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평화 조약
그레칸은 체라와 함께 밀라니아의 뒤에 시립했다.
그의 눈이 성질을 내는 발칸에게 잠시 닿았지만 눈빛은 무생물을 보는 듯 무감했다.
“약속 시간보다 얼마나 늦었는지, 지금…….”
“밀라니아까지 왔으니 회의를 시작하죠.”
평소였다면 발칸이 직설적으로 밀라니아를 비난하고, 스칼렛은 발칸의 무식함과 밀라니아의 교양 없음을 교묘하게 비꼬았겠지만 오늘은 조용했다.
밀라니아는 달라진 스칼렛의 태도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르베리안즈를 나한테 맡긴 걸 의식하고 있누.’
르베리안즈를 위해 밀라니아가 대충 둘러댄 대륙 일통까지 지지하겠다고 선언한 스칼렛이다. 마녀족에 우호적으로 돌아섰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밀라니아는 박쥐족의 은인이 될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기분이 좋을 만도 했지만 밀라니아는 도리어 얼굴 근육이 빳빳해졌다.
‘그레칸과의 일을 절대로 숨겨야겠느니.’
르베리안즈 때문에 밀라니아를 신경 써 주는 스칼렛이다.
소중한 후계이자 혈족인 르베리안즈가 그레칸에게 발목을 물리고 호수에 버려졌다는 걸 안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반면 발칸은 차분한 스칼렛의 반응을 예사로 넘기지 않았다.
“이상한데? 오늘따라 얌전하니까.”
의심스럽게 가늘어진 발칸의 사나운 눈매를 쳐다도 안 본 스칼렛은 그런 말 자체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중요한 얘기를 하러 모인 거잖아요. 혼자 성질을 내려면 밖에 나가 더러운 털이나 씻고 와요.”
“뭐 이 여자야?”
그리고 이전 회의에서의 싸움이 반복되었다.
크엉크엉대는 발칸의 목소리와 땍땍거리는 반박이 빠른 속도로 오갔다.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는 두 수장을 보고 있는 밀라니아는 입이 근지러웠다.
침묵 마법을 난사하여 평화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대마녀는 자연의 일족.
그 방법이 다소 파괴적이든 온건하든 간에.
“이러다가 시일이 더 늦어지겠어요. 얼른 협정 회의를 시작하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발칸이 흥, 코웃음을 쳤다.
“협정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건 스칼렛 저 여자가 먼저 사과를 한 뒤에야 가능해. 박쥐족이 나대는 것 때문에 우리 늑대들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고 있는지 아시오? 스트레스를 받아 한창 커야 할 놈들의 털이 자라다 만 것처럼 짤막하다고.”
발칸이 스칼렛을 싸늘하게 응시하자 스칼렛이 비뚤어진 모자챙을 반듯하게 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리가 시작하기 전에, 먼저 시비를 건 것은 늑대들이니 사과를 받으려면 우리가 먼저 받아야지.”
“무슨 소리하는 거야? 박쥐족 여자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요?”
“늑대들이야 겉으론 고고한 체하지만 실은 무신경하고 둔한 놈들 천지이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니면, 먼저 시비를 건 것도 까먹었다던가?”
테이블을 짚은 발칸이 으르렁댔다.
“당장 그 말 사과해, 스칼렛!”
“당신이야말로 너희 일족의 시끄러운 하울링이나 닥치게 해!”
스칼렛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발칸의 몸에서 털이 자라나고 스칼렛의 뾰족한 송곳니가 더 뾰족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또다시 싸우기 시작하는 두 수장을 보며 밀라니아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게다가 두 수장만이 아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까. 밀라니아의 뒤에서도 이 싸움을 가만두고 볼 수 없는 누군가도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저런 더러운…….”
너까지 끼어들지 말라는 마음을 담아 밀라니아는 말했다.
“입.”
입술을 실룩거리며 싸움에 기름을 던지려는 체라는 침묵 마법이 걸려 입을 딱 다물었다.
그레칸은 회의장 내부에 어떤 고성이 오가든 관심 없다는 얼굴로, 가늘게 뜬 눈을 밀라니아에게만 고정했다.
시장통처럼 시끄러워진 회의장 안에서 마녀족만이 평화로웠다.
결국 더는 진행할 수 없게 된 그날의 회의는 그대로 끝났다.
* * *
이렇듯, 세 종족의 회의가 길어지는 것은 조정해야 할 내용이 많아서가 아니라 회의 자체가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이번의 협정 조약 회의 필요성은 다들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기에 둘째 날 회의는 첫째 날보다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두 수장이 캉캉거리며 싸우려고 들면 적절히 마법을 써 가며 중재한 밀라니아의 노력 덕에 회의는 막바지로 달려 나갔다.
어느 정도 논의가 끝내자 밀라니아는 차분한 말투로 각 종족들이 원하는 바를 정리했다.
“그러면 이제 제4회 1대륙 마녀숲 평화 조약 내용을 선언하겠다.”
“그렇게 하세요.”
“첫째, 10개체 이상으로 떼를 지어 조롱하지 않기. 둘째, 5개체 이상이 하울링하지 않기. 셋째, 10개체 이상의 종족 간 패싸움 금지가 되겠군. 이견이 있느냐?”
