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48)

20

특명, 대마녀를 살려라

“하지만 제가 없어진다고 숲이 기운을 잃는 건 아닐 거예요.”

앨리지가 거울의 테두리를 매만지다 품에 집어넣었다.

“전 곧 죽는걸요.”

화난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닌, 약간의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배인 목소리로 담담하게.

“전 시한부예요. 에반이 죽은 하루 뒤 죽기만을 바라는.”

제 죽음을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차분한 태도다.

조금 당황한 듯 분노가 사그라든 르베리안즈가 눈을 깜박였다.

“……병에 걸렸어?”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만도 감사하답니다.”

“고칠 방법은 없는 건가?”

“……제 걱정을 하는 건가요?”

앨리지가 놀랍다는 듯 묻자 르베리안즈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고칠 수 없는 병은 아니란다.”

밀라니아의 말에 앨리지를 제외한 셋은 ‘치료법이 있으면 됐잖아.’ 하는 얼굴이 되었다.

“네 병은 심장의 마력이 빠져나가 생기는 병. 시체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듯 마력을 모두 잃은 넌 죽은 몸이 될 것이니라.”

“…….”

“그러나 대책은 마력이 빠져나가는 심장을 튼튼히 만드는 것이야.”

기대 반, 실망 반으로 앨리지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방법이 불가능하지 않나요?”

“요정족과 대마녀는 근원이 비슷한 만큼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많으니. 너와 같은 병은 대마녀의 심장으로 치유 가능하단다.”

“…….”

“그러니까, 나는 고칠 수 있다.”

그 말에 모두들 일순 불가해한 표정을 지었다. 곧바로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었다.

누구도 그녀의 말이 액면 그대로의 뜻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레칸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심장으로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

“심장을 재료로 사용한다는 것도 아니고.”

“맞느니.”

“뭐?”

“그게 맞다고 했느니라.”

밀라니아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가볍게 긍정했다.

의아해하는 표정을 둘러보며 그녀는 제 일이 아닌 것처럼 느긋한 말씨로 설명을 이었다.

“마녀의 심장이 필요하여 일반적으로 마녀병이라 불리는 네 병은, 내 심장을 흡수하면 나을 수 있느니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뒤늦게 르베리안즈에게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입을 꾹 다물고 벌떡 일어난 그레칸이 앨리지를 노려보았다.

당장 잡아 죽이기라도 할 듯한 살기가 쏟아져 나와서 안 그래도 밀라니아의 말에 당황하던 앨리지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런, 그런 치료는 할 수 없어요. 제가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어떻게 대마녀님을…….”

당황과 혼란과 분노가 휘몰아치는 장내에 밀라니아는 얼굴을 찌푸리고 진정하라며 손을 흔들었다.

“지금 당장 치료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들 그러느냐? 내 말에 의문은 가질 필요 없도다. 오랜 시간 고민한 문제이리라. 그 결과, 내 피로 병세가 호전되는 사실을 확인했으이. 심장이 아니라 심장의 피만 있으면 돼.”

혹 다른 얘기가 있을까 봐 희망을 갖고 가만 듣던 르베리안즈가 얼굴을 구겼다.

“그게 그거잖아?”

그레칸은 아직도 앨리지에게서 차가운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앉거라. 그레칸.”

미동 없는 그레칸을 보며 손짓했다. 그레칸이 망설이자 씁, 하고 잇소리를 냈다.

결국 그레칸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가와 밀라니아의 옆에 앉았다.

밀라니아는 사락, 그레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슬퍼할 거 없도다. 어차피 내 수명은 다했느니. 마지막에 죽어 가는 요정 하나 살리는 것뿐이야.”

“……왜?”

침묵하던 말라도르가 무겁게 물었다. 미묘하게 일렁거리는 눈이 밀라니아에게 답을 요구했다.

“왜 그러려는 거야? 갑자기 박애주의자가 되어 상관도 없는 요정을 구하고 싶어지기라도 한 거야? 이 먼 곳까지 와서?”

왜.

밀라니아는 말란도르의 질문을 곱씹었다.

이 계획을 생각했던 초반에는, 단지 반복되어 온 미래를 바꾸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 바람이 간절하여 혐오하던 늑대와 박쥐도 거두지 않았는가.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는가?’

이젠 서로 사랑하지 않는 이들을 보자니 바뀐 것도 같았다.

적어도 물줄기의 방향이 약간이나마 틀어졌다.

앨리지를 구하도록 어떻게든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상황을 보아하니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앨리지는 죽을 것이고 그녀는 평범하게 영면에 들 터였다.

평범한 영면을 원했던 그녀가 소망한 대로 되는 거다.

“난…… 20여 년 동안 생각해 왔느니라.”

“…….”

“내 최후를.”

앨리지를 살려야 할 방법을.

밀라니아는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앨리지를 만나 어떻게 변할까에만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영 예상과 다르니 오히려 혼란스러워진다.

그러나 상황이 어떻든 간에 중요한 건 무사히 영면의 때를 맞는 것, 그거면 된다.

전생과 조금 다르게 흘러간다고 마지막을 바꾸는 건 너무 성급한 일이었다.

어차피 필연적으로 다가올 영면의 때다.

