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한 놈, 두 놈, 세 놈, 네 놈(2)
* * *
하벨은 결계가 만들어진 과정을 바라보며 클로저들을 재촉했다.
"뭐 하세요? 계속 그대로 있을 거예요?"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클로저가 무기를 들며 하벨에게 으르렁거렸다.
"사태 파악 제대로 해야죠. 이건 간부를 잡기 위한, 결계."
하벨은 자신들을 둘러싼 마법을 가리켰고, 이어 손가락이 카샬이 두 발등을 꿰뚫은 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날 습격한 검은 달.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알겠죠?"
"…주목!"
그나마 바로 정신을 차린 넬로스가 클로저들에게 명령했다.
쩌렁쩌렁 울리는 그 소리에 클로저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우리의 무기는 이제부터 검은 달을 향한다! 우리를 공격하는 자야말로 검은 달의 끄나풀이기에 주저하지 말고 공격하거라!"
착.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클로저들은 진영을 이루듯 흩어져서는 바짝 경계했다.
"달님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라르웬이 자연스럽게 하벨 옆으로 다가왔다.
"용케도 참으셨네요?"
하벨이 작게 속삭이자 라르웬이 루룸을 슬쩍 보았다.
"내 머리카락을 뜯었어."
루룸이 보란 듯이 라르웬의 머리카락을 쥔 발바닥을 보여주었다.
"햇님아."
하벨이 웃음을 참으며 칼리우스를 불렀다.
"응."
"보이는 족족 눌러버려."
"알고 있어! 다 납작하게 만들어줄게."
발등이 뚫린 간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다시 몸을 숨겼고, 분위기가 어느 정도 만들어지자 하벨은 클로저들을 향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모습을 나타난 저들은 단순히 검은 달의 일원이 아닌 무려 간부입니다. 미리 말하지 못해 무척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클로저들 전부가 미끼였습니까?"
브란스 역시 하벨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뇨. 미끼는 처음부터 접니다. 클로저들은 간부들을 가려주기 위한 은닉 장소에 불과했고요."
이 뻔한 놀음에 간부들이 보기 좋게 걸린 이유는 간단했다.
좋지 않게 흘러가는 검은 달의 상황으로 일어난 초조함과 압박감, 그리고 자신을 향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달님."
레디나가 단검을 들지 않은 손을 꽉 쥐며 하벨을 불렀다.
"괜찮아. 사냥해. 네가 하고 싶은 만큼 마음껏."
이곳이라면 레디나에게도 공평했다.
익숙하지 않은 곳, 한정된 공간, 계급을 다 떼버린, 그야말로 순수한 사냥터가 아닌가.
"고마워요."
레디나는 짐승이 되어 발을 놀렸다.
얼마나 신이 난 건지 그녀가 있던 자리에 한 번도 보지 못한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하벨이 아라를 슬쩍 바라보자 아라는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자, 얘들아 간다?]
[응! 나 눈 되게 좋아.]
[간부는 4명이었어. 위에서 다 봤어.]
[표시하는 거 맞지?]
[응응! 맞아! 이제 시작!]
아라가 앞발을 들자 불이 피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화르륵.
"……?"
클로저들 속에 숨어 있던 간부 두 명도, 나무 뒤에 숨었던 간부도, 카샬의 검에 두 발등이 꿰뚫린 간부마저 갑자기 머리 위에 나타난 숫자에 당황했다.
"자, 여러분. 이제 사냥감이 누구인지 확실해졌죠? 숨기 전에 달려드는 겁니다. 당신들이 가장 익숙한 방법으로 사냥을 떠나야죠."
하벨은 키득거리며 클로저들을 재촉했다.
클로저 중 일부가 지금 붙잡히다시피 한, 발등이 꿰뚫린 간부 2를 향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콰콰콰!
"…젠장."
아쉬움이 묻어난 레디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벨은 다시 목소리를 냈다.
간부가 쉽게 잡힐 거라 생각하지 않았으니 레디나와 달리 실망감이 없었다.
"아, 내 주변에 있어도 유리할 겁니다. 검은 달은 나를 잡기 위해 지금 혈안이 되어 있거든요. 그렇지, 간부들아?"
하벨의 손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르르륵.
"나를 죽이고 싶잖아? 이대로 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끝나는 건 너희야."
이어 왼손에는 번개가 타올랐다.
파지지직.
"째깍째깍. 시간이 흘러가네?"
"너……."
라르웬은 말을 꺼내다 말고 칭찬이 나올까,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저건 자신이 즐겨 쓰는 공격 방법이 아닌가. 왠지 기뻤다.
[와. 오고 있어.]
정령들이 속닥거리는 와중에 아라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칼리우스의 눈이 바쁘게 움직이며 하벨의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간부의 몸에 흐르는 마나를 느끼며 마법으로 세게 짓눌렀다.
쿠웅!
'와아. 화가 났나?'
하벨은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칼리우스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익! 사라졌어!"
하지만 그곳에 간부는 없었고, 하벨의 손은 움직이고 있었다.
검날이 손아귀에서 만들어지고, 번개와 불꽃이 울부짖었다.