발칸은 조용했고 스칼렛은 고개를 저었다.
두 수장의 반응을 확인한 밀라니아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 조약으로 당분간 싸움이 날 일은 없겠고.’
“대마녀로서 내가 이 조약을 공증하겠다.”
밀라니아가 은색 지팡이를 소환해 휘두르자, 허공에 글자가 저절로 생겨났다.
방금 밀라니아가 말한 조약 내용이다.
<제4회 마녀숲 평화 조약>이란 검은색 글씨 아래 조약 내용이 길게 이어졌다.
밀라니아는 수장들이 협약서를 다 읽어 볼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가진 뒤 지팡이를 휘둘렀다.
글자가 하얗게 빛나며 폭발하듯이 터지고, 산란한 빛의 입자가 위로 솟구쳐 올랐다.
회의장 바깥까지 오른 빛의 입자는 사방으로 빠르게 비산했다.
“모든 1대륙인들은 지금의 조약 내용을 알게 될 것이니.”
개정된 조약을 두 수장에게 선언하고 대륙에 공포하는 것까지 마친 밀라니아는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보이는 것과 달리 상당히 게으른 그녀에게 1박 2일의 일정은 적잖이 무리하는 편에 속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른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숨길 수는 없어 세 수장 중 가장 먼저 일어난 건 그녀였다.
우아하게 몸을 일으키자 체라와 그레칸도 밀라니아를 뒤따를 준비를 했다.
그때 문득 스칼렛이 밀라니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밀라니아, 그런데 그 늑대는 어디 있죠? 저번에 내가 마녀족을 찾아갔을 때 봤었던 그 새끼 늑대 말이에요.”
막 몸을 돌리려던 밀라니아가 멈칫했다.
“발칸을 만나는 날이니, 오늘 데려올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제 일족과 관련된 일임을 짐승 같은 촉으로 눈치챈 발칸이 인상을 쓰고 밀라니아와 스칼렛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늑대?”
“밀라니아, 그러다가 어영부영 넘어가지 말고 이 기회에 확실히 늑대족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걸 알려요.”
스칼렛은 이 기회에 마녀족이 발칸에게 빚을 지우면서, 동시에 발칸을 엿 먹이려는 의도였겠지만 밀라니아만 곤란한 일이었다.
“흥,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은혜 운운하는 걸 보니 쓸데없는 말이나 하는 거겠군.”
발칸이 코웃음을 치자 스칼렛은 상대하기 싫다는 듯 여전히 밀라니아만 보고 얘기했다.
“늑대족은 고고한 체하는 족속들이라 다른 종족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도 잘 인정하지 않아요.”
“…….”
“우리도 예전에 위험에 처한 어린 개체를 도와주었다가 감사의 인사는커녕 욕이나 먹었지 뭐예요. 수작을 부린 게 아니냐 하면서 말이죠.”
발칸이 얼굴을 붉혔다.
“스칼렛! 그때는 네가 우리 아이에게 이상한 짓을 했잖아!”
“이상한 짓이라니? 설마 그 늑대가 우리 아이에게 반한 게 우리 때문이라는 거예요?”
“고고한 척하는 천박한 털북숭이. 개중 눈깔이 제대로 달린 놈이 있었던 거죠.”
“고대 적부터 인간을 유혹하는 법이나 배우고 다니던 천박한 족속들이니,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늑대가 넘어가는 것도 흠은 아니지.”
“유혹하는 법은 배우는 게 아니라 타고나는 거예요. 유혹하지도 않았는데 반한 걸 보면, 우리의 태생적인 마력도 이기지 못할 정도로 허약한가 보군요.”
“이 여자가 하는 말마다 기분 잡치게…….”
발칸이 으르렁대기 시작하자 스칼렛의 호위병들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평화 조약이 맺어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다시 싸움이 일어날 분위기였다.
“무풍의 산에서는 싸움을 금지한다는 최초의 평화 조약을 다들 잊은 모양이군?”
밀라니아가 적절한 시점에 툭 뱉자, 움찔한 발칸과 스칼렛은 서로를 노려보다 각자 고개를 반대쪽으로 홱 돌렸다.
“싸움이 아니에요. 무식한 털북숭이를 상대하는 건 내 품격만 떨어뜨릴 일이죠.”
마지막까지 발칸의 속을 긁는 말을 한 스칼렛은 발칸이 날뛰기 전에 휙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다.
쾅!
한 방 먹은 발칸이 벌떡 일어나서는 씨근덕거렸다.
불편한 분위기였다.
밀라니아는 자연스럽게 이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한 말을 생각해 냈다.
“아, 스칼렛에게 할 말이 있는 걸 깜빡했느니. 나도 먼저 가 봐야겠구나.”
“잠깐.”
“스칼렛이 음습하고 꺼림칙한 여자이긴 해도 없는 말을 할 리는 없지. 그 여자가 한 말이 무슨 의미요?”
“…….”
스칼렛의 도발에 정신이 팔린 줄 알았는데 그녀가 뱉은 말을 머릿속 한구석에 단단히 저장하고 있었던 듯했다.
