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한 놈, 두 놈, 세 놈, 네 놈(4)
* * *
"…하벨."
간부들은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는 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하벨… 티에라."
하지만 저 얼굴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자신들의 표적이었고, 사라져야 할 티에라 가문을 위한 시작이었으니.
"놀랐어? 너희의 표적이 이러고 있으니까? 하지만 놀라기엔 이른데."
하벨은 레디나를 가리켰다.
"짠."
레디나가 이어 가면을 벗자 간부들의 입술이 부르르 떨려왔다.
미칠 것만 같았다.
그냥 이 모든 게 장난처럼 느껴졌다.
"내가 누구인지 알겠지, 쓰레기들아?"
레디나의 얼굴에 웃음기가 지워졌다.
"그럴… 리가."
"네가, 네가 어떻게 우리를 배신할 수가 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간부들은 현실을 외면했다.
레디나라니.
하벨 티에라부터 말이 되지 않았는데 레디나라니.
"레디나. 네가 검은 달을 버렸다고? 네가?"
아무리 받아들이려고 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니까.
"네놈들이 먼저 버렸잖아."
레디나는 간부들이 지껄이는 말이 우스웠기에 낄낄거리며 단검을 세게 쥐었다.
"엄마도."
콱!
레디나의 단검이 간부 한 놈의 목을 관통했다.
"…커, 커허헉."
"그리고 나도."
레디나는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미소를 지었다.
"다 버렸잖아? 그렇지?"
꺽꺽하며 피를 흘리는 소리에 맞춰 하벨이 말을 꺼냈다.
"그러게 애초에 날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왜 건드려서 이 사단을 만들어."
하벨은 간부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 이참에 좋은 말 하나 해줄게."
콰드드득.
레디나가 단검을 비틀어 그대로 옆으로 그어버렸다.
마치 하벨의 말 뒤에 깔린 배경음악 같았다.
"검은 달은. 이제, 사라질 거야."
"웃기지 마!"
남은 간부가 눈을 부릅떴다.
"검은 달이 왜 사라져? 검은 달이……!"
"왜 사라지긴. 수장이 있는 곳을 알았는데 사라져야지."
[…지, 진짜? 이 몸은 모르는데?]
아라가 눈동자를 빙그르르 돌렸다.
'이제부터 알 거라서.'
하벨은 저들의 피를 담는 카샬을 힐끔 보며 속으로 말을 삼켰다.
어쨌든 지금은 뭐가 제일 중요하겠는가.
"안녕."
하벨은 정성을 다해 간부들을 향해 웃어주며 손을 흔들었고, 잘린 머리를 하나 얻은 짐승의 칼날이 다시금 움직였다.
콱!
하벨은 목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모습에 아라를 슬쩍 보았다.
눈을 잘 가리고 있자 다시 가면을 쓰며 카샬을 불렀다.
"카샬."
"예.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너한테 말하려고 하다가 오늘 일 때문에 타이밍을 놓친 게 있어."
카샬은 괜히 긴장이 댔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건지.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럽니까? 긴장됩니다."
"그러니까요. 이상하게 저도 긴장이 되는데요?"
헤레스가 하벨의 망토를 슬쩍 들춰 정화 장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 정령이 아라 쪽으로 왔어."
"정령은 아라를 다 좋아해.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닌데?"
칼리우스가 하벨의 말에 의문을 드러냈다.
"그게 아니야, 용용아. 그 정령이 헤스트리아 왕국에서 왔다고 했거든."
"…헤스트리아?"
칼리우스가 눈을 크게 뜨고 카샬이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지금, 헤스트리아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래. 사태를 아주 잘 알고 있더……."
하벨은 말을 멈췄다.
쫘아아악.
갑자기 소름이 돋아났다.
하벨은 물이 요동치는 그 소리에 자리에서 당장 일어나 허공을 바라보았다.
"…틈의 세계다."
쩌어억.
불길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 균열이 일어났다.
[대, 대장, 저기 봐봐!]
아라가 다급히 하늘을 가리켰다.
쩌어어억.
하나가 아니었다.
두 개.
"도련님! 저기도 균열이 일어났어!"
칼리우스의 재촉에 하벨이 또 시선을 돌리자 틈의 세계가 열렸다.
'세 개… 가 열렸다고?'
"이거 너무 이상한데요? 일부러 노린 거 아니에요?"
레디나가 기가 찬 듯이 목소리를 냈다.
"도망치셔야 합니다."
카샬이 당장 하벨을 업으려 등을 내보였다.
"…아니야. 틈의 세계는 나 때문에 일어나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오?"
여하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저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아니오. 가르쳐주지 않아도 되오. 내가 실수했소."
곧 여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벨을 재촉했다.
"어쨌든 도망가야 한다는 말에 나 역시 동의하오. 죽지 않는 끔찍한 괴물들이 우글거리지 않소?"
