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레칸은 혼나야 합니다
‘……?’
밀라니아는 침묵했다. 그레칸은 밀라니아가 답이 없자 눈살을 찌푸렸다. 슬쩍 눈치까지 본다.
습관적인 듯 그레칸은 목을 조이는 복종의 밤을 더듬었다.
밀라니아가 화가 나서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릴까 염려하는 듯했다.
혼란에서 벗어난 밀라니아는 당황한 적 없는 척 얼굴을 굳혔다.
“그래. 벌받아야 하느니.”
“…….”
“네가 뭘 잘못했는지는 알겠지?”
그레칸은 눈살을 찌푸렸다. 인간형이 되니 늑대일 때보다 표정 변화가 생생했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게구나.’
“손님이 있을 때는 끼어들지 말고, 함부로 사람을 물면 안 되느니.”
“손님…….”
중얼거린 그레칸의 입술이 불퉁해졌다.
“손님 아니다. 이상한 냄새가 났다.”
나름대로 명료한 이유였다. 밀라니아는 말문이 막혔지만 곧 정석적인 말을 뱉었다.
“……그건 박쥐족 특유의 체취일 뿐이야. 그걸 싫다 하는 건 시대에 뒤쳐진 언행이지. 박쥐족과는 이 대륙을 공유하는 종족이니 잘 지내야 하느니.”
마녀족, 늑대족, 박쥐족은 서로를 싫어한다. 꽤 널리 알려진 종족 혐오이지만,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레칸이 미간을 좁히고 밀라니아를 올려다보았다.
“물면 안 돼?”
밀라니아는 잠깐 그레칸의 말뜻을 헤아려 보았다.
그녀의 말에도 박쥐족이 꺼림칙한 듯한 그레칸. 그리고 현재 마녀의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박쥐족은 하나.
‘르베리안즈.’
입맛을 다시는 그레칸을 보자 밀라니아는 목덜미가 오싹했다.
늑대족의 차기 수장이 박쥐족의 차기 수장을 공격한다는 건 대륙 전쟁 발발의 시발점을 의미한다.
‘내 대에서는 안 되느니.’
싸우려면 자신이 영면에 든 이후여야 하고, 마녀족의 영역을 벗어난 곳이어야 한다.
밀라니아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절대 안 돼.”
“…….”
그레칸의 얼굴이 불만스러워졌다.
만약 복종의 밤이 없었더라면 밀라니아를 물고, 나아가 관에 누워 있는 르베리안즈까지 물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기세였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불만을 모른 척하며 나뭇가지를 치켜올렸다.
가운데가 부러진 나뭇가지는 처음보다 짤막했다.
“말로 해서는 이해를 못 하겠구나.”
“…….”
“뒤돌거라.”
그레칸이 불량한 눈으로 밀라니아를 쏘아보았지만 복종의 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레칸이 뒤돌았다.
“망토를 걷거라.”
그레칸이 꾸물꾸물 망토를 걷어 올리자 근육이 통통하게 배인 종아리가 드러났다.
아직 어린 개체인데도 튼실한 종아리였다.
밀라니아는 나뭇가지를 쥔 채 그레칸을 흘끗했다.
“오늘부로 다시는 함부로 사람을 물지 않아야 한다. 알았느냐?”
그레칸은 답이 없었다. 명백한 불만의 표시였다.
‘쯧쯧.’
밀라니아는 망설임 없이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찰싹!
한 대, 두 대, 세 대.
그레칸의 구릿빛 종아리에 벌건 실선이 생겼다.
심장을 열 번이나 뜯어 갔던 원수를 때리는 짜릿한 순간이다.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던 밀라니아는 문득 손을 멈추고 그레칸의 동태를 살폈다.
그레칸의 어깨가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는 꼴을 보자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 심했나?’
사육이라고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를 길들이고, 심장을 노리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앙심을 품은 그레칸이 심장을 내놓으라며 달려드는 상상을 하자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밀라니아는 재빨리 나뭇가지를 뒤로 던지고 헛기침을 했다.
붉은 선이 쭉쭉 그어진 종아리가 거슬린다. 슬그머니 망토를 내려 종아리를 가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느니.”
역시 불만스러운 듯 아랫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밀라니아는 지금이 당근을 줘야 할 시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르릉…….”
