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89화 (189/415)

189화. 눈 좀 똑바로 떠(3)

* * *

"…그."

하벨은 여전히 종이를 쥔 채로 머뭇거렸다.

"제대로 드렸습니다. 확인해보세요."

"…예."

"왜 그러십니까?"

"아뇨. 상당히 대충하시네요?"

"도장만 찍혀 있으면 되는 거죠. 사실 어쩌고저쩌고 쓰려다 참았습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한 나라의 왕이 너무 대충하는 거 아닙니까?"

"오늘은 그래도 됩니다. 지금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들이 왕국으로 돌아가 왕에게 쫄래쫄래 이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잖습니까?"

바안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하벨은 천천히 웃음을 터트렸다.

배를 잡고 소리를 높이다 곧 통증을 호소했다.

온몸이 덜거덕거려 식은땀이 다 흘러내렸다.

"…하벨 공? 웃다가 죽겠습니다. 좀 조심하세요."

바안이 바로 정색했다.

"다음번에는 꼭 '어쩌고저쩌고'를 적어주세요. 간직하고 싶을 정도네요."

하벨은 여전히 키득거리며 바안을 바라보다 무언가 생각이 났다.

"전하."

"네."

바안은 책상에 앉았다.

"샬룸 말입니다."

"레놀드 왕국의 대신 말입니까?"

"예. 혹시 누구인지 아십니까?"

지금 페트리오가 조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샬룸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레놀드 왕국의 대신들도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고 했으니.

"신원 조사는 마쳤어요. 샬룸은 레놀드 왕국의 공작이죠. 이제껏 이름만 있던 자리였는데 이렇게 직접 나타날 줄은 몰랐습니다."

"공작이요?"

하벨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바안은 그게 왜 저런 표정을 짓는가 싶어 잠깐 생각했다.

아.

생각해보니 이 에르티안 왕국에 공작이라는 작위가 없지 않은가.

"예. 이 에르티안 왕국에는 없는 작위긴 하나, 보통은 왕실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걸 의미하죠. 하지만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웅에게도 내리는 작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레놀드 왕국의 대신 중에서 가장 위치가 높았군요."

"맞아요. 보통은 작위의 힘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바안은 그래서 매번 작위가 없는 티에라 가문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트리안 왕국에도 그런 게 있었습니까?"

하벨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리자 바안은 펜을 잠깐 굴렸다.

진짜 모르고 있었다니. 의외였다.

"페트리오 경의 가문은 백작가입니다."

"백작이요……?"

하벨은 눈을 깜박거렸다.

곧 손가락을 뻗으며 하나씩 접어 나갔다.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눈을 살짝 크게 뜨며 페트리오를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그럼 제가… 으음."

하벨이 말꼬리를 늘이며 접은 손가락을 바라보자 바안이 키득거렸다.

"공은 신경 안 써도 돼요."

"왜요?"

"그게 티에라 가문이니까요. 어떤 가문이든, 어떤 작위를 가지든 티에라 가문이 가진 힘과 정화제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죠. 하여 귀족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작위를 붙이지 않은 겁니다. 그렇지 않았습니까?"

"오. 그래서였군요."

하벨은 짧은 감탄을 내뱉고는 다시 바안에게 물었다.

"혹시 샬룸을 이전에 본 적 있습니까?"

"낯이 익긴 합니다. 어디선가 봤는데 기억이 잘 나질 않네요. 그런데… 그자가 뭔가를 했습니까?"

"신경 써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샬룸이야 말로 지금 레놀드 왕국의 의지 그 자체이니."

"그럼 진짜 물러나겠습니다."

쿠키를 손아귀에 가득 쥔 하벨은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안은 그 모습에 피식거리다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조심해서 가세요. 오늘처럼 움직이지 말고요."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끝까지 멋대로인 말을 꺼내고 가는 하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바안은 잠깐 떠오른 생각에 페트리오를 불렀다.

"페트리오 경. 잠깐만 나 좀 볼래요?"

"예, 전하."

페트리오는 하벨을 힐끔 보고는 허리를 숙였다.

하벨이 어디에 먼저 갈지는 예측 가능했기에 뒤따라갈 수 있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침묵이 계속 흐르자 페트리오는 허리를 숙인 채로 눈동자를 굴렸다.

대체 바안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망설이는 걸까.

"나는 경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압니다. 하여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바안은 고민 끝에 펜을 쥐었고, 페트리오는 숙인 허리를 들지 않았다.

"얼마든지 말씀하셔도 됩니다."

"경이 하벨 공의 사람이라도 괜찮습니다. 아니, 오히려 내가 바라던 바입니다."

"……."

"하지만 경이 가진 그 힘을 하벨 공의 심장을 찌르는 데는 사용하지 마세요."

"물론입니다, 전하."

페트리오는 일말의 망설임도 내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하벨을 찌르겠는가.

