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나랑 같이, 어때요?
* * *
"……?"
하벨은 눈을 크게 떴다.
'저게 무슨… 개소리인가?'
레놀드 왕국의 공작인 샬룸이 자신을 도와주려고 먼저 레놀드로 간다니.
"제 말을 믿지 못한다는 건 압니다. 거꾸로 바뀌어도 그럴 테니까요."
"아뇨. 믿습니다."
하벨은 신뢰감이 가득한 눈으로 샬룸을 보았다.
개소리에는 개소리였다.
설마하니 자신이 샬룸을 믿을까.
웃기게도 이번에 놀란 건 샬룸이었다. 저게 연기인지 아닌지 몰라도 하벨은 그 모습이 웃겨 키득거렸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어쩐지. 왜 저렇게 하시는 걸까 계속 생각했습니다."
"생각을… 하다뇨?"
"계속 절 도와주셨잖습니까."
"…티가 났습니까?"
"그럼요. 티가 났습니다."
곧 하벨은 어깨에 힘을 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절 도와주신다는 말씀은 고맙지만, 대체 어떻게 돕는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하벨 공."
"네."
"언짢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화내지 마십시오."
하벨은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그냥 눈을 크게 떴다.
대체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기대도 됐고.
"레놀드 왕국은 공을 환영할 겁니다."
'…저 말 어디서 들었는데?'
하벨은 익숙한 말에 잠깐 생각하다가 곧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코스모피안 왕국은 티에라 가문을 언제든 포용할 생각이 있습니다.
코스모피안 왕국이 에르티안 왕국에 뿌리를 깊게 박고 있다는 걸 알려준 데론 트로인이 지껄이던 말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 말 역시 갑작스럽다는 걸 이해합니다. 하지만 에르티안 왕국은 제가 보기에 위태합니다."
'사건이 많이 터졌으니 그렇게도 보일 수 있지.'
하벨도 영 틀리지 않은 사실에 샬룸의 말을 흘려듣진 않았다.
"저는 티에라 가문이 필요한 게 아니라 공이 필요합니다."
"제가요?"
"예. 혹시 제가 이전에 말씀드렸던 걸 기억하고 계십니까."
"미안합니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혹시 무슨 말을 했죠?"
하벨은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음, 이건 자국의 이익과는 별개로 세상을 위해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존재는 언제나 필요하다고 매번 생각해서 꺼낸 말입니다. 물론, 그런 존재가 저였으면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죠. 그러니 당신이 됐으면 합니다.
물론 기억은 하고 있었다.
그 개소리를 어떻게 잊겠는가. 자신이 희망이 되지 못하니 자기보고 하라고 했던 그 뻔뻔한 말을.
"괜찮습니다. 지금 다시 말하면 되니까요."
샬룸은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를 냈다.
"세상에는 희망을 주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바로 하벨 공이지요."
잠깐 샬룸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저는 공을 보호할 생각이고, 에르티안 왕국은 그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여 레놀드 왕국은 공을 환영한다고 말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필요한 겁니까?"
"요약하자면 그렇죠. 하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일단 레놀드 왕국으로 가서 에르티안 왕국이 이번 일에 휩쓸리지 않게 막을 겁니다. 아무래도 이번 사건에서 제일 강한 압박을 줄 수 있는 나라가 레놀드일 테니까요."
"혹시 이참에 범인도 찾을 생각입니까?"
흐름을 타듯 하벨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음.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에르티안 왕국에서 벌어진 이상 허락을 받아야겠죠. 아, 물론 요청은 할 겁니다."
샬룸의 말버릇인지, 아니면 분위기가 그래서인지 몰라도 거창한 일처럼 느껴졌다.
결론은 레놀드의 왕에게 에르티안 왕국은 '아무 잘못이 없다'라는 걸 말하러 가는 게 아닌가.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자면 레놀드 왕국은 하벨 공을 언제든지 환영할 겁니다. 사람들을 구한 영웅이니 당연합니다."
하벨의 반응을 기대했는지 샬룸은 기대에 찬 눈빛을 했지만, 정작 하벨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손을 들어 뒷덜미를 만지작거렸다.
호응 없는 연설을 한 후보자의 표정과 닮아있었다.
"그, 음, 귀족들의 화법에 거짓이 많아 경계심이 들겠지만, 저는 정말 진심입니다. 그러니 너무 의심하지… 말아 주세요."
그때, 하벨이 활짝 웃었다.
너무도 순수한 미소가 아닌가.
"아뇨. 저한테도 그렇게 들립니다. 그냥 놀랐을 뿐입니다. 저를… 이렇게 생각해주는 사람도 있다니."
하벨은 외부에서 보는 하벨 티에라를 떠올렸다.
하벨 티에라에게 이제껏 '편'이라는 사람이 있었을까.
어쩌면 그에게 있어 처음으로 호감을 넘어 도움까지 준 사람일지도 몰랐기에 그러는 척 꾸며나갔다.
