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75화 (376/527)

제67장. 향기(1)

그새 참 많이도 왔다.

발칸과 지그프리드의 수많은 기사들, 발칸의 마법사들, 히나와 드미레아. 이 기세면 오래지 않아 아르센까지 올 판이다.

에일라가 만들어 낸 폭음 하나, 때마침 밖에 있던 칼리안의 행동 하나에 일이 이렇게나 커졌다.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 에일라를 받아내고 그것으로 모자라 건물 옥상으로 뛰쳐 올라오고. 그야말로 난리를 피웠다.

잠시 동안 벌어진 일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크게 번지고 있는 상황을 알면서도 칼리안은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나를 그리 보고 싶어했다 하니, 할 말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내가 직접 듣지. 그 정도는 들어 줄 아량이 있으니까."

"그런 아량을 베푸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저하. 무슨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할지 고르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그럼 가던가."

"그리 잘라 말씀하시면 제가 참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그대의 서운함을 내가 헤아려야 할 이유가 있나."

"저하의 뒤에 서 계시는 참으로 대단하신 아우님과의 관계 만큼은 아니겠으나. 저와 저하 역시 결국은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의 헤아림은 보내주시리라 믿었습니다."

"······ 형제."

"혹 제 말이 거슬리십니까?"

"그래. 거슬리는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둘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저하께서 아무리 부정하신다 한들, 저하 역시······."

"예상했던 그대로의 말을 하는 것이 거슬린다는 뜻인데. 말의 진위를 이해할 만큼 영민하지는 못한 것인가."

도대체 동생 그늘이 얼마나 더 살만했는지는 몰라도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난 완두콩이 쉼없이 라시드를 긁어대고 있었던 까닭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어느새 어두워진 밤에.

달빛은 밝고 꽃향기가 짙었던 탓에.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게 되어서.

"그렇게 보셨습니까?"

"그렇게 보이는군."

"이런······. 드리고 싶은 말씀이 참 많았었는데, 저하께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자리에서 무언가를 더 꺼내놓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차분함을 잃게 될까 걱정이 되어서 말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않는 것은, 어쩐지 이번에는 다르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짙은 그 향기가 브리센의 핏줄에 대한 체념에서 나온 것이든 자신은 다르리라는 신념이든, 전부 다 제 몫이니 그냥 두라 말하는 것 같아서 그냥 두었다. 그렇게 해야 산다 했던 키리에의 말이 생각나서 나서지 않았다.

플란츠를 끌어내든 저 놈을 옥상 아래로 떨궈버리든. 둘 중 하나는 하고 싶은 마음을 일단 잘 눌러가며 꾹꾹 잘 참았다. 올바른 어른이란, 때로는 잘 믿어주고 혼자 걷게 해 주는 사람임을 칼리안도 알고는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놈이 말을 끌었다.

여전히 소리없이 한 걸음을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플란츠의 뒤에 서게 된 칼리안과 플란츠를 번갈아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저하. 제 시선에서는 도무지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칼리안은 잠시 눈을 감았고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놈의 시선이 칼리안을 깊숙이 훑어보는 것도 일단 그냥 두었다.

그러니 아무도 말을 허락하지 않은 셈이었으나 라시드는 개의치 않았다. 거리낌없이 하고자 했던 말을 입에 담았다.

"칼리안 왕자님께서는 득 볼 것이 없는데. 무엇을 위해 그렇게나 큰 그늘을 내어주셨는지. 실리케 전 왕비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저하께서는 결국 왕자님의 손도 놓아버릴 분임을 칼리안 왕자님께서 알고는 계시는지. 그것을 알면서 세자위에 앉혀두셨는지······ 꼭 여쭙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칼리안이 눈을 떴다.

* * *

다정한 것인지, 매정한 것인지.

단단한 것인지, 유약한 것인지.

살고 싶었으면 죽을 짓을 왜 했느냐며 가진 숨을 다 토해낼 것처럼 묻더니, 절대로 죽이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굴더니,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사지로 내몰았던 사람. 살아 돌아와 다시 만났을 땐 생애 두 번 없을 기회를 마주친 듯 절실한 얼굴을 했으면서 내 말을 듣지 않겠다면 이번엔 정말 죽이겠노라 진심이 가득 담긴 말부터 꺼냈던 사람.

