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장. 수면(3)
아델리아의 얼굴에 깊은 감정이 든다.
한겨울의 계곡 사이를 다시 베고 지나가는 바람이 고스란히 담긴 칼리안의 살기를 마주 대하면서, 낙엽을 다 떨구고 홀로 남겨진 늙은 나뭇가지에 잠시 머물다 간 바람같은 얼굴을 했다.
세월이 가득 묻어난, 혹은 회한이 그득한 얼굴. 지내 온 숱한 추억을 되짚어 보기에도 벅찬 노쇠한 이의 낡은 담요에 밴 묵은 먼지 냄새같은 그런 얼굴 말이다.
이를테면.
"내가 저 꼴 보려고 이 때까지 살아서 여기를 왔나······."
그래.
이런 말을 꺼내는 이가 지을 수 있을 최적의 표정이랄까.
그래도 일단 참을 것 한 번에 귀찮을 것 한 번이면 크게 고마울 것이 또 한 번이라던 다누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엉터리 점성가의 말을 무시하지 못해 옷깃 속에 라프라니아 뿌리를 넣고 꿰매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인세와 거리가 먼 다누마저 '크게 고마운 일' 이라 말하는 그 일이 대체 어느 정도의 일일까 하는 그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어서.
"살기 넣어라. 따갑다."
지극히도 마법사다운 그런 이유로, 현재 살아있는 인간 중 으뜸으로 연로하신 아델리아가 칼 잘 쓰는 어린애의 과한 치기를 넘어가줬다. 그 어린애의 아빠가 이 대륙의 가장 큰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이라서는 아니었다. 그 어린애를 애지중지한다던, 아델리아보다 조금 덜 어리지만 아직 한창 때인 건 마찬가지인 그 스승 나부랭이랑 싸우기 싫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넌 대체 왜 볼 때마다 그렇게 으르렁거려? 개야?"
"지금 안 짖고 안 물고 얌전히 있게 생겼어, 내가?"
"뭐야. 왜 그렇게 자연스럽게 받는데."
"뭐가. 자연스럽게 받아도 불만이야?"
"······ 아니야. 하여간 이제 아무 문제 없는데 왜 난리야?"
"애를 나흘 동안 혼자 뒀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어린 놈이 말대꾸는 또 어찌나 야무지게 잘 하는지.
"혼자 안 뒀다니까. 옆에서 계속 재웠다잖아."
"누가 날 혼자 뒀대? 사람 말 똑바로 안들어?"
"사람이라는 놈이 도대체 왜 짖고 무는데?"
"그럼 안 돼? 마법 쓰는 놈이 웬 편견이야?"
마법으로 지면 실력차이겠거니 하기나 하지. 말 싸움에서 지는 것은 결코 용납 못하는 마법사 중에서도 대륙에 딱 셋 있다는 대마법사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두 번 쯤 죽었다 깬 듯한 얼굴을 한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혼자 두면 풀도 안 뜯어먹을 애를 나흘이나 내버려두게 해?"
서슬 가득한 살기가 강하게 풍겨온다.
피 냄새가 더 짙은지 저 살기에 맺힌 원망이 더 짙은지 알 수가 없게 된 아델리아가, 뭉글뭉글 기분나쁜 그 기운을 밀어내며 물었다.
"······ 혹시 네가 타고 왔던 그 말 때문에 그래?"
"당장은."
사실 혼자 두면 풀도 안 뜯어먹을 애는 칼리안이 사는 세상에 둘이나 있다. 그 중 두 발로 걷는 놈은 그래도 옆에 붙어서 뭐라도 먹일 손들이 많으니까 시들긴 했어도 굶어 죽지는 않았을 거다. 문제는 잡초 따위는 제 식량 사전에 없는 것처럼 구는 남은 한 놈이다.
당연히 레이븐을 말함이다.
"아, 몰라. 너 여기 숨겨놓고 안 죽을 것 확인한 뒤에 다시 갔더니 없었어. 내가 그 상황에 네 말까지 챙겨주게 생겼어?"
다시 찾아갔다는 것이 곧 챙겨주려던 행동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외로 세심한데 본인을 포함해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는 아델리아가 이렇게 짜증 가득한 대답을 했다.
