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한 놈, 두 놈, 세 놈, 네 놈(3)
* * *
하지만 하벨은 방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간부들의 초조함을 이용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꽃님아."
하벨이 자신의 근처에서 맴도는 카샬을 불렀다.
순간, 브란스의 입꼬리가 흔들리는 걸 보고는 카샬은 당장 가면을 벗고 브란스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하. 말씀하시죠."
"무지개에게 내 말 좀 전해줘."
무지개를 가면을 쓴 여하를 가리킨다는 걸 알고는 카샬은 하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 놈씩 잡아서 땅바닥에 패대기쳐달라고 말해줘."
"그거면 됩니까?"
"아, 도중에 잠깐 놈들이 멈출 수 있으니까, 그걸 노려보라고 해."
"달님께서는……."
"나는 한 놈 잡았잖아? 뭐, 또 잡아도 되긴 한데……."
[안 돼! 그건 안 된다구!]
아라를 따라 정령들이 단번에 하벨을 쳐다보았다.
아라가 화를 내니 뭔진 몰라도 같이 내야만 할 것 같았다.
[안 된대!]
[맞아, 그러면 안 돼!]
하벨은 왠지 웃음이 났다.
헤레스 말대로 과로인지, 뭔가 하지 않았음에도 몸이 무거웠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마무리는 역시 구름이한테 맡기지 뭐."
어차피 지금 레디나가 두 놈의 목을 베기 위해 숨은 채로 계속 각을 노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자, 이제 두 분은 먼저 떠나시죠."
하벨은 라르웬과 브란스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적이 달님 씨를 노립니다."
브란스가 호소하나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위는 이미 충분합니다. 오히려 저쪽으로 가셔서 간부들을 잡는 게 이 사태를 더 빨리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라르웬은 굳어진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하벨이 분명 무언가를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목구멍 너머로 나올 뻔한 잔소리를 겨우 삼키며 하벨을 믿었다.
"어서 가죠. 이미 달님 씨의 호위는 충분하다는 걸 보지 않았습니까?"
라르웬은 브란스를 재촉했고, 브란스는 찝찝함을 드러냈다.
"달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계속된 브란스의 걱정에 하벨은 지부의 위치가 적힌 종이를 라르웬에게 넘겼다.
"이제 됐죠? 어서 가시죠. 지금 이것도 내 작전이라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거… 진짜가 맞습니다."
라르웬은 쪽지를 대충 확인해서는 괜히 요란을 피웠다.
"뭐라고?"
"그러니 더는 달님 씨를 방해하지 말고 일단 가시죠."
라르웬이 목표는 완수됐다며 브란스를 떠밀 듯이 데리고 갔다.
그들이 멀리 갔다 싶을 때, 하벨이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자. 내가 신호를 주면 다들 내 주변에서 멀리 떨어지는 거야. 알겠지?"
"지금 미… 왜 그러십니까?"
여하에게 향하던 카샬이 그대로 발을 틀어 하벨에게 다가갔다.
귀는 왜 이렇게 밝은 건지.
"나도 불만이야. 이러면 위험하다고."
어느새 결계를 좁힌 칼리우스 역시 불만을 담았다.
쉿.
하벨은 칼리우스가 더 입을 열기도 전에 손가락을 입술 위에 올렸다.
"놈들은 함정인 걸 알아도 올 거야. 그럴 수밖에 없어."
자신을 죽여야 검은 달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이제 그 방법밖에 없었다.
"내가 손을 흔드는 게 신호야. 그러면 너희는 클로저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면 되는 거야."
하벨은 카샬에게 손을 휘휘 저으며 아라를 쳐다보았다.
아라가 주변 눈치를 슬쩍 보다가 하벨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뭐 하려고 그래, 대장?]
"예쁜 꽃이 많이, 많이 자라면 좋겠지?"
[응! 이 몸은 꽃이 좋아!]
"그럼 나랑 함께 꽃을 피워보는 거야."
