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걸아!”
“전하. 부르셨습니까?”
문이열리며 송내관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또 뭘 시킬려고 그러십니까... 라는 불안한 눈빛이 역력했다.
그것을보며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수없다.
앞으로 너는 단순한 내관이 아니라 임금인 나의 손과발이 되는 것이니까.
앞으로 진행할 수많은 일들을 모두 송내관을통해 처리할것은 아니다.
송내관이 할수있는 것들이있고 아닌 것들이 존재하니까 말이다.
“지금 시각을보니 한낮이구나. 따라서 의정부를 포함해 6조의 관원들이 퇴궐할려면 시간이 꽤 남았을거 같구나.”
“그렇긴 하옵니다만 뭣때문에 그러시는지요. 전하.”
“저번에 승정원을 방문했으니 오늘은 궐안에있는 다른 관청들도 방문을 해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전하. 그것은....”
송내관이 말끝을 흐렸다.
속마음은 전하께서 그러실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게 역력했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꺼냈을 때에는 결심이 선 상태에서 한다는걸 종걸이도 충분히 체감하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의정부와 6조의 관원들이 아직도 업무를보고 있는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통 전하께서 각부의 관청을 직접 시찰하러 가실때에는 먼저 그곳의 판서들에게 미리 일러두심이 어떠할까 사료되옵니다.”
“그것도 한가지 방법이긴 하다. 다만 그렇게하면 임금이 친히 방문하는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공조판서나 예조판서에게 미리 일러둔다해도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그외의 6조의 판서들에겐 그럴필요가 없어보였다.
내심 목적은 그들이없는 상태에서 방문을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차피 이번의 현장방문에서 예조와 공조는 제외할 예정이다.
왜냐하면 예조와 공조는 이미 능력있는 두명, 예판과 공판이 잘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승정원도 제외하고.
그렇게되면 나머지 부처들을 훑어볼수가 있다.
무엇보다 조선의 국왕이된 상태에서 창덕궁에있는 각부의 관청들을 둘러보는건 필요한 일이지.
또한 의정부를 포함해 이조, 호조, 병조, 형조, 그리고 삼사에도 쓸만한 인재들이 있을것이다.
그들에게 임금인 내가 방문해서 기대감을 준다면 내쪽에는 몇배나 유리하다.
“몇명의 호위무사들만 대동하면 충분하니까, 준비를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전하!”
송내관이 대답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궁궐 내부라해도 임금이 움직일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미리 준비를하고 행렬의 규모도 상당해진다.
궁궐내의 예법에따라 행해지는 것이지만 앞으로는 그 절차를 간소화 시켜야될거 같다.
* * *
“주상전하를 알현합니다.”
큰소리로 외치며 내앞에 10명의 관원들이 엎드렸다.
그들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조선의 새로운 임금이 느닷없이 자신들이 일하던 관청으로 들어왔으니 말이다.
지금 그들이 업무를보던 장소는 호조에서도 중하급 관원들이 주로 모여있는 곳이다.
때문에 관청내부의 시설을 포함해 모든것이 허름하고 열악했다. 어떤곳은 먼지가 가득하게 쌓여있는 장소들도 보인다.
중하급 관원들이 이런곳에서 일하고 있었다니.
대충 예상은 하였지만 더 심각하네.
갑자기 호조판서에게 분노가 생긴다.
그래도 호조는 자신이 수장이고 여기에있는 중하급 관료들은 그의 지시를받는 부하들이다.
또한 호조판서는 김좌근에게 아첨하면서 엄청난 혈세를 빼돌리고 있었다.
엄청난 국세를 빼돌리며 부정착복하는 주제에 부하들에 해당하는 호조관원들의 복지부분에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것이다.
부정으로 빼돌리는 돈중에 일부만 써도 여기보다는 더 괜찮은 곳으로 만들수 있겠지만 그런일을 할리가 없지.
“모두 고개를 들라.”
관원들을향해 말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임금인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궁궐내를 포함해 세간에서는 새임금을 강화도에서 농사짓다가 온 촌놈이라고 수근대지만 그것은 어디나 뒷다마일 뿐이다. 그리고 여기있는 하급관원들에게 조선의 임금은 어디까지나 하늘같은 존재이니까.
조선을 레벨업(Level Up) 시켜보자
“그런데 자네들 뿐인건가? 참의나 참판은 어디에 있는가?”
“저 그것은...”
선두에서 엎드린 중급관원이 머뭇거렸다.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의 상황이다.
한국에서도 부패한 관료조직은 중간과 말단만 죽어라고 일한다. 그위에 상급에있는 넘들은 월급도둑이나 하면서 노는것이다.