그제야 칼리안이 살기를 아주 조금 누그러뜨렸다. 없어졌다면 영특한 레이븐은 왕궁이나 공작저로 알아서 잘 찾아갔을 테니까.
다만 살기가 전부 사라지진 않았다.
중요한 시기에 나흘이나 자리를 비우게 된 것에 대한 화. 연락 끊긴 칼리안을 다 녹아내리는 속으로 찾고 있을 앨런에 대한 미안함. 혹시나 제 탓일까 책망하고 있을 에일라에 대한 아린 마음, 당장 세상 끝날 것처럼 칼리안을 찾아나설 얀과 키리에에 대한 우려. 그리고 하필 그런 말을 하고 없어지게 된 바람에 풀 쪼가리 하나 제대로 안 뜯어먹으면서 쪼글쪼글 시들고 있을 것 뻔한 위층 거주인에 대한 걱정까지. 여러 심정이 다 섞여 나오는 살기였으니 완전히 사그라질 리 만무했다.
"그리고 너. 내 반지는 또 왜,"
"그건 내가 안 부쉈어. 너 그 꼴로 만든 놈들이 부쉈지."
"도대체 무슨 일이······."
칼리안이 자신의 손을 살피다 입을 꽉 다물었다.
- 욱씬!
치미는 감정들을 감당 못한 심장이 다시 힘겨움을 토로했다. 저도 모르게 주저앉을 뻔한 것을 버틴 칼리안이 머리를 짚었다. 머리가 아팠다.
'혹시 왕자님께서는, 사냥을 좋아하십니까?'
기억이 든다. 그제야 기억이 든다.
이제 막 아문 상처의 아릿한 감각이 머리에 남은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붓기가 가라앉은 뒷머리에 엉겨있던 마른 피가 손 끝에 묻어나온다.
'저는 덫 사냥을 즐깁니다, 왕자님. 토끼 덫에 토끼가 걸리는 것도 좋아하고 여우 덫에 여우가 걸리는 것도 좋아합니다만. 그보다는 사실 의외성을 좋아합니다. 토끼 덫에 여우가, 여우 덫에 사자가, 그리고. 사자 덫에······.'
머리. 머리를 얻어맞았다.
왜 그 날의 기억이 나지 않았는지를 알려주려는 것처럼 바삭거리는 핏자국을 클린으로 지워내던 칼리안이 긴 웃음을 지었다.
'······ 고양이가 걸리는 이런 모습을 보는 일이 더할 바 없이 즐거운 까닭에.'
길고 긴 웃음을 지었다.
* * *
밤이 깊은 날이었다.
시간이 늦었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깊은 밤이었다.
- 벼랑 끝에 세워 놓은 어린애처럼 그렇게 굴면, 제가. 계속 그렇게 있을 것 같습니까.
내뱉은 말들이 어둠 속에 내리깔려서.
노튼 라미레즈.
그 놈을 뒤쫓다 말고 문득 발을 멈췄었다.
이 넓은 땅에서 가장 긴 울타리를 가진 나라는 참으로 거대했다. 그 거대한 나라의 수도 역시 넓었다. 깊은 밤에 사람의 발이 닿지 않는 곳이 있어도 이상할 것 없을 만큼, 그렇게나 넓었다.
"잠시만."
지나다니는 이 없는 곳.
레이븐의 무릎팍까지 자란 긴 풀들이 사방에서 불어드는 바람 속에 부대끼던 곳. 멀리 세워진 건물들의 불빛이 가느다란 별빛처럼 보이던, 곁에는 검고 짙은 어둠만 가득했던 그런 곳. 어느새 그런 황량한 곳까지 가서는 결국 발을 멈추고 말았었다.
"······ 나 잠시만······."
누구를 쫓아가던 길이었는지도 그만 잊어버린 채 발을 멈춰 세웠었다.
- 언제까지고. 계속. 죽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 그렇게 될 것 같습니까.
끝도 없이 꺼내놓고 퍼뜨린 그 말이 한밤을 더 까맣게 물들여서. 누구를 향한 가시였을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그 말이, 빛 한 줄기 안 드는 밤 한가운데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워서.
사과를 하고 사과를 받고.
그리하여도 없는 일이 되지 못할 기억들이 그림자가 되어서. 돌아가던 그 발 끝이 그림자 속에 잠겨버려서. 그렇게 그만 길을 잃고 말아서.
