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83화 (384/527)

제68장. 수면(5)

있잖아, 드미레아.

내가 진지하게 생각을 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역시 파혼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물론 당연히 그럴 생각이긴 하겠지만 나는 아쉽다는 말이 영 거짓말은 아니었거든. 그런데 내가 몇 번을 다시 고민해봐도 파혼을 하긴 해야 할 것 같아.

아. 당장은 아니고 나중에 언젠가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는 소리니까 당장 하자는 말로 오해하고 바로 찾아오진 말아줬으면 해. 그럼 너무 서운하잖아, 내가.

혹시 이러는 이유가 궁금할까봐.

뭐 이유 따위 상관없다 할 것 같기는 하지만 굳이 내가 설명을 해주자면 말야, 드미레아.

"······ 그러니까, 형님."

"뭐."

"발칸을 데리고 여기로 온 사람이 형님이라는."

"그래."

"전하나 스승님이 아니라 형님께서요."

"그래."

그러니까.

내가 뭘 좀 키우고 있어. 있는데.

크긴 컸거든. 아직도 크고 있거든. 무럭무럭. 풀만 처먹는데 이상하게 되게 잘 커. 그것 참 신기하지.

"형님께서 직접 발칸을, 군대를 데리고 여기로요."

"아무래도 내 아우님께서 많이 편찮나본데. 몇 번을 말하게 하시는지."

"대책없이 발칸을 끌고 여기······ 브리센 후작저로 찾아오셨다는 겁니까."

"대책이 필요한가."

······ 근데 키만 컸어······.

"저 데려가시겠다고. 발칸······."

"말고. 사과받으려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드미레아.

아무리 생각해도 육아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 나는.

"뭐든요. 아무튼 그러시려고 발칸을. 그냥. 저렇게······ 발칸을 막. 우르르······ 엄청 많이."

"다 오고싶다 하는 것 추려서 온 건데. 반만."

"······ 반."

농사에도 소질이 없나봐.

지그프리드 뒷마당에서 일도 못하겠어.

쓸모없는 놈이라 미안해, 드미레아.

"반을 우르르······ 저렇게. 반······ 되게 많은 건데."

"반말."

아······ 어떡하지.

* * *

처음엔 기다렸다.

눈을 깜박이고 숨을 쉬고 고개를 움직이는 순간마다 걱정을 하면서도 기다렸다. 누가 뭐라한들 앨런의 앞에서는 그저 어리고 상처 많은 아들일 뿐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이들보다 강한 사람임을 알았으니까.

레이븐이 홀로 돌아온 사실을 알고 나갔을 때. 레이븐의 안장에 매어 둔 가방 안에서 사라진 물건이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했을 때. 앨런의 로브 자락을 입에 문 레이븐이 함께 가자는 것처럼 다시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보았을 때. 레이븐을 이끌고 칼리안의 행적을 쫓아간 발칸이 소득없이 돌아온 것을 알았을 때. 더는 참지 못하고 직접 나섰다. 왕궁을 벗어났다.

되찾으려 하였다.

이동 마법진에 남은 온갖 흔적을 전부 다 뒤졌다. 혹시나 또 다누일까, 혹은 시스파니안일까, 아니라면 이번엔 정말 세렌티가 나섰을까.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상상해내는 머릿속을 애써 비워가며 칼리안을 찾았다.

온 수도와 온 나라와 온 대륙을 다 뒤졌다. 왕궁의 숲을, 옛 헤이시아의 지하를, 지그프리드 공작저와 세뉴강과 앨런 스스로의 집을, 지그프리드 공작령과 시스파니안의 공동이 있는 바위산을, 세크리티아의 별장을, 그 바닷가를, 첨탑을, 브리지트 숲을. 전부 다 가 보았다.

찾아내지 못했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아비가 제 아들 하나를 찾지 못했다. 아비로서는 여전히 무력할 뿐인 대마법사가 더 이를 곳을 잃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다시 나락이었다. 악몽이었다.

'아델리아가 엮여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하는 텅 빈 머리를 대신해서, 그나마 온전한 사고가 가능한 파란 머리 마법사가 이런 말을 했다.

