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2권)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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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왕자님

위험한 맹수에게서 밀라니아를 지킬 필요도 없겠다, 할 일이 없는 그레칸은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했다.

그 순간이었다. 하품으로 촉촉해진 그레칸의 눈에 밀라니아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밀라니아!’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튀어 나갔다.

빗자루 대신 마법을 쓰기로 결정한 밀라니아는 대수롭지 않게 허공에 한 발을 내딛었다.

인간 마법사는 주문을 영창하고 플라잉 마법을 사용하지만 밀라니아는 주문을 욀 필요가 없었다.

느긋하게 허공을 밟아 내려가던 밀라니아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헉, 하고 입을 벌렸다.

머리에서 끔찍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악!”

흡사 머리 가죽이 통째로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통증에 익숙하지 않은 밀라니아의 눈꼬리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어찌나 아픈지 마법도 깨져 버려 몸이 아래로 쑥 꺼졌다. 그러자 하중이 가해져 머리가 뜯어지는 고통이 더 심해졌다.

“무, 무엇이냐!”

노성을 내지르며 휙 위를 올려다보았다.

언제 달려왔는지 인간으로 탈태한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머리카락을 뜯고 있었다.

그레칸을 보자마자 밀라니아는 벌컥 성질이 났다.

‘이 자식이 미쳤는고?’

아직 성체가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레칸이 돌아 버렸나 싶은 밀라니아는 두피에서 전해져 오는 극심한 고통으로 교양을 갖출 수 없어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불그스름해진 얼굴로 그레칸이 끄응, 힘을 주었다.

“미일, 라니아, 어, 어서 올라와라.”

영문을 모르는 밀라니아가 그레칸을 자세히 보니까 당기고 있는 모양새이지 않은가.

불시에 그레칸이 저를 공격한 줄 알았던 밀라니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뭐 하는 거야. 어서 올라오라니까!”

그레칸은 초조하게 외쳤다. 밀라니아를 끌어올리면서.

상황을 파악한 밀라니아는 깨져 버린 집중력을 되찾아 마력을 돌렸다.

몸을 허공에 가볍게 띄우자 머리에서 전해져 오는 통증이 약해졌다.

플라잉 마법 덕이었지만 밀라니아의 몸이 보다 수월하게 끌려오자 그레칸의 얼굴이 환해졌다.

곧이어 그레칸과 밀라니아의 눈높이가 같아졌다.

“밀라니아 가볍다. 많이 먹어야 한다.”

진지하게 말하는 그레칸을 보자 밀라니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

‘당최 이 놈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느니.’

여전히 머리칼은 그레칸에게 붙잡힌 채였다. 그레칸은 매끈한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산은 위험하다고 했다! 떨어지면 죽는다! 방금처럼!”

“…….”

“밀라니아는 바보인가?”

훈수를 두며 저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그레칸을 보니 밀라니아는 도대체 이놈이 자신을 어디까지 오해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전생에서도 원래 이런 놈이었던가?’

집착하는 성격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미친놈인 줄은 몰랐다.

한편, ‘바보처럼 절벽 아래로 미끄러진’ 밀라니아를 구하기 위해 힘을 쓰던 그레칸은 마침내 이상한 점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밀라니아를 지탱하느라 근육이 단단히 올라붙었던 팔인데, 언제부턴가 힘이 들지가 않았다.

슬쩍, 손에서 힘을 완전히 빼 보았다. 그래도 밀라니아는 둥둥 뜬 채 그레칸을 보고 있었다.

척, 팔짱을 끼는 그녀를 그레칸은 어리벙벙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밀라니아의 머리카락을 붙잡은 채로 눈을 끔벅이다가 슬며시 밀라니아를 불렀다.

“밀라니아?”

밀라니아는 지면에 발을 내려놓는 대신 그레칸의 허리에 팔을 감고, 몸을 위로 이동했다.

허공에 둥둥 뜬 밀라니아와 그레칸. 마침내 제 상태를 깨달은 그레칸의 눈 깜박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레칸의 머릿속으로 진작 깨달았어야 할 몇 가지 사실이 문장으로 떠올랐다.

하나, 밀라니아는 비행 마법을 쓸 줄 안다.

둘, 절벽으로 떨어진 건 실수가 아니었다.

셋, 고로 자신이 착각했다.

밀라니아가 절벽 너머로 사라지는 것만 보고 헐레벌떡 달려왔던 그레칸은 입을 꽉 다물고 눈동자를 빙그르르 돌렸다.