끝을 모를 만큼 다정한 것 같다가도 무엇이든 단숨에 잘라내버리고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을 수 있을 사람. 분명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을 만큼 단단하지만 사실 알고보면 단단한 껍질은 이미 다 녹아 사라지고 붉은 속살을 그대로 내놓은 채 사는 사람. 그렇게나 단단해보이던 겉모습은 그저 속살 위에 생겨난 흉터였을 뿐이었던 사람.

- 괜찮아요?

모순되는 것 투성이인 칼리안이 지켜내 생의 이유로 삼은 사람이라 그런가.

- 내가 안 괜찮다고 하면, 그만 할거예요?

- 아니요.

한없이 부드럽고 따스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전혀 아니었다.

걱정을 한가득 안고 있는 새까만 눈과 달리 단호하기만 한 손이, 부러진 쇄골 뼈가 어긋나 툭 불거진 목과 어깨 사이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지금 히나는 부러진 것을 무시하고 억지로 팔을 쓰느라 완전히 틀어져버린 뼈를 강제로라도 제 자리에 돌려놓는 중이었다. 치유의 힘을 쓸 땐 쓰더라도 일단 뼈부터 제 자리로 돌려놓은 뒤에야 아물게 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아프겠지만.

- 쇄골은 예쁘라고 있는 뼈 아니에요. 손에 뭐 들고 움직일 때 도와주라고 있는 뼈예요. 예를 들면 호위님, 아니. 이제 호위 안 해주시니까. 에일라님이 좋아하시는 칼이나 단검같은 거요. 그런데 그런 뼈가 부러졌으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그 손길만큼이나 단호한 말이 에일라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비명을 참아내느라 이제 입을 여는 것도 버거워진 에일라가 대답 대신 눈을 꾹 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나의 손은 쉼없이 움직였다.

- 안, 써야, 죠.

한 글자 한 글자 힘 주어 말하듯 히나의 목소리가 뚝뚝 끊겨 전해졌다.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뜨여진 눈에 괜스레 담긴 원망의 눈빛이 히나를 향했다.

- 안 그랬으면 나는 죽었을 거예요.

- 거짓말하지 말아요.

히나의 목소리가 곧장 전해졌다.

- 도망칠 생각 안 했잖아요. 살려고 발악하다가 끝에 몰려서 다친 것 아니잖아요. 그랬으면 나도 이렇게 혼 안 내요. 그런데 아니잖아요. 어차피 죽을 것 같으니까 그냥 전부 다 포기해버리고 한 번이라도 더 공격하고 죽으려 했다가 이렇게 된 거잖아요.

에일라는 대답하는 대신 다시 눈을 감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칼을 들었던 것은 맞지만 살아남고자 도망까지 칠 생각을 하지는 않은 것이 맞았으니까. 예전 같았다면 어떻게든 도망쳤을 테지만 이번만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 칼리안 왕자님이 에일라님 많이 도와줬던 것, 나도 대충은 알아요.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열심히 갚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위험해지면 도망치는 게 나아요.

수어가 아니었던 탓에, 히나의 목소리는 피할 길 없이 계속 들려왔다.

- 칼리안 왕자님 도와주려다 죽어버리면 칼리안 왕자님은 하나도 안 고마워 할 거예요. 차라리 어떻게든 도망쳐서 돌아오는 게 낫다고 할 거예요. 그게 얼마나 큰 골칫덩이가 되든 신경 안 쓰고 잘했다 다행이다 할 사람이잖아요.

- ······ 알아요.

- 알면 됐어요. 이제 또 그러지만 말아요.

- 알았어요.

- 네.

고분고분 들려오는 에일라의 대답에, 한결 누그러진 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 아무리 아파도 이 손으로 칼 들고 휘두르는 것보단 안 아플 거예요. 게다가 마취약은 싫다면서요. 많이 참았으니까 조금만 더 참아요. 금방 낫게 해 줄 테니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틀린 말 하나 없는 소리였으나 딱 한 가지 히나가 잘못 아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에일라는 그 한 가지를 굳이 해명했다.

- 싫다는 게 아니라 마취약은 소용이 없을 거라는 말이었어요. 내성이 생겨서.

