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48)

19

돌아온 왕자님

여기서 더 이상해지면 감당하기 힘들 텐데 곤란한 일이었다. 하긴 이런 걸 걱정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평온한 영면이 하루빨리 찾아오기를 바랐다.

영면이 손에 잡힐 듯 말 듯 하여 마음이 들썩거린다.

“그레칸은 어디 있죠?”

르베리안즈가 방을 둘러보며 의심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그 자식이 있을 게 분명하니 먼저 처리하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잠잠하네요?”

의아해하는 눈빛에 밀라니아는 황궁 문 앞에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레칸이 떠올랐다.

갑자기 속이 더부룩하게 불편해지는 듯하여, 대꾸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수장 의식에 대해서나 말해 보거라. 끝내고 싶다고 도중에 끝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게 아니었을 텐데.”

“맞아요. 하지만 장로들도 어쩔 수 없다며 날 보내 줬죠.”

“무슨 이유로.”

졸음이 밀려와 다시 잠들고 싶어진 밀라니아가 눈을 반쯤 감은 채 묻자, 르베리안즈는 고개를 기울여 밀라니아와 눈을 맞춘 채로 싱긋 웃었다.

“신부를 맞이해야 해서요. 찾으러 왔어요.”

“……아아, 그래. 수장 의식의 마무리는 반려자를 맞는 거니까.”

“그래요. 그들이 나한테 신부를 들이밀지 뭐예요. 바네사인가 바넷사인가 아무튼, 이름도 잘 모르는 여자를.”

“…….”

“처음에는 꽤 예쁘고 괜찮아서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는데.”

“싶었는데?”

이제 밀라니아는 거의 눈을 감은 상태로 르베리안즈의 뒷말을 따라 했다.

“신부를 들이면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게 곤란하다 하지 뭐예요.”

르베리안즈가 예상 못한 문제라며 얼굴을 찡그렸다.

‘수장 의식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나온 이유가 고작 그런 거라고?’

밀라니아는 어처구니가 없어 쯧, 혀를 찼다.

“보통의 일족이라면 몰라도 수장의 반려는 귀중한 존재지. 그래서 대부분의 종족은 그런 제한이 있다. 하지만 늑대족과 달리 너희 박쥐족은 있으나 마나 한 제한일 것이야.”

“아, 그래요?”

“늑대족의 낭만주의에 비해 박쥐족은 문란하여 일부일처제란 개념이 희박하니까.”

“몰랐어요.”

“넌 마녀성에서 자라 왔으니까 모를 수도 있느니라. 하지만 고작 그것 때문에 수장 의식을 끝마치지 못했다는 게 우습긴 하구나.”

우습다는 표현에 비해 밀라니아의 표정은 한심 그 자체였다.

스칼렛은 이 정도로 남성 편력이 화려하지 않았는데, 르베리안즈는 뭘 닮아서 이렇게 여자 없으면 못 사는 것처럼 구는지 모르겠다.

‘이놈은 결혼하고 나서도 끔찍한 치정 싸움을 몰고 다니겠구먼.’

문득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가 아직 앨리지를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이 조금 깨는 기분이다.

‘그레칸은 앨리지를 보아도 반응이 미미했지만 르베리안즈는 다를지도 모르겠느니.’

애초에 르베리안즈가 그녀를 죽이겠다고 쫓아다녔던 전생에는 이런 식으로 여자를 밝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

‘앨리지를 만난 후에야 한 여자에게 정착하는 걸지도.’

“우습기만 하고 이상하진 않아요?”

“무엇이.”

“그 말을 듣고 내가 곧장 밀라니아에게로 온 거.”

심각해진 밀라니아의 귀로 흥얼거리는 듯한 르베리안즈의 말이 흘러들어왔다.

생각에 골몰한 밀라니아는 그의 말을 흘려듣고 대충 대꾸했다.

“아는 곳이 여기밖에 없으니 그랬겠지. 뭐가 이상하겠느냐.”

‘아무래도 르베리안즈도 앨리지와 만나게 해야겠도다. 그래야 안심이 되겠느니.’

살짝 풀어졌던 마음을 바짝 죄인 밀라니아는 차가운 손가락이 이마를 툭툭 두드리자 귀찮은 표정으로 눈을 떴다.

“나는 이상했는데. 장로들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곧바로 몸이 움직인 거.”

이놈이 나에게 할 말이 있구나. 그제야 밀라니아는 그의 의중을 인지했다.

르베리안즈가 고개를 갸웃하고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긴 금색의 속눈썹이 나비 날갯짓처럼 느지막이 팔랑거린다.

“그럼 이건 어때요?”

“…….”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떠오른 사람이 밀라니아라는 거.”

“…….”

“이것도 안 이상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밀라니아가 희한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눈썹을 꿈틀하자 르베리안즈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요?”

“그건…… 이상하구나.”

“그렇죠.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르베리안즈가 손에 턱을 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다른 이와는 잠자리를 못한다는 소리에, 지금까지 즐겁게 놀았던 여자들이 아니라 밀라니아가 생각난 걸까요?”

똑바로 눈을 마주친 르베리안즈가 붉은색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이상하잖아요.”

밀라니아는 무심코 이상하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루비를 박아놓은 것처럼 반짝이는 르베리안즈를 발견하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초롱초롱한 눈빛은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

쉽게 대답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유도 신문이로다.’

하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천진하게 물어보니까 선선히 대꾸해 버릴 뻔했지 뭔가.

정신을 다잡은 밀라니아가 시선을 비껴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하지 않은 것 같구나.”

“안 이상하다고요?”

르베리안즈가 얇은 눈꺼풀을 깜박이며 물었다.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나를 양육자로 여기지 않느냐. 신부를 맞이하는 순간에 날 떠올린 건 뻔하지 않누. 나한테 신부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인 게지.”

밀라니아는 “그런가?” 하며 미간을 좁히는 르베리안즈를 보며 입술에 침을 발랐다.

“너희 박쥐족이 혼인 허락을 받지 않는 편이기는 하지만 넌 내 곁에서 자랐잖느냐. 문화가 다르니 당연히 내가 생각났겠지.”

부연 설명을 하고나서야 르베리안즈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래서였구나. 밀라니아를 양육자로 여겨서…….”

수긍하는 말을 듣고 밀라니아는 내심 한숨을 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잠자리를 못한다는 말에 자신을 떠올렸다니. 누가 들어도 이상한 소리였다.

르베리안즈가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생각을 바로잡아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누?’

불길한 기분에 고개를 들자 르베리안즈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내가 믿을 줄 알았어요?”

갑자기 불안해져서, 밀라니아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르베리안즈는 밀라니아를 따라 몸을 일으키고 침대에 걸터앉아 투덜거렸다.

“아이참, 밀라니아는 아직도 내가 당신보다 작은 어린 박쥐로 보여요?”

“…….”

“그런 어이없는 말을 믿게.”

그러면서 그녀를 보며 피식 웃는데, 꼭 귀여운 어떤 거라도 보는 눈빛이었다.

체라가 그녀의 사랑스러운 패밀리어를 볼 때와 비슷한 시선이라, 밀라니아는 찝찝해졌다.

‘얘가 왜 이러는고?’

어쩐지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르베리안즈를 보며 밀라니아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지팡이 소환 준비를 했다.

“다른 여자랑 자지 못한다는 게 아쉬운 건데, 그 순간에 양육자가 왜 떠올라요. 내가 변태도 아니고.”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

밀라니아가 몸을 뒤로 물리며 묻자 르베리안즈는 밀라니아를 향해 상체를 내밀었다. 한층 크게 보이는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이랑 자고 싶어요.”

“…….”

“평생 한 명하고만 잘 수 있다면 당신이랑 할래요.”

