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장. 내 건데(4)
칼리안 가라사대.
피 냄새가 꺼려지지 않을 때는 스테이크를 먹을 때 뿐이다.
기사가 아닌 사람은 맡지도 못하는 냄새. 사람의 것도 아닌 고기에서 풍겨오는 피 냄새도 역하다 여겨 모든 고기를 바싹 익혀 드시는 어느 비위 약하고 파릇한 분은 공감하지 않겠으나 칼리안은 그랬다.
그리고 그 칼리안은 지금, 앞에 선 이를 보며 이를 드러내고 싶은 기분을 애써 참는 중이었다.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풍겨오는 피 냄새 때문이다.
자신의 팔에서 올라오는, 이미 멎은 피의 냄새. 옥상 가장자리에 생겨난 피웅덩이, 옥상 난간까지 이어지는 긴 핏자국과 사방에 흩뿌려진 핏방울, 그리고 칼리안의 몸에 밴 에일라의 피 냄새.
그런 것이 앞에 선 놈에게서도 똑같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옅은 것, 짙은 것, 오래된 것, 그렇지 않은 것. 에일라의 비녀를 쥔 손에서 흐르고 있는 피 말고, 도대체 몇 명의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만큼 풀풀 풍겨나오는 피 냄새. 마법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그 냄새.
'칼리안입니다.'
때문에 제 목줄을 스스로 꽉 틀어잡았다.
저 얼굴에 그려진 웃음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발톱을 박고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아서. 피 냄새 때문에.
그런 칼리안을 쳐다보던 놈, 라시드가 느긋한 투로 입을 열었다.
"누가 왕자님의 것을 건드렸다니. 설마 이곳에 왕자님의 것이 있었습니까?"
툭.
대답 대신 칼리안의 발 끝이 바닥을 한 번 두드렸다. 굳이 같은 말을 또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저는······."
대답 대신 전해진 소리에 다시 입을 연 라시드가 왼손에 쥐고 있던 것을 펼쳐 보였다. 날이라고는 조금도 서 있지 않은 듯한 느릿한 목소리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새 한 마리만 보았습니다, 왕자님."
비녀가 온통 핏빛이다.
그것이 에일라의 피가 아님은 진작부터 알아봤다. 저 놈의 손바닥에 난 상처에서 흐른 피였다.
다친 쪽은 왼손. 검집은 왼쪽에 걸려있다.
'오른손잡이.'
급한 마음에 에일라의 검을 왼손으로 잡아챘다면, 에일라는 놈의 손가락을 전부 없애놨을 거다. 다른 상황에 에일라가 저 놈의 손에 상처를 낼 수 있었다면, 에일라는 고작 손바닥을 베는 대신 목을 잘라놨을 거다. 그러니 저것은 에일라가 던진 비수를 붙잡아 난 상처다.
드미레아 만큼은 아니겠으나 에일라가 어느 정도로 강한 사람인지는 칼리안이 가장 잘 안다.
그런 에일라를 저 정도로 만들어 둔 놈의 왼손에 난 상처. 충분히 쳐낼 능력이 되겠으나 굳이 붙잡아 만든 상처. 싸움에 방해되지 않을, 그러나 좋은 핑계거리는 될 수 있을 상처.
'일부러 만든 상처.'
조금 전까지 칼리안의 손에 감겨있던 붕대 속에 담아둔 것과 같은 의도를 가진 상처인 것이다. 협박에 있어 꼭 타인의 피가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녹빛 눈을 향한 시선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놈의 면면을 확인한 칼리안이 생긋, 웃음을 보였다.
"이렇게나 어두운 밤에 새를 보았습니까."
"네. 밤이 어두워 길을 잃은 것인지, 이렇게나 어두운 밤에 새를 보았습니다. 그것이 생소하여 잠시 발을 멈추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왕자님을 뵙게 되었으니. 과연 이런 상황을 예기치 못한 우연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라시드를 잠시 보던 칼리안이 시선을 내려 비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라시드가 하다 만 말을 대신 이었다.
"예정된 인연이라 해야 할지."
"맞습니다. 예정된 인연. 그 말이 실로 맞습니다, 왕자님. 마치 예정된 인연같다 생각이 드니 그것 참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남작의 생각을 사로잡을 만큼 신기했나 봅니다."
"네. 그렇습니다."