앨리지를 살리느냐 마느냐가 문제라면, 기왕이면 살리는 게 맞지 않겠는가.

‘나는 마녀족을 책임지는 수장이니라. 내가 죽은 이후의 일도 생각해야 되느니.’

복잡한 속엣말을 삼킨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며 읊조렸다.

“순리이고 운명이니라. 바뀌는 건 없을 것이야.”

모든 건 전생대로 흘러가리라.

그녀 자신의 최후를 제외한다면.

* * *

치료를 위해 가끔 방문하는 앨리지를 포함하여 이종족 넷이 머물게 된 고급 저택은 재상이 특별히 마음 써 준 덕분에 외진 곳에 위치했고, 거주자들도 웬일로 싸우지 않아 요즈음 그 어느 때보다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 덕에 밀라니아는 한결 평온한 마음으로 앨리지의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치료를 마친 앨리지는 문 앞에서 발그레한 얼굴로 진심의 감사를 표했다.

“네 연인을 설득하는 일은 어떻게 됐느냐?”

흠칫한 앨리지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긍정적이지 않은 반응에 밀라니아는 눈썹을 까딱였다.

“낯선 곳에 가는 걸 싫어하는 것이야?”

얼마 전 그녀는 앨리지에게 치료를 위해 1대륙으로 갈 것을 권유했던 참이었다.

심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2대륙보다는 1대륙이 영면의 때를 맞이하고 앨리지를 치료하는 데 낫다는 판단이다.

게다가 2대륙의 이종족 노예 제도는 그들 일행에게 예상 밖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밖에만 나가면 시비가 걸리는 것도 그런 문제 가운데 하나.

심지어는 밀라니아에게도 자유 신분의 수인이냐고, 돈이 필요하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왕왕 생겼다.

그 덕에 일행이 화나 큰 싸움이 벌어질 뻔하기도 했다.

“아니에요. 1대륙에 대해 잘 모르기는 하지만 이주하는 것 자체는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어요.”

“그럼?”

“아무래도 황제 폐하의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그게 걸리는 것 같아요. 수십 년간 서로의 존재를 모르다 겨우 해후하게 된 부자지간이니까요.”

이해한다는 듯 안타까운 표정의 앨리지와 달리 밀라니아는 눈빛이 냉랭해졌다.

감상에서 빠져나온 앨리지가 서둘러 말했다.

“하지만 떠나야 한다는 건 이해하고 있어요. 황제 폐하께서도 권유하시고요. 저희 부부는 대마녀님께서 하자는 대로 따를 거예요.”

그제야 표정이 풀어진 밀라니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하고 있거라. 바다를 건널 방법만 찾으면 떠날 것이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게다.”

“예.”

고개 숙인 앨리지가 마차에 올라탔다.

앨리지를 태운 마차가 움직이자 밀라니아는 등을 돌리고 저택의 문을 닫았다.

뚜벅, 뚜벅.

2층으로 올라가던 밀라니아는 그 위에서 내려오는 르베리안즈를 발견했다.

르베리안즈도 그녀를 보았다. 멈칫. 내려오다 말고 걸음을 멈춘다.

밀라니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르베리안즈.

요 며칠간 보이지를 않았던 얼굴이다.

비단 르베리안즈만이 아니라 다른 둘, 그레칸과 말란도르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건지 모르겠구먼.’

허구한 날 붙어 있던 그들을 보기 힘들어진 건 그날 이후부터였다.

밀라니아가 2대륙에 온 이유를 밝힌 그날.

‘내 생각보다 충격이 컸나 보이.’

어느 귀족 가문의 주인처럼 기품 있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온 르베리안즈가 밀라니아의 앞에서 멈춰 섰다.

“그 여자를 치료하고 오는 길이에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밀라니이를 보는 르베리안즈의 시선이 불만으로 가득했다.

밀라니아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르베리안즈를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녀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 상황이 궁금한 것이냐? 그거라면 앨리지는 어제보다 몸 상태가 나아졌느니라. 당장 죽지는 않을 게야.”

뿌리가 비슷한 탓인지 앨리지는 밀라니아의 치료에 보다 격렬히 반응했다.

병세를 감안한다면 치료의 효과는 아주 좋은 편이었다.

비록 병마가 워낙 깊게 진행된 상태라 몸을 격하게 움직이는 건 아직도 무리지만.

르베리안즈가 입술을 비틀었다.

“뭐 하는 거예요. 누가 그 건방진 여자가 궁금하대요?”

“…….”

밀라니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르베리안즈는 표정을 풀고 한숨을 쉬었다.

“밀라니아, 당신 얼굴이 안 좋아요. 무리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르베리안즈의 걱정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밀라니아는 그런 것이었냐며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문제없느니라. 비켜 주겠느냐? 올라가서 좀 쉬어야겠구나.”

르베리안즈는 밀라니아의 요구에도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며칠 동안 자신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도, 밀라니아는 궁금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씁쓸함을 느낀 르베리안즈는 그를 지나치려는 밀라니아의 손목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투명할 만큼 흰 피부에 기분 좋게 서늘한 감촉.

영원히 붙들고 싶은 손이었으나 뭐 하는 짓이냐는 듯한 눈빛과 부딪치자 황홀경이 깨졌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할 말이 있누?”

