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33화 (333/415)

333화. 세번째

* * *

[어어엇!]

이미 투명한 물속에 들어가 있던 아라가 깜짝 놀라며 밖으로 나왔다.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여기에 물이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던가.

킁킁.

아라가 냄새를 맡더니 하벨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건 대장인데?]

하벨에게 풍기는 냄새와 힘이 가득해서 도리어 모르고 지나가버렸다.

"그래. 아무래도 정령들이 내 힘을 가지고 장난을 한 모양이야."

하벨은 그 이유를 아주 쉽게 눈치챘다.

오미너스를 피하기 위함이 아닌가. 자신의 힘과 오미너스는 상극이었으니.

"응용도 가능한 걸 본다면 이미 전부터 그렇게 사용한 모양이야?"

하벨은 그 사실이 참 우습다 싶으면서도 놀라웠다.

"도련님의 힘을 사용해? 그게 가능해?"

칼리우스가 놀라며 묻자 하벨은 손바닥을 뻗었다.

"불가능할 건 없어. 내 힘과 정령의 힘은 그 줄기가 비슷하니까. 내 힘이 정령들을 경계하지 않았을 테고, 뭐, 좀 까다롭기는 했겠지. 고생은 했을 거야."

스으으윽.

하벨이 손바닥으로 쓸자 물 너머에 모습이 전해졌다.

"그래도 아라나 나처럼 물의 친화력이 높으면 바로 통과가 될 테니 어떻게든 하지 않았을까?"

"도련님. 누군가 있어요."

레디나가 날을 세웠고, 카샬은 검을 빼냈다.

"한, 열댓 명? 실력도 형편없으니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샬이 피식 웃었다.

"왕실에서 싸움이 벌어졌음에도 살아남은 걸 본다면 아마 귀족이나 왕족이겠죠."

왕실에 있을 수 있는 존재는 몇 없었다.

왕족, 귀족, 그리고 기사들과 시종.

제일 먼저 희생당할 이들이 시종이라면 나머지는 누군지 뻔했다.

"아라야. 이리 와봐. 숨바꼭질해야지."

하벨은 망토를 열었다.

아라의 외형은 딱 봐도 티가 났다. 바로 기억하기 쉬울 만큼 귀엽기도 하니 어쩌겠는가.

[응응! 이 몸은 숨바꼭질이 제일 좋아!]

아라가 망토 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이곳은 정령사들이 가득하지 않던가. 정령사들을 피해 모습을 숨기는 게 숨바꼭질이나 똑같았다.

흔들리는 꼬리를 따라 하벨의 망토가 덩달아 움직였다.

다다다.

꽤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기사들이라니. 와아, 신나는데요?"

레디나가 키득거리며 조용히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건물 잔해에서 거의 다 떨어져 나간 갑옷을 입은 자들이 우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저 결계가 흔들리는 걸 봤다네!"

기사들은 핼쑥한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그래서요?"

하벨이 물었다.

"우린 헤스트리아 왕국의 왕실 기사들이네. 당장 그 영광을 바칠 기회를 줄 테니 비키게나!"

기사들 전부 무기를 들고 있었다.

말이야 곱게 들려왔지만, 사실상 협박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상태가 나빠 보이는 놈들도 있고.'

하벨은 기사들 중에 붕대를 적실 만큼 피를 흘리는 이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왕실이 무너졌으니 대체 누가 지휘를 하겠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아직 왕이 살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지.'

여기서 설령 오미너스를 없앤다고 해도 헤스트리아가 지금까지 유지하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지 않을 순 없었다.

"영광이라뇨? 여기서 무슨 영광을 찾겠습니까? 그 꼴로요?"

그래서 하벨은 우스웠다.

"헤스트리아 왕국의 위대한 왕이신……."

"지금 이 상황에서?"

카샬이 기사들의 말을 잘라버리며 비웃음을 가득 담아 하벨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으로 들어가게 해준다면 무너진 이 나라라도 바치려고?"

"무엄하도다! 아직 전하께서 살아계시는데 지금 그게 무슨 망발이더냐!"

"소리치지 마. 검도 내려."

칼리우스가 당장이라도 기사들을 제압할 것처럼 보이자 하벨이 칼리우스의 옷자락을 슬쩍 당겼다.

지금은 힘보다 더 잘 먹히는 게 있지 않은가.

[와, 진짜 개소리네.]

아코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기사들은 정령의 존재에 거의 반사적으로 무기를 내렸다.

"…정령님?"

"정령님께서 어떻게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겁니까?"

기사들은 아코의 등장에 크게 흔들렸다.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라고?]

아코는 씩 웃었다.

