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저는… 말입니다(2)
* * *
하벨은 드란트의 의심을 이해했다.
저 병에 든 게 오미너스를 제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누구라도 의심할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의심하지 마라, 드란트. 저건 진짜니까.'
어제 자신의 심장이 멈춰버렸다.
―아직 영혼이 몸을 거부하고 있단 말이에요. 제가 이걸 얼마나 달래고 있는데. 뭐가 됐든 조심해야죠. 그렇게 자신을 궁지에 몰면 어떡해요?
하벨 티에라가 꺼낸 말을 더듬어본다면 몸하고 영혼의 합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참 이상하게 들려왔다.
하벨 티에라가 용왕이라면 이 몸 역시 용왕의 몸인 건 분명했으니까.
영혼이 완전하지 않기에 몸이 거부하는 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저주가 두 개였다.'
하나는 영혼에 새겨진 저주, 다른 하나는 육체에 새겨진 저주.
어제는 아무래도 그 불안정함이 자신의 심적 흔들림으로 인해 더욱 거세게 왔고, 결국 몸과 영혼의 괴리로 심장이 멈춘 게 틀림없었다.
이걸 그때는 알 리가 없었기에 카샬한테 소식을 듣고 온 헤레스가 얼마나 놀랐는지 말을 못 할 정도로 거센 숨을 헐떡거리기 바빴다.
―제 탓이에요. 제가 도련님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겨우 숨을 고르나 싶더니 갑자기 헤레스가 펑펑 울자 너무 당황했고, 모두가 그녀를 달래지 않았던가.
진찰을 끝낸 뒤, 헤레스는 기쁜 소식을 입에 담아냈다.
―…저, 해낸 것 같아요.
그때 모두가 헤레스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있는 실험 자료가 에르티안 왕국에 있었던 마법사 협회보다 더 자세해서 방법을… 찾았어요.
처음과 다른 의미로 뚝뚝 떨어지던 헤레스의 눈물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감사합니다. 도련님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정말로. 정말로… 죽을 때까지 후회만 하는 삶을 살았을지도 몰라요.
헤레스가 아직은 완성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드란트를 움직이게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얼마나… 더 필요한가?"
그걸 증명하듯 드란트의 곳간이 열려버렸다.
"영향력이 닿는 선까지 도와주십시오."
하벨은 드란트의 말에 대답한 후에 뒤로 물러나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수도에 있는 거대 정화 장치는 멀쩡히 돌아갈 겁니다. 다만, 다른 곳에 있는 거대 정화 장치는 지금 건들지 않길 요청하겠습니다."
"어째서인가? 지금이야말로 나라를 정상으로 되돌릴 기회라 생각하네."
드란트는 하벨의 의견을 듣고자 했다.
하벨은 드란트가 바라는 부분에 대답하지 않았다.
드란트가 자신을 위해 움직일 여지를 남기는 것이며 그보다 더 큰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더, 큰놈이 있다고 말씀드리면 믿으시겠습니까?"
드란트의 눈썹이 움직였다.
"저도 가늠이 되질 않을 만큼 큰 세력이 뒤에서 모든 걸 움직이고 있습니다."
"레놀드 왕국을 말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어쩌면 레놀드 왕국보다 더 큰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 말에 드란트가 팔걸이를 꽈악 쥐었다.
"그게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예. 거짓 하나 없는 진심입니다. 그 사실로 지금 레바놈의 뒤에 누가 있는지 제대로 밝혀지질 않았잖습니까."
레바놈이 여러 사건을 벌일 때마다 쌓여간 계약서에 레놀드 왕실에서 쓰는 도장이 찍힌 게 전부였다.
누가 그랬는지, 어떤 목적인지 밝혀진 건 없었다.
"그러니 몸을 낮추고 기다리셔야 합니다."
마법사의 탑이 무너졌다.
그리고 헤일리스가 계획대로 공식적으로 코스모피안 왕국, 마법사 협회로 방문했다.
적은 반드시 이번 일이 어떻게 됐는지 누군가를 보내게 되어 있었다.
그 누군가를 잡아야 했다.
'그건 셴의 몫이지.'
하벨은 셴이 어떻게 마법사들의 죄를 아주 손쉽게 손에 넣었는지 알게 되었다.