고개를 끄덕인 르베리안즈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거 먹어요, 밀라니아.”

르베리안즈가 조심스럽게 꺼낸 건 붉은 광택이 도는 먹음직스럽게 생긴 사과였다.

꺼내자마자 천상의 것처럼 달콤한 향기가 확 퍼졌다.

밀라니아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이건 프린서플이 아니냐.”

“역시 밀라니아는 바로 알아보네요. 맞아요. 이거 가지고 오느라 며칠 동안 안 보였던 거예요. 궁금하지도 않았겠지만…….”

르베리안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프린서플은 박쥐족의 영역 밖으로 가져오기 까다로웠을 텐데 어이 한 것이야.”

붉은 사과, 프린서플.

겉보기엔 단순한 사과처럼 보이지만 일반적인 사과와는 궤를 달리하는 물건이었다.

이 세상엔 신이 직접 만든 게 분명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가 있다.

인간의 대마법사, 흑계의 존재와 요정족, 그리고 대마녀. 그리고 몇 가지 신물로 취급되는 귀물이 그것들이었다.

그중에서 귀물에 속하는 프린서플은 죽어 가는 자의 숨결을 향기로 되살린다는 말이 있을 만큼 매우 달콤한 과일이었다.

그리고 전설처럼 내려오는 효능은 과장이 아니었다.

프린서플은 복용하면 마력이 늘고 힘이 늘어난 만큼 수명도 늘려 주는, 말도 안 되는 효능을 가진, 박쥐족이 애지중지하는 보물이었다.

저주받은 붉은 꽃과 달리 부작용도 없으므로, 가히 신물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백 년에 한 알 열리는지라 박쥐족이 수장을 위해서만 사용한다고 밀라니아는 알고 있었다.

“수장 의식을 치르고 내가 받은 내 몫이에요. 밀라니아가 먹어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 거 아니에요.”

나직하게 말하는 르베리안즈의 눈 밑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구나.”

그는 싱긋 웃었다. 지친 얼굴이지만 그럼에도 활짝 피어난 장미처럼 아름다웠다.

어렸을 때부터 퇴폐적인 아름다움으로 마녀들을 홀렸던 그의 미모는 수장이 된 지금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아아, 그럴 수밖에요. 장로들이 어찌나 귀찮게 구는지, 떨쳐 내느라 힘들었다니까요. 수장이라고 떠받들어 주는 게 아니라 의무만 권유하니 원. 괜히 수장에 오른다고 했나 봐요.”

르베리안즈는 엄살을 부렸지만 그럴 만한 일이었다.

프린서플은 박쥐족의 장로들 앞에서 수장이 섭취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것을 먹지 않고 밖으로 가져가겠다는데, 박쥐족의 장로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설득이 먹히지 않자 몸으로 막아서는 장로들을 따돌린 후 쉬지 않고 비행한 결과, 강인한 르베리안즈의 몸에도 피로가 쌓였다.

애초 르베리안즈는 그레칸보다 마력은 높아도 체력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죽을 것처럼 피곤했지만 밀라니아의 얼굴을 보니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어서 먹어요.”

다소 설레는 얼굴로 그가 프린서플을 내밀었다.

밀라니아는 그의 해쓱한 안색과 향기로운 프린서플을 번갈아 보고, 손가락을 튕겼다.

공중으로 둥실둥실 떠오른 프린서플이 스스로 분쇄되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이 향긋한 향이 배가 되어 주변에 번져 나갔다.

“나는 받을 수 없느니라.”

나직한 말과 함께 밀라니아가 또 한 번 손가락을 튕겼다.

사과주스처럼 변한 프린서플이 르베리안즈의 벌어진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상황을 파악한 르베리안즈가 재빨리 입을 막았으나 이미 프린서플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그의 입으로 투입된 상태였다.

“대체, 왜…….”

르베리안즈가 목구멍에서 쥐어짠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박쥐족 수장의 것이야. 네 부족한 힘을 채워 줄 수 있는 걸 왜 나한테 주느냐. 이치에 맞지 않도다.”

받을 이유가 없다는 그녀의 태도에, 르베리안즈의 얼굴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날카로운 눈초리로 밀라니아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감정에 둔하죠. 그 때문에 다른 이들의 감정에 공감하지도 못하고요.”

“…….”

“이성적으로 아니라고 생각했어도, 이번만은 내 뜻대로 따라 주지 그랬어요.”

“…….”

“그럼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 들지 않을 텐데.”

쓰디쓴 기분이 묻어 나오는 그의 말에 나름대로 그를 생각해서 한 일이었던 밀라니아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게 귀한 거라는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요.”

“…….”

“그래서 가지고 온 거고요. 내가 당신에게 싸구려를 먹이겠어요?”

프린서플이 열리는 나무는 박쥐족이 대대로 지켜 온 보물이었다.

다른 자였다면 르베리안즈는 결코 프린서플을 양보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밀라니아였다.

수면병에 걸려 한 달에 눈뜬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많았던 그가, 살아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 온 사람.

늘 덤덤하고 침착한 밀라니아.

그게 흥미로웠고, 무표정한 얼굴을 깨고 싶다는 도전 의식도 들었지만 지금은 그 무덤덤함이 끔찍하게 싫어졌다.

