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82화 (383/527)

제68장. 수면(4)

들려오는 발소리가 둘이었다.

거리낌없이 당당한 구두 소리가 하나, 묵직하게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하나. 후자는 오늘 이미 들었던 것이었으나 다른 하나는 익숙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누구의 걸음일지 유추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므로, 수도 경비대장 트리번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앞에 앉아있던 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왕세자 저하와 지그프리드의 소공작께서 오신다. 일어나거라."

오래 전 만났던 칼리안을 앞에 두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예를 보이지도, 심지어 제대로 된 존대조차 하지 않았던 남자. 팔이 잘리기 전에는 다친 팔의 통증 때문에, 팔이 잘린 뒤에는 상실의 감각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왕족의 몸에 손을 댄 죄로 사형이 예정되어 있었던 탓에 그리 행동했던 남자. 그 뒤 칼리안으로부터 벌 대신 이해를 받았던 남자.

노튼 라미레즈가 이번에는 군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어두운 방 안으로 함께 들어서는 두 명을 향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왕세자 저하와 소공작님을 뵙습니다. 카이리시스 경비대장 트리번 피아트입니다. 그리고 이 자는 휘트린 영지에서 온 노튼 라미레즈입니다."

트리번의 인사가 이어졌다.

레릭이 다가와 플란츠가 앉을 자리의 의자를 한 발 뺐다. 보일 듯 말 듯한 움직임으로 고개만 끄덕여 인사를 받은 플란츠가 그 자리에 앉았다.

'칼리안. 어디에 있는데.'

'수도 안, 에이난샤의 인근입니다. 그 자의 말을 따라 해당 지역 주변을 수색하던 중 여러 명의 피 냄새를 강제로 지운 것으로 의심되는 장소가 있음을 힐 경이 확인했습니다. 그 자의 진술과도 일치합니다. 힐 경의 말로는 한 명의 피 냄새, 칼리안 왕자님의 피 냄새가 에이난샤로 향하다 끊겼다 합니다.'

'······ 에이난샤. 귀족들이 사는 곳 아니던가.'

'네. 맞습니다.'

'그 안 어디인지는.'

'보다 믿을 수 있을 높은 사람을 불러줄 수 있다면 직접 말하겠다 합니다만. 직접 만나지 않는다 하여도 에이난샤 쪽으로 발칸의 마법사들을 보내 저택을 수색한다면······.'

'만나지. 지금.'

'······ 알겠습니다.'

조금 전 왕궁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던 플란츠가, 드미레아가 앉기를 기다린 뒤 등받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한 마디로 플란츠 한 명을 제외하고는 이 자리의 모두가 불편해할 것 뻔한 자세를 취했다는 소리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는 플란츠가 고개를 비딱하게 세웠다. 그러자 트리번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 휘트린 영지 내에서 의심스러운 일이 생겨 그에 대해 칼리안 왕자님을 직접 뵙고 말씀을 드리고자 수도를 찾아왔다 합니다. 그러다 휘트린 영지에서 보았던 수상한 자를 여기서 다시 맞닥뜨리게 되어 쫓던 중에 칼리안 왕자님을 보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칼리안 왕자님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다 하나, 말씀을 전해드렸던 바와 같이······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트리번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보인 플란츠의 눈이 노튼을 향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선 노튼을 그렇게 한참동안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말해."

짧은 명령.

앉으라는 허락도 없는 말.

왕족은 물론 귀족들의 이러한 행동이 다른 사람을, 특히 평민을 얼마나 위축시키는지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상당히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드미레아는 그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공작령에 가 있다 칼리안과 플란츠를 따라 잠시 수도로 올라온 기사 로난시테로부터 '두 왕족과 아르센이 평민들도 자주 찾는 식당에 들러 식사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은 바 있었고 슬레이만으로부터 '둘이 직접 양조장에 들러 술을 사왔다' 라는 말도 들었던 드미레아다. 물론 그런 말이 없었다 하더라도 플란츠가 평소에 저런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임은 이미 잘 알지 않나. 그러니 이유가 있으리라 여기는 중이었다.

플란츠의 눈은 여전히 노튼에게로 향해 있었다. 원하는대로 '더 높은 사람'이 이렇게 직접 걸음을 했으니 제대로 말하라는 뜻이었다.

"······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저하."

다소 갈라진 노튼의 목소리가 플란츠를 향했다.

그 얼굴을 잠시 쳐다보던 플란츠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노튼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옆에 서있던 트리번에게 낮은 목소리를 냈다.