“…….”

“그러니까 하는 수 없잖아요? 밀라니아가 내 신부가 되어 주는 수밖에. 신부가 되어 줘요, 밀라니아.”

그 말을 듣자마자 밀라니아는 지체 없이 자작나무 지팡이를 소환해 휘둘렀다.

휘익!

딱딱한 지팡이를 팔목으로 막은 르베리안즈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야, 아파요.”

“아프라고 때린 것이니라. 왜 막았느냐? 아픈 건 문제가 되지 않느니라. 머리 한 대 맞으면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 텐데. 에잉.”

밀라니아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혀를 찼다.

르베리안즈는 그렇게는 안 되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제정신이에요.”

“아무리 봐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구나.”

“이번에 박쥐족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깨달았어요.”

르베리안즈가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난 당신에게서 멀어지고 싶지 않아요.”

“자주 왕래하면 되느니라. 넌 날개도 있으니까 움직임에 제약이 없지 않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데는 밀라니아를 따라갈 사람이 없겠어요.”

후후, 웃는 르베리안즈의 말에 밀라니아는 무표정한 얼굴 위로 물음표를 떠올렸다.

지금 말이 안 되는 말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르베리안즈는 웃는 얼굴 그대로 단호하게 말했다.

“신부가 되어 줘요.”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의 고집이 시작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그레칸에 비하면 그다지 고집스러운 편이 아니었지만, 안 그랬던 만큼 한번 마음을 정하면 잘 바꾸지 않는 귀찮은 습성을 갖고 있었다.

르베리안즈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해 줄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밀라니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내가 배우자를 맞아 본 적은 없지만,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리며 배우자를 맞는 경우가 있느냐?”

“결혼하고 싶은 신부를 납치한다는 인간들도 있는 걸요, 뭘. 약탈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요?”

르베리안즈는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라는 듯 반짝거리는 얼굴로 대꾸했다.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가 잡고 있는 자신의 지팡이를 힐끗했다.

방금은 그저 르베리안즈를 때리고 싶어 휘두른 것뿐이었다.

‘작정하고 마법을 사용한다면 못 떼어 놓을 것도 없느니라.’

“혹시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생각이라면 쉽지 않을 거예요, 밀라니아.”

르베리안즈의 말에 밀라니아는 지팡이를 움켜쥔 손가락을 움찔했다.

그가 밀라니아에게 몸을 좀 더 기울였다. 밀라니아는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긴 채로 몸을 뒤로 젖혔다.

전에 없이 위압적인 기운이 밀라니아에게로 쏟아졌다.

르베리안즈가 향기 나는 숨을 뱉으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이제 나는 일개 박쥐 수인이 아니에요. 박쥐족의 수장이라고요.”

“…….”

“밀라니아는 나만이 아니라 전 박쥐족을 상대해야 할 거예요.”

르베리안즈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명백히 협박이었다.

밀라니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머리를 잘 썼구먼.’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고자 하면 박쥐족 백이 달려든다 해도 떨쳐 낼 수 있었지만, 이곳은 나무와 풀이 가득한 1대륙이 아니라 건물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2대륙이었다.

게다가 르베리안즈의 찝찝한 공격 스타일도 신경이 쓰인다.

원래 전생에서도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앞으로는 그녀를 공격하고, 뒤로는 마녀성을 공략하는 교활하고 음습한 놈이 르베리안즈였다.

‘내 몸 상태도 그렇고, 무력 겨루기는 문제가 있겠느니라.’

르베리안즈를 구슬려야 한다는 쪽으로 밀라니아의 마음 무게추가 기울어졌다.

장난질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밀라니아는 일단 진지하게 대꾸해 주었다.

“나는 널 배우자로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왜요?”

되물음은 빨랐다.

“내가 널 사육…… 아니, 양육하지 않았느냐.”

“맞아요. 근데 그게 뭐가 문제가 되죠?”

밀라니아는 한숨을 쉬며 르베리안즈와 눈을 맞추었다.

“짐승도 제 어미와 붙어먹진 않느니라.”

“재밌는 말을 하네요. 우리가 피를 나눈 건 아니잖아요?”

“내 피를 네게 먹이긴 먹였지.”

“날 웃기려는 거예요?”

붉은 눈을 동그랗게 뜨는 르베리안즈를 보며 밀라니아는 헛기침을 하고 엄중히 말했다.

“나는 네가 자라는 모습을 모두 지켜봤느니라. 잠자다가 화장실을 찾지 못하고 공중에서 싸는 것까지 다 보았단 말이지. 그런 내가 어떻게 널 배우자로 받아들이란 말이냐? 나는 인간들이 말하는 이상 성욕자가 아니니라.”

화장실 얘기에 잠시 부끄러워하는 그를 보며 밀라니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15년간 거의 매일 매 순간 얼굴을 봐 왔던 사이니라. 무엇을 기대할꼬.’

이 말에는 설득되겠지. 바랄 게 있고 아닐 게 있지. 이번엔 장난이 과하다.

“하하, 누가 들으면 밀라니아가 엄마처럼 날 살뜰히 키운 줄 알겠어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밀라니아의 예상을 깨뜨렸다.

“실은 독방에다가 던져 놓고 가끔 다정한 손길 정도만 내밀어 줬으면서.”

르베리안즈가 나직이 투덜거리는 말에 밀라니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배신감까지 들어 그녀는 기가 막혔다.

육아엔 소질이 없어 마녀 하나 제대로 키워 내지 못한 자신이 유일하게 키워 낸 사람이 원수,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였다.

“그 말은 타격이 있구나.”

밀라니아는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미간을 좁혔다.

이런 게 바로 ‘당신이 나에게 해 준 게 뭐가 있어?’란 말을 들었을 때의 부모의 마음인 걸까?

밀라니아는 이제야 어려서부터 돌본 마녀가 커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2대륙으로 떠났을 때 체라가 짓던 허탈한 표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밀라니아의 중얼거림에 르베리안즈가 안타까운 얼굴로 밀라니아를 껴안고 귀에 대고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밀라니아도 나를 자식으로 여긴 적, 한 번도 없었잖아요.”

“…….”

“나에게 원하는 게 있었죠? 예전에는 그게 뭔지 궁금했었는데, 이젠 아니에요. 더는 궁금하지 않아요.”

“…….”

“밀라니아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요. 그러니까 밀라니아는 내 신부가 되어 줘요.”

“…….”

“불리할 때만 자식 취급하지 말고요.”

솔직히 말해서 밀라니아가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를 자식으로 여긴 적이 없기는 했다.

자식은커녕 어쩔 때는 하루에도 여러 번 ‘지금 죽이면 죽여질까.’ 고민했었지 않나. 그런 애틋한 마음을 가지는 건 불가능했다.

좋으나 싫으나 같이 지낸 지 5년이 넘어서야 겨우 패밀리어 정도로는 생각하게 되었으니.

기본적으로 밀라니아는 일족을 제외하고는 정을 아낌없이 나눌 정도로 박애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부보다야 자식이 낫지 않겠누.’

쯧, 혀를 찬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의 품에서 벗어났다.

“가능한 말이라야 정상적인 제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니.”

순순히 밀려난 르베리안즈가 미소를 띠며 나직하게 말했다.

“내 제안이 불가능하다고요? 우리가 부부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말이라고 하는고.”

“한번 알아볼까요? 사실 우리가 부부가 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는 쉬운 문제거든요.”

르베리안즈의 눈빛이 짙은 색으로 변하여 야릇해졌다.

‘도대체 언제부터 나를 그런 상대로 보고 있었던 거지?’

떫은 감을 먹은 듯한 눈으로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를 훑어보았다.

“듣고 싶지 않구먼.”

