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자작나무의 딱정벌레
“만에 하나 전대 대마녀 같은 자를 되살리기라도 하면 매우 골치 아파지겠죠.”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까지? 너무 걱정 말거라. 붉은 꽃의 소생 능력을 실제로 목격한 자는 한 명도 없느니라.”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나는 계속해서 그자의 행동을 감시할 거예요. 밀라니아 당신도, 혹시 수상한 기색을 눈치채면 내게 알려 주길 바라요.”
스칼렛은 그 말을 하고 떠났다. 그녀를 보낸 뒤 밀라니아도 비행을 재개하며 생각에 잠겼다.
‘말란도르를 만나 봐야 하나?’
그런 귀찮은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스칼렛 말대로 말란도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괴짜였다.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말로 고대 미녀 노예를 만들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진실로 미친 작자로다.’
말란도르를 찾아가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동안 어느새 일행은 마녀의 영역에 들어서 있었다.
곧바로 마녀성으로 이동한 밀라니아가 빗자루에서 내렸다.
먼저 빗자루에서 내린 체라가 그녀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걔를 왜 매달고 계세요?”
“응?”
밀라니아는 어리둥절했다.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 매달린 그레칸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밀라니아는 당황했다.
“너 게서 뭐 하느냐?”
생각에 골몰한 탓에 그레칸이 이러고 있는 것도 몰랐다.
“어쩐지 무겁더라니.”
밀라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그레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떨어뜨리려는 의도였다.
“크릉!”
그레칸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밀라니아의 손을 털어 냈다.
미간을 설핏 찡그린 밀라니아가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그레칸의 얼굴을 밀었다.
“크르르…….”
“……?”
밀라니아가 의문 어린 눈으로 체라를 바라보자 체라가 명쾌하게 대꾸했다.
“내려오기 싫대요. 흐흐.”
“그렇구나. 한데 뒤에 웃음소리는 무엇이냐?”
“모습이 꼭, 자작나무에 붙은 딱정벌레 같아서요.”
밀라니아는 체라가 기이하게 웃는 것을 잠깐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눈을 똘망똘망하게 뜬 그레칸이 밀라니아와 시선을 마주쳐 왔다.
밀라니아는 갑자기 뭔가 부담스러워졌다.
손으로 다시 밀어 볼까, 하다가 굳이 힘으로 용쓸 필요가 없음을 상기했다.
“내려오려무나.”
간단히 명령했다. 복종의 밤을 거부하지 못한 그레칸은 곧 내려갈 테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밀라니아의 눈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컥!”
갑자기 목이 죄이는 느낌이 밀라니아의 뒷머리를 잡아챈 것이다.
목을 감싼 팔을 꽉 쥔 밀라니아는 컥컥대며 간신히 뒤를 돌아보았다.
인간으로 탈태한 그레칸이 목을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목이 더 졸리자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아직 각성 전인데도 손목이 밀라니아의 것보다 튼실했다.
“내, 큿, 내려와.”
밀라니아는 명령이 안 먹혔나 싶어 다시 명령했다. 그러나 그레칸은 팔 힘만 세졌지 도통 요지부동이다.
‘지금 이게 무슨 꼴인가?’
밀라니아는 눈을 깜박였다.
“커억!”
목 졸린 소리가 크게 났다. 지레 놀랐는지 목을 죄던 팔이 약간이나마 느슨해졌다. 밀라니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벌써 복종의 밤이 고장 났누?”
대꾸를 해야 할 체라는 자기 일이 아니라고 빗자루에 붙은 먼지를 떼고 있었다.
“내려와!”
하는 수 없이 밀라니아는 재차 강하게 명령했다. 설마 정말 소용이 없을까 싶어서.
그런데 명령을 할 때마다 그레칸이 등에 밀착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까?
밀라니아의 수선에 체라가 힐끗하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어 댔다.
“고장 난 건 아니네요. 하얗게 변한 걸 보니 제대로 작동하고 있어요.”
‘그럼?’
밀라니아는 고개를 돌린 채 그레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가만 보니 구릿빛 피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컥!”
허리를 으스러뜨릴 듯 다리가 허리에 감긴다.
“크억!”
밀라니아는 또다시 교양 없는 신음을 터뜨리는 스스로가 수치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문제의 원흉인 그레칸을 노려보았다.
그는 귀물의 강제적 명령에 저항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다리로 밀라니아의 허리를 꽁꽁 휘감고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입술 사이로는 끙끙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명령을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허나 죽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왜 이러누?’
아무리 원수라지만 겉모습만큼은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작은 아이다.
뭐 한 것도 아니고 내려가라고 명령한 것뿐인데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느낌에 밀라니아는 기분이 찝찝해졌다.
“저러다가 얼굴 터지겠는데요?”
체라는 그레칸이 끙끙대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밀라니아도 동의했다.
그레칸만이 아니라 자신의 장기도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팔다리 힘을 이기지 못하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 그만……!”
거짓말처럼 그레칸의 팔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밀라니아는 대왕 문어의 여덟 다리에 갇혀 있다 풀린 느낌이었다.
