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34화 (334/415)

334화. 세번째(2)

* * *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 틈의 세계가 나타났다고요?"

라르웬이 질겁했다.

또.

또 기계에 잡히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다니. 자신이 왜 하벨을 따라왔는데.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이럴… 수가. 그래서 지금… 지금 헤스트리아 왕국이 더 망가진 거야.]

라탄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다시 돌아와 본 헤스트리아 왕국은 꼭 전쟁이라도 휩쓴 것 같았다. 사실상 틈의 세계마저 일어나 상황이 더 최악으로 흘렀다니.

자신들의 아름다운 세상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다는 걸 드디어 느꼈다.

"잠깐만 이리 오겠어요?"

넬시아는 틈의 세계를 언급했던 남자를 자신들 쪽으로 불렀다.

남자는 쭈뼛쭈뼛하며 넬시아 쪽으로 걸어와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틈의 세계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제가 미친 게 아닙니다. 그자를 본 사람들이 다, 전부 다 죽었는데……."

남자는 말을 하다 말고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는 사, 살았어요! 시체 속에 조용히 숨죽여 있었어요!"

남자의 눈이 커졌다.

그때 맡았던 피 냄새가 코끝에서 다시금 번지는 것만 같았다.

"다, 다시 오겠다고 그랬어요. 오미너스가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고는 데려가겠다고 그랬습니다. 오미너스가 무, 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놈이 그랬어요!"

제발 믿어달라는 표정을 지으며 남자는 틈의 세계가 닫히고 눈이 내린 뒤 푸른 조각상이 된 이들을 떠올렸다.

악마 때문에 시체조차 산산조각 부서지고 말았지만, 다 기억했다.

"저는…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헤레스가 입술을 세게 깨물며 말을 토했다.

오미너스라는 말은 이제 막 알려졌을 뿐, 왕족과 귀족도 아닌 저들이 알기에는 무척이나 낯선 말이 아닌가.

"누님, 이거……."

"…젠장."

넬시아가 참다못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 남자가 말한 '사람이 나왔다'라는 말은 곧 하벨을 죽인 대신들이며 놈들이 오미너스마저 주도했다는 게 아닌가.

에른스트가.

그 새끼가 하벨의 모든 걸 망가트리고 있었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지만, 넬시아는 감정을 눌렀다.

'이걸 전해야 한다.'

하벨이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정령들이 없는 지금 루룸이나 톰톰을 내보내는 건 위험했다.

"네가 갈 수 있겠어?"

넬시아는 라탄을 바라보았다.

[나는… 나는…….]

라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거 안 되겠는데? 그냥 통과시켜. 솔직히 지금도 제정신이라기에는 어렵잖아?]

톰톰이 라탄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넬시아는 여하를 바라보았다.

"무얼 시키려는 건지 몰라도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소."

여하의 시선이 엘라힘과 헤레스에게 향했다.

―여하.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모두를 보호해줘. 내가 너를 이쪽에 붙인 이유이기도 해.

자신이 가진 재생 능력을 알기 때문에 하벨이 저런 말을 꺼냈으리라 생각했다.

다소 냉정할 수 있으나, 자신이 보기에 확실한 결단이었다.

'과거에 오미너스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오미너스는 닿는 순간, 큰일이 날 테니.'

여하는 자신의 손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건 제가 하겠습니다."

헤레스가 손을 살짝 들었다.

"그분이라면 알아챌 겁니다."

헤레스는 '칼리우스'라는 말을 생략했다. 여기서 이름이 불려봤자 뭐하겠는가.

"고마워, 헤레스."

넬시아가 헤레스에게 고마움을 표현한 뒤에 주변으로 시선을 뒀다.

저들 대부분이 정령사였기에 티에라 가문이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든 싫든 앞으로 티에라 가문과 어떤 관계가 유지되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넬시아는 고민이 되었다.

'왕을… 찾아야 해.'

넬시아는 어딘가 살아 있을 헤스트리아 왕국의 왕을 떠올렸다.

