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48)

6

그레칸은 집요하다

그제야 깨달았다.

‘르베리안즈가 마음에 안 드는구나.’

전생의 두 사람은 협공하며 달려든 적이 왕왕 있었기 때문에 사이가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지금 보니 전생에도 사이가 좋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의문 하나가 풀렸다.

‘생각해 보니 그때도 협공이라기보다는 사냥감을 차지하려는 것 같았지.’

전생에서 지독했던 둘의 눈을 떠올린 밀라니아가 몸을 가볍게 떨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덩달아 그레칸을 껴안은 몸도 경직되었다.

“……?”

압박감을 느낀 그레칸의 눈이 의아하게 가늘어졌다.

‘내가 원수의 보모 노릇을 하게 되다니.’

밀라니아는 다시금 한탄했지만 어쨌든 이 질긴 운명의 고리를 끊어 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밀라니아는 한숨을 쉬며 그레칸이 뱉어 낸 훈련용 공을 잡아 들었다.

“명령이다. 저 관에 손대면 안 되느니. 알았지?”

복종의 밤이 하얗게 빛났다. 그레칸은 르베리안즈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밀라니아는 그래도 불안해서 재차 물었다.

“알았느냐?”

그레칸이 못마땅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끄덕끄덕.

미약하게나마 고개가 끄덕여지는 걸 확인한 밀라니아가 공과 그레칸을 함께 들고 일어나려다가 주저앉았다.

새삼스럽다는 듯 그레칸을 바라보았다. 그는 왜 그러냐며 무구한 표정으로 눈만 끔벅대었다.

“너 이제 제법 무겁구나.”

언제 이렇게 살이 쪘는지, 이제 안아 들기에는 벅찰 정도로 무거워졌다.

하는 수 없이 그레칸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화아아.

풍성한 검은 털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부숭부숭했던 네 다리는 어린아이의 미숙한 팔다리가 되었다.

갑자기 인간으로 탈태한 그레칸을 보며 밀라니아는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왜?’

어리둥절했지만 이럴 때를 대비하여 준비해 둔 게 있다.

큼지막한 천을 소환한 밀라니아는 천 자락을 그레칸의 하반신에 둘러 주었다.

그레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여전히 심통 맞았다.

‘뭐가 문제인고?’

육아에는 소질이 없어 어린 마녀 공동 육아에도 참여한 적 없던 밀라니아는 표정으로만 불만을 표출하는 그레칸의 행동에 속이 답답해졌다.

결국 한숨을 쉬고 그레칸과 공을 동시에 들어 올렸다.

“왜 기분이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나가서 놀아 보자꾸나.”

어느새 공 던지고 가져오기는 훈련이나 벌칙이 아니라 놀이가 되어 있었다.

그레칸은 여전히 뚱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

다만 양손으로 밀라니아의 팔을 찰싹 잡았다.

방문이 닫히기 전, 그레칸의 스산한 시선이 검은 관에 닿았다.

* * *

모든 생명체가 낳아 준 부모를 갖듯이, 밀라니아의 부모는 마녀목이었다.

좀 더 올바른 표현으로는 마녀목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녀목은 밀라니아뿐만이 아니라 모든 마녀들이 소중히 여기는 그들의 고향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마녀들은 종종 마녀목에 가 정기를 느끼고 오곤 했다.

그건 마녀족이 중요하게 여기는 몇 가지 신성한 의식 중 하나였다.

“기력이 쇠한 것 같으니 마녀목에 갔다 와야겠다.”

체라는 좋은 생각이라며 박수를 치며 반겼다.

그렇게 마녀목으로의 나들이가 결정되었다. 밀라니아의 동행인은 체라와 몸이 안 좋은 몇 명의 어린 마녀들이었다.

그레칸이 혼자 남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슬쩍 운을 띄우니.

“늑대를 마녀의 수호목으로 데려가신다고요?”

‘제가 잘못 들었겠죠?’ 귀를 의심하는 체라의 파들거림을 못 이기고 마녀의 성에 놓고 왔다.

‘이제는 말도 잘 듣고 나름대로 얌전하니 괜찮지 않겠누. 명령도 잘 내려 두었고.’

마녀숲으로 들어가기 전, 밀라니아는 성을 흘끗했다.

복종의 밤은 이제껏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다.

‘근데 왜 이렇게 불안한고?’

* * *

밀라니아가 떠난 마녀의 성.

그레칸은 늑대 모습으로 훈련장을 어슬렁거렸다. 인간형으로 탈태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는 아직 늑대 모습이 더 익숙했다.

홀로 공을 가지고 놀다가, 밀라니아가 던져 주지 않으니 그것도 재미가 없어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데구루루. 데구루루.

왼쪽 앞발로 공을 굴리고 오른쪽 앞발로 잡았다. 다시 오른쪽 앞발로 공을 굴리고 왼쪽 앞발로 잡기를 반복하길 한참.

“구구, 구구구.”

비비가 날개를 넓게 편 채 그레칸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레칸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비비의 그림자로 시야가 한순간 어두워졌지만 금세 환해진다.

날개를 활짝 펼친 비비는 유유히 밀라니아의 방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 여자 거기 없는데.’

시큰둥하게 생각했던 그레칸의 머릿속에 노랗게 불이 켜졌다. 마침 좋은 생각이 났다.

그레칸은 늑대족의 애물단지였지만 그에 비해 괴롭힘은 크게 당하지 않았다.

수장의 막내아들이라고 다른 늑대들이 봐준 건 결코 아니었다.

늑대족의 어린 독종.