'그 자, 라시드 브리센. 그 자에게도 검은 돌이 있다 했습니다. 제온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런데 왕자님께서 그 자와 대치하셨던 날에 사라지셨습니다. 만약에 라시드 브리센이 왕자님께 무슨 짓을 한 것이라면······ 제온과 연관된 이들 중에 군단장님 눈에서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왕자님을 가릴 수 있을 사람. 아델리아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길로 텐실에 갔다. 텐실을 쥐잡듯 뒤져가며 아델리아의 흔적을 찾았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아델리아를 찾지 못했다.

확신했다.

아델리아가 기어이, 감히 그 아이에게 손을 댔다고.

다짐했다.

텐실을 죄 짓이겨서라도 찾아내겠노라고.

어떻게든 찾아내 어떻게든 죽이겠노라고.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죽여 없애겠노라고.

- 마법사.

그 때.

- 당신 아들. 어디 있는지 알아냈어.

혹시나 찾거든 연락을 달라며 내려놓고 간 통신용 팔찌를 통해 플란츠가 말을 걸어왔다. 마치 앨런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섣부른 분노를 가라앉히려는 것처럼, 거부할 수 없는 단어로 칼리안을 칭하며 앨런을 불러냈다.

- 내가 지금 내 아우님 데려오려고 하는데. 혹시······.

'혹시 같이 갈 생각 있으면' 이라는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으나 제대로 듣지 못했다. 플란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텐실에서 빌헬름 관으로 곧장 돌아왔으니까.

갑작스레 눈앞에 마법사 한 명이 나타난 것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경고와 같은 부탁을 했다.

'아무도 죽이지 마. 안 되겠으면 여기 있는 게 나아.'

그래서.

죽이지 않겠노라 약속을 하고 동행한 길이라서.

"발칸의 발이 생각만큼 무겁지 않은가 봅니다, 마나실 후작."

"군인들의 발이 굼떠서야 되겠습니까."

"이 나라 왕실을 지켜낼 군대의 움직임이 저렇게나 재빠른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 텐데······. 나는 왜 이렇게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지 모르겠습니다."

여유 가득한 얼굴로 마주앉아 입을 놀리고 있는 그레이 브리센을 죽이는 대신 번지르르한 저 면상에 주먹을 한 번만 꽂아볼까 말까, 하고. 깊디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왕세자 겸직하시는 부군단장님께서 그레이 브리센의 집에 납치되어 있던 왕자님을 발견해 구해주시게 되면 말입니다. 우리 왕자님을 찾는 것이야 당연히 다행하고 좋은 일입니다만. 만약 그렇게 되면 라시드 브리센 그놈에게만 이득이 되는 일인 것 아닙니까?'

'맞아.'

'그럼 차라리 마나실 군단장님이 브리센 후작저로 몰래 들어간 뒤에 왕자님을······.'

'왜.'

'······ 하도 안 주무셔서 눈 뜨고 주무시는 겁니까? 라시드 브리센 좋은 일만 시킨다는 제 말에 방금 긍정하신 것도 잊어버릴 만큼 피곤하십니까?'

'이 좋은 패를. 왜.'

드미레아가 그러지 않았던가.

칼리안이 사라진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하라고.

그 상황 스스로에게 유리하도록 쓸 생각은 없는데 동생 놈에게 유리하도록 써먹을 생각은 참 많은 착한 형 플란츠가, 또 사람 말을 안 하고 있는 아르센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앨런을 향해 말했다. 부군단장으로서가 아니라 왕세자로서, 아랫사람인 듯 윗사람인 듯 애매한 관계에 있는 앨런을 향해 명령을 했다.

'같이 가. 가서 아무도 죽이지 말고 그레이 브리센 앞에 계속 있어. 자리 비우지 말고 같이. 내가 아우님 찾아 올 때까지.'

'그리하지요. 저 하나만 가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여기 이 물건도 데려갈까요?'

'물건이라뇨. 너무하십니다, 군단장님. 저 엄연히 이름도 있고 생각도 잘 하고 움직일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이거 빼고. 발칸 많이. 가능한 많이.'

