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나랑 같이, 어때요?(2)
* * *
* * *
"안녕."
하벨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폭파범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꼴이 아주 역겹네."
대놓고 꺼내는 신랄한 소리에 폭파범은 순간 울컥했다.
"꼴은 나보다……."
"카샬."
스겅.
카샬이 하벨의 부름에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을 꺼냈다.
"지금 나를……."
휘익!
카샬은 놈이 말을 꺼낼 틈도 주지 않고 놈의 머리 윗부분을 베어냈다.
머리카락이 후두두 떨어지며 놈의 정수리가 갓 자란 잔디처럼 평평해지자 놈은 순간 멈칫거렸다.
검은 멈추질 않았다.
놈의 어깻죽지부터 사선으로 그어버렸다.
피부가 살짝 벨 정도라도 피가 고여왔다.
콰앙!
놈의 뒤로 걸어가 있던 페트리오가 뒷머리를 움켜쥐며 책상에 얼굴을 박아버렸다.
다른 손으로 카샬이 벤 어깻죽지를 세게 쥐었다.
피가 새어 나오도록.
"병신같은 놈."
하벨은 책상에 파묻다시피 한 놈을 정수리를 꾹 누르며 말을 던졌다.
"내가 이런 꼴을 보면서 매번 느낀 게 있거든."
"…씨바알."
"너나 네 친구들이 목숨을 바쳐서 네가 '그분'이라고 따르는 개새끼를 위해 몸을 던진 건 알아. 그런데 그놈이 널 기억해줄 것 같아?"
"네 같은 개……."
콰앙!
페트리오가 놈이 말하지 못하게 이마를 다시금 박아버렸다.
"아니."
하벨은 낄낄 웃었다.
"전혀. 애초에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넌 개 짓거리한 거야. 너의 그 소중한 인생을 널 모르는 놈한테 그냥 던져버린 멍청한 짓거리를 한 거라고."
다시금 생각해도 하벨은 너무 웃겨 웃음을 멈추느라 애를 써야만 했다.
"나 봐봐."
하벨의 말에 페트리오가 놈의 고개를 올렸다.
"넌 아니라고 생각하지? 넌 다르다고. 그 개새끼가 널 기억해주고 여기서 탈출시켜줄 거라 믿고 있지?"
천천히 놈의 마음을 갉는 하벨의 말에 놈은 코피를 흘리며 입가를 부들거렸다.
"하지만 봐봐."
놈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주며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죽었어?"
놈은 그 목소리와 손길에 소름이 돋아났다.
"내 온기가 느껴지지? 난 네가 보는 대로 살아 있어."
손을 내린 하벨의 입꼬리가 언제 다정했냐는 듯이 금방 비틀어졌다.
"다음 생에도 꼭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하길 빌게. 여기 감옥에서 죽기 전까지 널 구하러 오지 않는 그 개새끼에게 네 인생을 바친 사실을 원망하면서 말이야."
하벨이 눈짓하자 카샬이 검을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고 하벨에게 걸어왔다.
하벨이 벗은 장갑을 받으며 카샬은 새로운 장갑을 꺼냈다.
"아. 경고를 잊었네."
천연덕스러운 하벨의 말에 놈의 눈이 흔들렸다.
경고라니.
자신에게 정보를 캐야 하는 게 맞는 게 아닌가.
"그 개새끼가 오긴 올 거야."
조금 전과 다른 말에 놈은 숨을 참았다.
"널 죽이러 말이야."
하벨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가득 담겼다.
"네가 살았으니까 개새끼가 곤란해지겠지? 아. 이참에 그 개새끼를 위해 여기서 머리 박고 먼저 죽지그래?"
휠체어가 움직였다.
문이 열리자 놈이 소리쳤다.
"…아니야!"
하벨은 놈을 향해 씩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그분은 우리에게 그럴 짓을 하실 분이 아니야! 그분을 모욕하지 마라! 이, 이……."
탁.
문이 닫혔다.
"아니야! 그분이… 그분이 그럴 리가 없다고!"
놈은 닫힌 문을 향해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눈동자에 가득했던 믿음이 천천히 조각나고 있었다.
"…아니야!"
쿵!
놈이 악을 지르다 말고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아니라고!"
쿵!
책상에 피가 가득 묻자 놈은 두 손을 벌벌 떨며 계속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야! 그분이! 그럴 리가 없어!"
* * *
'…방금은 세뇌랑 좀 달랐다.'
하벨이 코스모피안 대신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마법사들에게서 종종 보였던 흐리멍덩한 눈이 아니었다.
오히려 놈이 따르는 그분에 대한 강한 믿음이 눈동자에 어려 있었다.
―저놈은 누군가로부터 후원을 계속 받고 있었습니다. 집에 아픈 딸이 있었고요.
코스모피안 대신을 만나러 가기 전 잠깐 페트리오와 대화할 시간을 가졌다.
그는 방금 만난 폭파범의 기억을 읽었다.
