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 68. 천마재림(The second coming of the chosen one)(2) >
고무림 사회부 기자 제갈성혜는 방계의 인물이었다.
몇백 년 전에 선조가 한국에 온 것이니, 같은 제갈세가의 일원이라고 하기도 뭣할 정도로 피가 옅어진 방계.
그녀와 제갈세가 사이에 있는 공통점이라곤 사실상 제갈이라는 성뿐이었다.
그래도 제갈성혜는 같은 성씨랍시고 제갈세가를 꽤 좋아했다. 다른 언론사들 대신에 고무림을 고른 것은 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나름대로 피는 이어졌던 모양인지, 제갈성혜는 무공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머리는 잘 굴러갔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어렵지 않게 기자가 되었다.
그렇게 살아온 몇 년 차, 화산검룡 관련 기사를 살피다 특종을 직감했다.
처음 낌새를 느낀 건 MBS를 통해 방송된 '독괴의 난' 다큐멘터리를 본 며칠 후부터였다.
화산검룡은 분명 주목할 만한 인물이었지만 감안하고도 파급력이 과했다. 열기가 도무지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여론을 부풀리고 있었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월신교라는 사이비 종교를 알게 되었다.
존재 자체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파고들어 보니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컸다. 재계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했다.
일월신교 관련 언론사에서 의도적으로 화산검룡에 대해 우호적인 노출을 계속하고 있었다.
제갈성혜는 화산검룡과 일월신교 사이에 유착 관계를 의심했다. 아무도 일월신교에게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때였다.
며칠 후 화산검룡이 일월신교의 장로라는 언론 발표가 있었다. 출처는 당가 측 언론사였다.
의심이 확신이 된 순간이었다. 제갈성혜는 희열을 느꼈다. 영웅의 감추고 싶은 뒷모습. 내가 먼저 알았다. 짜릿하기까지 했다.
후속 기사를 내기 위해 일월신교의 뒤를 파기 시작했다.
이 사이비 종교가 얼마나 나쁜 일을 하고 있는지, 그런 종교의 장로인 화산검룡은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인물인지. 알리고 싶었다.
어느 날 상사가 제갈성혜를 불렀다.
"그만해라."
"예?"
"지금 하고 있는 거. 일월신교 특집인가 그거. 그만하라고."
"왜요? 저 이걸로 대박 칠 자신 있어요. 맨날 특종 물어오라고 하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래요?"
"위험하다."
"네?"
"위험하다고. 우리한테는 안 그러지만 다른 언론사에는 대놓고 압박도 들어온단다. 위험한 인간들이야. 무림인들인데 정신줄까지 나갔다.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우린 고무림이잖아요. 뒤에 제갈세가도 있고……."
"성혜야."
"네, 부장님."
맨날 기삿거리 좀 찾아오라고 장난스럽게 제갈성혜를 타박하던 사회부 부장은 진지하게 말했다. 제갈성혜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너는 제갈세가 사람이 아니잖아."
"……."
그건 제갈성혜의 컴플렉스였다. 제갈 성씨를 달고 살지만 제갈세가의 주류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 차라리 고무림에 들어오지 말 걸 그랬나.
"그게 뭐 잘못이라는 건 아니다. 나도 세가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데 중요한 건 우리는 결국 고무림 지사 언론부에 불과하다는 거다. 돈 많은 단체가 기자 하나 건드려봐야 서로 쉬쉬할 거라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일월신교도 알고 제갈세가도 알아."
"그렇지만, 언론인이잖아요. 우리."
"언론인."
"네. 언론인. 우리가 무섭다고 취재 안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알아요."
부장은 잠깐 말이 없었다.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만 돌렸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다가 허공에서 손을 휘적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비흡연자 후배 앞에서는 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우리 언론인이지. 그리고 네가 말을 들으면 제갈성혜가 아니었겠지."
"그쵸."
"뭘 그쵸야. 이 애물단지를 어쩌면 좋을까."
"하게 해주세요."
말리는 사람까지 생기자 오히려 제갈성혜는 일종의 의무감마저 들고 있었다. 기자의 사명 같은 것이 오랜만에 내면에서 꿈틀거렸다.
"저 잘할게요. 이거 하고 싶어요."
부장은 말없이 볼펜만 씹었다. 담배 대신인 듯했다.
