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이상하다
* * *
스르르 허공이 친 물결이 양쪽에서 커튼을 잡아당긴 것처럼 움직이더니 안에서 거센 바람이 몰려왔다.
[떽. 바람아 안 돼.]
아라의 말과 함께 바람이 빨리 가라앉았다.
하벨은 안쪽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보이는 곳과 다른 장소가 드러났다.
어딘가 단절된 느낌이 몰려왔지만, 불쾌함은 없었고, 그저 산지처럼 눈이 펑펑 내렸다.
"……?"
하벨의 눈이 살짝 커졌고, 아라와 칼리우스가 새하얀 풍경에 놀라다 말고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대장, 가면!]
"가면 써야 해! 비가 오면 써야 하는 가면 말이야. 그거 안 쓰면……."
"괜찮아. 이 눈은 평범한 눈이야."
평범한 눈.
하벨 자신이 말하기는 했지만, 참 낯선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평범한 눈이라는 건 오염된 물이 뒤섞인, 닿기만 해도 푸른 돌을 일으키는 물일 테니까.
[그러니까 위험하잖아!]
아라가 대체 무슨 말을 하냐며 하벨을 닦달했다.
"이건 오염되지 않은 눈이야."
하벨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원래는 당연했던, 원래라면 이게 기준이었어야 했던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그게 정말 가능해? 아니.]
킁킁.
아라가 코를 움직이다가 앞발을 위로 올렸다.
[우와아! 진짜다!]
"헛. 정말이네?"
킁킁.
덩달아 냄새를 맡던 칼리우스가 환하게 웃다가 움찔거렸다.
저 안쪽에서 익숙한 냄새가 몰려왔다. 기억 속에서 어렴풋이 존재했던 냄새였기에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떨려왔다.
"여기… 에서 내 냄새가 나."
칼리우스는 다시 이빨이 보일 정도로 크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자신이 있던 곳인 게 틀림없었다.
[우와아. 우와아아!]
아라가 이미 안으로 들어가서는 눈을 향해 뛰어들었다.
포옥.
눈 위를 파고들자 아라가 눈인지, 눈이 아라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아라야! 눈은 너랑 닮았어!"
칼리우스 역시 덩달아 달리다가 아라 옆에 털썩 누웠다.
꺄르르.
칼리우스와 아라가 서로를 보며 키득거렸다.
뒤따라 안으로 들어온 하벨은 그들보다 바라보며 더 나아갔다.
뽀드득.
걸을 때마다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하벨의 시선이 천천히 왼쪽으로 향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보이는 커다란 나무 뒤에 누군가 있었다.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와 눈가를 시큰거리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이곳에 누군가 올 걸 예상이라도 하듯 남녀가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하벨은 눈이 덮인 세상 속을 달렸다.
가다가 넘어지긴 했지만, 아프진 않았다.
그저 머리가 조금 울리며 어지러울 뿐이었다.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내렸던 오염된 눈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었으니.
"…하."
하벨은 숨을 몰아쉬어서는 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그림자가 지는 걸 확인했다.
두 그림자, 그리고 내민 두 손이 보이자 하벨은 웃음을 터트렸다.
"무날아."
하벨이 왼쪽에 내민 손을 잡았다.
"…예, 용왕님."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태련아."
하벨은 오른쪽에 내민 손을 잡았다.
"아니, 왜 이렇게 다리에 힘이 없어요?"
속상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벨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내 몸이 아니라서 그래. 알고 있지?"
"되게 작아지셨어요."
태련은 하벨을 일으켜 세운 뒤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우와!"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만족했다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제가 용왕님의 머리를 쓰다듬었어요. 이전에는 손이 닿지 않았는데요."
"태련. 그건 실례다."
무날이 옆에서 헛기침을 내뱉으며 태련을 말렸다.
"이 정도는 괜찮죠? 반가워서 그랬어요. 너무… 오랜만이잖아요?"