―2주 전쯤에 편지를 받았습니다. 받은 은혜를 갚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아, 적어도 놈은 에르티안 왕국 백성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방의 구조나 장식물이 꽤 낯설었거든요.
페트리오는 자신이 보았던 것들을 짧고, 빠르게 요약한 뒤로 자리를 벗어났다.
―도움이 될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 방 형태가 일단 어떤 나라인지 일단 알아오겠습니다.
'저놈들이 코스모피안 왕의 도장이 찍힌 임명장을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느냐 하는 사실을 가장 알고 싶었는데 아쉽네.'
가장 알고 싶었던 걸 알지 못했기에 조금은 실망하며 하벨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톡톡.
소리가 울렸다.
'이 넓은 방에 나 혼자라니.'
코스모피안 대신을 만날 수 있는 건 왕의 대리인임을 증명하는 임명장을 가진 자신뿐이었다.
하벨은 힐끔 주변을 살폈다.
이곳이 왕실이기에 떠돌아다니는 정령들도 없었고, 옆에 늘 있던 아라도 없기에 조금 전부터 이어지던 적막함이 점점 압박으로 다가왔다.
'…불쾌하다.'
테이블을 두드리던 하벨은 갑자기 손끝이 떨려오자 당황하지 않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고요함과 적막함은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 느꼈던 풍경이라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불쾌해.'
누군가의 웃음소리도.
자신을 부르던 대신들의 소리도.
다 사라진 알현실 속 왕좌에 앉아 가만히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여나 자신이 미칠까 자신을 배반한 대신들이 바닷속이 아닌 인간 세상에 데리고 가지 않았던가.
―보글보글.
이따금 올라오는 물거품에 마음을 달랬던 기억이 맴돌자 하벨은 또 환상을 볼까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그 풍경을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고, 다시는 돌아갈 수도 없었다.
모두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그 절망감이 자신을 잡아먹어 앞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때 내 선택은 최선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하벨은 비로소 안도했다.
'그러니 정신 차려라.'
하벨은 속으로 되뇌었다.
지금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과거처럼 자신을 건든 놈을 멍청하게 바라보지 않기 위함이 아니던가.
왕실 기사들과 함께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이 걸어왔다.
덩치는 자신이 본 사람 중 가장 크며 옷을 입어도 근육이 태가 날 정도였다.
얼굴에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하벨을 본 순간 살짝 놀라며 날카롭게 세워놓았던 날을 꺾어버렸다.
이미 하벨하고 대신의 나이는 못해도 30대 이상 차이가 나 보였다.
"…반갑습니다."
말과 달리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은 퉁명스럽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하벨이 반갑게 웃자 대신은 대놓고 한탄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거, 댁은 안 갑니까?"
대신이 왕실 기사들을 쳐다보자 기사들은 조용히 문 앞에 섰다.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십시오."
"아니, 여기 딱 있는데 어떻게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라는 겁니까?"
대신이 핀잔이 섞인 말을 꺼냈지만, 왕실 기사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참나. 이런 대접을 받을 줄 알았으면 애초에 오질 말았어야 했는데."
대신은 투덜거리며 하벨 앞에 앉았다.
"죄송하지만, 나가주시겠습니까?"
하벨이 왕실 기사들을 바라보며 정중히 부탁했다.
아무리 그들이 바안의 사람이지만, 자신은 이 상황 자체가 불쾌했다.
대놓고 감시하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하지만… 이는 전하의 명이십니다."
하벨은 왕실 기사들의 말에 자신이 바안에게 받은 임명장을 내밀었다.
"내가 전하의 대리인입니다. 이는 곧 내 말이 전하의 말이라는 의미지요. 이래도 못 알아듣겠습니까?"
"실례했습니다."
왕실 기사들은 얼른 고개를 숙인 뒤에 밖으로 나갔다.
'권력이 좋긴 좋네.'
임명장 밑에 날림 글씨로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들을 만날 때라고 한정되어 있긴 해도 자신이 권력을 누렸던 적은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아주 짜릿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누려볼 걸 그랬나?'
"…거, 몸은 괜찮습니까?"
"절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대신의 물음에 하벨이 놀라며 묻자 대신은 코웃음을 쳤다.
"아니, 폭탄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나 다쳤는데 걱정을 안 하면 그게 사람입니까?"
대신의 언성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그의 눈동자에 걱정이 어려 있었다.
상태가 보면 볼수록 엉망이지 않은가.
계속 침대에 누워 요양해야 할 사람을 억지로 끌고 온 느낌이라 대신은 마음이 불편했다.
"하벨 티에라라고 합니다."
하벨이 손을 내밀자 대신은 머쓱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어휴, 많이도 다쳤네."
중얼거리려고 꺼낸 말이었음에도 대신의 목소리가 큰 탓에 아주 잘 들렸다.
대신은 하벨의 동그란 눈동자에 순간 흠칫거리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살짝 민망했다.
"게리온 크라넨이라고 합니다. 거… 방금은 내 손주가 생각이 나서 그랬습니다. 부담스러웠다면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저를 걱정해주시다니요."
하벨이 미소를 짓자 게리온은 대놓고 안쓰러움을 토로했다.