바람이 불어왔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실크를 한 올 한 올 골라 이어둔 듯한 칼리안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흔들리다 내려앉는다. 꼼꼼하게 모양을 잡아 두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라시드의 갈색 머리와는 많이 달랐다.
흠잡을 곳 없는 차림새를 바라보던 칼리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허나 나는······ 새를 물은 것이 아니었는데."
"네. 왕자님의 것에 대해 물으셨지요."
놈이 한 걸음을 다가왔다.
"그래서 저는. 새를 만났다, 답해 드렸습니다."
발이 바닥을 디디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대신 향기가 났다.
지독한 꽃향기가 났다.
* * *
기사 둘, 마법사 하나.
함께 만나 찾아오기라도 한 것인지 한꺼번에 찾아든 셋을 보던 아르센은 머리가 아프다는 얼굴을 했다.
아르센이 조용히 고개를 들고 상황을 가늠했다.
앨런은 오전부터 자리를 비웠다. 리베른에 다녀오겠노라 했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자진해서 일을 돕던 니들렌은 오전에 퇴근했다. 그리고 집무실을 나누어 쓰던 또 다른 부군단장은 왕궁 밖으로 도망갔다.
'아스트리샤.'
다섯 글자.
딱 다섯 글자를 말해주고서.
대체 그게 뭔 말인지도 모르겠고 해야 할 일은 많았던데다 짧은 말로 무슨 소리를 하고 싶던 것인지 크게 관심도 안 갔던 탓에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는데 그것이 아마도 아스트리샤 거리에 간다는 이야기였나 보다고, 이제야 깨달음이 왔다.
뭐. 할 일 잘 마치고 나간 것이니 플란츠가 아스트리샤를 가든 바넨샤를 가든 세뉴강을 건너가든 상관할 바는 아니었으나.
'헤르츠 부군단장님, 나에랑샤 거리 쪽에서 폭음이 있었습니다. 마나 파동이 감지됐다는 보고로 보아 마력탄이 터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플란츠 부군단장님, 아니. 왕세자 저하와 3왕자님께서 왕궁 밖에 계십니다.'
이 상황에 부군단장 플란츠 말고 왕세자 플란츠가 밖에 있는 것은 문제가 좀 되었다. 수도의 경비대가 아니라 발칸이 관심을 보이고 직접 나서줘야 할 만큼은 문제가 되었다.
니들렌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사단장을 지긋이 바라보던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어찌 말씀하셨나."
"아직 보고드리지 않았습니다."
"왜?"
"군단장님도 안 계시는데 전하께서 상황을 알게 되시면 엘라자르 쪽을 움직이실 것 아닙니까."
엘라자르는 새로 바뀐 국왕 친위대의 이름이었다.
지난 해, 르메인은 브리센의 손에 물들었던 왕실의 근위기사단 카렌과 라온을 해체했다. 그리고 플란츠는 두 기사단의 기사들 중 완전히 제 손에 들어 온 이들을 골라내어 발칸에 합류시켰다.
모자라는 기사들의 수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칼리안을 따르는 기사 가문 연합을 이끄는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이 계속하여 기사들을 양성해 지그프리드로 보내고, 그들 중 이상이 없는 이들을 드미레아가 차출해 발칸에 투입하고 있었으니까.
어찌됐건 그렇게 기사단과 마법사단을 발칸 하나로 통합한 르메인은 국왕 친위대 '카에라'의 이름을 바꿨다.
당시 카에라 소속의 기사가 플란츠에게 독 주머니를 건네는 일을 자행했고 이로 인해 칼리안이 에반을 찾아가 직접 칼을 쓰게 된 일이 있었지 않나. 때문에 르메인은 카에라 소속의 기사들 중 브리센과 연관되었다 의심되는 이들을 모조리 쳐냈었다. 다만 당연하게도 국왕 친위대 자체를 해체할 수는 없었던 까닭에 그 이름을 포함한 관리 체계를 모두 바꾸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이렇게 왕궁 내의 기사단을 싹 뒤집어가며 국왕의 자리를 단단히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소 같은 르메인의 새가슴이다.
"왕세자 저하나 왕자님들의 안위에 이상이 생기면 늘 엘라자르부터 내보내려 하셨는데, 오늘은 그런 전하를 말려드릴 군단장님도 안 계십니다. 그래서 아직 전하께는 보고드리지 못했습니다."