방금 전까지 혼을 내던 것도 잊은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무슨 약을 얼마나 먹었으면 마취약이 안 들어요?

- ······ 독약. 먹은 건 아니지만.

입 속에 독을 넣고 몇 년을 보냈다.

비록 독약을 뱉어낸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지만 그 약에서 퍼져나온 미세한 독기운이 몇 년을 두고 몸 속에 스며들었던 일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물론 에일라는 그리 오랫동안 독에 노출되지도 않았고, 그 정도의 독이 평생 흘러든다 한들 없던 병이 찾아들거나 수명이 줄어드는 등의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저 히나가 늘 가지고 다니는 마취제가 소용없어지는 정도의 가벼운 증상이 부작용처럼 남았을 뿐이다.

- 아. 그래서 그런 거구나.

에일라의 말을 듣고도 히나는 놀라지 않았다.

다른 이가 애써 묻어 둔 과거를 들춰내고 그 동안 무슨 일을 겪으며 살았느냐 오지랖을 부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히나 역시, 히나를 처음 만나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일들을 겪어봤던 사람이니까.

- 그런데 에일라님은 반대네요. 플란츠 저하는 약이 너무 잘 듣는 것 같아서, 마취약이 너무 독할까봐 못 썼었는데. 혹시 그것도 치료할 수 있으면 치료해줄까요?

- 마취약이 안 듣는 건 나한테는 오히려 좋은 일이니까. 괜찮아요.

- 알겠어요. 대신 다음엔 이렇게 다치면 그 팔로 검 쓰지 말아요. 뼈가 다 틀어지면 전부 도로 맞추고 치료해야 하는데 그건 너무 아프니까요. 물론 안 다치는 게 제일 좋겠지만요.

- 노력해볼게요.

빈 말이라도 알겠다고는 약속 못하는 에일라가 최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 어쨌거나 베로니카에게 더 약한 약 만드는 김에 더 강한 것도 만들어달라고 부탁은 해야 되겠네요.

히나가 에일라의 목 언저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비수에 찔린 상처를 치료해줬을 때와 같은 따스한 기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만큼이 지났을까.

목의 통증을 거의 다 잊었을 때 쯤, 히나의 손이 에일라에게서 떨어졌다.

- 이 정도면, 일단 왕궁으로, 돌아갈 정도는, 될 거예요. 가서, 조금 더 제대로, 치료해요. 그래도, 자상한 왕자님이, 조치를 잘 해두신 덕분에, 더 안좋아지진 않아서, 다행이에요. 가서, 약도 잘 드시고, 밥도 잘 드시면, 금방 나을 테니까요.

어느새 전해진 수어를 본 에일라가 잠시 할 말 잃은 얼굴을 했다. 이제껏 아무 말없이 곁에서 지켜보던 드미레아도 무어라 입을 열려다 도로 다물었다. 그 상처를 지혈한 것은 칼리안도 에일라도 아닌 드미레아였다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던가.

그런 둘을 한 번씩 쳐다 본 히나가 바닥에 떨어진 붕대와 로브 조각을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 보통의 왕자님이, 알기 어려울 일을, 자상한 왕자님이, 할 수, 있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의심하지 않아요.

아르센의 어깨를 잘 감싸 두었던 붕대를 처음으로 보았을 땐 솔직히 조금 놀랐다. 세크리티아에서 플란츠의 어깨를 칭칭 감은 붕대를 보았을 때에나, 얼마 전 플란츠의 팔을 묶은 타이의 매듭을 보았을 땐 그 모두를 조치한 것이 전부 다 칼리안이 맞겠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을 했다. 이번에 에일라의 상처를 막아 둔 솜씨를 보고 나서는 또 칼리안이 한 것이겠거니, 그냥 그렇게만 여겼다.

사실 남의 상처 돌볼 일 없을 왕자가 그런 일을 능숙하게 할 줄 안다는 것이 큰 잘못도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히나에게 있어서는 이상하다기 보다는 반가운 쪽에 가까웠다. 덕분에 힘을 덜 들이고 있으니까.