"그게, 음, 그냥 놀랍네요."
하벨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를 바라보던 샬룸의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지다 곧 포근히 감겨왔다.
"그렇게 말해주니 너무 기쁜데요? 혹시 레놀드 왕국의 도움이 필요할 때, 이걸 내보이면 됩니다."
샬룸은 주머니에서 동그란 배지를 꺼냈다.
"이게… 뭔가요?"
"공이 나중에 레놀드 왕국으로 오실 수도 있잖습니까. 그때 쓰십시오. 그냥 내밀기만 하면 됩니다. …아, 만지면 독이 있다든지, 마법이 튀어나온다든지 하는 등 그럴 일은 없습니다."
괜찮다는 걸 직접 알려주려는지 샬룸은 배지를 자신의 이마에 찍어보고 손가락으로 눌러보고, 심장에 가까이 대보고 양손으로 꾹 누르기도 했다.
"믿기 어려우시다면 제가 보는 앞에서 감정을 해봐도 됩니다. 하지만 저는 맹세코 이 배지에 수작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하벨이 그저 배지를 보며 눈을 크게 뜨자 샬룸은 여전히 자신감이 넘친 태도로 배지를 흔들었다.
"만약에 제가 하벨 공에게 해코지한다고 하면 이 방법은 너무 유치합니다. 찝찝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라면 그냥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이는 게… 뭐어, 그렇다는 말입니다."
도중에 말을 멈춘 샬룸은 자신이 너무 과했다는 걸 깨닫고는 배지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까지 신경 써줘서 고맙습니다."
하벨이 손을 내밀자 샬룸은 두 손으로 하벨의 손바닥에 배지를 내려놓았다.
샬룸이 말한 대로 무언가 이상한 건 느껴지질 않았다.
'안정성은 당연히 확인해야 한다.'
하벨은 일단 활짝 웃으며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고마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연히 신경을 써야죠.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는 물 마법사가 아닙니까?"
샬룸은 활짝 웃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하벨이 놀라며 묻자 샬룸은 자신이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토로했다.
"감사합니다, 하벨 공. 공 덕에 레놀드 왕국의 대신들이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는 레놀드 왕국의 대표로서 인사드리겠습니다."
하벨은 묘한 시선으로 아래로 향한 샬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노랗게 물든 머리카락이 언뜻 보였다.
"……?"
하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가발이라고?'
마치 자신에게 보라며 노골적으로 내보인 것 같지 않은가.
* * *
푸욱!
번개가 둘린 창에 배가 뚫리자 복면으로 가리지 못한 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커헉!"
여전히 창을 쥔 라르웬은 놈의 다리를 걸어 뒤로 쓰러트리며 덩달아 아래로 힘을 주었다.
쿠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놈이 바닥에 닿자 창이 더욱 깊게 들어가며 놈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목을 베지 않으면 웬만큼은 안 죽는다는 말이 사실이라니.'
라르웬은 아직도 살아 있는 놈의 끈질긴 목숨에 혀를 찼다.
[하벨이 알려주지 않았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쟤들 진짜 싫어.]
루룸이 뒤쪽으로 시선을 두자 벼락이 떨어졌다.
콰르릉!
라르웬을 덮치려고 했던 또 다른 암살자에게 파편이 튀며 비틀거렸다.
라르웬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왼손에 두른 화염을 창으로 만들어 그대로 던졌다.
푸욱!
머리에 꽂혀서는 머리카락부터 타들어 갔다.
"그러게 말이야. 설마 했는데 진짜 덮쳐올 줄은 몰랐네."
라르웬은 씁쓸했다.
방금 클로저들끼리 모여 에르티안 왕국에 벌어진 사건에 대한 2차 회의를 끝내고 다시 왕실로 돌아가던 참이었다.
하벨이 말해주지 않았던가.
검은 달이 클로저들을 암살해달라는 의뢰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는 걸.
"그사이 의뢰가 받아들여졌네."
라르웬은 확실히 마무리하고자 머리가 타고 있는 놈의 목을 잘라버렸다.
루룸은 눈을 찌푸렸다.
라르웬은 회의에서 검은 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습을 받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을 알게 하지 않는가.
[클로저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것도 말이야.]
루룸은 일그러진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혹시 봤어, 루룸?"
[몇 놈은 봤지. 그런데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 클로저 내에서 네가…….]
"내가 인기가 좀 많지."
라르웬은 루룸이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내뱉으며 낄낄 웃었다.
다른 클로저들이 잠깐 신경 쓰였지만, 걔들도 한 사람 이상의 몫을 하니 알아서 하겠거니 생각했다.
라르웬은 다시 바닥에 쓰러진 놈을 바라보았다.
이 습격을 이끌던 놈들의 대장이었다.
라르웬이 히쭉 웃었다.
"아직 살아 있네? 좋아. 그럼 나랑 같이 갈 때가 있지."
