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74화 (375/527)

제66장. 내 건데(6)

그들은 당연히 드미레아를 알아봤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폭발에 대한 조사를 하고자 왔다면 이런 모습을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왜 왔는지, 그 목적을 짐작한 드미레아의 입이 먼저 열렸다.

"지그프리드의 드미레아다."

무슨 작위를 가진 가문의 사람인지. 누구의 자식인지, 스스로의 작위가 어떻게 되는지. 그딴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는 듯 간단히 자신을 밝혔다. 사실 그것조차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겠으나 굳이 언급했다. 상대에 대한 존대도 하지 않았다.

"······ 수도 경비대의 테이든 게일드만입니다. 소공작님을 뵙습니다."

"수도 경비대에서 병력까지 이끌고 무슨 일인가."

"폭발 사고를 확인하고자 왔습니다."

드미레아가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그리고 에일라를 가리고 선 그대로 대답을 전했다.

"무고한 사상자는 없다. 부서진 물품에 대한 보상은 지그프리드에서 알아서 진행할 테니 돌아가도록."

"조사해야 할 이가 있습니다, 소공작님."

"누구를 말함인가."

"마력탄을 사용해 폭발사고를 낸 범인이 이곳에 있다 들었습니다."

"마력탄은 공중에서 폭발했다. 그것과 연관된 사람을 두고 범인이라 칭하는 것이 듣기 좋지는 않은데."

"이곳을 이렇게 부서뜨린 일에 대한 조사도 진행을······."

"칼리안 왕자님의 사람을 그대들이 조사하겠다 말하는 것인가."

- 다각.

익숙한 이름이 들려온 것에, 영특한 레이븐이 아는 척을 했다. 흰 털이 난 자신의 한쪽 앞발을 들어 가볍게 바닥을 구르는 레이븐을 가리켜보인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3왕자님께서 이곳에 계신다. 그렇다면 수도 경비대가 아닌 발칸의 소관인 것 같은데. 아닌가."

왕족이 연관된 일은 수도 경비대의 소관이 아니었다. 발칸이 진행해야 할 일이다. 과거 도박장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든 키리에를 체포한 수도 경비대에서 모든 조사 권한을 곧바로 왕실에 넘겼던 것처럼.

그런 사실을 언급하는 드미레아를 향해, 경비대원 테이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력탄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지, 무슨 의도인지. 직접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공작님."

"몇 번을 이야기해야 내 말을 이해하겠느냐."

드미레아의 말투가 바뀌었다.

똑같은 하대였으나 상대를 더더욱 낮추는, 평소의 드미레아라면 꺼내지 않을 그런 말투였다.

"하지만 소공작님."

상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발칸이 오기 전에 반드시 에일라를 데려가야 하겠다는 것처럼, 이곳에 있다는 칼리안이 나타나기 전에 에일라를 붙잡아 이 자리를 떠나려는 것처럼 고집을 부렸다.

"계속 막아서신다면 저희도 강제로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물러서 주십시오."

"가능하다 생각하느냐. 고작 여덟 명으로."

"물러나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만큼 당당하다.

그들의 앞에 선 이가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임을 알면서도.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위세 역시 무시할 수 없겠으나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마땅한 보상을 줄 수 있는 곳은 지그프리드가 아닌 브리센이라는 사실을 더 잘 알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었다. 어떻게든 저 뒤의 여자만 잡아다 후작에게 넘긴다면 누구로부터든 불이익을 얻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날이 밝기 전에 후작가의 기사로 받아주겠노라는 약속도 받았으니까.

드미레아가 테이든을 쳐다봤다.

칼리안을 만난 그레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이미 다 들어서 안다. 지금 그레이는 라시드로부터 칼리안을 떼어내고, 이참에 자신을 미행한 듯한 에일라를 붙잡아들여 칼리안을 상대 할 패 하나를 손에 쥐려는 속셈이다. 그 수가 뻔하다.

그럼에도 드미레아는 더 이상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테이든의 앞을 가로막고자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럼. 지나가겠습니다, 소공작님."

그것을 물러서는 행동으로 본 테이든이 발을 내밀었다. 이제까지 앞을 막고 서 있던 드미레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화를 내리라 여겼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테이든의 뒤를 따라 함께 나섰어야 할 다른 경비대원들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무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테이든이 고개를 돌렸다.

뒤를 바라봤다.

검은 옷의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와 드미레아와 테이든의 사이를 막고 섰다. 주변에 서 있던 다른 이들이 누군가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인 것이 보인다.

"······ 지금."

그 누군가가 다가왔다.

낮고 낮은 목소리가 침묵에 잠긴 거리를 울린다.

"소공작의 말을 무시하고 왕족의 일에 관여하려는 것이냐."

은백색의 말이 보인다.

그 위에 앉은 이의 눈이 보인다.

"감히."

사람을 짓누르는 듯한 연두색 눈동자가 테이든을 고스란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맛있다고 했었다.

그러더니 혼자서 신이 나 말을 하기 시작했다.