하벨은 자신을 가리켰고, 곧 손가락이 정령들을 향했다.
"너희들하고."
[우리도?]
"그래. 같이 피워보자."
자신은 정령사였으니까.
[좋아!]
[나도 너무 좋은데?]
정령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꺄르르 웃던 와중에 시선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콰앙!
무언가를 아예 땅에 때려 박는 소리가 들려왔다.
[…히익!]
아라가 깜짝 놀라 하벨에게 매달리다가 다시 허공에 둥둥 떴다.
하벨이 슬쩍 헤레스를 보자 그녀 역시 당황한 눈초리였다.
"…이렇게나 반응 속도가 빠를지는 몰랐어요."
"괜찮아. 안 죽었어."
하벨은 오히려 반가웠다.
곧 마지막이 금방 찾아올 테니까.
여하는 카샬이 하벨에게 전한 명령 그대로 이행하고는 마저 달성하고자 다른 놈을 찾으러 시선을 돌렸다.
이걸 왜 해야 하는지, 여하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하벨이 내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있구나' 하고 그런 생각이 들 뿐이었다.
멋대로 나서는 점이나, 남을 중심에 두는 삶이 고리타분한 아버지를 닮았으면서도 또 하벨이 가진 자유로운 분위기가 신기하게도 섞여 있어 뭔가 달랐다.
화르륵.
여하는 불의 냄새를 맡았고, 간부의 머리에 숫자가 떠오르자마자 달려들었다.
간부의 몸을 멈추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기에 서두르지 않아도 됐지만, 여하는 하벨이 무얼 할지 궁금했다.
얼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특이했고, 가장 비밀이 많았고, 또 가장 빛이 났으니까.
여하는 손을 뻗어 간부의 팔을 쥐었다.
콱.
간부의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든 말든 그대로 땅을 향해 힘껏 던져버렸다.
콰앙!
흙먼지가 일어났고, 조금 전처럼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하가 고개를 돌렸다.
하벨 주변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왜 자신 쪽으로 뛰어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적어도 간부라는 놈들은 이곳에 없었는데.
'…저러면 위험할 텐데.'
여하의 눈이 찌푸려졌다.
―아니, 저놈들이 지금 용왕님 쪽으로 가잖아!
―하지만 용왕님한테 다 계획이 있으신데?
―에이, 나는 그런 거 몰라!
물들이 소곤거렸고, 여하 역시 마음이 흔들렸다.
바닷속을 구해줄 귀인이 아닌가.
여하가 하벨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한 발자국.
콰드드드드.
갑자기 땅이 울렸다.
두 발자국.
하벨 주위에 입이 떡 하니 벌어질 만큼 많은 줄기가 튀어나오고.
세 발자국.
동시에 꽃이 피어났다.
절로 걸음을 멈출 만큼 아름답게 피어나 시각을 뺏기고, 꽃향기에 후각을 뺏기고, 정원이라도 된 것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에 장소마저 빼앗기지 않았는가.
'귀인은 어디 있는 거지?'
여하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고, 꽃들 속에 무언가를 보았다.
얼추 본다면 장식품처럼 꽃하고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잘 어울려 사람 두 명이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숫자 1, 3이 머리 위에 떠올라서야 알았다.
'…간부다.'
여하는 너무도 아름답게 간부를 제압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얽혀 있던 꽃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하는 눈썹을 꿈틀거렸고, 곧 천천히 입을 벌렸다.
꽃들 사이로 하벨이 걸어 나왔다.
분명히 자신이 아는 하벨이었음에도 걸음걸이부터 느껴지는 고귀함에 여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왕이시여."
곧 여하는 다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건지.
하지만 여하의 시선 끝에 여전히 하벨이 있었다.
바닷속에 있는 모든 생물의 왕인 자신의 아버지가 내보이던 여유와 강인함, 아니, 그보다 더 큰 무언가가 엿보였다.
여하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이 모습이야말로 진짜 왕이 되어야 하는 자가 가진 면모가 아닐까 싶었다.