하벨은 저 틈의 세계에서 하벨 티에라를 아끼던 그들이 나올지, 아니면 대신들이 나올지 몰랐기에 바짝 긴장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도망쳐야 하는 건 너희야. 뭐가 되었든 목표는 나야."
도망이라는 말에 아라가 얼른 하벨의 등에 딱 붙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카샬이 언성을 높이자 레디나가 격하게 동의했다.
"맞아요. 도망이라뇨. 차라리 도련님을 죽이면 죽였죠, 저는 도련님을 두고 도망칠 생각이 조금도 없어요."
"나는 틈의 세계가 빨아들이는 마나를 멈춰야 하는 의무가 있어. 그리고 그렇게 해야 주변에서 틈의 세계가 나타났는지 아닌지 몰라. 이건 도련님한테 도움 되는 일이니 나는 더 갈 수 없어."
칼리우스는 용의 의무를 들먹이자 헤레스 역지 당당하게 자신을 가리켰다.
"주치의잖습니까. 도망이라는 말을 꺼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아니. 다들 정신 차려. 이건 다르다니까?"
하벨은 저들 모두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초조함이 몰려왔다.
"다 도련님을 닮아가네요."
카샬이 말을 던지자 하벨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찔려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라야."
[이 몸도… 가기 싫어. 이 몸도 안 갈 거야.]
"그거 말고."
[그러엄?]
아라가 눈을 반짝였다.
"다시 싸울 준비 하자고."
[응! 좋아! 이 몸은 언제든 준비됐어.]
아라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꼬리를 신나게 흔들었다.
"일단 다들 대기하고 있어."
하벨은 갈 생각은커녕 당장 덤빌 생각만 가득한 저들을 말렸다.
"용용아."
이어 하벨은 칼리우스를 불렀다.
"응!"
칼리우스가 힘차게 대답했다.
"네가 마나를 막으면 틈의 세계가 나왔는지 아닌지 모른다고 했지?"
"응. 틈의 세계가 나오자마자 바로 마나를 막고 있어. 지금도 그러고 있고."
"그래. 잠깐만 붙잡고 있어 봐."
하벨은 주변으로 시선을 뒀다.
"너희는 잠깐 물러나 있어."
"도련님……."
"조금 전처럼 도망가라는 게 아니야. 만약에 이전처럼 날 죽인 대신들이 나오는 거라면 놈들이 쓰는 힘이 정말로 위험해서 그러는 거야. 과거에 용왕이었던 내 육체를 뚫어버렸던 힘이니까."
하벨은 카샬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지금 도련님께서 저 괴물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많이… 아프시죠?"
계속 하벨의 상태를 살피고 있던 헤레스는 걱정을 담아 물었다.
말려야 하는데 말릴 수가 없었다.
지금도 부상을 떠안고서는 꾸역꾸역 할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괜찮아. 버틸 수 있어. 그러니까 물러나 있어."
하벨은 그들이 물러나는 걸 보며 틈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만약에 대신들이 맞다면 이건 자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놈들이 내던 그 힘은 에른스트가 내던 힘이랑 거의 유사했으니까.'
쩌어억!
균열이 커지고 구멍이 나타났다.
하벨은 자신에게 꼭 붙은 아라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쿵쿵.
얼마나 긴장했는지 몰랐다.
[이, 이 몸이 급하면 정령들을 부를 거야. 꼭 그럴 거야.]
아라는 소곤소곤하며 하벨을 꼭 잡았다.
탁!
거대한 손이 틈의 세계에서 뻗어 나오며 몇 명인지 모를 괴물 같은 모습을 한 저들이 꿈틀거리며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등장과 함께 행동을 멈춰버렸다.
하벨은 절로 숨을 낮췄다.
그가 눈가를 꿈틀거릴 무렵, 이전에 봤던 작은 괴물이 그들 사이로 걸어 나왔다.
이전과 달리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었다.
'…대신들이 아니다.'
하벨은 그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
숨을 한 번 돌렸다.
"…아가… 야."
"아… 가."
저들은 자신이 계속 들었고, 하벨 티에라의 기억 속에 봤던 그 호칭을 꺼냈다.
랜턴이 흔들렸다.
하벨이 가면을 벗자 저들은 어색하나 찬찬히 웃어 보였다.
기억을 봤기에 틈의 세계에서 하벨 티에라를 아끼고 사랑하던, 검은 형체였던 저들이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저들은, 괴물이 아니라 평행 세계가 합쳐져 발생한 이들이 아닌가.
"나를 기다렸습니까?"
저들이 많은 자를 죽였다는 걸 알지만, 하벨은 적의를 드러낼 수가 없었다.
"네. 위… 험해."
어설픈 발음으로 저들은 대답했다.
"얼마나 나를 기다린 겁니까?"
"조금……. 아주 조금."
"보는 것처럼 나는 무사합니다. 그러니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됩니다."
저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같이. …다 같이. 나는……."
말을 하고 싶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지 답답해 보였다.
"다 같이 그 속에 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더는 그쪽으로 갈 수가 없어요."