"잠시만······ 레이븐."
허리를 구부려 레이븐의 목덜미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은 채로, 말없는 큰 짐승의 더운 목덜미에 온 몸을 기대고 숨을 참았다. 어느 곳에도 꺼내놓지 못할 것들을 토해내려 숨을 참았다.
- 사락.
그렇게 찰나를 있었을까 한참을 있었을까.
향기가 났다.
뱀의 피를 말려 꽃잎 위에 흩뿌린 듯한 향기가 났다. 비릿한 듯 향긋하여 차마 거부할 수 없을 지독한 향이 났다.
- 푸르릉······.
레이븐이 칼리안보다 먼저 그 향을 맡았다. 몇 번 발을 움직이던 레이븐이 가만히 몸을 구부렸다. 제 등에 기대 있는 주인을 그 와중에도 걱정하여서, 천천히, 아주 조심스레 무릎을 바닥에 댔다. 더운 목을 늘어뜨리고 긴 머리를 바닥에 댔다. 흙먼지가 묻는 것조차 꺼려하던 밤하늘같은 꼬리가 진흙 위에 흐트러졌다.
- 사락.
독과 수면제 그리고 마취제.
몸의 움직임을 방해할 모든 약이 통하지 않을, 통하지 않아야 할 몸 속에 역하고 달큰한 향이 들어찼다.
드미레아의 손이 닿은 붕대를 태워 없앴다.
약과 거즈가 올라있던 손으로 도로 검을 쥐었다.
- 우우웅!
아찔한 감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붉은 검 끝이 아주 잠시 일렁이다 제 자리를 찾았다. 흩어진 정신을 다잡았다.
"이렇게 금세 다시 뵙게 될 줄을 알았다면 마땅히 대접해드릴 것이라도 마련해 둘 것을 그랬습니다."
목소리가 들렸다.
"후작이 아마도 이미 검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확신하지 못해 준비를 해 두던 중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분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세렌티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개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미 깊이 잠든 레이븐의 숨 소리, 그리고 놈. 라시드 브리센의 웃음기 가득한 말 덕에 알게 되었다.
"······ 제 아들이 자신을 얼마나 지극하게 여기는지 안다면 후작이 참 좋아하겠습니다. 브리센 남작."
그레이 브리센.
놈을 없애려 준비해 둔 덫에 칼리안이 걸려들었다.
어느새 놓친 외팔이 검사, 노튼 라미레즈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주변에 모여드는 수많은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실소했다.
풀어지려던 정신을 이렇게 강제로라도 다잡아 주니 이것을 고맙다 해야할지 지긋지긋하다 해야할지.
무슨 이런 다누같은 놈이 있나 싶기도 하고.
"이것 참.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내가."
"특별히 감사를 받을 일은 아닙니다만. 왕자님께서 친히 말씀을 내려주신다면 겸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래도 내가 누구인지 잊은 것은 아닌 듯 보이니."
바람이 불었다.
"그렇다는 건 브리센 후작 대신 나를 잡아도 뒤탈이 없으리라 믿었다는 말인데."
"아. 뒤탈이야······."
뒷말을 끈 라시드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녹빛 눈을 한 번 가리켜보인 뒤 대답했다.
"이 지긋지긋한 색을 물려 준 사람이 지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계획한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 하여도, 막힌 길 옆에는 반드시 다른 방향의 살 길이 열리는 법이니 말입니다."
"아······ 그런 방법이 있겠군요. 남작의 말대로 언제든 나를 못 죽여 안달인 브리센 후작이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왕자님."
"계속하여 나와 부딪혀 왔으니. 생각 짧은 브리센 후작이 나를 없앴다, 그리 하여도 모두가 믿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대안입니다."
"칭찬에 이렇게나 후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라시드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겨드는 눈, 그리고 절로 펼쳐지려는 손에 힘을 준 칼리안이 라시드를 향해 마주 웃음을 보였다.
"다행한 일이 또 있군요."
"무엇이 또 다행이라 하십니까?"
"내가."
- 쌔애액!
- ······ 서걱!
붉은 빛이 칼리안의 뒤를 스친다.
어느새 형체를 가진 짧은 칼날이 칼리안의 뒤에 있던 이의 목젖을 가른다. 찰나의 빛이 스친 곳에 그 붉음과 꼭 어울리는 비릿한 향기가 확 퍼져나간다.