그것이 19세기 중반의 조선에서도 똑같이 벌어진 상황이다.
호조에서 처리하고 왕에게 보고해야할 업무의 내용은 상당하다.
그러나 어전회의에서 호조판서는 항상 특별한 상황은 없고, 호조를 포함해 하부의 관청들은 이상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거짓말만 해대었다.
하긴 평소에 그놈이 호조판서로서의 업무를 제대로 하지를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여기에있는 중하급 관원들을 다그칠 생각은 없었다.
여기있는 관원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그저 위에서 권력을쥔 놈이 시킨대로 하는것 뿐인데.
모여있는 관원들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호조판서 때문에 무능한 부서로 변했지만 여기있는 관원들의 능력은 결코 무능한것이 아니다.
임금인 내가 그들의 능력을 끌어낼수 있도록 지도해주면 뛰어난 인재들이 되는것이다.
“과인은 이곳에서 업무를보는 그대들을 만나서 무척이나 기쁘군요. 앞으로 필요한것이 있거든 서슴치말고 임금을향해 직언을하고 본연의 업무를 할수있는 관원들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이요.”
“성은이 망급하옵니다. 전하!”
관원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눈빛은 새임금에대한 기대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역시 효과가 있다.
사전에 연락도없이 일부러 여기에 온 목적의 50%는 충분히 달성한 셈이다.
어차피 호조판서를 포함해 동조하는 윗대가리들은 쳐낼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부서에서 실무를 담당하고 핵심이라고 할수있는 중하급 관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게 중요했다.
잠시 그곳을 둘러본뒤에 관원들을 다독여 주었다.
호조에대한 방문을 마쳤으니 다음은 어디로 가볼까?
“전하. 지금이라도 호조참판이나 참의를 불러올까요?”
“그럴필요는 없느니라.”
송내관을향해 대답했다.
임금의 뒤통수를 칠려는 그놈들을 뭣하러 일부러 만나?
그놈들이 있으면 저기있는 중하급 관원들이 얼마나 불편하고 눈치를 보겠나.
“과인이 여기에 온것은 호조참판이나 호조참의를 볼려고 한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여기에서 조정을위해 헌신하는 저들을 보려고 온것이다.”
“.....”
송내관이 머뭇거렸다.
그리고 송내관을향해 대답하던 목소리를 크게 하였다.
일부러 엎드려있는 중하급 관원들이 들도록 말이다.
임금인 내가 자신들을 얼마나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것.
그것만큼 신하들과 관료들의 충성심을 끌어내는 더 좋은 방법은 없는것이다.
얼마후 호조에대한 방문을 마친뒤에 형조로 향했다.
형조는 조선에서 치안에 관련된 부분을 담당하는 중요한 곳이다.
조선의 치안력이 지금같이 비틀거리는것도 형조판서와 그 상부의 놈들이 무능해서다.
이렇게 따지니까 앞으로 손대야할 분야가 엄청날 정도다.
벌써부터 머리가 욱씬거리네.
하지만 최약체 캐릭터인 조선을 레벌업 시키는것도 새로운 도전과 재미가 아니겠는가?
* * *
“주모. 여기 국밥 한그릇 더!”
“곧 갑니다요.”
치마와 저고리를 두른 중년여인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맘때면 주막은 손님들로 넘친다.
손님들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들과 장사를위해 지방으로 떠나는 보부상들이 많았다.
한편으로 그녀가 운영하는 주막은 한양으로 입성하는 길목에 있었기에 다양한 지역의 손님들로 가득했다.
주막이 항상 손님들로 붐비는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파리가 날릴정도로 장사가 안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수지타산이 그럭저럭 맞았고 요즘에는 한양으로 몰려드는 행인들의 숫자가 부쩍 늘었다.
그 이유중에 하나는 새로운 임금의 등극과 그에따른 기대감이다.
얼마전까지 전대왕인 헌종의 죽음으로 조선은 초상집 분위기였지만 빠르게 변화되었다.
임금이 허약하고 병상에 누워있다는 사실만으로 밑에있는 민초들의 삶과 수많은 활동들이 위축된다.
그렇게 허약했던 헌종이 승하하고 난뒤에 새로운 임금이 종묘사직을 이끌게 되었고 창덕궁의 주인이 되었다.
한편 이전의 임금들과는 전혀 다른 등극과정을 거쳤다는 사실만으로 조선의 민초들에게 철종 이원범은 화제의 대상이다.