“말해 보시오. 우리 일족이 댁과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지.”
발칸의 의심스러운 추궁에 멈춰 있던 밀라니아는 고개를 돌려 발칸을 마주 보았다.
서늘하고 우아한 얼굴이지만.
‘이런.’
속으로는 인상을 있는 대로 구겼다.
스칼렛의 의도에 상관없이, 발칸이 아니라 자신이 엿을 먹을 상황이다.
스칼렛에게 거짓말을 한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던 밀라니아는 그날의 임기응변이 후회스러웠다.
‘비밀 엄수를 당부했어야 했거늘.’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고 벌어진 지금이다.
약간 뜸을 들인 밀라니아는 의심을 사지 않을 만큼 태연히 말을 꺼냈다.
“……별거 아니다. 마녀숲에서 길 잃은 늑대 하나를 주웠던 것뿐이니.”
가장 들키지 말아야 할 건 늑대의 영역으로 들어가 새끼 하나를 홀랑 납치했다는 거다.
자존심이 강한 발칸은 자신의 영역이 그렇게 쉽게 뚫렸다는 데 분노할 터.
괜한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마녀숲? 마녀족과 가까운 숲은 우리 일족과는 거리가 꽤 있는데.”
밀라니아가 어떤 식으로 얘기를 풀어 가야 할지 고민하는데, 아까부터 밀라니아의 뒤를 유심히 살펴보던 늑대족 청년이 발칸에게 다가왔다.
밀라니아는 청년이 발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려고 했지만 워낙 작은 소리라 파악이 힘들었다.
발칸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레칸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의심을 풀려면 우리 마녀족의 영역에…….”
시간이나 벌어 볼 참이었지만 발칸이 손을 들었다.
“잠깐.”
발칸이 손가락이 밀라니아의 뒤를 가리켰다. 손가락 끝에는 그레칸이 서 있었다.
“그 소년.”
“…….”
“왠지 낯이 익는데, 누구요?”
밀라니아는 혹여 그레칸이 발칸을 향해 ‘아빠’라고 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그레칸과 말을 맞춰 놓은 상태이긴 했지만 변수까지 통제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상대가 그레칸이라서 불안감이 한층 심화되었다.
밀라니아가 침묵을 지키자 발칸의 눈은 한층 더 의심스러워졌다.
그레칸 역시 미간에 실금 같은 주름을 잡은 채 말이 없었다.
회의장의 침묵을 깬 것은 아까부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늑대족 청년이었다. 발칸에게 그레칸의 존재를 속삭였던 자이기도 했다.
그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반신반의한 표정이 확신이 담긴 표정으로 변했다.
“그레칸. 너 그레칸 맞지?”
“……그레칸?”
“예, 로드. 제가 그레칸의 짝형제 아니었습니까. 그레칸의 냄새가 나요. 요즘 안 보인다고 했는데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그새 인간형으로 탈태할 수 있게 됐나 봅니다.”
대화를 들으며 밀라니아는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인간형을 취하고 있는 그레칸을 알아보는 늑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콩콩콩.
밀라니아의 심장이 소심하게 뛰었다.
체라가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는 시선이다.
밀라니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레칸의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얼핏 표정이 굳어졌던 발칸도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 밀라니아의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많은 생각을 떠올린 것과 달리 잇새를 뚫고 나간 말은 짤막했다.
“……맞느니.”
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차피 인간형인데 뭐 하러 인정했냐는 의문이 눈빛에 스쳤다.
하지만 밀라니아는 그녀의 의심과 달리 귀찮아서 수긍한 게 아니었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냥 오늘 해결을 보자꾸나.’
밀라니아는 평화를 사랑하는 만큼 갈등을 싫어하고 귀찮은 것도 싫어하는 대마녀였다.
만약 추후에라도 분란의 싹이 움틀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여기서 잘라 내는 게 낫다.
“……그레칸. 마녀족에 있다는 늑대가 그레칸이었군.”
발칸이 미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뜻 경멸과 자조의 표정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그는 그답지 않게 차분한 시선을 밀라니아에게 옮겼다.
“어떻게 된 일이오?”
“말했다시피 마녀숲에서 길을 잃은 아이를 구했단다.”
날카로운 목소리에 밀라니아가 사뭇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나를 취조하느냐, 발칸?”
“…….”
“내 생각에 나는 취조가 아니라 감사를 받아야 할 입장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냐?”
밀라니아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발칸은 잠시 침묵했지만 태도가 변하지는 않았다.
“당신 말의 사실 여부를 떠나 그레칸은 나의…… 일족. 그러니 데려가겠소.”
밀라니아는 할 말을 찾지 못해 가만히 있었다.
아직 그레칸에 대한 앙금이 남았는지 발칸의 태도가 떨떠름하기는 하지만, 자기 자식을 데려간다는 데 막을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그냥 보낼 수는 없지.’
밀라니아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발칸은 어느새 그레칸을 쏘아보고 있었다.
말쑥한 인간 아이처럼 보이는 그레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더러운 꼴을 하고 있잖아.”
“…….”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표정에 발칸은 열받은 얼굴이 되었다.
