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내가 줬으면 너도 줘야지(3)
* * *
"그게 누구더냐?"
드란트는 살짝 급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바안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에르티안 왕국의 선왕을 시해한 범인이 '코스모피안' 사람이라 주장했다는 말이었다.
단연코 자신은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고, 만약 이 일마저 퍼져간다면 코스모피안 왕국은 정말로 모든 나라의 적이 될 테니 동맹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내게 그 더러운 레놀드 왕국이라 말하거라!'
하지만 여전히 하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드란트는 분노를 드러내며 약속을 꺼냈다.
"혹 레놀드 왕국인가? 아니면 레놀드가 아니어도 좋다. 누구인지 말하거라. 내 그놈을 당장 찢어 죽이겠다 약속하마!"
갑자기 하벨의 입꼬리에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가 어리자 드란트는 흠칫 놀랐다.
무언가 함정에 걸렸다는 느낌이 몰려왔다.
그게 무엇일까. 어떤 함정일까.
드란트의 머릿속이 복잡해질 무렵, 하벨은 느긋하게 그 이름을 언급했다.
"전하의 첫째 아들, 레바놈 코스모피안입니다."
"……?"
드란트는 하벨이 꺼낸 말에 그대로 정지됐다.
드란트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 이마를 쓸어넘겼다.
침착하려고 해도 손끝부터 떨려왔다.
"…거, 거기서 왜 내 아들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인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드란트는 손을 내린 뒤 다시 차분하게 물었다.
"그야 레바놈 저하가 중간 다리니까요."
"그대가 잘못 알았던 걸세."
"아까 그 패기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약속하셨으면 지키셔야죠."
"지금 나를 우롱하러 왔는가? 내 상황을 조롱하기 위서라면 그만두게. 공을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하네."
"아뇨. 증거라면 곧 드리죠. 하나, 먼저 아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벨의 눈빛이 전혀 변하지 않았기에 드란트는 숱한 경험을 통해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절실한 진실이라는 걸.
"전하께서는 코스모피안 왕국의 왕임을 떠나 레바놈 저하의 아버지이시기에 응당 먼저 찾아뵙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리는 다했다.
하벨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녕… 내 아들이 그랬단 말인가?"
드란트는 분명 레바놈과 사이가 좋지 않음에도 크게 흔들렸다.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로.
하벨은 드란트의 상태를 지켜보며 대답했다.
"예. 제가 굳이 바안 전하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알리면서까지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에르티안 왕국은 물론 저 역시 아무 이득도 없습니다."
드란트와 레바놈 사이를 이간질해 에르티안과 티에라 가문이 얻을 이득은 손에 꼽아봤자 코스모피안 내부의 혼란뿐이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결과적으로 이득일 게 없었다.
이 세계에 제국은 없었으니, 레놀드 왕국과 코스모피안 왕국의 미묘한 균형이 무너진다면 레놀드 왕국의 독주로 이어질 수 있었으니.
"…중간 다리라고 말했으니 그렇다면 어느 쪽과 이어져 있는지 말해줄 수 있겠는가?"
"말씀은 해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 저만 너무 전하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하벨은 드란트가 딱 감칠맛이 날 때 손에 든 사탕을 뒤로 숨겼다.
"여기서 내가 무얼 하면 되겠는가. 아니, 무얼 바라는가?"
수작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드란트는 하벨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수밖에 없었다.
일단 벌어진 사건이 너무도 컸고, 거기에 아들이 엮어있었다.
사람이면 이걸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에르티안 왕국과 코스모피안 왕국을 흔든 적이 무너질 때까지 코스모피안 왕국과의 절대적 동맹을 원합니다."
하벨은 코스모피안 왕국이 국익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도중에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 배에서 절대로 네 마음대로 내리지 못할 것이다.'
드란트의 시선이 흔들렸다. 생각보다 강한 수였다.
"또 있습니다, 전하."
하지만 하벨의 말이 멈추질 않자 드란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충분하거늘, 또 있단 말인가."
"첫째 저하에게 무겁고 강력하며 죄에 걸맞은 처벌을 바랍니다."
"지금 무얼 하자는 것인가!"
"혈육의 정이 무섭다는 건 압니다. 감히 얼마나 소중한지 제 입으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흔들려 모든 걸 망칠 수 없기에 미리 언질을 드리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독하게 먹으시지요. 저하는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벨의 당돌한 말에 드란트의 얼굴이 기어코 와락 구겨졌다.
"정녕 그대가 나의 위에 서겠다는 말인가?"
"위가 아닙니다. 제가 전하께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알려드리는 걸 보셨음에도 그리 말씀하는 겁니까? 제 말이 곧 바안 전하의 말과 같습니다. 하여 저는 이 둘을 손에 넣어야겠습니다."