자신이 죽는 미래를 덤덤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괴로울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이걸 당신에게 주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데.”

입 안에 번지는 달콤한 감각에 그는 허탈해졌다.

아랫배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고여 들었다.

프린서플의 마력이리라.

힘이 느껴지는데도 전혀 달갑지가 않았다.

1대륙으로 오기 전, 장로들의 만장일치로 수장의 신부로 낙점되었던 예비 약혼녀는 떠나려는 르베리안즈의 앞을 가로막았다.

결정을 결사반대하는 장로들을 염력으로 날려 보내느라, 르베리안즈의 신경은 아주 예민해진 상태였고 가로막은 그녀가 달갑지 않았다.

사납고 싸늘한 그의 눈빛에도 그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가지 마세요, 로드.]

어릴 적 한두 번 보았던, 그의 신부가 될 예정이었던 여자는 아름답게 굽이치는 금발에 보석 같은 적안을 가지고 있었다.

고운 자태의 여자는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면서 르베리안즈를 눈물로 붙잡았다.

[사랑해 왔어요. 노력했어요. 당신에게 걸맞은 신부가 되기 위해…….]

평소라면 거절하지 않았을 여자였다.

그의 입맛에 적절하게 맞아서, 이 정도면 평생 함께해도 그럭저럭 괜찮다 생각할 만큼 나쁘지 않은 여자.

그러나 르베리안즈는 여자와 조금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1분 1초가 급했다.

정작 당사자는 더 살기를 원하지 않는데, 그런 밀라니아를 살리고 싶어서 그는 몸이 달았다.

“고마워하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런 얼굴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어요.”

르베리안즈는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듯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밀라니아를 노려보았다.

공감 능력이라곤 바닥까지 긁어내야 겨우 찾아볼 수 있고, 귀찮은 건 또 얼마나 많은지 끈기도 없는 평화주의자 밀라니아.

늘 먼저 건드려야 반응해 주는 재미없는 그녀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

“생각해 줘서 고맙구나.”

선심 쓰듯 말하는 그녀의 무덤덤한 얼굴을 보는 순간 르베리안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게 그렇게 서러운 게냐?”

‘네 것을 네가 섭취한 것뿐일진데.’ 하며 당황하는 밀라니아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그의 붉어진 눈시울에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이해가 안 가느니……. 설마 우는 것이야?”

입술을 달싹이던 밀라니아가 입을 다물었다. 르베리안즈는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는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리고 밀라니아에게 프린서플을 건네는 동안 그럭저럭 침착했던 르베리안즈의 아름다운 얼굴은 엉망으로 흔들리는 목소리처럼 잔경련을 일으켰다.

맞다. 말이 되지 않는다. 너무 이르다.

그는 이제야 어른이 되었다. 그것도 위대한 박쥐족의 수장이다.

1000년 동안 한 일족의 수장으로 군림해 온 대마녀를 품에 안을 수 있는 사내가 되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신부가 되어 달라 프로포즈한 상대가 곧 죽음을 앞두고 있단다.

르베리안즈는 너무 억울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다른 여자를 집적거리는 시간에 밀라니아에게 딱 달라붙어 있을 것을 그랬다.

그레칸이 그랬던 것처럼 약간의 시간도 다른 데 쓰지 않을 것을 그랬다.

후회가 깊은 만큼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예비된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그는 아니었다.

인정은 너무 멀었고 단념은 생각조차 하기 힘들었다.

“이 상황에 이런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

“꽤 피곤하구먼. 아, 물론 너 때문만은 아니다. 네가 우는 게 내 죽음 때문이라면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설명해야 하거늘.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생각하다 보니 머리가 아프면서도 피곤하구나.”

“…….”

“괜찮다면 나중에 얘기하는 게 어떻겠누.”

무표정한 얼굴로 느릿느릿 말하는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를 더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차분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녀가 단지 이 자리를 귀찮아해서, 회피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란 것을 그는 깨달았다.

르베리안즈는 멍한 눈으로 피로가 묻어 나오는 밀라니아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왜 피곤해요?”

“…….”

“영면이 가까워져서?”

“음, 그럴지도.”

잠깐 고민하다 이내 태연하게 얘기하는 밀라니아였다.

죽음을 앞둬서가 아니라 잠이 부족해서 피곤한 것처럼, 지나치게 태연하다.

그녀를 향한 르베리안즈의 눈동자에 묘한 기광이 어리더니, 불꽃이 튀었다.

르베리안즈는 입 속에서 혀를 튕겨 보았다. 프린서플의 달콤한 맛이 넘칠 만큼 충분했다.

퓨즈가 끊긴 르베리안즈는 ‘확실히 체력이 떨어졌느니라.’라고 혼잣말하는 밀라니아에게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뒷목에 손바닥을 대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삽시간에 좁혀지는 거리에 밀라니아는 눈을 크게 떴다.

“읍!”

그가 속도를 줄이지 않은 탓에 입술이 강하게 부딪쳤다.

얼얼한 통증이 입술 전체로 번졌다. 밀라니아는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러나 그레칸만큼은 아닐지언정 호리호리하고 키 큰 사내가 된 르베리안즈를 밀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따뜻하고 촉촉한 그의 혀가 말캉하게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갈라 침입했다.