그녀는 잠깐 비틀했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우아한 표정을 지었다.
밀라니아는 약간 게으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좋아하는 대마녀이나 체면은 또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무슨 일 있었나 하는 태도였다.
추잡하게 뱉어 내던 경악성은 머릿속에서 삭제했다.
체라가 밀라니아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괜찮으세요?”
“괜찮고말고.”
“정말 괜찮으세요? 아직 아프신 거 아니에요?”
“그래. 안 괜찮을 건 또 뭐가 있누. 이 정도 가지고.”
밀라니아는 태연히 말했지만 여전히 묵직한 등 뒤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왜 그러느냐, 너?”
그레칸을 향해 조용히 물었지만 그레칸은 명령이 취소된 지금이 만족스러운지 방긋방긋 웃기만 했다.
밀라니아는 못 볼 꼴을 본 듯한 기분에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제정신이 아닌 듯한 그레칸의 모습에 체라가 그럴 듯한 논거를 제시했다.
“발칸을 만난 게 충격이었던 거 아닐까요? 밀라니아 님이 사이가 안 좋다는 말을 하시긴 했지만 설마 그 지경일 줄은 몰랐어요. 추방이라니.”
“…….”
“반려를 잃은 늑대족이 끔찍하게 고통스러워한다는 건 아는데, 그래도 그렇지. 자기 자식까지 외면할 건 뭐래요.”
“감정에 충실한 발칸이니까.”
“어쨌든 늑대족도 버렸겠다 이제 그레칸은 밀라니아 님을 엄마처럼 여기는 게 아닐까요?”
체라의 아니면 말고 식의 해답에 밀라니아가 메스꺼운 표정을 지었다.
“엄마?”
밀라니아가 노려보자 실실 웃던 체라는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발칸을 물 먹인 게 어지간히 좋은가 보구나.”
체라의 기분 상태를 정확히 짚은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팔이 움직이자 체라가 당황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흠칫했다.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고 어깨 위에 턱을 올린 채 그녀에게 머리를 비비고 있었다.
그레칸의 머리카락에선 마른 흙냄새가 났다. 다리는 여전히 밀라니아의 허리를 대왕문어처럼 감고 있었다.
“그대로 두시게요?”
“안 떼어지는데 그럼 어떡하누? 이러다 말겠지.”
밀라니아는 대충 대꾸하고는 골똘히 생각했다.
그녀는 그레칸이 복종의 밤을 거부했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복종의 밤은 정신계 귀물이다. 정신에 관여하여 시전자의 명령에 따르게 하는 귀물.
‘그런 복종의 밤에 저항했다는 건 정신력이 성장했다는 증거겠느니.’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명령을 곧잘 따랐던 그레칸이 그 사이에 성장이라도 한 건가.
‘좋은 징조는 아니군.’
그레칸이 각성하는 그때에는 복종의 밤이 효과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전에는 효과를 봐야 한다는 말이다.
벌써부터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면 큰일이다.
‘아직 완벽하게 그레칸을 종속시키지 못했거늘.’
밀라니아는 힐끗, 심란한 눈으로 그레칸의 검은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당초 그녀가 계획했던 건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가깝다.
그레칸을 완벽히 훈련시켜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르도록 세뇌에 가까운 학습을 시킬 예정이었다.
‘날 엄마로 여기고 있을 수도 있단 말이지.’
원수의 엄마라, 불쾌하기 그지없는 말이지만.
스륵.
눈이 마주치자 밀라니아는 의식적으로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체라의 말을 의식한 결과였다.
“그르릉.”
그레칸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목을 울렸다. 위협적인 느낌이라기보다는 기분 좋은 목울음에 가까웠다.
‘그래. 유쾌하진 않지만 생각해 보면 이쪽도 나쁘진 않겠구나.’
누가 뭐래도 늑대족은 효심이 뛰어난 종족이니까.
등허리가 조금 뻐근했다. 그레칸이 힘을 주고 매달렸던 탓이었다.
그레칸을 내려놓을까 하다가 방금 생각한 ‘원수와의 부모 자식 관계가 미래에 미칠 영향’을 떠올린 밀라니아는 약간의 관대함을 베풀기로 했다.
‘며칠 안 갈 테니까.’
한 가지 그녀가 예상 못 한 것은, 그레칸의 집요함이었다.
* * *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마녀의 영역에 손님이 찾아왔다.
인간계라 불리는 2대륙에서 온 손님은 부강한 제국이라 불리는 르안나 제국의 재상이었다.
마녀성의 접견실, 그는 퍽 심각한 얼굴로 밀라니아에게 읍했다.
“그리하여 저희 제국에선 방법을 찾다 찾다가 결국 대마녀님께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 불로불사의 묘약입니다.”
“…….”
밀라니아는 한심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 표정이 어찌나 적나라했던지 머쓱해진 재상이 크흠, 헛기침을 했다.
‘인간들의 어리석음은 원래부터 유명했지만 이제는 하늘을 뒤집어엎으려고 하는군.’
수명은 하늘이 내려 준 것.
영생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영원히 사는 삶을 원하는 건 운명을 거스르는 일이다.