"전하께서 걱정하실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고마워요."

바안은 페트리오에게 진심을 느낀 후에야 종이를 넘겼다.

"여기, 받으세요."

페트리오는 멀뚱멀뚱하게 바안을 바라보며 서 있다 바안의 재촉에 조용히 다가가 종이를 받았다.

페트리오의 시선이 종이로 향했다.

"솔직히 줄까 말까 고민했어요."

서걱서걱.

바안은 몸을 돌려 쥐었던 펜을 놀렸다.

"하지만 경의 능력은 내게 필요합니다."

파르르.

페트리오가 쥔 종이가 크게 흔들렸다.

'…이건.'

자신의 가문, 비발체가 오래전부터 소유하던 저택이 하나 있었다.

귀족들의 공격에 짓밟혀버린, 비발체 가문을 상징하던 그곳.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페트리오가 고개를 올리자 바안은 어느새 고개를 돌리며 씩 웃고 있었다.

"가지세요."

"…전하."

"그리고 더 일하세요."

"전하……!"

"나는 아직 경계는 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내가 경께 보이는 성의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감사는 하벨 공한테도 꺼내야 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걸 부탁한 건 하벨 공이니까요. 물론, 경에게 줄지 말지를 선택하는 건 나였습니다."

―귀족들을 뒤지다 보면 비발체 가문이 소유했던 뭔가가 있을 겁니다. 그게 저택이면 완전 좋고, 아니면 아쉽지만, 페트리오 경에게 넘겨주십시오. 물론, 선택은 전하께서 하시면 됩니다.

하벨이 참 웃겼다.

이렇게 챙겨주는데 같은 편이 아니라는 것도 우습고, 설령 진짜 아니라고 해도 우스웠다.

페트리오의 눈동자에 어린 고마움과 그 고마움을 넘어선 충성심은 이번 신입 왕실 기사들에게도 쉽게 보기 어려운 게 아닌가.

이로써 페트리오는 하벨의 사람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안심했다.

하벨이 페트리오라는 짐승의 목줄을 쥐고 있으니.

바안은 다시 펜을 잡았다.

"이제 나가보셔도 됩니다. 하벨 공이 기다릴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전하. 소신 물러가겠습니다."

깍듯하게 허리를 굽힌 페트리오를 보던 바안은 눈동자를 굴려 책상에 세워둔 붉은 여우 모습을 한 장식품을 바라보았다.

―이 여우를 기억하십시오.

하벨이 불로 된 여우를 만들었을 때, 자신은 그 여우에 모든 걸 담아버렸다.

슬픔도.

복수도.

괴로움도.

바안은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펜을 놀렸다.

사각사각.

* * *

와사사삭.

쿠키를 먹는 소리에 복도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벨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때마다 카샬은 날카롭게 생긴 자신의 인상을 이용해 다 쫓아버렸지만, 당장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 도련님은 이 와중에 왜, 대체 왜…….'

카샬은 솟구치는 욕지거리를 삼켰다.

이미 하벨이라는 존재 자체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먹는 것도 모자라 쿠키까지 먹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카샬은 하벨을 계속 지그시 쳐다보았다.

대체 뭘 생각하는지 몰라도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시선도 주지 않았다.

와사사삭.

하벨은 손에 움켜쥔 쿠키를 먹으며 우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정말 이상했다.

헤일리스를 처음 볼 때도, 두 번째 봤을 때도 랜턴은 작동하지 않았다.

'심지어 장례식장에서 터진 폭발에도 랜턴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하벨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하벨 티에라의 기억을 엿봤을 때, 과거 장례식장에는 다른 나라들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이 났다.

'과거가 바뀌어서… 그런 건가?'

하벨은 찝찝함을 느끼며 랜턴을 몇 번 건드렸다.

'아니면… 드디어 망가진 걸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갈 무렵, 갑자기 랜턴에 검은 불꽃이 붙었다.

화르르륵!

하벨은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만, 시종과 그리고 사람들이 오가는 이곳에 대체 누구한테 반응했는지 알기 어려웠다.

'이런…….'

왜 하필 여기에.

하벨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이다 잠깐, 양 갈래를 딴 소녀에게 오래 머물렀다.

'…헤일리스 옆에 있었던 마법사였는데.'

자신이 물 마법사임을 검증하는 자리와 장례식장.

이 둘 장소에서 저 사람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흘러왔다.

'랜턴이 왜 이제 반응하는 거지? 만약 저 사람이 맞다면 그때 반응했어야 할 텐데. …이상하다.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걸까.'

하벨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도련님? 대체 누굴 찾는 겁니까?"

카샬이 보다 못해 말을 걸었다.

하벨이 마치 누군가를 애타게 찾듯이 움직였지 않던가.

다시 말을 꺼내려던 카샬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 오고 있었다.

하지만 먼저 바라보진 않았다. 자신은 집사였으니 먼저 알아채는 건 이상했다.