- 풀썩!
큰 것이 긴 풀 위로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칼리안을 포위하고 있던 이들의 수가 하나 줄었음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 여기 모인 이들을 다 없애고 나서."
- 쌔액, 쌔애애액!
- 콰직!
- 쿠웅······ 쿵!
"제 아들 무서워 한 후작이 이 어두운 밤에 직접 칼을 들었다. 그리 말해도."
- 쉬이익!
- 카가가각, 카앙!
- ······ 콰직!
"뒤탈이 없을 것이란 뜻일 테니."
- 풀썩!
- 쿠우웅!
바람이 불었다.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든다. 은빛으로 물들어야 할 긴 풀 위에 붉고 불쾌한 것이 가득 고인다. 그것을 무심히 바라보던 붉은 눈이 녹빛 눈을 향했다.
"안그렇습니까, 남작."
라시드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땅에 진득히 고인 다른 이들의 흔적을 보며 감탄어린 목소리를 냈다.
"과연. 눈이 즐겁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제가 언제 또 볼 수 있겠습니까?"
"아. 그건 그냥 내가 예쁜 거라서. 그건 됐고."
생긋 웃은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숨느라 애쓰지 말고 차라리 전부 다 나오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남작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니라면 남작이 먼저 와도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몸을 사릴 줄 아는 사람이니······ 왕자님께서 더 이상 졸음을 물리지 못하실 즈음에 나서겠습니다."
비겁하다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칼리안은 조금씩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이 될 테니, 라시드가 섣부르게 칼리안의 앞에 나설 이유가 없으니까. 비겁하다 하기 보다는 제 이득을 잘 챙긴다 하면 맞을 터였다.
"그래요. 그럼 잠시 뒤에 보는 걸로."
"네, 왕자님. 기다리겠습니다."
날아드는 검 쯤은 쉬이 쳐낼 라시드의 말에, 칼리안이 미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에 붙든 검을 꽉 쥔 채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칼리안을 둘러싼 수십의 검에 일제히 붉은 빛이 감돈다. 그 붉음보다 더 붉은 죽음이 놈들의 몸을 가르기 시작했다.
쉼없이 검을 휘두르고, 막아내고 빗겨가면서, 입 속이 다 해어질 만큼 힘주어 물어뜯고 정신을 차려가면서, 그렇게 버텼다. 그러다 결국.
- 퍼억!
한계가 왔다.
머리가 흔들린다. 진득한 핏줄기가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시야가 흐릿해지다 기우는 것을 막지 못하고 결국은 다리의 힘을 잃었다.
"먼저 가서 좀 씻을 테니까, 완전히 정신 놓고 나면 나한테 데려와."
멀리 보이는 것이 하늘의 별빛인지 건물의 불빛인지, 발에 밟히는 것이 자갈인지 풀인지, 가려 했던 곳이 첨탑인지 호수인지, 지킬 것이 성벽이었는지 약속이었는지.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죽일지 달리 써먹을지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대체로 멀쩡한 상태로 싸운 적이 없어 늘 불리한 조건 속에 있었음을 깨달은 것에 대한 억울함, 라시드에 대한 흥미, 엉뚱한 방향으로 걸음을 한 일에 대한 후회, 그리고.
"······ 또."
돌아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익숙한 죄책감.
그 모든 것이 혼재하여 웃음이 났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 기억이 만든 나락 속에 들었다.
그런데.
그러다가.
"와······ 대단한데. 얘를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놨어?"
생각지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람 이는 소리와 그 바람에 흩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 * *
"······ 아델리아."
"왜, 또?"
"전하의 탄신일 축제. 오라고 해. 전하든 란델 형님이든 내가 설득시켜서 국경 문 열어두게 할 테니까."
"그것 때문에 온 줄 어떻게 알았어?"
"그것 말고 올 이유가 없지 않았어?"
칼리안의 되물음에 아델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변명거리 찾느라 닷새동안 시간 보낸 적이 있기는 한데. 그거 그렇게 좋은 효과 안 나. 다음엔 그러지 마. 일만 더 커지니까."