밀라니아가 내심 혀를 찰 때 진지한 얼굴을 회복한 재상은 강조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녀들의 묘약은 기상천외한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저희 대륙에도 마녀라 불리는 이들이 있지만, 그래도 마녀의 고향인 이곳보다는 못하지요.”
마녀목과 대마녀의 곁을 벗어난 그들은 차츰 마력을 잃겠지만, 연인을 만들거나 사정이 생겨 마녀성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2대륙에 잔류하게 되는 게 대부분이다.
“연금술사의 탑도 고려 대상이었습니다만, 워낙 어려운 과제이니만큼 여러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게 성공률을 높이는 방향이 아니겠습니까.”
넉살 좋은 재상의 말은 흘려들으며 밀라니아가 툭 뱉었다.
“내가 듣기로 지금 르안나 제국의 황제는 불사에 관심이 없다는데?”
한심한 나머지 은근슬쩍 말을 놓았다.
르안나 제국의 황제. 과거에도 2대륙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였던 제국의 황제는 대륙 간 맹약을 맺은 당사자였다.
재상은 밀라니아가 하대하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대꾸했다.
“욕심이 없으셨을 때는 그랬었지만…….”
“그랬었지만?”
“몇 년 전에 성혼을 하셔서 말이지요.”
밀라니아는 어리둥절했다. 결혼을 한 것과 불사를 원하는 게 무슨 관련이 있지?
‘너무 행복해서 오래 살고 싶다는 건가?’
밀라니아의 의아한 시선에 재상이 헛기침을 했다.
“황후께서 좀 어리십니다. 그거에 맞추려면…… 어쩔 수가 없지요.”
같은 남자로서 이해한다며 재상이 체념의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의 체면으로 말을 돌려 하는 재상에 비해 밀라니아는 직설적이었다.
“그러니까 어린 반려자와 잠자리할 때 힘이 달려서 불로불사의 약을 찾는다는 게 아니냐?”
재상은 황제의 추문을 염려하는 듯 머뭇거렸지만 곧 인간 아닌 마녀 앞에서 감춰서 뭐 하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인들보다 규범에서 자유로운 밀라니아는 질려 하는 기색 없이 쉽게 답해 주었다.
“한때는 정력제를 복용하기도 하셨습니다. 연금술사들이 이쪽 방면으론 의외의 재주가 있더군요. 아, 철을 금으로 만든다는 자들 말입니다.”
재상이 놀랐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다가 이내 난감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순간일 뿐이라 아무래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셔서요. 황제께서는 젊은이 때의 체력을 찾고 싶어 하십니다.”
‘욕심도 많구나.’
평생 살면서 욕심이란 ‘무한 회귀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정도밖에 모르는 밀라니아로서는 다 늙은 나이에도 욕망만큼은 정정한 황제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마녀님께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황태자께서도 손댈 필요 없이 장성하시고, 또 다른 자식인 제국도 알아서 굴러간다고 하면 별달리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많지 않습니다. 순간의 재미와 쾌락에 진심이 되실 수밖에요.”
황제의 변을 한 재상은 관심 없어 보이는 밀라니아의 시큰둥한 얼굴에 난감해했다.
“황제 폐하의 뜻을 이뤄 주신다면 르안나 제국의 이름으로 모든 지원과 도움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마녀족의 번성을 위해 마력을 타고난 여자아이들을 구해 주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밀라니아는 턱을 쓰다듬었다.
‘말을 들어 보면 꼭 불로불사의 약일 필요는 없는 것 같으니.’
그렇다면 어떻게 방법이 있을 것도 같다.
‘어차피 인간 대륙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했으니까.’
인간 대륙에 터를 잡고 산다는 앨리지를 떠올리자 결심은 더 빠르게 섰다.
“그런데 대마녀님.”
“그 개는…… 아니, 개가 맞기는 한지요?”
밀라니아는 재상의 손가락에 따라 고개를 숙였다.
언제 기어들어 왔는지 밀라니아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은 그레칸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밀라니아는 잠시 침묵했다가 대꾸했다.
“……개가 아니라 늑대로다.”
‘얘가 또 언제 여기까지 왔지?’
분명 아까 전만 해도 훈련장에서 놀아 주다 왔는데 말이다.
요즘 그레칸은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다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저기 있었던 걸 봤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면 주변에 와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
“아, 늑대를 길들이셨다니 참 대단하십니다!”
밀라니아의 속내를 모르는 재상은 순수한 얼굴로 감탄했다.
“이야, 얼굴도 잘생긴 게 과연 대마녀께서 기를 만한…….”
친근함을 표현하고 싶었든지 아니면 그저 신기했던지, 재상은 태연하게 손을 뻗었다.
밀라니아가 경고를 주기도 전이었다.
“크르…….”
재상의 손이 그레칸의 한 뼘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푸릉, 거칠게 새어 나간 콧김이 재상의 손가락을 간질였다.
유들거렸던 재상이 해쓱하게 질릴 만큼, 그레칸의 기세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그레칸.”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재상의 손을 물어뜯을까 염려된 마음에 엄중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인간의, 그것도 늙은 인간의 피부는 연약하고 물러서 그레칸의 날카로운 이빨이 스치기만 해도 만신창이가 될 터였다.
