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 69. 천마재림(The second coming of the chosen one)(3) >
제갈성혜는 태연한 표정으로 걸었다. 멀리 보이는 자율무공학부 학생들을 은근슬쩍 따라갔다.
학생들이 오디토리엄 객석 한쪽에 자리를 잡자 제갈성혜도 근처에 앉았다. 학생들의 대화가 들릴 정도의 거리였다.
"여기 정말 학부장님이 오신다고? 아무리 봐도 좀 이상한 데인 거 같은데……."
"확실해."
해왕환생 이신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남옥창 원지혜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모종의 루트를 통해 이미 참석하는 명사들의 명단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하긴 제갈성혜도 미리 입수한 정보였다. 원주원가의 보석이 마음만 먹으면 명단을 입수하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일월신교 측에서도 숨기기보다는 오히려 자랑하려는 모양새이기도 했고 말이다.
"저기, 팸플릿에도 그렇게 적혀 있긴 해."
투희 당수련이 종잇장을 흔들며 소심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봐봐."
"으응."
원지혜가 고개를 가깝게 들이밀자 당수련은 부담스럽다는 듯 팸플릿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투희라는 별호가 붙을 성정으로는 안 보이는데. 당가의 여론몰이인가?'
제갈성혜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원지혜는 명단을 빠르게 훑었다.
"보자. 군자검. 무림맹 군사였던 사람이고. 닉슨? 미 국방부 장관이었잖아. 중간엔 마교 장로도 있고. 축하 공연은 악절(樂絶, ace of music)? 이 사람도 있네. 파라과이 대통령은 왜 오는데? 라인업이 생각보다 더 짱짱한데?"
"교수님은 저 밑에 있네. 끝에서 두 번째."
이신이 옆에서 보더니 턱짓했다. 제갈성혜도 고개를 슬쩍 내밀어 명단을 훔쳐봤다. 미리 입수한 정보보다 참석 명사가 더 많았다.
"그러네. 재림천마. 즉 일월마군 바로 앞이군."
"그, 지혜야. 여기서는 목소리 좀 낮추는 게 어떨까?"
아닌 게 아니라 주변 신도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뒷자리에 앉은 제갈성혜마저 섬뜩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원지혜는 당당했다.
"뭐요. 왜 봐요? 내가 일월마군을 일월마군이라 부르지도 못해요?"
원지혜가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자 오히려 신도들이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학생들이 무인임을 숨기지 않고 있는 것도 한몫한 듯했다.
'아무리 봐도 저쪽이 투희 같은데. 싸움닭이 따로 없군.'
남옥창의 성질이 더러운 것이야 제갈성혜도 이미 익히 아는 사실이었으나 남의 행사에 와서까지 저렇게 맹랑하게 굴 줄은 몰랐다.
곧 오디토리엄이 어두워졌다. 행사가 시작될 징조였다.
짝짝짝짝!
무수한 박수소리가 신도들의 기대감을 대변했다.
"우리 교수님이 대체 여기서 뭔 말을 하는지 어디 한번 들어보자고."
원지혜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어째 검룡이 불러서 이곳에 온 것 같지는 않은 듯한 언사였다.
제갈성혜는 잠깐 의문이 들었지만 곧장 호위에게 카메라 님을 받아와 연단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따라오겠다는 사진기자가 없어 제갈성혜가 직접 찍어야 했다.
곧 연단이 한쪽이 서서히 밝아지자 박수소리가 잦아들었다. 연단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소저들 그리고 대협들! 반갑습니다. 제16회 국제 무림 평화 컨퍼런스를 찾아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사회를 맡게 된 무명소졸, 일월신교의 김상배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와! 주교님!"
'일월신교 사천 교구 주교 김상배.'
실제로도 김상배는 무명소졸이었다. 이렇다 할 명성을 날리지 못한 그저 그런 초절정고수.
그러나 여기서는 아니었다. 수많은 신도의 존경을 받는 일월신교 최대 교구의 주교였다. 사실상 일월신교의 대주교라고 해도 좋을 인물.
제갈성혜는 카메라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메모를 시작했다.
'교도들은 수탈자를 증오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
"첫 번째로 국제 무림 평화 컨퍼런스를 빛내줄 명사를 소개합니다! 국제 무림 평화를 위해 앞장서는 무림맹의 제1군사를 역임한 군자검 대협이십니다!"