한번 당한 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되돌려 주는 그의 집요한 습성. 몇 번 그에게 호되게 당한 늑대들이 혀를 찼기 때문에 생긴 별칭이다.

한번 노린 먹이는 놓치지 않는 습성은 하이에나에 못지않았다.

씩, 웃은 그레칸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날랜 몸은 이내 꼭대기 층을 향해 쏜살같이 사라졌다.

‘저 얄미운 새, 언젠가 한 번은 손봐 줘야겠다고 생각했었지.’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 안 된다는 말만 달고 사는 밀라니아도 없겠다, 비비를 가지고 놀려는 음습한 계획을 품고 그레칸은 힘차게 계단을 박차고 올랐다.

그러나 그에겐 불행히도, 비비에겐 다행히도 그레칸의 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밀라니아의 부재를 확인한 비비가 그녀가 미리 만들어 둔 육포 하나만 입에 물고 슝, 하고 떠났기 때문이다.

끼익.

살금살금 문을 열었던 그레칸은 텅 빈 방을 보고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였다.

“…….”

휙휙 고개를 돌려 봐도 빈방이다. 그레칸의 표정이 아쉽게 변했다.

다시 내려가려던 그레칸은 멈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책상 위에 놓인 검은 관이 크게 확대되어 눈으로 들어왔다.

“…….”

까만 동공이 빙그르르 돌아간다.

[명령이야. 저 관에 손대면 안 돼.]

밀라니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레칸은 불만스럽게 목을 조이는 복종의 밤을 툭툭 건드렸다.

이 짜증 나는 물건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명령을 어기려고만 하면 뇌를 반죽하듯 주물러 대서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명령이 내려져 어차피 뭘 할 수도 없는 상황, 그냥 방에나 있자 싶은 그레칸은 시큰둥하게 침대로 걸어가다 멈칫했다.

성질대로 찢어 버릴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기에 어두칙칙한 관은 지독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쁜 꽃을 바라보는 것처럼 관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던 밀라니아가 떠오르자 머리털이 바싹 섰다. 망설임이 사라진다.

“크르릉…….”

그레칸은 관이 놓인 책상 주위를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시험 삼아 발을 뻗었다.

툭.

그레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발톱으로 다시 관을 쳤다.

발톱이 관에 닿았다.

“……?”

발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갸웃.

그레칸의 경험상, 명령은 거부할 수 없는 것.

아무리 짜증 나는 말이라도 목줄이 채워진 이상은 무시할 수 없었는데.

관에 손대지 말라는 명령은 분명히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관을 만질 수 있는 걸까?

‘왜?’

눈을 굴린 그레칸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길어졌다.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 중요한 건 밀라니아의 명령이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레칸은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잽싸게 발을 들어 관을 후려쳤다.

탁!

밀린 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쾅!

충격을 받은 관 뚜껑이 튕겨져 나갔다.

“……크릉크릉.”

그레칸은 자기가 안 한 척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우다가,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없자 슬쩍 떨어진 관을 향해 다가갔다.

뚜껑이 떨어진 관 안에는 창백하고 아름다운 소년이 누워 있었다.

배꼽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손은 낙하한 충격에 의해 흐트러졌다.

그레칸은 르베리안즈를 노려보며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네 발은 바닥을 단단히 짚고, 등허리는 위로 솟구쳐 올랐다. 풍성한 꼬리털이 바짝 곤두섰다.

“으르릉…….”

찡그린 콧잔등 아래, 낮게 깔린 목울음이 위협적으로 흘러나왔다.

그대로 물어뜯으려는 찰나.

벌컥!

그레칸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밀라니아가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레칸!”

재빨리 달려온 그녀는 그레칸을 그대로 안아 올렸다.

어느새 커다래진 덩치를 들어 올리느라 낑낑대자 그레칸이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컹! 컹!”

“어째 불안하더라니. 명령도 내렸는데 어떻게 된 일인고?”

그레칸을 혼자 두는 게 불안해서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왔던 밀라니아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다행히 일이 벌어지기 직전에 발견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도 잠시, 그레칸의 버둥거림이 거슬렸다.

“그레칸! 몸에 힘을 빼거라. 지금 반항이라도 하는 것이냐?”

그레칸의 팔다리가 늘어졌다. 그러자 더 무거워져서 밀라니아는 끄응, 신음을 흘리고 그레칸을 땅에 내려놓았다.

르베리안즈를 확인했다.

다행히 관이 내팽개쳐지고 큰 소란이 난 데 비하면 어디가 다친 건 아닌 것 같다.

르베리안즈를 납치했다면 모를까. 박쥐족에게서 정식으로 인도받은 이상 르베리안즈에게 생기는 모든 문제는 그녀의 책임이었다.

수면병의 병마가 어찌나 강력한지, 르베리안즈는 이런 소란에도 깊이 숙면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그레칸이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는 반면 르베리안즈는 기억해 놨다가 낌새도 없이 드러내는 타입이었다.

일어나 있었다면 그레칸과 골치 아픈 상황을 벌였을 것이다.

곱게 잠든 르베리안즈의 얼굴을 재차 확인한 밀라니아는 나뒹굴고 있는 관 뚜껑을 찾아 덮었다.

팔짱을 단단히 끼고 그레칸에게 고개를 돌려 엄한 목소리를 냈다.

“그레칸.”

 빠졌다는 듯 바닥에 누워 발등 위에 턱을 올리고 있던 그레칸이 귀를 쫑긋했다.

“왜 그랬느냐.”

일단 타이르는 어조로 묻자 뜨끔한 그레칸은 휙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레칸!”

