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49화 (349/415)

349화. 이상하다(2)

* * *

"용용아."

하벨은 바로 칼리우스를 불렀다.

"응."

"아무래도 네가 에르티안 왕국으로 온 이유가 류아 때문인가 봐."

"류아 때문이라고?"

"그래. 애초에 너를 용의 나라라 불리는 그곳으로 데려간 게 류아야. 그렇다는 건 너를 에르티안 왕국으로 데려간 것 역시 류아라는 거지."

[그럼, 용용이가 아주 오랫동안 알이었다는 거잖아? 류아가 이곳이 레놀드 왕국이 되기 전에 알을 들고 갔다고 태련이 말했으니까. 엄청 답답했겠다.]

아라가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눈에 힘을 주었다.

"맞아, 아라야. 알인 상태에서 용이 어떻게 깨어나는지 몰라도 용용이 너는 이 나라가 레놀드 왕국이 되기 전부터 존재했어."

"내, 내가?"

칼리우스가 놀라면서도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난 걸까. 설마 나이가 많아서 좋아하는 걸까.

무엇이 됐든, 칼리우스가 늦게 깨어난 건 분명했다. 그 영향으로 불안정해지지 않았나 싶었다.

'용용이의 미래를 알고 있었던 류아라면 계속 지켜봤겠지.'

그러던 중에 여전히 안전지대라 생각한 레놀드 왕국에 어떤 문제가 터졌거나, 용을 찾던 대신들이 은밀히 숨겨뒀던 칼리우스를 찾아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시간이 흘러 이곳은 레놀드 왕국이 되었고, 류아는 알을 들고 도망쳤어. 레놀드 입장에서는 용의 알이 사라져서 당황했겠지?"

"응. 엄청 당황했을 거야."

칼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용이 네가 이렇게 성장하기 전까지 레놀드 왕국의 왕은 도멘을 시켜 널 계속 찾고 있었어."

[도멘이라면 카샬의 스승님 맞지? 이 몸은 기억하고 있어.]

"카샬의 스승님이 맞아. 도멘이 카샬한테 용을 찾으라고 시켰거든. 그게 아마……."

하벨은 점점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못했다.

"레놀드 내부에 터진 어떤 문제랑 관련이 있는 모양인데. 뭐가 됐든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겠어."

"뭘 알겠다는 거야? 나는 하나도 모르겠는데?"

동그랗게 뜬 칼리우스는 인상을 잠깐 찌푸리다 눈을 꼬옥 감으며 열심히 생각해보았다.

"에른스트는 지금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회귀 전, 이 세상을 실망한 카르밀의 주도로 칼리우스가 세상을 멸망으로 이끄는 장본인이 되었다.

적에서 아군이 된 그 상황만 놓고 본다면 아마 이건 에른스트에게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행운이자 기회가 된 게 아닐까. 그래서 건드리지 않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칼리우스가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고, 에른스트에게 더 까다로운 존재로 성장했다.

만약에 에른스트가 용이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나왔을까.

에르티안 왕국의 마법사 협회를 지배했던 시렌.

놈이 에른스트에게 알리지 않은 비밀이 바로 칼리우스였다.

"내가 죽었다고 알고 있다고? 왜?"

칼리우스는 그 사실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마도 에른스트는 용이 어떻게 해야 태어나는지 알았을 거야. 가령, 이곳을 떠나면 태어날 수 없는 조건이 붙지 않았을까?"

"…어?"

칼리우스는 하벨의 말에 놀라다 머릿속에 들려오는 카르밀의 말에 숨을 잠깐 참았다.

'도련님은 진짜 대단해.'

하벨을 바라보는 칼리우스의 눈에 존경이 어렸다.

"도련님 말이 맞아. 내가 태어난 건 기적이었대. 어쩌면 옮겨진 곳이 에르티안 왕국이라서 태어날 수 있었다고 그래. 거긴 티에라 가문 덕에 헤스트리아 만큼이나 정령들이 많으니까."

저 말을 들은 하벨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웠다.

정령들이 많다는 건 용이 필요로 하는 순수한 마나가 많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게 칼리우스를 살렸을지도 몰랐다.

그럼 대체 왜 에른스트가 그렇게 용을 없애려고 했겠는가.

마법이 두려웠을까.

'아니.'

그럼, 무엇이 두려웠겠는가.

답은 생각보다 뻔했다.