휘리리릭.
하벨은 손가락을 내밀어 클로저들에게 간부 두 명을 바쳤다.
"구름아. 이건 양보해줄 수 있지?"
"머리는 양보 못 해요. 그건 제 거예요."
레디나의 목소리가 하벨 뒤에서 들렸다.
방금 하벨 자신이 정령들과 함께 꽃을 피우자마자 나타난 레디나를 말리느라 진땀을 흘렀으니까.
[…나는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해.]
정령은 레디나를 힐끔 보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이, 이 몸도. 진짜 엄청 많이 놀랐어!]
아라는 하벨에게 딱 붙어서는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등장한 레디나는 너무 무서웠다.
꼭 밤에 나타난다는 귀신처럼 보였다.
'그건 공감이지.'
하벨 역시 레디나가 흘리는 살기에 몸이 떨릴 것만 같았다.
자신의 물을 흘려보내 진정시킬까 하다가 여하와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걱정되어서 온 건가?'
하벨은 씩 웃었고, 여하는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이게 아닌가?'
하벨은 어리둥절했지만, 상황상 더는 머뭇거릴 수 없어 클로저들을 향해 말했다.
"죽여도 되니, 목은 건들지 마세요. 그건 내 사람 겁니다."
"…아니, 이 두 놈은 그대가 가지게."
넬로스가 입을 열자 하벨은 활짝 웃었다.
"정말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지부의 위치는 손에 넣었으니 이 정도는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게 가짜일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 없지. 연륜을 무시하지 말게."
넬로스는 하벨의 말을 부정하며 가볍게 웃었다.
여기서 클로저들을 적으로 돌려봤자 달님이 얻을 건 보이지 않았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브란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달님을 만나면서 검은 달의 아지트 위치를 추가로 가지고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가지고 있었고, 그런데 달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통자가 아직도 있을지언정 간부들을 잡았기에 검은 달의 기세가 단번에 기울었다는 게 벌써 느껴졌다.
"저희도 동의합니다."
클로저들은 불만을 품지 않았다.
코스모피안 왕국을 담당하는 지부장과 에르티안 왕국을 담당하는 지부장이 이미 동의했다.
무엇이 되었던 자신들은 뭉쳤고, 지부를 부술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곧 확인할 수 있을 테니 전혀 조급하지 않았다.
"저도 동의합니다."
라르웬이 손을 들자 클로저들이 그를 따라 우르르 손을 들어 의견을 내보였다.
클로저들은 처음과 전혀 다른 눈빛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아직 불안정하나, 적어도 클로저들의 눈빛에 신뢰가 엿보였다.
"그럼 고맙다는 의미로 나 역시 힘을 실어주겠습니다."
하벨이 손을 들었다. 칼리우스가 하벨의 신호를 받고는 주변에 있던 결계를 해지했다.
클로저들은 결계가 사라졌음을 알자마자 곧이어 경계했다.
지금 누군가가 오고 있지 않은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사람들로 된 결계처럼 가면을 쓴 자들이 우르르 오고 있었다.
'이제는 가면단을 숨길 이유가 없지.'
하벨은 클로저들을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신뢰를 구축했다면 이제 자신의 덩치가 크다는 걸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감히 자신을 함부로 볼 수 없게.
"소개하죠."
하벨은 당당하게 말을 꺼내며 손을 내밀었다.
"내 가면단입니다."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었다.
클로저들의 숫자를 단번에 엎을 숫자였으며 뒷세계에서부터 굴러온 가면단들이 가진 위압감이 클로저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들을 도와줄 내 사람들이죠."
하벨의 말과 함께 클로저들이 숨을 삼켰다.
가면단이 이렇게나 큰 단체였다니.
'그래도 가면단은'이라고 출발한 생각들이 모조리 지워졌다.
"내 가면단은 사납지 않습니다. 물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판도가 뒤집히자 하벨이 키득 키득거렸다.