- 시금치 스프 정말 맛있었습니다, 부군단장님. 제 동생이 만든 것만큼 맛있었습니다.

- ······ 닭고기 준다던.

- 아. 부군단장님 그런 것도 알고 계십니까? 맞습니다. 제 샌드위치랑 루시 안네 줄 간식 싸주는 제 쌍둥이 동생입니다. 요리를 정말 잘 하거든요.

얘기만 하면 얼마든지 나가서 다 죽이고 오겠다던 니들렌과 주고 받았던 대화. 그것이 생각났다.

- 처음에 제 동생이 카페 열었을 때, 사람들이 동생을 너무 무서워해서 가게에 안 들어갔었습니다. 덩치가 이만하고 엄청 무섭게 생겨서요. 팔뚝이 에스티나 뒷다리보다 더 굵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운동을 해요.

- 왜.

- 제가 무섭대요. 제가 무서워서, 저한테 겁 안먹겠다면서 그렇게 근육을 키우고 있습니다. 아,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름은 스칼렛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 그다지. 안 이상한데.

-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동생에게 꼭 전해줘야 되겠습니다. 부군단장님께서 안 이상하다 했으니까 일부러 이름 마지막글자 빼먹고 다니지 말라고 말입니다. 다들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 동생이랑 제 이름이 서로 바뀐 것 아니냐고요.

얘기가 왜 그렇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흘러갔다.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퍼져가는 그 말을 듣고 있자니 그레이에게 들은 이야기도 어느새 밀려나고 다른 생각이 드는 것도 미뤄지는 것 같아서, 재미가 있어서, 그냥 계속 들었었다.

- 사실은 바뀐 것이 맞습니다. 아버지는 글 읽는 법을 모르셨고 어머니는 저희를 낳다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런데 저희 태어나기 얼마 전에 어떤 치료사가 어머니에게 저희가 성별 다른 쌍둥이라고 알려줬었나봐요. 그래서 저는 스칼렛, 동생은 니들렌. 이렇게 짓자고, 어머니가 이름 두 개를 써서 아버지에게 건네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태어나고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행정관에게 저희 태어난 것을 알리려던 아버지가 이름 두 개를 바꿔 쓰셨대요.

어느새 재미는 사라지고 묵직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 행정관이 이 이름이 진짜 맞냐 물었다는데 아버지는 글 못 읽는 것을 알리기 싫어서 그냥 그렇다고만 했나봐요. 아무튼 그렇게 되고 저희가 열한 살 되던 때에 아버지도 돌아가셔서 서로 이름을 다시 바꿀 겨를도 없이 살게 됐습니다.

- 어디서 살았는데.

- 원래 살던 집에서요. 동생이랑 저랑, 둘이 살았습니다.

재미라고는 정말 하나도 없는 무거운 이야기. 시금치 스프 하나 때문에 나와서 엉뚱한 곳으로 번져버린 이야기.

그래도 플란츠는 그냥 계속 들었다. 누군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재밌다 생각할 수도, 지루하다 여길 수도 없는 일이니까.

- 아버지 돌아가신 얼마 뒤부터 마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왔고요. 사실은 동생을 지켜주면서 별 탈 없이 살려고 배운 것인데, 오히려 동생까지 무서워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참 재밌는 일 아닙니까.

- 재미없어.

- 아······ 제가 너무 말이 길었나 봅니다, 부군단장님. 바쁘실 텐데 이만,

- 말고. 대단한 것 아닌가. 어렸는데.

잠시 플란츠를 보던 니들렌이 웃음을 지었다.

- 저 그렇게 안 대단했습니다. 겁도 많고 울음도 많았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데, 동생 손을 잡고 세뉴 강에 서서 아버지 드릴 안네루시아를 띄우고. 밤이 되어서 집에 돌아오는데 길이 너무 무섭더라고요. 외진 길을 지나 집에 오다 보니 스칼렛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그게 보기 싫었습니다.

- 그래.

- 저도 무서웠는데 그것보다 보기 싫은 게 더 컸습니다. 그런데 그렇다 해서 다를 것이 있었겠습니까. 어렸으니까. 누구라도 똑같았을 것 아닙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마법에 별반 재능도 없었으니 억지로 강해질 수가 있었겠습니까. 대단하지도 않고 단단하지도 않게 겁만 많은 채로, 결국은 그냥 그렇게 지냈습니다.

- ······ 그래.

-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돌아오는데 스칼렛에게 멧돼지가 달려드는 것을 봤습니다. 그걸 보고, 도대체 무슨 용기가 났는지 몰라도 그 앞을 막고선 저도 모르게 마법을 썼습니다. 한 번도 성공 못했던 것이 곧바로 나가더라고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긴 이야기를 풀어놓던 니들렌이 손을 들어 거대한 동그라미를 그려냈다.