'용이 가진 권능. 그게 무서웠겠지.'

에른스트 자신마저 위협할 만큼 엄청난 권능을 가진 게 틀림없었다.

"용용아. 아라야."

하벨이 입을 열자 칼리우스와 아라가 동시에 하벨을 바라보았다.

"세상의 수호자인 용용이 너와 정령왕인 아라. 너희가 가진 권능이 혹시 뭔지 알고 있어?"

자신에게도 물을 부리는 권능 이외에도 다른 힘이 있었다.

그건 아마도 두 평행 세계를 유지할 힘과 관련된 게 아니었을까.

자신에게도 있는 그 힘이 아라와 칼리우스에게 없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류아 말에 따르자면 신성 국가 시엘느에 있는 신관들이 다 죽었다고 그랬지?'

―제 기억에 마지막으로 큰 사건이라고 한다면, 신성 국가 시엘느. 그곳에 있던 신관들이 다 죽어버린 사건이 있습니다.

[이 몸은… 으음, 모르겠는데?]

"나도 몰라. …어어, 잠깐만."

아라와 칼리우스가 비슷한 반응을 보였지만, 칼리우스는 다급히 말을 바꿨다.

카르밀의 말을 듣는지 고개가 살짝 삐딱해 있었다.

"도련님이 용에게 권한이 있던 걸 어떻게 알았냐면서 놀라는데?"

"뭘 놀라, 카르밀? 나는 용왕이야. 지금까지 보고도 이런 반응이라니. 너는 참, 보는 눈이 좁네. 어떻게 수장 자리를 차지했는지 신기하단 말이야."

하벨은 카르밀의 반응이 참 우습다 싶었다.

"어쨌든 그 권한이라는 게 뭐야, 카르밀?"

"잊혔겠지만, 심판을 할 수 있대."

[…응? 심판을 해? 어떻게?]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하벨은 짐작 가는 바가 있기에 다시 물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봐, 카르밀. 나 지금 시간 없어."

"용들 사이에 토론해서 안건을 들고 온대. 그 안건을 각 종족의 대표에게 서명을 받으면 마법 말고 세계의 수호자로서 힘을 낼 수 있다고 그래."

칼리우스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말을 마저 이었다.

"이때, 으음. 수호자로서의 힘을 더 발휘하려면 더 많은 조건이 필요하대. 정령왕의 서명과 열쇠의 수호자가 가진 서명이 있으면 된다고 그러네?"

"분명히 단순한 서명이 아니겠네? 뭐가 더 필요할 거야. 그게 뭔데?"

하벨은 눈가를 좁히며 카르밀의 말을 기다렸다.

"…음, 그건 모르겠다고 그래. 해본 적이 없대."

아쉽게도 칼리우스의 대답은 하벨이 바랐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니 어쩌겠는가.

"어쨌든 확실한 건 두 개야."

하벨은 새어 나오는 입김과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맞으며 마저 입을 열었다.

"에른스트는 어떻게든 용의 권능이 발휘되는 걸 막으려고 했어. 그래서 용용이 널 없애려고 했고, 정령왕을 묶었고, 세상을 위협할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어."

각 종족의 대표라고 해봤자, 이 세계에 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딱 두 개밖에 없었다.

육지에 사는 인간과 바다에 사는 인어족.

이전과 다르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의 안건에 동의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용이 가진 수호자로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도 '더 많은'을 강조하면서 정령왕과 열쇠의 수호자를 끼워 넣는다는 것 자체가 아주 큰 능력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대장, 열쇠의 수호자가 누구야?]

곰곰이 생각하던 아라가 귀를 쫑긋 세웠다.

"열쇠의 수호자는 나야."

하벨이 자신을 가리켰다.

태어날 때부터 지닌 열쇠.

―너는 바다와 물의 지배자인 용왕이자 그것들의 심장이다. 네 존재는 세계를 위한 것이며 세계를 위한 열쇠가 되거라.

자신을 탄생시켰다고 생각하는 신으로부터 그 임무를 부여받지 않았던가.

세계를, 두 평행 세계가 서로 만나지 않게 이를 막는 수호자.

'내가… 영혼을 얻어야 하는 이유가 더 늘어났다.'

지금은 온전하지 않았다.

서명해봤자 될 리가 없었다.

진짜 열쇠의 수호자가 되려면 모든 영혼이 모여야만 했다.