"입이 있다 해서 왔는데. 머리가 있군."

듣겠다 하는 내용만 걸러내어 전해 줄 머리는 필요하지 않다는 말.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고 이해할 머리 역시 필요없으니 입만 놀리게 하라는 말.

허락도 없이 왕족에게 질문을 던진 행동에 대한 질책 따위는 건너뛰고 그런 말만 했다.

"죄송합니다, 저하."

대신 사과를 전한 트리번이 노튼을 향해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감추던 것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올리거라."

이 말을 들은 노튼이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 뒤 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뗐다. 굳이 필요없다 했던 머리로 그렇게 잠시 생각을 했다.

그 모습을 본 플란츠의 한쪽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튼이 플란츠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눈을 바라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으니 플란츠의 비소 어린 입을 보며 말을 시작했다.

"······ 말씀을 드리면, 저하께서는."

"됐어."

드르륵!

몸을 일으키며 일부러 밀어낸 의자 소리가 침묵에 잠긴 방을 울린다. 조금 놀란 트리번이 플란츠를 쳐다봤고 드미레아는 말없이 함께 일어났다. 노튼은, 일어나 선 플란츠의 구두 끝을 내려다봤다.

"더 필요한 이야기가 있다면 경비대장에게 듣지."

"네. 저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왜 그러시느냐 묻지 않고 대답만 한 트리번이 뒤돌아서는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왕실에서는 사람을 상대하는 법까지 가르치나보다,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형님을 앞에 둔 아랫사람이 말에 앞서 뜸을 들이는 것은 긴장하거나 신중하여 말을 고르는 중이거나 계산을 한다는 소리입니다. 단순히 긴장한 이들은 입술이 마르고 목젖이 자주 움직입니다. 그런 이들과의 대화는 크게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높은 사람을 앞에 두어 겁을 먹은 것뿐이니 편안하게 대해주시면 충분합니다.'

사실은 왕실이 아니었다.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이었다.

'신중한 이는 이야기의 결론을 먼저 언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머릿속으로 할 말이 정리되어 있으니까요. 목소리가 고르고 얼굴이 차분합니다. 눈동자가 많이 움직이지 않고 불필요한 행동이 없습니다. 멜피르 폴룬 남작이나, 그와 함께 일하고 있는 레딩턴 자작, 기사단 연합을 이끄는 에이프린 백작이 그러합니다. 그런 이들을 경계할 필요는 없겠으나 형님께서도 함께 신중히 말을 듣고 대해주셔야 합니다.'

왕실에서는 예법을 가르쳤고 실리케는 다스리는 법을 가르쳤다. 물론 잊지 않았다. 잘 익히고 나름의 방식으로 잘 쓰고 있다. 그러나 지금 플란츠가 상기하고 있는 것은 예법도 아니고 다스리는 법도 아니었다.

'문제는 후자입니다. 이야기에 앞서 조건을 먼저 내뱉는다면 듣지 마십시오. 형님께 필요한 내용이 아닌 다른 말로 속을 들춰보려 한다면 거부하세요. 말을 자르고 상대하십시오. 자리를 벗어나도 됩니다. 대화의 주도권은 언제나 형님께 있음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상대의 혀에 휘둘리면 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이야기라 한들 형님께 도움 될 것이 없습니다.'

손해보지 않는 법, 이기는 법, 다루는 법.

상대하는 법.

그것을 가르쳐 준 칼리안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 저벅, 저벅.

말로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일가견이 있다 못해 말싸움 하나로 세렌티도 이겨먹을 것 같은 놈이 아닌가. 칼날을 손으로 든 것인지 입으로 든 것인지 알 수 없는 동생의 가르침을 아주 잘 배운 순한 플란츠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발을 옮겼다. 재빨리 따라온 레릭이 문을 향해 먼저 걸음을 했다.

"그 형에 그 아우라 하는 말이 틀리기도 하나 봅니다."

"라미레즈. 입을 다물거라."

뒤에서 건네는 노튼의 말, 그리고 트리번이 노튼을 제지시키는 소리가 들렸다.

- 저벅.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계속 걸었다.

그런 플란츠를 향한 말이 계속 이어졌다.

"때로 아우가 형보다 능숙한 경우도 있음은 압니다만."

"입을 다물라 하지 않았느냐. 왜 이리 무례하게 구는 것이더냐.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잊은 것이냐."

- 저벅.