"화가 날 만하지요. 달님 본인을 미끼로 삼을 거라는 말을 듣고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카샬이 자신의 등에 떠오르는 검을 움직였다.
파파파파!
검들이 간부를 쫓으며 땅을 향해 순서대로 내리꽂던 와중에 카샬이 땅에서 발을 튕기며 바람의 힘을 이용해 가속도를 붙였다.
카샬은 눈을 떴다.
간부의 머리에 뜬 숫자가 사라졌지만, 놈이 쥔 검의 소리가 들렸기에 어디에 있는지 알아챘다.
금방이라도 사선으로 벨 것처럼 굴던 카샬의 검이 방향을 틀었다.
그대로 복부를 찌르듯 앞으로 뻗어 나갔다.
콰직!
피가 튀었고, 땅에 머리를 박고 있던 검들이 일제히 다시 카샬의 등 뒤로 날아왔다.
모습을 드러낸 간부의 머리에 숫자 2가 떠올랐다.
간부 2는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그대로 카샬의 심장을 향해 검이라는 송곳니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하벨은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날 뒤로 만들어진, 불과 번개가 합쳐진 거대한 대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간부 2가 들이밀던 검마저 깨부수며 놈을 땅에 박아버렸다.
불과 번개가 동시에 일어나 놈을 태우고, 지져버렸다.
'저대로 죽지는 않지.'
하벨은 검은 달의 끈질긴 생명력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무리 짓지 않았다.
조금 전 실망하며 숨죽여 있던 또 한 마리의 짐승을 기다렸다.
콱.
바람에 휩싸인 레디나의 단검이 간부 2의 목덜미를 뚫었다.
간부 2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레디나가 휘두르는 다른 단검에 목이 날아가고, 피가 튀었다.
"하하하하!"
레디나가 날아간 목을 공처럼 잡으며 웃었다.
저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에 같은 편은 맞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어 행동을 멈추고 레디나를 쳐다보는 클로저들도 있었다.
하지만 클로저들은 멈추질 않았다.
암살자답게 갑자기 사라지곤 하지만, 머리 위에 떠오르는 숫자만 본다면 대처하지 못할 건 없었다.
오히려 방심하다간 저놈들에게 목덜미를 내어줄지도 몰랐다. 이미 여러 명의 클로저들이 조용히 죽지 않았던가.
'…이 상황을 보면 달님이 옳았다.'
넬로스는 검에 오러를 새기며 여전히 미끼가 된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하벨을 바라보았다.
간부의 전력을 약화하고자 여러 가지 준비했다는 건 알겠지만, 왜 아직도 자신을 미끼로 삼고 있는 건지.
넬로스는 머리 위에 나타난 숫자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오러가 힘껏 발산된 검기가 간부 4를 덮쳤다.
콰드드득.
하지만 간부 4가 몸의 방향을 뒤틀어 오러를 피하자 애꿎은 땅을 쓸었고, 흙먼지가 일어났다.
흙먼지 속에 몸을 잠깐 숨긴 간부 4가 그대로 하벨에게 접근했다.
'모두가 저 썩을, 달 가면 때문이다!'
저놈에게 접근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눈에 거슬렸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일이 갑자기 꼬여버리지 않았는가.
어떻게 자신들이 이곳에 올 거라 예상했는지, 이런 결계는 또 어떻게 준비했는지.
게다가 미리 대기 시켜두었던 부하들과 연락이 끊어져버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속에서 화가 올라왔다.
지금 이렇게 함정에 빠질 수 있었던 원인은 딱 하나이질 않은가.
내부자.
'…누군가 정보를 흘렸다.'
간부 4는 이를 악물었다.
더는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파지지직!
번개가 코앞에서 내리치자 간부 4는 그대로 발걸음을 멈췄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어딜 감히."
라르웬이 눈꼬리를 올리며 하벨에게 접근하는 간부를 더는 허락하지 않았다.
"…라르웬?"
브란스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가면단들의 실력에 또 놀란 것도 사실이나, 라르웬의 행동에 더 놀랐다.
"왜 그러시죠?"
라르웬이 태연하게 묻자 브란스가 입가를 핥으며 말했다.
"혹시 화났나?"
"그래 보입니까?"
"아주 많이?"
"정확히 보셨네요."
라르웬은 이가 갈렸다. 첫 번째 공격은 하벨의 부탁 때문에 참았다.
하지만 이제는 참고 있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라르웬이 땅을 굴리자, 하벨 역시 슬쩍 땅을 굴렸다.
콰르르르!
간부 4가 서 있던 땅이 갈라졌다.
라르웬의 시선이 바로 하벨에게 향했다. 하지만 하벨은 모르는 척 슬쩍 시선을 돌렸다.
쿵!
칼리우스가 만든 강한 중력이 간부 4를 강하게 짓눌렀지만, 라르웬에게 지금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헤레스가 과로라고 했는데! 이, 이 사고뭉치가!'
라르웬이 당장 하벨에게 무어라 말하려고 하자 루룸이 라르웬의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정신 차려, 라르웬. 앞을 봐야지.]
