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73화 (374/527)

제66장. 내 건데(5)

칼리안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너도 나만큼 참 복잡한 인성이구나.

너한테서 아버지랑 내 냄새 난다고 생각해서 미안하다고. 내가 살다살다 너같은 미친놈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나한테 이런 말 들을 정도면 너 진짜 헤르츠 경만큼 대단한 거라고.

이런 말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반가운 사람을 찾았나 봅니다."

"제가 이곳에 돌아온지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꼭 한 번 뵙고 싶었지만 방도가 없어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을까, 요즘 그 생각을 많이 하고 지냈는데 이렇게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반가울 수밖에요, 왕자님."

칼리안의 눈이 먼 곳을 향했다.

플란츠 쪽에 두었던 시선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칼리안이 물었다.

"당도한 이들이 많은데. 남작의 눈이 어디에 닿았는지 궁금해해도 되겠습니까."

"그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라시드가 다시 한 번 천진한 얼굴을 보였다.

"플란츠, 룬, 카이리스."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왕족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 왕세자 저하 말입니다, 왕자님."

"아아."

칼리안이 가만히 눈을 내리떴다.

라시드의 피로 흠뻑 젖은 손을 조용히 들어, 검은 머리를 아주 천천히 쓸어올렸다.

"내 형님 말입니까."

재밌어서 미치겠다는 얼굴이 그 손에 가려지도록. 드러나지 않도록.

* * *

살금살금 발을 뒤로 물렸다.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뺏겨줄 만한 간식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저 멀리 걸어오고 있는 루시와 안네를 보았을 때에나 할 법한 짓이지, 바로 전날에 식사까지 함께 한 상관을 발견했을 때 보여야 할 올바른 행동은 결코 아니다.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아니, 그래도.

상황이 좀 그렇지 않느냔 말이다.

내 상관과 동료가 다정하게 손도 잡고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까지 든 채로 분수대 앞에 서 있는 것을 봤다. 그런데 거기에 해맑은 얼굴로 찾아가 안녕하시냐고, 그간 잘 지내셨냐고, 나 퇴근할 때 보니까 이미 진작에 일 마치고 퇴근해서 안 계시던데 그래서 그런가 나랑 달리 잘 지내신 얼굴이라 부럽다고 인사를 건넬 수는 없지 않나.

"근육 키울 때 눈치도 좀 키우지 그랬냐."

이게 다 닭가슴살같은 스칼렛 탓이다.

중요한 것을 제일 먼저 말해줬어야지.

플란츠와 히나 주변에 잠시 발을 멈췄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제 갈길을 가는 귀족들 사이에서, 그들의 끊이지 않는 시선 사이에서, 제발 나 하나 쯤은 눈에 띄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 니들렌이 얌전히 뒷걸음질을 했다.

"분홍 머리 마법사."

"네, 저하.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셨습니까."

아······.

시스파니안이시여.

"······ 플란츠 왕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죄송합니다."

딱 걸렸다.

너 지금 무슨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같은 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플란츠를 앞에 두고, 저도 모르게 말도 안 되고 예법에도 하나도 안 맞는 인사를 보내버린 니들렌의 낯빛이 제 머리색처럼 변했다. 사실은 그 표정없는 얼굴에 '밤새도록 일하는 바람에 많이 피곤했나보다' 하는 나름대로의 걱정이 담겨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 안녕하세요, 사단장님. 여기에서, 뭐, 하세요?

덕분에 난처하고 민망한 얼굴이 되어 있는 니들렌을 향해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니들렌 덕에 위험한 상황이 생길 일이 없어졌으니 가차없이 플란츠의 손을 놓고 나서 이미 많이 녹은 아이스크림부터 한 입 떠먹은 뒤 남은 아이스크림을 플란츠에게 잠시 맡긴 히나의 인사였다.

별 말 없이 자연스레 히나가 먹던 아이스크림을 받아드는 왕세자를 보게 된 탓에, 민망하던 기분도 다 까먹고 저도 모르게 웃어버린 니들렌이 서둘러 대답했다.

"동생의 카페가 이 앞에 있습니다, 치유사님. 세자 저하께서 밖에 계신다 하기에 인사드리러 나왔습니다."

- 아, 그렇구나. 밖에서 뵈니까, 더 반가운 것, 같아요.

"네. 저도 그렇습니다."

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히나가 플란츠의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돌려받아 한 입을 더 먹었다. 바람 좋았던 봄날에 키리에가 처음으로 사줬던 바로 그 딸기 아이스크림이었음을 깨닫게 된 탓에, 반갑기도 하고 조금도 남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든 까닭이다.

맛있게 먹는 히나를 본 니들렌이 뿌듯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지금 들고 계시는 것이 루시와 안네의 간식을 주식 삼은 내 동생이 만든 것이라 알려줘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 다그닥, 다그닥!

그런데 이 거리에 어울리지 않을 말 달리는 소리가 니들렌의 입을 막았다.

