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71화 (372/527)

제66장. 내 건데(3)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니까.

생각이 틀렸을 수 있으니까.

떨어진 물건 하나, 지나가던 작은 아이의 손 끝 하나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달리는 레이븐의 위에 앉은 채 이성의 끄트머리를 다잡았다.

"칼리안, 칼리안."

내가 누구인지.

그러니 이 곳은 어디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하나도 잊지 않으려고. 다 까먹고 날뛰지 않으려고. 전부 다 망쳐버리지 않으려고.

함부로 죽여버리지 않으려고.

- 다그닥, 다그닥!

말의 편자가 바닥을 쳐내는 소리가 골목을, 왕도를, 다시 골목을 가득 메웠다. 칼리안의 발이 레이븐의 단단한 몸을 박찼다. 어련히 알아서 달리고 있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

"······ 칼리안."

가느다란 목소리가 흔들리듯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간신히 스스로 붙들어 맨 이성이 손을 움직였다. 격하게 달려가는 거대한 말의 위에서 안장에 매어 둔 가방 속을 뒤졌다. 거대한 검은 로브를 움켜잡았다.

누가 보아도 칼리안의 말이겠지만, 누가 보아도 칼리안의 움직임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만 드러나지 않는다면 감추고 부인할 여지가 있을 테니까.

만에 하나, 사람들의 앞에서 살인을 하더라도.

레이븐의 몸이 어둠 속에 들어섰다. 그 틈을 타 검은 로브를 뒤집어썼다. 얼굴을 가렸다.

'나에랑샤.'

잠시 뒤 팻말이 보였다.

세크리티아 왕궁의 첨탑보다 더 멀리 있는 것 같던 곳에 드디어 다다랐다. 아스트리샤와 달리 가까운 곳에서 폭음이 생긴 탓에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들이 보인다. 다만 몸을 피해야 할 만큼의 큰 싸움이 나지는 않았는지 아무도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폭음의 진원지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븐은 속도를 낮추지 않았다.

거리 가득한 인파의 사이를 파고들면서, 때로는 장애물을 피하고 때로는 뛰어넘어가며 칼리안이 가야 할 곳까지 착실히 나아갔다. 어느새 레이븐을 알아 본 이들이 비켜섰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말에 놀란 이들이 걸음을 물렸다. 억지로 만들어진 작은 길 위로 레이븐이 계속 달렸다.

웅성거리는 소란이 가득한 곳에 다다랐다. 저 멀리 낡은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진작부터 뻗어나오던 익숙한 살기에 칼리안의 시선이 고정됐다. 검은 인영 둘이 서로 맞붙어 검을 겨루는 모습이 언뜻 언뜻 보인다.

에일라가 위험에 처했으리라는 생각이 맞았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에일라가 살아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칼리안은 로브를 벗지 않았다. 검은 천 안에 붉은 눈을 감춘 채로 건물의 옥상을 주시했다.

- 다각, 다각······!

달리던 속도가 현저히 줄어든다.

아직 에일라가 있는 곳과 상당히 떨어져 있었으나 몰려든 인파에 밀려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다. 때문에 레이븐의 위에서 내려 직접 달려가고자 마음을 먹었을 그 때.

"어, 어!"

숨을 들이켜듯 놀란 음성이 주변에서 일제히 터져나왔다. 칼리안의 고개가 위를 향했다.

푸른 물결이 난간 밖으로 기운다. 중심을 잃는다. 떨어지기 시작한다. 짙고 짙은 피 냄새가 온 몸을 짓눌렀다. 세레누스의 독한 향이 심장 곁을 맴도는 기분이 든다.

- 타앗!

어느새 떠오른 칼리안의 발이 레이븐의 안장을 박찼다.

떨어진다. 높았다. 칼리안으로부터 멀었다. 떨어진다. 떨어지면, 충격을 줄일 곳은? 없다. 없었다. 떨어지면 죽는다. 다시 죽는다. 잃어버린다. 또, 늦게 되어버린다.

안돼.

새카만 그림자가 쏘아지듯 움직였다.

에일라의 피 냄새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다쳤다.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도 모르지만 피가 흐른다. 떨어지는 것을 받아낸다 하여도 자칫 몸이 흔들리면 상처가 벌어질지 모른다. 뼈가 부러질 지도 모른다.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

- 펄······ 럭!

붉은 눈을 가리던 마지막 도피처를 벗어냈다. 바닥을 다시 박차고 벽을 디디며 날듯이 계속 움직였다. 떨어져내리는 파도에서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날지 못하는 푸른 솔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에일라에게 손이 닿았다.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로브를 펼쳐 에일라의 몸을 감쌌다.

바닥을 굴러도 몸이 휘둘리지 않도록, 작은 모래 하나조차 상처에 닿지 않도록.