그 혀에서 단맛이 짙게 느껴졌다.

미뢰를 강타하는 프린서플의 강렬한 단맛에 밀라니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프린서플은 그 과육 하나하나가 다 마력 덩어리였다.

평범한 인간이 섭취하더라도 수준급의 마법사가 지닐 만한 마력을 가질 수 있다.

밀라니아는 프린서플을 이곳까지 가져온 르베리안즈의 마음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프린서플은 그녀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다.

마력이 부족하여 수명이 줄어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내게 주어진 시간을 다 썼느니라.’

프린서플을 섭취한다 하더라도 그녀의 수명을 연장할 수는 없었다.

괜히 희소한 귀물을 헛되이 쓰느니 르베리안즈가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내 깊은 뜻을 짐작 못 하고 이리 무례하게 굴다니.’

슬그머니 분노가 치민 밀라니아는 물러나라는 의미로 르베리안즈의 어깨를 탁탁 쳤다.

그녀의 손바닥 아래 검은 정장으로 감싸인 리베리안즈의 어깨 근육이 조물조물 잡혔다.

그 왜소했던 어린 박쥐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 하는 새삼스러운 감상을 뒤로 하고 밀라니아는 오히려 혀를 더 밀어붙이는 르베리안즈의 행동에 한숨을 삼켰다.

어쩐지 필사적으로 느껴져서 진심으로 화를 내기도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살짝 입술을 뗀 그가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프린서플의 강대한 마력 덩어리는 곧바로 흡수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게서 흡수해 버려요.”

그러고는 다시 입을 맞춘다. 그제야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의 이 무례한 행동의 의도를 파악했다. 혀를 찼다.

‘뭘 해도 의미가 없거늘.’

어떻게든 그녀에게 프린서플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넘기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던 르베리안즈의 움직임은 시간이 지나자 조금 다른 분위기로 바뀌었다.

부드러운 입술과 입 안의 살점을 샅샅이 핥아 내는 농밀한 혀 놀림이 야릇한 느낌을 전했다.

밀라니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것 보게나?’

좀 더 붙고 싶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비튼 르베리안즈의 손이 그녀의 날씬한 허리에 닿는 순간,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차창창!

저택의 모든 창문이 밀려오는 바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안쪽으로 깨져 버렸다.

유리 파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요란하게 부는 바람소리에 맥없이 묻혔다.

휘이이이잉!

강한 바람이 르베리안즈의 몸을 밀쳐 댔다.

르베리안즈는 날개까지 꺼내 들며 바람에 저항했지만 바람은 점점 더 강하게 불어올 뿐이었다.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밀라니아에게서 한 발 물러섰다.

손 하나 대지 않고 르베리안즈를 밀어낸 밀라니아의 속삭임이 강한 바람을 타고 르베리안즈의 귓가에 꽂혔다.

“겉으로는 날 위하는 척하며 네 욕심을 채우려 드는 솜씨가 기가 막히느니. 하마터면 내 착각할 뻔했도다.”

그녀의 향기와 촉감에 취해 잠깐 정신이 나간 건 사실이나, 의도만큼은 순수하다고 자부하는 르베리안즈는 그 말에 억울해졌다. 그러나 변론할 기회는 쉽지 않았다.

바람이 얼굴을 찰싹찰싹 후려쳤다.

“크윽.”

바람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어 르베리안즈는 눈살을 찌푸리고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입고 있는 옷자락이 사정없이 펄럭였다.

밀라니아에게 그만하라고 손짓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

“으아아악!”

상황에 맞지 않는 비명 소리가 휘몰아쳐서, 밀라니아는 의아해져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천장 쪽으로 들었다.

“무엇인고?”

그녀의 질문에 대한 반응은 반대쪽에서 돌아왔다.

벌컥!

문이 벌컥 열리더니 검은 늑대가 뛰어 들어와 르베리안즈를 위에서부터 덮쳤다.

* * *

르베리안즈가 박쥐족의 영역에서 프린서플을 습득하고 귀환하던 그 시점, 그레칸은 제국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가 찾은 건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인간 집단 중 하나라고 알려진 곳이었다.

바로 마탑의 대문 앞.

황궁의 가장 높은 성보다 높다는 마탑의 명성은 그 높이가 증명하고 있었다.

[황궁보다 높은 인류 최후의 탑은 마법사의 영역에 있다.]

그것이 마로 마탑이었다. 마탑의 위풍당당한 기세는 그들의 현 위세를 반증하는 듯했다.

그리하여 내부 출입증을 손에 넣은 실력파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마탑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도 자부심을 갖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들의 자부심 만만한 일상에 누군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10년째 마탑을 지키고 있는 턱수염 사내는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전에 정문 앞에 나타난 정체 모를 남자의 존재감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문지기로서 그는 위험인물과 침입자를 빠르게 판별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같이 근무하는 동료에게 의견을 구하기로 했다.

“저 새끼 뭐야?”

다른 문지기는 그가 누굴 가리키는지 대번에 알았다.

그 역시 남자를 예의 주시 하고 있었기 때문.

“마법사는 아닌 것 같고.”