"따자하오. 반갑습니다. 군자검입니다."
"군자검 대협이시다!"
"대협!"
메기 수염을 기른 중년인을 향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명성이 없는 인물이 아니었다. 무공 경지는 드높지 않았으나 무림맹 군사를 역임하며 인간적인 면모로 인기 높았던 것이 군자검이었다.
'여기서 마주쳤다는 사실에 서글플 정도군.'
그러나 지금은 사이비 종교의 홍보 행사를 도와주는 앞잡이에 불과했다. 군자라는 별호를 가질 자격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설 내용 자체는 지루하고 뻔했다. 예상 가능한 내용이었다.
본인이 무림맹에 있을 때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일을 했는지. 거기서 국제 무림의 평화를 지키는 것의 가치를 깨달은 일화 하나. 소소한 웃음 포인트 몇 개. 그리고 일월신교를 추켜세우는 말 몇 마디.
"와아아아아!"
일월신교 교도들은 좋아했다.
그 이후로도 다 비슷비슷했다.
천마신교의 장로가 나오든, 헥사곤의 전 장관이 나오든, 무림맹의 전 간부가 나오든, 한국의 정치인이 나오든. 세부적인 일화만 조금 달랐을 뿐 같은 내용의 연설을 반복했다.
하긴 일월신교 측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명사들이 자기네들이 주최한 행사에 와서 연설을 하였다는 사실 자체였을 것이다.
세기의 명연설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사실 연사가 너무 대단한 말을 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가장 빛나고 충격적이어야 하는 것은 교주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금 달랐던 것은 릴 드레이크(Lil drake)였다.
악절.
미국 음반시장 최대의 슈퍼스타.
음공의 대가.
음공을 익혀 초인의 경지에 이른 독보적인 인물. 무공을 익힌 음악가는 넘쳐나지만, 그 중 화경에 닿은 음악가는 악절이 유일했다.
제갈성혜가 알기에는 일 년에 버는 수입이 천억이 넘었다. 독보적인 음원 성적에 자기 이름을 건 패션 브랜드로 벌어들이는 수익을 더한 결과였다.
목숨을 걸고 무력을 파는 다른 화경들보다도 돈을 훨씬 많이 번다는 이야기였다. 사이비 종교 행사에 오는 게 이상한 인물이었다.
'동양의 사이비 종교에 혹하기라도 한 건가?'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화경이 화경을 보고 재림천마라는 말에 속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안녕, 여러분."
어느새 무대 위에는 검은색 반팔 티셔츠를 입은 흑인 하나가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제갈성혜는 무대에서 시선을 뗀 적이 없지만 그가 올라오는 장면은 보지도 못했다. 그저 카메라 님이 찍어주셨길 바랄 뿐이었다.
"릴 드레이크다!"
"와! 악절!"
"오빠 사랑해!"
"저 사람은 여기 왜 왔대?"
"와. 나 릴 드레이크 처음 봐."
"나, 난 한국 가수도 본 적 없는데. 기대된다."
끼이이이이이─.
마이크를 조절하는 노이즈 소리가 잠시 오디토리엄 전체에 울렸다.
"아아. 반가워, 여러분."
릴 드레이크의 목소리가 홀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는 한국어로 말하고 있었다. 발음이 완벽하지는 않았으나 말은 유창했다.
"여러분은 아마 궁금할 거야. 저 존나 잘 버는 흑인 새끼가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왔을까. 이렇게 말이지. 아주 타당한 의문이야."
릴 드레이크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내가 내 세션도 없이 여기 온 이유는 말이지. 내 자칭 천마 친구가 존나 개쩌는 기타를 준다고 해서야. 바로 헨드릭스가 썼던 기타 말이야. 그런 걸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
악절이 짧은 연설을 하는 사이에 무대 위에는 커다란 스피커와 조명 따위가 준비되고 있었다.
"난 돈밖에 없는 사람이란 말이야. 그래서 돈으로 때우고 싶은데 안 팔겠다니 어쩔 수 없지. 간만에 버디의 나라에 와서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존나 갖고 싶었던 물건이었거든."
악절 말고 다른 연주자는 없었다. 그러나 악기 몇 개가 허공에 둥둥 떠있었다. 허공섭물이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악절만이 할 수 있는 퍼포먼스였다. 화경이면서 뛰어난 음악적 감각까지 가진 자는 릴 드레이크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악절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여기까지 온 김에 내 개쩌는 히트곡 3개 정도는 해주지. 여태까지 앞에서 이야기한 바보들(Dudes)의 개소리를 잔뜩 들었던 귀에 위로가 되길 바래."