페트리오에게 던져주면 딱 맞겠거니 생각했다.
누가 클로저를 배신했는지 알 기회이기도 했고.
"그런데 루룸."
루룸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하벨이… 이 사실을 알면 으음, 가만히 있을까?"
[에이, 하벨이 지금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데?]
"지금 시엘느의 신관들이 있잖아. 그 힘을 쓰는 게 아니겠지?"
[저번에 공짜로 가볍게 해줬으면 됐지, 또 해줄까? 신의 은총이 다 돈이라며?]
"…그렇겠지? 그럴 리가 없겠지?"
라르웬은 무척 찝찝했다.
* * *
"…샬룸을 만나셨습니까?"
감옥에서 폭파범을 면회소로 데려오는 사이 하벨이 꺼낸 말에 페트리오가 놀라며 물었다.
"그래. 뭔가 묘하더라."
하벨은 장갑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저도 그 느낌을 받았습니다. 뭔가, 일반인과 달랐습니다. 시엘느 신관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와 닮은 느낌도 들고, 당당한 모습이……."
"일단 가발을 쓰고 있었거든."
하벨이 가볍게 던진 말에 페트리오는 말을 멈췄다.
"가… 발이라고요?"
"노란 머리카락이 보이던데."
"노란 머리카락이라면……."
페트리오가 그 말에 곰곰이 생각하자 카샬이 말을 던졌다.
"딱 보면 모르겠어? 정체를 숨긴 거잖아. 레놀드 왕국이 이걸 몰랐겠어? 알면서 인정해줬으면 누구인지 감이 잡히잖아, 멍청아."
"감은 무슨 얼어 죽을 감. 이, 멍청아. 내가 레놀드 왕국의 왕족들을 모를 것 같아?"
"아."
샬룸의 의도를 계속 생각하던 하벨은 페트리오가 꺼낸 말에 샬룸에게 받은 배지를 내보였다.
"샬룸한테 이걸 받았는데 혹시 뭔가 느껴져?"
배지를 가만히 보던 페트리오와 카샬의 미간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그들의 표정과 눈동자에서 놀람이 어렸지만, 카샬은 금세 우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좀도둑아. 내가 뭐라고 했어? 샬룸이 왕족이라고 했지?"
"…그럴 리가. 내가 아는 왕족 중 이름이 샬룸인 사람은 없어."
페트리오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름도 속인 거네. 그 레놀드 왕국이 무려 인정해줄 정도이니 레놀드 왕국 내에 실세 쪽에 가깝다는 말이고."
하벨은 배지를 보며 흥미를 드러냈다.
"좀도둑. 현재 레놀드 왕국의 실세가 누구인지는 알아?"
"압니다."
페트리오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이름을 꺼냈다.
"레놀드 왕국의 첫째 왕자, 메이데인 레놀드입니다. 하지만 나이대가 맞지 않습니다. 왕이 아직 왕권을 놓지 않고 있어서 40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름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어?"
하벨은 혹시나 하며 물었다.
"있긴… 합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많을 텐데."
"잘난 척하지 말고 얼른 말해."
카샬이 핀잔을 주자 페트리오는 카샬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다는 표정으로 뒷말을 이었다.
"막내 왕자인 샤넬리움 레놀드. 나름 비슷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줄여서 샬룸인가?"
하벨은 피식 웃더니 배지를 다시 주머니에 놔뒀다.
"뭐가 됐든, 좋은 걸 얻었네?"
만약 레놀드 왕국으로 간다면 이 배지만 내보이기만 해도 왕족과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착착.
기사들 발소리가 들렸다.
교도소장과 기사들이 들어오며 하벨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놈이 멋대로 날뛰어 진압하느라 늦어졌습니다.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교도소장은 먼저 앞서 걸으려던 차, 하벨이 말했다.
"그냥 놈을 앉힌 장소만 알려주게. 어차피 금방 끝날 거라서."
폭파범을 만나려는 이유는 페트리오가 기억을 볼 수 있게 피를 얻으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놈은 위험합니다."
교도소장은 얼굴을 굳혔다.
이번에 폭파도 막고, 물 마법사가 된 하벨 티에라가 아닌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자신의 목이 날아가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그럼 방 앞까지만 따라와 주게. 아,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놈의 몸을 조금만 그어도 되겠는가?"
하벨이 자연스럽게 묻자 교도소장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긋다뇨?"
"내가 이 모양이라, 사소한 복수라고 생각하면 된다네. 얼굴이나 팔이나 흉터만 내려고 하니… 부탁하겠네."
하벨은 구슬픈 눈으로 바안이 넘긴 '(감옥에 갇힌) 가짜 코스모피안 대신들 만나기 1회.'권을 흔들었다.
"…알겠습니다."
협박인지 부탁인지. 교도소장은 망설임 끝에 대답했다.
다 떠나서 왕의 인장이 찍혔는데 이걸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