순식간에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니들렌이 플란츠와 히나의 앞을 막고 섰다. 그리고 말들이 달려오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가문의 문장 하나 그려져 있지 않은 검은 갑옷의 기사 십여 명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 파지직······!

아이스크림을 가리켜 보이려던 손 끝에 전류가 모여든다.

- 우웅!

동시에 플란츠와 히나의 앞에 두터운 실드가 만들어졌다.

"조심하십시오."

마법사의 짧은 말과 갑작스런 움직임. 그리고 수상한 기사들의 질주에 놀란 이들이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상당한 소란이 일었음에도 니들렌의 시선은 기사들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

그런데 뒤에서 이런 한숨 소리가 들렸다.

분위기가 좀 안 좋다 싶으면 앞뒤 잴 것도 없이 냅다 실드 안에 가둬지기부터 하는 이 상황이 너무 익숙해 그만 짜증이 치밀게 된 왕세자의 입에서 나온 소리다.

내 동생이 그러는 건 이제 그냥 그러려니 하겠는데 분홍 머리 마법사 너까지 왜 그러느냐고. 내 칼은 내 눈에만 보이는 거였냐고. 딱 그런 눈으로 니들렌의 뒷통수를 가만히 쳐다보던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단장."

"네, 부군단장님."

"치워."

"네?"

"지그프리드니까."

"······ 네?"

비상 사태를 대비해 만들고 훈련시킨 소음탄이다. 그것으로 지원군을 불렀다면 소속을 드러낼 수 없을 상황일 가능성도 많지 않나. 때문에 가문을 나타내는 표식을 모조리 떼어놓고 온 것임을 알 리 없을 니들렌이 다시 앞을 봤다.

- 다각.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말들이 속도를 늦추더니 드미레아의 말과 똑같은 모습으로 몇 차례 발을 굴렀다. 그것을 확인한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자신들을 불러낸 드미레아의 행방을 알 만한 사람을 향해 곧장 걸어왔다.

가장 앞에 서 있던 기사 한 명이 절도있는 모습으로 예를 보였다.

"왕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지그프리드 공작가의 수석 기사단장, 로난시테입니다."

긴 머리를 높이 묶은 여자의 얼굴이 낯익다는 것을 안 니들렌이 실드를 해제했다. 그리고 방금 인사를 받은 플란츠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발칸의 사단장 니들렌 제이아입니다. 지그프리드에서 이곳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이곳으로 기사들을 부르신 이유는 저희가 여쭤야 할 사항일 것 같습니다. 소공작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실드는 해제했으나 여전히 플란츠의 앞을 가로막은 채였다. 지그프리드의 기사가 맞았고 얼굴을 아는 기사인 것도 맞았으나 가문의 문장을 두고 나온 모습이 영 이상하다 여겨진 까닭이다.

"설명할 시간 없어."

소공작님 대신 왜 왕세자와 발칸의 사람들이 있는지.

갑자기 나타난 쟤들은 칼리안 왕자님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다 가리고 시커멓게 입고 있는지.

로난시테와 니들렌의 의문은 싹 무시한 플란츠가 히나를 쳐다봤다.

"다 먹었으면."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쪼르르 달려가 다 먹은 아이스크림 컵을 버리고 온 뒤 튼튼이의 안장 날개를 잡았다. 키 작은 히나가 등자를 밟도록 직접 도와준 플란츠가 에스티나에 훌쩍 올랐다.

곧 플란츠의 고개가 움직였다.

서로 굉장히 서먹하게 서 있는 마법사와 기사들을 내려다보다 낮은 목소리를 냈다.

"따라와."

"······ 어딜 가십니까?"

"따라오라고."

내 동생 그 놈이 어떤 분이냐면 한 번 짖기 시작하면 눈에 뵈는게 없어지는 그런 분인데 며칠 전에 만난 빨간 새한테 마음껏 짖질 못하고 많이 참으셨다고. 그날 안 그래도 없는 인내심을 너무 많이 쓰셔서 이번에 자칫하면 짖다 말고 물 지도 모르겠다고. 오늘은 히나도 있고 해서 그냥 안 따라가려고 했는데 내 동생 거기로 가시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내 동생이 혹시 누구 하나 물기라도 하면 사람 말리는 법만 알고 있을 소공작은 아마 감당 못 할 거라고.

"소공작은 내 아우님 못 잡아두니까."

길고 긴 말을 꼭꼭 접어 담아 내려놓은 플란츠가 유유히 앞서나갔다. 가는 길에 발칸의 단원들을 만나게 되면 같이 데려가고, 못 만나면 뭐. 알아서 찾아오겠지.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 오지 마. 돌아가.

때문에 나에랑샤에 들어선 뒤 멀리 보이는 건물의 옥상 위에서 곁에 선 어떤 놈의 눈에 띄지 않게 주의해가며 수어를 보내오는 동생을 보았을 때도,

- 지금, 당장. 돌아가.