르베리안즈의 미소가 농후해졌다. 밀라니아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얼굴이었다.

“키스해 봐요, 우리.”

지금 이 순간, 밀라니아는 십여 년 동안 르베리안즈가 쳐 온 사고들은 아주 자잘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영면을 앞둔 시기에 찾아온 난관이 기가 막힐 만큼 거대했다.

“입을 맞추는 행위로 뭘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야?”

르베리안즈는 간단하다는 양 쉽게 말했다.

“가슴이 떨리면, 아니, 적어도 기분이 좋다면 가능한 거예요.”

“…….”

창백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가까워진다. 한 뼘 앞으로 다가온 얼굴을 길고 유려한 손가락이 가로막았다.

“…….”

“…….”

밀라니아의 손가락에 막힌 르베리안즈가 곱게 뻗은 눈썹을 꿈틀했다.

밀라니아는 꽃과 꿀과 황금, 뭐 좋은 거는 다 갖다 붙여서 만든 것 같다고, 마녀들이 칭송했던 르베리안즈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고는 이전보다 진지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르베리안즈, 네게 들려줄 말이 있도다.”

“중요하지 않은 얘기는 나중에 할까요?”

르베리안즈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거절했다.

“지금은 우리 두 사람의 미래…….”

덤덤한 표정으로 밀라니아가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곧 죽느니라.”

붉은 눈동자가 유리처럼 굳어졌다.

“……뭐라고요?”

좁혀진 미간에 깊은 주름 골이 생겨났다.

밀라니아의 입술을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르베리안즈는 거짓말인지 살펴보겠다는 듯 밀라니아의 표정을 살폈다.

“거짓말이죠?”

평온하고 담백한 밀라니아의 얼굴.

물에 종이가 빠르게 젖듯, 르베리안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쿠당탕!

“막아!”

그 순간 문 너머가 소란스러워졌다.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에게서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쾅!

부서질 듯 열린 문이 굉음을 냈다. 그 사이로 입을 크게 벌린 검은색 늑대가 방으로 들어왔다.

늑대의 뒤로 박쥐족이 널브러진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레칸?”

르베리안즈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사람 하나는 그대로 삼킬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늑대는 들어오자마자 지체 않고 르베리안즈의 머리를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르베리안즈가 날개를 펼쳐 막았지만 근육이 올라붙은 두꺼운 앞발은 날개와 함께 르베리안즈의 머리를 후려쳤다.

쾅!

어떻게 피륙으로 이루어진 머리와 팔이 부딪쳤는데 금속성의 소리가 날까.

밀라니아는 스륵, 눈을 감는 르베리안즈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정신을 잃은 르베리안즈가 침대 위로 엎어졌다.

그녀의 바로 앞에 금색 머리칼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죽었느냐?”

“하루 동안은 일어나지 못할 거다.”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대꾸한 늑대가 르베리안즈의 발목을 덥석 물었다. 그대로 질질 끌고 가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헉, 로드!”

떨어진 르베리안즈를 발견했는지 박쥐족이 대경하여 외치는 소리가 창문을 타고 넘어왔다.

밀라니아는 습관적으로 혀를 차려다 자신을 쳐다보는 늑대의 시선에 멈칫,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마차에 타는 자신을 멀거니 쳐다보았던 그 눈빛.

까만 유리알 같은 눈동자는 물기에 젖은 것처럼 촉촉하고 반질반질했다.

밀라니아는 입 속에서 혀를 찼다.

“알아들을 만큼은 말했다고 생각했거늘.”

왜 여기 있느냐. 그녀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늑대의 콧잔등에 주름이 맺혔다.

곧 부슬부슬한 털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사라지고, 검은 늑대가 있던 자리에 그레칸이 나타났다.

“설명이, 부족했어.”

그레칸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 올 필요 없었느니라. 재상을 통해 얘기를 전했지 않누? 만나지 못했느냐?”

그레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만났군. 전해 들은 대로니라. 그가 저택 하나를 소개해 주지 않았든? 당분간은 거기에서 지내거라.”

“…….”

“때가 되면 1대륙으로, 늑대족의 영역으로 돌아가면 되느니.”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밀라니아의 곁을 떠나지 않아.”

그레칸이 어두운 얼굴로 말하자 밀라니아는 피식 웃었다.

“누가 네게 그런 자격을 주었는고?”

“…….”

“적어도 나는 아닌 것 같으이.”

“밀라니아.”

상처받은 그레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울한 시선으로 그레칸은 밀라니아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본 밀라니아가 베개에 등을 뉘였다.

그레칸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밀라니아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무시하려 해도, 따라오는 시선이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왜 나를 이다지도 곤란하게 하느냐.’

결국 한숨을 쉰 밀라니아가 그레칸을 향해 가만가만 손짓했다.

소리 없이 움직이며 그레칸이 얌전히 밀라니아의 어깨에 이마를 대었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에 손을 넣어 부드럽게 헤집듯이 쓰다듬었다.

“원래 자리로 가려무나.”

거칠어지는 그레칸의 숨소리를 무시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곧 발칸이 죽을 게야.”

흠칫, 그레칸의 어깨가 굳어졌다. 밀라니아의 눈이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득해졌다.

박쥐족과 연락이 닿았던 르베리안즈와 달리 그레칸은 15년간 단 한 번도 늑대족과 교류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대륙에 살고 있는 이상 아예 모른 척하며 지내기는 힘든 일이었다.

한밤중,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 일족의 하울링에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던 그레칸이다.

밀라니아는 좀 더 다정해진 손길로 그레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자리로 돌아갈 때가 머지않았느니.”

투박했던 그레칸의 숨소리가 차차 가라앉았다. 밀라니아는 얌전해진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곧 허스키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밀라니아가 어떻게 늑대족의 수장이 죽는 것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눅눅한 흙처럼 무거운 목소리가 내는 진동이 느껴진 밀라니아는 그의 말에 집중했다.

“밀라니아가 하는 말이니 거짓은 아닐 거야. 그러니까 밀라니아가 곧 죽는다는 것도, 사실일 거다. 그렇지?”

발칸이 죽는다는 말은 그의 뇌리 한편도 차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 정도로 그레칸이 무반응일 줄 몰랐던지라 밀라니아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레칸과 눈이 마주쳐서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니라.”

약간이나마 다른 대답을 기대했었던 듯, 그레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내가 살릴 거다.”

떼를 쓰는 아이처럼 말하며 그레칸은 다짐하듯 부언했다.

“죽게 두지 않을 거다. 내가 살리겠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릴 거다.”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비릿하게 웃었다.

일을 이렇게 꼬이게 만든 당사자가 그런 말을 하니 심경이 복잡했다.

호의적이지 않은 그녀의 반응에 그레칸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밀라니아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내 수명이 다한 문제를 네가 무슨 수로 해결하겠느냐?”

“내가, 어떻게든…….”

더듬거리는 그레칸의 얼굴에 혼란이 어렸다. 밀라니아는 한숨을 쉬었다.

마법의 ‘마’도 모르는 그레칸이다.

르베리안즈나 말란도르라면 모를까.

그는 생명이 떠난 몸에서 마력이 흩어지고, 실체는 이내 무로 돌아간다는 사실도 모를 터였다.

‘무지하니 할 수 있는 말이겠느니. 그러니 화내거나 탓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레칸의 말에 어울려 주기엔 밀라니아는 너무나도 피곤한 상태였다.

이미 충분히, 사실은 지나칠 정도로 오래 살아왔다.

“바라지도 않느니라. 더 오래 사는 문제는. 그러니 이 얘기는 그만하거라. 말을 꺼내는 것도 귀찮다. 너는 어서 네 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겠느니라.”

