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69)

엄세번이 냉소를 지었다.

명나라가 청에게 멸망당하고 수백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 중국의 지배자는 만주족이다.

그럼에도 명나라의 재건을위해, 지배자인 만주족에게 반항하는 멍청한 한족들이 있었던 것이다.

만주족에게 반항하는 세력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운명은 뻔했다.

만주족의 팔기군과 정예병들에의해 온몸이 찢기고 가족들마저 목이잘려서 장대에 세워졌다.

이것이 만주족에게 반항하던 한족들의 운명이다.

자신은 그런 멍청이가 되지 않을것이라고 다짐했다.

만주족에게 아부하고 관직을 높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요동사령관이라는 엄청난 직위에 올랐다.

휘하에는 수만, 아니 십만에 이르는 막대한 군대가 있었다.

그때문에 요동지역에서는 그에게 굽실거리는 만주족들도 나올 정도다.

모든것이 순조롭게 되고있는데 이 불안함은 뭘까?

그것은 조금전 꾼 악몽때문인거 같았다.

꿈의내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상당히 불길했고 그때문에 온몸으로 식은땀이 흘러갔다.

고개를 세차게 흔든뒤에 일어났다.

‘어차피 사소한 것에 일일이 신경쓸 필요는 없지.’

엄세번이 냉소를 지었다.

자신은 요동의 군벌이자 군주다.

한족들은 그의 앞에서 고개조차 들지못한다.

그에게 아부하는 요동의 만주족들이 매일같이 선물을들고 찾아올 정도였다.

이윽고 엄세번의 시녀의 도움을받아 옷을입었다.

그리고 침실로 측근인 한탁주가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나리. 연경(북경)에서 귀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이라, 누구인가?”

“병부중관인데, 천기대신 주광비의 서찰을 갖고 왔습니다.”

“그것이 정말인가?”

엄세번이 놀라고 있었다.

요동군부가 있는 심양이 청제국의 수도인 북경에서 꽤 떨어져 있었지만 엄세번도 북경에서 얼마전 벌어진 상황들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혁저(함풍제)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는 것.

새황제의 등장과함께 자금성과 북경에서 실권자로 떠오른 인물이 천기대신 주광비다.

따라서 북경의 실권자가 자신에게 서찰을 보냈다는것.

그것도 병부에서 고위급에 들어가는 관료가 온것이다.

엄세번이 한탁주와함께 손님을 맞이하러 출발했다.

“병부중관께서 친히 오시다니!”

“반갑소이다. 연경에서도 요동군부를 관할하고 있는 대인에대한 소식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저 변방에서 대청제국을위해 임무를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엄세번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이에 병부중관인 장방창이 미소를 지으며 엄세번을 격려했다.

하지만 찰나간 그의 표정은 몇차례나 바뀌었지만 엄세번은 결코 알아채지 못했다.

“듣기로 천기대신님의 서찰을 가져오셨다고 하던데.”

“그런데 이번에 여기로 온것은 특별한 용무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지금 연경에는 아직도 황제폐하에 불충하고, 천대대신과 우리들에게 대항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제압하고 대청제국의 안위를 위해서는 대인같은 분이 필요하다고 천기대신께서는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럴수가...”

병부중관의 말을듣자 엄세번의 입이 찢어질려고 하는 중이다.

자신이 원하던 중앙진출이 결정된 것이다.

이것을위해 엄세번은 계속해 북경에 줄을대고 작업해왔다.

더이상 지방파견군의 사령관으로 만족할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이윽고 병부중관이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어 엄세번에게 전달했다.

거기에 쓰여져있는 내용들에 엄세번은 흥분했다.

그럴것이 막강한 권력과함께 병부와 이부까지 손에쥔 천기대신 주광비가 엄세번을 북경에있는 중앙군의 사령관중에 한명으로 천거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엄세번을향해 자신들의 파벌에 들어오고 협력하라는 문구도 있었다.