“그릉?”
그레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꼬리를 살랑살랑 휘저었다.
이제 괜찮은 줄 알고 재상이 다시 손을 뻗었다가 홱, 고개를 돌린 그레칸과 눈이 마주치고 찔끔했다.
“크르르…….”
언제 꼬리를 흔들었냐는 듯 사나운 기세가 폭발적으로 새어 나왔다. 재상은 주춤거리며 손을 거둬들였다.
성격이 더럽다는 말을 대장부답다고 대체하다니.
과연 변덕스러운 황제의 곁에서 혀로 살아남는 재상다웠다. 능란한 표현 변환에 밀라니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니. 꽤…… 위험한 개체라.”
“길들이기 쉽지 않은가 봅니다. 폐하께서 특이한 걸 좋아하시는데 흥미를 가지실 것 같군요.”
재상이 입맛을 다시며 그레칸을 흘끗거렸다.
그 눈에 탐심이 어려 있어 밀라니아는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떠올렸다.
‘불로불사의 묘약을 원한다 했으면서 오래 살고 싶지 않은 건가?’
그레칸을 탐내는 것 = 죽음.
밀라니아의 머릿속 생각은 그랬다.
그레칸의 성질머리를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희귀 소장품’으로서 그레칸을 보는 재상의 정신세계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지금은 비록 힘이 약해 이러고 있지만 그레칸은 사상 최강이라고 일컬어지는 늑대 수장이었다.
누구도 그를 길들일 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단지 그녀는 그레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영면에 들 때까지의 시간을 벌고 싶을 뿐이었다.
“그럼 대마녀님 제가 부탁드린 부분, 가능은 하실지요?”
“……적당한 게 있긴 한데.”
밀라니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하며 눈을 빛내는 재상에게 밀라니아가 도도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완성되면 황궁으로 보내도록 하마.”
“대마녀님의 능력에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군요. 저는 일단 대마녀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
“폐하께서 조금, 애가 닳으신 상태라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신혼인지라.”
멋쩍게 웃으며 찬사를 늘어놓는 재상이지만 눈동자 깊숙한 곳은 날카롭게 번뜩였다.
‘나만 믿고 있기는 무슨. 반만 믿고 있겠구먼.’
인간의 사탕발림이란.
인간족의 이중성을 알고 있기에 밀라니아는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우스웠다.
“그럼 혹시 바라는 것이 있으실까요?”
“…….”
“약소하게나마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뭘 원한 줄 알고 약소하다고 하누?”
밀라니아가 입꼬리를 우아하게 올리며 묻자 잠깐 멈칫했던 재상이 허허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댔다.
“위대한 르안나 제국에서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
“아, 황제 폐하의 정력…… 아니 영생은 빼고요.”
너스레를 떤 재상이 이내 잔잔하게 웃는 얼굴로 밀라니아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한번 들어 볼까요?”
“…….”
“뭘 원하십니까, 밀라니아 님?”
못 하는 게 없다고는 하지만 태도는 듣고 결정할 듯하다.
젊었을 때는 협상의 귀재로 이름 좀 날렸을 재상은 벌써 밀라니아의 호칭도 달리 부르고 있었다.
“사람을 하나 찾고 있느니.”
“…….”
“그녀를 찾아 줬으면 해.”
재상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황제 폐하를 위한 영약을 만들어 주시는 건데 고작 그걸로 수지가 맞을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마녀들에겐 수족처럼 부리는 패밀리어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
“직접 찾지 않으시고 왜?”
“사정이 있느니. 무슨 사정인지까지 얘기해야 하느냐?”
“당연히 아닙니다. 저희 대륙의 일이니 아무래도 저희가 움직이는 게 수월하겠죠.”
재상은 재빨리 자세를 낮추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습니다. 허면 어떤 인물을 찾길 원하십니까? 정보가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찾을 확률이 올라갑니다.”
밀라니아는 머릿속에 떠오른 그녀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현재 10살이 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니.”
“어린애를 찾으신다고요?”
“그래. 여자애고, 얼굴은…….”
밀라니아는 남주들에 비해 흐릿한 여주에 대해 생각했다.
한때는 악에 받쳐서 도대체 이 남주들이 미쳐 날뛰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동분서주했었다.
‘요정이라는 걸 알고는 놀랐고.’
천 년에 한 번 나무에서 태어나는 유일무이한 존재인 대마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요정족 역시 매우 희귀한 소수 종족이다.
밀라니아처럼 자연 친화적인 요정족에서, 앨리지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존재였다.
‘생명의 근원과 맞닿은 대상.’
앨리지의 경이로운 점을 꼽자면 그 치유력을 들 수 있었다.
밀라니아는 혈액으로 치유의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앨리지는 신체 전반을 모두 활용 가능하다.
그녀의 머리카락만으로도 어지간한 상처는 나을 것이다.
‘물론 그건 병마에 잠식당하기 전에야 가능할 테지만.’
생명체인 이상 그녀에게 매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편이다.”
