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69)

동료의 핀잔에 백동준은 슬쩍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경비를 서고있던 비변사의 정문으로 들어간 일행들.

선두에는 김좌근이 있었고 뒤에는 병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등 조정에서는 대신급에 속하는 관료들이 똥씹은 표정을 하였던 것이다.

얼마전만해도 김좌근 패거리가 비변사로 들어갈때에는 항상 위세가 당당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두명다 이유를 알고있지만 함부로 발설할수는 없었다.

비변사 내부의 회의실로 들어온 김좌근이 상석에 앉았다.

그의 미간이 꿈틀하면서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다.

“개같은 애송이 놈이 상국의 사신을향해 그따위 망발을 해대? 거기다 영은문까지 부셔버려?”

“어찌하여 이런 변고가 생겼단 말입니까?”

“병조판서는 도대체 뭘하고 있었단 말이요?”

“저... 그게.”

김좌근의 질책에 병조판서 이규동이 머뭇거렸다.

“군권을 쥔 소관도 모르게 강화도 촌놈이 그런짓을 벌였을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병권의 관리를 어떻게 하였기에 두눈 멀쩡히뜨고 당했다는 것이요? 그게아니면 병조판서가 일부러 눈감아 주었던건 아닙니까?”

“이판대감.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병조참지인 박규수가 몰래 수작을부린 것입니다.”

문책을당한 병조판서가 변명을 시작했다.

그것을보며 김좌근이 고개를 저었다.

병권을 통제하기위해 이규동을 병조판서의 자리에 넣은것이다.

그런데 제 역활을 못했던 것이다.

“이번 사태가 끝나면 박규수 그놈을 반드시 처리해야 할것이요.”

“그뿐만이 아니요. 이하응도 마찬가지 입니다. 영의정인 정원용과함께 음험한 짓거리를 해대고 있소이다.”

“강화도 놈이 끌어들인 세력들이 한두명이 아닙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자 한마디씩 뱉어냈다.

그리고 김좌근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놈이 어떻게 우리들도 모르게 그런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지 납득이 안됩니다. 그놈이 진정 호랑이 새끼였다는 것입니까?”

“호랑이 새끼건 늑대 새끼건 지금은 중요한게 아니요. 이미 사건은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청나라 사신이 뭐라고 하였소? 조선군들이 매복과 습격을통해 지르칼손의 팔기와 기병부대를 전멸시켰다고 했잖소? 그것도 무려 2000명이 넘어가는 숫자의 기병들이요. 팔기들 모두가 만주족이고 기병대를 지휘했던 지르칼손은 변방으로 밀려나긴 했지만 연경(북경)에서 이름난 만주귀족의 출신이요.”

“.....”

김좌근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호조판서가 넌지시 말했다.

“그런데 조선군이 매복과 기습을 했다지만 청의 팔기와 기병부대를 전멸시켰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강화도 놈이 사실이라고 대답했지 않습니까? 그것도 상국의 사신을 앞에두고 말이요.”

그때의 표정은 잊을수 없었다.

이원범은 청국의 사신이 지르칼손 기병부대의 습격에대해 추궁하자 예상한듯이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지르칼손 부대를 전멸시킨건 조선군이다.

그것을 명령한 것은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김좌근 패거리가 받았던 충격이란 엄청났고, 여기있는 무리들은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였다.

“감히 조선왕이 겁도없이 황제가보낸 사신을향해 이토록 망언과 무례를 범했으니 앞으로 어떤일이 벌어질지는 불보듯 뻔한것이 아니겠소?”

“청에서는 사신을통해 조선왕이 직접 연경(북경)으로 와서 청제국 황제에게 사죄하고 은 5000만냥의 배상금을 지불할것과 5000명의 공녀들. 그외에도 몇가지 요구를했소. 그런데도 이원범 그놈은 사신앞에서 보란듯이 거절하며 욕까지 보였단 말이요.”