엄세번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온 것이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그것은 연경에 도착한뒤 천기대신님께 하시는것이 좋을 것이요. 앞으로 천기대신께서 폐하를도와 대청제국을 번영을 이룩하실 분이니시 말이요.”

“당연합니다.”

“준비되는대로 떠날수 있도록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병부중방인 장방창이 말하더니 나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탁주도 엄세번을향해 축하했다.

“나리! 드디어 고대하던 중앙진출의 기회가 왔군요. 이번에 나리를 포섭한 천기대신 주광비는 황제폐하의 심복이면서 북경의 실세입니다. 그리고 나리께서 높은자리에 올라가게되면 저의 공로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거야 당연한거 아니겠나? 이번에 천기대신을 만나는 자리에서 자네에게도 적당한 자리가 나도록 요청을 해보겠네.”

엄세번이 호쾌하게 대답했고, 한탁주도 고생한 보람이 생겼다고 기뻐했다.

* * *

“끄아악!”

비명소리가 고문실을 가득메웠다.

내부에는 한명이 의자에 결박된 상태다.

주위로는 살벌한 고문도구를 손에든 사내들이 보인다.

지금까지 이런일을 능숙하게 해왔고 주저함도 없었다.

상대가 청제국에서 멸시받는 한족들인 경우에는 어떤 사정도 봐주지 않았다.

고문실에 배치된 그들은 만주족이다.

그들의 신분이 높은건 아니다.

때문에 눈앞의 한족에비해 보통의 경우라면 손조차 댈수도 없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무리 요동지역 사령관이라해도 한족이다.

고문실에 끌려온 이상은 자신들의 사냥감일 뿐이다.

여기서 비명을 지르면서 살려달라고 발버둥친 한족들의 숫자는 헤아릴수 없었다.

저기있는 한족도 똑같을 것이다.

“엄세번. 시간을끌면 당신만 불리해질 뿐이야.”

“무슨 말을 하시는거요. 내가 뭘 잘못했다는 것이요? 나는 대청의 황제폐하를향해 충성을 바쳤을 뿐입니다.”

엄세번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의 머리는 헝클어진 상태다.

입고있던 관복도 군데군데 찢겨져 나갔다.

얼마전까지 요동의 군벌로서 위세를떨던 모습은 찾아볼수 없을 수준이다.

엄세번은 자신의 실수에대해 절규했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것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었다.

북경에서 자신을 기다리는게 함정일 줄이야.

이럴줄 알았다면 죽기살기로 반항이라도 해볼건데.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그리고 반항 한다고해서 뭐가 될것인가?

요동에서 중앙을향해 반기를 든다해도 아래에있는 지휘관들은 대부분 만주인들이다.

한족인 자신의 반란명령을 따르지도 않을것이다.

먼저 목이 베이는건 자신이다.

‘크흐흐. 지금까지 이룩한 모든것이 허상일 줄이야.’

수없이 후회가 밀려왔다.

그것도 고문이 가해지는 고통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끄아아악! 엄세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앞에있는 심문관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아직도 죄를 자백하지 않는군. 네놈이 뭣때문에 여기로 잡혀왔는지 모르나? 비천한 한족놈을 출세시켜 요동사령관 자리를 주었더니 감히 황제폐하와 대청제국을 배신해? 한번더 묻겠다. 네놈은 뭣때문에 지르칼손과 그의 부대에대한 사건을 숨긴것인가?”

“그것은...”

엄세번이 더듬거렸다.

자신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수있는 사실을 심문관이 어떻게 알았는지 충격이다.

그대로 밝힐수는 없었다.

엄세번이 몇차례 변명을 시도했지만 고문은 중단되지 않았다.

심문관의 말을통해 어떻게된 상황인지 알수있었다.

엄세번이 은폐하고 덮었던 사건.

그것이 중앙인 북경에서 소문이 퍼져나간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지르칼손과 정예부대에 벌어진 사건은 자신과 몇몇 측근들만 알고있는 부분이다.

측근들 중에는 같이잡혀온 한탁주도 있었다.

한탁주는 다른 고문실로 끌려간 상태다.