분노가 들끓었지만, 라르웬은 꾹 참으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부들부들 떨던 놈의 행동이 한순간 멈췄다.
헤레스였다.
라르웬은 그대로 바람을 타듯 부드럽게 놈의 심장을 노리려고 했지만, 이 역시 멈췄다.
저놈 뒤에 누군가 있었다.
가슴팍에서 단검이 튀어나왔다.
푸욱!
라르웬은 자신에게 튀기는 피를 피해 옆으로 움직였다.
"양보해줘서 고마워요."
레디나가 씩 웃고는 그대로 발로 밀치며 머리를 베어냈다.
"이제 두 개예요."
키득키득.
도르르 구른 간부 4의 머리를 쥔 레디나의 웃음에 라르웬은 검을 내렸다.
'아… 맞다. 여긴 애초에 레디나를 위해 막내가 꾸민 무대였지?'
이유를 생각하니 라르웬은 사냥감을 빼앗겨도 전혀 화가 내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들어 레디나를 위해 옆에서 자꾸 요란하게 들려오는 곳을 가리켰다.
"어서 가야지?"
"고마워요. 정말로요. 저는 진짜 행복해요."
레디나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가면을 썼어도 그녀의 마지막 시선은 라르웬 자신이 아니라 하벨에게 향한다는 걸 알았다.
이 소란과 달님이라는 미끼는 전부 레디나를 위한 무대였다.
암살자가 가장 활약할 수 있는 무대는 바로 제약된 환경, 적이 방심한 순간이니까.
하벨이 일부러 결계를 친 건 제약된 환경을 위해서고, 클로저들이 마음대로 설치게 둔 것과 하벨 본인을 미끼로 삼은 건 간부들의 눈을 속이기 위함이었으니.
수많은 적이 있는 간부들과 노려야 할 게 분명한 암살자 중에 누가 더 강하겠는가.
라르웬은 다시 하벨에게 돌아갔다.
'대단해. 정말 내 동생이지만, 최고란 말이지.'
라르웬은 지금 당장 달님이 자신의 동생이라 밝히고 싶어 입이 간지러웠다.
하벨이 갑자기 손을 들었다.
손가락 두 개를 올리며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두 놈 남았습니다! 꽁지 빠지라 도망치는 모습이 우습지 않습니까? 이대로 다 죽이고 지부까지 불바다로 만든다면 누가 클로저들을 함부로 노리겠습니까?"
하벨은 클로저들에게는 사기를 돋웠고, 간부들을 도발했다.
"…간부라고?"
조금 전 하벨이 꺼낸 말을 듣지 못했던 클로저들이 크게 반응했다.
어쩐지 다르다 싶더라니.
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검은 달의 위계질서가 어떻게 되는지 몰라도 간부라는 이름을 봤을 때 높은 게 틀림없었다.
사기가 더욱 차올랐다.
"햇님아."
하벨은 저 모습을 보며 칼리우스를 불렀다.
칼리우스가 다가와 하벨을 바라보았다.
"응?"
"결계를 좁혀줄래?"
"그래도 돼?"
"지금 다들 눈이 돌아갔거든. 딱 좋아. 아, 비야."
하벨이 이어 헤레스를 불렀다.
"예, 달님."
"간부 둘 다 잡을 수 있겠어?"
"네. 가능해요. 이미 제 마나를 발라놨어요."
"너무 과하게 하지 않아도 돼. 저기 보이지?"
하벨은 자신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사기가 한껏 오른 클로저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간부 둘을 가리켰다.
"내가 봤을 때, 지금은 결속력을 다지는 게 좋을 것 같거든. 그렇죠, 브란스 씨?"
"…이 와중에 나중을 대비하는 것입니까?"
브란스가 놀라며 물었다.
"맞아요. 그래도 한 번 봤다고 나는 브란스 씨가 편하니까 말씀드리는 거예요. 내부의 적은 아직 남아 있을 겁니다. 다만, 조용히 아닌 척 입을 다물고 있겠죠."
브란스는 이어진 하벨의 말에 침이 절로 삼켜졌다.
대체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건지 몰랐다.
"클로저의 우두머리는 믿을 만합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브란스가 아닌 라르웬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하벨은 뒷말을 흘리지 않았다.
라르웬이 그렇다는데 무어라 말하겠는가.
"추후 지부 어딘가 검은 달과 내통한 클로저들의 명단이 있을 겁니다. 그걸 위해 오늘 일은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내통자를 처리하고자 한다면 조직 내 결속력이 높아야 했다.
오늘 이렇게 조직에서 버려지다시피 한, 내통자라 내몰린 저들이 검은 달을 무너트리는 행동 자체가 다른 클로저들의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끼게 하며 내통자를 처리할 좋은 힘이 되어줄 테지.
'…자신은 내통자가 아님을 주장해야 하니까.'
하벨은 브란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그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브란스 씨?"
"대체… 당신의 정체가 뭡니까?"
"쉿. 때론 모르는 게 아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습니다."
하벨은 키득거렸다.
이제 끝을 낼 차례였다.
간부든 뭐든 애초에 암살자가 노출된 순간부터 패배는 확정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