'발칸은 많이 데려간다 하면서 저는 왜 빼십니까? 저도 우리 왕자님 구하러 가는 역할 해보고 싶습니다.'

'말고. 전하 막아.'

'설마 전하께 말씀 안 드릴 겁니까?'

'언제는 드렸던 것처럼 말하네.'

'······ 자랑이십니다.'

그렇게 같이 왔다.

아무도 안 죽였다. 아무데도 안 가고 그레이 브리센과 계속 함께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레이 브리센을 마법 말고 주먹으로 좀 패 놓는 것도 안 된다는 말은 없던 터라. 자꾸만 꾹 쥐어지는 주먹을 애써 도로 펼치며 폭력적인 생각을 간신히 물린 앨런이 조용히 웃었다.

"농부가 농기구를 그냥 두어서는 녹만 슬 뿐 아닙니까. 그리 되지 않도록 부지런히 이곳저곳 움직여가며 그 푸릇푸릇한 잡초들을 싹 베어 놓아야 배를 곯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 농사 망치려 드는 쓰잘데기 없는 잡초들이 있나 없나 미리미리 뒤적여보는 일과 전하께서 발칸을 쓰시는 일에 다른 점이 있겠습니까."

잡초를 얘기할 때마다 어쩐지 자신의 푸릇푸릇한 머리카락을 깊숙이 쳐다보는 것 같아서, 괜히 기분만 더 나빠진 그레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을 본 앨런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손에 쥔 것이 녹슬지 않도록 부지런히 놀리는 모양새를 불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베어지고 잘려나가 말 먹이로 내쳐지는 것은 오로지 잡초뿐일 터이니, 농사 잘 되길 바라는 입장이라면 오히려 환영하며 반기셔야지요. 브리센 후작."

한 나라의 후작을 고작 잡초 따위와 비교해가면서, 이렇게 사람 속을 다 뒤집어놓고 있으면서, 아무 문제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하더라도 항의할 생각 말고 오히려 환영하며 반기라니. 이 얼마나 노골적이고 뻔뻔한 협박이란 말인가.

"모르나본데, 마나실 후작. 당신의 무력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정당한 명분 없는 권력행사는 그저 핍박일 뿐입니다."

"우리는 칼리안 왕자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것이 후작이 그리 좋아하는 바로 그 명분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한 차례 사람을 보내 내 집을 다 뒤집어놓았습니다. 비밀통로 하나 없는 이 작은 집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을 이미 전부 다 손수 확인해놓고. 갑작스레 이렇게 다시 찾아와서는 있지도 않은 왕자님을 내놓으라 하면, 그것이 핍박이 아니고 대체······."

"스승님."

그레이의 말이 잘렸다.

누군가 앨런을 불렀다. 앨런의 시선이 그레이의 뒤를 향한다. 그레이의 고개가 돌아간다.

앨런이 앉아있는, 저택 바깥쪽을 향해 난 문 말고 그레이의 뒤편에 있던 문. 저택 안쪽의 복도와 연결된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껏 돌아가는 고개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기분이 든다.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리에에게 온 몸을 기대다시피 부축을 받으며 들어온 칼리안을 향해 서둘러 걸어갔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잘못 건드리면 깨지기라도 할 것처럼, 스쳐 잡으면 색이 번질 것처럼, 그리 조심스러운 눈길로 칼리안을 보듬었다.

"어쩌다 또 이리 되셨습니까."

"향기가 났는데······ 제가 잠깐 꿈을 꾸다가. 그 향에 취해서요."

얀이었다면 이게 무슨 멍멍이 얀같은 소리냐 할 법한 대답이었으나 앨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혹시나 아플까 차마 손도 대지 못하고 칼리안을 살피다 이제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또 꿈을 꾸셨습니까."

"잠시동안요."

"······ 그래요. 깨었으면 되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왕자님 좀 더 살만 해지면 그때 나누시지요."