밀라니아가 재차 부르자 꼬리로 바닥을 탁, 친다.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었다.

“으르릉…….”

낮은 목울음이 다시 흘러나왔다. 밀라니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이마를 짚은 밀라니아가 턱짓을 했다.

“독방에 가 있거라.”

그레칸이 몸을 일으켰다.

쳇,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끼익.

스스로 독방을 열고 시린 냉골에 몸을 누이는 그레칸의 마음속에 불만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 * *

밀라니아는 대외용 망토를 어깨에 걸쳤다.

3종족 간의 회의처럼 위엄을 보여야 하는 자리에서 입는 망토였다.

실은 다른 종족들에 꿀리지 말라고 체라가 거미족에게 특별 의뢰해서 만든 망토다.

전체적으로 은색인데 햇빛에 비추면 금빛도 은은하게 나는 망토를 걸친 밀라니아는 겨울 나라의 여왕 같았다.

준비를 마친 밀라니아는 시간을 확인했다.

‘빗자루를 타고 가면 딱 적당하겠군.’

밀라니아는 습관적으로 르베리안즈의 관을 확인했다. 르베리안즈가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잘 자고 있다. 그다음으로 그의 건강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혈색도 점점 돌아오고 있고…….”

피를 두 방울로 늘렸더니 창백했던 낯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죽은 것처럼 약했던 호흡도 안정을 찾았다.

‘눈은 한 번도 안 뜬 상태. 이상 없군.’

이대로라면 그녀가 바라는 대로 천천히, 적정 속도를 유지하며 수면병에서 회복될 것 같았다.

달칵.

붉은색 망토를 입은 체라가 들어왔다.

“준비 다 되셨어요?”

“응. 이제 출발하면 되느니.”

“네. 아, 근데 밀라니아 님, 그레칸은 어쩌실 생각이세요?”

“그레칸은 왜?”

“협정 회의에 데려가야 할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정말 그렇게 하실 거세요?”

밀라니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복종의 밤의 효과가 그렇게 짧은 줄 누가 알았겠누.’

그레칸이 명령에도 불구하고 르베리안즈의 관에 손을 댈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명령의 유효 시간.

복종의 밤은 입력한 명령을 한도 끝도 없이 지키는 귀물은 아니었다. 제한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복종의 밤을 찬 노예들이 말란도르의 말을 하도 고분고분하게 잘 따라서 만능인 줄 알았지 뭔가.

“협정을 맺고 온다면 적어도 이틀은 걸릴 테니 결정은 이해를 하지만요.”

체라의 말에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칸이 르베리안즈를 노렸던 사고 이후, 밀라니아는 복종의 밤의 효능을 시험해 보았다.

귀물의 효과가 지속되는 시간은 약 하루 정도.

명령을 하면 하루 동안은 효과가 있지만 그 이상이 되면 먹히지 않는다.

“……그레칸만 뒀다가는 사고가 일어날 게 분명하니, 데려가야지.”

“하지만 발칸은요. 회의엔 발칸도 올 게 분명하잖아요?”

“…….”

“지랄 발광을 해 댈 텐데…….”

늑대족에 지대한 유감을 갖고 있어 객관성을 잃은 체라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이 맞다.

밀라니아는 가는 거미줄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흐트러졌다.

“어쩔 수 없느니. 다행히 박쥐족은 그레칸에 대해 알고 있잖느냐. 신경 쓸 건 발칸 하나뿐이야.”

“발칸에게도 그레칸을 구조했다고 말할 생각이세요?”

알아들었다는 체라의 표정에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발칸에게 먹힐까요? 그 성격에, 그래도 기분 나빠할 텐데요. 아무리 그레칸이 버린 자식이라 해도요.”

밀라니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발칸이 우렁우렁 소리를 지를 것을 생각하니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입을 봉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박쥐족에게 들킬 때만 해도 발칸 역시 그렇게 구슬리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르베리안즈가 너무나도 소중한 스칼렛에 비해 발칸은 그레칸보다 제 자존심이 더 중요한 사람이니, 스칼렛 때처럼 부드럽게 넘어가는 게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그레칸의 존재를 숨기는 건 어떻겠느냐? 그레칸이 수장이 될 때까지만. 무풍의 산에 가서는 체라 네가 그레칸을 맡고 있으면 될 터인데.”

그걸로 될까.

모호하게 중얼거리는 밀라니아의 말을 들은 체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 그레칸이 수장이 된다고요? 물론 그레칸은 제가 본 늑대 중 역대급으로 집요한 놈이긴 하지만요, 수장이 되기엔 약하지 않아요?”

회의적인 미래를 짐작하지 못하는 체라를 보며 밀라니아는 아련하게 웃었다.

전생에서는 발칸이 죽고, 각성한 그레칸은 수장이 되었다.

‘지근은 늑대 무리에 속해 있지 않으니까…… 시일은 틀릴지언정.’

하나는 변하지 않는다. 발칸이 죽으면 그레칸은 늑대족의 수장이 된다.

그때까지 길어야 20년.

‘20년간 그레칸을 숨길 수 있을까?’

“발칸은 그레칸의 인간형을 모르지 않느냐.”

“인간 형태로 데리고 다니자는 말씀이세요?”

“그래.”

“안 들킬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래도 최대한 피해 봐야지 어쩌겠누.”

“뇌까지 털이 들어찬 것 같은 발칸이라면 속아 넘길 수도 있을 거 같긴 하네요.”

체라의 편견 가득한 말에 밀라니아는 표정이 밝아졌다.