쿵쿵─.
♩─♬─.
드럼과 묵직한 베이스 소리에 빠른 비트의 전자음이 섞였다.
릴 드레이크는 연주에 맞춰 노래와 랩을 했다.
말한 대로 딱 3곡. 채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퇴장했다.
관객들은 손뼉조차 제대로 치지 못했다. 악절의 등을 보며 여운에 잠겼다.
무대는 신이 나면서 또 깊은 감동까지 주었다. 살상력을 제거한 음공은 곡에 대한 깊은 이해로 다가왔다. 음악가의 심상을 그대로 뇌리에 때려 박는 느낌이었다.
난생 처음할 수밖에 없는 경험이었다.
'이래서 악절, 악절 하는구나."
제갈성혜도 만족했다. 재밌는 공연이기도 했고, 악절이 공연 전에 한국어로 한 연설만으로도 기삿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신나던 순간도 잠시였다. 이제부터 또 명사들의 지루한 연설을 들을 생각을 하니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다행히도 2부는 짧은 편이었다.
곧 연단에 설 명사는 두 명만이 남았다.
"여러분. 환영의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구국의 영웅! 현대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무인. 화산검룡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일월신교의 김산 장로님입니다!"
"화산검룡!"
"장로님!"
주교가 소개하자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다른 명사들에 비하면 훨씬 컸다. 어쩌면 악절을 맞이할 때보다 더 컸을지도 몰랐다.
언론에 의해 부풀려지긴 했으나 그렇지 않더라도 검룡은 인기 있는 인물이었다. 특히 이 자리를 찾은 자들에게는 그 정도가 더했다. 구국의 영웅인지는 모르겠지만.
연단 위로 느긋한 걸음걸이로 김산이 올라왔다.
제갈성혜는 카메라를 다시 체크했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잘 돌아가고 있었다. 학생들도 속닥거렸다.
"교수님이다."
"쉿. 들어보자."
"아아."
김산은 마이크를 몇 번 테스트하는 듯하더니 그냥 내려놓았다.
"여러분."
소리가 귓가에 와 닿았다.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이.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랬다. 순간적으로 놀라 헛숨 들이키는 사람이 수십이었다.
'……육합전성?'
아니었다. 육합전성과는 달랐다. 파동을 광범위하게 퍼트리는 방식으로 전음을 반대로 응용한 것에 가까웠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육합전성과 달리 소리는 분명 김산이 서 있는 곳으로부터 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공에 무지한 일반인들에게는 별 차이가 없게 다가왔다. 일류 무인인 제갈성혜 역시 육합전성이라고 메모했다.
경이로운 수준의 내공 수발이었다. 악절이 보여준 것과는 다른 방향의 놀라움이었다.
"반갑습니다. 김산입니다."
장내가 고요해졌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모두가 직접 경험하는 신비에 집중했다. 악절의 공연을 보면서 심리적 장벽이 많이 내려간 상황이었다.
"여러분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지만, 오늘은 제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꾼 꿈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김산은 자연스럽게 양팔을 벌렸다. 진짜로 종교 지도자라도 되는 듯한 자세였다.
"오랜 세월 동안, 저는 화산의 도사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일월신교에 입교했을 때부터, 저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사는 꿈입니다."
파직─.
"저, 저건……."
"쉬, 쉿!"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김산의 몸 위로 어두운 기운이 피어올랐다. 짙고 검은 구름과 같았다. 그 위로 백색의 번개가 명멸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공 중에 하나였다.
그러니까 일월마군이 재림천마임을 내세울 때 보여줬던 모습과, 아주 비슷했다.
"저는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습니다."
파천신공.
전반부까지는 세간에 공개된 천마신교의 비급이었다. 파천신공의 적합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적성은 알 수 있되 파천신공의 효용을 모조리 발휘하기에는 부족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현재 김산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무공의 문외한인 제갈성혜가 보기에도 너무나도 깔끔하고 완벽했다. 마치 오랫동안 파천신공만을 익혀온 천마신교의 후계자처럼.
아니면 천마 본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가 천마입니다."
김산은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반박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듯이.
사이비 종교의 가짜 천마 자리에 대한 가장 확실한 도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