칼리안이 독을 마시고, 플란츠가 칼에 찔리고, 칼리안이 비명횡사 할 뻔하고, 이 와중에 란델은 텐실의 신성기사를 왕궁 안으로 불러들이질 않나, 좀 살만하니까 플란츠가 죽었다 살아나고. 아무튼 다사다난한 아들들을 둔 탓에 르메인은 뭔 일만 났다 하면 엘라자르부터 보내 일을 해결하려 들었다. 국왕만을 위해 존재하는 기사단이니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칼리안과 플란츠가 또 몰래 도망을 친 상황에 마력탄이 폭발하는 사고가 났단다. 그런 사고라면 열에 아홉은 칼리안이 연관된 일이고 나머지 하나 정도가 이름 모를 웬 정신나간 마법사가 벌인 실수일 것이 분명하지 않겠나. 그건 굳이 머리를 써서 예상해 볼 것도 없이 아주 뻔한 일이다.
그렇다면, 말려 줄 앨런도 없는 르메인이 어떻게 할까. 발칸 뒤에 엘라자르 딸려 내보내겠지. 직접 가보겠다 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숨겨봐야 어차피 들으실 일 아닌가."
"네. 곧 정보 담당관이 전하께 내용을 알려드리게 될 겁니다. 어쩌면 이미 들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 알겠네."
왕궁 밖에 마력탄 폭발로 의심되는 사고가 났다.
하필 이럴 때 칼리안과 플란츠가 왕궁을 나갔다.
르메인은 아직 사고 소식을 모르고 앨런은 없다.
상황 정리를 마친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발칸 기사단의 사단장인 라즈와 데미안, 마법사단의 사단장 중 한 명인 페일튼을 보며 지시사항을 전했다.
"기사 스물, 마법사 셋. 스물 세 명씩 둘. 총 마흔 여섯 명 차출하게. 반은 나에랑샤, 나머지 반은 아스트리샤로 보내서 현장 확인해보고. 왕세자 저하랑 왕자님 보이면 곧바로 잡아······ 모셔오라 하게."
"네. 혹시나 싸움이 벌어졌으면 어떻게 할까요."
"왕자님 안 계시는 싸움이면 알아서 진압하고 왕자님 계시는 싸움이면 말리려다 다치지 말고 현장이나 통제하면서 대기하게. 내가 전하께 보고 드리고 나에랑샤 쪽으로 뒤따라 가겠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세 명의 사단장이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별 일 아니라는 듯 태평한 기색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새파란 눈이 문이 닫히자마자 날카롭게 바뀌었다.
'그래도 요즘은 한가해. 브리지트 경이 정보 쪽 일을 나눠가져가서. 덕분에 우리 코코랑 놀아 줄 시간이 생기네.'
'그럼, 협회장님. 지금 정보 수집하는 일은 브리지트 경 혼자 하고 있는 겁니까?'
'뭐야. 칼리안 왕자님한테 얘기 못 들었어?'
'협회장님과 하는 일을 우리 왕자님이 왜 저에게 알려주시겠습니까. 제가 관여해야 하는 일이 아니면 얘기 안 해주십니다.'
'아, 그래. 그러시겠구나. 아무튼 맞아. 카이리스 내부 정보 쪽 업무는 지금 브리지트 경이 혼자 담당하고 있어.'
'혼자 가능한 일입니까?'
'어. 아직 텐실 쪽 정보는 계속 협회에서 맡고 있고 카이리스 안에서는 왕자님께서 특별히 더 알아보라 하신 일도 없어. 그래서 당장은 브리지트 경 혼자 움직여도 괜찮은 것 같더라고. 보니까 요즘 그레이 브리센 뒷조사를 시작했던데 사람 더 필요하면 얘기하라 했어.'
어제 에우리아와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마력탄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력탄은 그리 흔한 물건이 아니다. 살상력은 강하지만 폭음이 심하고 가격은 어마어마하다. 그것을 써서 누군가를 해치고 바로 붙잡히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독을 구하든가 뒷세계의 마법사 한 명을 고용해서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낫다. 때문에 마력탄을 쓰는 이들은 아주 드물었다.
그리고 아르센은 그것이 시끄럽든 말든 효과적인 무기임은 분명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그것이 비싸든 말든 신경 안 써도 될 만큼의 급여를 받으면서 심지어 꽤 위험한 일을 하기 시작한 사람을 딱 한 명 알고 있었다.