“마법사라기엔 몸이 너무 좋은데.”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대체로 마법사는 기사 집단에 비해 형편없이 연약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직접 몸을 단련하기보다 머리와 감각을 단련하는 게 마법사들에겐 훨씬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타난 관광객인지 마법사 후보인지 모를 남자는 문지기 중 가장 큰 턱수염 사내보다도 훌쩍 크고, 어깨는 떡 벌어져서 길에서 만난다면 절로 긴장이 될 듯했다.

존재만으로도 위협적인 남자가 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탑만 가만히 올려다보니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관광객인가?”

“그럼 주변이나 둘러보겠지. 왜 한자리에서 위만 올려다보고 있겠어?”

그들은 남자를 수상한 인물로 규정지었다.

관광객이라면 적당히 넘어가겠지만, 적지 않은 시간 멀뚱히 마탑만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마법사의 영역 안에서 묘한 위화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몇몇 지나가는 관광객과 마법사들은 그레칸이 쳐다보는 곳을 따라 쳐다보고 가기까지 했다.

“도대체 뭘 보는 거야?”

턱수염 사내가 부리부리한 눈을 찌푸리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마탑의 꼭대기 층을 보고 있었다. 그것만 보고서는 그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안 되겠어. 내가 적당히 쫓아내고 오지.”

마법사들이 남자를 피해 돌아가는 것을 발견한 턱수염 사내가 쯧 혀를 찼다.

정체 모를 남자를 향해 걸어가는 턱수염 사내의 얼굴엔 한 점 긴장한 기색도 없었다.

위대한 마탑의 문지기는 함부로 얻을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문지기가 되기 전에는 명성 높은 용병단의 간부로 일하다가, 퇴직 후 소일거리를 하기 위해 마탑에 취직한 턱수염 남자는 덩치만 큰 얼뜨기 따위는 금세 쫓아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무슨 용건이요?”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남자가 눈을 굴려 턱수염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키가 꽤 커서, 턱수염 사내는 남자를 올려다봐야 했다.

이렇게 신장 차이가 클 줄 몰랐던 턱수염 사내가 인상을 썼다.

“출입증이 없으면 자리를 비키시오. 이곳은 외부인이 마냥 구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

남자는 묘할 정도로 까만 눈으로 턱수염 사내를 쳐다보기만 했다.

전혀 긴장하지 않은 기색에 은근히 부아가 치민 턱수염 사내는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당장 떠나지 않으면 타국의 첩자로 간주하겠소. 그렇게 된다면 곱게 떠나지는…….”

“어딨는지 아나?”

“뭐요?”

남자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 뜬금없어, 이해하지 못한 턱수염 사내가 되물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마법을 가장 잘 쓰는 인간.”

“…….”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하다면, 수명을 늘리는 방법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혼잣말처럼 덧붙이는 말에 턱수염 사내는 기가 막혔다.

이 세상에서 마법을 가장 잘 쓰는 인간이 누군지 묻는다면, 질문을 받은 사람은 다 똑같은 사람을 말할 터였다.

제국의 대마법사이자 마탑의 주인. 마법 종주 윈더 스프리드.

“이 일 하면서 대놓고 탑주님을 물어보는 사람은 또 처음 보는구만.”

헛웃음을 뱉는 턱수염 사내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남자가 손가락을 세웠다.

그의 손가락 끝은 마탑의 꼭대기 층을 향해 있었다.

“저리로 가면 되나?”

기이하게도 남자의 말에서 턱수염 사내는 어떤 불가해한 의지를 느꼈다.

그는 온갖 위험한 사지에서 뒹굴고 살아남았던 경험으로 남자의 말을 좌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무력을 쓰더라도 쫓아내야 한다.

휘익!

턱수염 사내는 들고 있던 창을 능숙하게 휘둘렀다.

숱한 사지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 준 무기로, 그의 창술은 일정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웬만한 용병들은 몇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떨쳐 낼 수 있을 만큼.

이 남자는 곧 창끝에 찔려 뒤로 나뒹굴게 되리라.

턱수염 사내는 이번에도 그렇게 될 거라고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잠시 후, 창이 완전히 휘둘러지기도 전에 목이 잡힌 턱수염 사내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뜨였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손목을 비틀어 방어하려고 해도 손목은 비틀리기는커녕 살만 조금 밀려날 뿐 아닌가.

‘무, 무슨 이런 근육질이!’

턱수염 사내는 더는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커, 커억…….”

남자가 목을 움켜쥔 채 들어 올렸다. 턱수염 사내의 발끝이 휘어졌다.

필사적으로 땅에 닿고자 다리를 버둥거렸지만 턱수염 사내의 두툼한 발끝은 땅에 닿을 듯 닿지 않았다.

턱수염 사내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힘 하면 빠지지 않는 사람이건만 미치고 팔짝 뛰게도, 목을 붙잡은 이 손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턱수염 사내는 가물가물한 시야 사이로 남자의 무뚝뚝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잘생긴 편이다. 아니, 꽤 잘생겼다.

문지기로 일하며 얼굴값 한다는 귀족들도 자주 본 편이었지만 한 손에 들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다.

그러나 사람 목을 죽일 듯이 조르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태도는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도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이 힘.

