 마력이 느껴진다.

그레칸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는 거라곤 인간을 훨씬 상회하는 가공할 육체적 힘뿐.

“너무 그렇게 불쌍히 있지 마라. 넌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되잖아.”

기실 내재된 잠재적 힘을 각성하게 되면 그 누구보다 강력한 늑대족 수장이 될 운명인 그레칸이지만, 현재의 그는 절대자라고 하기 어려웠다.

박쥐족 수장이 된 르베리안즈와 흑계의 진정한 주인인 말란도르에 비해서 그가 약한 것은 사실이었다.

“다른 방법? 그런 게 있기나 한가? 자신이 없다.”

그레칸의 얼굴이 묘하게 어두워졌다.

마녀성에서 르베리안즈와 투닥거렸던 기억만 있는 그레칸은 인간 대륙에 온 뒤로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언제든 밀라니아에게 치댈 수 있었던 마녀성과 달리 이곳에선 장애물이 너무나도 많았다.

가장 가까이에는 말란도르와 르베리안즈가 있다.

특히 르베리안즈가 그레칸에겐 충격이었다.

수장이 된 그는 개인의 힘이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성가신 수하들을 데리고 다녀서, 그가 방해할 때는 짜증이 나는 걸 넘어 분노가 일었다.

이들 사이에서 밀라니아의 옆자리를 온전히 차지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어렴풋하게 깨달아 가는 사실에 그레칸은 초조해지고 있었다.

“이것도 네겐 도움이 안 될 거라니까.”

이를 아득 문 그레칸이 말란도르를 직시했다.

“그래도 줘 봐.”

“이게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 건데 육포 하나 달라는 것처럼 굴어? 울프 보이, 울프 보이 했더니 네가 정말 앤 줄 아냐?”

평소라면 울프 보이란 조롱의 단어에 이를 드러내도 열 번은 드러냈을 그레칸인데 지금은 찜찜할 정도로 조용했다.

묵묵히 있는 그레칸의 묘하게 그늘진 눈을 확인한 말란도르는 쯧, 혀를 차고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었다.

“하, 정말. 난 마음이 약한 게 문제라니까.”

양심 없는 소리를 지껄인 말란도르는 병을 그레칸에게 던지듯 건네었다.

한 손으로 병을 낚아챈 그레칸이 손가락을 폈다.

손바닥엔 차가운 기운을 전해 주는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유리병을 살짝 흔들자, 투명하지만 사이한 느낌이 풍겨 나오는 붉은 꽃 용액이 찰랑거렸다.

“사용법은?”

“네가 자격이 있는 자라면, 사용할 때가 됐을 때 저절로 알게 될 거야.”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레칸은 가타부타 말없이 유리병을 소중히 챙겼다.

그러고는 볼일 끝났다는 듯 마법사를 데리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란데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금세 사라진 그레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말란도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여간 건방지기는. 그래도 네가 밀라니아를 살리기만 한다면 웬만한 건 용서해 주마.”

중얼거린 말란도르는 찜찜함이 가시지 않아 인상을 썼다.

“정말 소용없을 텐데 괜히 준 거 아닌가. 저거 하나도 뼈 빠지게 고생해서 모은 건데.”

갑자기 후회가 솔솔 밀려오는 것 같았으나 그는 어깨를 으쓱해서 털어 버렸다.

“뭐, 여러 방면으로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찝찝함을 털어 버리려 혼잣말하던 말란도르는 결국 입을 다물고 상념에 잠겼다. 눈빛이 복잡하게 변했다.

“……근데 진짜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레칸의 눈빛이 그랬다.

사실 말란도르는 살아 있는 생명체 중, 단일 개체가 가진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편이었다.

수명이 다한 개체는 죽을 수밖에 없다.

일종의 초월자로서 세상의 이치를 꿰고 있는 말란도르는, 설령 신일지라도 죽은 자를 되살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아등바등하는 건 밀라니아를 조금이나마 더 길게 이 땅에서 숨 쉬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 부질없는 욕망에 미련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한참 어린 늑대는 조금 달랐다.

그레칸의 눈.

새카만 동공 속, 세상의 이치 따위는 모르겠다는 듯 의지로 타오르는 불꽃.

그 눈이 반쯤 체념한 말란도르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다.

* * *

저택에 도착하기 전, 말란도르에겐 두 가지 계획이 있었다.

하나는 밀라니아 수명 늘리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년 정도만.

원래 그가 기대하던 밀라니아와의 마지막 시간은 조용한 마녀숲에서 서로의 숨 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옛 추억을 꺼내 볼 수 있는, 상대방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런 식으로, 연고도 없는 인간 대륙에서, 시간의 흐름을 음미하지도 못한 채,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그런 게 아니었단 말이다.’

다시 생각하니 또 화가 나서 말란도르는 끓어오르는 머릿속 분노를 가라앉히느라 다소의 시간을 할애했다.

다른 하나는 앨리지 살리기다. 이건 그 자신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지만 밀라니아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고려한 계획이다.

말란도르는 앨리지에게도 붉은 꽃을 사용해 볼 예정이었다.