"이 시국에 우리 왕자님 사고치시면 안 되는데······."
더불어 그 사람, 에일라가 잘못됐을 때 제대로 돌아버릴 한 분도, 그 분이 지금 얼마나 몸을 사려야 하는 시기인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큰일이군."
아르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클린 마법으로 차림새를 깨끗이 한 뒤 옷 매무새를 대충 정리하며 르메인이 있을 아르피아 궁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 *
칼리안 가라사대.
자고로 향수란 과일 향이 제일이다.
기분 좋아지는 복숭아의 단 향, 상큼한 귤 향, 몽글몽글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코코넛 향, 언제나 싱그러운 라임 향. 그리 좋은 향기들을 다 놔두고 왜들 저러는지.
불어온 바람을 타고 확 풍겨오는 짙은 꽃향기에, 순간적으로 싫은 티를 낼 뻔한 칼리안이 다시 라시드를 쳐다봤다.
"왕자님께서는 궁금한 것을 못 참는 분이라 하셨으나······ 이 또한 신기하게도, 저 역시 호기심이 많습니다. 때문에 신기한 것을 보아 놀란 마음에 다른 기억이 떠오르질 않습니다. 그러니 이렇게나 어두운 밤에 제가 어떻게 새를 만났을지 혹 왕자님께서 저에게 알려주실 수 있다면 그 때에는 저도 기억을 되짚어 보겠습니다."
청포도빛 드레스가 떠오른 것은 놈의 향기 때문일지, 향기로 덮이지 못한 악취 때문일지.
"왕자님의 것을 누가 건드렸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바닥을 향한 칼리안의 손 끝이 긴 곡선을 그렸다.
'뱀이. 또 있네.'
오늘 만난 새 친구에게서 내 옛날 아버지와 내 냄새가 풀풀 풍기는 것을 느낀 칼리안이 흡족한 얼굴을 했다. 세상에 올려진 뱀이 어찌 한 마리 뿐이겠냐만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또 다른 뱀을 만난 것이 실로 신기하고 반가우며 한편으론 역하기 짝이 없어서.
"내가 안다 하면 어찌 아는지를 궁금해 할 테고. 내가 모른다 하면 남작 역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할 텐데······ 그러니 나는 이것을 무어라 답해야 할까."
"고민이 되십니까, 왕자님."
"고민이 됩니다, 남작."
"즐거운 고민이라 여겨주시기는 어렵겠습니까? 이런 밤이 아니라면 또 언제 마주할지 알 수 없을 일이니 말입니다."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칼리안이 살짝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독한 향에 잠시 취한 것처럼 큰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쉰 뒤 눈을 떴다.
"그나저나. 내가 남작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네.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사람입니다. 새가 아니라."
칼리안의 손가락이 다시 한 번 에일라의 비녀를 가리켜 보였다.
"남작이 주워 든 것이 새의 깃털이었다, 그리 여기는 듯 한데. 내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아 해 주는 말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것 참, 제가 큰 착오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리 본 이가 또 있어서. 익숙합니다."
칼리안이 한 발을 더 다가갔다.
그리고 라시드의 손에 들려있던 비녀를 조용히 집어들었다.
"또 있었다. 라고 해야 맞겠습니다만."
"있었습니까."
"있었습니다."
라시드의 얼굴에 악의없는 웃음이 번져나갔다.
똑같은 것이다.
실로 신기하고 반가우며 역한 그 기분이.
손에 들린 비녀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던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됐건 남작의 호기심은 오늘 풀어주기 어렵겠습니다. 아무래도 대답을 찾기 어려워서. 내 궁금증도 잠시 미뤄두어야 할 것 같고."
"아쉬운 일이군요, 왕자님."
"너무 아쉬워하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아쉬움도 그만큼 클 것이라서."
"그래도 언젠가는 서로 답을 주고 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글쎄. 어떠려나."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라시드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어찌됐건 내 사람을 만난 일이 남작의 마음에 들었던 것 같으니. 이것까지는 돌려받지 않겠습니다."
칼리안이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라시드의 왼손에 에일라의 것이었던 비녀를 도로 올린 뒤, 그 손을 잡아 주먹을 쥐어 주었다.