사실 오랜만이라는 말로도 채워지지 못한 시간이 있었다.
태련은 눈 밑까지 오르는 감정을 삼키고, 하벨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몸은 달라졌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정말로 그리워서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어요. 잘못한 건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네요. 아. 꼭, 언젠가 꼭 용왕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요. 해도 될까요?"
"갑자기?"
"네, 갑자기요."
하벨은 얼떨떨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태련은 그때와 비슷하지만, 어딘가 무거워 보이는 미소로 하벨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주었다.
"계속 잘하고 있어요. 용왕님이라면 지금도, 나중에도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태련아."
하벨은 갑자기 목이 바짝 말랐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시작부터 마지막 작별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았다.
"용왕님. 우선 들어주세요."
태련은 흔들리는 하벨의 표정을 보며 단호하리만큼 중심을 잡아갔다.
눈앞에 죽었다가 다시 돌아온 용왕이 있었다.
당장 눈물을 흘리며 용왕을 꽈악 안고 싶었지만, 용왕과 함께 온 이들이 누구인지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차차 듣고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럴 수 없었다.
"류아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줬을 거예요."
태련의 표정이 와락 구겨지자 무날이 심호흡하며 대신 말문을 열었다.
"혹, 저희가 유렌에게 얽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들었어."
하벨은 당장이라도 그들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저들 역시 얼마나 참고 있는지 보였으니까.
"저희는, 이제 참을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참을 수 없다니?"
하벨은 눈을 크게 떴다.
"저희에게 영혼은 없고, 유렌에게 얽혀 있는 상태입니다. 용왕님을 살해한……."
"그 썩을 자식들이 에른스트에게 받은 무기 덕에 영혼이 없어도 갈증을 느끼지 않고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용왕님을 노리고 있어요!"
태련은 참다못해 언성을 높이며 무날의 말을 가로챘다.
증오가 너무도 노골적으로 드러났기에 하벨은 덩달아 일렁거리던 감정을 눌렀다.
"…해연을 만났어."
"해, 해연을 만났단 말씀입니까? 하지만 해연은 지금……."
무날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해연이 지금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에 올릴 수 있을까.
"해연은 괜찮아."
칼리우스가 말문을 열었다.
유독 날카로운 저 눈동자에 무날은 시선을 잠깐 길게 유지했다.
"실례지만, 그게 무슨 말씀인지 여쭙겠습니다."
무날은 칼리우스를 향해 정중하게 부탁했다.
"너희도 해연처럼 마나의 흐름이 달라져 있어. 몸을 이상하게 만들어버릴 정도는 아니더라도 마나가 고여있어."
"…너희."
하벨은 이어진 칼리우스의 말에 당장 눈꼬리를 올렸다.
"설마, 나한테 마지막 작별을 고하려고 한 거야?"
"예."
무날이 짧게 대답했다.
하벨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어쩐지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왜 이렇게 무언가를 바삐 시작하는지.
"왜에……?"
하벨은 아려오는 가슴에 목소리부터가 먹먹하게 튀어나왔다.
[요… 용용이가 고칠 수 있을 거야, 대장.]
아라가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하벨을 진정시켜보고자 애를 썼지만, 아라는 당혹함을 숨기지 못했다.
마지막이라니.
자신도 이렇게나 놀랐는데 하벨은 오죽할까.
"저희는 이제 갈증이 시작됐으니까요. 해연을 만났다면 이미 듣지 않았습니까?"
공손히 꺼내는 무날의 말에 하벨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평행한 세계가 합쳐져 틈의 세계라는 부작용이 만들어졌다.
한 세계에 하나의 존재와 하나의 영혼만 허락하기에 세계가 합쳐지면서 같은 존재인 두 사람 중 한 사람에게만 영혼이 깃들었고, 영혼을 빼앗긴 이들이 모조리 틈의 세계에 얽매이고 말았다.