플란츠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문을 향해 발을 옮겼다.

"이럴 때 칼리안 왕자님이었다면, 필요한 말을 꺼내놓으면 신변을 보호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먼저 건넸을 겁니다. 다른 분도 아닌 플란츠 저하께서 칼리안 왕자님의 행방을 듣고자 오셨는데 제가 무엇을 믿고 입을 열겠습니까."

- 우뚝.

답답하다는 듯 계속된 그 말에, 플란츠의 발이 멈췄다.

'아. 물론 사람이 다 천차만별이니 전부 한 방법으로 상대하실 수는 없겠죠. 언제나 예외는 있습니다. 그건 그때그때 상황 봐서 형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세심하지 않은 가르침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아른거린다.

"내 아우님 손에 팔을 잃었다던 사람이 내 아우님 찾는 일을 돕겠다며 굳이 찾아왔는데. 내가 무엇을 믿고 나서서 신뢰까지 줘야 하는지 모르겠군."

- 저벅.

다시 옮겨진 걸음이 열린 문 앞에 다다랐다.

플란츠가 레릭을 쳐다봤다.

고개를 숙여 보인 레릭이 문을 열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내 그 손을 치우고 플란츠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노튼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속삭이며 물었다.

"저하······. 왕자님 행방을 아는 자라 하는데 한 번만 다시 물어보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수색을 하여 찾아내는 것도 물론 방법입니다만 그리 되면 시간이······."

"브리센 후작저에 있다는데. 무엇을 더 물어야 하지."

플란츠가 레릭을 향해 말했다.

노튼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갑자기 웬 후작저냐는 눈이 된 레릭을 향해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자가 누군가 내 아우님을 후작저에 데리고 들어가는 걸 봤는지 나에게 말하지 않은 그 정황들로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내 아우님 편의 높은 사람이 오면 자신이 알아낸 것을 얘기하겠다 했던 자가 나를 보고 입을 다무는군. 내 아우님 행방을 안다 말했으면서 이제와 신변 보호를 입에 담고. 그렇다는 건 나를 경계한다는 말 아닌가. 그건 결국 브리센이 얽혔다는 뜻인데. 나와 브리센 후작의 사이를 몰라 나까지 경계하는 것일 테니까. 그 정도로 소식에 둔한 자라면 에이난샤의 집만 보고 그 집의 주인이 브리센과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을 리 없지."

설명을 이어나가는 소리가 작지 않았던 까닭에, 멀리 서 있던 노튼의 시선이 플란츠에게 닿았다.

"그레이 브리센 본인의 집이 아니고서는."

플란츠의 생각이 빠른 적이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어서, 이미 익숙한 레릭은 다른 의문 없이 그냥 그렇구나 하는 얼굴을 했다. 거기는 이미 전하께서 살펴본 곳이라는 말은 듣는 귀가 많았던 탓에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런 것을 모를 플란츠는 아니니까.

곧 플란츠가 곁에 있던 드미레아를 향해 말했다.

"지그프리드 기사들 전부 집어넣어. 대문 닫지 말고."

"저하의 행보에 지그프리드가 말려들까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 그래."

"네, 그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마음 편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았어."

살짝 웃은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트리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사람. 내 정혼자 되시는 3왕자님의 영지에서 온 손님이라 하니, 조사할 것이 더 없다면 저택으로 초대하여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아······ 네, 물론입니다. 문제될 것 없습니다."

지그프리드에서 신변을 보호하겠다 하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겠나. 때문에 트리번은 흔쾌히 대답했다.

"신경 써 주어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소공작님."

대화가 일단락 된 것을 확인한 레릭이 그제야 문을 열었다.

그곳에 더 머물 이유가 없는 플란츠가 가장 먼저 발을 옮겼고 드미레아와 레릭이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다시, 저벅 저벅. 두 발소리가 어두운 복도를 따라 멀어져가다 이내 사라졌다.

* * *

어쩐지.

죽은 레넌이 꿈에 보이더라니.

쿡쿡 쑤시는 허리를 툭툭 때린 그레이가 주변을 둘러봤다. 마주보고 선 왕세자의 뒤에 도열한 새하얀 로브의 물결, 그리고 자신의 뒤에 몇 겹을 두고 서 있는 은빛 갑주의 기사들을 확인했다.

수를 세어 볼 것도 없이 불리하다.

아니. 수를 세는 것이 필요하기는 한가? 왕세자의 뒤에 서 있는 앨런 마나실, 그 한 명만으로 이미 전력 차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는데.