아델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시간 보내면서 안 재웠으면 그 몸으로 나가겠다며 또 난리를 피웠을 것 아니냐는 말은 그냥 안 했다. 그래서 칼리안도 고맙다는 말 안 했다. 대신 흔들거리는 몸을 다시 세웠다.
"어디 가게."
"돌아가려고."
"좀만 더 있어봐."
"왜."
"여기 위에 갑자기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놈들 좀 적어지면 그 때 나가. 너 투명화 마법도 못 쓸 것 아냐?"
맞다. 서클이 네 개밖에 없어서 못 쓴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여기가 대체 어딘데 투명화가 필요해?"
"등잔 밑."
플란츠의 짧은 말은 참 잘 알아들으면서, 아델리아의 짧은 말은 이해 못 한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
"여기. 브리센 후작저."
"······ 어디라고?"
"그레이 브리센이라는 놈 집. 내가 죽인 놈들한테 너 공격한 놈이 누군지 물어봤었는데 이 집 아들이라 하더라고. 그래서 너 여기 내려놓고 여기있으니 찾아가라고 너희 아빠한테 얘기하면 대충 해결되겠다 싶어서 데려다놨지. 그런데 이 집에 그 놈이 안 오는데다 잠깐 지켜보니까 이 집 주인이랑 그 아들 놈 사이가 좀 나쁘더라고. 너 여기서 발견되면 너 공격한 놈 좋은 일만 시킬 것 같고. 그래서 너 다시 데리고 나가서 다른 데 숨기려고 했지. 그런데······."
"그런데, 또 뭐."
"너희 아빠가 보낸 기사들이 여기를 찾아와서 뒤지더라고. 여기까지 오려고 하길래 일단 내가 환각 써서 돌려보냈거든. 그랬더니 그 뒤에 그레이 브리센이라는 그 놈이 이 집을 완전히 봉쇄해버렸어. 덕분에 좀 난처해져서 내가 생각을 좀 해봤지."
"······ 생각을 왜 그 때 해, 아델리아?"
"마법사가 깊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 봤어? 아무튼 그래서 곰곰이 고민을 해보니까 일이 좀 복잡해진 것 같다 싶더라. 너 지금 여기에서 발견됐을 때 이 집 주인이나 이 집 주인 아들이 증거 몇 개 만들어 우기면, 비밀 통로 하나 없는 이 집에 사람 보내 뒤져놓고도 너 못 찾아낸 너희 아빠한테도 문제가 좀 될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요즘 것들 증거 조작하고 우기고 그런 거 엄청 잘 하잖아. 하여간 그래서 내가 계속 고민하고 있던 참이야. 얘 정말 지금 나가도 괜찮나, 하고."
아.
"······ 아델리아······."
자칫하면 그레이 브리센이 왕자를 납치한 죄로 당장 광장에 세워지고 브리센 후작가 전체가 라시드 브리센에게 넘어갈 판이 아닌가.
이 몸을 한 채 당당히 올라가 그레이 브리센과 이야기를 나누기엔 그레이 브리센도 칼리안을 못 잡아 안달이다. 다 필요없고 여기 놈들 그냥 다 죽여달라 아델리아에게 부탁하기엔 그레이 브리센이 아직 살아있는 편이 나았다.
그렇다고 몸이 다 나을 때까지 하루 이틀을 더 기다리기엔, 왕궁에 있을 한 놈이 어떻게 될 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아······ 어떡해야 하나, 이걸."
브리센만 얽히면 아주 그냥 상황이 미쳐 돌아간다 싶어서, 이번에는 욱신거리는 것 말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칼리안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나 머리가 아파서, 여기 놈들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하는 아델리아의 말을 놓치고 지나갔다.
은밀하게 발칸 움직여 후작저에 갇혀 있는 네 동생 꺼내와라 했더니, 계산이고 증거 조작이고 수 싸움이고 정치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발칸 절반을 뚝 떼내어 데려온 사람. 칼리안 대신 어련히 알아서 목숨 잘 살려 줄 앨런 마나실과 키리에를 양쪽에 하나씩 세워놓은 사람.
후작저 앞에 그렇게 당당히 선 채로, 내 동생 당장 안 내놓으면 너희 다 죽여 없애버리겠다 협박을 시작한 이 나라의 후계.
"······ 환장하겠네."
플란츠 룬 카이리스가 동생 데리러 온 것은 까마득히 모르는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