영혼이 부족한 그들에게 남을 죽이고 영혼을 얻으라는 목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이 목소리를 떨쳐내지 못한 그들이 바로 틈의 세계에서 나온 '괴물'이라 불리는 이들의 모습이었다.
이건 틈의 세계에, 유렌에게 얽혀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 해당하는 일이었을 텐데.
"하… 지만, 류아는 괜찮았어."
하벨은 그 당연한 사실을 간과했다는 게 부끄러워져 말끝을 흐렸다.
"류아는 주술사잖아요. 허리춤에 달린 그 많은 부적은… 모두 그 갈증을 참기 위해서였어요."
태련이 쓰디쓴 미소를 내보였다.
"주술… 사?"
칼리우스는 갑자기 드는 호기심에 말문을 열었다.
사실 하벨에게 묻고 싶은 게 여러 개가 있었다.
주술사도 그중 하나였으며 저번에 류아가 말했던 말도 마음에 걸려왔다.
―용이시여. 이번에는 당신이 용왕님 곁에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하벨 티에라가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왔으니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법이 마나를 매개체로 한다면 주술은 피를 매개체로 삼아. 마법과 비슷할지도 몰라. 다만, 부적이라고 하는 작은 종이에 피를 대가로 바쳐 여러 가지 힘을 담아내어 사용하곤 해."
하벨의 설명에 아라가 눈을 번뜩 떴다.
[아! 이 몸은 기억이 났어. 류아한테 무슨 종이가 엄청 많았어!]
슬쩍 만져보고 싶었기에 아라는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는 저희도 그 주술의 힘으로 버텼어요. 그런데 한계가 찾아오지 뭐예요. 꽤 많이 버틴 거죠. 류아는, 아니, 저희는 죽지 않지만, 바쳐야 할 대가가 너무도 커졌어요."
태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죽지 않기에 피를 얼마든지 뽑아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 꼴을 어떻게 보겠는가.
"류아의 걸림돌이 될 바에야 차라리 이곳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용왕님의 시신을 지키고 있는 편이 낫습니다."
무날의 목소리에도 묻어나는 분통함에 하벨은 두 사람의 손을 꼬옥 잡았다.
차가웠다.
"류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알아요. 저희는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아서 류아한테 부탁을 했어요.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 소리가 아주 작아지거든요."
태련은 말을 하는 게 힘들었다. 괴로움이 드러나는 하벨의 표정에 마음이 쓰라렸다.
"이 결계가 류아가 만든 거라고?"
"네. 이 결계는 용왕님의 힘과 이곳에 원래 있던 용의 힘을 이용한 거예요."
하벨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태련이 애써 밝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찬찬히 밀려오는 참담함이 눈가에 그려졌다.
"하지만 이곳에 있던 용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칼리우스가 갑자기 손을 힘껏 뻗었다.
"나야!"
옷에는 눈이 가득 묻어 있었고, 머리카락에도 눈이 묻어 있어 검은 머리카락과 비교가 되었다.
히히.
"…푸흡."
너무도 해맑은 모습에 하벨은 갑자기 몰려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용이 아니라 강아지 같았다.
기분이 저기 지하보다 더 깊은 곳에서 한순간 하늘로 올라가자 하벨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배 잡고 웃자 칼리우스와 아라가 당황했다.
[대장 지금 그렇게 웃으면 안 돼. 헤레스한테 또 혼나!]
"맞아. 그렇게 크게 웃으면 큰일 나!"
"…잠시만요."
태련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용왕이 여전히 웃으며 저 해맑은 존재에게 다가가 눈을 털어주는 모습도 몹시 낯설었다.
용왕님이?
어린애 같던 용왕님이 누굴 챙겨줘?
태련은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게 음, 진짜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혹시 용… 이세요?"
"맞아! 나는 용이야. 마지막 남은 용인 칼리우스!"
칼리우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하벨이 이를 기특하게 바라보자 태련은 웃음이 터져버렸다.
"와. 용왕님께서. 우리 막내가."
"태련아……?"