그토록 맹렬했던 기사들은 다 시든 꽃처럼 기세가 팍 죽어서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상당히 복잡해 보였지만, 대답은 서로 똑같았다.

"저, 저, 정령님들의 나라입니다."

푸핫.

카샬은 변하지 않은 나라의 모습에 그만 웃음보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보셨습니까?"

카샬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게 헤스트리아 왕국의 진짜 모습입니다. 정령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버러지 같은 새끼들 말입니다."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카샬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증오라는 존재는 아무리 기억과 시간 속에 묻어도 함부로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벨은 카샬의 어깨를 가볍게 짚으며 기사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무사합니까?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간단하게 말해주세요."

[대답 안 해?]

아코가 재촉하자 기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말문을 열었다.

"악마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아뇨. 갑자기는 아닐 텐데요."

하벨이 바로 반박하자 아코가 화난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지금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한 거야? 내가 너희의 감정을 봐야 정신 차릴래?]

카샬의 어깨가 잠깐 떨렸다.

지금 아코가 신이 났다는 게 느껴졌다.

'그럴 만도 하지. 나를 지켜준다고 아코도 얼마나 속앓이를 했을까.'

카샬은 아코가 마음껏 떠들어대는 지금 이 순간이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저희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기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저 누군가… 올 거라 말했고, 정중히 모시라는 명령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 누군가가 온 뒤에 악마가 나왔다, 이거죠?"

이미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기에 하벨은 놀라지 않고 기사들에게 물었다.

"마, 맞습니다."

"그럼 여기서 기다려요."

"여기서 기, 기다리라뇨?"

"당신들은 모른다면서요? 그럼 왕을 만나야죠."

하벨은 방금 셴이 오미너스를 전달해준 누군가와 저들이 말하는 누군가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물어보는 방법뿐이지 않겠는가.

'다 방법이 있지.'

하벨은 아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깐만 부탁해."

[안에 위험한 건 없겠지?]

"물론이야. 약속할게."

하벨이 '약속'을 입에 담자 아코는 카샬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꽃무늬 문양이 왜 이렇게 잘 어울리는지 몰랐다.

"꽃님아. 너는 남아도 괜찮아. 안에 위험한 건 없으니까."

하벨이 카샬을 향해 말하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저놈들이랑 같이 있으면 무조건 죽이고 싶을 겁니다. 따라가겠습니다."

"뭐, 좋아. 아.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하벨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기사들에게 경고했다.

기사 한 명의 목덜미에 검이 슬쩍 닿았다.

뒤쪽에서 슬그머니 나타난 레디나를 보며 하벨은 흡족했다.

"이미 내 사람이 당신들의 목숨을 쥐고 있으니까요."

"저는 여기에서 지키고 있을게요."

레디나가 활기차게 말했다.

"그래. 부탁해, 레디나."

하벨이 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길을 트거라."

물을 향해 명령하자 물이 스르르 물러나 길을 터주었다.

기사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지만, 하벨은 숨을 쉬듯 당연한 일상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 * *

"…그러니까, 왕이 여기를 버렸다는 말이에요?"

넬시아가 이전에 헤스트리아 왕국의 정화제를 담당하고 관리하던 관리자를 향해 물었다.

"맞습니다. 소동은 왕실에서 벌어졌습니다. 악마가 튀어나와 이렇게 엉망이 되었음에도 왕실에서는 어떤 지원도, 아니, 살아 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정령들은 어떻게 됐는데? 여기에 하나도 없잖아."

주변을 둘러보고 온 라르웬이 자리에 앉으며 묻자 관리자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악마가 정령님들을 잡아먹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 먹혀버린 건지, 도망치신 건지."

오미너스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라르웬은 다치고 아프고, 굶고, 정신이 나간 이 지하 장소에 괜한 바람을 넣고 싶지 않았다.

[너도 그걸 모르면 이제 어떻게 얘들을 찾아야 하는 거지?]

기대로 가득 찼던 라탄은 시무룩함을 숨기지 못했다.

관리자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허탕이었다.

"그전에 누가 온 사람들은 없었나요?"

'악마'라는 말에 헤레스가 진료 도구를 확인하다 말고 물었다.

"그건… 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번쩍.

어디선가 퍼지는 은은한 빛을 보자 관리자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다, 당신들도 한 패였어?"

관리자가 바로 뒤로 물러나며 날을 세웠다.

"그게 무슨 소리야?"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지자 라르웬은 주변을 의식하며 물었다.

"진정하세요. 저건 신의 은총입니다. 이곳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 신관님을 데려왔을 뿐입니다."

넬시아가 당황해 굳어진 엘라힘을 의식하며 관리자를 말렸다.

"내가! 내가 악마가 나타나기 전에, 저, 저 빛을 봤어! 정화제 근처에서 처음 보는 얼굴들이 저 빛을 사용했다고!"