그레칸은 분에 못 이긴 듯 계속 씨근덕댔다.
아무리 천덕꾸러기라고는 하나 늑대 일족으로서 맞는 일은 없었던 것일까.
그것도 복종의 밤을 억지로 채운 마녀에게 맞은 다음에야, 분할 만도 하다.
다만 분한 것으로 끝내야지, 앙심을 품는 건 금물이다.
‘곤란한지고.’
밀라니아는 고민하다가 그레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오려무나.”
행여나 앙심을 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목소리도 부드럽게 흘러나갔다.
그레칸은 이게 명령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표정이었지만 밀라니아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내 너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그랬느니라.”
적당히 입에 발린 말을 해 주자 그레칸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얌전히 턱을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놓았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한 팔로 안고 다른 손으로는 망토 자락을 걷었다. 또 때릴까 걱정이 되었는지 그레칸이 움찔했다.
밀라니아는 약간 머쓱해졌다. 그레칸이 놀라지 않게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종아리의 붉은 선. 그레칸에 대한 묵은 분노로 쫙쫙 그어진 선이 선명하기도 했다.
쯧, 혀를 차고 손가락을 튕겼다. 손바닥 위에 마녀 제조 효과 직빵 연고가 소환되었다.
대마녀는 마녀목에서 태어난다. 따라서 밀라니아도 이제껏 양육을 받은 적도, 양육을 한 적도 없다.
그렇지만 체라의 어린 마녀 훈육 장면을 구경한 적은 있다.
[체벌도 사랑이 느껴지게끔 해야 하거든요.]
회초리를 들어 체벌하더라도 밤중에 어린 마녀의 방에 들어가 약을 발라 주던 체라.
그녀는 그럴 거면 귀찮게 체벌을 할 필요가 없지 않냐는 밀라니아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잘못한 게 있으니 벌은 내려야 하는데 속상함이 오래가면 안 되잖아요.]
지금 상황에 딱 적절한 해답이다.
‘요컨대 분노는 풀되 상대방은 그 분노마저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는 게지.’
잘못 짚었다. 체라가 한 말은 사랑의 훈육이 서로의 앙금이 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밀라니아는 연고를 그레칸의 종아리에 조심스럽게 발라 주었다.
열이 올라 후끈후끈한 종아리에 차가운 연고가 닿자 그레칸이 계속해서 움찔거렸다.
‘그렇게 아픈가?’
나뭇가지가 조금 단단하기는 해도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밀라니아는 예상보다 체벌이 아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차 혀를 차고, 손가락을 좀 더 섬세하게 움직였다.
기억 속에서 집착의 그레칸은 아주 집요한 놈이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기억하여 나중에 어떤 식으로 보복할지 모르니 앙심을 풀어 줘야 한다.
이 모든 건 마녀들 앞에서 생중계되고 있었다.
체라가 마녀들 틈에서 빠져나와 밀라니아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에게 그레칸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대꾸해 주었다.
“사랑의 훈육.”
“체벌을 하고 바로 약을 발라 주시다니……. 병 주고 약 주고의 표본이네요.”
“…….”
“적어도 잘못을 생각할 시간을 줘야죠.”
당장 앙심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밀라니아는 체라의 조언에 흠칫했다.
‘내가 잘못하고 있단 말이냐?’
슬쩍 고개를 돌리자 마녀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밀라니아 님이 지금 뭐 하시는 거지?’ 하는 표정들이다.
아차, 이게 아니구나.
혼이 난 적도, 누군가를 사랑으로 혼내 본 적도 없는 밀라니아는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겐 종잡을 수 없이 느껴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헛흠, 헛기침을 하고 진중히 대꾸했다.
“……누구나 약간의 실수는 하는 법이니라.”
연고는 다 발랐다. 밀라니아는 연고가 묻은 손가락을 어정쩡하게 들고 난감해했다.
그레칸은 이마를 그녀의 팔뚝에 댄 채였다.
체라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레칸이 ‘병 주고 약 주고’를 당했다고 생각할까 봐 염려가 된 밀라니아는 작위적으로 들릴 만큼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레칸이 빼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까만 눈을 응시하며 조곤조곤 말했다.
“이거 하나는 알아 둬야 하느니.”