- 왜.

그래서 히나와 대화하듯 동생 놈에게 대답을 전했을 때에도.

- 믿기지 않겠지만, 여기, 미친놈이, 있어.

중간에 섞인 험한 말을 이해 못해 히나를 향해 같은 것을 보여주며 뜻을 물은 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의 히나가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들어 머리 옆에서 뱅글뱅글 굴리는 것으로 뜻을 알려줬을 때도. 그 제스처도 이해하지 못하는 곱게 자란 왕세자의 손바닥에 히나가 단어 하나를 써 줬을 때에도.

- 믿어.

- ······ 아니, 나 말고. 다른, 미친놈.

플란츠는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둠에 가려진 탓에, 내 동생에게 미친놈으로 인정받을 만큼 대단히 미친 놈의 정체를 몰랐으니까.

- 반말.

칼리안이 누구를 마주쳤는지 몰랐으니까.

* * *

속수무책으로 칼에 찔린 것이 얼마 만이더라.

가물거리기 시작하는 정신을 애써 다잡으려 그것을 가늠해봤다. 그러나 곧바로 떠오르질 않았다. 또렷이 기억되는 최근 몇 년 사이에는 그런 적이 없었을 뿐더러 상처 속에 든 천 뭉치와 부러진 쇄골이 자꾸 살을 찔러대는 느낌이 생각을 방해한 까닭이다.

바로 근처에 칼리안이 있으니 얌전히 잠에 들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다친 채 벽에 기대 앉아있는 이를 그냥 두지도 못하고, 누가 오든 그 앞을 막아서는 3왕자의 검은 말 덕에 다가와 살피지도 못해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잠을 자겠나.

'죽지 마.'

하기사. 그런 얼굴을 보고 말았으니 마음놓고 정신을 잃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다시 생각을 했다.

잠들지 않도록, 정신을 잃지 않도록.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칼에 찔린 것이.

······ 얼마 만이더라.

"브리지트 경."

목소리가 들렸다.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정신을 들게 할 목소리가 반가워서, 에일라가 감겨들던 눈을 떴다. 검은 말 두 마리를 뒤에 둔 누군가가 보였다.

"내가 누군지 압니까."

"······ 지그프리드. 소공작."

에일라의 앞을 막고 서 있던 레이븐이 유일하게 길을 내어 준 사람. 그렇게 가까이 와 에일라가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한 사람.

드미레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더니 바닥에 놓여있던 자주색의 재킷과 베스트를 한 쪽으로 치우곤 자신의 묵빛 재킷을 벗어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에일라의 몸을 천천히 눕혔다. 돌봐 줄 사람이 생겼는데도 굳이 앉은 채로 버티게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왕자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옥상. 라시드 브리센을 만나러 갔어요."

생각지 못한 이름을 들은 드미레아가 눈매를 굳혔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당장 죽을 상태는 아니니 이렇게 두고 올라갔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얼마나 다쳤는지는 알고 있어야 히나가 있을 아스트리샤로 찾아가든 왕궁으로 가 히나를 기다리든 결정할 수 있을 터였다. 때문에 드미레아는 칼리안이 있을 곳에 가 보는 대신 에일라의 상태부터 주의깊게 살폈다.

쇄골이나 어깨 쪽이 부러진 듯 보인다. 열이 심하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몰라도 상당히 강한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허리 쪽의 상처에는 이미 붕대가 잘 감겨 있었고, 붕대 밖으로 피가 배어나오진 않고 있었다.

칼리안이 무슨 방법으로 지혈을 해뒀는지 알 만하다. 때문에 잠시 생각을 해보던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혹시 베른 자작이 묻거든 내가 조치했다 하십시오. 왕자님이 하셨다 하기에는 너무 익숙한 솜씨니까."

"내가 했다고 대답할까 했는데. 이상한가······."

"이런 건 혼자 못 합니다."

"그건 그렇네. 알았어요."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던 사람이 어느새 멀쩡히 대답하는 것을 본 드미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 죽은 채로 공작저에 실려왔던 칼리안 역시 치료를 받는 내내 단 한 번도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린 탓이다.

지독하다.

그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 줄이야.

"곧 왕궁으로 갈 테니 편하게 있어도 됩니다."

"왕궁에 가면 그렇게 할게요."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은 진작에 아스트리샤에 도착했을 테고, 빠르다면 발칸의 단원들이 인근에 도착했을 터였다. 그들이 찾아와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주변에 모여있던 이들을 물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던 드미레아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거리의 사람들이 이미 물러나고 있었다. 그렇게 생겨난 길 사이로 가벼운 무장을 한 병사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지그프리드의 기사들도 발칸도 아닌 이들.

수도의 경비대였다.

"빨리도 오는군."

혼잣말을 흘려보낸 드미레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천천히 발을 옮겨 경비대의 앞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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