"네. 스승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앨런의 시선이 다시 돌려졌다. 조금 전까지 마주보고 있던 사람, 지금은 '쟤가 왜 내 집에서 나오나' 하는 의문을 아직 해소하지 못한 얼굴을 한 그레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잡초, 가 머리를 드민 모양입니다. 그러니 내가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레이 브리센. 후작."

그레이 브리센의 인생길에 큰 굴곡 하나가 더 생기는 순간이었다.

"······ 무슨 큰 오해를 한 듯 합니다. 마나실 후작."

피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곳에 들어오던 발칸의 불청객들 중에 저렇게 짙은 냄새를 풍기던 놈은 없었다. 피 냄새를 지우려 클린을 써 가며 이 곳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레이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발칸을 들인 뒤 다시 집을 봉쇄했으니 그 뒤에 밖에서 들어왔을 리도 없다. 그레이 몰래 이 집 안에 칼리안을 옮겨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앨런 마나실은, 이제껏 그레이와 함께 있었다.

그렇다는 건 둘 중 하나.

앨런 마나실이 칼리안을 이곳에 미리 옮겨둔 뒤 발칸을 데리고 들이닥치는 연극을 했거나, 혹은 칼리안이 정말 이 집 안에 잡혀 있었거나.

살면서 이보다 치열하게 머리를 굴려본 적 있나 하는 마음을 잠시 미룬 그레이는 첫 번째 가정이 맞다 여겼다. 칼리안이 줄곧 이 집 안에 있었다면 아무리 자신이 예전과 같지 않다 해도 몰랐을 리가 없어서였다. 저 정도의 짙은 피 냄새를 이 집안의 기사들이 맡지 못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

그런데. 그렇다 해서.

도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발칸이 이 집 안에 들이닥친 뒤 앨런이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면, 믿어주는 이는 당연히 적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 우겨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발칸이 그레이의 눈을 돌려놓는 동안 은밀히 움직인 앨런이 외부에서 칼리안을 옮겨다 놨다고.

허나 앨런은 분명.

"궁색한 변명 늘어놓을 생각 마시지요. 나는 분명 이제까지 후작과 함께 있었으니."

앨런은 분명 그레이와 함께 있었다.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다. 그것을 그레이 뿐 아니라 정말 많은 이들이 함께 보았다.

그러니 이 억울한 일을 대체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브리센 후작이 아닙니다, 스승님. 제가 스스로 이 곳에 몸을 피했던 것이니 브리센 후작은 이 일과 관련없어요."

그런데 그 때, 가느다랗게 잠겨드는 목소리 하나가 그레이에게 구명줄을 내려줬다. 믿기지 않게도 그 구명줄의 주인은 칼리안이었다.

"허나······ 이것을 어떻게 증명해야 하나. 그게 좀 어렵겠는데. 이것 참. 당면한 상황이 좀 곤란하겠습니다, 브리센 후작."

구명줄 아닌가보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할 바에야 차라리 기절이나 해버릴 것이지, 도대체 어디서 저런 꼴이 되어 와서는 내 앞길을 막으려 드느냔 말이다.

"이런 자를 위해 그리 마음 써 가며 걱정해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전하께서도 걱정이 많으실 테고 왕자님께서도 계속 머무르기 어려우실 터이니 이만 왕궁으로 돌아가시지요."

성의껏 그레이를 걱정하는 칼리안을 앨런이 말렸다.

그 뒤에는 아무래도 걱정이 커 자리를 못 벗어나겠다는 얼굴을 한 칼리안 대신 플란츠를 보며 말했다.

"이곳의 일은 제가 마무리하고 가겠습니다. 왕자님 데리고 먼저 돌아가 계십시오, 저하."

"그리하지."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칼리안을 한 번 쳐다봤다.

곁에 선 키리에가 다른 말 없이 칼리안을 다시 부축했다. 업히겠느냐 물어도 고집스레 거절을 한 칼리안이 키리에에게 온 몸을 다 기댔다. 굳이 제 발로 서서 발을 옮겼다.

이제 돌아가야지.