물론 순수한 자연의 일족인 요정족 앨리지에게는 붉은 꽃 사용이 독일 수 있다.

요정으로서의 근원이 오염될 수도 있는 일이란 거다.

하지만 말란도르는 그 문제는 먼지 한 톨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어쨌든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히고, 연금술사 탑주까지 데려온 그의 결심은 눈앞의 광경을 마주한 순간 요란스럽게 박살이 났다.

크아아아아앙―.

그레칸의 분노의 포효와 함께 밀라니아에게 달라붙어 있던 르베리안즈가 뒤로 붕 밀려났다.

쾅!

어찌나 세게 밀쳐졌는지,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굉음 수준이었다.

그러나 르베리안즈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육체적 힘으로는 그레칸에게 달릴지 몰라도, 그는 한 일족의 수장인 것이다.

부서진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킨 르베리안즈의 눈이 줄기줄기 붉은 광망을 뿜어냈다.

“이, 이 낄 데 안 낄 데 못 알아보는 개새끼가…….”

흔들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걸음을 뗀 르베리안즈는 어느새 밀라니아의 앞을 막아선 그레칸을 노려보았다.

열받게도 서 있는 자리도 그가 있던 자리였다.

“로드!”

저택에 먼지 섞인 바람이 일었다.

수장의 분노에 감응한 박쥐족이 속속들이 저택 안으로 날아들었다.

재상이 마련해 준 저택은 꽤 권세 있는 귀족의 저택으로 널찍했지만 열 명 남짓 되는 이들이 제각각 기운을 거세게 뿌려 대고 있으니 협소하게 느껴졌다.

20년의 세월은 허투루 먹었는지, 머리에 뇌가 아니라 주먹이 들어찬 것처럼 혈기 왕성한 둘이었다.

밀라니아는 마녀성에서처럼 두통이 일었다.

‘날 공격하지 말라고 세뇌를 할 게 아니라, 마인드컨트롤 훈련 같은 거라도 시켰어야 한 것이냐?’

아쉬운 마음에 혀를 차 보지만 소용이 없었을 거라는 데 그녀는 남은 수명이라도 걸 수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야 점잖은 축인 말란도르까지 혀를 찼다.

“난투극이 따로 없네. 저 새끼들 때문에 네 수명이 빨리 줄어든 건 아닐까, 밀라니아?”

박쥐족 전사까지 포함한 이들 나이를 합산해 봤자 평균 연령 100살이 되지 않을 상황에서, 둘이 합쳐 이천 살은 가뿐히 넘는 밀라니아와 말란도르는 묘한 동질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아, 스트레스 때문에 늙는 기분이네.”

“네가 퍽도 그러겠느니.”

“그러지 말고 말만 해. 저것들 내가 다 처리해 줄게.”

언제 심각하게 계획을 짰다는 양 말란도르가 밀라니아를 향해 상큼한 윙크를 보내자, 밀라니아는 손을 휘휘 내저어 튕겨 냈다.

“네 아래서 꿈틀거리는 사기나 풀고 생각하는 척을 하려무나. 그 기운에 머리가 더 아프이.”

머리를 짚은 밀라니아가 눈살을 찌푸리자 말란도르는 ‘앗!’ 하며 저도 모르게 풀려 가던 기운을 거두었다.

그러자 발 아래에서 달그락거리던 백골도 땅 아래로 숨어들어 모습을 감추었다.

“혈기 왕성이 따로 있는 게 아니구먼.”

머쓱해하는 그를 보며 밀라니아는 딱한 표정이 되었다.

한편 분위기는 점점 더 과격해지고 있었다.

“로드, 어떻게 할까요?”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안 그래도 로드께 건방지게 굴던 저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참이었습니다. 하등하고 무식한 늑대족의 버려진 새끼 따위, 저희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적의를 드러내는 시선을 받으며 그레칸은 르베리안즈를 향해 무뚝뚝하게 빈정댔다.

“수장이 됐다는 게 떠벌리기 좋아하는 날파리를 거느린다는 의미였는지는 몰랐다.”

“…….”

“너, 대장 날파리가 되어 왔어.”

박쥐족 전사들의 기세가 사나워졌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듯 르베리안즈가 가벼운 비소를 머금었다.

“날파리 대장도 대장이지. 아무리 힘세고 큰 벼룩이라도 내게 닿긴 쉽지 않을 걸.”

“…….”

“이제 신분이 달라졌지, 그레칸. 그렇지? 일대일이었을 때도 승부를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말할 것도 없지 않겠어? 사사건건 방해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어쩌냐?”

그레칸의 빈정거림에 대응하는 르베리안즈의 응수도 만만찮았다.

안 그래도 밀라니아에게 프린서플이 그다지 효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되어 기분이 좋지 않았던 르베리안즈는 눈빛에 살얼음을 품고 있었다.

‘앙숙은 앙숙이로구먼.’

지켜보던 밀라니아는 서로를 노려보는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로 인해 과열되는 공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피부가 저릿저릿했다.

이쯤에서 열기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이 일순 상쾌해졌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수중기가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이동된 수증기는 응집하고 응집해서 차가운 물이 되었고, 그대로 가장 뜨거운 곳으로 날아갔다.