"아니, 아프면 나중에 만나러 오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나왔습니까? 그냥 다음에 만나서 이야기나 나누는 게 어떤가 싶은데."
"꼭 만나서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게리온은 하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분명 초면일 텐데.
"전하께서 이번에 발생한 폭파 사건을 두고 대신이 주장했던 말 모두를 사실이라고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
게리온은 실례라는 걸 알지만, 자신도 모르게 팔짱을 꼈다.
그만큼 황당한 소리였다.
애초에 자신들을 인정했다면 풀어주는 게 먼저가 아니겠나.
순서가 뒤바뀌었고, 방금 왕실 기사들의 태도를 보면 더욱 말이 되지 않은 소리라고 할 수 있었다.
게리온의 눈가가 좁혀졌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습니다. 좀 알아듣게 말씀하시죠."
만약에 하벨이 왕의 대리인이 아니었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지도 몰랐다.
하벨은 태연하게 다시 임명장을 내밀었다.
"이걸 전하께서 저한테 주신 의도를 진정 모르겠습니까?"
대답보다는 뒤로 한 발짝 빠져 게리온이 가진 그릇을 넌지시 살폈다.
최근 물 마법사가 된 하벨 티에라.
그런 하벨 티에라를 대리인으로 임명한 에르티안의 임시 왕, 바안 에르티안.
저 두 상황을 엮고 생각하는지 게리온의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갔다.
"…은밀히 이뤄져야 할 이야기가 있단 말입니까?"
게리온이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여기에 와서야 자신들은 폭파 사건이 벌어졌고, 이에 하벨 티에라가 휘말렸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필 티에라 가문의 막내아들이, 그것도 물 마법사가 된 하벨 티에라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탄식이 밀어닥쳤다.
코스모피안 왕국이 에르티안 왕국이 가진 것 중 가장 원하는 게 바로 티에라 가문이었으니.
아예 사이가 틀어지지 않을까 엄청 걱정하면서 한편으로 언제가 되든 하벨 티에라가 자신들을 찾아올 거라 예상하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게리온은 하벨이 꺼낼 말을 기다렸다.
"맞습니다. 은밀히 이뤄져야 할 말이지요."
"들어보겠습니다."
게리온은 어차피 시간은 넘치고, 짜증만 나는 상황에서 생긴 여흥 거리라 판단하며 하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군가 코스모피안 왕국을 모함하고 있습니다."
탁!
게리온은 바로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바로 그거라고!"
게리온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하벨은 몸을 뒤로 빼며 눈을 깜박거렸다.
"아주! 아주 속이 시원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이 망할, 아니 다른 나라 대신들은 나사가 빠진 건지 왜 하나같이 똑같은 말만 지껄이는 건지."
게리온은 이를 갈았다.
대체 그간 얼마나 시달린 건지 빠드득 갈리는 이만 뺀다면 아주 속이 후련해 보였다.
"특히, 레놀드 왕국, 저 개새끼들. 지들이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혐의를 인정하라니 마니 지껄이는 게 아주 아니꼬웠는데! 좋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단 진정하시죠."
하벨은 게리온을 말렸다.
안이 시끄러우면 밖에 있는 왕실 기사들이 언제 들어올지 몰랐으니.
"…어흠. 미안합니다."
뒤늦게 이성을 되찾았는지 게리온은 올렸던 손마저 내렸다.
"여기에 와서 맨날 해명하라는 말에 앵무새처럼 지껄이다 보니 잠깐 흥분했습니다."
"혹시 짐작 가시는 쪽은 있습니까?"
"레놀드 왕국입니다."
게리온은 어떤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그의 눈동자에 어린 분노는 상당히 깊었다.
코스모피안 왕국과 레놀드 왕국 사이에 관계가 좋지 않다고 듣긴 했지만, 사절단이라는 위치에 있는 게리온마저 저렇게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낼 줄이야.
하벨은 의문을 가지며 물었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레놀드 놈들이 우리 코스모피안 왕국에 지금 그 자리를 다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이겠죠."
하벨은 앞뒤 따지지 않고 내지르는 게리온의 말에 일단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게리온은 레놀드 왕국을 싫어했다.
그것도 엄청.
그게 아니고서야 자신의 앞에서 대놓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도 됩니까?"
하벨은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아. 아직 모릅니까?"
"뭘 말입니까?"
"저뿐만 아니라 코스모피안 왕국 사람들은 레놀드 새끼들을 싫어합니다. 그것도 아주아주 많이 싫어합니다. 아무리 돌대가리라도 레놀드 놈들이 그걸 모를 거라 생각합니까?"
게리온은 당당히 말하며 코웃음까지 쳤다.
"어쨌든 그래서 이렇게 은밀히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번 사건의 범인을 쫓고 싶지 않습니까?"
하벨은 게리온을 살살 긁었다.
방금 그 말은 억울함에서 비롯되어 꺼낸 말일 뿐, 솔직히 진짜 이유를 알고 싶겠지.
그걸 증명하듯 게리온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