“청국에서 군사를보내 조선을 쳐들어올거 같소이까?”

“그놈이 죽고싶어서 환장했는데 당연한거 아니겠소?”

“이를 어쩌면 좋다는 것이요?”

표정은 두려움과 공포로 바뀌었다.

청나라의 대군이 쳐들어온다.

막강한 팔기군이 조선을향해 진격해오는 것이다.

그들이 한양에 도착하면 어떤일이 벌어지겠는가?

지금까지 편안하게 지내왔던 자신들은 하루아침에 목이 잘릴것이다.

절망에빠진 그들을보며 김좌근이 소리쳤다.

“이대로 포기할수는 없소!”

“무슨 뜻입니까? 대감! 조선은 상국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후에는 한양이 불타는것만 남았는데.”

“청국의 심기를 건드리고 사신을 막대한것은 우리가 아니요. 어디까지나 강화도 촌놈이 벌인 짓일 뿐이요. 그런데 우리들이 왜 그놈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요?”

“대감의 말을 듣고보니 괘씸한 놈은 이원범 녀석이요.”

“맞소! 그놈이 왕이되고 난뒤에 이런 불행이 생긴것이요.”

이원범을 임금으로 만드는데 앞장섰던 김좌근과 패거리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허수아비를 왕으로 세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자신들 목에 밧줄을 걸어버렸으니 말이다.

분개하던 그들이 김좌근에게 말했다.

“이대로 당하실 겁니까? 아니면 이판께서는 묘책이 있다는 뜻입니까?”

그러자 김좌근의 입가에 냉소가 올라왔다.

잠시후 하인을불러 준비해온 것들을 탁자위에 놓았다.

터억! 수백장에 이르는 편지와 서찰이였고 그양도 상당할 정도였다.

왕이 되고 싶은 놈, 그러나...

“이것은 무엇입니까?”

형조판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하였다.

그러자 김좌근의 표정이 당당하게 바뀌었고 설명을 시작했다.

“강화도 촌놈이 청의 사신들을 모독하고 영은문까지 부셔버렸는데 한양내 양반과 유생들이 가만히 있을거 같소? 한양과 경기도만이 아니라 전국팔도의 사대부들이 이번 일에대해 분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양에있는 주학서원, 그리고 해당 서원의 훈장이 보내온 연판장이요. 읽어들 보시요. 그외에 다른 서원들에서 온 연판장이 수백장 입니다.”

“이 모든것들을 이판대감께 보냈다는 것입니까?”

그들이 놀라며 서원들에서 보낸 연판장과 호소문들을 읽어나갔다.

연판장은 수백장에 이를정도로 많았다.

때문에 측근들은 먼저 유명서원들의 책임자인 훈장들이 보낸 서찰과 호소문부터 확인을 시작했다.

읽어가던 그들의 표정이 밝아졌고 몇명은 입이 귀에까지 찢어진다.

그럴것이 서찰과 호소문에 적힌 내용들이 바로 그들이 원하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거야말로 우리들이 찾던 것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거기다 한양내 유생들이 강화도 촌놈을 광해라고 부르고 있군요.”

“확실히 광해처럼 미친놈인건 사실인거 같소.”

“이미 양반과 유생들, 그리고 사대부들이 지금의 이원범을 적대하고 있으니 상황이 유리한것은 분명하군요.”

저마다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한양내 양반들과 유생들의 뜻이라면 지금 창덕궁에있는 그놈은 왕의 자격을 잃은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내말이 그말이요. 그리고 우리들에게 시급한것은 그놈에게 모욕당한 상국의 사신들을 달래는것이 급선무요. 따라서 그들에게 한가지 제안을 할 생각이요.”

“어떤 것입니까?”