"혹시 저를 찾습니까?"

목소리가 들린 후에 카샬은 고개를 돌렸다.

이어 하벨 역시 그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샬룸이었다.

하벨의 시선이 닿자 샬룸은 보폭을 넓게 걸으며 활짝 웃었다.

'랜턴의 빛이 꺼졌다.'

적어도 샬룸은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오늘은 우연이 아니라 하벨 공을 찾으러 온 게 맞습니다. 보세요. 오늘은 당당하죠?"

"무슨 일로 저를 찾아왔습니까?"

하벨은 사람들이 많은 와중에 자신을 찾아온 샬룸의 의도가 무엇인지 예측해야만 했다.

이렇게 대놓고 보여주는 건 으레 꿍꿍이가 있기 마련이니까.

가령 샬룸의 웃음에는 '우리 서로 친해요'라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물 마법사이니 호기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 될 수 있으면 딱 그 선까지라면 좋을 텐데.'

그 이상은 귀찮을 뿐이었으니.

"음……. 하벨 공께 볼일이 있으니까요. 혹시 잠깐 시간이 되십니까?"

샬룸은 당연한 말을 내뱉었다.

지금 하벨 근처에 어슬렁거리던 사람들 대부분이 경악하며 표정을 숨기느라 애를 썼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의도를 드러내다니.

"그 시간은 용건이 뭔지 들어본 뒤에 생길 것 같은데요?"

하지만 하벨은 샬룸에게 그냥 끌려가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레놀드 왕국의 대신이라는 이름보다 더 신기하고 값진 존재이니 이 정도는 괜찮았다.

"내일 저는 떠납니다. 가기 전에 전해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레놀드 왕국의 대신들 모두요?"

"제 방이 이 인근이라 안내하겠습니다. 그곳에서 대답해도 괜찮겠죠?"

샬룸은 하벨의 질문에 그를 잡았다고 생각하며 넌지시 입꼬리를 올렸다.

"…아. 제가 공을 봐서 기쁜 나머지 한 가지 잊어버렸네요."

"왜 그렇게 기뻐하는 겁니까?"

하벨이 정말로 왜 기뻐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샬룸은 자신이 꺼내려던 말을 삼키고 잠깐 생각했다.

"음."

말꼬리를 늘이며 주변으로 시선을 뒀다.

"저렇게 공을 노리는 사람이 많은데 제가 먼저 공과 말을 섞었잖습니까?"

샬룸은 노골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우위를 차지했다는 걸 알렸다.

다른 이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음에도 샬룸은 오히려 더 뻔뻔하게 자신을 가리켰다.

"이건 제가 다른 이들보다 빠르며 기회를 잘 잡는다는 걸 드러내는 셈이니 왜 안 기쁠까요? 아, 나는 아직도 건재하구나. 아직도 괜찮네, 하며 우쭐해야 할 순간이 맞잖아요."

샬룸은 히쭉 웃었다.

주변 분위기가 살짝 냉랭해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그는 조금 전에 꺼내지 못한 말을 자연스럽게 언급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하벨 공?"

하벨은 지금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샬룸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지 않던가.

"아뇨. 지금 제가 괜찮아 보입니까?"

하여 하벨은 주변을 향해 비웃음을 그렸다.

이 주변에, 아니면 자신의 앞에 폭파 사건을 주도한 범인이 있을 수 있으니.

"눈을 좀 똑바로 뜨셔야겠습니다. 제가 지금 많이 아프거든요."

와사사삭.

하벨은 곧 아무렇지도 않게 쿠키를 씹어먹었다.

"만족할 만한 대답이 됐으면 좋겠네요."

샬룸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오르자 하벨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히쭉 웃었다.

저들의 시선도,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도 다 자신의 것이 되어야 했다.

* * *

하벨의 휠체어를 밀고 방으로 들어온 샬룸은 의자를 끌고 와 그의 앞에 두고 자리에 앉았다.

"저만 일단 떠납니다. 나머지는 이틀? 아마 그 뒤에 떠나는 걸로 압니다."

"이 사실을 왜 알려주시는지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대뜸 꺼낸 말에도 하벨이 당황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자 샬룸이 웃었다.

"안에서는 덜 사나우시네요?"

"원래부터 사납지 않아요. 그냥 저한테 개같이 하면 똑같이 개처럼 짖어버릴 뿐인걸요?"

"무서운데요?"

샬룸은 말과 달리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어떤 감정이 담겼는지 쉽게 알 수 없었다.

하벨은 샬룸이 무슨 말을 할지 그저 기다렸다.

무섭다는 말도 다 거짓이었으니.

"음. 이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샬룸은 하벨의 시선에 슬쩍 눈길을 돌렸다.

아까 보여주었던 여유는 어디에 갔는지 입가를 핥았다.

"제가… 하벨 공을 도와주려고 먼저 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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