입술을 달싹여 신상 명세를 기억하던 재상이 고개를 유쾌하게 끄덕였다.
“오호라, 흥미롭군요. 그럼 상세한 신체적 특징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녹색 머리에 눈동자. 얼굴은 희고, 무엇보다 좋은 냄새가 나.”
“귀족입니까?”
“아닐 확률이 크다.”
“피부가 희고 좋은 냄새가 난다면 귀족일 텐데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두고 찾아 줬으면 좋겠구나.”
“…….”
“어렵겠나?”
재상은 협상의 귀재.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재상은 곤란한 태도로 미간을 모았다.
“그럼 어쩔 수 없느니.”
거래는 끝났다는 양 밀라니아가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키자 재상이 주름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일어나냐는 얼굴이다.
밀라니아가 일어나는 기색에 그레칸은 네 다리를 활짝 펴고 그녀의 몸에 매달렸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몸에 매단 채로 재상을 오연히 바라보았다.
“…….”
“특별한 약초도 찾아야 하고, 까다로운 약이라 잠도 줄여야 하고…….”
“…….”
“이만 가 봐야…….”
“자, 잠깐만요. 밀라니아 대마녀님!”
그대로 나가려는 밀라니아에게 재상이 손을 뻗으려 했다. 그레칸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빨을 드러냈다.
“크르르!”
황급히 손을 거둔 재상의 얼굴이 곤혹스러워졌다.
“대마녀님, 까다롭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가능하다는 얘긴가?”
밀라니아가 뒤를 힐끗하고 묻자 재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했던 그였지만 이미 밀라니아에게 말린 탓에 체념한 기색이었다.
밀라니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느릿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나이가 있어서 말이야. 한번 말할 때 똑바로 말해 주면 좋겠구먼.”
재상은 떨떠름한 시선으로 밀라니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은발 머리에 반짝거리는 금색 눈, 이슬이 맺힐 듯 투명한 피부와 길쭉한 팔다리는 꼭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재상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늙은 사람 앞에서 별말을 다 하시는군요.”
“내가 자네 나이일 때 르안나 제국은 화폐란 물건을 만들어 유통했었지.”
그 말에 담긴 아득한 시간에 재상은 기함하여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렇군요. 어쩐지, 제가 나름 협상에는 재능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대마녀님 앞에서는 영 안 먹히는 것 같더니 이유가 있었네요.”
“그래서 얘기는 어떻게 되는 거지?”
“찾으시는 분이…….”
“앨리지.”
“네. 앨리지 님을 찾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재상이 결연하게 말을 맺었다. 밀라니아는 짙어진 재상의 눈빛을 통해, 앨리지를 밀라니아에게 꽤 중요한 존재일 거라고 착각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
앨리지의 마녀병이 고쳐지지 않으면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는 결국 자신의 심장을 노리게 될 터였다.
아무리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를 효과적으로 사육한다고 할지라도 가장 안심이 되는 궁극적인 해결 방안은 앨리지의 병이 낫는 거였다.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이지.’
“그럼 전 대마녀님만 믿고 가 보겠습니다.”
떠나려는 재상에게 자신과 연락할 수 있는 연락 도구를 건네었다.
“……이걸로 그 먼 거리를 뛰어넘어 소통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재상의 말 앞에는 ‘고작’이란 말이 빠진 듯했다.
밀라니아가 재상에게 건넨 연락 도구는 화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화분 속 빼꼼 피어난 새싹이다.
“내 패밀리어란다.”
“마녀의 패밀리어는 대체로 움직일 수 있는 동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반신반의하는 재상은 아무리 봐도 자그마한 새싹에 불과한 대마녀의 패밀리어를 향해 불신의 시선을 보냈다.
“그건 식물을 패밀리어로 삼는 게 매우 어렵기 때문이지.”
“…….”
“하지만 난 대마녀다. 평범하게 취급하면 곤란하느니.”
거만한 말이지만 거만하게 들리지 않았다. 당연한 말을 하는데 거만할 리가 없다. 재상은 어색하게 웃었다.
새싹이 든 화분을 소중하게 들고 재상이 떠나자, 밀라니아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시기를 점쳤다.
밀라니아는 당장 오늘 밤, 재상의 의뢰를 수행할 생각이었다.
황제의 소원.
‘영생약.’
밀라니아는 생각을 정정했다.
연금술사들이 만든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강력한 정력제 말이다.
“인간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도 힘없는 살덩이를 휘두르고 싶어 하다니.”
밀라니아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다가 어디선가 느껴지는 빤한 시선에 시선을 내렸다.
아직까지도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그레칸과 눈이 마주쳤다.
그레칸은 아무래도 네 다리로 몸을 지탱하는 게 힘든지 인간으로 탈태했다.
나체가 된 그레칸은 보다 수월하게 밀라니아의 목을 끌어안고는 물었다.
밀라니아는 잠시 고민했지만 그레칸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무시하지 않고 대꾸했다.
“……넌 알 거 없느니라.”
밀라니아는 살랑거리는 원피스를 벗고 간편한 바지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오랜만에 약초를 채집하신다고요?”