“처음에는 농사나짓던 촌놈이라고 생각해 놈을 왕으로 세웠소. 하지만 이것이 나의 큰 착각이고 실수였소. 이번만해도 그렇고 앞으로 계속해 녀석은 우리에게 방해가될 존재요. 따라서 이번기회에 제거하거나 퇴위를 시켜야 합니다. 이미 본관에게 수백장의 연판장과 서찰을보낸 양반과 유생들이 그것을 바라는 중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상국의 사신들에게 이것을 제안한다면 그들도 충분히 납득할 것이요.”

“좋은 생각입니다.”

“이원범 그놈을 사로잡아 상국에 보내버리면 대청의 황제도 조선을향해 정벌군을 파견하지는 않을겁니다.”

“대청제국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야지요.”

김좌근의 제안에 모두가 동의하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몇명은 자신들의 목과 뒷덜미를 쓰다듬으며 한숨까지 내쉰다.

그럴즈음 병조판서가 다른 부분을 꺼내었다.

“대감의 묘책에 찬성입니다. 그런데 이원범 그놈을 청에 보내버리면 조선에서는 새로운 임금을 옹립해야 하지않겠소? 그렇다고 흥선군 이하응을 내세울수도 없소. 그놈은 우리에게 이를 갈고있는 상태고... 잘못해서 이원범같은 놈이 또 나온다면 조선은 전멸당할 뿐입니다.”

“병조판서의 말이 옳소! 이미 한번 크게 당했는데...”

나머지 사람들이 대답했고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움직였다.

그것을느낀 김좌근이 헛기침을 해대며 말했다.

“경들은 설마 본관을 임금으로 추대하고 싶다는 뜻이요? 그건 아니될 말이요.”

“안될것이 무엇입니까? 왕손의 대는 대부분 끊겨져 버렸습니다. 이판대감께서는 대왕대비(순원왕후)의 남동생이지 않소이까? 엄밀히 따진다면 이판대감도 왕가에 속하고 종친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이런 난세와 위기에는 뛰어난 능력을가진 대감같은 인재가 조선을 이끌어야 합니다.”

“지금 조선에서 이판대감외에 누가 조선을 구할수있다는 것입니까?”

“허허! 경들의 말씀은 고맙지만 너무 과찮이요.”

손을내젓는 김좌근.

그러나 표정은 웃고 있었다.

임금자리에대한 욕심이 머리속에 가득했던 김좌근이다.

왕후장상의 피가 따로있는가?

지금 조선에서 권력실세는 자신이다.

그뿐인가?

조선에는 수많은 양반 사대부들과 관료들이 안동김씨의 수장인 자신에게 줄을대려고 노력중이다.

의정부와 6조에서 핵심적인 자리의 대신들은 모두 자신의 측근들이다.

동시에 한양백성들 사이에서 창덕궁의 숨겨진 주인은 김좌근과 안동김씨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좌근은 짐짓 헛기침을하며 대답했다.

“경들이 본관을 임금으로 추대하는건 엄청난 역모죄 입니다.”

“역모죄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강화도 촌놈을 제거하는건 역모가 아니라 조선을 구하는 길입니다. 구국의 결단이란 말입니다. 과거 미친 놈인 광해를 내쫓고 조선을 구했던 선대들처럼 이판대감께서 결단을 내려야하는 것입니다.”

“맞소이다!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이원범 그놈을 왕에서 끌어내리고 상국인 청나라에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야 조선이 살아날 희망이 생기는 것이요.”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는 움직임을 확인하며 김좌근이 음성을 가다듬었다.

“커험. 경들이 그렇게 원하는 것이라면 나 김좌근, 여러분들과 조선을위해 기꺼이 투신하겠소.”

“대단한 결정을 하셨소이다.”

“이제야 암울했던 조선의 운명에 서광이 비치는거 같습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아부성 발언.

김좌근의 머리속에서는 온갖 상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내일 당장이라도 익선관(翼善冠)을쓰고 곤용포(袞龍袍)를입은채 옥좌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 * *

초승달이 떠있는 밤하늘.