- 이정도 되는 멧돼지를 한 번에 잡았습니다. 제가요. 그런 일을 겪고 났더니 그 뒤로는 겁나는 것이 저절로 없어졌습니다. 마법도 잘 부리게 됐고요.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 아마 다들 그럴 겁니다. 그러니까 대단해야 된다고, 단단해야 한다고.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일부러 애쓰실 필요 없습니다.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가려가면서 단단해지려고 하지 않아도요.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저도 모르게 단단해지고 대단해지는 때가 옵니다.

시금치 스프 든 저녁식사를 권했을 뿐인데.

또 한 가지를 배우게 되었었다.

- 알았어.

* * *

아무튼 어찌나 말을 안 들으시는지.

기다리라 했더니 기다리질 않고, 오지 말고 돌아가라 했더니 돌아가질 않고. 기어코 찾아왔다.

- 저벅, 저벅.

칼리안처럼 날아들듯 올 능력은 못 가진, 그렇다고 도망도 가지 않을 사람이 옥상 계단을 걸어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플란츠 왕세자 저하."

도대체 저 완두콩을 왜 그렇게 반가워하는지 알 길 없을 라시드가 보기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칼리안에게 보였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정중한 예를 건넸다.

고개를 끄덕여 예를 받은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넌 도대체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어 처먹고 여기까지 꾸역꾸역 기어올라왔느냐는 말이 잘 숨겨진 동생 놈의 얼굴을 슬쩍 본 뒤 라시드 쪽으로 눈을 돌렸다.

반가운 기색이라고는 일절 들어있지 않은 얼굴로, 사실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그러더니 이렇게 뜻밖의 대답을 꺼냈다.

칼리안은 의외라는 얼굴이 되었고 라시드는 즐거운 얼굴이 되었다.

"저를 기억하십니까?"

"하지 못할 이유가 있나."

"꺼려하고 잊으셨을 줄 알았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뵈었던 날, 좋지 않은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찬 바람이 불었다.

조금도 옅어지지 않은 지독한 꽃내음이 훅 풍겨왔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가."

"그것은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좋지 않은 예감은 확실히 든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얌전히 서서 열심히 상황을 지켜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요즘 삶아졌다 절여졌다 해 가며 상태 변화 심하신 형님 또 물에 빠지기 전에 건져내려고.

그런데 말을 잇지 못했다.

"내 어머니가 그대와 그대 아비의 목을 꺾어두려 했던 일은. 기억이 나는데."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라시드를 향해 한쪽 입술을 비뚜름히 올려 보였다.

"안 좋은 일은 무엇이 있었던가. 모르겠군."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플란츠의 모습을 본 칼리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라시드의 얼굴에는 아주 잠시 감정이 비쳤다.

순수한 악의.

혹은, 순수한 즐거움.

그런 것이 잠시 빛을 내다 들어갔다.

"여전히 당당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변하지 않은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저하."

라시드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들어올렸다.

"실리케 전 왕비의 치마폭 속이든. 동생의 그늘 밑이든. 온실 속에 든 채 창 밖을 내려다보는 것만은 다르지 않을 테니 무엇인들 바뀌었을까······ 예상하고는 있었습니다만."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 저벅.

플란츠가 발을 옮겼다.

마치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다만 칼리안이 놈의 목을 틀어쥐지 못하도록. 아주 천천히 한 걸음씩을 걸어왔다.

바람이 불어왔다.

짙고 짙은 꽃향기가 들었다.

"······ 하."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 소리를 냈다.

악취가 배어있지 않은 향기.

아주 가끔씩 니들렌에게서 풍겨오던 백합 향기. 그것이 플란츠에게서 배어나오고 있었다.

제 손으로 제 몸에 향수를 뿌리고 왔다.

- 저벅, 저벅.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질 만큼의 향기를 달고 와서는.

그 꼴을 하고 와서는.

- 탁.

칼리안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달라진 것이 안 보이나."

플란츠가 대답했다.

라시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익숙하지 않은 완두콩의 등짝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서 칼리안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동생 그늘이 더. 살만하던데."

"······ 형님. 지금."

칼리안의 말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라시드를 향한 답이 이어졌다.

"그런데. 나는 안 달라진 것처럼 보여도······ 그대는 확연히 달라졌군."

"제가 달라졌습니까?"

라시드가 어떤 놈인지 칼리안보다는 잘 알아서. 지금 누구와도 엮이면 안 되는 칼리안이 그레이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서. 결국 제 관심의 끝에 플란츠가 있을 저 놈을 칼리안이 막아서다보면, 결국은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저 놈을 없애버릴 칼리안임을 알아서.

그러면 안 되는 것이라서.

"별 볼 일 없는 네 아비 대신해 내 어머니께서 그리 신경을 써줬던 것 아니었나. 덕분에 좋은 곳에서 편안히 살게 된 줄 알았더니."

낮은 목소리가 라시드를 향했다.

"그게 아니라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은데······ 안쓰럽게도."

플란츠의 손이 등 뒤로 향했다.

- 내, 몫이야.

저절로 단단해진 형의 수어가 칼리안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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