넬로스가 침을 삼키고 브란스는 라르웬을 힐끔 바라보았다.
"이제 내 동맹의 의지를 아시겠습니까?"
하벨은 이 모습이 클로저들에게 조금은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힘없이 지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벌써 자신을 보는 클로저들의 눈빛이 또 달라지지 않았던가.
신뢰감을 덮는 거대한 위협감이.
"내가 클로저와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고 싶다고 당신들의 우두머리에게 말해주세요. 오늘 선물을 드릴 테니까요."
하벨은 자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검은 달의 지부를 모두 삼켜버릴 자신이.
"달님."
페트리오가 하벨 옆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고생 많았어."
"아닙니다."
"이제 남은 건 지부를 쓸어버리는 일인데 할 수 있겠지? 나는 저 친구들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하벨이 간부들을 가리켰다.
"금방 끝내고 찾아뵙겠습니다."
페트리오는 당연하다는 식으로 대답하며 클로저들을 향해 두 발자국 다가갔다.
"제가 앞장설까요, 뒤에서 따라갈까요?"
"이거… 상당히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넬로스의 말에 하벨은 콧바람을 살짝 내쉬었다.
"계속 나를 무시하길래요. 기분 나빠져서 불렀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 겁니까?"
"우리를 공격할 수 있지 않은가?"
"아뇨. 넬로스 씨. 달님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넬로스의 발언에 브란스가 끼어들었다.
브란스는 한 번 더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제가 장담하건대, 그 어떤 동맹보다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너무 고마운데요?"
하벨은 진심을 담아 브란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믿어주니 어쩌겠나.
하벨은 기쁨을 드러냈다.
"솔직히 이번에 클로저들이 날 무시했잖습니까? 그러니까 보여준 겁니다. 내가 무시할 크기가 아니라는 걸요. 그러니까 당신들의 우두머리에게 전하세요. 그리고 내 선물도 받아가야죠."
하벨은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검은 달의 지부를 그대로 내버려 둘 셈입니까? 싫으면 내 사람들부터 먼저 출발시킬 겁니다."
"…아니네. 과한 의심을 해서 미안하네."
넬로스는 브란스를 힐끔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브란스가 먼저 하벨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클로저에서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진 건 맞으나, 이렇게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선물. 고맙게 받겠습니다, 달님 씨. 보답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작지만, 제 명예와 이름을 걸고 꼭 당신의 의견을 전달하겠습니다."
"정말 계속 고마워요. 연락은 라르웬 씨를 통해서 하면 됩니다. 브란스 씨라면 꼭 받겠습니다."
하벨은 클로저들에게 대충 손을 흔들고는 아직 살아 있는 간부들을 쳐다보았다.
"이제 갈까?"
어차피 거절은 받지 않을 셈이었다.
저들에게 미래란 없으니까.
* * *
하벨은 적당한 곳에 간부들을 끌고 간 뒤에 대충 평평하게 생긴 돌에 앉았다.
"이 정도로 떨어졌으면 되겠지?"
하벨이 묻자 레디나가 실실 웃으며 손에 든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물론이죠. 이미 충분히 멀어졌어요."
"아라야. 그리고 얘들아. 미안한데 누가 오는지 감시 좀 해줄래?"
[응응! 우리가 잘 보고 있을게. 우리한테 맡겨.]
아라가 꼬리를 흔들었다.
하벨은 정령들이 흩어지는 걸 보며 간부들을 쳐다보았다.
독기가 가득 어린 저 얼굴을 보자 하벨을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곧 무슨 표정이 등장할까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안녕."
하벨은 가면을 손에 쥐었다.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죽여주마……."
"죽여버리겠어!"
간부들이 내지르는 소리는 어차피 칼리우스가 차단해 문제없었다.
"그러니까 알려줄게."
하벨은 친절한 목소리를 냈다.
천천히 하벨의 가면이 얼굴을 떠나자 간부들의 얼굴이 굳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