오랜만에 상봉한 부자 관계라기엔 퍽 삭막했다.
“본신으로 돌아가라. 어서!”
윽박지르는 발칸에게 뒤늦게 시선을 돌린 그레칸의 눈이 가늘어졌다. 발칸을 향한 눈빛이 점점 비딱해졌다.
강압과 억압만이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발칸의 목소리가 한층 강하게 터져 나왔다.
“내 말이 안 들리나.”
“…….”
“그 더러운 인간의 옷을 벗어!”
그는 역대 늑대 수장 중에서도 다혈질이라고 알려졌고, 그런 그의 역린은 죽은 라미에와 그 비극의 부산물인 그레칸의 존재였다.
발칸과 그레칸, 부자 사이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밀라니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발칸, 그레칸을 핍박하지 말거라.”
침착한 중재에 발칸은 거칠게 반응했다.
“끼어들지 마시오. 나는 지금 당신에게도 화가 많이 나 있으니.”
“화가 나 있다고?”
의아해 눈썹을 꿈틀하는 그녀에게 사나운 눈빛이 꽂혔다.
그레칸을, 또는 이 상황을 향한 분노를 모두 그녀에게 풀려는 태도였다.
“늑대족이 새끼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지금까지 그레칸의 존재를 숨겼으니 내가 화가 안 날 리가 있나.”
말이 반토막으로 짧아지자 밀라니아의 기다란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마치 사라진 새끼 늑대를 열렬히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발칸이 그렇다는 듯이 입술을 실룩였지만 밀라니아의 눈빛은 싸늘해지기만 했다.
“글쎄? 난 지금까지 늑대족의 어린 개체가 사라졌다는 말은 못 들었거늘.”
“…….”
“사라진 새끼를 찾아 달라는 협조 요청? 역시 받지 못했지.”
“우린 마녀의 협조 따위 받지 않아.”
발칸은 기분이 상한 티를 숨기지 않으며 으르렁댔다. 밀라니아는 딱하다는 얼굴로 사실을 짚었다.
“잃어버렸다는 걸 인지는 했느냐?”
“……그래.”
발칸이 마뜩잖은 태도로 대꾸했다. 밀라니아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렇다면 어째서 찾지 않았지?”
질문은 던졌지만 답은 필요 없었다.
‘그레칸이 꼴 보기 싫으니까 그랬겠지.’
유일하게 사랑하는 반려를 그레칸 때문에 잃었다고 생각하는 발칸에게 그레칸은 생각하기 싫은 존재일 터였다.
역시나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는 발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점점 못마땅하게 변하는 얼굴을 보면서도 밀라니아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그대에게 나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고?”
평범한 어투의 질문이었지만 이 상황의 맹점을 품고 있었다.
발칸이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불쾌감을 표출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오금이 저릴 만한 기세에도 밀라니아의 냉랭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마녀인 그녀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발칸의 위협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세계의 사랑받는 주인공들을 제외하고, 사실 밀라니아는 누구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그대 일족의 어린 개체를 보호한 자.”
“…….”
“스칼렛처럼 내가 그대를 무도한 자로 매도하길 바라느냐?”
눈썹을 꿈틀대며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발칸은 스칼렛이 언급되자 얼굴을 구겼다.
그러나 흉포한 기세와 달리 섣불리 밀라니아에게 덤벼들지는 않았다. 그래 봤자 손해라는 인식은 있는 것이다.
“내게 혀 놀리는 솜씨가 없다는 건 알고 있소.”
발칸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렸다.
“그러니 다른 말 필요 없이 내가 원하는 건 하나요. 그레칸을 내놓으시오. 어찌 됐건 그 앤 나의 일족이니.”
발칸이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그레칸을 힐끗했다가 밀라니아를 응시했다. 밀라니아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
이런 상황에서 그레칸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발칸에게서 그레칸을 데려가는 명분을 무력화시켜야 했다.
“그레칸은 그대의 일족이 맞느니. 허나!”
“…….”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것도 확실하지.”
뭐라고 항변하려는 그의 눈앞에 손을 척 올려 말문을 막은 밀라니아가 하려던 말을 이었다.
“내가 돌보지 않았으면 살기 위해 사냥하다 멧돼지에게 받쳐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설사 죽지 않았더라도 험난하고 고단한 시간을 보낼 게 분명하니 인도적인 차원에서 내가 어찌해야 할꼬.”
“…….”
“이제야 보호받아 마땅할 아이로서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데, 그런 그를 돌려줘야 하는지 의문이구나.”
“…….”
“대륙의 모든 어린 개체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내 입장에서는 고민이 클 수밖에 없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에 방점을 둔 밀라니아가 입은 열되 말은 없는 발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밀라니아가 선택한 명분은 어린 개체 보호법.
아무리 사이가 안 좋은 종족 간이라도 새끼는 보호해야 한다.
박쥐족이 늑대족의 어린 개체를 만났을 때 손수 거두지는 않더라도 공격하지는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 당신네 일족에서는 잘 보살필 수 있다는 거요? 음흉한 마녀족이 우리 늑대족을?”