에일라.

감쌌다.

끌어안았다. 온 몸의 오러를 뻗어 품에 든 작은 것을 휘감았다.

- 쿠웅!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몇 바퀴를 굴렀는지 모른다. 하늘과 바닥이 계속 바뀌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무엇이 쌓인 곳의 위를 굴렀는지도 모른다. 에일라의 등을 감싸안은 채로, 머리를 끌어안은 채로 굴렀다.

그 움직임이 비로소 멈췄을 때, 작디 작은 숨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칼리안의 입에서도 숨이 터져 나왔다.

"아······ 잡았다."

팔이 떨렸다.

부서진 나무 판자에 찢겨서였을지, 세레누스의 향에 취해서였을지, 신경쓰지 않았다.

"에일라."

······ 다행이다.

검은 도피처에 든 푸른 새를 다시 한 번 감싸안았다. 놓으면 놓칠까봐 겁이 나서.

"나 숨 막혀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안 죽었어요."

"······ 응."

"많이 다치긴 했어요. 엄청 아프고요."

"응."

"비녀 망가졌어요. 새로 사 주세요."

"응."

"또 망가지면 또 사 주세요."

"응······."

"금방 나을 테니까."

"응."

"라시드 브리센. 죽여주세요."

"그래."

* * *

사람은 강해질 수 있는 생물이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든.

그래서 강해졌다.

소금 안 넣은 삶은 닭고기로 끼니를 때워가면서, 그렇게나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들은 전부 다 남들에게 건네가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떠올리다 집어치워가며 정말 힘들게 강해졌다.

"샌드위치 소스 이거 말고 다른 걸로 줘. 원래 먹던 거."

그럼 뭐 하나.

"그거 새로 개발한 거야. 인기 좋아."

"맛 없어."

"그렇게 따로따로 먹지 말고 한 입에······."

"야."

"아니야. 지금 바로 다시 해 줄게."

아무리 강해져봐야 소용이 없는데.

본능적으로 밀려오는 두려움을 힘겹게 쫓아낸 카페 주인이 마치 레이븐의 뒷다리같은 팔뚝을 섬세하게 놀려가며 베이컨을 구워냈다. 정교하게 만들어 낸 다부진 근육이 호밀빵 하나를 번쩍 들어 반으로 갈라내고, 건장한 기사의 손목 쯤은 쉬이 우그러뜨릴 듯한 손의 자비없는 움직임에 커다란 토마토 하나가 그대로 썰려나갔다.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미세한 힘 조절로 빵 위에 고르게 뿌려진 소스. 그 위에 베이컨과 토마토, 그리고 새하얀 치즈가 얹어졌다.

- 달칵.

하나의 예술작품이라 해도 좋을 완벽한 샌드위치를 보기 좋게 잘라 접시에 옮겨 담아 온 사내가 그것을 테이블 위에 조신하게 내려놨다.

밤샘 근무를 마치고 오전에 돌아와 가게 한 켠에 만들어진 작은 방에 들어가더니 천지가 뒤바뀌어도 모를 만큼 자빠져, 아니. 단잠을 자고 이제야 밥 처먹으러 기어 나온, 아니. 밥 먹으러 나온,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

발칸의 사단장 니들렌 제이아가 앉아있는 테이블 말이다.

"밖이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잖아. 오늘 축제라도 있어?"

길고 긴 하품을 마친 니들렌이 차가운 우유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뒤 물었다. 그러자 온순한 얼굴로 마주앉아 있던 사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닌데 소란할 만하기는 했어. 조금 전에 우리 가게에 지그프리드 소공작께서 오셨다 가셨거든."

"뭐? 소공작께서 여긴 왜?"

"아이스크림 사가셨는데. 딸기 아이스크림."

이 카페에서 샌드위치 만큼이나 유명한, 생딸기가 가득 얹어진 맛 좋은 아이스크림을 떠올린 니들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소공작께서는 그런 거 안 좋아하실 것 같았는데. 의외네."

"발칸 치유사님한테 건네주시는 것 같던데."

샌드위치를 집어들던 니들렌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다시 움직였다.

"두 분이 아스트리샤에는 왜 오셨지? 전하 탄신일 축제 의상이라도 맞추러 오셨나?"

"그런 것 같아. 3왕자님 의상 담당한다는 사람 의상점이 근처에 있잖아."

"응. 들은 적 있어."

"그래서 3왕자님께서 직접 소개시켜 주시는 것처럼 보였어."

그렇게나 좋아하는 샌드위치에서 큼지막한 토마토 한 조각이 툭 떨궈졌다.

"칼리안 왕자님께서 여길 오셨다고?"

"응. 왕세자 저하 호위해주실 겸 함께 오셨나 보던데."