히나에게 혼나고 얀에게도 혼나겠지만 그래도 좋으니 돌아가야지. 레이븐을 달래주고 에일라를 만나고 헤르츠 경도 들여다보고. 그러려면 돌아가야지. 빨리 나아서 드미레아를 다시 초대해야지. 리리에를 불러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한 걸음을 더 걸었다.

바로 옆에는 키리에를 둔 채로, 조금 앞선 옆에는 플란츠를 둔 채로.

"소란이 큽니다.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그런데 그때.

참 반가운 목소리 하나가 칼리안의 길을 막았다.

- 철컥.

- 저벅.

키리에의 허리춤에 달린 검이 경계의 소리를 냈다.

마치 가려던 길인 것처럼 자연스레 방향을 바꾼 플란츠의 걸음이 칼리안의 앞을 막았다.

도무지 익숙하지도 않고 별로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은 어색한 역할을 맡게 된 상황. 그것이 안겨주는 어색한 기분을 이기지 못한 칼리안이 소리없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에라모르겠다 전부 다 정말로 얀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알아서 맘대로 보호해봐라, 그런 체념이 담긴 한숨이었다.

그 사이.

모두가 있던 응접실을 찾아온 이가 목소리를 냈다.

"아, 이런. 플란츠 왕세자 저하가 맞으십니까?"

이번에도 또 플란츠의 등짝에 가려져서 앞이 하나도 안 보였지만, 다른 이의 것과 혼돈할 수 없을 목소리.

"아니. 제가 무슨 결례를······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저하. 인사 먼저 올리겠습니다. 저는 라시드 브리센이라는 남작입니다. 그레이 브리센 후작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된 것이 가문의 영광입니다."

마치 처음봤다는 듯 인사를 건네오는 저 목소리.

"그래."

칼리안의 얼굴에 진심어린 반가움이 가득 들어찼다.

그리고 그레이 브리센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 떠올랐다.

칼리안. 소문은 돌지 않았으나 실종되었음을 누구나 알고 있는 칼리안. 브리센과 얽힌 악연이 한 둘이 아님을 모르는 이 없는 칼리안. 하필 이 순간 피 냄새를 한가득 품고 있는 칼리안. 바로 그 칼리안이 이 자리에 있었다.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들이닥친 게로구나.'

왕자의 몸에 해를 입힌 죄.

그것으로 모자라 왕자를 억류한 죄. 혹은 납치한 죄. 더 나아가, 왕자를 살해하려 한 죄.

그 모든 것을 제 아비에게 씌워놓기 위해서.

현장에 직접 찾아와 빠져나올 수 없는 죄를 만들기 위해서.

'네가 꾸민 짓이로구나. 라시드.'

올가미에 발을 들였다.

그레이가 빈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 * *

라시드를 보던 그레이가 가까스로 진정한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귀한 손님께서 찾아오신 탓에 내가 저택을 모두 닫아두었다. 어찌 온 것이냐."

귀하기는.

조금 전까지 내 집 문 못 연다 했던 그레이가 아니던가.

태도 변화 확실한 모습에 실소할 겨를도 없이 라시드의 대답이 들려왔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 귀한 손님들께서 저희 가문을 찾으셨다 하는데 차마 모르는 척 넘어갈 수가 있어야지요. 하여 다급히 발을 놀려 이리 찾아뵌 길입니다."

"저하를 뵙고 인사를 올렸으니 이만 돌아가거라."

"네. 그리 할 생각입니다. 저하를 직접 뵙고 인사를 드렸으니 이만 물러날까 합니다."

라시드가 싱긋 웃어보였다.

그렇게 하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생긴 사람처럼 플란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하였는데."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플란츠의 긴 망토 아래로, 검은 구두 한 쌍이 보인다. 흙길 밟을 일이 없어 그저 곱게만 만들어진 새카만 구두가 보인다. 그곳에서 풍겨나오는 피 냄새가. 보인다.

"그대의 인사에 응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아, 물론 저하께서는 응해주셨습니다. 다만."

다 잡았다 놓친 사냥감을 찾은 만족감이 라시드의 눈에 들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사냥감이 놀라지 않도록, 애써 침착한 얼굴을 만들어 낸 라시드가 플란츠를 응시했다.