생각하고 보니 나쁘지 않은 방안인 것 같다.

“이제 출발하자. 근데 그레칸은 어디 갔느냐?”

“그레칸은 훈련장 쪽에 있을 텐데……. 어라?”

창문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던 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러느냐?”

밀라니아가 체라에게 다가갔다.

“없는데요?”

밀라니아도 훈련장을 내려다보았다. 몇 명의 마녀들이 숲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웅성대는 분위기가 전해진다.

“뭔가 이상해요, 밀라니아 님.”

밀라니아는 체라의 말에 동의했다. 분위기가 영 이상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목덜미를 스멀스멀 간질였다.

밀라니아는 벽에 세워 두었던 빗자루를 잡아타고, 아래를 향해 쏜살같이 내려갔다.

“어마!”

갑작스레 나타난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란 마녀에게 대뜸 물었다.

“무슨 일이냐? 여기 있던 그레칸은 어디 갔고?”

“그, 그게요.”

어린 마녀가 얼떨떨하면서도 난감한 표정으로 숲을 가리켰다.

“그레칸이요. 갑자기 이쪽으로 달려 나갔어요. 저희는 공놀이라도 하는 게 아닌가 했는데 한참이 지나도 안 돌아오길래…….”

툭.

밀라니아의 손에서 빗자루가 떨어졌다.

한 발 늦게, 밀라니아보다 다소 난폭하게 내려온 체라가 밀라니아의 빗자루를 주워 들었다.

“그레칸이 사라졌다고요?”

“…….”

“하지만 밀라니아 님, 명령을 내리셨잖아요?”

“…….”

“멀리 나가지 말라고…….”

체라의 의아한 시선에 밀라니아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아니, 도망가지 말라는 명령은 안 내렸느니.”

“헉, 그럼!”

‘도망갔구나!’

체라와 밀라니아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 밀라니아는 살짝 비틀거렸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다툴 것만 생각했지 정작 그레칸이 도망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 못했을까. 납치를 해 왔으니 당연히 도망칠 수 있는 건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밀라니아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심장 부근에 가져다 댔다.

내 심장.

“……찾아야 하느니.”

밀라니아가 체라에게서 빗자루를 뺏어 들었다.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테니까!”

밀라니아는 빗자루를 타고 숲 위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높여 명령을 내렸다.

“어디 있느냐!”

성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런 어투라면 들어도 돌아오지 않겠다. 판단한 밀라니아가 억지로 목소리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성으로 돌아오거라, 그레칸.”

손가락을 튕기자 그다지 크지 않은 밀라니아의 서늘한 목소리가 숲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명령을 내린 후 기다렸다. 마력이 담긴 목소리가 닿는다면 복종의 밤은 그레칸을 그녀에게로 이끌 터였다.

그러나 그레칸이 설사 숲 저편에 있어도 충분히 돌아올 수 있을 만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 * *

한편 밀라니아와 체라가 뛰쳐나간 밀라니아의 방. 조용한 가운데 문고리가 달그락거렸다.

달칵, 달칵.

끼익.

문고리 돌아 가는 소리가 연거푸 나더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나타나는 까맣고 촉촉한 코.

마녀들이 백방으로 찾아 대고 있는 그레칸이었다.

숲으로 도망가는 척 숲을 돌아 성으로 돌아온 그레칸은 성으로 들어가는 중 밀라니아의 명령을 들었다.

그러나 성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었기에 이미 성내에 있는 그는 명령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멀리 도망갔을 거라고만 생각한 밀라니아의 실수였다.

명령에 구애받지 않은 그레칸은 아무 거리낌 없이 계단을 올라가 밀라니아의 방에 도착했다.

애초에 그레칸은 목적이 있었다.

도망은 아니었다.

방금 전, 밀라니아의 명령 유효 시간이 끝났다. 무슨 명령이냐 하면, 바로 르베리안즈에게 손대지 말라는 명령이다.

이때만 기다린 그레칸의 눈이 반짝거렸다.

유효 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이기까지, 그레칸은 치밀하게 계산하고 움직였다.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온 그레칸은 르베리안즈의 관이 있는 책상 주변을 뱅뱅 돌았다.

그러다가 툭, 발을 위로 내밀어 관을 밀어냈다.

콰당!

관이 떨어지며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그레칸은 슬그머니 창문 밖을 살폈다.

“성으로 돌아오거라, 그레칸.”

밀라니아가 명령하는 소리가 울린다. 관이 떨어진 소리가 덕분에 묻힌 듯했다. 아직까지 아무도 그의 행각을 눈치채지 못했다.

안심한 그레칸은 관으로 다가갔다. 떨어진 충격에 반쯤 열린 뚜껑을 발로 툭 쳤다.

그러자 관 안에 있는 르베리안즈가 드러났다. 그레칸은 망설이지 않고 입을 크게 벌려 르베리안즈의 가느다란 발목을 콱 물었다.

콰직!

한기와 함께 박쥐족의 체취가 코로 한껏 들어왔다.

“으르르릉.”

그레칸은 못마땅하게 목을 울렸다.

‘이상한 냄새.’

그러나 냄새가 싫다고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다.

그레칸은 다른 새끼 늑대들이 먹이를 받아먹을 시점부터 사냥을 해 왔다.

그레칸의 사냥 스타일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뼈째 씹어 먹는 것.

생존율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고 그건 지금처럼 은밀한 순간에도 효과적으로 발휘되었다.

그레칸은 르베리안즈의 발목을 문 채로 뒤로 물러났다. 르베리안즈의 엉덩이가 걸려 관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자 위쪽으로 반동을 주었다.