하벨의 말에 저들은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쿵.
멈췄던 큰 괴물의 모습을 띤 자들마저 움직이자 작은 괴물 모습을 한 저들이 당황한 채로 하벨과 그들을 바라보았다.
"안 대. 기다려… 줘. 제발."
"조금… 만. 그러면 안… 돼."
작은 괴물의 모습을 한 저들은 큰 괴물의 모습을 한 그들을 말리고, 또 말렸다.
"…도련님."
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저 존재들 전부 마나가 이상하게 뒤틀려 있는 게 보여."
"뒤틀려 있다니?"
"마나가 너무 과해. 저 정도로 필요가 없는데, 뭔가, 굶주린 것처럼 자꾸 마나를 흡수하려고 해. 그래서 고장 나버렸어."
"저들은, 원래… 사람이야. 아마 세계가 합쳐진 부작용일지도 몰라."
하벨은 룬델에게는 말했지만, 저들에게 꺼내지 못한 말을 꺼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레디나가 황당해하며 묻자 하벨은 미간을 잠깐 찌푸렸다.
"여기는 원래 평행 세계였어."
"…허."
저 말을 처음 듣기에 여하가 기가 찬 소리를 냈다.
"평행 세계라는 말은 같은 존재가 두 명이 있다는 뜻이지. 여기서 세계가 합쳐지면서 같은 존재였던 이들이 한 세계에 동시에 살아남을 수 없게 되어버린 거야. 누군가는 사라져야 했고, 그게 다른 모습으로 드러났어. 그게 뭐겠어?"
"틈의 세계… 말입니까?"
카샬의 목소리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맞아. 세계에 남을 수 없었던 이들이지."
하벨은 대답한 후에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이건 내 가설이야. 하지만… 이것 이외에 틈의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어."
하벨의 시선이 칼리우스를 향했다.
"용용아."
"…응."
"네가, 마나의 흐름을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되돌려줄 수 있어?"
저들이 이렇게 뒤틀어져 버리는 모습이 마나 때문이라면, 이전과 달리 움직이지 않는 이유 역시 마나 때문이 아닌가.
"할 수 있어."
카르밀이 가능하다고 말해주었기에 칼리우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하지만 칼리우스는 당당함을 드러낸 것과 달리 곧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저들의 상태가 어떤지 직접 나와 닿지 않으면 몰라."
"알았어. 기다려봐."
하벨은 작은 괴물의 모습을 띤 저들 중에서도 대화가 통하는 자에게 걸어가려고 하다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멈춰. 지금은 안 돼, 카샬, 레디나."
하벨은 두 사람을 멈췄다.
틈의 세계가 열렸음에도 지금 이렇게나 평화로웠던 적이 있었던가.
언제 다시 대치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괜히 자극하고 싶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고 있잖아?"
하벨은 그들의 걸음이 멈추자 다시 말을 꺼내며 걸어갔다.
"당신들은 원래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었잖습니까. 그런데 지금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이유를 방금 당신들도 들었죠?"
작은 괴물을 닮은 자는 하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와 대화하고 싶잖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벨의 물음에 작은 괴물을 닮은 자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화… 원해요."
"이리 올 수 있겠습니까?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몸을 망가트린 마나를 바로 잡기 위해서예요."
하벨이 손을 뻗자 작은 괴물을 닮은 자는 비슷한 이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여서야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벨에게 다가올수록 작은 괴물을 닮은 자는 해맑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칼리우스라고 하는 저 존재가 곧 다가올 겁니다. 놀라지 마세요."
하벨은 칼리우스를 가리켰다.
칼리우스 역시 얼른 가면을 벗고 최대한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알았… 요."
작은 괴물을 닮은 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줄래?"
칼리우스가 다가와 말하자 작은 괴물을 닮은 자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을 내밀었다.
큰 괴물을 닮은 자에 비해 턱없이 작을 뿐, 작은 괴물을 닮은 자 역시 하벨보다 세 배 이상 컸기에 내민 손이 몸통만 했다.
"놀라지 마. 이건 하나도 아프지 않아."
칼리우스가 손에서 느껴지지 않는 온기에 안쓰러움을 담아 말을 꺼냈다.
작은 괴물을 닮은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우스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에 마나를 가득 담았다.
순간,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고, 그의 머리카락이 살며시 휘날리며 눈동자마저 한껏 날이 섰다.
저 존재의 몸에 깃든 마나가 보였다.
한 번 들어간 마나를 저 존재가 어떻게 분출하는지 모르기에, 마나가 답답하고, 화가 났기에 아예 육체 자체를 멋대로 뒤바꾸어 놓은 듯했다.
"세계가 필요로 하는 마나가 저 사람들한테 다 모인 것 같다고 카르밀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칼리우스가 꺼낸 말에 하벨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이걸 해결할 방법이 있는 거야?"
"응."
칼리우스는 대답과 동시에 하벨을 바라보았다.
"도련님이 그 방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