무너졌지만, 헤스트리아라는 이름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이를 결정할 수 있는 왕이 필요했다.

"…잠깐만 기다려보시오."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여하가 입을 열었다.

"무언가 오고 있소."

―오미너스야.

―맞아. 오미너스가 정령들을 발견했나 봐. 이쪽으로 오고 있어.

―아까 오미너스가 용왕님을 공격했어. 그래서 화가 아주 많이 난 모양이야.

―그건 당연하지. 왜 용왕님을 건드는 거야? 용왕님이 용맹한 힘으로, 어? 딱 처리했다고!

물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하는 자신을 주목하는 시선을 보더니 말문을 마저 열었다.

"오미너스가 오고 있소. 준비해야 하겠소."

* * *

[…발소리가 들려.]

정령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낯선 발소리에 서로를 안으며 불안함을 드러냈다.

[악마가 온 거야!]

[그 악마가… 여길 어떻게 온 거야?]

[여기가 유일하게 안전한 장소였는데. 그런데 여길 와버리면…….]

기기기긱.

정령들은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문만 바라본 채 숨을 죽였다.

철컥.

손잡이가 완전히 돌아가고.

스르르.

문이 열리자 정령들은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듣고 말았다.

쿵.

쿵.

악마에게 잡아먹혔던 정령들의 마지막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안녕."

하지만 악마가 아니었다.

장난스러운 목소리, 아니, 어딘가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아라가 손을 흔들자, 정령들은 멍하니 아라를 바라보았다.

[다들, 진짜 여기 있었네?]

아라가 배시시 웃자 정령들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왜인지 몰라도 긴장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긴말하지 않을게. 나는 헤스트리아 왕국이 아니라, 너희를 구하러 왔어."

하벨은 못부터 박아놓았다.

헤스트리아 왕국과 정령이 별개라는 말로 시작하며 하나씩 입을 놀렸다.

"밖에 너희가 악마라고 부리는 것들은 '오미너스'라는 이름을 가진 괴물이지. 나는 저걸 없애러 왔고, 이쪽은 아라, 너희의 왕이야."

물 흐르듯 흘러간 소개에 칼리우스가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너무 빠른 소개가 아닌가.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아. 너희는 이제 헤스트리아 왕국을 벗어나 전혀 다른 삶을 살 테니까."

하벨은 천천히 웃었다.

[너. …너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정령사 주제에 지금 누구 앞에서 말을…….]

[쉬잇.]

아라가 저들을 향해 말하자 정령들은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저 작은 정령의 말이 꺼낸 말의 무게가 다르게 다가왔기에 입이 자연스럽게 서로 맞물릴 수밖에 없었다.

[다들 대장이 하는 말을 얌전히 듣는 거야.]

하벨이 라탄에게 언급했던 것처럼, 카샬이 헤스트리아의 정령들이 이렇다고 말한 것처럼 아라는 단호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정령의 관계에 있어 위와 아래가 나누어져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정령사 주제라. 말 잘했어."

하지만 하벨은 오히려 정령들을 칭찬했다. 아라가 하벨을 잠깐 멍하게 바라보았다.

[…어어? 대자앙?]

"너희가 이 나라의 주인이라며?"

하벨이 던진 말에 정령들이 세차게 반응했다.

정령사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눈빛부터가 바뀌었으니.

[당연한 거 아니야? 이 나라는 정령들을 위한 나라야!]

[이걸 모른다는 건… 설마 외부에서 온 거야?]

[이럴 수가. 벽이… 벽이 무너져버린 거야?]

오미너스를 걱정하던 정령들이 이제는 밖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 이미 헤스트리아 왕국은 무너졌으니까. 음, 쉽게 말해서 너희의 동화 속 세계는 이제 끝이 났다는 거야."

하벨이 사실을 날카롭게 건드리자 아라가 힐끔 하벨을 보았다.

밖에 있는 정령들을 대할 때와 너무도 달랐다.

저런 단호함이 필요한 건가.

[무슨 소리야? 헤스트리아 왕국은 다시 일어날 수 있어.]