잠깐 침묵이 있었다. 볼펜을 아그작 씹는 소리만 가끔 울렸다.
이내 부장이 볼펜을 뱉고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국제 무림 평화 컨퍼런스라고 아냐?"
"네?"
"일월신교가 개최하는 국제회의다. UN과 무림맹의 공식 인정도 받은. 명목은 그런데 사실은 자기네들 홍보 행사지. 투자를 꽤 한다는군. 전 무림맹 간부부터 천마신교 장로 출신에 대통령도 몇 온다더라. 화산검룡도 거기서 데뷔한다고 하고."
"……부장님."
"카메라 좋은 걸로 가져가라. 초고수들 무공 시연하면 파바박하는 거까지 찍을 수 있는 걸로. 이왕 가는 김에 제대로 써와. 호위도 본사에 정식으로 요청해서 괜찮은 애들 데려가고."
"네! 저 진짜 제대로 취재해서 올게요!"
"다치면 우리랑 남인 거 기억하고. 카메라 님도 안 다치시게 조심하고. 초고수 무공 찍히는 사양 카메라는 우리 몸값보다 비싼 물건인 거 알지?"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남이라도 어떻게든 복수는 해주마. 잘 다녀와라."
그 말은 끝으로 부장은 의자를 뒤로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대충 손을 휘저었다. 축객령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제갈성혜는 바로 호위를 요청하고 일월신교에 관한 조사를 계속했다. 초절정 한 명이 붙었다.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수법이 교묘하고 피해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취재를 하지 말라고 협박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다행히도 아직은 호위 선에서 정리가 되었다.
그게 오늘까지였다.
그런데 화산검룡을 직접 만나보니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사이비 종교의 지도층이라기보다는, 흡사 전쟁을 앞둔 장군 같은 분위기.
여태 조사해온 일월신교의 간부들과는 결부터 다른 느낌이었다. 눈빛부터 기세까지 모든 게 달랐다.
세월에 썩어가는 수탈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젊고 도전적이었다.
인파에 섞여 짧은 인터뷰를 했다.
그 후 광장 경비를 맡은 교도들에게 끌려가던 중 화산검룡으로부터 이상한 말을 들었다.
─재밌는 일이 있을 테니까 말이오.
마치 모종의 사건을 암시하는 듯한 언사였다.
문득 컨벤션 센터 광장 주위를 둘러보니 어색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거지가 기묘할 정도로 많았다.
물론 이 정도 인파가 몰리는 공간이면 개방도 몇이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분명 거지들은 자연스럽게 여기저기 앉아 각자 딴 곳을 보며 구걸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간질간질 마음 한구석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뭘까.
'봉? 개방도가 들고 다닐 수도 있지.'
'몸이 좋은 편인 거? 개방도니까? 어머, 쟤는 복근도 있네.'
'나이대? 청년부터 중장년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고.'
'위치? 유동인구가 좋은 곳이고. 목도 참 잘 잡는다.'
'얼굴? 쟤는 복근도 있는데 얼굴도 반반……. 잠깐만, 얼굴?'
얼굴이었다.
얼굴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면면들이 낯이 익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저 사람들을 어디서 봤지? 인터뷰를 했나? 아니면 방송에 나온 사람들인가? 아니…….'
제갈성혜는 인상까지 찌푸리며 기억을 되새김질했다.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쥐어짜내 결국 기억해냈다. 저 자들을 어디서 봤는지.
그냥 많이 본 사람들이었다.
그냥.
출근할 때. 야근하고 늦게 퇴근할 때. 오다가다.
사천역에서 보이던 자들이었다.
보통 거지들의 얼굴까지 기억하는 자는 별로 없지만 제갈성혜는 사람들의 얼굴을 특별히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사천역을 지나다닌 시간이 몇 년.
며칠에 한 번 본 얼굴이라도 세월이 쌓이면 머리에 남았다.
제갈성혜의 뇌리에 번개가 쳤다.
오늘 인생 최대의 특종을 잡을 거라는 직감이 왔다.
검룡과 개방 사이의 커넥션은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사천역은 말하자면 개방 한국지사 본타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검룡이 개방을 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지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교묘하게 돌리던 와중 수상한 무리를 하나 더 발견했다.