덜컹.

엉덩이가 관 밖으로 빠져나오니 그다음부터는 수월했다.

홱, 고개를 틀어 르베리안즈의 몸을 관으로부터 끌어냈다.

쿵!

머리가 바닥에 부딪쳐 소리를 냈다. 밝은 금발이 바닥에 지저분하게 흩어졌다. 예술품을 사랑하는 자들이 봤다면 안타까워 한숨을 흘릴 모습이었다.

물론 그레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르베리안즈를 문 채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르베리안즈는 그레칸보다 약간 작은 덩치였다.

그레칸보다는 작지만 처음 스칼렛이 데리고 왔을 때보다는 골격이 두꺼워지고 커진 상태.

그레칸은 그것도 꺼림칙했다. 자신처럼 고기를 먹는 것도 아닌데 점점 자란다.

밀라니아의 피를 먹고 자란 르베리안즈는 곧 눈을 떠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오늘부로 이 기분 나쁜 것도 끝이다.’

그레칸은 르베리안즈가 더 크기 전에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르베리안즈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분 나쁜 냄새도 그렇고, 곰팡이 포자처럼 떠다니는 차가운 공기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그 마녀가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게 가장 거슬렸다.

‘날 억지로 데리고 온 주제에.’

취급이 개판이다.

가슴에 쌓인 불만으로 콧잔등이 신경질적으로 실룩거렸다. 어쨌든 르베리안즈는 오늘 이후로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할 터였다.

이미 적당한 곳도 물색해 둔 상황이다.

스으윽. 스륵.

그레칸은 조심스럽게 르베리안즈를 끌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가벼운 육체가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렀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갈 때마다 르베리안즈의 잘생긴 뒤통수가 바닥을 찧어 댔다.

쿵! 쿵!

물론 그레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레칸은 누군가 올라올 기미가 보이면 르베리안즈를 끌고 방에 숨었고, 아무도 없으면 이동했다.

밖에서 밀라니아가 그레칸을 찾는다고 소리를 퍼뜨리고 있기에 마녀들이 거기 몰려간 것도 그레칸의 은밀한 범행에 도움이 되어 주었다.

성에서 빠져나온 그레칸은 조그마한 숲길로 걸어갔다. 르베리안즈가 질질 끌려갔다.

스윽, 스윽.

등이 끌리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났다.

박쥐족이 입혀 놓은 검은색 정장과, 깨끗하고 부드러웠던 금발에 흙먼지가 엉켜 붙어 점차 더러워졌다.

한참 걸어간 그레칸이 도착한 곳은 마녀성에 포함된 숲 깊은 곳 호수였다.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공을 찾아다니며 발견한 곳으로, 이럴 때를 대비하여 점찍어 두었다.

물은 아주 맑지만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어서 범행을 도모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그레칸은 호수를 향해 르베리안즈를 끌고 갔다.

짹짹, 짹짹짹.

나무 여기저기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새들이 포식자의 냄새를 맡고 놀라 날아올랐다.

* * *

밀라니아는 빗자루 위에서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명령이 열 번을 넘어가는데도 그레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녀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했을 터인데.’

대체 어디로 간 걸까?

그 순간이었다.

“밀라니아 님, 여기 흔적이 있어요!”

숲 한가운데서 어린 마녀가 외쳤다.

밀라니아는 즉시 어린 마녀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어 날아갔다.

밀라니아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르베리안즈의 팔 하나가 물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빗자루를 타고 날아와 그레칸을 발견한 밀라니아는 경악으로 얼어붙었다.

입을 벌린 건 거의 본능이었다.

“그레칸, 내려놓으려무나. 르베리안즈.”

어찌나 급했는지 말의 어순이 바뀌었다. 복종의 밤이 하얗게 변했다.

“땅에다가…….”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는데.

풍덩!

그레칸이 얼른 르베리안즈를 놓았다. 문제는 르베리안즈의 몸이 반쯤 호수에 걸쳐진 상태였다는 점이다.

그레칸이 놓자, 르베리안즈의 몸은 물귀신이 끌어당기는 것처럼 호수로 빨려 들어갔다.

철썩!

호수의 수면이 출렁이고 물이 솟구쳐 올랐다.

밀라니아는 입을 떡 벌렸다.

밀라니아가 입을 열자마자 재빨리 호수에 르베리안즈를 던져 버린 그레칸은 아무것도 안 한 척 팔을 할짝할짝 핥아 댔다. 얄밉도록 태연한 몸짓이었다.

뒤늦게 도착해 그 광경을 목격한 체라가 합, 숨을 들이마셨다.

“쟤 진짜 또라이네요.”

밀라니아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레칸도 그렇지만 르베리안즈는 음습한 박쥐족답게 제게 가해진 해악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밀라니아의 머릿속에서 르베리안즈가 깨어난 뒤의 골치 아픈 상황과, 후계자를 형편없이 대했다고 싸움을 걸어올 박쥐족의 모습이 뒤죽박죽으로 엉켰다.

‘최악이구나.’

밀라니아는 머릿속 계획이, 다소 고난이 있겠지만 순조로웠던 사육 플랜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미친 개새끼로고!”

빽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호수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벌써 바닥까지 가라앉았는지 르베리안즈는 보이지 않았다.

체라는 밀라니아가 내던진 욕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밀라니아 님이 욕하는 거 처음 봐요.”

흔적을 발견한 어린 마녀가 소곤거리자 체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르베리안즈를 호수로 던져 버려 명령에서 자유로운 상태의 그레칸은 얼굴이 뚱해졌다.