"만나뵙고 인사를 드려야 할 분이 또 계시는 것 같아서, 발을 물릴 수가 없겠습니다."

불쾌하다는 얼굴이 된 플란츠가 라시드를 봤다. 그리고 손을 뒤로 뻗어 키리에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이 자는 그대의 인사를 받을 이가 아니다. 기사니까."

"이런······ 저하. 설마 제가 그 정도를 알아보지 못할까 그런 우려를 해주십니까. 저는 저하의 뒤에 계시는 칼리안 왕자님. 그 분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칼리안이 눈을 꾹 감았다.

그레이를 위한 레니시타가 깔리는 것이야 특별히 애석할 것 없으나 일이 아주 많이 꼬이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왕궁 돌아가던 길에 한 눈을 판 것도 자신이고 그러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도 자신이니. 책임을 져야지.

때문에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열었을 때. 뒤로 빠져나와 있던 플란츠의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수어 하나를 만들어보였다.

- 바꿔.

······ 바꾸라니?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인 것처럼 플란츠의 손이 한 번 더 움직였다. 다만 이번에는 수어를 만들지 않았다. 대신 칼리안의 팔을 살짝 건드리고 지나갔다.

찰칵, 하고.

가벼운 무언가가 어딘가에 채워지는 소리가 난다.

소리의 근원을 따라 자신의 손목을 확인한 칼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소리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주 가느다란 금속 팔찌.

에일라의 손목에 걸린 모습을 몇 번 보았던 그것이 어느새 자신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것을 안 까닭에.

"······ 그대는 내 아우님을 만난 적이 없지 않나. 뿐만 아니라 한동안 수도에 걸음하지 않았다 들었는데."

"네. 맞습니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자마자 내 등 뒤의 사람을 내어놓으라 하는 것인가. 이 사람이 내 아우님이라 확신을 하면서. 내가 꺼리는 것을 알면서도."

"꺼리시는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하. 다만 칼리안 왕자님이 맞다면 인사를 올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귀족이 예를 다하지 않는 것을 그리도 싫어하는 분이라 들었으니 혹여 이 일이 흠이 될까 우려됩니다."

"만난 적도 없는 내 아우님을 알아봤다 하고. 기어코 이 사람의 얼굴을 봐야 하겠노라 하고."

플란츠의 말이 길어진다.

시간을 끌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플란츠를 얼마나 피로하게 하는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칼리안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바닥을 향한 가늘고 긴 손가락이 허공에 곡선을 하나, 천천히 그려냈다.

그 손가락이 곡선의 마지막에 닿았을 즈음.

바닥에 닿은 빈 화살촉처럼 멈추었을 즈음.

- ······ 사락.

무언가가 손등을 스치는 느낌에, 살짝 고개를 틀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한 플란츠가 다시 라시드를 쳐다봤다. 그리고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의 망상과 무례함이 참담할 지경이라."

- 저벅.

플란츠가 한 발을 옆으로 냈다.

제 몸으로 가리고 섰던 것을 꺼냈다.

"그 동안 수도에 오지 않은 이유가 혹시. 그대의 이런 참담한 모습을 차마 내어놓지 못한 후작이 영지에 꼭······ 꼭. 숨겨두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 안쓰럽게도."

칼리안이 급히 떠올릴 만큼 익숙한 모습. 라시드가 알지 못할 모습. 사실 라시드가 그와 비슷한 외모의 엉뚱한 이를 안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을 모습.

그런 모습의 사람을 라시드의 앞에 내어놓았다.

형의 등 뒤에 서 있던 이가 잠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호수 깊숙이, 바다 깊숙이, 심장 깊숙이 내려두었던. 그것을 꺼냈다. 꺼내들었다.

고개를 들었다.

팔은 조금 짧지만 제 품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그리고.

긴 청은발을 제멋대로 늘어뜨린.

"반갑습니다."

낯선 이의 낯선 연보라색 눈이 라시드를 내려다봤다.

싱긋, 웃었다.

멋짐과 잘생김을 가득 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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