촤악!

사납게 으르렁대던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의 머리 위로 물벼락이 내렸다.

한겨울 호수 물처럼 시린 물벼락에 홀딱 젖은 두 사람의 움직임이 일순 석상처럼 굳어졌다.

끓어오르던 분노가 파삭, 하고 식었다.

그레칸이 도리질을 치자 물방울이 튀었다.

르베리안즈에게까지.

“로드!”

“됐으니 물러가라.”

르베리안즈는 짜증을 내며 손으로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긴 머리를 한데 모아 쭉 짜자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에 경악하던 박쥐족 전사들은 르베리안즈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고,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명령에 따라 하는 수 없이 저택 밖으로 물러났다.

그제야 저택은 원래의 고요한 공기를 되찾았다. 물벼락으로 바닥이 젖기는 했지만.

“좋은 구경을 할 수도 있었는데.”

말란도르는 밀라니아의 개입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웬만하면 힘쓰지 말랬잖아. 남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몰라도 힘을 쓰면 쓸수록 몸이…….”

“고작 이 정도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고.”

말란도르에게 핀잔을 주었던 밀라니아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밝힌 게 과연 좋은 선택이었나 하는 의문에 휩싸였다.

말란도르의 말에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울먹거리는 눈을 했기 때문이다.

“…….”

“…….”

풀이 팍 죽은 두 사람을 보자 무던한 밀라니아도 민망하고 머쓱하고 속이 울렁거려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녀는 뒤늦게 소란에 밀려 잠시 잊혔던 두 남자를 발견했다.

안대를 쓴 채 바닥에서 꿈틀대는 남자와 주저앉은 채 침을 흘리는 남자는 각각 2대륙에선 명실상부 마탑의 2인자 마법사로 불리는 란데스와 고명한 학자로 이름 높은 연금술사의 탑주였다.

“저들은 누구인고?”

그레칸이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안대 밖으로 드러난 얼굴이 온통 침에 젖어 추접한 상태라 미덥지 않긴 하지만, 마법사 중에서 두 번째로 강한 자라고 했다.

‘밀라니아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될 거다.’

그레칸의 얼굴에 기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간만에 나타난 그레칸의 해맑은 미소는 채 삼십 분을 채 가지 못했다.

엉망이 된 1층은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치 못해 2층의 응접실로 옮겨 간 자리에서, 란데스는 난색을 표했다.

“그런 건 당연히 못 합니다.”

“당연히, 못 해?”

밀라니아의 수명을 늘리라고 명령하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던 그레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너, 강하다고 했다.”

“…….”

“내게 거짓말을 한 거야?”

그레칸의 눈이 오싹하게 번뜩였다.

그 앞에서 한 마리 쥐가 된 기분을 느끼고 있는 란데스는 죽을 맛이었다.

강하냐고?

만약 그 말을 한 사람이 일개 범인, 아니 황궁의 마법사였어도 콧방귀를 뀌며 화염 마법을 쏴주었을 것이다.

란데스는 보통의 인간들이 이름만 듣고도 인정할 만큼 강한 마법사였다.

그런데 갑자기 저를 납치한 눈앞의 젊은 청년은 그의 위명 따위 하등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오로지 그가 기사처럼 지키고 있는, 눈이 튀어나오게 아름다운 여자를 살릴 수 있는지 없는지만 중요한 양 굴고 있는데 그게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어야지 말이다.

사람의 수명을 마법으로 늘리다니. 그런 게 가능했으면 자신이 진작 탑주의 자리를 꿰찼을 것이다.

란데스의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 이 미친놈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작자란 말인가.’

저를 납치한 그레칸의 신경이 다른 데 쏠려 있을 무렵부터, 아니, 그에게 수치스럽게 들쳐 메어져 납치당했을 때부터 란데스는 명석한 머리를 굴려 방법을 강구했다.

캐스팅을 통해 마법을 쓰지는 못하더라도, 비상시를 대비하여 챙긴 마법 아티팩트를 사용하면 이 파렴치한 납치범에게서 벗어나 응징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겼고, 진즉 시도도 해 보았다.

‘아티팩트가 고장 났나?’

그런데 대체 무슨 조화인지 이 무식하게 힘 센 청년에겐 그의 마법이 조금도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란데스는 지금의 난관을 타개할 길을 마땅히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건, 당연히…… 못 합니다. 아직 수명을 늘리는 마법은 개발되지도 않았고, 물론 상처를 고치는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원하는 건 그런 것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도 아니고 어느 마법사가 이미 수명이 다한 생명체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겠는가.

그건 창조주의 영역이지, 자신 같은 일개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대부분의 상처나 병은 제가 고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목숨을 살릴 수는 있…….”

“너, 쓸모없다.”

그 말이 비수가 되어 란데스의 가슴에 꽂혔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 요구가 과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까?”

울분에 차 항변했지만 이미 그는 그레칸의 심중에서 추방된 상태였다.

그렇게 마탑의 2인자 란데스는 그레칸에게 하등 쓸모없는 무능력자 취급을 받고, 기억에서 삭제되었다.