‘기, 기사라도 되는 건가. 아니면 마법사?’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까만 눈동자를 보자 인간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턱수염 사내의 머리를 스쳤다.

자신이 어떻게 할 상대가 아니었다. 빨리 다른 누구를 데리고 와야 한다.

다행히 뜻이 통했는지 누군가 마탑 안으로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동료일 터였다.

턱수염 사내는 안도했지만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마법사님들이 달려오기 전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기를 사내는 간절히 빌었다.

“시간이 없다. 이곳의 수장이 누구냐?”

“……거기 무슨 일이에요? 아니, 뭐 하는 짓입니까!”

문지기가 꺼억, 꺼억 간신히 마른 숨을 토해 낼 때, 그 장면을 본 누군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마탑의 건물에서 빠져나온 그는 흰색의 긴 망토를 뒤로 휘날리고 있었다.

깔끔하게 성장한 마법사 제복의 가슴팍에는 달린 금색 인장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남자의 차림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그의 신분이 제국에서 검증받은 고위 마법사라는 것.

불안하게 웅성대던 사람들이 마법사를 보고 환호했다.

“란데스 님이다!”

“전장의 치료사 란데스 님!”

요란하게 등장한 마법사를 물끄러미 살피던 그레칸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었다.

‘치료사?’

“저자, 마법을 잘 쓰나?”

턱수염 사내를 보며 그레칸이 묻자, 란데스를 확인한 턱수염 사내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탁.

그레칸이 공중에서 손을 쫙 펼치자 끈 떨어진 연처럼 턱수염 사내가 바닥으로 무너졌다.

바닥에 엎어진 채 부족한 숨을 급하게 몰아쉬는 턱수염 사내를 쌩 지나친 그레칸이 란데스의 앞에 섰다.

자신이 가기도 전에 먼저 다가온 그레칸을 보고 흠칫한 란데스는 경계심이 역력한 눈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주문을 영창하는 마법사들에게 거리 확보는 필수였지만, 그레칸은 그가 그러는 이유를 알지 못해서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무슨 용건입니까?”

“네가 마법사들의 수장인가?”

란데스는 미간을 좁혔다.

“다짜고짜 무슨…….”

“시간이 없다. 대답부터 해라.”

그레칸은 인간을 좋은 종족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인간에 대한 인상적인 첫 기억은, 수인들을 액세서리처럼 데리고 다니고 짜증이 치미는 눈으로 자신을 구경하며 듣도 보도 못한 ‘몸값’을 묻던 기억이다.

인간은 그 이미지로 그레칸의 머릿속에 콱 박혀 버렸다. 그는 인간들이 껄끄럽고 싫었다.

그리하여 딱딱한 그레칸의 언어는 란데스에게 고압적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란데스의 눈이 싸늘해졌다.

상류 계층에 속한 그는 그레칸과 달리 인간 세상의 매너와 어법에 익숙했고, 목적을 위해 참는 방법을 아는 자였다.

“수장의 곁에서 일합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강하지는 않단 말이군.”

그레칸의 눈에 실망이 스쳤다.

물론 대마법사인 탑주보다 강하지는 않으나, 어린 나이에 천재 수식어를 이름 앞에 붙이고 승승장구해 왔던 젊은 마법사 란데스는 그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런 대접은 처음 받아 보는 것이었다. 그는 하, 헛웃음을 뱉고 차갑게 말했다.

“당신 정도는 눈 하나 찡긋하는 것만으로도 치울 수 있죠.”

“……강한가?”

“설마 당신, 방랑 기사입니까? 요즘 결투하기 위해 강자들을 찾아다니는 방랑 기사가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 무기는 없어 보이는군요.”

그레칸은 뜻 모를 란데스의 말은 무시했다.

“마법을 얼마만큼 쓸 수 있지? 수명도 늘릴 수 있나?”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탑주는 지금 황궁에 가 있어서 만날 수 없어요. 할 말이 있으면 내게 하세요. 마탑의 2인자이니, 당신 용건을 들을 자격은 충분하겠죠?”

“탑주가 제일 강한 자라는 건가?”

비꼬는 말에도 한결같이 동일한 질문만 던지는 그레칸의 말은 묘하게 그의 자존심을 긁어 댔다. 란데스의 이마에 푸른 핏줄이 솟았다.

“치유 마법이라면 내가 탑주보다 뛰어나죠. 이제 내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참을 만큼 참았다. 불쾌한 빛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란데스는 기분 나빠하는 기색도 없이, 도리어 입꼬리를 올리는 그레칸의 표정에 흠칫했다.

그레칸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찾았다.”

그리고 몇 분 후, 란데스는 두 손을 결박당한 채 의지에 상관없이 몸이 움직이는 형편이 되었다.

방금 처음 본 수상한 남자에게 납치당하는 위기의 상황이었다.

명석한 머리로 상황 자체는 빠르게 파악했지만 그게 다였다.

‘왜 이렇게 된 거지?’ 그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했다.

‘눈 하나 찡긋하는 걸로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의 말을 의식했는지, 그의 두 눈에는 검은색 끈이 칭칭 감겨 있었다.

란데스가 기억을 되짚어 보니, 정체불명의 남자가 허리를 동여맸던 허리끈이었다.