열이 조금 넘는 무리였는데, 주요한 특징은 나이가 어려 보였고 다양한 무기를 차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공대를 다니는 대학생 같은 느낌이었는데 일월신교의 주류 교도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공대를 다닐 정도의 무공 엘리트들이 화경을 보고 재림천마로 믿을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변장을 한다고 한 모양인지 선글라스나 모자, 안경 등을 착용하고 있었다. 변장이라고 하기엔 어설픈 수준이었다.
'해왕환생?'
당연히 독괴의 난으로 라이징 스타가 된 이신은 제갈성혜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수준 낮은 변장으로 기자의 눈을 속이기는 힘들었다.
하나를 파악하니 나머지를 알기는 더 쉬웠다.
'그럼 옆은 남옥창. 투희에 지리랑. 견희(犬姬). 나머진 확실하진 않지만, 사천공대 자율무공학부 12명이겠군.'
그 순간 제갈성혜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제갈가의 비상한 머리는 특정한 결론을 금방 내렸다.
화산검룡이 개방도와 휘하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악질 사이비 종교를 어떻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
마침 일월신교의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화산검룡이 알려진 대로 정파의 협객이고, 내부에서부터 침투하기 위해 일월신교에 잠입한 거라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을 것이었다.
그럴듯한 상상이었다.
'근데 이 정도 인원으로 가능한가?'
제갈성혜는 기자로는 뛰어났지만 무인으로는 일류였다. 무공과 전투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전력을 정확히 가늠할 능력은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일월신교의 교주 일월마군이 화경이라는 것은 알았다. 화경은 화경으로 상대해야 한다는 것도.
거기다 이번에 국제 무림 평화 컨퍼런스에 초대된 인물 중에서도 화경을 포함하여 고수가 즐비하다는 정보를 입수한 참이었다.
학생들은 별호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신을 제외하면 후기지수 수준에 불과했다.
개방 본타의 무력이라 한들 단독으로 화경이 포함된 광신도들을 제압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였다.
'그럼 아닌가?'
제갈성혜는 고개를 저었다.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추론할 필요는 없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카메라로 기록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자세한 것은 실제로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일단은 감을 믿고 판단하면 된다.
제갈성혜는 자율무공학부 학생들이 컨벤션 센터로 입장하자 따라서 들어가려 했다.
일월신교 휘하 언론사를 사칭했다. 컨퍼런스 자체에는 입장이 어렵지 않았으나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가니 관리인이 막아섰다.
"그, 프레스 석 초대 명단에 없으시면 기자 분은 입장이 곤란합니다만."
"주간일월 소속 명찰 안 보여요? 이번 컨퍼런스에 공들인다고 이렇게 좋은 카메라까지 특별히 들고온 건데 사진 제대로 못 찍으면 그쪽이 책임지실 거에요?"
"책임이요? 아니……."
"아마 저희보다 크고 좋은 카메라 들고 온 언론사 없을걸요? 저희도 장로님 명받고 특별히 준비하느라 조금 늦은 거예요. 시간 없으니까 얼른 통과시켜줘요."
입구 경호원은 상사와 몇 차례 통신을 주고받더니 마지못한 듯 제갈성혜 일행을 통과시켜주었다.
"들어오시랍니다."
"고마워요."
제갈성혜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태연한 얼굴로 걸어 들어갔다.
경호원을 향해 승리의 눈웃음을 치며 뒤를 슬쩍 보았다. 거지들의 위치와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선팅을 짙게 한 차가 줄줄이 광장 쪽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이런 미친."
"예? 그, 그래도 통과시켜 드렸는데 욕까지 하시는 건 좀."
"아. 그쪽 보고 한 거 아니에요. 실례했어요. 들어갈게요."
제갈성혜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컨벤션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국제 무림 평화 컨퍼런스가 열리는 곳은 대규모 교도까지 참석할 수 있는 거대 오디토리엄이었다.
오디토리엄까지 걸으며 제갈성혜는 방금 본 것을 떠올렸다.
'대체 무슨 일을 벌어지는 거지? 전쟁이라도 하려는 건가? 도심에서?'
줄줄이 지나가던 선팅 차량. 기억에 있었다. 문양은 없었으나 확신이 들었다.
물론 저자들은 사천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 같았다.
선팅 짙게 된 회색 12인승 승합차. 차체에 흠집 하나 없는 깔끔함. 일정한 속도와 간격.
그렇게 특이할 것은 없었지만 누구도 그들을 따라하지 않았다.
그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경비업체의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철두철미한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