[맞아. 우리가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어.]

"아니. 그럴 시간이 없을 거야. 너희는 날 따라와야 하니까."

하벨은 정령들의 말을 부정했고, 카샬은 솟구치는 웃음을 참느라 너무 힘들었다.

순진한 건지, 순수한 건지, 멍청한 건지.

어느 쪽이든 카샬은 하벨의 다음 말이 기대됐다.

"오미너스가 헤스트리아 왕국에 퍼진 건 너희 탓이잖아? 이렇게 꽁지 빠지게 도망간 꼴을 보아하니 수습도 할 수 없는 상태고. 그렇다면 이 사태를 싹 정리해줄 나한테 뭔가를 주는 게 당연할 텐데."

하벨은 정령들을 가리켰다.

"마침 너희가 필요하니 날 따라오기만 하면 돼. 간단하지? 이거 완전 거저야. 엄청난 할인이라고."

[너.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게 우리 탓이라니? 웃기지 마!]

정령들은 어느새 날을 세우며 하벨을 보았다.

[자연한테 미움을 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알려줘야 그 입을 다물 거야?]

[자연이 우리를 사랑하는 거…….]

[안 돼! 그건 이 몸이 허락할 수 없어.]

아라가 눈에 힘을 주었다.

누구든 하벨한테 손을 대는 건 자신이 허락할 수 없었다.

[너희는 대장의 손가락 하나도 건들 수 없다구.]

단호한 아라의 말을 이어 정령들 머리 위로 꽃이 피어났다가 사라졌다.

정령들은 놀란 눈으로 아라를 보았다.

조금 전에 하벨이 꺼낸, 정령왕이라는 말을 개소리라고 취급하며 흘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사실이었다.

정말이었다.

[와… 왕이시여.]

진짜 왕이 이곳에 오고 말았다.

저 작은 정령이 진짜 왕이었다니. 정령들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자신들이 왕도 알아보지 못하고, 거들먹거린 게 아니겠나.

짝짝.

"훌륭하십니다, 아라 님."

카샬은 손뼉을 마주쳤다.

"아라 님을 알아보지 못한 저들에게 내리는 훌륭한 명령입니다."

이곳에서 왕으로서 지내왔던 정령들이 쩔쩔매는 꼴이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카샬은 더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정령들은 쏟아지는 비웃음에 화가 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왕을 알아보지 못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자. 그럼 계속 말해볼까? 너희를 데려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 있어야지 안심하겠지?"

하벨이 말문을 열며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듬직한 아라가 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나는 양심이 있어서 너희가 사람들을 굴린 만큼, 정령사가 아닌 존재를 업신여긴 만큼, 이곳에 감히 왕을 두고도 왕으로 군림한 만큼만 딱 굴려줄게."

하벨은 저들을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다.

정령들의 성격이 각자 다르다고 해도 저들이 가진 오만함은 하늘이 무서운 줄 몰랐다.

누군가는 꺾어줘야만 했고, 그게 어쩌다 보니 자신일 뿐이었다.

"아라야."

[응, 대장.]

감히 왕이 가진 이름을 불렀고, 왕 역시 다정하게 바라보는 저 정령사는 대체 누구인지 정령들은 미칠 듯한 호기심을 느꼈다.

"여기 정령들을 기억할 수 있겠어?"

[기다려봐, 대장.]

아라가 혀를 날름거렸다.

[오오. 이 몸 눈에 구분이 돼.]

방금 아라 자신이 저 정령들에게 내렸던 명령이 보였다.

인간들을 해치지 말라는 이안의 명령 위로 하벨에게 손을 댈 수 없다는 명령이 떠 있었다.

"그럼 저들은 아라 네 손에서 벗어날 수 없겠네?"

[응응. 이 몸은 다 구분할 수 있어. 이전에 내린 명령이 뭔지도 다 알아.]

하벨은 싱긋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비켜줄래? 내가 좀 급하거든."

영혼이 공명하는 게 계속 느껴졌기에 초조함이 저절로 생기던 참이었다.