힘 빠진 밀라니아의 목소리에 그레칸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밀라니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밀라니아는 잊었다.”

“……내가 뭘 잊었다는 것이야?”

“난 갈 곳이 없어.”

밀라니아가 눈썹을 까딱이자 그레칸은 담담하게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아 냈다.

“뭐?”

“날 죽이고 싶은 것인가?”

뜬금없는 질문에 밀라니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레칸이 그녀의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체온 높은 그의 뺨에 손을 댄 채 밀라니아는 고요한 눈으로 그레칸을 바라보았다.

서글픔에 찬 눈빛을 하고선, 그레칸이 조용하게 뱉었다.

“밀라니아가 날 버린다는 건 그런 의미야.”

문득 밀라니아는 그를 강제로 데려가려는 발칸을 막아서고 그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던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레칸은 말했다.

[당신 곁에 있기를 원해.]

홀로 흔들리는 잎새처럼 외로움에 젖었던 목소리는 기묘하게 흔들렸었다. 꼭 기쁜 것처럼.

그 순간을 쉬이 생각한 적은 없었건만.

“밀라니아는 천덕꾸러기였던 날 거뒀다. 근데 이제는 버리려고 한다. 왜? 내가 더는 필요 없어서?”

매달리는 눈을 보며 밀라니아는 쇳덩어리라도 달린 것처럼 무거운 입을 달싹였다.

“그래. 필요 없느니. 너도 더는 내 곁에 있을 필요가 없도다. 버린다고 표현할 필요도 없어. 독립할 때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거라. 남은 시간 얼마 없는 내 곁에 있느니, 지금이라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편이……!”

돌연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말이 끊긴 밀라니아는 두 손을 어정쩡하게 들었다.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푹 숙인 그레칸이 격정을 참는 것처럼 몸을 들썩였다.

“난 늑대족의 수장에게 등 돌리고 당신을 선택했다.”

“…….”

다시금 그 순간이 떠오른다. 발칸이 뒤돌고 나서 품으로 안겨 들어왔던 그레칸.

지금보다 훨씬 작고, 연약했던 새끼 그레칸.

그 이후 그레칸은 자신에게서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말했다. 분명 말했어. 당신 곁이 내가 있을 곳이라고. 밀라니아가 말했었잖아.”

“…….”

“당신만 바라보게 해 놓고 이제 와서, 날 버리려는 건가?”

“…….”

“책임을 져.”

밀라니아를 더 힘주어서 끌어안는 그레칸의 어깨 위에 턱을 맥없이 올렸다. 탄식이 잇새로 흘러나온다.

이렇게 무너질 것처럼 연약한 그레칸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사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가 동요할 건 없었다.

그레칸이 괴로워하든 말든 그녀와는 상관없는 문제니까. 오히려 꼴좋다고 비웃어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잘게 떨리는 어깨를 보자 밀라니아는 비웃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골칫덩이가 아닌고.’

밀라니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와 해묵은 증오를 꺼내기에는 그녀가 그레칸을 품어 온 시간이 너무 길었다.

고작 20여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을 길다고 하는 게 우스웠지만 체감이 그랬다.

아무 일 없이 평온히 보냈던 100년보다, 그레칸이 곁에 있었던 20년이 더 길었다.

[그 아이를 아끼잖아?]

말란도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하여간 눈치 빠른 놈이다. 밀라니아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어떻게든 이놈을 세뇌하려고 했었거늘.’

함께한 시간에서 영향을 받은 건 그레칸만이 아니라는 건가.

손가락 사이를 스치던 머리카락의 감촉이나 추운 밤 품을 파고들었던 그레칸의 뜨거운 체온, 간혹 다리를 툭툭 치던 꼬리의 느낌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해서, 밀라니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

“내가 널 아끼기는, 하는구나.”

그레칸이 고개를 들어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밀라니아는 버려질까 봐 걱정하는 듯 굳어진 그레칸의 눈을 마주하며 그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그레칸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그녀의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덩치 차이가 큰 탓에 밀라니아가 그레칸에게 안겨 있는 모양이 되었다.

밀라니아는 저밖에 없는 것처럼 매달리는 그레칸이 곤혹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안쓰러우니.’

스스로의 감상에 놀라 버렸다.

발칸에게 동족 취급도 받지 못하고 굴려지는 어린 그레칸을 봤을 때에도 이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연약한 새끼는 지켜져야 한다.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작지도 연약하지도 않은 그레칸이 안타깝게 여겨지다니.

‘죽을 때가 다 되긴 했나 보이.’

끝이 다가오는 이때에 조금 너그러워지면 어떠하랴.

밀라니아는 쿠션에 등을 기대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레칸을 쓰다듬기만 반복했다.

마녀성에 있을 때처럼 방 안의 공기는 따스하고 평온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둘 모두 각자의 상념으로 마음이 어지러운 탓에, 한 사람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제 몸을 태워 타오르는 촛불이 반으로 짧아질 무렵이었다.

창밖에서부터 소름끼치게 차가운 음성이 흘러들어온 것은.

“주인에게 목줄이나 채워져야 마땅할 늑대 새끼가 이제는 가릴 것도 가리지 않는구나.”

마치 죽음에서 돌아온 망자와 같이 스산한 음성이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얀 손이 탁, 하고 창틀을 붙잡았다. 그리고선 몸을 가벼이 올려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그레칸에게 후려쳐져 창밖으로 밀려났던 르베리안즈였다.

그의 눈이 악귀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레칸은 밀라니아를 끌어안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나가라.”

방해꾼을 대하듯 시큰둥한 그의 표정에 르베리안즈가 더 분노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최대한 서둘러 돌아온 건 너 때문인 탓도 있었다, 그레칸!”

르베리안즈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염력이 발휘되었다.

무형의 힘으로 그레칸을 떨어뜨린 후, 르베리안즈는 홀로 남은 밀라니아를 잡아채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니, 지들끼리 싸우면 될 것을 난 또 왜 끌어들이누.’

불시에 봉변당한 밀라니아의 뺨으로 서늘한 밤바람이 미끄러지듯 스쳤다.

“르베리안즈!”

갈라진 목소리로 으르렁댄 그레칸은 지체 않고 그 뒤를 쫓았다.

여기까지는 마녀성에 있을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르베리안즈가 대기하던 박쥐족 전사들에게 눈짓하자,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어딜 가려고 하는가!”

“늑대 따위가 감히 로드의 발치에나 닿을 거라 생각하느냐.”

자신을 둘러싼 박쥐족들을 보고 당황한 그레칸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밀라니아가 멀어지고 있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건만 박쥐족들은 끈질겼다.

크아아아앙!

늑대로 변한 그레칸이 앞을 가로막는 박쥐족들을 물어뜯고 뒤로 던졌지만 그보다 더 많은 박쥐족이 몰려오자 그의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일개 개인이었을 때는 서로의 힘만 겨루었으면 됐으나, 이제 르베리안즈는 일족을 이끄는 수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시야에서 가물가물한 밀라니아를 보며 그레칸이 하울링을 터뜨렸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방해만 하는군.”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주변을 빽빽하게 가린 박쥐족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한편, 멀리서 늑대의 하울링을 들은 밀라니아는 혀를 찼다.

어째 마녀성에 있을 때와 달라지는 게 없나.

“이대로 박쥐족의 영역으로 갑니다.”

르베리안즈가 빙그레 웃었다.

“바로 식을 올릴 수 있을 거예요. 반려자로서의 맹약을 맺으면…….”

“수장이 되더니 한층 제멋대로가 되었구나.”

한심한 기색이 어린 그녀의 목소리에 르베리안즈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레칸을 떼어 놓기 위해서는 이 수밖에 없다고요.”

“그만두고 돌아가려무나. 아니면 내가 알아서 돌아갈까? 내가 못할 것 같느냐?”