체라는 재상이 방문했을 때 마녀 육아소에서 마녀들이 새로 데리고 들어온 신생아를 보살피고 있느라 상황을 몰랐다.
밀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뭘 만드시려고요? 온갖 지병에 시달려도 먹으면 낫는다는 만병통치약? 그 어떤 불면증이라도 한 알이면 낫게 해 주는 수면제?”
밀라니아가 한창 인간들을 상대로 장사할 때 쓰던 약들이 체라의 입을 통해 줄줄이 흘러나왔다.
밀라니아는 가볍게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그거보다 더 잘나갔던 거.”
“그러면…….”
체라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정력제요?”
“밀라니아 님이 직접 만드실 정도면 황제 정도는 되나 보지요?”
“정확해. 르안나 제국의 재상이 의뢰하고 갔느니.”
“허참, 그 제국 황족들은 저주라도 걸렸대요? 어째 두 세대에 한 명은 꼭 찾아오는 것 같네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버려지고, 지나가던 마녀에 의해 마녀의 영역에 들어와 평생을 살았던 체라는 백 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인간 남자에 대해 무지한 편이었다.
정력을 향한 황제의 욕구를 저주라고 표현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밀라니아는 저주라는 단어에서 위화감을 느꼈지만 곧 별다를 것도 없지 싶어 어깨를 으쓱였다.
“초대 황제부터가 그랬으니 뭐. 오늘 갔다 올 거란다.”
“일찍 움직이시네요.”
“오늘 보름달이 뜨니까. 아, 그리고 인간들이 고맙다고 육아소를 새로 지어 주겠다고 했느니. 저번에 많이 낡았다고 했지 않았느냐.”
“좋네요. 이번에는 석재로 지어 달라고 해야겠어요. 저번에 지은 건 목재라서 쉽게 낡더라고요.”
“그거 좋겠느니. 네가 맡아서 요청하려무나.”
마녀족은 자급자족이 기본이지만 다른 종족보다는 인간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종종 이런 식으로 인간과 거래하면 마녀의 영역이 한층 화려해지고는 했다.
“그레칸도 데려가시죠?”
“걔를 왜?”
“데려가시려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걔를 왜 데려…….”
밀라니아는 말을 멈추고 뒤를 힐끗했다. 체라의 시선도 이미 그녀의 뒤를 향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밀라니아에게 따개비처럼 붙어 있는 그레칸을 가리켰다.
밀라니아가 한숨을 쉬었다.
“……내려오거라.”
나직하게 말하자 그레칸이 가볍게 땅으로 내려왔다. 걷지 못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매달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레칸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그는 희한한 차림이었다. 린에게서 받아온 옷은 세탁 중이기에, 옷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포대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는 거적때기를 걸치고 구걸에 나선 잘생긴 소년 같았다.
“안 되느니.”
무엇이 안 되는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명확했다. 그레칸은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밀라니아는 자신의 허리밖에 오지 않는 그레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밀라니아가 여성체치고는 꽤 큰 편이기는 했지만 키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밀라니아의 눈에 그레칸은 핏덩어리였다.
그런데 무어라?
“체라, 들었느냐?”
밀라니아는 체라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녀를 곁눈질했다.
낌새가 이상하더라니 아니나 다를까, 손으로 입을 막고 낄낄대고 있는 중이었다.
세상에, 대마녀 밀라니아가 성체도 되지 않는 존재에게 약하다는 말을 듣다니!
그레칸이 뭐 때문에 저렇게 말하는 건지 대강 짐작은 갔으나 밀라니아는 억울했다.
자신이 약한 게 아니라 이 세상이 이상한 거였다.
한낱 주인공들의 행복을 위한 제물에 불과한 자신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판이다.
“약하지 않단다.”
밀라니아가 화를 참고 말하자 그레칸의 눈이 의아해졌다.
“밀라니아 약하다. 쉽게 다친다. 나보다 느리고, 내 손도 잘 피하지 못한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에게 물렸던 일을 떠올렸다.
과거의 기억에 잠식되어 느려진 밀라니아가 그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자 그 이후로 그녀를 약한 개체라고 규정한 눈치였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레칸은 애잔함을 담은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둔해.”
“…….”
“그러니까 내가 보호한다.”
그레칸이 가슴을 늠름히 내밀었다.
뒤늦게 그의 존재를 깨닫고 깜짝깜짝 놀란 바 있던 밀라니아는 불시에 들어온 공격에 미숙했던 대처를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끄, 끕, 끄흡!”
체라의 숨죽인 웃음소리가 기어이 손가락 사이를 뚫고 흘러나왔다.
입씨름을 해서 뭐 하랴. 밀라니아는 기운이 빠져 체념했다.
“……네 맘대로 하거라.”
밀라니아를 설득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레칸은 뿌듯하게 웃었다.
* * *
저녁이 되기 전에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데리고 마녀숲에 올랐다.
생명의 산의 일부인 마녀숲은 인간 대륙의 약제사들이 봤더라면 환장을 할 약초들이 도처에 즐비한 신비한 곳이었다.
밀라니아가 찾으려는 약초는 하얀 꽃의 뿌리였다.