간신히 할 말을 찾은 발칸은 흥, 코웃음을 쳤다가 무심코 그레칸을 쳐다보았다.
키도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훌쩍 크고, 비쩍 말랐던 뺨도 보기 좋게 살이 올라와 있다.
비록 꼴 보기 싫은 인간의 옷을 입고 있기는 했으나 상태가 썩 괜찮아 보이는 건 부정하기 힘들었다.
떨떠름해진 발칸을 보며 밀라니아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눈이 있으면 그레칸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겠지.’
자신은 원수라도 기본적인 생활권은 보장해 준다.
아내를 잃은 건 안타깝지만 그 분노를 죄 없는 새끼에게 풀고 있는 발칸의 모습이 밀라니아에겐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 분노의 대상이 자신의 원수인 그레칸임에도 말이다.
“고민이 끝났도다.”
“…….”
“그레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 아이가 성체가 될 때까지는 내가 데리고 있는 게 낫겠어.”
발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늑대족이 더 잘 키워 줄 수 있다느니 하는 양심 없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물러나지도 않았다. 시커멓게 가라앉은 눈매 주변으로 털이 수북하게 자라났다.
팔뚝과 허벅지에 힘이 팽팽하게 들어가고, 그의 주변 공기가 긴장으로 흔들렸다.
이성의 논리 대신 감정의 욕망에 따르기로 결심한 모습이었다.
“힘으로라도 뺏어갈 거요.”
그 말과 동시에 발칸이 움직였다. 거친 털이 솟아나고 뾰족하고 단단한 손톱이 달린 손은 살짝만 스쳐도 피를 볼 듯했다.
휘두르는 손 주위로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의 손이 노리는 건 그레칸이었다.
“어딜!”
밀라니아는 재빨리 지팡이를 휘둘렀다.
깡!
발칸의 손톱이 밀라니아의 은색 지팡이에 맞닿자 철판을 때리는 것처럼 기괴한 소리가 났다.
발칸은 지체 않고 손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손톱이 밀라니아의 팔을 갈라 버릴 것처럼 휘둘러졌다.
발칸의 손톱이 밀라니아를 공격하는 그 순간, 밀라니아의 지팡이 뒤에 서 있던 그레칸이 뛰어올랐다.
슈왁!
삽시간에 검은 늑대로 변한 그레칸이 발칸의 손목을 물어뜯었다.
아직 어린 개체답게 여물지 못했지만 생존용 사냥으로 인해 충분히 날카로워진 이빨에 단단한 피부 가죽이 썰려 나갔다.
피가 솟구치는 손목을 붙잡은 발칸이 눈을 매섭게 치떴다.
“그르르…….”
콧잔등에 주름이 잔뜩 간 사나운 표정은 밀라니아에게 다가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결연했다.
“마녀에게 손대지 마라.”
적나라한 적의를 느낀 발칸의 안색이 일순 딱딱하게 변했다.
그레칸의 짝형제였다는 늑대 청년이 대경해서 소리쳤다.
“그레칸! 감히 수장께 뭐 하는 짓이냐!”
으르렁. 늑대로 변하기 직전인 그의 목구멍에서 사람 같지 않은 울음이 흉포하게 끌어 올랐다.
명확한 문장에 청년의 눈이 커졌다.
처음에는 인간의 말에 미숙했던 그레칸이었지만, 밀라니아와 지내는 동안 점차로 능숙해졌다는 것을 모르는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당황하는 것도 잠시, 그레칸의 말뜻을 깨달은 청년이 표정을 굳혔다.
그레칸이 쐐기를 박았다.
“내겐 수장이 없다.”
그레칸의 새카만 눈동자는 차가웠고 일말의 치기도 없었다.
장난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늑대 청년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도리어 입을 다물었고, 대신 극도의 분노로 냉정해진 발칸이 입을 열었다.
“그건 늑대 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겠다는 말이냐.”
늑대족의 수장으로서 하는 말이라 무게감이 있었다.
그레칸이 비웃음을 보이자 입술이 올라가 하얀 송곳니가 드러났다.
“나는 늑대족이다. 그저 당신을 수장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그레칸!”
무례한 말에 청년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지만 그레칸의 감정 없는 눈과 마주치자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하나는 명확했다. 그레칸은 그들에게 조금의 애정도 없었다. 청년과 같은 사실을 깨달은 발칸의 눈이 일그러졌다.
“너는…….”
발칸은 무의식적인 듯 그레칸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크르르…….”
그레칸이 몸을 낮추고 목을 울렸다. 그 이상 다가온다면 공격할 기세였다.
자리에서 멈춘 발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밀라니아는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거대한 분노와 회한, 약간의 서글픔을 눈치챘다.
‘자신이 잘하고 있던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나 보지.’
혹여 그레칸에게 진심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해서 그레칸을 흔들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 후, 흔들렸던 표정을 갈무리한 발칸이 엄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나를 수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방랑자가 되는 수밖에 없지.”
“…….”
“우리 일족의 수장은 단 하나. 따르지 않는 자는 추방뿐이다.”
추방.
일족에서 추방된다는 건 그 수장이 살아 있는 한은 영원히 일족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추방된 존재들은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기 마련이었다.