슬쩍 뒤를 돌아본 정령은 다급히 외쳤다.

[이, 이, 이게 없으면, 우린 죽어!]

[제발 이것만은 빼앗지 말아줘.]

정령들이 울상을 지으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조금 전에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 하지만 이게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야. 제발, 부탁이야……!]

"미안하지만, 그 힘의 주인은 나야. 그건 아무한테도 줄 수 없어."

하벨은 딱 잘라 거절하자, 정령들은 아라한테 호소했다.

[왕이시여. 제발 도와주세요. 이게 없으면 악마가 저희를 먹으러 찾아옵니다.]

[얼마나 먹혔는지 몰라요. 왕이시여, 저희를 살려주세요.]

[부디, 저 인간을 설득해주세요!]

여기저기 울리는 소리에 아라는 당장이라도 귀를 잡고 싶었지만, 참아야만 했다.

자신은 저들의 왕이었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막으러 왔어.]

아라는 오히려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 몸도 힘낼 거니까, 대장이 힘을 되찾는 걸 도와줘.]

[그 악마를… 정말로 무찌르러 왔단 말입니까?]

오미너스를 무찌르러 왔다는 소리에 정령들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라를 바라보았다.

그건 자신들에 있어 종말을 가져온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응. 그러니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이 몸이 누구인지 함부로 말하면 안 돼. 다 비밀이야.]

입단속을 시켜야 한다는 사실은 하벨 옆에서 정말 많이 봤기에 아라는 척척 해냈다.

쉿.

아라가 앞발을 입가에 올렸다.

"기특한데?"

하벨이 아라를 쓰다듬어주자 아라는 꼬리를 흔들며 으쓱함을 드러냈다.

[이 몸은 엄청 자랐어. 어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구.]

이것도 칭찬해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됐지만, 하벨은 앞으로 걸어나가며 칼리우스를 재촉했다.

"용용아. 준비됐어?"

"응! 나는 얼마든지 준비됐어."

"그럼 저들이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해줄래?"

하벨은 자신이 무어라 말을 하든 저 정령들에게 닿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됐어."

주변에 무언가 감싸진 기분과 함께 칼리우스의 말이 들렸다.

"아라야. 정령들이 날 보지 못하게 뒤를 돌아달라고 말해줄래?"

[응!]

하벨은 힘찬 아라의 말을 들으며 그대로 나아갔고, 정령들이 물러났다.

정령들로 가득 찼던 그곳 중앙에 천으로 똘똘 감긴 무언가가 유리에 둘러싸여 보관되어 있었다.

형태로 봤을 때 몸통이라 생각했다.

"…하."

하벨은 씁쓸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련님. 일단 심호흡부터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카샬이 하벨에게 조심스레 제안했고, 하벨은 괜찮다며 손짓했다.

"세 번째야. 괜찮아."

이번에는 울지 않을 자신이 있기에 하벨은 장난스레 대답했다.

진짜 울음을 터트릴지 아닐지는 몰라도 여기서 울면 부끄러울 테지.

"용용아."

"응."

"내가 이걸 흡수하면 이전처럼 틈의 세계가 열릴 거야. 이전에 봤지?"

"봤어. 바로 튀어나왔어."

"이번에도 류아가 내 육체를 가지러 올 거야. 그런데 물어볼 말이 많아서 말을 좀 나누고 싶어. 잠깐 버텨줄 수 있어, 용용아?"

"버틸 수 있어. 여기에는 순수한 마나가 많아서 더 오래 버틸 수 있으니까, 나는 걱정하지 마."

틈의 세계가 나타나서 마나를 빨아들이긴 했지만, 이곳은 정령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정령들이 있는 곳에 용의 마나가 되는 순수한 마나가 존재했고, 그런 의미로 헤스트리아 왕국은 아주 좋은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이제 시작할게."

하벨은 심호흡을 여러 번 거친 후에야 유리 벽에 손을 올렸다.

이전과 달리 거리가 멂에도 영혼이 반가워하며 벽 너머에서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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