질문을 할 수록 중요한 얘기가 나오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대체 뭐지. 착각인가.

"플란츠 저하께서도 오셨었다는 말이지, 지금."

"저기 밖에 계시잖아. 안 보여?"

아.

내 동생이 근육 키우다 머릿속에 소금 안 넣은 닭가슴살을 가득 채웠나보다. 우리 부군단장님은 꽃같은 동생 두셨는데 나는 닭가슴살같은 동생이 있네.

세상 참 불공평하지.

"······ 스칼렛."

"스칼."

"스칼렛."

"이름 좀 제발, 누나."

할 말을 잊고 동생의 이름을 부르짖던 니들렌이 튀어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샌드위치도 내버려 둔 채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덕분에 보게 되었다.

분수 앞에 서 있는 왕세자와 치유사의, 정답게 꼭 붙든 손을.

그래서 알게 되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쌍둥이 동생 스칼렛이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음을. 이 시점에 니들렌이 눈치없이 밖에 나와선 안 됐던 것임을.

* * *

폭음이 일고 싸움이 있었다.

한 명이 떨어졌고 누군가 날아들어 받아냈다.

품 속에 두었던, 검은 천에 감싸인 사람을 살피는 듯 보이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한 눈에 보기에도 값진 것이 분명할 자줏빛의 긴 재킷. 그 옷의 소매가 길게 찢어져 있었다. 소매 아래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온 몸을 뒤덮은 흙먼지, 찢어진 소매, 굵은 핏방울.

사람들의 눈은 그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남자가 검은 천 속의 사람을 가볍게 들어 벽에 기대 앉도록 돕는 것도, 찢어진 재킷과 불편한 베스트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는 것도, 흐트러진 옷과 검은 로브에 묻어있던 뽀얀 먼지가 일순간에 사라진 것도 분명 보았으나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내려앉은 밤보다 어두운 머리카락. 밤을 밝힐 불꽃보다 더 붉은 눈. 그것을 보게 된 탓에.

"방금······."

방금 날아온 게 왕자님이 맞느냐고. 나도 누울 일 없는 흙바닥을 뒹군 사람이 왕자님이 맞느냐고. 조금 전 떨어진 사람을 구한 분이 왕자님이 맞느냐고.

길 가다 우연히 위험에 빠진 사람을 보고 구해냈다 하기에는 서로 이미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지금 설마 누가,"

그러니까 지금 설마 누군가가 왕자님의 사람을 옥상 아래로 떨어뜨려 죽이려 한 거냐고.

- 찌이익.

- 사락, 사락.

그런 웅성거림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의 이목은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듯 건물 벽에 에일라를 기대 앉힌 칼리안이 검은 로브 자락을 한웅큼 찢어내고는, 제 손에 둘둘 감겨있던 새하얀 붕대까지 풀어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마력을 운용해 이미 깨끗했던 로브 조각과 붕대에 대고 클린 마법을 거듭 썼다.

비슷한 일을 했던 적이 있음을 떠올린 입이 작은 호선을 그렸다.

"그래도 비싼 옷인데 자주 찢어먹네. 게다가 재활용하려고 감고 나온 붕대도 아니었는데."

"사람 죽여달란 말에 그러겠다 하시더니. 죽일 생각은 않고 살려만 주고 계시네요."

"언제 죽여준다고 안 했어. 지금 못 죽여. 보는 눈 많아서."

"그럼 따라가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 상처는 내가 봐도 되는데."

"아직 안 도망갔어. 위에서 구경하는 것 같고."

"대담하네."

"못 죽일 걸 아나 보지. 아니면 나한테 인사라도 하고 싶든가."

가만히 대답한 칼리안이 에일라를 쳐다봤다. 둥글게 뭉쳐낸 로브 조각을 손에 꽉 움켜쥔 채였다.

"참아. 피 많이 나."

"알았어요."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은 천 뭉치가 옆구리의 상처 속을 우악스레 밀고 들어왔다.

둔감해지던 통증이 다시 살아나는 감각에,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 상처를 지혈해주던 왕자를 걷어찰 뻔한 에일라가 이를 악물었다. 뭉툭한 것이 상처를 헤집고 들어와 출혈 부위를 강제로 틀어막는 통증을 참아냈다.

울컥울컥 새어나오는 피를 막은 칼리안이 에일라의 얼굴을 슬쩍 쳐다봤다. 그러나 오래 마주하지 못하고 다시 상처로 눈을 돌렸다. 깊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입술 틈으로 새어나왔다.

"여전히 지독하네."

"참으랬잖아, 요."

"진짜 참을 줄 몰랐지. 안 죽긴 하겠네. 독해서."

"남의 상처에 천 조각 집어넣는 왕자님보다는,"

"눈 감지 마. 에일라."