기대를 한 게 억울한 듯 그레칸이 낮게 중얼거렸다.

“밀라니아는 아덴샤라는 마법사가 전지전능했다고 말했다.”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던 란데스의 얼굴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아덴샤?’

작금의 시대에 아덴샤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대명사였다.

현재 모든 마법사들은 그의 발자취라도 쫓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실정이었고, 란데스도 그중 한명이었으므로 아덴샤란 이름을 못 알아들은 건 결단코 아니었다.

그저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귀를 의심할 것뿐이었다.

그의 말대로 아덴샤라면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그는 세상의 법칙을 새로 썼다는 말이 돌만큼 강대한 인간이었다.

재능은 미천하되 한계가 없다는 인간의 특성을 그대로 실현시킨 자.

그 대마법사를 언급하니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화를 내려던 마음도 푸시식 식었다.

‘이 작자들이 정말 제정신인가? 대체 정체가 뭐야?’

그레칸의 기분 저조한 중얼거림에 르베리안즈가 깔깔 웃었다.

“인간에게 뭘 기대했던 거야? 하여간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놈이 할 만한 생각이라 웃기긴 웃기네. 한참 웃었다, 덕분에.”

르베리안즈의 통렬한 비웃음은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그레칸의 이마에는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란데스는 기분이 상했다.

‘아까부터 말끝마다 인간, 인간. 자기들은 인간이 아니란 거야, 뭐야?’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가 섬광처럼 떠오른 가능성에 멈칫 굳어졌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란데스는 머릿속이 마비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인간이 아니라면,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그의 뇌가 이제까지보다 훨씬 팽팽하게 돌아갔다.

“탑주라면 방법을 생각할 수도…….”

란데스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그레칸이 귀를 쫑긋했다.

“탑주?”

관심을 보이는 그를 보며 란데스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제 상사입니다. 마법 실력만이 아니라 온갖 기상천외한 것들을 연구하기로 유명하시죠. 수명과 관련된 마법은 금지되어 있지만 그분이라면 한 번쯤은 연구했을 법해요.”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으며 란데스는 저를 쳐다보는 이들의 면면을 꼼꼼히 살폈다.

‘이렇게 보아서는 인간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런 가공할 힘을 사용하는 인물에 대한 얘기는 어디서도 듣지 못했다.

이렇게 눈에 띄는 이들이라면 풍문으로라도 한 번 들어 볼 듯한 데도.

“어디에 있지?”

“그건 왜 물으시는지…….”

“불러와야 한다.”

“…….”

“어디에 있지?”

란데스는 어떻게 해야 이들의 정체를 마탑에 알릴 수 있을지 머리를 쓰느라 시간을 끌었다.

고작 몇 초 머뭇거렸을 뿐인데 그레칸이 못마땅하게 재촉했다.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게, 탑주는 지금 황태자 전하와 함께 계실 터라…….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납니다.”

어렵다는 란데스의 말을 무시하며 그레칸은 당장이라도 황궁으로 떠날 듯한 기세였다. 그런 그를 말린 건 말란도르였다.

“탑주라는 인간을 데려와도 하는 수 없는 건 마찬가지야. 수명을 늘리는 마법 같은 건 인간의 수준에서 불가능하니.”

오만한 투로 말한 그가 품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사이한 붉은 용액이 찰랑거렸다.

“방법은 이것뿐이야.”

자신만만한 장담에 모두의 시선이 유리병에 꽂혔다.

“붉은 꽃이다.”

말란도르는 붉은 꽃을 활용한 밀라니아 소생 계획을 설명했다.

대수롭잖은 듯이 붉은 꽃을 내놓긴 했으나 사실 그가 갖고 있는 액체는 수십 년을 투자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걸 다른 이들에게 순순히 설명하는 이유가 있었다.

‘나랑 밀라니아는 상극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로는 역부족이야.’

어둠 그 자체인 말란도르가 인간계의 붉은 꽃을 활용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벌써 몇 차례 밀라니아에게 사용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말란도르에게 큰 고민거리였다.

결국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밀라니아와 그의 상성이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살릴 수 없다면 타인의 생명력을 이용하는 수밖에.’

밀라니아를 살린 뒤 죽어 주면 더 좋고.

때문에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레칸에게 용액을 건네주었고, 르베리안즈가 탐욕스러운 눈으로 붉은 꽃을 바라보는 걸 묵과했다.

오히려 이 상황을 그가 유도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

“…….”

말란도르가 붉은 꽃을 꺼낸 시점부터, 분위기는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밀라니아는 붉은 꽃에 어린 죽음의 기운이 거북하여 내내 인상을 쓰고 있었고, 이미 말란도르에게서 용액 한 병을 받은 그레칸은 잠잠한 체했다.

유독 붉은 꽃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이는 르베리안즈였다.

그 기색을 눈치챈 밀라니아가 유리병을 깨뜨리려 했지만 말란도르가 눈치 빠르게 손으로 쥐고 보호했다.