침묵이 감돌았다.

밀라니아는 한마디만 했다.

“가지가지 하느니.”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레칸이 고개를 떨어뜨려 시선을 피했다.

지상으로 몸을 이동한 밀라니아가 그레칸을 내려 주었다.

그제야 밀라니아의 머리카락이 그레칸의 손에서 해방되었다.

혀를 찼던 밀라니아는 그레칸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눈을 의심했다.

그레칸의 손가락 사이에서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한두 가닥이 아니었다.

그레칸이 무심코 땀이 배어 나온 손을 털자 머리카락이 후두둑 떨어졌다.

‘……!’

그레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밀라니아의 반듯한 이마에는 힘줄이 솟았다.

분위기가 스산해지자 그레칸은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밀라니아의 눈치를 보았다.

“…….”

밀라니아는 간신히 화를 참아 냈다. 그레칸이 예전처럼 앨리지 때문에 돌아 버린 건 아니라서 겨우 참은 거였다.

제 딴에는 선한 의도로 행동한 것인지라 뭐라 하기도 애매했다.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녀의 손에서도 두피에서 분리된 머리카락이 수북하게 묻어 나왔다. 하필 머리카락도 얇아서 더욱 쉽게 뽑힌 듯했다.

밀라니아는 손가락에 엉킨 머리카락을 보고 침묵했다. 그레칸이 눈치를 보다 입을 달싹였다.

“잘못…….”

“……잘못?”

“했습니다.”

양순해진 그레칸은 저도 모르게 한 번도 뱉어 본 적 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후우, 크게 한숨을 쉬며 곱게 얘기하려던 밀라니아는 여전히 두피가 욱신거리자 짜증이 확 솟구쳤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지 말거라. 머리! 머리를 쓰란 말이야.”

고상한 모습은 간데없이 이를 갈았다가 한숨을 쉬며 평정을 찾았다. 그레칸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미안하다.”

밀라니아는 우아하게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래도 한 번 쏘아붙이니 파도가 지나간 바다처럼 마음이 한결 평온해졌다.

“……잘못을 알면 가만히 있으려무나, 그레칸. 알았느냐?”

조용한 타이름에 그레칸이 이빨로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잘못을 고백했을 때와 달리 반항심이 튀어나온 모양이다.

그것도 잠시, 밀라니아가 눈을 부라리자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 후, 얌전해진 그레칸 덕분에 밀라니아는 수월히 허공을 날아 하얀 꽃을 뿌리까지 완벽하게 채집했다.

원래 세 뿌리는 더 채집할 예정이었지만 하나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두피의 둔통으로 심력이 꺾여 더 채집할 의욕도 들지 않았다.

돌아올 때는 빗자루를 이용했다. 휘이이이잉. 세찬 바람에 망토가 펄럭거렸다.

약한 고소 공포증이 있는 그레칸이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밀라니아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지만 밀라니아는 초연한 표정이었다.

어느새 그레칸이 달라붙어 있는 온기와 자세에 익숙해졌는지, 낯설지 않다는 것에 심란해졌다.

두 사람을 태운 빗자루가 마녀의 성을 향해 날아갔다.

* * *

요즘 마녀의 성에서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방은 밀라니아의 침실 바로 아래층 방이었다.

원래는 창고로나 사용했던 빈방이지만 현재는 마녀성의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쏟는 화제 중의 하나였다.

밀라니아는 방문을 열었다. 서늘한 방 안의 공기가 느껴지는 동시에 ‘까르르’ 웃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밀라니아는 이 방에서 웃음소리가 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아 얼굴을 굳혔다.

탁!

부러 소리 내어 문을 닫았다.

“밀라니아 님!”

한참 뭔가에 집중하고 있던 마녀들이 밀라니아를 확인하고 분분히 일어났다.

그들이 옆으로 비켜나자 가려져 있던 것이 보였다. 두터운 돌 탁자 위에 놓인 검은 관이었다. 문짝은 어디로 갔는지 얼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것인고?”

“…….”

“내가 너희들에게 이 방의 출입을 허한 건 웃고 떠들라고 한 것이 아니느니. 내가 뭐라 하였느냐?”

엄중히 묻자 가장 키가 큰 마녀가 우물쭈물하며 대꾸했다.

“수상한 점이 있는지만 확인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녀들이 쩔쩔매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가장 키 작고 여리여리한 마녀가 소심하게 반박했다.