늑대의 형상임에도 불만스러운 기분이 생생히 드러났다.

“나 개 아닌데.”

그 말에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밀라니아는 망토를 벗어던졌다.

빨리 찾지 못하면 르베리안즈가 익사할 것이다.

남주들은 쉽게 죽지 않는다. 호수에 빠진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 일로 앙심을 품는다면 골치로다.’

르베리안즈가 깨어나기 전에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수밖에 없다. 판단한 밀라니아가 물에 입수하려는 찰나였다.

첨벙!

아래에서 뭔가 툭 튀어 올랐다.

르베리안즈였다. 꿀처럼 짙은 금발이 젖어서 축 늘어진 채로 뭍에 팔을 걸쳤다.

창백한 피부에 물이 뚝뚝 떨어진다.

밀라니아는 호수에 들어가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는데 기어이…….’

콜록콜록.

르베리안즈가 밭은기침을 하자 물방울이 튀었다. 인형처럼 관에 누워 있었던 모습이 아니라 생생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할 일은 다 했다며 신경을 껐던 그레칸의 털이 빳빳하게 곤두섰다.

“으르릉…….”

‘죽지도 않고 살아 나오네’ 눈빛으로 말한 그레칸이 몸을 낮게 낮추며 목을 울렸다.

믈을 토해 낸 르베리안즈가 그레칸을 노려보았다. 붉은 눈이 피처럼 짙어서 섬뜩했다.

정확히 그레칸을 향한 르베리안즈의 적안이 반질거렸다.

“너…….”

얇은 입술이 비틀리고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은 성대에서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일 거야…….”

스륵.

르베리안즈는 그 말만 남기고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금 잠에 빠져든 것이다.

밀라니아는 호수로 빠져들려는 르베리안즈의 몸을 서둘러 붙잡았다.

그대로 안아 들자 젖은 옷자락에서부터 차가운 호수물이 뚝뚝 떨어졌다.

“컹! 컹컹컹!”

그레칸이 미친 듯이 짖어 대며 밀라니아의 주위를 뱅뱅 돌았다.

죽인다고? 죽여 봐! 죽여 보라고! 라고 외치는 듯 방정맞았다.

밀라니아는 르베리안즈의 눈꺼풀을 손으로 까뒤집었다. 초점 없는 붉은 눈동자가 드러나자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뗐다.

충격으로 깬 건 아닌가 싶었는데 일시적인 현상인 듯했다.

‘생존 본능 하나는 기가 막히는구나.’

그러는 동안 밀라니아의 옷은 르베리안즈의 몸에서 떨어지는 물로 점차 젖기 시작했다.

축축한 기분에 밀라니아는 똥 씹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컹컹! 컹컹컹!”

“시끄러워.”

“컹컹컹!”

그레칸이 아랑곳하지 않고 짖어 대자 밀라니아는 한숨을 쉬었다.

‘명령이 아닌 말은 씨알도 안 먹히는군.’

“입 다물려무나.”

“낑.”

복종의 밤이 하얗게 빛남과 동시에 그레칸이 주둥이를 딱 닫았다.

짖지 못해 화가 나는 듯 얼굴이 불만에 찼다.

밀라니아는 조용해진 그레칸을 지나치며 툭 뱉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골칫덩어리.”

“낑.”

“아,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걷던 밀라니아가 멈칫하고 그레칸을 내려다보았다. 그레칸이 검은 눈망울을 깜박였다.

“너 개 맞느니.”

‘나 개 아닌데.’라는 그레칸의 불만에 대한 대꾸였다. 눈 깜박거림을 멈춘 그레칸이 소리 없이 발광을 해 댔다.

밀라니아는 꿋꿋하게 무시했다.

늑대는 개가 맞다.

개과.

‘말 더럽게 안 듣는 거 보면 보통 개도 아니고 똥개로다.’

* * *

때아닌 소동으로 예상보다 조금 늦게, 밀라니아는 길을 떠났다. 그레칸을 대동한 채였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그레칸을 놓고 오는 게 가능하다면 그러려고 했지만 호수 사건 이후로 그런 생각이 싹 들어갔다.

웬만하면 그레칸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게 마음이 더 편할 듯했다.

이번에 열리는 1대륙 마녀숲 협정.

협정 장소는 1대륙의 정중앙이자 세 종족의 영역 가운데 위치한 곳이었다.

싸움과 협잡을 방지한다는 의미에서 ‘무풍의 산’ 이라고 불리는 협정 장소는 산이라기엔 야트막한 분지에 가깝다.

“체라, 도착하면 그레칸과 함께 있거라.”

“저 없이 들어가셨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시면 어떡하시려고요?”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된 상황이다. 밀라니아가 서둘러 회의가 열리는 분지로 홀로 향하려 하자 체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가요, 밀라니아 님. 수행원 하나 없는 수장은 위엄이 살지 않는단 말이에요. 마녀족의 참모로서, 밀라니아 님이 늑대와 박쥐에게 무시당하시는 꼴은 제 눈에 흙이 들어와도 못 봐요.”

떠벌떠벌 하는 걸 보니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마음을 단단히 정한 듯했다.

“그럼 그레칸은 어떡하고?”

“인간형으로 데려간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하면 되지요.”

밀라니아가 그레칸을 내려다보았다.

그레칸은 태연하게 르베리안즈를 호수에 집어던졌을 때와 달리 얌전했다.

언뜻 순해 보이기까지 하는 새끼 늑대를 불신 어린 눈으로 흘겨보던 밀라니아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레칸.”