그녀는 그를 쏘아보았다가 얼빠진 얼굴의 르베리안즈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이가 원하는 게 네 그런 반응이니라. 말란도르는 언행 불일치의 공작. 그가 이 저주받은 물건을 내놓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너무해, 밀라니아.”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고 억울해하는 말란도르와 달리 르베리안즈는 침착해진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꿍꿍이가 있다는 거죠?”

“물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밀라니아는 여전히 정신을 딴 데 두고 있는 르베리안즈의 눈앞을 손으로 가렸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서늘한 눈꺼풀에 내려앉자, 르베리안즈는 그 가슴 벅찬 온기에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보지 마려무나. 생을 늘릴 수 있다는 사실에 현혹되지 마. 저건 실패할 가능성이 크고, 설사 성공하더라도 수명이 단축되며, 알 수 없는 저주까지 형벌처럼 부과하는 저주받은 물건이니라.”

그레칸은 침묵을 지켰다. 뭔가를 움켜쥐듯이 가슴팍 옷자락에 올린 손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이건 아니지. 왜 애를 겁주고 그래?”

말란도르는 혀를 쯧쯧 찼다.

장내는 다소 어수선해졌지만, 르베리안즈는 밀라니아의 소리에만 집중했다.

약간 낮은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

귓가를 긁는 듯한 묘한 마력이 있다. 또한 들릴 듯 말 듯 해서 더 집중이 되는 숨소리. 온 신경이 사로잡혔다.

그녀가 말하는 경고는 뒷전이었으나, 되새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붉은 꽃에 대해선 할머님으로부터 간략하게나마 전해 들었지.’

말란도르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 하더라도 저게 밀라니아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 확실할 터.

‘그렇지 않으면 꺼내 놓지도 않았을 거야.’

이미 기대했던 일족의 보물이 실패한 상황. 크게 상심한 르베리안즈에게 붉은 꽃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밀라니아의 손을 붙잡았다.

하얀 찰흙처럼, 물기가 배인 듯한 손. 떨어지는 데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천천히 손을 뗐다.

밀라니아는 의아한 눈빛이었다.

“바보 같은 선택은 안 할게요.”

르베리안즈는 애처럼 인상을 쓰고 있는 말란도르와 무덤덤하게 쳐다보는 그레칸을 응시했다.

‘밀라니아를 살리고 싶어.’

그건 그가 가진 가장 큰 목표.

부차적으로는 그레칸과 말란도르가 아닌 자신이 그리 해 주고 싶다는 것.

전자는 순수한 욕망이고, 후자는 사내로서의 바람이었다.

그 욕망과 바람 때문에라도 르베리안즈는 유혹을 물리치기 힘들었다.

말란도르가 탁자 위에 내려놓은 붉은 꽃은 르베리안즈의 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까짓것.’

르베리안즈는 유리병을 낚아채고, 밀라니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마개를 열고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밀라니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내가 그렇게 설명했건만 그리도 어리석게 구느냐!”

그레칸은 르베리안즈의 반응에 집중했고, 말란도르 역시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관심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르베리안즈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목으로 넘어간 용액의 향기가 역류하여 콧속을 찔렀다.

일반적인 꽃향기를 수백 배로 농축시켜 놓은 것처럼 짙은 향기. 그러나 향기를 껍질처럼 감싼 죽음의 냄새.

썩어 가는 시체를 코앞에 둔 듯한 기분에 르베리안즈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병환으로 인해 마녀성에서 그레칸과 이리저리 험하게 굴러다녔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그는 박쥐족의 고귀한 핏줄로 이제는 수장이 된 자였다.

어려서부터 최고급이 아니라면 눈길도 주지 않은 그에게 시취는 일주일 내내 방치해 둬 재떨이로 사용한 미트파이를 먹는 것 이상으로 역겨웠다.

‘이까짓 것쯤.’

억지로라도 신경을 돌리고 르베리안즈는 몸 안의 변화를 관조했다.

주변의 반응과 달리 그는 긴장하긴 했지만 걱정하진 않았다.

붉은 꽃이 저주받은 물건이라지만 그래도 한낱 귀물.

강력한 박쥐족의 수장이 고작 귀물 따위로 어떻게 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수명은 대마녀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긴 편이었다.

밀라니아에게 수명을 떼 주더라도 당장 즉사할 만큼은 아닐 거라는 믿음도 그의 과감한 행동에 한몫했다.

그러나 붉은 꽃을 복용한 후의 일은 몰랐으므로, 그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가만히만 있었다.

‘……뭐지?’

붉은 꽃을 마셨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몸은 멀쩡하고, 아무런 변화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꽃 따위가 어떻게 자신을 해하겠는가.’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비를 하고 있던 르베리안즈의 눈이 미심쩍어졌다.

말란도르가 가짜를 꺼내어 자신을 놀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 한편, 그러나 시체 썩는 냄새와 사악한 마력만큼은 생생하여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뚝!

식도를 따라 흐른 붉은 꽃이 마침내 그의 위장에 당도했다.

순식간에 속이 뒤집혔다.

르베리안즈는 창백한 얼굴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거대한 파도처럼 메스꺼움이 몰아친다.

온몸의 장기가 뒤틀리고 썩어가서 악취를 풍기는 것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의자에서 떨어진 르베리안즈가 속에 있는 것을 모두 토해 냈다.