“잠깐 눈을 떼는 사이에 큰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밀라니아의 눈썹이 위로 휘어졌다. 엄격한 공기에 마녀들의 어깨가 조금 더 찌그러졌다.

“내가 성에 있을 때에 큰일이 난단 말이냐?”

“…….”

“너희들은 내가 신경 쓰지 못할 때만 관리하면 된다고 했잖으냐.”

밀라니아가 무표정하게 말하자 마녀들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질책을 받으니 속상해하지만 왜인지는 이유를 모르는 얼굴이라 밀라니아는 한숨을 쉬었다.

“너희들을 혼내려 하는 게 아니라, 르베리안즈와 가까이 하는 게 그다지 좋지 않은 일이라서 그런 게야.”

“하지만…… 잠자는 왕자님이 뭐가 그렇게 위험하다고요?”

마녀들 중 가장 어린 마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밀라니아는 마녀의 질문보다 그가 말한 단어에 주목했다.

“잠자는 왕자님?”

“아, 그건 그냥 저희끼리 그렇게 부르기로 했어요.”

마녀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밀라니아는 마침내 ‘잠자는 왕자님’이 르베리안즈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붉은 눈을 반짝이며 심장으로 손을 뻗던 르베리안즈와 ‘잠자는 왕자님’이란 달콤한 명칭을 연결 지은 밀라니아는 속이 울렁거렸다. 목소리도 짜부라졌다.

“……왜?”

“이름을 몰라서요. 르…… 어쩌구라고 했던 것 같은데.”

“르베리안즈.”

밀라니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름을 몰라도, 얼마든지 좋은 호칭을 붙일 수 있잖은가.

짐승. 아, 그레칸이 있어 헷갈릴 수 있으니 날짐승이라고 해도 되고. 특징적으로 박쥐라고 해도 되고. 노란 머리. 희멀건 얼굴 등등. 얼마나 많은데.

“왜 굳이?”

하고픈 말은 많았지만 짧게 줄이자 마녀가 수줍게 말했다.

“왜겠어요, 밀라니아 님. 잠자는 왕자님처럼 적절한 별칭이 없으니까 그렇죠.”

“…….”

“인간들은 잠자는, 아니, 르베리안즈를 보고 수많은 낭만적인 동화를 지은 걸까요?”

“…….”

“인어 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신데렐라! 르베리안즈는 대부분의 동화에 등장하는 왕자님과 똑 닮았어요.”

아직 마력이 부족하여 1대륙을 벗어나지 못한 마녀는 인간 세상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녀는 밀라니아의 표정도 보지 못하고 꿈을 꾸는 눈으로 속삭였다.

“부드럽고 달콤한 금발에, 푸른 바다를 집어넣은 눈동자…….”

밀라니아가 눈썹을 꿈틀하고 잘못된 사실을 지적했다.

“푸른 바다라니, 눈이 어떻게 된 게 아니냐. 르베리안즈는 빨간 눈이란다.”

“매력적인 입술, 홍조가 깃든 뺨…….”

밀라니아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마녀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속삭였다.

‘말이 안 통하는 상태구나.’

혼자만의 몽상에 빠진 마녀를 상대하는 대신 밀라니아는 관을 흘끗했다.

약을 먹일 시간이 지나서 파리해진 르베리안즈의 뺨이 보였다. 다시 한번 마녀의 시력이 걱정되었다.

‘홍조가 깃든 뺨……?’

홍조는 어디에 있는가. 밀라니아의 표정이 희한해졌다. 마녀의 안구 건강을 위해 의원을 불러야 할까?

밀라니아의 눈치를 살피던 마녀들은 그녀의 표정이 미묘해지자 서둘러 여전히 르베리안즈를 왕자님과 동일시하고 있는 마녀를 말렸다.

“야아, 그만해, 그만.”

“으응?”

몽상에서 허우적거린 마녀가 게슴츠레 눈을 뜨는데, 그 꼴이 밀라니아에게 그렇게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마녀들에게 무익한 동화책은 그만 읽으라고 해야겠구나. 차라리 인간 마법사들이 집필한 마법의 구조 같은 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니.”

못 쓰는 것을 보는 시선으로 마녀를 보며 밀라니아가 충고하자 나머지 마녀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었다.

“아무래도 그런 건 재미가 없으니까요. 이 애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르베리안즈 때문에 흥분해서 그래요.”