"허락할 수 없다!"
드란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요구하는 건 애초에 거래로서 맞지 않았다.
무언가 더 얹어야만 했다.
설령 하벨이 바안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들 살아온 세월이나 경험은 거의 없다시피 할 테지.
요구를 줄일 수는 없어도 자신은 거기에다가 조건을 걸 수 있을 거라 보았다.
'망설이거라.'
드란트는 사회 초년생의 패기와 더불어 일어나는 불안함을 기대했다.
오히려 시선은 넬시아와 라르웬에게 향했다.
하벨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그들이기에 중간에 끼어든다면 곤란해지는 건 자신 쪽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저 역시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벨은 드란트의 예상과 다른 방향을 택했다.
이 정보가 필요한 건 다름 아닌 드란트이기에 흔들리고 있을 테지.
'네 패기는 다 보인다, 드란트. 하지만 감히 내게서 흥정을 요구하다니.'
하벨은 마지막 작별인사를 꺼내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고, 아라는 흔들렸다.
[어, 어어.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이렇게 가버리면 대장이 원하는 건 이룰 수 없는데?]
"그럼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회담에서 서로 의견이 달랐다, 바안 전하께 그리 보고 하겠습니다."
드란트는 그대로 등을 돌리는 하벨을 보자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죽여야 할까.
아니. 하벨을 죽인다면 지금 바로 전쟁이 벌어질 게 뻔했다. 일반인도 아닌, 물 마법사였으니.
'참아라. 참아.'
이 잠깐의 감정으로 많은 이들이 죽는 상황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드란트는 이가 갈리는 심정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이건 내가 무조건 불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네."
하벨을 뒤따라 등을 돌리려던 넬시아와 라르웬이 멈췄고, 그 후에야 하벨이 멈춰 드란트를 바라보았다.
"한데 공은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제시하는 건 과하다 생각하지 않나?"
"그게 정보를 가진 자의 여유가 아니겠습니까?"
하벨이 얄밉게도 씩 웃었다.
드란트는 현재 왕으로서 자존심을 살짝 내려놓으면서 동시에 지키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습게도 조건을 내밀게 분명했다.
'이제 내게 말해야지. 어서.'
"마법사 협회를… 건드려주게. 하면 받아들이겠네."
드란트가 손에 힘을 꽉 쥐며 말했다.
잠깐 하벨의 입꼬리가 실룩거려왔다.
'마법사 협회가 바로 나왔네?'
하벨은 즐거웠다.
자신이 드란트에게 받고 싶었던 건 조건이 튀어나왔다.
"놈들이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네. 내가 확인한 건 오염된 물이 움직였다는 반응일세. 분명히 그대의 가문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일 걸세."
하벨은 이어지는 말에 기쁨을 꽉 누르며 물었다.
이 땅에서 설쳐도 된다는 허락은 이미 받은 셈이 아니겠는가.
"하면 레바놈 저하의 마지막 숨통쯤은 바안 전하께 양보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벨이 또 제안하자 드란트는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선을 넘었다 생각한 순간, 하벨이 입을 열었다.
"이 조건을 허락하신다면 마법사 협회의 그 높은 탑을 반으로 뚝, 부서트려주겠습니다."
자신만만한 그 말에 드란트는 단번에 올라왔던 화가 가라앉았다.
그저 건드려달라던 조건이 마법사 협회를 부서트리는 걸 바뀌었다.
"수도에서 벌어진 거대 정화 장치에 일어난 이상 현상을 압니다.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그대가… 어떻게 그걸 없앤단 말인가?"
드란트는 하벨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는 묻지 않았다.
티에라 가문이 왜 티에라 가문이겠는가.
다만, 없앨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이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잊으셨습니까? 저는 물 마법사입니다."
쉬잇.
하벨은 검지를 입술에 올렸다.
게리온의 말을 따르자면 드란트는 오염된 물을 무척 신경 쓴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을 붙잡아야 하는 게 맞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증명하듯 드란트의 눈동자에 희망이 가득 어렸다.
"어떠십니까?"
하벨은 속삭이듯 드란트를 살살 긁었다.
"저는 외부자이기에 전하께서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좀 더 수월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하벨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뭔가 자신이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자 드란트는 이 사실이 너무도 수상했다.
드란트의 시선에 의심이 어리자 하벨은 여기서 확실한 못을 박았다.
게리온을 통해, 이곳에 오면서 무수히 들었던 말, 심지어 드란트에게도 나오지 않았던가.
레놀드 왕국이 싫다고.
너무나도 싫고, 증오스럽다고.
"얽힌 곳은 레놀드 왕국입니다."
하여 하벨은 레놀드 왕국을 향한 강한 분노와 적개심을 건드렸다.