하얀 꽃은 보름달이 뜨는 절벽에 피는 꽃으로서, 음기가 강한 성질이 있어 성욕 증진에 효과적이었다.
성욕이 증진되기만 한다면 현재 인간들이 사용하는 정력제와도 큰 차이가 없으나, 한 가지 보다 효과적인 점이 있다.
‘하얀 꽃의 뿌리로 만든 정력제는 잠자리를 하면 할수록 건강해지는 특징이 있지.’
귀한 약초이기는 하지만 못 구할 약초도 아니다.
건강해지기는 하지만 인간이 본래 가진 수명을 늘려 주는 건 또 아니기 때문이다.
황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어린 황후와 건강하고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하는 것일 터.
밀라니아에게 이번 재상의 의뢰는 누워서 열매 먹기였다.
밀라니아는 다른 쓸 만한 약초가 있으면 가져갈 요량으로 설렁설렁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스락!
숲은 수천수만 가지의 생명들이 사는 생명의 보고. 가끔 산짐승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크르르…….”
밀라니아는 옆을 내려다보았다. 그레칸이 몸을 낮추고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곧 그레칸이 노려보는 곳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갔다.
바짝 섰던 그레칸의 귀가 슬그머니 내려갔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그레칸은 어떤 경우에도 밀라니아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보호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한때는 원수였던 이가 자신을 보호하는 상황이라니.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곧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 이질감을 모른 척했다.
밀라니아와 그레칸은 오래지 않아 하얀 꽃이 자주 피어나는 절벽 가까이에 당도했다.
‘여유롭구나.’
밀라니아는 쓸모 있는 약초를 채집하며 산을 올랐다.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긴 짐승의 노린내가 바람결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짐승의 노란 눈이 번뜩일 때면, 밀라니아는 걸음을 멈추고 냄새가 새어 나오는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면 나무가 스스로 움직여 건너편에 도사린 짐승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리둥절한 짐승이 주춤할 때 밀라니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산을 올랐다.
그러길 반복하자 밀라니아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크릉?”
긴장을 늦추지 못한 그레칸은 빽빽한 나무 너머 들려오는 우렁찬 짐승 울음소리에 털을 곤두세웠지만 공격은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이질감을 눈치채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어느새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르르.”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 수상했지만 달리 눈에 띄는 건 없었다.
나무가 가시처럼 촘촘히 돋아난 숲을 통과하자 주변이 환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달빛 때문이었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고 달이 머리 꼭대기에 떠올라 있었다. 둥근 달이 밀라니아의 머리 위에 반짝이는 달무리를 쏟아 내었다.
사락. 가느다랗고 하늘하늘한 밀라니아의 머리카락은 달빛을 받아 좀 더 섬세하게 반짝였다.
그레칸의 검은 눈동자에 밀라니아의 신비로운 모습이 그대로 담겼다. 바짝 서 있던 꼬리가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그러던 찰나, 그레칸은 귀를 쫑긋했다.
“크르르…….”
그레칸이 옆을 향해 몸을 낮추고 위협적으로 목을 울렸다.
전에 없이 강한 긴장감을 보이는 그레칸의 모습에 밀라니아는 그가 보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공기가 숨을 죽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언가 도사리고 있다.
‘흠, 곤란한데.’
이곳은 변변찮은 나무 하나 없는 휑한 공터였다.
발목까지 올라온 수풀이 다였고, 그걸로는 바싹 독 오른 짐승의 앞을 가로막기에 역부족이다.
“위험.”
그레칸이 경고했다. 공기 입자를 타고 전해져 오는 위협감을 느낀 밀라니아는 어둠이 움직이는 공간에 시선을 고정했다.
스륵.
곧이어 어둠 속에서 꽤 거대한 몸집을 가진 늑대들이 나타났다.
그레칸보다 족히 세 배는 더 큰 늑대가 다섯 마리나 있었다.
가장 선두에 선 잿빛 늑대에겐 산적 두목처럼 난 눈의 흉터가 있었는데, 다른 늑대보다 덩치도 반 배는 더 커서 훨씬 위협적인 기세를 내뿜었다.
대장으로 보이는 늑대는 눈을 은밀히 빛내며 그레칸과 밀라니아를 살폈다. 탐색당하는 그레칸의 털이 꼿꼿하게 곤두섰다.
“크으…….”
목울음도 좀 더 낮아졌다.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그레칸은 나이에 비해서 사냥 실력이 뛰어났다.
혼자 사냥을 하며 먹이를 조달했던 덕이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짐승들이었다.
늑대족의 독종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악바리였지만 저렇게 덩치가 큰 동류와 생사 혈투를 벌여 본 적은 없다.
반면 그레칸의 크기를 가늠한 늑대들은 눈에 비웃음을 떠올렸다.
그레칸이 저들 중 하나도 상대하지 못할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생사 혈투의 결전을 앞둔 장수처럼 그레칸의 눈은 도리어 차분해졌다.
“밀라니아.”
무슨 마법을 써야 늑대들을 상처 없이 되돌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밀라니아는 앞으로 나서는 그레칸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레칸의 눈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흡사 죽음을 도외시한 투사 같은 눈빛이다.