“컹!”

“인간형으로 탈태해 보거라.”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고 짐짓 점잖게 말하자 그레칸은 흔쾌히 명령을 따랐다.

그레칸의 풍성한 털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곧 구릿빛 피부의 건강해 보이는 사내아이가 나타났다.

그새 팔다리가 좀 더 길쭉해진 듯했고 골격이 커졌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군.’

밀라니아는 미리 챙겨 온 옷가지를 그레칸에게 건넸다.

그레칸이 이게 뭐냐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네가 입기에 좋을 옷이다. 내 망토보단 편할 게야. 네 나이 또래 아이의 수중에 있던 걸 부탁하여 가져온 것이니 소중히 입거라.”

“…….”

그레칸의 시선이 밀라니아의 망토로 향했다. 왜 그걸 나두고 굳이 이런 걸 입냐는 떨떠름한 시선에 밀라니아가 씁 질책의 숨을 들이켰다.

“언제까지 내 망토를 쓰려는 게냐?”

인상을 쓰는 그레칸은 현재 상황이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망토가 편한 모양이지.’

그러나 그레칸이 옷을 입는 것을 본 밀라니아는 생각을 수정했다.

슬쩍 밀라니아의 눈치를 보고는 바지를 펼친다. 그러고는 바지에 엉거주춤하니 다리를 넣는데, 어째 불안하다 싶더니 기우뚱거린다.

지켜보던 밀라니아는 혀가 절로 차였다.

마녀족과 박쥐족에 비해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늑대족. 그레칸은 그중에서도 가장 문명에 소외된 일족이란 걸 깜박 잊어버렸다.

‘어떻게 입을지 몰라서 그랬구먼.’

기우뚱, 기우뚱. 그러고는 완전히 옆으로 무너지는 그의 몸을 재빨리 지탱한 밀라니아는 그레칸에게서 옷을 뺏어 들었다.

그러고는 적당한 옷을 빌려 달라고만 했지 제대로 보지는 못했던 옷을 제대로 살폈다.

남색의 정장 바지는 두껍지 않았고, 무슨 옷감으로 만들었는지 다리를 억지로 쑤셔 넣은 것만으로도 주름이 갔다.

‘에잉, 싸구려를 사 놨잖누.’

이 옷의 진정한 주인이 수집품의 품질보다는 그 종류와 모양을 중시한다는 것을 상기한 밀라니아는 묵묵히 바람과 물기를 이용하여 옷감을 쫙 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거미족에게 적당한 옷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할 것을 그랬지.’

회의 때까지 시간을 맞출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새 옷처럼 변한 옷을 그레칸에게 입히려던 밀라니아는 곧 문제점을 깨달았다.

휑한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빌려 온 옷가지를 뒤적거렸다.

‘없구나.’

“뭐 찾으세요?”

난감한 밀라니아의 표정을 보고 체라가 같이 옷가지를 뒤적였다.

“바지 안에 입어야 하는 것이 없느니.”

“아, 팬티요?”

대수롭잖게 말한 체라가 멀뚱멀뚱 선 그레칸을 흘끗했다.

“제가 갖고 있는 게 있기는 있는데…….”

밀라니아가 흠칫하고 체라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남자애 속옷을 갖고 있단 것이냐?”

“남자애 말고 여자애요.”

체라는 도리어 한심하단 눈으로 밀라니아를 흘기고는 중얼거렸다.

“가끔 어린 마녀들에게 필요할 때가 있어 챙겨 둔 게 있긴 한데, 남자애가 입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체라는 망토 안쪽을 뒤적거렸다. 밀라니아의 민무늬 단순한 망토와 달리 체라의 망토는 잡동사니 보물 상자였다.

육아에 필요한 모든 물건이 그 안에 있다고 하여 밀라니아가 부르는 명칭이었다.

안쪽에서 깨끗한 흰 속옷을 꺼낸 체라가 그레칸에게 속옷을 던져 주었다.

한쪽 구멍에 다리를 꿴 그레칸은 이내 인생을 팍 쓰더니 땅바닥으로 속옷을 탁 던졌다.

극도의 불만 표시였다. 팬티가 워낙 작은 나머지 허벅지까지도 가지 못한 것을 본 밀라니아와 체라는 버릇없는 행동에도 뭐라 하지 못했다.

체라의 보물 상자에서 나온 팬티도 도움이 되지 않자 밀라니아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입어야지 어쩌겠누.’

사실 속옷까지 갖춰 입는 늑대족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바지 대신 가죽을 꿴 천을 둘러 입고 다니는 늑대족을 생각해 보면 속옷 없이 바지를 입었다고 이상하진 않을 터.

밀라니아와 달리 체라는 좀 더 현실적이었다.

“바지 옷감이 싸구려라 그냥 입으면 안 될 텐데.”

잠시 고민하던 체라는 “아!” 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마침 그게 있네요.”

하면서 망토에서 꺼낸 뭔가를 밀라니아는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부드럽고 깨끗해 보이는 푹신한 하얀 천.

밀라니아는 그걸 갓 태어난 어린 마녀들이나 나이가 찼음에도 볼일을 가리지 못하는 늦된 마녀들에게서 본 적이 있었다.

“기저귀를 입으면 좀 나을 거예요. 특히 이건 좀 큰 애들 용이라 팬티보다 널널하고 얇아요.”

“그게 입혀지겠느냐?”

“뭐, 이것도 안 되면 어쩔 수 없고요.”

밀라니아와 체라의 시선이 동시에 그레칸에게 향했다.