"레놀드……."
드란트가 이를 악물며 그 이름을 말했다.
점차 점차 일그러지는 드란트의 표정에 그가 쌓았던 이성의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게 보였다.
"지금 레놀드 왕국… 이라고 했는가?"
"그렇습니다."
"지금 내 아들이 레놀드 왕국과 손을 잡고 에르티안 왕국의 선왕을 시해한 건 물론 일부러 자작극까지 벌이도록 도와줬단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전하."
빠르게 스며드는 서늘한 감각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드란트의 눈가에 핏줄이 어리고 어리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하마."
드란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대의 제안을 허락하마!"
* * *
계약서는 아직 어설픈 자신을 대신해 넬시아 쓰기로 했다.
하벨은 잠깐 쉰다는 핑계로 아라를 살짝 불러 드란트가 내어준 방에 같이 들어갔다.
"카샬."
"…예, 도련님."
방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을 부르는 터라 카샬은 그렇게 마음이 조급할 수가 없었다.
"잠깐 갔다 올게."
"어딜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몸이 물의 길을 열면 돼?]
그제야 아라는 하벨이 방에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았다.
칼리우스만 어리둥절했다.
"맞아. 조각난 내 영혼을 찾으러 가야지."
조각난 영혼이라는 말에 칼리우스는 입을 가렸고, 카샬은 주춤거렸다.
하벨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카샬은 말을 돌렸다.
"하지만 저번처럼 왕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럼 확인한다고 생각해야지. 무턱대고 왕한테 물을 수도 없잖아?"
하벨은 잠깐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내가 왕을 너무 자극했거든. 그러니까 몰래 가는 거야."
"아주 잘하셨습니다. 일단 헤레스 씨와 엘라힘 신관을 부르겠습니다."
"음, 이번에는 좀 다를 텐데?"
하벨이 여유롭게 말했지만, 카샬은 그냥 흘리지 않았다.
"처음 조각난 영혼을 얻으셨을 때 난리가 났던 걸 벌써 잊으셨습니까?"
"그건 처음이어서 그랬어. 영혼을 어떻게 흡수하는지 몰랐거든. 물도 진정시켰어야 했는데 내가 당황했어. 엄청 많이."
하벨은 류아를 떠올렸다.
분명 류아 본인은 틈의 세계에 있는 다른 존재들에게 쫓길 걸 알면서도 자신을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이 당황하고, 허둥지둥거려서 에른스트에게 들킬 걸 예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
하벨은 카샬을 보며 활짝 웃었다.
"용용이가 더 강한 힘으로 침식을 억누르고 있거든."
"맞아. 이전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눌렀어. 하지만 강하다고 해서 풀리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조심해야 해, 도련님."
칼리우스가 제법 단호함을 드러내며 말하자 하벨은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지."
"나, 지금도 도련님한테 걸린 저 저주를 풀기 위해서 계속 살피고 있어."
"이제는 잘 보여?"
"응. 이제는 훨씬 더 잘 보여. 그래서 저 저주를 풀 자신감이 생겼어."
칼리우스가 배시시 웃었다.
이전에는 마냥 복잡해 보였지만, 성장한 지금은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이 이상해 계속 보고 있었다.
분명 하벨은 저주가 하나라고 했는데 하나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럼 칼리우스를 데리고 가십시오."
카샬은 칼리우스가 작은 포탈을 열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가 성장했기에 용으로서 더 많은 능력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대처할 힘이 있었다.
"여기는 제가 잘 막아 보이겠습니다."
하벨이 자리를 비워서 발생할 일들을 처리하는 건 자신의 몫이었다.
"고마워, 카샬."
하벨이 실실 웃자 카샬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운 게 아니라 당연한 겁니다, 도련님. 그 영혼은 원래 도련님의 것이었을 테니까요."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인데 뭐가 고맙다고 말하는 건지.
카샬은 하벨을 바라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빼앗겼으니 되찾아야 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럼 너도 그래?"
느닷없이 찔러온 하벨의 물음에 카샬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는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처음부터 제 자리는 없었습니다. 지금 제가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고요."
코스모피안 왕국에 왔을 때부터 카샬은 가슴이 뛰었다.
자신의 모국, 헤스트리아 왕국과 너무도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방금 하벨에게 언급한 대로 그곳에는 애초부터 자신의 자리란 존재하지 않았다.
"얼른 출발하십시오. 도련님께서 귀족들을 너무도 잘 건드셔서 지금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까요."
"그래. 금방 갔다 올게. 아라야."
[응, 대장!]
"어디 있는지 알겠지?"
[응! 이 몸은 아까 바로 알아챘어. 이 몸만 믿어!]
아라가 우쭐하며 물의 길을 열자 하벨은 고민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자, 영혼을 찾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