“우에에에에엑!”

프린서플 때문에 그의 몸은 세포 하나까지 일시적으로 완벽한 상태였기 때문에, 토해진 것은 붉은 액체뿐이었다.

불가항력으로 붉은 꽃을 토해 낸 르베리안즈의 안색은 곧 죽을 것처럼 창백했다.

살면서 이토록 끔찍한 고통은 처음이었다.

아직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이다.

말란도르는 바닥에 쏟아진 용액이 아깝다는 듯 혀를 찼다.

“이런. 설마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수장쯤 되는 놈도 안 된다는 건가.”

자괴감과 물리적 괴로움에 고통스러워하던 라베리안즈의 귀로 그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홱, 고개를 돌려 말란도르를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생각에 빠진 그의 얼굴을 보자, 르베리안즈는 말란도르가 제게 하지 않은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말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그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말란도르는 제가 잘못해 놓고도 모른 척하는 못된 아이처럼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나 이 상황이 궁금한 건 르베리안즈뿐만이 아니었다.

그레칸 역시 묵묵히 말란도르를 응시했다.

쩝, 입맛을 다신 말란도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퍽 재수 없는 몸짓. 르베리안즈의 눈꼬리가 파르라니 올라섰다.

“내가 이렇게 쉽게 쉽게 꺼내서 그렇지, 붉은 꽃은 전설 속의 귀물이야. 그런 걸 쉽게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본론만 말해. 깔짝깔짝 약 올리지 말고.”

“휘유, 무서워라. 하려던 말도 하고 싶지 않아지는 걸. 그래도 다들 궁금해하니까 말해 주지. 사실 붉은 꽃은 아무나 쓸 수 없거든. 네가 붉은 꽃을 소화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야.”

말란도르는 손가락을 칼같이 펴고 르베리안즈를 가리켰다.

르베리안즈는 기분 나쁜 얼굴로 그 손가락을 노려보았다.

말 한 마디, 몸짓 하나로 르베리안즈의 기분을 시궁창으로 만들어 버린 말란도르는 그의 자신감을 끝장내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눈은 웃지 않고 진지하여, 비록 태도는 장난이나 진실을 말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르베리안즈는 간신히 화를 참아 냈다.

“자격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지.”

“자격이 없는 자?”

“안타깝게도 모든 걸 알고 있는 나도 이 부분만큼은 나도 잘 몰라.”

뭔가 잔뜩 있는 것처럼 굴었던 주제에. 르베리안즈가 분노를 터뜨렸다.

“지금 장난하자는 거냐?”

“누구나 붉은 꽃을 사용할 수는 없어.”

“그럼 그 자격이란 게 뭔데!”

주먹으로 바닥을 치며 르베리안즈는 거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드문 일이었다.

르베리안즈는 대부분의 일을 진심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그레칸과 다툴 때도 이 정도로 화가 나지는 않았다.

실패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밀라니아는 차라리 잘됐다는 얼굴. 그 평온한 얼굴이 르베리안즈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레칸은 더했다.

비웃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실패를 되새기는 기색.

르베리안즈는 처음으로 패배감을 맛보았다.

그로 인한 분노는 납득 가는 답을 내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말란도르를 향했다.

말란도르는 모호한 얼굴이었다.

“힘.”

서늘한 표정을 짓던 르베리안즈는 예상 못 한 단어에 멍해졌다.

힘이라니.

지금, 수장으로서 각성한 르베리안즈는 제1대륙, 아니 전 세상을 통틀어도 10명의 강자로 뽑힐 수 있을 터였다.

인간들이 공성 무기니, 대포니 하는 걸 끌고 군대를 이룬다면 모를까.

단일 개체로 힘을 따진다면 그를 빼놓을 수 없다.

“……힘이라고?”

어이없어 묻자 말란도르는 그의 혼란 따위 제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탈함과 어처구니없음에 힘이 빠진 르베리안즈가 비웃듯 말했다.

“그럼 붉은 꽃은 아무도 사용할 수 없겠어.”

“왜 없어?”

눈을 동그랗게 뜬 말란도르가 손가락으로 제 가슴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과 말란도르를 응시한 르베리안즈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신보다 힘이 세다고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 아닌가.

제 속을 터지게 하려고 ‘힘’이라고 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말란도르가 아무리 심상찮더라도 자신이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르베리안즈가 빈정거렸다.

“거참 대단한 이유네. 힘이라니.”

“글쎄, 잠재력이나 육체적 힘이나 마력이나, 다 힘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

“영혼의 파동이라든지, 결이라든지, 그런 것도 영향을 주긴 하겠지만.”

두루뭉술한 대꾸. 르베리안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마디로 말하면 당신도 모른다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르베리안즈는 허탈해졌다.

하도 확신한 투로 말하기에 정답인 줄 착각했다.

어쨌든 말란도르 저자가 사용할 수 있는 걸, 그는 사용 못 한다는 건 사실이다.

더 좌절스러운 점은, 저 괴기스러운 용액을 다시 속에 집어넣을 엄두는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르베리안즈는 다시금 말란도르의 말을 곱씹었다.