“밀라니아!”

르베리안즈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내 할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느니. 모든 일이 해결된 뒤에 다시 얘기하거라.”

“이해가 안 가요. 말란도르 그놈의 말을 따라 하고 싶진 않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마녀족과 관계된, 마녀족의 일족만이 알고 있는 그런 거. 근데 아니잖아요. 밀라니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밀라니아가 해야 할 일은 뭐고요.”

“죽기 전에 해야 하는 일이로다.”

해야 할 일. 앨리지를 살리고 영면에 드는 일이다.

다소 긴장감 도는 말에 르베리안즈가 멈칫하고, 고개를 숙여 밀라니아를 응시했다.

굳은 눈은 그레칸이 쳐들어오기 직전 밀라니아가 했던 말을 회상하고 있었다.

[나는 곧 죽느니라.]

“네가 가뜩이나 얼마 남지 않은 내 수명을 줄이고 싶거든 마음대로 하거라.”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던 르베리안즈가 우뚝 멈추었다.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가 없잖아요. 정말 치사하네요.”

“…….”

“해야 할 일이 뭔데요?”

“…….”

“일이 끝나면 밀라니아, 더 살 수 있는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말에 밀라니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 *

“싫어요, 밀라니아.”

웃고 있지만 비딱한 자세는 르베리안즈가 현재 상황을 매우 불쾌해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흥미가 돋지 않느냐?”

“무슨 흥미요? 저 덩치만 큰 늑대라면 모를까, 내가 바보 같아요?”

손가락으로 지적당한 그레칸의 눈동자가 사나워졌다.

밀라니아에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레칸 또한 기분이 좋지 않은 듯 입술이 꾹 다물려져 있었다.

“널 바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느니.”

“그게 아니라면 왜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한 방에 있으라는 거예요?”

르베리안즈가 미심쩍은 눈으로 크림색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는 앨리지를 훑어보았다.

밀라니아의 시선이 닿자 앨리지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시간은 정해져 있을까요? 얼른 끝내고 에반에게 가 봐야 해서요.”

밀라니아는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그레칸과 그 맞은편에서 툴툴대는 르베리안즈와 중앙의 침착한 앨리지를 순서대로 살펴보았다.

그야말로.

‘편두통이 도지는 것 같으이.’

한 손으로 이마를 잡고 밀라니아는 대꾸했다.

“시간은 차 한 잔 마실 수 있을 정도면 될 것 같느니라.”

“그렇다면 뭐…….”

그 정도야, 하고 반색하던 르베리안즈는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믿을 수 없는 걸 봤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시선은 밀라니아가 소환한 찻잔 세트에 쏠려 있었다. 보통 사용하는 찻잔보다 10배 이상 큰.

그레칸은 못 본 척 눈을 돌려 버렸고, 앨리지는 침묵하다 한마디 했다.

“화장실은 가도 되겠지요?”

경악을 금치 못한 르베리안즈가 펄쩍 뛰었다. 솟아난 날개가 시끄럽게 펄럭거렸다.

“프러포즈에 대한 답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어딨어요!”

“뭐가 잘못됐느냐?”

밀라니아가 평온한 태도로 고개를 갸웃하자 르베리안즈는 당연하다는 양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난 당신에게 신부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런데 그런 내게 다른 여자를 들이미는 저의가 뭐예요.”

“…….”

“이렇게 날…… 상처 입히려고.”

“…….”

“일부러 이러는 거예요?”

르베리안즈가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중얼거렸다.

눈치 빠른 그는 마음을 잔인하게 거절할 수 있는 수십, 수백 가지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직접적인 거절의 단어보다도 이런 방법이 더 잔인하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달리 뚜렷한 이유가 있는 밀라니아로서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떠는 그가 이상해 보일 따름이었다.

“오해하지 말거라. 그런 의미가 아니니라. 물론 더는 곤란한 프로포즈를 안 하겠다면 대단히 환영하겠노라.”

밀라니아의 말에서 진심을 읽은 르베리안즈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예요?”

“그런 거 없느니라. 그냥 시간을 보내라는 것뿐이거늘. 어려운 요구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싫어하느냐?”

르베리안즈가 말하기 싫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 탁자에 걸터앉은 말란도르가 한 편의 희극을 보는 듯 킥킥 웃음을 흘렸다.

르베리안즈의 이마에 핏줄이 불룩 올라섰다.

“밀라니아 하는 행동이 꼭…….”

“꼭?”

밀라니아가 모르겠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자 르베리안즈가 퉁명스럽게 뱉었다.

“데이트라도 하라는 것 같잖아요.”

“…….”

“그것도 말도 안 되게 셋이서. 난 당신이 정말 좋지만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돌려 말하지만 ‘제정신이에요?’ 하고 묻는 것과 다름없었다.

밀라니아는 태연히 대꾸했다.

“그럼 둘 둘씩 짝지어 주면 괜찮겠느냐? 그레칸과 앨리지, 앨리지와 너.”

새로운 제안에 대한 답은 득달같았다.

“싫어요.”

“싫다.”

“저도 별로예요.”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턱을 괸 밀라니아는 문득 이 상황이 묘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서로를 아끼었던 그들이 이제는 싫다며 밀어내고 있는 상황이라니.

“그럼 셋이서 차 한잔하면 되겠구나?”

상황은 못마땅하지만 ‘어찌할 수 없다면’ 하는 분위기여서, 밀라니아는 지체 않고 일어났다.

눈짓을 하자 시종이 가까이 다가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빙그레 웃고 시중이 탁자 위로 주전자를 올렸다. 웃는 얼굴과 달리 손목이 바들바들 떨렸다.

미리 끓여 놓은 물을 담은 주전자도 찻잔 세트와 어울리게 특대형 사이즈였기 때문이다.

그걸 보며 질린 표정을 하는 셋을 내버려 두고 밀라니아는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는 듯했던 말란도르가 밀라니아의 뒤를 따랐다.

탁.

부드럽게 닫힌 문에 등을 기댄 밀라니아는 볕 좋은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진행하라고 시종에게 일러뒀으니, 준비한 차를 다 마시려면 족히 한 시간은 걸릴 터였다.

“사랑에 빠지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지 궁금하구먼.”

“3초 만에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걸.”

혼자만의 중얼거림이었는데 의외로 답이 돌아왔다.

말란도르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고 햇살에 기분 좋은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밀라니아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얼굴을 가볍게 구겼다.

“3초? 불가능한 일.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기도 힘든 시간이거늘.”

‘첫눈에 반했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관용적 표현일 정도로 흔한 일이라는 건데, 밀라니아는 여전히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첫눈에 반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알고 있는 사랑을 떠올려 보면, 그녀는 그렇게 쉽게 사랑에 빠지는 일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밀라니아가 생각하는 사랑은 상대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거였다.

전생의 그레칸과 라베리안즈가 아무리 그녀에게 험한 꼴을 당해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제 몸이 나자빠질 판에 황제의 사생아를 걱정하는 앨리지처럼.

인생을 걸만한 황위 쟁탈전을 앞두고 있음에도 남편의 배신에 괴로워하는 황후처럼.

‘이 경우는 황제를 위한다기보다는, 황제를 사랑하는 자신을 위하는 것 같으나.’

어쨌든 공통점은 맹목적이라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더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일이 얼마든지 있는데, 다 신경 쓰지 않는 느낌.

마치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뇌가 사라진 것처럼. 감정만 남은 듯이.

그녀가 지켜봐 온 모든 사랑하는 자들은 그랬다. 그렇게 격렬했다.

“가능해.”

“?”

그런데 그 오랜 의문에 말란도르는 자신만만하게 대꾸하는 게 아닌가.