"물론, 이 과정이 신이 되려는 에른스트의 욕심과 맞닿은 방법이 될 수도 있어."

"…시, 신이요?"

잠자코 말을 듣던 태련과 무날이 덩달아 당황했다.

신이라니.

"그래. 놈은 신이 되려고 해. 지금 신을 끌어내려서."

하벨의 코끝이 빨개지고, 볼 역시 붉게 물들어갔지만, 웃음이 났다.

모두가 틀리지 않았다.

류아도, 하벨 티에라도.

하벨은 랜턴을 쥐며 하벨 티에라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자신을 '용의 왕'이라고 말했는지 몰라도 그 오해가, 그 말이 자신을 여기까지 인도했다.

참 웃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러 그렇게 말했던 건가?'

하벨 티에라가 용왕을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하."

하벨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머지는 도멘을 만나 불확실한 부분을 이어나가야 했다.

왜 레놀드 왕국에서 알이 사라져야만 했는지.

하벨은 새하얀 풍경으로 시선을 뒀다.

세상의 수호자인 용은 정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을 낼 수 있다는 걸 지금 확인했지만, 하벨은 칼리우스에게 더는 말하지 않았다.

괜한 부담은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고, 지금은 조금 전부터 꼭 하고 싶은 게 있었으니.

"태련, 무날아."

하벨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불렀다.

진실을 알았지만, 그리움과 반가움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라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많이 참았다.

정말 많이.

달려가 양손으로 그들을 힘껏 안아주었다.

"보고 싶었어."

내린 눈처럼 그들의 몸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지만, 하벨에게는 그 사실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보고 싶었고, 또 보고 싶었고, 이렇게 힘껏 안아줄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주 많이. 정말… 정말 많이."

말로서 이 마음을 다 표현할 수가 없어 하벨은 밀려드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다.

자신에게도 길었고, 저들에게도 길었던 이 시간을 어떤 말로 메워야 할까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워졌다.

"보고 싶었어."

하지만 하벨은 그 말을 또 꺼냈다.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저것뿐이었다.

"…미안해요."

태련은 밀려드는 온기에 참고,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웃으면서 용왕을 반기겠노라, 그렇게 다짐했지만, 지킬 수가 없었다.

"미안… 으흑."

밀려드는 안쓰러움이 깊어서, 그토록 허망하게 떠나버린 용왕의 최후가 슬퍼서, 곁을 지키지도 못한 사실이 미안해서.

"…해요."

서럽게 우는 태련을 토닥이며 무날은 울음을 꾸욱 삼켰다.

지금은 오래 묵었던 말을 조심해서 꺼내보았다.

"용왕님을 지켜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그토록 발버둥 쳤으나, 이곳이 자신들의 한계였다.

"그리고 끝까지 용왕님을 보필하지 못한 저희를 용서하십시오."

"…왜 그래, 무날아?"

하벨은 기쁨 위로 올라오는 따끔함에 무날을 바라보았다.

"저희는 여기까지입니다."

무날은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용왕님께서 그 거대한 폭발에서 저희를 구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에른스트라는 더 큰 산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해도 용왕님을 속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건 속인 게 아니야. 너희는 돌아오려고 했고, 유렌이 너희를 배신했잖아?"

"용왕님. 어떻게 빙의와 회귀를 할 수 있었는지를 들었다면, 저희가… 경멸스러울 겁니다."

무날뿐만 아니라 태련의 상처받은 눈이 하벨에게는 안쓰럽게 다가왔다.

"무날아, 태련아."

하벨은 뒤로 물러서서 그들의 손을 잡았다.

"내가 우리의 왕국인 '화해(花海')를 어떻게 지켰는지 알잖아?"

꽃의 바다란 이름을 띤 그 왕국의 이름을 자신이 지었다.

죽어간 이들이 슬피 울지 말라고, 언제나 아름다운 왕국이 될 거라 약속하며 지었던 이름이었다.

"너희가 과연 나보다 더 경멸스러울까?"

하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흘러간 피가 얼마나 많았고, 지키지 못해 바다에 뿌려준 이들이 얼마나 많았어? 수많은 목숨을 희생해서 지킨 나라였어. 하지만 나는 제대로 지키지 못했어. 이런 사태까지……."

아라가 하벨의 입에 앞발을 올렸다.

[너무해, 대장. 그렇게 말 안 하겠다고 이 몸하고 약속했잖아. 이 몸은 대장이 그런 말을 하면 정말로 슬프다구.]