마법사들이 각자 죄를 지었을 때, 거기에 셴이 있었다.
―…제가 직접 본 것들을 사진처럼, 아니, 상황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마법이 있습니다. 장소나 사람 등 같은 피사체는 두 번 정도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셴이 가진 마법은 전투와 거리가 멀었지만, 정말 유용했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동영상이었으니.
"그래서 내게 물의 오염과 관련된 협회를 만들길 제안했던가?"
드란트는 하벨의 속내를 들여다보았다.
저 협회는 단순한 협회가 아닌, 세계 협회가 될 것이며 곧 세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했다.
"제안한 건 제 누님이나,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좋네."
드란트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나 역시 물의 오염을 '적'이라 판단하고 있으니."
"임시입니다, 전하. 그 점, 분명히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허허. 그대는 참 알 수가 없다네. 요구를 그렇게 할 때는 언제고, 권력을 잡을 기회가 오니 거절하는 모습이라니."
"임시입니다, 전하."
"알아들었으니 그만 말하게."
드란트는 껄껄 웃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레바놈은 그대가 떠나고 난 뒤, 삼일 뒤에 죽을 것이다. 사인은 독. 이와 얽힌 이들은 그대가 처리를 바랐던 귀족을 포함한 레놀드 왕국과 얽힌 이들 전부라네."
"감사합니다, 전하."
하벨은 바안 때처럼 마음껏 비아냥거릴 수가 없었다.
'마음껏 휘두르거라, 드란트.'
드란트가 잘라내는 귀족들 전부가 죽는다면 결국, 자신한테 이득이며 에른스트한테는 뒤통수를 때리는 일이기도 했다.
에른스트가 자꾸만 코스모피안 왕국을 이용하려고 한다면 지금처럼 자신이 막으면 되지 않겠는가.
"이제 레바놈을 데려가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하게나. 나머지는 내 알아서 할 테니, 이제 출발 준비에 신경 쓰게."
드란트는 하벨이 참 마음에 들었다.
'보면 볼수록 탐이 난다. 정말로.'
"제가 탐이 나십니까?"
물러가려는 듯했지만, 하벨이 상당히 도발적인 발을 꺼냈다.
"그렇네."
드란트는 속내를 감추질 않았다.
"그렇다면 제가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해보시지요. 이 또한 방법이지 않겠습니까?"
하벨은 말을 던진 뒤, 그대로 물러갔다.
푸하핫!
뒤에서 드란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얼마나 타당한 패기인지 몰랐다.
"좋네. 내 그대가 이곳 코스모피안 왕국으로 올 수 있게 준비해두겠네."
"지지 마십시오, 전하."
하벨의 목소리가 닿았는지 몰라도 그가 나갈 때까지 드란트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 * *
"…달님 말입니다."
얼굴에 반쪽짜리 가면을 쓴 남자가 배시시 웃으며 옆에 선 자신의 호위를 바라보았다.
"예, 대표님"
머리카락이 짧은 남자의 입에서 딱딱한 말이 퍼져 나왔다.
"정체가 대체 뭘까요?"
"모릅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대표는 가볍게 웃으며 책상 앞에 몰려온 편지에 가까운 서류를 읽었다.
"하지만 몰라도 괜찮아요."
저 서류 전부가 달님을 보호해 달라는 클로저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우습게도 이걸 제출한 클로저들 전부는 이번에 검은 달과 얽혀 있다고 의심받은 이들이었다.
코스모피안 왕국에 있던 검은 달을 몰아냈다는 사실은 보고를 통해 듣지 않았던가.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에르티안 왕국을 담당하는 지부장 브란스 웰이 자신에게 찾아왔다.
이전에도 없던 일이었고, 자신이 클로저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지금, 없어야 할 일이기도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달님이라는 자가 동맹을 요구했습니다. 저는 달님이 이끄는 '가면단'과 동맹을 체결해야 한다고 대표님께 강력히 요구하는 바입니다.
"이번에 말이에요."
대표가 말문을 열었다.
"예."
"원망을 넘어 대표라는 자리도 내놓아야겠다고 각오했단 말이죠."
"그건 각오하셔야 하는 게 맞습니다. 이번에 검은 달과 내통했다고 의심된 이들만 모두 몰아서 내던졌잖습니까?"
"하지만 그건 내 의견이 아니었어요!"