처음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관리자는 그저 증오로 가득 차서는 목에 핏대를 세웠다.

라탄은 저 모습에 질겁했다.

지금 정령사가 자신들에게 소리를 치다니.

"그래! 내가 잘못 봤을 리가 없어! 분명 저 빛이었다고! 저 빛이 악마를 불러들였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세상에 악마를 불러들이는 신의 은총은 없습니다!"

졸지에 악마로 몰리자 엘라힘은 기가 막혀 억울함을 목소리에 담았다.

"내 두 눈으로 봤다고, 이 악마야!"

여전히 관리자가 두 눈이 시뻘겋게 되어서는 엘라힘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여하가 슬쩍 엘라힘 근처로 다가가며 입을 뗐다.

"상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그것보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해도 되오?"

"이건 말해도 되겠는데? 나도 그렇게 보이거든."

라르웬이 팔짱을 꼈다.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도 커서 그래요."

헤레스가 관리자의 상태를 이해했다.

"원인을 찾을 수가 없는데, 마침 뭔가 기억 속에 벌어진 일과 비슷한 하나를 찾은 거예요. 그래서 저게 진실이라고 믿는 거죠. 신의 은총이 악마를 부른다는 사실은 진실일 리가 없는데도요."

하지만 무언가를 이해하기에는 지금 상황은 다른 경우와 너무도 달랐다.

헤레스가 치료했던 이들마저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그간 쌓여왔던 여러 감정들을 자신들에게 풀어버리려는 게 틀림없었다.

하나, 둘, 점점 늘어나는 시선에 루룸이 그들을 째려보며 말을 꺼냈다.

[다들 정신 안 차려? 아니면 너희는 바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령이 꺼내는 말에 화르륵 타올랐던 불이 순식간에 죽어버렸다.

"저, 정령님."

관리자는 손을 벌벌 떨었다.

[그래. 다 양보해서 악마라고 쳐. 하지만 그 악마가 지금 뭐하러 이러고 있는 거지? 왜 사람들을 다시 구해주려고 하는 거냐고.]

루룸이 저들이 어렴풋이 느끼던 의문을 고스란히 잡아당기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 멍청이들아! 너희는 방금 기회를 잃은 거야.]

이렇게 오해까지 산 마당에 뭐가 예쁘다고 도와주겠는가.

[그래. 아무리 혼란스럽더라고 너희가 지금 우리한테 소리를 쳤어? 너희가?]

라탄마저 몸을 부르르 떨며 분노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십시오."

"정령님.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부디, 악마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쾅.

넬시아가 발을 굴리자 땅이 울렸다.

갑작스러운 현상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하십시오."

넬시아는 그들 모두에게 경고했다.

"이곳은 당신들의 나라가 아닙니까? 도와 달라고 손을 뻗기 전에 당신들이 사라진 정령들을 찾아 나섰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남아 있던 정마저 떨어질 것 같았다.

왜 하벨이 헤스트리아 왕국을 포기했는지 이제야 더 이해했고, 자신이 얼마나 헤스트리아 왕국을 몰랐는지, 겉에만 치장된 모습을 전부라고 보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얼마나 오만했던가.

[네가 제일 못 된 거 알아?]

루룸이 날을 세우며 관리자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중심도 못 잡을 것 같으면 우두머리 노릇을 하지 말든지. 확신이 없으면 말을 꺼내지 말든지!]

버럭 지르는 소리에 관리자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분노에 찬 눈빛은 아직 죽지 않았다.

"일단 여기에 신관이 왔다는 건 분명하네. 너도 부정할 생각은 없지?"

라르웬이 엘라힘을 바라보았다.

"…없습니다. 빛의 상징은 신관만이 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신관이 있는 나라는 이 세계에서 한 곳뿐이었다.

신성 국가 시엘느.

"신관을 부른 쪽은 어디입니까?"

넬시아는 신관이 '오미너스'를 가져왔다는 걸 인정하며 그들이 자발적으로 왔는지, 아니면 헤스트리아 왕국이 부른 건지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모릅니다. 조금 전 일은 제가……."

"됐습니다."

넬시아는 관리자의 사과를 받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대신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하세요. 이곳에 눈이 왔던데 혹시 틈의 세계가 열렸습니까?"

"그럴 리가."

라르웬이 넬시아의 물음을 부정했다.

요새 클로저용 기계가 잡아내지 못하는 틈의 세계가 늘어났지만, 헤스트리아 왕국이 지금 얼마나 크던가.

"…나, 나타났다고 한다면 믿어주시겠습니까? 아니, 저, 저를 살려주실 수 있습니까?"

그때, 관리자 대신 누군가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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