마음에 들어 주운 것일 테니 놓치지 말라는 듯 비녀를 감싸 쥐게 된 손을 꾹 눌러 잡았다. 에일라의 비수에 깊이 패인 상처 안에, 부서져 깨진 구슬이 달린 비녀를 잘 새겨 담을 수 있도록.
"내가 이미 새 것을 사 주기로 하여서, 이미 주인이 없어진 물건이 된 터라."
칼리안의 말에 대한 대답인 것처럼, 뚝, 뚝, 뚝.
라시드의 손 안에서 멈췄던 피가 다시 흘렀다. 그 피에 자신의 손이 같이 젖어드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칼리안이 웃었다.
생긋, 하고.
악의없는 향기 가득한 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자신의 손을 일별한 라시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조금 더 재미있는 놀이를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티 하나 없이 말간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선물로 여기고 감사히······."
"몇 번을 이야기해야 내 말을 이해하겠느냐."
그런데 이렇게.
건물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라시드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소공작님. 이곳에서 수상한 폭발이 있으니 바로 조사를 해달라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브리센 후작의 명이라 하여도 괜찮다. 이미 짐작하고 있으니."
"······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공작님."
"발칸에서 나올 테니, 그들을 직접 만나 인계하겠다 하지 않았느냐. 절차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텐데 어째서 굳이 이 사람을 체포하겠다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구나."
서로에게 너무 집중하여 알아채지 못한 사이, 소란이 생겼다.
에일라가 이곳에 온 것은 그레이를 뒤쫓기 위함이 아니던가. 이곳에서 폭발이 있었음을 그레이도 확인했을 터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잠시만 서 있어도 다 알 수 있을만큼 웅성거림이 있었을 테니 지금 아래 쓰러져 있는 이가 누구의 사람인지, 누가 그를 구해냈고 어디로 올라갔는지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일에 누구의 아들이 엮여있을지도.
이 자리에서 칼리안이 라시드를 죽이지 않은 채 물러나게 할 방법이야 간단하지 않나. 에일라를 체포할 사람을 보내 더 큰 소란을 일게 하면 될 일이니.
그래서 그레이가 수도 경비대를 불러냈다.
그 일이 칼리안과 라시드의 대화를 조금 방해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으리라는 사실을 모를 테니까.
에일라의 앞을 막고 선 드미레아와 에일라를 체포하겠다는 이들의 대치를 확인한 칼리안이 라시드를 바라봤다. 진심이 반, 비웃음이 반 담긴 말이 라시드를 향했다.
"후작이 그대를 아낀다 여겼는데. 내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나 봅니다."
그 아낌이 과연 애정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뒷말을 빼고 건네진 말에 라시드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후작께서 제 걱정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아쉽지만 아무래도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왕자님."
"그리 해야 할 것 같군요."
"그리고 왕자님께서 건네주신 선물은 잊지 않고 잘 간직하겠습니다. 다음에 뵐 때까지."
"알겠습니다."
어차피 서로 물러나려 했던 자리.
그레이 덕에 한 두마디 나눌 시간이 줄어들었을 뿐이니 사실 아쉬울 일은 없었다.
때문에 라시드는 다른 미련 없다는 얼굴로 깊숙이 허리를 숙여 예를 보였다. 마찬가지인 칼리안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는 마력을 움직여 주변에 낭자한 피를 모두 지워냈다. 라시드의 손에서 흘러내린 것만 남겨 둔 채로.
그렇게 주변을 정리한 칼리안이 건물 뒷편을 이용해 내려가고자 몸을 돌렸다.
'······ 아.'
그리고 보게 되었다.
저 멀리에서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기사와 마법사의 무리를. 갑작스런 군대의 모습에 사람들이 놀라지 않도록 밝게 비춰 올린 마법등불 아래, 그들의 가장 앞에서 말을 몰아오는 한 사람. 아무튼 동생 말은 더럽게 안 들어처먹는 사람의 얼굴을.
플란츠를 보게 되었다.
같은 것을 발견한 녹빛 눈이 천천히 움직인다.
멀리 다가오고 있는 제 사촌 형제를 바라봤다.
"아. 이렇게 뵙게 될 줄이야······."
꽉 틀어쥔 손아귀에서 퍼져 나오던 아픔도 잊은 듯.
"실로 대단한 우연이 아닙니까!"
작은 감탄이 어려있는 즐거운 목소리가 칼리안의 귀에 들려왔다. 지독한 꽃향기로 채워진 향수 냄새가 함께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