때문에 간신히 만들어낸 웃음을 내보인 그레이가 입을 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하."

"알아."

······ 뭘 아시는데요.

하는 얼굴을 가까스로 집어넣은 그레이가 다시 한 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미 꽤 오랫동안 플란츠와, 플란츠의 뒤에 서 있는 병력을 보며 대치하는 중이었다. 르메인이 정말 이 행보를 용인한 것인지는 몰라도 혹시나 르메인 모르게 무작정 데려 나온 병력이라면 일단 엘라자르가 이 상황을 해결하러 올 테니 잠시 버티려는 생각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말고. 열어."

두 눈을 꾹 감은 그레이가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둘이 마주쳤던 그 날. 속내를 감추고 칼리안의 손을 잡고 있다 했던 플란츠가 아니던가. 때문에 일단은 날을 좀 그만 세우고 열린 마음으로 플란츠를 살펴보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대체 감춰뒀다는 그 속내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마음을 바꿔먹는 바람에 자신의 아들인 라시드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음을, 그래서 라시드가 덫을 하나 만들었다가 엉뚱한 왕자를 잡을 뻔했음을, 덕분에 죽은 레넌이 그레이의 꿈에 살짝 나왔다가 도로 들어간 것임을 모르는 채였다.

"하지만 저하. 전하께서 이미······."

"마나실 군단장."

"네, 저하."

"대신 좀 열어줬으면 좋겠는데. 가능할까."

"문을 열까요, 아니면 둘러보시기 조금 더 편하도록 벽과 지붕을 열까요. 알려주시면 노력해보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 작자의 가슴팍을 열어보는 것도 방법이기는 하겠습니다만.

어쩐지 이런 말이 섞인 듯한 앨런의 말에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결정을 전했다.

"전부 다······."

"아닙니다. 문 열겠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그레이가 플란츠의 말을 막았다.

"다만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 안에 칼리안 왕자님 없습니다. 만약 없는 것이 거듭 확인된다면 저는 이 일을······."

"나 역시 없기를 바랍니다."

앨런의 목소리가 그레이의 말을 잘랐다.

지금껏 부드러운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던 앨런이 그레이를 직시했다.

"만약 이 안에 칼리안 왕자님이 계시는 것을 확인한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범인을 찾아 손 끝부터 태워내는 수고를 해야 할 터이니."

생각같아선 지금 당장 후작저 전체를 뿌리뽑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참았다. 혹시라도 화를 참지 못할 것 같다면 그냥 왕궁 안에서 많이 놀랄 르메인이나 달래주고 있으라던 플란츠의 말을 생각하며 꾸욱 꾹 참는 중이었다.

결국 그 말이 그레이의 입을 다물렸다.

곧 앨런이 한 발을 내딛었다. 몸이 닿은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인 것도 없었으나, 그레이의 몸이 무언가에 강하게 떠밀려 두어 걸음을 물러서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본 브리센의 기사들이 그제야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수비망을 풀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몇 명이 지나갈만한 길을 냈다.

- 철컥!

검을 다시 고쳐 쥔 키리에가 한 팔을 들어 앞을 가리켜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발을 움직였다. 한때는 레넌 브리센의 집이었고 지금은 잠시나마 후작저가 된 그 견고한 성에 직접 발을 들였다.

지금 당장 브리센과 연관된 모든 이들을 세상에서 다 지우고도 남을 병력을 홀로 이끌고서.

* * *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아델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는 칼리안의 귀에도 확연히 들려오는 분주함 때문이다.

곤란하다는 얼굴이 된 아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나 도망가도 돼?"

다른 말이 필요없었다.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아빠가 왔구나, 싶어서.

"도망갈 수는 있어?"

"혼자서야, 얼마든지."

"가, 그럼. 스승님께는 내가 설명할 테니까."

"혼자 있기 위험하겠으면 잠깐 더 있어줄게. 그 정도야 뭐. 도와주지."

"작정하고 숨으면 스승님도 나 못 찾아. 괜한 걱정 마."

하긴. 소드마스터였지.

잠시 잊었던 것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인 아델리아가 무언가를 하나 꺼내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칼리안이 고개를 들자 아델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국경 열리면 그 쪽으로 편지 보내."

좌표가 씌인 종이였다.

바깥 상황을 우려한 칼리안이 그곳에 적힌 좌표를 그냥 외운 뒤 태웠다. 그런 칼리안을 향해 아델리아가 다짐을 받듯 말했다.