“르베리안즈와 저 아이가 흥분 상태인 게 무슨 관련이 있누?”

밀라니아의 불가해한 표정에 마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유리아가 워낙 공주와 왕자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요. 사실 유리아뿐만 아니라, 지금 르베리안즈는 마녀성에서 인기 최고거든요!”

“?”

“쉽게 말하면 유리아는 르베리안즈와 사랑에 빠진 상태란 거예요.”

“뭐?”

민망해하는 마녀와 달리 밀라니아의 눈은 매섭게 번뜩였다. 사랑이란 낭만적인 단어에 감흥을 받은 건 아니었다.

그녀가 주목한 건 ‘사랑’이라는 단어와 밀접하게 관련된 박쥐족의 특질이었다.

르베리안즈는 박쥐족답게 유혹을 잘했다. 아니, 잘한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자연스럽게 유혹되었으므로. 스칼렛이 발칸에게 했던 말처럼 박쥐족에게 유혹은 일상이었다.

그들의 아름다운 외모와 달큰한 체향도 그에 일조했다.

‘어떻게 보면 말란도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말란도르에게 홀린 자들은 스스로 그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한다면 르베리안즈에게 홀린 여자들은 르베리안즈의 침대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했다. 반한 상대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상태, 그게 사랑이었다.

‘사랑이라니, 내가 실수를 할 뻔했구나!’

밀라니아는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르베리안즈를 흘끗거리던 여자들이 갑작스러운 바람에 쓸려 방 밖으로 튕겨 나갔다.

“어, 어어? 밀라니아 님! 무슨……!”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쾅, 문이 닫혔다. 밀라니아가 심각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이 점은 생각 못했군.”

마녀들의 말은 그들에게 르베리안즈의 감시를 맡겼던 밀라니아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사랑에 빠진 존재만큼 스파이가 되기에 적절한 존재도 없으니.”

앞으로는 르베리안즈와 마녀들의 접촉을 최소화해야겠다. 결심한 밀라니아가 르베리안즈에게 다가갔다.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덩치가 커졌을까. 르베리안즈를 살피는 밀라니아는 관이 조금 작다는 느낌을 받았다.

“관을 다시 짜야 하겠는데.”

이대로 가다간 다리가 관을 넘어설 듯했다.

르베리안즈의 쾌적한 환경을 위해 고심한 밀라니아는 이내 할 일에 집중했다.

마법을 통해 손목에서부터 핏방울 두 방울을 빼내자 여느 때처럼 핏방울이 그의 입술 안으로 미끄러지듯 흡수되었다.

밀라니아는 평소와 달리 다소 조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애초에 르베리안즈를 직접 감시하지 못하고 마녀들에게 맡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레칸이 쫓아오기 전에 나가야 하니. 하여간 점점 정신 사납게 굴어서는.”

그레칸이 르베리안즈를 싫어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

아무도 모르게 호수에 던져 수장시킨다는, 완전 범죄를 꿈꿨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원래 르베리안즈의 관은 밀라니아의 방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이 방으로 오게 된 이유도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그레칸 때문이었다.

잠든 르베리안즈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장면만 세 번은 발견했다.

[뭐 하는 게냐, 그레칸!]

[크르릉?]

놀라 질책하면 뭘 했냐는 듯 꼬리를 다리 사이에 숨기고 시침을 떼는 것이 아닌가.

결국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의 이사를 결정했다.

그래 봤자 무슨 일이 생기면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바로 아래층 방이었지만.

‘르베리안즈의 위치를 알면 그레칸이 또 이상한 짓을 할지 모르니.’

이런 일로 골머리를 썩이는 게 어이없는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성체일 때나 어릴 때나 다름없이 개새끼일세.”

하아―.

투덜대던 밀라니아는 거세게 새어 나온 숨소리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피를 흡수한 르베리안즈의 입술이 불그스름해져 있었다.

퇴폐적인 병약미가 도사리는 얼굴은 장인이 몇 날 며칠을 지새우고 만든 인형 같았다.

밀라니아는 금발 몇 가닥이 내려앉은 가녀린 목을 주시했다.

수면병에 걸린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에 비해 몸이 약하다.

누워 있는 시간이 기니 근육이라든지 체력이라든지,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

‘설마 이 꼴인데 마녀들을 유혹했을까.’

의심스럽게 르베리안즈를 내려다보았다.

다 자라지 못했음에도 새어 나오는 화려한 아름다움. 아직 꽃피기 직전인 꽃봉오리처럼.