“……뭘?”
“너를 싫어해서 혼을 낸 게 아니다. 네가 그 정도는 이해할 만큼은 성숙하다고 기대해도 되겠느냐.”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레칸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스쳤다.
잘 자는 와중에 납치를 당하고 철창에 가둬지고 그것도 모자라 독방에 가둬지다가 거부할 수 없는 목줄을 채워진 과거를 생각하는 눈이었다.
“오늘은 너도 속이 많이 상했을 테니 들어가서 쉬렴. 훈련도 쉬게 해 주마.”
‘이 정도면 나쁜 마음은 먹지 않겠지?’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하자 그레칸이 눈을 굴려 밀라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밀라니아가 어서 쉬라며 성으로 등을 떠밀었다.
몇 걸음 걸어간 그레칸이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난데없는 체벌 논란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밀라니아는 그의 시선에 억지로 얼굴을 활짝 폈다.
그레칸의 고개가 슬쩍,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러고는 밀라니아의 은빛 망토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종아리 부근을 걷었다.
짙은 초록색 연고가 발려져 있는 종아리를 묘한 눈으로 응시하고 다시 밀라니아를 바라본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이 일을 그의 복수 리스트 같은 데다가 정리해 놓으려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밀라니아의 억지 미소는 그레칸이 성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씻은 듯 흐려졌다.
“후, 죽을 때가 다 된 것이 틀림없구나. 이 내가 원수의 눈치까지 봐야 하다니.”
한탄하는 그녀에게 체라가 떽떽거리는 어투로 말을 붙였다.
“밀라니아 님, 혼을 내실 땐 확실하게 엄하게 내셔야 해요. 그렇게 마음 약하게 구시면 애 버릇 나빠져요.”
마법 제일 빨리 성공한 마녀 배출 1위, 인성과 지혜가 뛰어난 마녀 배출 1위에 빛나는 체라다.
사육과 양육에 있어 뛰어난 경력과 기술을 발휘하는 그녀는 밀라니아가 답답한 듯 혀를 찼지만, 허탈함에 휩싸인 밀라니아에겐 시도 때도 없이 몰아치는 가을바람보다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하아…….”
한숨을 쉬며 밀라니아는 손으로 이마를 훔쳤다. 순전히 기분 탓으로, 땀은 한 방울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그레칸은 자기 몸에 상처를 낸 사람을 절대 잊지 않느니.”
밀라니아는 몇 번째 회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생에서 이를 아득바득 갈며 그레칸을 처치해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던 때를 떠올렸다.
악연의 고리를 끊고자 그레칸을 처리했고, 처리했다고 믿었다.
이 주인공들에게만 은혜로운 세상에서 멀쩡히 살아 돌아온 그레칸을 보기 전까지는.
‘그때는 정말 최악이었지.’
고생이란 고생을 다 회상하고, 얼굴이 파리해진 밀라니아가 몸을 떨자 체라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레칸이요?”
“그래. 체라 너도 명심해 두거라.”
“이상해요. 고작 새끼 늑대 가지고 뭘 그렇게 조심하세요?”
“……애들은 금방 크는 법이야. 그것도 모르느냐?”
그레칸이 집착 남주가 되기까지 20년도 채 남지 않았다.
“훈련용 공이나 몇 개 더 만들어야겠군.”
* * *
밀라니아의 그레칸 사육 방식은 이랬다.
복종의 밤을 통해 복종을 세뇌하는 한편 잘해 줌으로써 그녀의 애정을 소중히 느끼게 한다.
밀라니아는 궁극적으로 그레칸이 자신을 부모처럼 여기기를 바랐다.
‘그러면 앨리지를 만나도 멈칫하긴 할 테지.’
그런고로 밀라니아는 그레칸에게 다정했다. 그런데 거기는 일단 그렇다 치고 새로 나타난 골칫덩이는 어찌해야 할꼬?
‘르베리안즈가 깨어나면…….’
밀라니아는 그녀의 방에 있었다.
언젠가부터, 정확히 말하면 박쥐족이 다녀간 날부터 평화롭기 그지없던 그녀의 방은 동굴 천장에 맺힌 고드름이 생긴 양 차가운 이질감을 분출하고 있었다.
모두 방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외관만 고급스러운 검은 관 때문이었다.