늑대족 청년은 설마 발칸이 추방을 입에 담을 줄은 몰랐던지 놀란 표정이었다.
다혈질인 수장이 홧김에 뱉은 게 아닐까 의심하는 듯했으나 발칸의 표정은 무거웠고 담담했다.
진심이라는 뜻이다.
체라 또한 얼굴을 굳혔다. 마녀족을 열렬히 사랑하는 체라 또한 추방이란 말이 남다르게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숨이 막힐 만큼 무거운 분위기였다. 밀라니아의 표정도 분위기에 맞게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나 속내는 사뭇 달랐다.
‘그래그래. 그대로 놓고 가거라.’
추방이란 말에 놀라기는커녕, 밀라니아는 이 진지한 분위기에 감화된 그레칸이 마음이 흔들려 발칸을 따라갈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부자간의 인연이 영영 끊어지기를 열렬히 응원했다.
부모 없이 나무에서 태어난 밀라니아는 자연처럼 물 흐르듯 살아왔고, 살아 있는 존재가 느끼는 감정에 무지한 편이었다.
부모 자식 간의 정 또한 사랑처럼 그녀가 모르는 감정 중 하나.
다만 모든 생물체들이 부모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것은 알기에 마음이 불안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분위기야. 그레칸의 마음이 정말로 바뀌었나?’
밀라니아는 겉으로는 우아하게 차가운 얼굴을 유지한 채, 힐끗 그레칸을 곁눈질했다.
“추방을 받아들이겠나?”
“…….”
묵직한 분위기로 묻는 발칸은 그레칸이 거부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밀라니아는 발칸이 자꾸만 그레칸을 흔들자 그가 못마땅해졌다.
평소처럼 다혈질적인 모습을 보여 발광이라도 하기를 바랐는데 한 일족의 수장답게 차분한 모습을 보이는 게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밀라니아 역시 마녀족의 수장다운 품위를 유지해야 하므로 발칸이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지는 못했다.
모두의 관심이 그레칸의 대답으로 옮겨졌다.
마침내 그레칸이 입을 열었다.
“상관없다.”
경악이 섞인 침묵이 휘몰아쳤다. 늑대족 청년은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으음, 목을 울린 발칸은 잠깐 숨을 고른 후 무겁게 말을 꺼냈다.
“너는 방랑자가 될 것이다.”
“역시 상관없다.”
“…….”
“거기 속해야지만 내가 늑대족인 것은 아니다.”
소신을 밝히는 그레칸은 어린 개체였음에도 묘하게 성숙했다.
훗날 그가 늑대족 하나하나를 완벽히 통솔하는 수장이 된다는 것을 아는 밀라니아는 이런 그레칸의 모습이 놀라지 않았지만 늑대족 청년은 못내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또 한 번 침묵한 발칸이 심지 단단한 음성을 냉랭히 뱉었다.
“그렇다면 너는 오늘부로 내가 이끄는 늑대족의 일원이 아니다.”
“…….”
분위기가 한층 싸늘해졌지만 그레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반응을 보겠다는 듯 그레칸을 지그시 바라보던 발칸이 무뚝뚝하게 몸을 돌리자 늑대족 청년은 그 뒤를 따르면서도 미련이 남은 눈으로 그레칸을 흘낏 돌아보았다.
저벅저벅.
세 명의 늑대족이 회의장을 걸어 나갔다.
문이 열리고 나가기까지, 발칸은 그레칸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고 그건 그레칸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자의 인연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쾅, 문이 닫히자 회의장은 묘한 정적에 휩싸였다.
“밀라니아 님…….”
대범했던 체라지만 천륜이라는 부자의 인연이 어그러진 현재 상황은 난감한 듯 말을 끌었다.
졸지에 명목상의 부친이나마 잃은 그레칸을 힐끗한 체라가 밀라니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떡하려고 그러세요? 언젠가 늑대족에게 돌려보낼 생각 아니셨어요?”
그건 맞다.
하지만 그 전에는 아니었다.
이 세계는 어떤 식으로 운명을 굴릴지 모르니 그레칸에게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으니까.
바라던 대로 됐지만 늑대족이 떠난 자리에 홀로 서 있는 그레칸을 보고 있자니 묘한 감흥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괜찮으니.”
밀라니아는 체라에게 말하며 동시에 그레칸을 바라보았다.
체라는 밀라니아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깜박였다.
“잘했다, 그레칸.”
뜻밖의 칭찬에 그레칸이 고개를 들었다.
수장인 발칸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맞섰지만 역시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 건 아닌 듯 씁쓸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레칸이 나중에라도 늑대족에 향수를 느껴 도중에 도망갈까 봐 밀라니아는 더욱 다정하게 말했다.
“네가 새로운 정착지를 찾을 때까지 너의 정착지는 마녀의 성, 내 곁이 될 것이야. 널 버려둔 일족 대신 내가 너를 품으마.”
“…….”
“물론 네가 원한다면 말이다.”
눈을 깜박인 그레칸이 느릿하게 다가와 밀라니아의 다리에 몸을 기대었다. 약한 무게감이 전해져 왔다.
밀라니아는 주춤했지만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어 그레칸의 몸을 안아들었다.