대표가 주먹을 꽉 쥐며 당장이라도 책상을 칠 것처럼 보이자 호위는 대표를 말렸다.
"진정하시죠. 밖에 소리가 들리겠습니다."
"사실 이 대표라는 자리부터 내가 원해서 된 게 아니잖아요?"
대표는 책상에 올려진 '크로니안'이라는 이름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그렇죠. 대표님이나 저나 꼭두각시일 뿐이죠."
호위는 크로니안을 달랬다.
자신이나 크로니안이나 클로저를 사랑하기에 클로저가 가진 죄를 떠안았다.
틈의 세계가 나타나지도 않았음에도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강탈하는 등 어두운 부분이 얼마나 많았는가.
하지만 저들은 오히려 하나로 뭉쳐 자신을 협박했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요. 저희가 일부러 당신을 대표직에 올렸다 생각합니까? 이거 보기보다 깡이 좋으시네요? 뭐, 좋습니다. 과연 대표님의 정의가 사람들 귀에 닿는 게 빠를까요? 아니면 클로저가 무너지는 게 빠른지 해볼까요, 대표님?
클로저 중 실세들이 자신을 대표자리에 올렸던 일은 그저 꼭두각시를 위함이라는 그때 알아버렸다.
그때는 정말로 클로저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그 사실이 두려워 자신이나 크로니안은 눈을 감아버렸다.
겁쟁이처럼.
"하지만 달님 덕에 드디어 기회가 생겼어요."
크로니안은 감격에 젖은 목소리를 냈다.
클로저가 숨기고, 자신이 숨겼던 죄가 드디어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참에 사람들 귀에 들어가는 건 분명했고, 클로저 내부에서도 경각심이 퍼졌다.
이렇게 자신을 이 자리에 올린 놈들의 힘이 자연스럽게 약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드디어.
자신은 예전과 달랐다.
이번에는 클로저를 지킬 수 있었다.
"그분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분이야말로 클로저를 바로잡는 데 도움을 주신 분이니까요. 곧 저들의 표적이 됐을 겁니다."
크로니안의 남은 눈동자에 활기가 가득 하자 호위는 활짝 웃었다.
드르륵.
크로니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왜 일어나십니까?"
"우선 사과하러 가야죠. 아마 믿지 못하겠지만, 내 뜻이 아니었다고 사과해야 합니다."
"감시는요? 아, 이제는 상관없죠."
"네. 상관없습니다."
크로니안의 입꼬리가 길어졌다.
자신들을 무너뜨릴 목적으로 검은 달이 찾아왔는지 몰라도 이제는 역으로 검은 달이 이용당할 차례가 아닌가.
하지만 그 전에 달님을 만나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나가실 겁니까?"
호위의 물음에 크로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라르웬 티에라 씨를 찾아갈 겁니다. 조용히, 은밀하게 갈 거니까 준비해줘요. 모든 수단을 동원하더라도요."
* * *
하벨은 먼저 자신의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넬시아를 바라보았다.
톰톰하고 놀던 아라가 당장 하벨에게 달려왔다.
[대장! 이 몸은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으며 톰톰을 바라보았다.
[나, 나는 아무것도 한 거 없어.]
톰톰이 얼른 넬시아 뒤로 숨자 그녀는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누님."
말문을 열었지만, 하벨은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넬시아가 그간 어떤 마음으로 버텨왔는지 왜 모르겠는가.
헤스트리아 왕국은 그녀에게 있어 몹시 중요한 곳이었다.
하벨 티에라와 룬델, 라르웬과 뒤틀어진 관계 사이에서 정을 붙인 곳이 헤스트리아이지 않은가.
"잘 해결됐니?"
넬시아가 웃으며 묻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혹시 내가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어? 미안해. 나는 그저 네 얼굴을 더 보고 싶었는데. 내 마음이 너무 급했나 봐."
"아닙니다. 그런 거 전혀 아니에요. 나도 누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 내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 엄청… 놀라실 겁니다."
하벨은 자신을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넬시아를 보며 머릿속에 이것저것 다양한 게 떠올라 벌써 미안했다.
"예. 하도 도련님께서 여기저기 다닌 곳이 많아서요. 아마도 찔리실 겁니다."