‘힘이라고?’

힘이든 영혼의 파장이든 기분 나쁘긴 매한가지였다.

르베리안즈가 침묵하고 있는 사이,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 생겨난 물은 예쁜 항아리 모양을 이룰 때까지 모였다가, 항아리가 찰랑거리는 형상이 되자 바닥으로 쏟아졌다.

르베리안즈가 뱉어 낸 붉은 꽃과 투명한 물이 섞여 오묘한 색의 액체로 휘몰아쳤다.

그 상태로 밀라니아가 창문을 통해 바깥에 내다 버리자, 말란도르는 찡그린 얼굴로 연신 아깝다며 고개를 저어 댔다.

그때까지도 침묵하고 있던 르베리안즈에게서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저 자식은? 저 자식도 안 되는 건가.”

가라앉은 시선이 그레칸을 향했다.

‘이걸 경쟁이라고 해야 하는지, 어리다고 해야 하는지. 역시 혈기 왕성하네.’

말란도르는 장난기 가득한 할아버지가 어린 애들을 놀리는 것처럼 히죽거렸다.

“글쎄. 알 수 없는 일이지.”

“뭐 하나 명확한 게 없군.”

말란도르의 말이 어지간히 맘에 안 들었던지 르베리안즈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윽고 그는 이상하게 잠잠한 그레칸을 힐끗했다. 평소와 달리 얌전한 게 영 언짢았다.

차라리 원래 하던 것처럼 빈정거리고 조롱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왠지 자신 따위는 이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미 같아서, 더럽게 거슬렸다.

“당신이 보기엔 내가 그레칸보다 못하단 건가?”

말란도르는 차갑게 얼어붙은 눈으로 답을 요구하는 그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재밌군, 재밌어.’

그는 박쥐족의 수장을 몇 번 만나 본 적 있었다.

박쥐족 특유의 성질대로 차갑고 조용하고 거만해서 영 싫어하는 놈들이었다.

그런데 밀라니아에게 달라붙은 두 마리 벌레 중 하나인 이놈은, 이제까지 봐 왔던 놈들처럼 거만했지만 비교적 끓는 냄비처럼 뜨거우니 그 의외성이 흥미로웠다.

“그럴 수도.”

속으론 배를 잡고 박수를 치고 뒹굴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란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 그렇게 생각한다?”

르베리안즈는 황당해했다.

그렇게 어이없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무시해도 될 텐데도, 말란도르의 말을 신경 쓰는지 굳어진 얼굴.

‘저자는 밀라니아만큼이나 오래 살았겠지. 그냥 무시하기엔 거슬려.’

심란해하는 르베리안즈에게서 시선을 떼고 말란도르는 그레칸의 동태를 살폈다.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은연중 그를 무시하는 르베리안즈의 반응에 화를 내며 펄쩍 뛰는 것도 좋겠는데. 그러나 생각과 달리 그레칸은 여전히 점잖고 조용했다.

말란도르는 눈살을 찡그렸다.

다행히도 르베리안즈가 그를 도왔다. 다소 긴 금발을 쓸어 넘긴 르베리안즈가 씹어 먹듯 뱉었다.

“사용해 보면 알 수 있잖아.”

“뭘?”

“한번 해 봐, 그레칸. 내가 실패한 거, 네가 한번 해 보라고.”

그러면서 르베리안즈가 말란도르를 바라보았다.

말란도르는 얼른 흠, 헛기침을 하고는 짐짓 신중한 투로 대꾸했다.

“붉은 꽃은 구하기 매우 어렵지만, 시험해 볼 만한 양은 있지.”

르베리안즈의 두 눈은 밀라니아가 살았으면 하는 희망에 기인하는 기대와 회의감, 착잡함 그리고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가 실패한 걸 그레칸이 성공한다면, 기쁨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리라는 건 분명했다.

선명한 감정의 파동에 말란도르는 손뼉을 치고 싶은 마음을 참고 그레칸을 응시했다.

그레칸의 입술은 단단히 닫혀 있었지만 르베리안즈의 말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오랜 시간 머물던 흑계에서 벗어나 흥밋거리를 찾으러 다닐 만큼 유흥에 목말랐던 말란도르는 밀라니아의 한심해하는 시선도 느끼지 못할 만큼 열중해 있었다.

더군다나 아무도 모르는 사실.

말란도르는 그레칸이 이미 붉은 꽃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도 그게 있다고 말해. 지금 당장 시험해 볼 수 있다고 말해 봐!’

너의 젊은 혈기를 미친 듯이 자랑해 봐. 나를 재밌게 해 줘.

말란도르의 흥미로운 눈과 달리, 그레칸은 귀찮은 표정이었다. 제 생각에 더 골몰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대답을 하려는지 입술을 달싹인다.

르베리안즈는 딱딱한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았고 말란도르의 빨간 눈은 한층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 순간, 지켜보던 밀라니아가 끼어들었다.

“하지 말거라.”

“으응? 이건 아니지, 밀라니아.”

“…….”

“진심이야? 이 재밌는 걸 그만하자고?”