어느새 혼자 힘으로 들기에도 무거워진 그레칸이었지만 내려놓지는 않았다.
몸을 굳힌 그레칸은 이내 힘을 빼고 그녀에게 몸을 완전히 맡기었다.
턱을 밀라니아의 어깨에 내려놓고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
“…….”
토닥토닥.
밀라니아는 그가 감정을 갈무리하는 걸 기다리며 그의 단단한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지나치게 밀접한 자세였지만 그레칸은 다른 때와 달리 약간의 불편함도 드러내지 않았다.
새액새액. 몰아쉬는 숨은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을 찾아갔다.
그레칸이 스스로 몸을 뗄 때까지 기다리려는 찰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고른 숨소리에 섞여 나왔다.
“원한다.”
“……응?”
“밀라니아. 당신 곁에 있기를 원해.”
* * *
무풍의 산에서 내려왔을 때, 빗자루를 타고 내려가던 밀라니아는 스칼렛을 발견하고 비행을 멈추었다.
거기 서 있었던 게 우연이 아니었던지 스칼렛은 밀라니아를 발견하고 손을 들어 제 존재를 알렸다.
“진즉 떠난 줄 알았거늘.”
“기다리고 있었어요. 원래부터 논의하고 싶었던 것이었는데 발칸이 있어 말하지 못했어요.”
스칼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밀라니아의 앞에 있는 그레칸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레칸은 스칼렛의 묘한 눈빛에 크르릉 목을 울렸다. 그런 그레칸을 깔아 보며 스칼렛이 밀라니아에게 말했다.
“이제 보니 이 소년이 그 늑대인가 보군요.”
밀라니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발칸도 아는 상황에 숨길 필요가 없었다.
“발칸과 대화를 했을 텐데. 아직 데리고 있다는 건?”
“내가 계속 데리고 있기로 했느니.”
“당신이, 늑대를요?”
딱히 숨길 얘기도 아니라 밀라니아는 순순히 말했다.
스칼렛은 당연히 그레칸이 늑대족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는지 조금 놀란 듯했다.
그녀가 밀라니아와 그레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의외네요.”
말뜻을 이해 못 한 밀라니아는 어리둥절했지만 곧 알아들은 척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견 네 속을 다 알고 있다는 태도에 그럴 줄 알았다며 스칼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마녀들이 대체로 평화로운 성품을 가지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이가 나쁜 늑대족의 아이까지 품을 정도로 마음이 넓은지는 몰랐어요.”
“…….”
“하긴 그러니까 빈말로도 사이가 좋다 말할 수 없는 내게도 먼저 손을 내민 거겠죠. 놀랐어요, 정말. 감명도 받았고.”
스칼렛이 잔잔하게 웃었다. 냉혈한 스칼렛이 웃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밀라니아는 스칼렛이 보내는 신뢰의 시선에 침묵을 지켰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스칼렛이 착각하고 있는 바를 깨달았지만 밀라니아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밀라니아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은 딱히 인도적이거나 박애주의의 의도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명백한 착각이었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였다.
밀라니아는 평화를 사랑하는 대마녀이나 그만큼 귀찮은 것도 싫어한 탓에 이제까지 각 종족들의 갈등을 해결하려고 아등바등 노력한 적은 없었다.
중재하려는 건 시늉뿐, 방관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갈등이 싫은 건 맞아서, 그녀는 스칼렛이 보이는 호의가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밀라니아는 자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듯 고개를 느릿하게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러니 더 믿음이 가요. 내 아이도 잘 부탁해요. 건강은…… 한가요?”
스칼렛은 르베리안즈가 보고 싶어 애간장이 타는 눈으로 밀라니아를 주시했다.
박쥐족의 수장으로서 사이가 나쁜 마녀족의 영역을 일상적으로 드나들 수 없는 것이겠지.
밀라니아는 자신을 기다리면서까지 르베리안즈에 대해 묻고 싶은 스칼렛의 마음을 짐작했다.
이때에는 안심시킬 수 있을 만한 말을 해야지 옳다.
‘나를 못 믿어서 데려간다고 하면 그건 또 그거대로 곤란하니까.’
숲속으로 쓰레기처럼 끌려가다 수거되는 것처럼 호수에 버려졌지만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진상을 꽁꽁 숨긴 밀라니아가 온화하게 말하자 스칼렛은 아쉬운 듯 머뭇거렸다.
“혹시 언제쯤 완전히 나을 수 있을까요?”
르베리안즈가 수면병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때를 묻는 것이다.
“며칠 되지 않아 섣부른 질문인 걸 알아요. 하지만 아이를 둔 어미의 마음이 이렇답니다. 초조하고 괜한 걱정이 들죠.”
밀라니아는 눈을 깜박였다.
전생의 르베리안즈는 약 15년간 수면병을 앓았다.
이번에는 앨리지의 등장 시기에 맞춰 10년으로 투병 기간을 조정할 예정이었다.
‘그 정도면 르베리안즈가 앨리지를 만나기 전에 세뇌를 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니까.’
“한 10년…….”
“10년이나요?”