관을 내려다보는 밀라니아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그레칸은 어떻게 사육해야 할지 대략 감이 잡혀 가는데 르베리안즈는 깜깜하다.
어린 시절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아 본 적 없는 그레칸과 달리 르베리안즈는 박쥐족의 보물이었다.
그러니 밀라니아가 어느 정도 잘해 준다고 마음을 열 리 만무하다.
그레칸이 고슴도치처럼 빽빽한 가시를 세우고 경계한다면 르베리안즈는 사랑을 듬뿍 받아 고고해진 장미처럼 까다롭다고 할 수 있다.
슬쩍, 관의 문짝을 열었다.
르베리안즈는 창백한 얼굴로 관 안에 누워 있었다. 언뜻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다.
르베리안즈는 박쥐족이 돌아간 그날 이후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정량은 일주일에 피 한 방울.’
밀라니아는 신중하게 손가락에서 피를 뽑아내어 르베리안즈의 입술에 떨어뜨렸다.
행여나 피가 더 떨어질까 봐 한 방울만 떨어뜨리고 즉시 손을 회수했다.
핏방울이 르베리안즈의 아랫입술에 안착했다. 마치 르베리안즈가 빨아들이기라도 하듯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언제 봐도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꼭 내 생기를 탐하는 것 같지 않누.’
밀라니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신중한 시선으로 르베리안즈를 관찰했다.
르베리안즈의 창백한 얼굴에 약간의 혈색이 돌았다. 다행히 그것뿐으로, 눈을 뜨지는 않는다.
‘갑자기 눈을 뜰 수도 있으니까 좀 지켜봐야지.’
긴장을 놓지 못한 밀라니아가 르베리안즈에게 눈을 떼지 않는 와중이었다.
끼익.
“크릉?”
방문이 열리고 그레칸이 들어왔다. 보드라운 털이 부숭부숭 난 늑대 상태의 그레칸.
긴 주둥이는 훈련용 공을 물고 있었다.
밀라니아가 공을 던지면 그레칸이 찾아오는데, 처음에는 반나절 걸렸던 것이 점차 짧아져서 이제는 한 시간 만에 공을 찾아오기도 한다.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그레칸을 보며 밀라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점점 훈련이 아니라 공놀이를 해 주는 것 같지 않느냐.’
미심쩍게 바라보자 그레칸은 꼬리를 더욱 세게 홱홱 흔들다가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밀라니아의 발치에 내려 얌전히 앉는다.
며칠 같이 지내보니 알게 되는 게 있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꼬리가 격하게 흔들릴수록 ‘좋다’ 또는 ‘흥분했다’라는 뜻이란 걸 이해했다.
한마디로 지금 그레칸은 기분 좋은 상태다.
“잘했도다.”
떨떠름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레칸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어 주었지만 그레칸은 그것도 좋다는 듯 헥헥거렸다.
벌어진 주둥이를 자연스럽게 긁어 주는 밀라니아의 얼굴은 태연했다.
머리를 쓰다듬고 턱을 긁어 주는 정도야, 벌써 오늘 하루만 해도 세 번이나 반복된 일이라 저도 모르게 시큰둥해져 있었다.
‘지금은 르베리안즈의 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아는 게 더 중요하느니.’
게다가 그녀의 마음은 그레칸이 아니라 다른 콩밭에 가 있었다.
순조롭게 사육 중인 그레칸보다는 미지의 남주 르베리안즈에게 관심이 쏠린 것이다.
주인이 생긴 개는 주인의 관심이 어딜 가 있는지에 대해 온 촉각을 기울이는 법이다.
그레칸은 더는 야생 늑대가 아니었다.
“크릉, 컹컹!”
불만스러운 목울음이 터져 나오는 그의 콧잔등엔 주름이 잔뜩 가 있었다.
“그래그래.”
대충 달래 준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떨어뜨린 훈련용 공을 주워 들어 창문을 통해 던졌다.
“재미나게 주워 오거라.”
그레칸은 ‘이게 아닌데’ 하듯 얼굴을 구겼지만 반복 학습이 된 몸은 충실히 공을 따라 내달렸다.