한탁주가 배신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상대는...?

설마-

‘개같은 조선 놈들인가? 하지만 그놈들이 뭣때문에...’

지르칼손은 조선인 마을을 약탈하다가 전멸당했다.

조선인 정착촌의 주민들에 의한것인지 아니면 조선군에게 당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요동에서 지르칼손과 2000명에 이르는 기마부대를 전멸시킬 존재는 조선인들밖에 없었다.

강력한 기병부대가 상대도 안되는 조선인들에게 당했다는 사실은 믿을수 없었다.

그것을 상부에 보고한다면 무능한 사령관으로 취급되면서 어떤꼴을 당할지 모른다.

그때문에 엄세번도 측근인 한탁주의 요청에따라 지르칼손에대한 부분은 은폐한 것이다.

숨겨왔던 사실이 북경에서 소문으로 퍼지면서 이제는 독이되어 자신에게 온것이다.

갈등하던 엄세번은 입을 다물기로 하였다.

지금은 심문을 당하지만 추가적인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요동사령관의 자리를 유지할수 있을것이라 기대했다.

이것은 엄세번의 착각일 뿐이였다.

엄세번은 모든것을 각오하고 고문도 견딜 각오였다.

그러나 같이잡혀온 한탁주는 겁쟁이에 불과했다.

운좋게 엄세번에게 아부해 측근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엄세번이 팔기들에게 포박당하고 만주족들에게 끌려가는 상황을보며 포기하고 있었다.

“커어억! 모든것을 실토할테니 목숨만 살려주십시요.”

“이제야 말을하는군. 네놈 상관인 엄세번은 제법 버티고 있지만 너까지 죽을 필요는 없지. 안그래?”

다른쪽 고문실에서 한탁주를 심문하던 만주인이 히죽거렸다.

섬뜩한 웃음에 한탁주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상관인 엄세번은 몰락한 상태다.

한탁주는 고통을 이기지못해 자백을 시작했다.

지르칼손의 사건을 은폐한것.

지금까지 벌어졌던 모든것에대해 엄세번에게 책임을 전가시켰다.

자신은 시키는대로 했고 무죄라고 주장하였다.

한탁주의 자백과 모습을보며 만주인 심문관은 킬킬거렸다.

역시 한족놈들은 열등하다는것.

그랬으니까 만주족들보다 몇배나 많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지배를 당한다고 말이다.

* * *

“칼을든 상대앞에서도 주늑들지않던 자네가 이토록 긴장한 모습이라니, 세상에 별일이 다 있구만.”

“죄송합니다. 행수님! 하지만 이나라의 임금님을 만나는 자리이지 않습니까? 거기다 소문에 듣기로 지금의 전하께서는 범상한 분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무엇보다 우리들을 만나러온 저 강기석이란 분을 포함해 비호국 요원들의 위세도 놀라울 정도입니다.”

“나도 느끼고 있었네.”

방동진이 오자와(小川)를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전 일들이 떠올랐다.

방동진이 행수로있는 해남상회(海南商會)는 일본의 시라키 해안까지 들어가서 무역을 하였다.

다만 상대쪽에서 나온 일본상인 나카노(中野)가 시미즈의 꼬임에빠져 뒤통수를 칠려고 했다.

하지만 나카노는 방행수에게 호되게 당했고 처음보다 더 비싼가격에 물건을 모두 사들여야 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방동진은 나카노가 더이상 허튼짓을 못하도록 단속했고 상당한 이득과 은괴도 챙겼던 것이다.

기분좋게 조선으로 복귀했고 부산포에서 내린뒤에 동래에 왔을때 그곳에는 방문자들이 찾아왔다.

한명은 방동진도 알고있는 동래쪽에 파견된 공조의 관원이다.

그러나 다른 두명은 처음본 사람이였고 방동진은 그들이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아챘다.

방동진에게 용무가 있었던건 낯선 사내들이였던 것이다.

자신들을 비호국의 요원이라고 밝힌 그들은 방동진에게 한장의 밀서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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