스칼렛의 얼굴이 굳어졌다. 스칼렛은 르베리안즈가 15년 넘게 수면병을 앓게 된다는 것을 모른다.
밀라니아가 말한 투병 기간은 5년이나 단축한 시간이었지만 원래의 투병 기간을 모르는 스칼렛으로서는 믿기지 않을 만큼 긴 시간일 터였다.
스칼렛의 눈에 의심이 번져 나갔다. 불안한 마음에 고질병인 의심증이 돋은 것이다.
“……년보다는 조금 빠르게 일어날 수 있을 것 같구나.”
밀라니아는 자연스럽게 말을 정정했다.
“그만큼 르베리안즈의 상태가 심각하느니. 수면병에 대해 많이 알아봤으니 얼추 예상은 했을 게 아니냐?”
“그래. 일반적인 수면병은 아무리 깊은 잠에 들더라도 지속적으로 자극을 가하면 잠깐이라도 일어나지. 하지만 르베리안즈는 그렇지 않잖느냐.”
밀라니아가 조곤조곤 설득하듯 말하자 스칼렛의 눈이 혼란스러워졌다.
“그건 맞아요. 하지만 10년은 너무 긴 기간이에요.”
“그것도 짧게 줄인 거야, 스칼렛. 날 믿고 기다리려무나. 내가 책임지고 그를 깨울 테니.”
밀라니아가 다정하게 말하자 스칼렛의 눈이 흔들리더니 곧 한숨을 쉬었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네요. 믿고 맡기겠어요, 밀라니아.”
“르베리안즈의 상태를 묻기 위해 날 기다렸던 게냐?”
스칼렛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있어요. 다른 용건도 있지만요.”
“…….”
“말란도르. 그 난잡한 흑계인에 대해 논의하고 싶은 문제가 있어요.”
‘말란도르?’
뜻밖의 이름에 밀라니아는 눈썹을 꿈틀했다.
복종의 밤을 양도받은 후엔 생각도 안 한 그의 이름이 왜 스칼렛의 입에서 나온단 말인가.
“밀라니아 당신이 그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죠?”
“친분은 아니지만…….”
“아니라고요?”
스칼렛이 의아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다지 친하지는 않아.”
밀라니아는 정정했다. 말란도르는 밀라니아에게 있어 유황불의 입구를 지키는 적격자로서 마녀숲을 잠시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세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우라고도 할 수 있었다.
‘발칸이나 스칼렛보다는 친밀한 편이긴 하니.’
발칸과 스칼렛은 친한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지도 않으므로 친밀하단 말은 사실상 말란도르가 적은 아니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가요? 그자는 가장 친애하는 존재로 당신을 뽑았는데 당신은 친하지 않다니 이상하군요.”
스칼렛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어쨌든 우리 아이들의 말에 따르면 그자의 동태가 요즘 수상하다고 해요.”
“수상하다고?”
밀라니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말란도르는 존재 자체가 수상한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암흑계가 열릴 수 있으니 입구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마녀숲에 자리 잡은 자.
흑계의 괴짜라지만 엄연히 한 세계의 공작인 자가 그렇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도 수상했다.
“시체들이 쌓인 곳에서 자주 목격되고 있어요.”
“…….”
스칼렛의 붉은 눈동자가 새빨갛게 빛났다.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그녀와 달리 밀라니아는 아직도 심각하지 않았다.
“사령술을 다루는 그가 시체들이 모인 곳을 찾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닐 텐데?”
“사령술을 위한 거였으면 수상하다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 더 수상한 건 그의 목적이에요.”
“…….”
“그가 붉은 꽃을 수집한다는 말이 있어요.”
“……붉은 꽃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신중한 스칼렛이 이렇게 따로 불러 얘기를 하나 싶었던 밀라니아의 눈이 커졌다.
붉은 꽃.
붉은 꽃은 시체가 쌓인 곳에서 자라는 저주받은 식물이었다.
서식지부터가 꺼림칙한데 붉은 꽃은 죽은 존재의 남은 생명력을 빨아들이며 자랐다.
붉은 꽃은 다른 존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생명력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었다.
‘실존하는지도 모르는 그 꽃을 어떻게. 아니, 그것보다는 왜?’
주목해야 할 건 붉은 꽃의 수집 목적이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법칙을 거스르는 금지된 대법.
붉은 꽃은 그 금지된 대법의 재료로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가 되는 점은, 붉은 꽃은 채집자의 생명까지 깎아 먹는다는 것.
역사적으로 붉은 꽃을 사용했다고 알려진 이들은 대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괴짜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그가 혹여나 이미 죽은 존재들을 깨우려는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어요.”
“다시 깨어나면 안 되는 이들을 말이냐?”
“그래요.”
밀라니아는 스칼렛이 걱정하고 있는 부분을 바로 깨달았다.
이 세상은 죽음과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
만약 고대로부터 명성이나 악명을 떨친 이들을 되살린다면 필히 혼란이 야기될 터였다.
굳이 왜 그런 짓을 할까 싶지만, 말란도르가 대상이라면 의심이 된다.
그는 가끔씩 천상의 미모를 갖고 요절했다는 고대의 미녀들을 노예처럼 부려 보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