하벨을 보는 아라의 눈동자가 벌써 구슬퍼 보였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울컥해 저질렀던 실수였기에 하벨은 숨을 내쉬며 일렁거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제야 아라가 앞발을 내렸다.

"…분명 너희는 그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 수많은 대가를 바쳤겠지. …알아. 이해해."

하벨은 진심이었다. 정말로 저들을 이해했다. 모든 걸 다 바쳐서라도 죽은 자를 살리고 싶은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자신도 너무도 절박했기에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를 비난하지 않을 거야."

"…저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토닥거리는 듯한 말에 무날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두가 저희에게 대신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하벨은 슬픔이 넘쳐흘러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무날의 손을 더 꽉 쥐었다.

"그게… 으흑, 대가예요."

태련은 계속 울었다.

"죽지 않는… 저희가 죽는 게 대가였어요."

하벨의 눈이 흔들렸다.

착.

무날이 하벨 앞에서 미끄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별동대, '란'. 용왕님께서 내려주신 마지막 임무인 귀환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란의 대장이었던 저 무날의 책임이며 330명 중, 3명만이 잔존, 327명이 사망했습니다."

눈이 내려왔다.

하벨은 무날이 보고하는 말에 가만히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았다.

물이 우는 것 같았다. 자신의 슬픔에 같이 공명하는 기분을 느꼈다.

"327명은 용왕님의 부활을 위한 빙의와 회귀에 유렌이 내어준 추가적인 인원을 포함해 모두 자발적으로 희생… 했습니다."

하벨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가 떠졌다.

예상했지만, 자신이 했던 예상보다 더 큰 사실이 몰아닥쳐 왔다.

죽지 않는 자가 죽어버릴 만큼의 대가라면 대체 얼마나 더 큰 대가였단 말인가.

'왜.'

하벨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들도.

유렌도.

죄다 혼란스러웠다.

'대체 왜……?'

하지만 이 보고가 끝이 날 때까지 흐느낄 수 없었기에 참았다.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그저 다시 눈을 뜨며 무날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이후 저와 태련, 류아는 용왕님이 빙의하기까지 여러 작업을 틈의 세계에 얽힌 어인족과 함께 했음을 밝힙니다."

보고를 끝낸 무날은 고개를 숙였다.

눈 위로 눈물이 내려왔다. 뜨거워야 할 눈물은 그저 눈 위를 맴돌다 스르르 사라졌다.

"이후… 갈증이 시작된 저와 태련의 상태로 앞으로 란은……."

"멈춰."

하벨은 무날의 입을 막았다.

"아니야. 아직… 아니야."

"막을 수 없습니다, 용왕님. 저흰 그 폭발에서 이미 죽은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십시오. 그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너라면,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허를 찌르는 하벨이 꺼낸 말에 무날과 태련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용왕을 살린 일 역시 너무도 큰 욕심이지 않은가.

용왕은 자신들에게 살려달라는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죄송해요, 용왕님. 이건 저희의 욕심이었어요. 하지만 용왕님을 살릴 수 있다는데. 이걸 어떻게 거절해요?"

태련의 눈이 흔들렸다.

천천히 커진 눈동자에 애절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이건, 절대로!"

주먹을 꽉 쥐며 가슴에서 솟구치는 말을 꺼내야 했다.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거잖아요! 용왕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데……."

"그럼 나는?"

하벨은 자신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너희가 사라지면 나는……?"

눈을 크게 뜨며 강하게 호소했다.

"그러니까… 살아주세요. 저희는 유렌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뿐이에요."

태련은 이별을 고하는 이유를 꺼내 놓았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결국 죽는 길이 유일했다.

유렌이 용왕을 위해 무엇을 했든지 간에 유렌은 죽어야만 했다.

그게 맞는 거였다.

"유렌을… 반드시 죽이셔야 해요."

이어진 태련의 말에 하벨은 주먹을 꽉 쥐었다.

벌써 손끝이 차가울 만하지만, 아라 덕에 아직 몸이 따뜻했다.

"…모순적이야."

하벨은 중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유렌이 자신을 죽였으며 자신을 살렸다.

유렌을 죽여야 하는데, 유렌을 죽으면 저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벨은 눈물을 고이 담으며 저들을 바라보았다.

숨이 섞인 말을 조심스레 꺼내보았다.

"나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