이따금씩 풀벌레 소리만이 주위에서 흘러나올 뿐이였다.

정적이 감도는 어둠이지만, 그곳에는 매서운 눈빛으로 감시를 진행중인 사내들이 있었다.

그들이 감시하는 목표는 영은각이다.

영은각 주변으로는 장창이나 휘어진 곡도를든 팔기병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저놈들 오래도 버티고 있네. 벌써 며칠째지?”

“오늘까지 계산하면 거의 한달인데.”

“저놈들 조선에 금덩이라도 묻어두었나? 왜 자기들 본국으로 안돌아가고 지랄이야?”

“사실은 가고 싶어도 못가는게 아닐까? 기세좋게 조선으로 왔다가 우리한테 걸려서 빡세게 구르고, 그뒤에는 전하에게 온갖 굴욕을 당하며 쳐맞았으니까.”

“하긴. 저기있던 영은문이 박살나던 꼴을 볼때에는 통쾌했지.”

“아무튼 지금까지 조선을 속국으로 대하며 행동했는데, 이번에는 망신만 당했으니 저기있는 뒈놈 사신들도 그냥 돌아가면 어떻게될지 모르지.”

“흠. 듣고보니 정답일세.”

동료의 말에 안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속에서 영은각을 감시중인 5명의 인원들은 간도정찰대 소속의 대원들이다.

대장인 박민준은 청나라의 사신단들을 신의주 나루터에서부터 한양까지 빡세게 굴리면서 데려왔다.

그리고 영은각에 도착한 뒤에는 신의주에서 빼앗았던 무기들을 팔기들에게 나눠주고 철수했던 것이다.

사신단의 양무와 등비, 그리고 팔기들은 간도정찰대가 떠나버리자 살았다는 기분이였다.

하지만 이것이 큰 함정이였다.

박민준은 노련했고 철종의 지시에따라 영은각에서 좀 떨어진 곳에 은밀하게 숙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대원들을 교대로 투입해 밤낮으로 감시활동을 진행했던 것이다.

이런줄도 모르고 영은각에있던 팔기들은 완전히 방심했다.

일부는 야간경비를 서다가 꾸벅거리며 졸기도 했다.

허접한 팔기들의 모습에 냉소를 보내고 있을즈음 감시조중에 누군가가 신호를 보내었다.

“저곳에 뭔가 나타났습니다.”

“야심한 밤중에 영은각을향해 접근하는 놈들이라니? 수상한데.”

조장인 임상우가 미간을 꿈틀했다.

얼마후 그는 이것들을 정찰대장인 박민준에게 보고했다.

“영은각이 있는곳은 도성의 중심에서도 떨어진 외곽이다. 따라서 일반백성이 저곳을 찾아갈 일은 없다. 예조의 관원들이 영은각에 식량등을 보급해주러 가기도 하지만 그것도 주로 낮에 진행된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야간에 영은각을 감시할때에, 저곳을향해 접근하는 조선인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역시 전하께서 예상했던 상황이 벌어지는거 같군. 즉시 감시조를 추가로 투입하고 접근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파악한다.”

“알겠습니다.”

박민준이 능숙하게 지휘를 하였다.

영은각이 있는 곳으로 횃불을 밝히며 나아가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확인되었다.

행렬의 중간쯤에서 가마에탄 인물도 보였다.

그외에도 관복을입은 사내들은 말을 타고있거나 호위병들도 좌우로 늘어선 상태였다.

누가봐도 상당한 지위나 권력을가진 사람이 움직인다는건 뻔했다.

얼마후, 부하들과함께 어둠을 이용해 근처까지 접근한 박민준은 가마에 탄 중년사내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정찰대장인 박민준은 임금이 간도정찰대에 비밀임무를 주었는지 알게되었다.

처음에는 영은각을 감시하라는 지시에 의문을 품었지만 그래도 박민준은 한달가까이 진행을 하였다.

그리고 이제 엄청난 대어가 걸려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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