그레칸은 바지로 제 하체를 가린 채 두 사람과 기저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떨떠름함이 가시고, 뚜렷한 거부감이 두 눈에 떠올랐다.

“싫다.”

“그냥 입으면 살이 쓸릴 게다.”

밀라니아가 타이르자 그레칸은 고개를 두어 번, 거세게 저어 댔다.

“굉장히 기분 나쁜 느낌이 나.”

그거, 하며 그레칸이 노려보는 건 하얀 기저귀였다.

밀라니아는 조금 머쓱해졌고 체라는 별꼴을 다 본다는 듯이 허, 탄식했다.

“꼴에 좀 컸다고 저러네요. 나중에 후회하지 마.”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레칸의 하체 사정을 고려했던 체라였지만 싫다는데 설득할 만큼 늑대족인 그레칸에게 정을 붙이고 있는 건 아니었다.

도리어 이렇게 신경 써 주는데도 싫다고 단호히 거부하는 그레칸이 못마땅한지 버려진 속옷과 기저귀를 망토 안으로 되돌리며 연신 툴툴거렸다.

“늑대족 주제에 가리는 건 많아가지고…….”

체라의 불만을 한 귀로 흘리며 밀라니아는 그레칸에게 옷을 입혔다.

바지는 한 쪽 다리, 다른 쪽 다리 짚어 주니 쑥쑥 다리를 집어넣어서 입히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다음은 흰 긴팔 셔츠. 매끄러운 광택이 도는 걸 보니 주름이 쩍쩍 가는 바지 옷감보다는 좀 더 좋은 재질인 듯하다.

바지를 입고 어느 정도 옷 입는 방법을 눈치챘는지 밀라니아가 셔츠를 들고 있자 그레칸은 몸을 돌려 팔 한 쪽, 다른 팔 한 쪽을 각각의 자리에 끼워 넣었다.

셔츠는 그레칸의 상체를 부드럽게 감싸 주면서도 널널하여 편해 보였다.

그 후 블랙 타이를 매 주었다. 물론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체라가 못 보겠다는 듯 밀라니아를 옆으로 밀었다.

“비켜 보세요.”

그레칸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아 타이가 완성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체라의 것도 밀라니아의 완성본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그레칸의 그릉거림이 체라의 귓가에 쏟아졌다.

체라는 약간 민망한 얼굴로 물러섰다.

“뭐, 타이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여자애의 리본을 묶는 건 잘해도 타이를 매는 건 체라도 처음이었던 것이다.

밀라니아는 혀를 쯧쯧 차면서도 엉성한 타이 모양은 쿨하게 넘어갔다.

지금 회의장에서 타이가 허접하다는 걸 눈치챌 자는 스칼렛밖에 없을 테고, 스칼렛은 늑대족 아이가 뭘 입든 신경 쓸 사람이 아니었다.

재킷을 주워 들던 밀라니아는 재킷 가슴 어림에서 툭 떨어져 나오는 동그랗고 딱딱한 물체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이건 여기 왜 있는 것이고?”

“커프스 링크 같은데요.”

“속옷은 없는데 이런 건 있다니 참으로 이상하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긴 했지만 까맣고 반질반질해서 꼭 그레칸의 눈동자를 닮은 커프스 링크도 소매에 달았다.

마지막으로 남색의 재킷을 어깨 위에 걸쳐 두고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완성된 남색 턱시도를 입은 그레칸은 어깨에 자리 잡은 재킷이 불편한지 팔을 몇 번 툭툭 올리더니 손으로 재킷을 붙잡아 내렸다.

그러고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눈으로 재킷을 내려다보다 결국 팔에 걸쳤다.

다소 방만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그래도 어느 귀족 집안의 자제 못지않게 멀쑥했다.

“흐음―.”

“차려입으니 멀쩡한 인간 남자애 같네요.”

놀랍다는 어투로 체라가 말했다.

그레칸의 지저분하고 야만적인 모습만 봤던 밀라니아도 조금 놀랐지만 곧 헛기침을 하고 대꾸했다.

“놀라울 것도 없다. 멀쩡한 옷을 입었으니 멀쩡해 보이는 게 당연하지.”

“린도 참. 별스러운 옷을 다 모은다고 했는데 이럴 때 도움이 되네.”

린은 밀라니아가 옷을 빌려 온 마녀의 이름이었다.

마녀족은 인간 대륙으로 여행 갔다가 돌아온 마녀들에게서 태어난 아이와 인간 대륙에서 버려진 아이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다.

마녀족은 인간 대륙, 즉 2대륙과의 관계가 다른 종족들보다는 밀접한 편이어서, 인간들의 옷을 좋아하여 소년이 입을 법한 곳까지 모으는 린의 존재가 이례적이지는 않았다.

다행이라는 체라의 말과는 달리, 정작 그레칸은 처음 입어 보는 옷이 불편한지 매끈한 미간에 주름이 잔뜩 가 있었으나 밀라니아도 체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자.”

생각지도 못하게 옷차림으로 시간을 지체한 밀라니아는 곧장 그레칸을 품에 안고, 빗자루에 올라탔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부드러운 품에 안긴 그레칸의 눈이 커졌다. 당황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 * *

밀라니아는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발칸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짜증을 내는 소리를 맞닥뜨렸다.

“지금이 몇 시요?”

“사고가 있었느니.”

발칸은 밀라니아가 일찍 와도 왜 이렇게 일찍 오냐고 투덜거릴 놈이었다.

 무시한 밀라니아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삼각형을 이루는 세 자리 중 빈자리에 앉았다.

“시작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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