힘을 사용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마녀들을 홀린 게 사실이라면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전생이 생각난 밀라니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엔 그레칸보다 얌전했거늘.”

그레칸이 심장을 달라고 그녀를 쫓아다녔다면 르베리안즈는 심장을 두고 거래를 시도하는 타입이었다.

물론 교섭은 항상 실패하고 곧 싸움으로 번졌지만.

그레칸처럼 대책 없는 타입은 아니라는 거였다.

‘복종의 밤이 두 개는 필요 없겠어.’

어느새 생각이 길어졌다.

그레칸에게 생각이 미친 밀라니아는 방에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손가락이 탁, 밀라니아의 손목을 휘어 감았다.

밀라니아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손목을 쥔 파리한 손가락이 보였다.

눈썹을 치켜세운 밀라니아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하암.”

하품을 하며 눈을 깜박인 르베리안즈와 눈이 마주쳤다.

붉은 자수정처럼 우아한 눈동자에 졸음기와 웃음이 혼재했다.

“벌써 가려고 해요?”

“…….”

“오랜만에 왔는데.”

입맛을 다시는 그를 밀라니아는 경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요?”

목소리는 잠겨 있었으나 그 상태로도 심령을 울렸다.

몸 상태가 회복된다면 목소리만으로도 사람을 매혹할 수 있을 듯했다.

딱딱하게 굳어진 밀라니아를 보고 르베리안즈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순간, 그를 본 사람은 모두 사랑에 빠뜨릴 수 있을 듯한 미소였다.

밀라니아 역시 심장이 쿵쾅거렸다.

‘소름이 끼치는구나.’

물론 감상은 범인들과 조금 남다른 데가 있었다.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붉은 눈동자가 살짝 움직였다.

졸음이 밀려오는 듯, 하품이 길게 터져 나온다.

“아직 졸리군요.”

나른한 얼굴을 보며 밀라니아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고민했다.

지금의 르베리안즈에겐 그녀에게 뚜렷한 적의도 호의도 보이지 않았다.

밀라니아는 이 일상적인 대화가 조금 낯설었지만 솔직하게 대꾸했다.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그렇다.’ 하고 말을 맺으려는 참이었다.

쾅!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열린 문으로 인간으로 탈태한 상태인 그레칸이 들어왔다.

마디가 굵어진 손에는 훈련용 공이 들려 있었다.

꿀꺽.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왜 저렇게 살기가 등등한고?’

살기등등한 그레칸은 까만 눈동자를 움직여 밀라니아와 르베리안즈, 그리고 르베리안즈가 잡고 있는 밀라니아의 손을 시야에 담았다.

옆으로 긴 눈매가 서서히 일그러졌다.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사나운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으르르…….”

뭐라고 말하려던 밀라니아는 손목을 잡은 르베리안즈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흘낏 내려다보자 르베리안즈의 꼴도 범상치가 않았다.

붉은 눈동자가 세로로 길쭉해지고 눈꼬리도 귀신처럼 올라갔다.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었다.

‘이 자식들이 왜 이러누?’

서로에 대한 강한 적의를 드러내는 두 원수를 번갈아 응시하는 밀라니아는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진하게 들었다.

“그 손 놔라, 더러운 박쥐 새끼야.”

“이거? 놓으라고?”

르베리안즈가 보란 듯이 잡고 있는 밀라니아의 손을 흔들었다. 그레칸에게서 새어 나오는 소리가 한층 흉흉해졌다.

르베리안즈는 졸음기 가신 얼굴로 이죽거렸다.

“네가 뭔데? 내가 분명히 말했지. 너 죽인다고…….”

르베리안즈가 밀라니아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물론 밀라니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손목만 움직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레칸의 심기를 제대로 건든 듯했다.

눈이 뒤집힌 그레칸이 달려들었다.

“네 연약한 주먹 따위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야.”

기다렸다는 듯 웃으면서 르베리안즈가 반대쪽 손을 들었다.

그레칸의 불끈 쥔 주먹 주변으로 공기가 일렁였다.

르베리안즈의 힘, 접촉하지 않은 것들에도 영향을 주는 그의 힘이 작용하는 현상이었다.

“이상한 술수. 내게 통하지 않는다.”

근육이 옹골찬 팔을 강하게 휘둘러 르베리안즈의 힘을 떨쳐 내며 그레칸이 주먹을 뒤로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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