- 만약 자상한 왕자님께서, 제가 그걸, 이상하게 여길 거라고, 생각했으면, 안 하셨을 거예요. 잘못되거나 수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괜히 숨겨 주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줄 아는지, 왜 그렇게 능숙한지.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일이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게 마련이고 꼭 서로의 비밀을 다 알아야 신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과거는 과거고 비밀은 비밀이고 중요한 건 지금이니까.

"알겠습니다."

에일라는 고개만 끄덕였고 대신 드미레아가 대답을 전했다.

그리고 멀리서 다시 한 번 다각다각, 하고 말 발굽 소리가 들렸다. 르메인을 먼저 만나러 갔던 아르센이 찾아오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에일라가 고개를 돌렸고 드미레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때.

둘의 시선이 동시에 옥상을 향했다.

"······ 왜."

난색 가득한 음성이 드미레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싸움의 기색도 없고 계속 잠잠한 듯 보여 이제 곧 내려오겠거니 했는데,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진 까닭이었다.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은 그대로 두고, 발칸 전원과 베른 경은 왕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 곳에 있다 휘말려 오해를 사기보다는 그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을 이해하지 못한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에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리스의 왕자와 왕세자가, 군대까지 이끌고 후작의 아들을 공격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보단 조용히 처리하는 편이 낫다고. 그런 의도로 꺼내진 말임을 이해한 까닭이었다.

"알겠어요."

쏟아져 내려오는 강한 살기에 더 욱신거리는 듯한 몸을 힘들게 일으킨 에일라가 짧게 대답했다.

* * *

일부러 꺼낸 말이었다.

정말 궁금하기도 했고, 의외로 평정심을 잃은 까닭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러 물었다.

앞에 선 왕세자는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였다. 그렇게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라시드를 보다가,

"······ 칼리안."

하고 제 동생을 불렀다. 그랬더니,

"안 뭅니다. 아직."

라는 대답이 플란츠의 뒤에서 들려왔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기도 전에 플란츠가 움직였다. 라시드에게로 딱 세 걸음을 다가갔다.

"내 아우님께서는 참아주셨다 하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라시드의 코앞에 선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내 어머니와 나를 모독한 죄를 물어 당장 그대의 목을 칠까. 아니면 평생 카이리스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할까. 그도 아니라면······ 이해를 해줘야 하나."

비웃음.

분명한 비웃음이 가득 어린 목소리가 라시드를 찾아들었다.

"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대 역시 결국은 그대의 아비를 고스란히 닮았을 테니. 예상했던 그대로. 조금도 벗어나질 못하고. 그러니 그것을 딱하게 여겨 이해를 해주는 것이 나을 듯 하군."

라시드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 얼굴에 어떤 표정이 들었는지 플란츠는 보지 못했다. 다만.

- 휘익!

바람이 일었다.

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검 한 자루가 플란츠의 목을 향해 치달았다.

플란츠는 움직이지 않았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그 검을 쳐다봤다. 고요히 가라앉은 눈 속에 여전히 그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채로.

- 사락······.

대신 가벼운 천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 우우웅!

- 카앙!

그와 동시에 검은 기운이 일렁이는 소리가, 그리고 칼날이 칼날을 쳐내는 소리가 들렸다.

"······ 아무튼 내 형님은 어찌나 겁이 없으신지."

참지 못한 이의 날붙이가 달려들기 전에 플란츠의 앞을 막아서고, 칠흑의 빛이 뭉클거리는 검을 들어 공격을 막은 칼리안이 라시드를 쳐다봤다.

두 눈은 라시드를 향한 채로, 칼리안이 손을 뒤로 보냈다. 그리고 조금 전 플란츠가 그러했듯 빠른 수어를 만들어 보냈다.

- 이거 확인하려고, 그랬어?

라시드의 검에 맺힌 붉은 기운.

그것을 확인하려 일부러 나서서 라시드를 긁어냈음을 이제야 알아서.

"반말."

혼잣말처럼 이어진 플란츠의 대답에, 라시드의 힘에 조금씩 밀리는 검을 한 손으로 다잡은 칼리안이 다시 한 번 다른 손을 움직였다.

- 이거 확인하려고, 당신 목을 걸었어?

"어련히 알아서 살려주실까."

태평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 카아앙!

더 인내하지 못한 이들의 검 끝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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