“종묘사직과 조선의 미래가 어떻게 될려고 하는지. 쯧쯧!”
“갑자기 왜 그러나?”
“자고로 임금이라면 왕세자의 교육을받고 학문을 익힌뒤에 조선의 큰어른이 되는게 수순이지 않는가? 그런데 강화도에서 농사나짓던 촌부가 하루아침에 임금이라니, 허허!”
“듣고보니 그렇네. 아무리 왕족의 핏줄을 갖고있다해도 강화도에 쳐박혀있던 무지렁이가 왕이라니.”
두명이 투덜거렸다.
그들의 행색은 남루했고 평민과 다름없었다.
때문에 자신들과 비슷한 삶을살았던 강화도의 촌동네 농사꾼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왕후장상의 피가 따로없고 이제는 농사꾼도 왕이되는 시대구나... 라는 것.
그들과 철종 이원범은 근본부터가 다르다.
이원범에게는 왕족의 핏줄을 포함해 왕위의 계승권까지 있다는건 고려하지 않은 부분이다.
두명이 이렇게 불평하고 편견을 가지게된 것에는 다른것도 있었다.
민초들에게 임금에대한 충성과 존경심을 유도하고 지도해야할 지도층에 속하는 양반과 사대부들이 암암리에 한양에서 기괴한 소문을 내고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임금이 강화도에서 태어나고 농사만 지었기에 천자문조차 모르는 일자무식이라는 것.
그외에도 강화도에서 지낼때 동네에서 바보로 취급되고 놀림을 받았다는 것.
또는 한쪽 다리를저는 병신이더라.
얼굴에 흉터가 가득해 제대로 봐주기도 힘들더라.
임금에대한 소문치고는 고약하고 저질스러운 것들로만 퍼지는 중이다.
핵심적인 키워드는 주로 일자무식, 바보, 병신-등이다.
임금에대해 이런 소문이 퍼지면 관청을 포함해 양반들과 사대부들이 나서서 단속을 해야함에도 저질의 소문을 퍼뜨리는건 오히려 양반들이다.
그중에서도 김좌근과 안동김씨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몰래 주동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창덕궁내의 상황을 모르는 한양내의 민초들은 그런 소문을 믿어버리고 있었다.
헛소문을믿고 왕에대한 존경심조차 없어지니 이제는 주막에서 동료들과 막걸리를 마시면서 대놓고 욕하는 상황까지 생겼다.
둘중에 한명이 시작하자 나머지가 받아치며 그 정도가 심해졌다.
이제는 임금에대해 병X... 이라는 말까지 나올려는 순간.
옆에있던 4명의 중년 사내들이 벌떡 일어났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갑자기 왜 그러시오?”
처음에는 임금에대해 조롱하던 두명이 발끈했지만 상대가 4명이고 건장한 체격이라 주늑이 들었다.
“주상전하가 천자문도 모르는 일자무식에다가 동네에서 바보로 놀림을 받았다고?”
“소문이 그런건데 우리보고 따지시는거요?”
“어허 네놈들. 주상전하를 직접 뵙지도 못했지?”
“그렇다면 당신들은 봤다는 거요?”
“물론이다.”
“무슨 거짓말을 하시는거요? 강화도에서 한양까지 왔으면 분명 가마를 타고왔을건데 그안에있는 임금님을 봤다는 거요?”
“가마가 아니라 말을타고 한양으로 오셨다. 그것도 위엄이 넘치는 군마위에서 당당하게 오신것이다.”
“.....”
사내들의 반박을듣자 두명은 움찔거렸다.
분명히 자신들이 들었던 소문과는 다르지 않는가?
갑자기 벌어진 말다툼에 주변에있던 사람들도 흥미를 가지고 모여들었다.
그들의 표정이 호기심으로 빛나면서 재촉했다.
“이보게. 자네들이 주상전하를 뵌거같으니 좀더 말해보게.”
“알겠소. 그런데 어떤 놈들이 감히 주상전하를 모함하는 저딴 소문을 퍼드리고 다니는 것인지.”
그들이 투덜거렸다.
그리고 4명은 자신들이 한양에서 길을가던중 눈앞에서 직접 목격한 새임금 철종 이원범에대한 첫인상과 여러가지 것들을 설명하였다.
특히 새임금이 가마대신 말을타고 한양으로 입성했다는것.
그 과정에서 길에나온 수많은 민초들을 상대로 열정적인 연설을하며 덕담까지 주었다는 사실을듣자 주막내의 손님들은 크게놀랐다.
이거야말로 자신들이 바라던 강력한 군주의 상징이자 임금의 모습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