그레칸이 나가고 밀라니아는 다시 르베리안즈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오뚝한 콧날. 어렴풋하게 붉어진 입술. 아직 어리지만 이목구비가 선명한 얼굴은 창백하리만치 희다.
생기 없는 인형 같은 꼴이었으나, 밀라니아는 그의 뺨에 오른 은은한 홍조를 놓치지 않았다.
‘아직 혈색이 사라지지 않았다.’
생기가 도는 르베리안즈는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밀라니아에겐 원수의 어린 얼굴일 뿐이었다.
무심한 표정의 밀라니아는 냉철하게 르베리안즈의 상세를 분석했다.
한 방울은 그 정도. 다섯 방울은 르베리안즈가 눈을 뜰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너무 나중에 병이 나아도 안 되느니. 나와 친밀감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앨리지를 만나게 되는 상황은 없어야지.’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될 수는 없다.
앨리지를 만나기 전에, 사육할 시간. 밀라니아는 적어도 5년을 내다보았다.
‘한 방울은 좀 적은 감이 있는데 앞으로는 피 두 방울로 시도해 봐?’
골똘히 생각에 잠긴 참이었다.
벌컥.
문이 열리고 위풍당당한 그레칸이 보무도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마치 ‘내가 벌써 왔다.’라고 외치는 듯했다.
밀라니아가 공에 마법을 걸지 않은 탓에 공은 가까운 곳에 떨어졌고, 그레칸은 재빨리 공을 입으로 낚아채어 헐레벌떡 올라왔다.
최단 시간의 귀환.
‘마녀가 놀라워하겠지!’
그러나 막상 도착하니 밀라니아는 그를 대견하게 여기기는커녕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꺼림칙한 관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데구루루.
입에서 떨어진 공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외롭게 구석으로 굴러갔다.
“으르릉…….”
그레칸의 의기양양한 눈은 일그러졌고 작은 몸집은 분에 못 이겨 거칠게 씩씩거렸다.
밀라니아는 따끔한 느낌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손을 왕, 물고 있는 새끼 늑대. 눈이 마주치자 으르렁, 목을 울린다.
‘……?’
밀라니아는 성질을 내는 그레칸을 보자 헷갈렸다. 손이 아프지도 않고.
‘뭐지? 장난쳐 달라는 건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세게 물었다면 공격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심통을 부리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왜?”
다른 손으로 그레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밀라니아가 물었다.
까칠하면서도 풍성한 털이 밀라니아의 손에 의해 슥슥 눌렸다.
“이빨이 가려우냐?”
“크르르…….”
밀라니아는 그레칸의 주둥이 살을 슬쩍 들추어 이를 확인했다.
으릉, 으르릉. 뭐가 그리 불만스러운지 그레칸이 작은 목울음을 냈다.
“멀쩡한 거 같은데.”
뾰족하고 하얀 이를 확인한 밀라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레칸을 힐끗했다.
인상을 잔뜩 쓰고 으르렁댄다. 밀라니아는 약간의 귀찮음과 곤혹스러움에 난감함을 느꼈다.
말로 해도 이해가 안 갈 판에 으르렁대기만 하니. 짐승이 아니고서야 알아듣겠는가 말이다.
밀라니아는 하는 수 없이 그레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그러는 사이 그레칸은 문짝이 열린 관을 노려보며 콧잔등을 실룩였다.
책상 위에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기분 나쁜 냉기는 뾰족한 가시처럼 피부를 찔러 댔다.
‘기분…….’
‘나빠!’
“크아왕!”
그레칸이 전광석화처럼 튀어 올랐다. 진로 방향엔 르베리안즈의 관이 놓여 있었다.
뒤늦게 깜짝 놀란 밀라니아가 재빨리 그레칸을 붙잡아 안았다.
“크르렁! 크렁!”
밀라니아의 품에 안긴 그레칸이 다리를 바둥거리며 벗어나려고 했다.
팔딱대는 것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은 밀라니아가 혀를 차며 강하게 명령했다.
“힘 빼!”
즉시 복종의 밤이 작동했다.
스륵. 다리에 힘을 뺀 그레칸이 불만 어린 눈을 꿈벅거리며 밀라니아와 눈을 맞추었다.
밀라니아가 눈을 부라리자 끼잉거리며 눈을 내리깐다.
곧 그레칸은 얌전히 밀라니아의 품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