카샬이 슬쩍 말을 꺼냈지만, 넬시아는 여전히 웃는 얼굴 그대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무얼 해도 다 용서해주겠다는 얼굴이 아닌가.
[있지, 넬시아. 대장이 다닌 곳은 많은데, 다 필요해서 그런 거야. 대장이 일부러 막 다닌 건 아니었어.]
아라가 필사적으로 하벨을 두둔하자 넬시아는 아라를 귀엽게 바라보았다.
"괜찮아. 그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형님은요? 같이 안 왔어요?"
"너 보려고 라르웬한테 출발 준비를 떠맡겼어. 아마 화내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게 좋은데?"
넬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벨에게 다가왔다.
"고생 많았어, 하벨."
하벨을 살며시 안아주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대신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닙니다. 누님도 여기에서 얼마나 고생 많았는지 압니다. 손목은 괜찮으십니까?"
"손목이라면 나보다 아버지를 걱정해야 할 거야. 지금도 열심히 서류 작업 하시고 계시니까."
"누님."
하벨은 뒤로 물러났고 넬시아를 바라보았다.
"누님한테 해야 할 말이 있어요."
"그래. 무슨 말이든 들어줄게."
"카샬. 잠깐만 문 좀 살짝 열어줄래?"
"알겠습니다."
카샬은 하벨의 지시대로 문을 살짝 열었다.
[어엇!]
아라가 금세 귀를 쫑긋 세웠다.
[라탄이다!]
문틈 사이로 고양이 귀가 나왔다.
[어떻게 온 거야? 다른 곳은 무섭다고 용용이랑 있던 게 아니었어?]
[하벨이… 불렀어요.]
라탄이 꼼지락거리며 다가오자 넬시아는 바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있던 미소마저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아니지?"
"맞습니다, 누님."
하벨은 넬시아가 부정한 사실을 다시 부정했다.
"라탄은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왔습니다."
넬시아는 잠깐 숨을 멈춘 듯 그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라탄. 너는 누님을 기억하고 있지?"
하벨이 묻자 라탄은 천천히 다가오며 대답했다.
[…알아. 멀리서 한 번 본 적이 있어.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만들어낸 정화제를 가지러 오는 인간이라고 알고 있어.]
라탄의 시선은 잠깐 카샬에게 향했다.
저 인간은 이상하게도 보면 볼수록 누군가를 닮은 듯해 조금 전부터 자꾸만 눈길이 갔다.
[뭘 쳐다봐?]
아코가 날을 세우며 쳐다보자 라탄은 살짝 움츠러들었다.
자신을 아냐고 묻기에는 아코의 눈빛이 너무도 날카로웠다.
"…그럴 리가."
넬시아는 불안함에 휩싸였다.
"너희는, 헤스트리아 왕국 밖으로 나오지 않을 텐데."
머릿속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 다 알면서 넬시아는 빙글빙글 돌아갔다.
하지만 참기가 너무 어려웠다.
"대체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대답해줘, 하벨."
넬시아는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느낌에 휩싸여서는 하벨에게 다가가 그를 재촉했다.
"거기는 나의 또 다른 집이야."
넬시아의 말에 카샬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말이 오늘은 이상하게도 좋게 들리지 않았다.
"그곳에 오미너스가 나타났습니다."
하벨이 입을 열자 넬시아는 중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오미너스가 나타나?"
눈을 한 번 깜박거린 뒤 하벨을 다시 제대로 바라보았다.
"하벨 네가 오염된 물로 오미너스를 만들려면 분명히 정령이 필요하다고 그랬잖아. 헤스트리아 왕국에는 정령이 정말 많아. 정말로."
넬시아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꼭 소리치는 것처럼 들려왔다.
[맞아. 그… 물이, 검은 물이, 악마가 헤스트리아 왕국을 휩쓸었어.]
라탄이 눈을 부릅뜨더니 꼭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가… 얼마나 죽었는지 몰라. 하지만 아직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정말로……?"
넬시아가 그 사실을 반갑게 맞이했다.
'살아 있다'라는 말이 꼭 절망 속에 피어난 꽃처럼 다가왔으니까.
[정말이야. 내가 이렇게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다른 정령들 덕인데? 그러니까 살려야 해. 아직… 버티고 있을 거야.]
"아니."
카샬이 단호하게 끊어냈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