"구해준 값 제대로 갚아야 해. 안 그러면 나 여기 또 와야 되니까."

"알았어."

아델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법 대신 손을 써서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가 싶더니 팔과 허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의 모습이 모두 환각이었다는 것처럼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자신이 없어지는 순간 피 냄새와 기척이 모두 퍼져나가리라는 말, 그러니 혹시 모를 싸움을 준비하라는 말, 몸 조심하라는 말, 다음에 보자는 말. 그 모든 말 중 단 하나도 건네지 않고서.

그것이 참으로 아델리아답다는 생각에, 아델리아가 사라지는 것에 맞춰 제 기척을 지운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바로 그 웃음을 씻어낸 듯이 지운 칼리안이 허리를 폈다. 몇 번을 베이고 어디를 어떻게 찔렸는지 모를 몸을 곧게 세웠다. 섣부르게 움직여 피 냄새를 퍼뜨릴 생각은 없었으므로 가능한 숨을 참으며 그림자 속에 숨은 채 바깥 소리를 살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가만히.

"키리에."

그리고 조용히.

앨런이 왔다면 분명 함께 있을 자신의 기사를 불렀다.

바깥 상황은 모른다. 사실 이 곳이 저택의 어디인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허나 어차피 앨런이 이곳에 왔다면 괜히 브리센의 기사들에게 들키느니 앨런과 키리에에게 발견되는 것이 나았다. 대책이 있어 찾아온 것일 테니까. 그러고보니 발칸을 데려왔나본데 아무 대책없이 군대를 끌고 오진 않았겠지.

······ 에이, 설마.

불안함은 일단 애써 치워냈다.

그 대신 오래도록 보지 못한 앨런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 자신의 실종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번져나갈지에 대한 여러 경우의 수, 라시드 브리센을 언제쯤 처리하면 좋을지에 대한 인내심 가득한 계획 등. 참 많은 생각을 떠올리고 또 지워내가며 주변을 살피던 그 때.

- 저벅.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났다.

처음 그 소리를 들은 칼리안의 얼굴에 반가움이 떴다.

- 저벅.

그러다 곧 미간을 찌푸렸다.

- 저벅.

그 뒤에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완두콩이 안 굶어죽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에 대한 반가움, 설마 정말 대책없이 군대를 끌고 온 건 아니겠지 하는 우려, 그러다 완두콩도 은근히 이성 없는 사람이었음을 떠올린 뒤 터져나온 한숨.

그것을 꺼내놓았다.

- 탁.

그 복잡한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저택의 지하 가장 깊은 곳까지 혼자 걸어온 플란츠가 발을 멈춰 섰다. 그리고 칼리안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살아있긴 한데 살아있다 해도 말이 되는 몰골이 맞나 싶은 그 꼴을 한참 쳐다보다가.

"해."

여전히 아무 말도 안 하고 마주보고만 있는 칼리안을 향해 참 짧은 말을 툭 던지듯 꺼냈다.

"······ 뭘요."

"사과."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 말해두는데 나 지금 동생 구하러 온 것 아니라 사과받으러 왔다고. 그런 해명을 담은 말이 돌아온다.

피식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선히 입을 열었다.

"싫은데요."

플란츠가 짜증 가득한 얼굴을 했다. 그것을 보며 생글생글 웃은 칼리안이 말했다.

"혼자 안 둘 테니 혹시 혼자 계시게 되면 멋대로 돌아다니지 말라 했던 약속은 서로 안 지킨 셈이니 사과할 것이 아니고······ 나머지는."

안그래도 희멀건한 얼굴이 더 허옇게 되서 죽었다 살아난 게 나인지 너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한 30년 쯤 뒤에. 아니면 50년 쯤 뒤에. 세렌티고 악신이고 다 까먹어서 가물가물해지면. 고민할 거라곤 내일 사냥을 갈지 집에 앉아 책을 볼지, 저녁에 소를 먹을지 돼지를 먹을지. 그런 것만 남았을 때 쯤에. 그 때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하려면 잘 살아 있어야 할 테니.

그 정도면 꽤 괜찮은 약속이 아니겠나.

"안 지키면."

"지킬게요. 그건."

"······ 알았어."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 모두 사과하지 않고, 사과를 받지도 않기로 했다. 아니.

조금 미뤘다. 한 30년 쯤, 혹은 50년 쯤 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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