갑자기 가공할 압력이 느껴진 란데스의 입이 큼지막하게 벌어졌다.

“으…… 으아아아악!”

그레칸은 언덕을 뛰어넘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아도 그 격렬한 바람을 느낀 란데스가 공포의 괴성을 질러 댔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더 무서웠다.

눈 하나 찡긋하는 것으로 해치울 수 있단 그의 말은 진실인 동시에 약간의 허세가 섞여 있었다.

보통의 마법사들이 수결을 맺고, 마법진을 그리고, 아주 긴 캐스팅 시간을 갖는 걸 생각하면 란데스가 개발해 낸 마법은 혁명이었다.

비록 차 한 잔 끓일 수 있는 만큼의 물을 소환하는 마법밖에 되지 않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떤 오만한 마법사들은 우스갯소리로 그의 마법을 ‘윙크 마법’이라 조롱하곤 했다.

어쨌든 기타 위력이 큰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란데스 역시 다른 마법사들처럼 긴 캐스팅 시간을 필요로 한다.

두 손을 결박당해 마법 지팡이를 사용하지 못하는 란데스는 일반인과 다름이 없었고, 그 말은 현재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으아아아아악!”

도대체 어딜 가는지 자신을 납치한 상대는 또 다른 언덕을 뛰어내렸다.

란데스의 두 눈에서 눈물이 질질 흘러내렸다.

“잘못 데려온 거 아닌가?”

용케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그 의심스러워하는 중얼거림을 들은 란데스는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

으아아아악! 또다시 한차례 내지른 란데스의 애처로운 비명 소리는 비행하는 새들의 귀에만 들어간 게 아니었다.

연금술사 탑에서 빠져나오던 말란도르도 그 괴이한 비명을 들었다.

“뭐야, 이 돼지 멱따는 소리는.”

밀라니아를 살려야 한다. 그 일념으로 세 남자는 각각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찾아 움직였다.

르베리안즈는 프린서플을, 그레칸은 강한 마법사를, 그리고 말란도르는 연금술사를 대책으로 삼았다.

마탑의 이웃사촌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금술사의 탑.

붉은 꽃의 효능을 높이고자 탑주를 찾아 데리고 나오던 말란도르였다.

같이 소리를 들은 탑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무심코 소리의 진원지를 찾던 말란도르는 발견할 수 있었다. 란데스를 첫날밤 신부, 아니, 짐 덩이처럼 둘러메고 달려오는 그레칸을.

눈이 마주쳤다.

말란도르는 흙먼지를 일으키는 그레칸의 무표정한 얼굴과, 그에 비해 안대를 쓴 채 눈물을 쏟는 란데스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는 란데스의 가슴팍 인장까지 빼먹지 않고 확인했다.

마침내 상황 파악을 한 말란도르는 입을 벌려 흐흐,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미친놈이야, 저거.”

그대로 말란도르를 지나치려던 그레칸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가까스로 발을 멈추었다.

관성을 이기지 못해 말란도르보다 한참 앞선 곳에서 멈추었다가 빠르게 후진했다.

말란도르는 왔다 갔다 움직이는 그레칸의 얼굴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품에는 딱 봐도 허약한 인간 마법사가 축 늘어져 있었다.

“마법사를 납치하는 거? 그게 네가 생각한 방법이야? 진심이냐……. 하여간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늑대족답네. 입은 얼굴에 달려만 있지 어디다 써야 하는지는 모르는 거지, 울프 보이?”

“그자는 누구지?”

말란도르의 말을 싹 무시한 그레칸의 시선은 말란도르의 곁에 있는 키 작은 사내에게 꽂혀 있었다.

안경을 쓴 지적인 외모의 연금술사 탑주는 탈진한 얼굴로 숨을 헉헉 내쉬는 란데스를 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란데스 공……?”

반신반의하며 연금술사 탑주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의 목소리를 인식한 란데스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란데스가 뭐라고 말을, 아마도 도움을 요청하는 말을 뱉으려는 찰나 말란도르가 대꾸했다.

“연금술사 탑주. 누구와 달리 정중히 모시는 중이지.”

부드럽게 웃는 말란도르의 시선에 연금술사 탑주는 흠흠, 헛기침을 했다.

“연구를 위해서 협조하는 것뿐입니다.”

안경을 추어올리며 시선을 피하는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올라왔다.

왠지 모르게 불쾌한 기분이 든 그레칸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연금술사 탑주라고?”

“여기서 얘기할 시간이 있어? 네가 저지른 일을 보면 잠시도 지체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꼬리가 붙었으면 어떡할 거야?”

말란도르가 웃으며 짜증을 냈고, 그레칸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두 명의 이종족과 두 명의 인간은 동행하게 되었다.

한편 그레칸 일행을 만난 연금술사 탑주는 이대로 말란도르를 따라가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란데스 공을 저 꼴로 만들다니.’

정체가 뭐기에 이리 대책이 없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안위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말란도르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하고자 했지만, 그 결심이 초반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야. 이런 일로 마음 약해지면 안 돼. 일생일대의 기회가 온 것일 수도 있다고.’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연금술사의 탑주, 그는 ‘저주받은 붉은 꽃’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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