말란도르는 장난감을 뺏긴 소년처럼 애처로운 눈을 했다.

무감한 밀라니아의 표정이 변하지 않자, 쩝 입맛을 다셨다. 아쉬움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레칸이 뭐라고 대답할지 너무 궁금했지만 밀라니아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는 한 발 물러났다.

‘수백 년이 지나도 변한 게 없느니.’

수백 년 전 말란도르의 장난기로 인해 남들은 백 번 죽었을 위기에 빠졌던 밀라니아다.

‘말란도르는 단순히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노예들의 주인이란 칭호도 온갖 생명체를 재미 삼아 손 위에 대고 굴려 댔기 때문이 아닌가.

“적당히 하려무나. 진정 내가 화를 내야 그만할 것이야?”

“…….”

천성적으로 게으름뱅이라 말란도르는 가만히 있을 때는 가만히 있지만, 한번 개입하면 적당히 하지 않는다.

밀라니아가 정말로 화를 내고 있음을 깨달은 말란도르가 결백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에 속지 않으며 밀라니아는 냉랭히 뱉었다.

“붉은 꽃은 저주받은 물건이니라.”

그녀의 말은 말란도르가 아니라 상심한 르베리안즈를 향해 있었다.

“그러니 그런 걸 사용하지 못한다고 실망할 필요 없느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돼.”

밀라니아의 관심이 침울한 르베리안즈에게 쏟아진 사이, 말란도르는 살금살금 그레칸에게 다가갔다.

그레칸이 무심하게 그를 응시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말란도르가 소곤거렸다.

“아까, 뭐라고 말하려 했어?”

“뭐라고 말하긴.”

“대답하려고 했잖아.”

그레칸이 귀찮은 얼굴로 대꾸했다.

“별거 아니다.”

“별거 아닌 거, 얘기해 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려고 했다.”

“뭐?”

말란도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문제가 있나?”

“실망인데. 밀라니아를 살리고 싶지 않냐?”

그레칸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네 말대로 붉은 꽃을 사용하면, 밀라니아를 살릴 수 있는 건가?”

“…….”

“르베리안즈가 실패했고, 넌 힘이 문제라고 했다. 나는 르베리안즈보다 강하지 않아. 지금 내가 그걸 사용한다 해도, 르베리안즈와 같은 꼴이 되겠지. 기회는 한 번뿐이다. 난 반드시 성공해야 돼. 그러려면 지금의 상태로는 안 돼.”

말란도르는 생각보다 침착한 그 대꾸에 얼이 빠졌다.

말란도르는 몰랐지만, 그에 비해 지닌 능력이 미약해도 그레칸에겐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었다.

그레칸은 탁월한 사냥꾼이었다.

그는 부모에게 버림받아 채 다섯 살도 안 되는 나이에 살기 위해 숲을 누볐다.

어린 살결에 흉터가 새겨지고, 새겨진 흉터만큼 두터워진 피부는 단단해졌다.

그레칸은 사냥할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신중함으로 점수 매기자면 훌륭한 정답지였지만, 말란도르의 기대에 부합하지는 않았다.

말란도르의 눈에 짜증이 어렸다.

‘……재미없기는.’

난 네가 과격한 혈기답게 바락거리는 걸 보고 싶었단 말이다.

거만하고 재수 없지만,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젊은 개체답게 오만방자하게 구는 르베리안즈보다 무뚝뚝한 그레칸이 말란도르는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박쥐족의 어린 수장이 황당해한 만큼 그레칸의 일신의 힘은 보잘것없다.

‘육체적 힘을 제외하고는 마력도 없고 염력 같은 권능도 없지. 그런데도 난 네가 더 경계된다. 이건 내 본능이자 직감이야.’

그건 사냥꾼처럼 때를 기다리며 가라앉은 눈 때문일 수도 있고, 이런 난리통에도 밀라니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집요함 때문일 수도 있다.

하나 확실한 건, 이 재수 없는 새끼 늑대를 향한 밀라니아의 부드러운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였다.

마치 자신이 품어 온 새끼가 비상하길 바라는 어미 새처럼 애정이 깃들어 있다.

누구보다 그 눈빛을 진작 깨달았던 말란도르는 속이 뒤틀렸다.

그레칸의 단단한 어깨를 툭툭 치며 덕담을 던지듯 방실방실 웃었다.

“좋아, 울프 보이. 너는 붉은 꽃을 취할 자격이 있었으면 좋겠다.”

‘네 생명을 밀라니아에게 모조리 바치고 콱 죽어 버려라.’

안 듣는 척하고 있던 르베리안즈가 끼어들었다.

“가만 보니 행동에 줏대가 없군 그래. 재미 삼아 여기저기 찌르고 다니지 말아라. 체통 없이 굴기는.”

“새끼 박쥐가 생사람 잡네. 너는 밀라니아에게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붉은 꽃도 사용 못 하고, 영 쓸모가 없어!”

말란도르가 혀를 쯧쯧 차자 뭐라고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르베리안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신이 섬세히 빚은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사뭇 처연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곳에 그의 미모에 안절부절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붉은 꽃은 실패했다. 난 마탑주를 데려오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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