밀라니아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자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내가 그랬으니까.”

그 말을 하며, 말란도르는 밀라니아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밀라니아가 그런 진득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대상을 말하지 않았지만 눈빛은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직설적이었다.

밀라니아의 눈썹이 삐뚜름한 사선을 그렸다.

‘전부터 이상하게 그러더니 점점…….’

하, 헛웃음을 흘리며 말란도르를 직시한 그녀는 날카롭게 말했다.

“너, 그거 자꾸 무슨 의도로 그러는 것이냐?”

뾰족한 분위기에 말란도르의 입이 다물렸다.

“장난친다고 무시하는 것도 한두 번이니라.”

“…….”

못마땅한 기색이 그녀의 두 눈에 역력하다.

말란도르는 밀라니아의 불신 가득한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럼 뭐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내게 첫눈에 반했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냐?”

“맞아. 근데 그게 이상해?”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한심하다는 그녀의 대꾸에 그의 붉은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상처 입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늘 너와 닿고 싶어 했고, 네 연락을 기다렸고, 네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어 했어.”

“…….”

“지금 내가 여기까지 와서 너와 대화하고 있는 이유가.”

말란도르가 비딱하게 고개를 틀었다.

“넌 뭐라고 생각하는데?”

“사랑해서 그랬다고 말하고 싶은 게냐.”

밀라니아는 짜증스러운 분노가 빠져나갈 정도로 어이가 없어 우스웠다.

그녀가 사랑에 대해 잘 모르기는 하나, 그래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을지도 모르나, 말란도르의 사랑 타령은 확실히 우스운 데가 있었다.

“네가? 나를?”

“사랑의 종류가 천편일률적이라 생각해? 네가 머릿속으로 형상화하는 그 모습만 사랑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

“좁은 눈으로 생각하지 마. 편견을 갖지 마.”

“…….”

“나 같은 방법으로 사랑할 수도 있는 거야.”

답답하다는 듯 말란도르가 화를 삭이는 억눌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밀라니아의 무미건조한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너와 내가 알고 지낸 지가 몇백 년이다.”

“…….”

“그동안 네가 품은 여자의 수를 내가 일일이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무슨 사랑. 사랑의 형태가 여러 가지라 했느냐? 그럴 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것도 납득이 되어야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느냐?”

말란도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침대 위에서 부리는 노예를 몇 명이나 거느린 네가 무슨 사랑?”

“…….”

“몸과 마음이 달랐다고 얘기하진 말아라. 어둠을 부리는 흑계인으로서의 체면이 있지, 인간처럼 말할 건 없으니.”

냉소적인 말투에 말란도르가 서둘러 입술을 열었다.

“그들은 나한테 아무런 의미도 없어. 내 유흥일 뿐이야.”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밀라니아의 표정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감히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느니. 네 그 말을 들은 나의 일족은 사흘 밤낮을 울었어.”

“……하지만 넌 신경도 쓰지 않았잖아.”

“상종 못 할 인사라고 생각했느니라.”

말란도르가 답답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 문제가 네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어. 네가 사랑을 말하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상관 안 할 테니 입에 담지 말아 줬으면 좋겠구나.”

딱 선을 긋는 태도에 말란도르의 얼굴에 당혹이 스쳤다.

“네가 내 마지막을 함께하려는 건 나름대로 오랜 시간 알아 온 악우로서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느니라. 실제로도 그럴 것이고.”

“내 감정 자체를 없는 걸로 치부하겠다는 거네.”

씁쓸한 대꾸에 밀라니아는 의아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이제 와서 네가 왜 이러는지 나야말로 모르겠구나. 나를 꺼지지 않는 화염에 던져 놓은 사실을 잊었느냐? 대마녀의 힘을 시험해 보겠다고 시독이 흐르는 늪에 날 밀어 넘어뜨렸던 건?”

“…….”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늪이었느니라. 너와 상성이 최악인 나에게도 불유쾌했고.”

말이 없는 말란도르를 향해 밀라니아는 무덤덤히 사실만을 짚었다.

이제 와 예전 얘기를 꺼내 말란도르의 위험한 장난기를 탓하려는 게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진즉 죽었을 게다.”

말란도르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난, 난 신기해서 그랬어. 밀라니아, 내가 만나 온 대마녀 중에서 너만큼 재밌는 놈이 없었으니까. 괴롭히고 괴롭혀도 귀찮다는 얼굴로 눈썹만 까딱이는 네가 신기했단 말이야.”

“그래, 신기하겠지. 나도 네가 신기하느니라.”

밀라니아가 어깨를 으쓱이자 말란도르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 말은…….”

“사랑은 아니라는 것이니. 신기하고 재밌어서 같이 있고 싶지만 가슴 절절히 원하는 그런 느낌은 아닌 게야.”

밀라니아는 이제는 알겠냐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사실 애초에 흑계인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기나 한 것이냐? 어둠에서 태어난 감정 없는 존재가 아닌고.”

“내가 괴짜라고 불리는 이유를 몰라?”

“괴이한 취향.”

“그리고.”

“감정적으로 굴기 때문이 아니냐.”

익히 알고 있던 바라 대꾸하기 쉬웠다.

말없는 말란도르를 보자 그가 의도하는 게 뭔지 단박에 깨달았다.

기가 막힌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사랑까지 하고 있다고.”

“…….”

“그럴 수도 있겠지. 이 세상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어렵지 않은 곳이니.”

제법 긍정적인 반응에 말란도르가 기대하는 눈을 하는 순간.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네가 이 몸을 사랑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라.”

“…….”

“잘 알고 있듯이 우린 붙으면 붙을수록 서로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그런 존재를 사랑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느니. 게다가 네 한 짓을 생각해 보면 더 그렇지.”

“…….”

“악우로서의 우정을 사랑이라 착각하지 말거라. 나도 이런 말을 하는 게 마음 좋지는 않느니라.”

밀라니아가 한심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쉬자 말란도르가 우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밀라니아, 너는 둔한 것만이 아니라…….”

“…….”

“융통성도 정말로 없어.”

‘왜 갑자기 시비를 거는 것인고.’ 밀라니아는 눈빛으로 말했다.

말란도르는 언제 당황스러워했고, 답답해했다는 양 금세 빙글빙글 웃으며 툭 뱉었다.

눈동자는 아직 딱딱했지만 접힌 눈매에 가려져 밀라니아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 밀라니아지.”

“…….”

“요즘 이상하게 굴어서 정말 밀라니아가 죽을 때가 다 됐구나 싶었다니까.”

“그럼 넌 죽을 날이 아직 한참 남았겠구나.”

늘 한결같으니.

“응. 아직 한참 남았지. 내 정해진 수명은.”

의미심장한 뉘앙스였다.

“이 세상의 모든 건 정해져 있다는 거 알지, 밀라니아? 대마녀의 수명이 천 살 남짓이라는 거, 흑계의 존재인 나와 마녀목의 수호자인 대마녀는 상성이 최악이라는 거, 요정족의 존재가 숲을 이루는 데 있어 필수라는 거.”

“…….”

“사실 모든 만물은 한계를 가진 채로 태어나 그걸로 고정되는 거야. 내 노력은 그 정해진 길을 약간이나마 바꾸는 정도밖에 하지 못하겠지.”

목소리가 쓸쓸하게 잦아들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오고, 무한 회귀를 겪은 밀라니아는 말란도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순리를 인지하는 자로서, 그들의 시선으로는 강물을 멈추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잠깐 멈추어도 곧 원래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으니까.

‘앨리지를 살리고, 내가 죽는 것 또한 순리이니라.’

몇 번의 기이한 회귀를 겪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어렴풋하게 피부로 느껴지는 게 있었다.