무날이 당황해서는 태련의 입을 막았다.
"읍읍!"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그러니까 이분이… 요, 용이라고요?"
무날이 뒤늦게 당황했다. 용이라니.
그때, 그 알이 진짜 용이 맞았다는 말이 아니겠나.
"여기에 있던 용의 알을 누가 노렸는지, 무슨 일이 터졌는지 말해 봐봐."
하벨은 무날이 무언가를 알자 웃음기를 쏙 빼며 그를 재촉했다.
"그게 음……."
"짧게 말해 봐봐. 다른 말을 더 나눠야 하니까."
"레놀드 왕국으로 용왕님의 시신을 옮기던 차에 갈증이 시작됐습니다. 시신을……."
"알아. 너희가 내 육체를 만지면 대신들이 알아챈다며?"
유렌이 에른스트를 속이고자, 혹은 에른스트의 명령으로 틈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설정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쪽도 다 우스웠다.
무날은 멈췄던 말을 이어나갔다.
"예. 그래서 시신을 옮기는 일은 굉장히 더뎠습니다. 그런 와중에 갈증이 시작되었으니 더는 육체를 옮길 수가 없어 방법을 찾던 차에 틈의 세계가 열렸습니다. 저희가 아니라 용을 찾고 있더군요."
"…나를?"
칼리우스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예. 그때, 틈의 세계가 꽤 많이 열린 탓에 결계가 부서졌다고 생각합니다."
'카르밀이 말하던 그대로다.'
하벨은 한쪽 눈썹을 올렸고, 칼리우스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쩌다 얽혔지만, 저희가 선택해야 하는 건 하나였습니다."
무날은 목소리를 더 내리깔며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용을 구해야 했습니다."
"혹시 이미 알았던 사실이었어?"
하벨의 물음에는 이미 회귀라는 사실이 전제로 깔려있었다.
과거에도 이런 행동을 했냐는 물음에 태련이 무날의 손을 내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몰랐어요.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어요. 애초에 이 시신을 옮길 자리를 알려준 건 류아였고, 만약에 알았다면 미리 알려줬을 거예요. 그러니까 첫 번째와 그때 상황이 다르지 않았을까 싶어요."
'일단, 이전 세계와 지금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다는 건가?'
류아의 기억이 완전하지 않다는 걸 이미 들었기에 하벨은 더는 파고들지 않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비록 똑같았다고 해도 현재가 달라진 건 확실했고, 자신은 지금 칼리우스가 무사히 성장하도록 용들이 만든 결계 안에 있었으니까.
"혹시 구했어?"
"예. 구했습니다. 류아가 알을 들고 레놀드 왕국… 아니, 레놀드 왕국이라는 이름이 되기 전 왕국으로 향했습니다."
무날의 대답에 하벨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너무도 당연한 행동처럼 느껴졌다.
"왜 그 왕국으로 향한 거지?"
"그거야 레놀드 왕국이 되기 전에 이곳은 용의 나라였으니까요."
카르밀이 꺼냈던 가정이 다 맞아떨어지자 하벨은 레놀드 왕국이 달리 보이며 에른스트가 왜 용들을 없애야만 했는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음, 그 이후는 모르겠어요. 나라 이름이 달라졌다는 건 류아에게 들었습니다. 그사이, 많은 일이 겹친 모양에요. 나라를 둘러싼 결계도 사라졌다고 했어요."
"어쨌든, 레놀드 왕국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네?"
하벨이 내뱉은 숨을 따라 새하얀 김이 나왔다.
"그런데 이 일에 왜 이렇게 관심을 가져요? 용과 함께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용은 용왕님 옆에 있잖아요. 다 해결된 거 아니에요?"
태련은 품었던 의문을 터트렸다.
"아주 중요해서."
하벨은 눈을 똘망똘망하게 뜬 칼리우스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럼, 아주 중요했다.
덕분에 다른 걸 떠올리게 했으니까.
용이 가진 권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