힘이 단단히 들어가 다부진 그레칸을 바라보며 밀라니아는 생각했다.
‘뭐라는 것인고?’
어쨌거나 그녀가 끼어들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밀라니아는 떨떠름하게 그레칸과 늑대 다섯 마리의 대치 상황을 바라보았다.
대충 자신이 저 늑대들을 상대할 테니 자신은 그 사이에 도망가라는 뜻인 듯한데.
“크릉!”
“컹, 컹!”
그레칸과 늑대가 탐색전 삼아 위협적인 목소리로 짖기 시작했다.
그들의 싸움에서 비껴나 있는 밀라니아는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지금 이 순간, 밀라니아는 늑대 수인 그레칸과 짐승의 싸움에 걸린 보상 같은 존재였다.
깨달은 밀라니아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무례한지고.’
밀라니아가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동안, 만반의 준비를 한 그레칸은 늑대 한 마리가 움직이는 동시에 앞으로 튀어 나갔다.
밀라니아에게 한마디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망가!”
‘참나.’
만약 자신이 늑대족 여자였다면 감동했을 수도 있겠다고, ‘꼴값’이란 교양 없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밀어내려고 노력하며 밀라니아는 손가락을 튕겼다.
쑥!
“흐엉!”
각기 다른 방향에서 달려들려던 늑대 앞에 나무가 생겨났다.
깜짝 놀란 늑대가 나무를 피해 간신히 몸을 옆으로 빼내었다.
활엽수에 속하는 나무는 넓은 잎을 펼쳐 산 속 작은 친구들의 불볕 그늘이 되어 주는 고마운 나무였으나, 서식지와 이곳은 꽤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밀라니아가 섬세한 마력으로 나무의 뿌리까지 이 자리에 소환한 것이었다.
대마녀의 청량한 마력에 감응하여 신이 난 활엽수는 늑대를 향해 넓은 잎을 팔락거렸다.
쑤욱!
쑥, 쑥!
파라락!
그걸 시작으로 주변의 모든 나무가 움직여 늑대의 앞을 가로막았다.
순식간에 살아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방어막에 가로막히게 된 늑대들이 ‘컹?’ 당황스럽게 짖어 댔다.
“아우우!”
사냥감을 눈앞에서 놓친 아쉬움을 담은 억울한 하울링까지 터져 나왔다.
서성이는 기척이 전해져 왔지만 밖으로 몸을 빼는데 성공한 늑대는 없었다.
“컹?”
하마터면 나무에 코를 박은 뻔한 그레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무 여러 그루 앞을 서성였다. 킁킁, 냄새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포기한 늑대들이 떠나 버려서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
어리둥절하게 밀라니아를 흘끗했지만 그녀는 이미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타다다닥.
그레칸은 서둘러 밀라니아의 옆으로 뛰어갔다.
곁에 온 그레칸을 힐끗 내려다보았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으며 밀라니아는 점점 더 높은 곳으로 걸어갔다.
밤이 되자 맹수들이 출몰하는 횟수가 늘었다. 늑대뿐만 아니라 곰이나 살쾡이도 종종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밀라니아의 옷깃 하나, 아니 근처에도 올 수 없었다.
심지어 어떤 맹수는 밀라니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공격 의사를 누그러뜨리고 그녀의 다리에 등줄기와 꼬리를 부비적거리기도 했다.
“끼잉끼잉.”
경계 태세를 풀지 않았던 그레칸은 황홀한 표정으로 밀라니아의 주변을 배회하는 살쾡이를 보고는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마침내 숲의 존재들은 밀라니아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마침내 긴장을 풀고 순해진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뒤를 쫄래쫄래 따랐다.
밀라니아는 절벽을 구석구석 뒤졌지만, 한 시간째 하얀 꽃이 발견되지 않자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귀찮게 됐구나. 이번에 못 구하면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하얀 꽃은 달빛이 많이 쬐는 곳을 주서식지로 삼는 습성이 있었다.
달빛이 항상 같은 곳을 비추지는 않으니 고정된 자생지를 갖지 못한다. 그러니 채집에 꽤 애를 먹이는 식물이기도 했다.
절벽 곳곳을 살피는 밀라니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한자리에 선 채 절벽을 훑던 밀라니아의 눈이 반짝였다.
“저기 보이는군.”
하얀 꽃은 하필이면 절벽 중간에 떡하니 피어 있었다.
“골치 아픈 곳에 폈느니.”
맞은편의 깎아지른 절벽 한가운데 핀 상황이라 빗자루를 사용하기도 애매했다.
저기를 올라갔다가는 빗자루가 절벽에 긁혀 상처가 날 게 뻔했다.
밀라니아는 하얀 꽃을 무사히 채집하기 위한 방안을 고심했다.
“크릉.”
한편, 그레칸은 나무 아래에 앞발을 모은 채 누워 있었다. 거친 콧김이 바닥에 깔린 푹신한 수풀을 덮었다.
밀라니아가 움직일 때마다 검은색 눈동자가 데구루루 움직였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