그렇게 흐르는 것이 순리라고.

왜 생이 끝나지 않고 반복되는지는 아직 불가사의한 문제지만 말이다.

말란도르가 그녀의 생명을 조금이나마 연장하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그녀가 하는 것 또한 운명을 역행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잠깐 멈추어서, 약간이나마 방향을 틀게 하려난 것 정도다.

앨리지를 위해 심장이 뜯겨 죽는 운명이 아니라 스스로 영면의 때를 찾아 앨리지를 살리는 것.

결과는 같으나 방법이 다르다. 그것이 그녀가 선택한 운명의 비틈이었다.

그나마도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는 생물체야말로 세상의 그물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가 될 테니…….”

밀라니아는 조용히 읊조렸다.

인간들에 비해 강한 그녀도 세상이란 거대한 본질 앞에서는 그물에 걸려 바둥대는 나비 한 마리에 지나지 않다.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인 말란도르가 발랄한 목소리로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그런 의미에서 내 사랑을 받아 주라고 애원하진 않겠어. 하지만 다른 내 마음은 받아들여 주는 게 어때? 방법은 쉬워. 내가 각고의 노력 끝에 준비한 약을 먹어 주면 되는 거거든.”

어느새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작은 유리병이 걸려 있었다. 반투명한 빨간 액체가 찰랑였다.

붉은 꽃.

시체 냄새가 훅 풍겨 오는 것 같아 밀라니아는 속이 메스꺼워졌다.

“저리 치우려무나.”

“네 수명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할 수 있어.”

“네 수명을 받고 싶진 않느니라. 효과도 없을 것이야.”

시체 사이에서 태어나 시전자의 수명을 빨아먹고 대상의 수명을 늘려 주는 저주받은 꽃.

밀라니아가 역겹다는 투로 거절하자 말란도르가 미묘하게 웃었다.

“넌 이미 몇 번 복용했어.”

“…….”

“활기는 좀 돋았잖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생각해 봐, 밀라니아. 이미 내친걸음이야. 몇 번 더 마신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그러니 마시라고 병을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붉은 액체는 언뜻 유혹적으로 보였으나 그녀에겐 아니었다.

분명 말란도르의 자택에서 일주일을 보낸 다음 자신의 치유력이 기이하게 높아졌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애초, 밀라니아에겐 역겨운 붉은 꽃을 통해 수명을 늘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말란도르의 제안은 전혀 유혹적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뚜렷하게 떠오른 거부감에 말란도르는 미묘하게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집 한번 세기는. 널 보고 있으면 말이지. 꼭 얼른 죽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

밀라니아는 피곤한 낯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너도 열 번 정도 똑같은 시간을 살아 보려무나. 너라고 나와 다르게 될지 나도 궁금하니.”

“그게 무슨 소리야?”

됐다며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서 계속 죽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낮잠이나 잘까.’

고민하는 찰나.

“으아아아아악!”

방 안에서 새어 나온 비명에 흠칫한 밀라니아는 문에서 몸을 뗐다.

‘?’

잠시간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해졌다.

혹시 그렇게 될 운명이면, 얼른 사랑에 빠져 보라고 판을 깔아놓은 곳에서 웃음소리는커녕 웬 비명 소리란 말인가.

홱.

밀라니아는 문을 열어젖혔다. 드러난 광경은 가관이었다.

“이 정체 모를 여자야, 나한테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르베리안즈가 이를 아득 갈며 앨리지를 윽박질렀다.

방금의 비명 소리에서 알 수 있듯이 화가 가득 난 태도였다. 한편으로는 당혹해하는 듯도 했다.

르베리안즈의 맞은편엔 앨리지가 소파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그 얌전한 모습에서 밀라니아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것이 있었다.

앨리지가 꽉 붙들고 있는 작은 손거울을 보고 밀라니아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레칸은 전혀 관여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시큰둥한 표정이었으나, 뭔가를 꺼려 하는 것처럼 앨리지 곁에서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다과 시중을 들던 시종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앨리지, 그게 무엇이냐?”

밀라니아의 목소리에 반응한 르베리안즈가 불쾌한 듯 와락 얼굴을 구겼다.

“괴상한 물건이에요.”

“…….”

“날 공격했어요, 저것으로.”

“공격?”

밀라니아는 다시 한번 앨리지의 거울을 힐끗했다. 앨리지가 거울을 꽉 붙들었다.

“저 여자가 거울로 날 비추는데…….”

르베리안즈가 거울을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귀신에라도 홀린 얼굴이었다.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기억나지 않아요.”

“응?”

“내 기억이 사라졌어요. 저 여자, 마녀인가요?”

“마녀는 나지.”

밀라니아는 가볍게 일축하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침묵했다.

보통 여성체에게 친절한 르베리안즈가 앨리지를 보면서는 이를 아득아득 갈았다.

의문과 경계가 어린 사람들의 시선에도 앨리지는 무서워하지 않고 침착하게 설명했다.

“기억을 빼앗은 것뿐이에요.”

“그건 그렇게 간단히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르베리안즈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앨리지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대마녀와 무슨 사이냐면서 먼저 저를 귀찮게 군 건 당신이에요. 난 당신 입을 잠시 다물게 하고 싶었던 거고요.”

르베리안즈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하!’ 헛웃음을 흘렸다.

“데이트를 하라고 했지, 싸우란 말은 안 했거늘.”

나직한 중얼거림이 바닥에 깔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밀라니아에게 쏠렸다.

르베리안즈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요. 말해 봐요, 밀라니아. 애초에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든 거예요?”

황당하다는 물음에 밀라니아는 덤덤히 대꾸했다.

“한 방에 두면 사랑이 싹트지 않을까 싶어서 그랬느니라.”

“……이렇게 한 방에 몰아넣는다고 저 여자에게 반하겠어요? 저 늑대 새끼는 눈치도 없이.”

저랑은 관련 없다는 양 밀라니아에게 찰싹 달라붙는 그레칸을 보며 르베리안즈가 이를 부득 갈았다.

밀라니아는 험악한 장내의 분위기에 이들의 관계가 전생처럼 흘러갈지, 실험하는 걸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이는구나.’

[사랑은 마음이 움직이는 거예요. 머리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과거 그녀의 일족이 했던 말을 실감하는 그녀였다.

“앨리지. 말해 보거라. 그 물건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구나.”

이 상황 자체보다도 그녀의 흥미를 일으킨 건 앨리지가 지닌 거울이었다.

앨리지가 거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제 얼굴이 비치는 거울을 손으로 덮었다.

“제국의 국보. 아덴샤의 거울이에요. 무형의 것들을 가둘 수 있지요. 기억이나, 건강, 아름다움 같은 것들을요.”

“뭐?”

기겁한 르베리안즈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깨달은 표정을 짓고, 제 기억을 빼앗아 간 게 분명한 거울을 노려보았다.

“대마법사의 유물이죠.”

중요한 건 그걸 지금 왜 꺼내 들었냐는 것이다. 그것도 인간들이 목숨처럼 지키는 나라의 국보 따위를.

의문 섞인 밀라니아의 눈을 앨리지가 똑바로 응시했다.

“대마녀님. 부탁이 있어요.”

“…….”

“이걸 깨뜨려 주세요.”

아덴샤의 거울.

초대 황제와 함께 제국을 건국하고 스러진 대마법사의 유물.

현재 존재하는 마법사들은 모두 아덴샤의 흔적을 따라 수련했고, 대륙 곳곳에 설치된 마법 장치에도 아덴샤의 생각이 녹아 있다.

아덴샤 이후로 몇 명의 뛰어난 마법사가 나타났으나 대마법사의 호칭을 달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마법사들의 어버이이자, 이종족을 제외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마법의 시초라고 할 수 있었다.