말대꾸를 끊고 나온 소리에 에일라가 입을 다물었다. 다른 말을 더 잇지 않은 채 허리 위에 몇 번이고 붕대를 두른 뒤 매듭을 진 칼리안이 에일라를 쳐다봤다.

"떨어지면,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눈 감지 마. 뭐라도 붙들어 잡을 생각을 해. 너 떨어뜨린 새끼 멱살이라도 잡고 버텨."

"감고 싶어서 감았나. 무서우니까 나도 모르게 감았지."

"죽지 마."

한동안 칼리안을 쳐다보던 에일라가 입술을 달싹였다.

"······ 내가 먼저 죽었었나보네. 왕자님보다."

칼리안의 대답은 없었다.

"안 감을게요, 다음에는."

대신 에일라가 대답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다각.

떠나지도 못하고 다가서지도 못한 채 칼리안을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로 레이븐이 걸어나왔다. 늦지 않게 이곳까지 잘 데려다 준 기특한 레이븐을 몇 번 쓰다듬어 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오지 말라고는 했는데 아마 소공작이 곧 올 거야. 내 형님이 보내든 직접 오든. 그 때까지만 잠깐 있어."

"인사 받고 오시려고요?"

"아니."

칼리안이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비녀가 망가져 길게 흘러내린 에일라의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망가뜨린 값을 받아야지. 내 건데."

에일라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이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자신의 팔이, 에일라를 감싸고 구르느라 생긴 상처가 보인다. 그것을 잠시 쳐다봤다. 어느새 피가 멎은 긴 상처보다 찢어진 셔츠 소매가 더 눈에 거슬린 탓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린 칼리안이 손을 움직였다.

툭.

커프스와 단추를 풀어내고 소매를 걷었다.

툭, 툭.

소매를 접은 탓에 생긴 주름을 펴냈다. 그것을 보던 에일라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받을 거면 비싸게 받아 오세요. 마음에 들었던 거라서."

"마음에 들었던 만큼 다 받아내려면 오래 걸릴 텐데."

"상관없잖아요."

"하긴, 그런가."

툭, 툭, 툭.

살짝 웃은 칼리안이 검은 구두 끝으로 바닥을 몇 번 찼다.

"다녀올게."

그리고 어느 순간, 힘을 주어 발을 박찼다.

- 타앗!

바닥에서 멀어진 발 끝이 레이븐의 안장을 디디며 높이 떠오른다. 부서진 천막의 얇은 기둥을 스치듯 밟으며 한 번을 더 도약한다. 창틀의 모서리를 건드리며 다시 한 번, 빨래줄을 감기 위해 튀어나온 작은 고리를 밟으며 또 한 번.

날렵한 고양이의 그림자라도 된 것처럼, 검은 잔상을 남기듯 옥상으로 몸을 날렸다.

- 스륵······.

몇 번의 발디딤으로 6층 높이의 건물 옥상에 소리없이 내려앉은 칼리안이 앞을 쳐다봤다.

"오셨습니까. 기다림이 길어 제가 먼저 자리를 떠날 뻔 했습니다."

그레이를 빼다 박은 듯한 수려한 얼굴, 짙은 갈색 머리, 선명한 녹빛 눈. 칼리안이 올라오기를 오래도록 기다려 준 인내심 많은 청년이 반갑다는 듯 인사를 건네왔다.

아, 또 풀 색이다.

내가 진짜 지겨워 죽겠다.

새 친구에 대한 첫 감상을 마친 칼리안의 입술 위에 고운 미소가 만들어졌다.

"다행입니다. 돌아갔다면 내가 많이 서운했을 텐데."

"네. 안 그래도 서운해하실 것 같아서 발을 멈추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순수한 웃음을 지어 보인 청년이 손을 모았다. 그리고는 매우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깊이 숙여보이며 예를 올렸다.

"3왕자님께 인사 올립니다. 브리센 후작의 아들, 남작 라시드 브리센입니다. 만나뵙게 되어 실로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기꺼이 예를 받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칼리안입니다."

청년, 라시드가 흥미로운 답을 들었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 표정을 잠시 살피던 칼리안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냈다.

"만나자마자 이런 질문을 하기엔 조금 이른 사이인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내가 궁금한 것을 못 참는 사람이라. 괜찮다면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얼마든지 질문하십시오, 왕자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걷어올린 까만 소매 아래.

새하얀 팔이 들어올려졌다.

가는 손목 끝에 이어진 흰 손이 움직여 긴 손가락 하나를 펼쳐냈다. 라시드의 손에 들려있던 작은 비녀를 향해서였다.

"누가 내 것을······ 건드렸던데. 혹시 아는지."

라시드가 고개를 들며 긴 미소를 지었다.

썩 비슷한 모습의 웃음이 칼리안의 얼굴에도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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