인간이 개발하고 발전시킨 마법의 시초.

인간들의 마법의 정점. 그들이 다다를 수 있는 최상단의 극점.

그걸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아덴샤의 거울이었다.

“이 거울은 대마법사가 죽기 전 그의 모든 공부를 응축시켜 만든 귀물이에요.”

“…….”

“제가 몰래 가짜를 만들어 집어넣고 빼 왔죠.”

당장 외부에 들키기만 해도 즉결 처형을 당할 일을 앨리지는 덤덤히도 얘기한다.

“황제도 아는 사실이냐?”

“그분은 황제세요. 제가 아덴샤의 거울을 보는 것은 허락해 주셨지만, 이런 간 큰 짓을 했다는 건 모르시죠.”

착잡한 듯 눈을 내리깔지만 앨리지는 후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바보 같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

“황태자의 짓을 저지하기 위해서예요. 폐하의 면전에서는 에반을 돌봐 주겠다 자애롭게 굴었으면서.”

시종 차분했던 앨리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뒤에선 에반이 분란의 싹이 될까 봐 악독한 수를 썼죠. 에반은 원래 병약했지만 지금처럼 악화된 상태는 아니었어요. 에반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건 황태자 때문이에요. 거울에 생기를 빼앗겼거든요. 그걸 근자에야 알게 됐어요.”

앨리지의 초록색 눈동자에 습윤한 막이 생겼다. 촉촉해진 목소리는 황태자를 향한 분노에 은은히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 거울을 깨 주세요.”

밀라니아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그레칸의 어깨와 머리가 살짝 맞닿았다.

아까부터 옆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그레칸을 흘끗한 밀라니아는 다시 앨리지를 바라보았다.

“너는 요정족이지만 인간의 세계에서 살아왔느니라. 그런데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유물을 깨 달란 것이냐? 고작 네 연인의 살날을 연장하기 위해서?”

“고작…….”

씁쓸히 중얼거린 앨리지의 얼굴이 미약하게 일그러졌다.

“고작이 아니에요. 에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고요. 에반이 죽으면 전 견딜 수 없을 테니까요. 에반을 살리고, 저를 살리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제게는 세상을 위하고 싶은 위대한 희생정신 따위는 없어요. 일개 범인인 제가 원하는 건 제 사랑과 행복뿐이에요. 그를 위해서 사람들이 욕하고 돌 던지는 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죠. 하지만 전 멈추지 않을 거예요.”

앨리지가 결심이 어린 단호한 눈으로 밀라니아를 직시했다.

“생각할 시간을 드릴 수도 있어요. 어차피 아덴샤의 거울은 쉬이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니, 진짜가 사라졌다는 걸 황태자가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하지만 서둘러 결정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게 원하는 게 있으시죠? 제 부탁만 들어주신다면 무엇이든 따르겠어요. 설사 세상에 부적절한 일일지라도 따를 거예요.”

“하여간 너희 사랑에 빠진 것들은…….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느니.”

머리가 아파진 밀라니아가 한숨을 쉬자 앨리지의 눈에 불안감이 어렸다.

“시, 시간을 더 드릴게요. 받아들여 주시기만 한다면…….”

“그럴 필요 없느니라.”

밀라니아가 손을 내밀었다. 앨리지는 눈을 크게 뜨고 밀라니아의 길고 하얀 손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줘 보거라.”

앨리지는 무표정한 밀라니아를 뚫어져라 보았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밀라니아의 손 위에 거울을 올렸다.

“네가 원한다고 없앨 수 있는 물건이라면 오랜 세월 인간들의 보물로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이야.”

밀라니아는 매끄러운 금속성의 거울 테두리를 만지작거리며 거울을 살폈다.

오래전 물건답게 약간의 예스러움이 느껴지기는 하나 그뿐.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요사스러움은 평범한 거울이 절대 지니지 못할 기운이다.

그야말로 인간의 마법 그 자체였다.

‘허어. 이런 물건을 한낱 인간이 만들어 냈다니.’

간혹 타고난 존재의 한계를 깨뜨리는 자가 나타나면 그 자는 인간이리라.

풍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 과언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밀라니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주변이 고요해졌다.

잠시 후, 거울을 움켜쥔 흰 손에 핏줄이 올라왔다.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은색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올라가고, 기이한 마력이 주변을 휘몰아쳤다.

번쩍. 눈을 뜬 밀라니아의 금색 눈이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찌직. 거울의 테두리에 금이 갔다. 밀라니아의 황금색 눈동자가 짙어질수록 거울이 크게 떨렸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진동하는 거울에서는 웅웅거리는 기이한 소리까지 흘러나왔다.

앨리지는 숨소리도 죽이며 거울을 응시했다. 깨지기를 바라는 눈이 간절함으로 흔들렸다.

거울의 테두리가 얇게 금이 갔을 때, 밀라니아는 힘을 거두었다.

올라서서 하늘거리던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내려왔고 번뜩이던 눈동자도 무덤덤해졌다.

테두리가 망가진 거울을 내려다본 밀라니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요?”

“이건, 없앨 수 없느니라.”

“네?”

“오해하지 말거라. 당장은 없앨 수 없다는 것이야.”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여기저기 잔뜩 금이 갔던 테두리가 저희들끼리 붙기 시작했다.

망가졌던 거울이 원래 상태로 돌아오자 앨리지는 “아.” 하고 탄식했다. 낙담한 얼굴이 어두워졌다.

“위대한 아덴샤의 물건이기 때문인가요? 그가 거울에 무슨 보호 장치라도 해 둔 거예요?”

“보호 마법이 걸린 건 사실이니라. 하지만 그것뿐만이면 없앨 수 없다고 할 수 없느니.”

“예?”

밀라니아는 기묘한 눈빛으로 거울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며 인간을 대표하는 물건이 되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답변은 말란도르에게서 나왔다.

밀라니아에게서 거울을 가져간 말란도르가 흥미로운 눈으로 거울을 살폈다.

“함부로 없앨 수 없단 소리지. 없애기 쉽지도 않고.”

“…….”

“쉽게 말해 주지. 이미 이 물건이 인세를 지탱하는 한 축이 되었다는 거란다. 없어서는 안 될 물건 말이야. 모르긴 몰라도 거울이 없어지면 인간의 마법적 능력은 크게 저하될 걸.”

그러고는 앨리지를 바라보며 눈을 기묘히 빛냈다.

“네가 사라지면 숲이 약해지는 것처럼.”

“…….”

“세계의 구성원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요정족의 수장과 마녀족의 수장. 두 사람은 세계의 숲을 이루는 존재들이야. 둘 중 하나만 없어져도 세상이 흔들리겠지. 이 거울이 없어지면 인세가 흔들린다고 보면 돼.”

밀라니아는 말란도르의 말에 혀를 찼다.

앨리지의 정체를 캐묻던 말란도르였는데, 어느새 그녀의 정체와 근원을 파악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놈.’

그런 감상 외에 밀라니아는 말란도르의 주장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만 말란도르의 말 중에서 하나는 이견이 있었다. 앨리지와 그녀의 차이점이었다.

수가 희소한 요정족은 당장 앨리지가 죽으면 새로운 수장을 세울 수 없다.

그러나 대마녀는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새로운 대마녀가 탄생하므로.

앨리지와 그녀의 다른 점은 명확했다.

‘나는 사라져도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니.’

“……그렇군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앨리지가 입술을 살짝 깨물고, 말란도르에게서 거울을 돌려받았다.

분위기가 침울해진 가운데 밀라니아는 문득 상황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이종족의 대마녀. 늑대. 박쥐. 인간의 마법을 담은 귀물. 숲의 요장족. 어둠의 흑계인.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기운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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