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75화 (175/415)

175화. 이제 됐죠?

* * *

카샬은 자욱하게 퍼진 연기를 뚫고 바로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대체 왜 하벨이 지금 당장 사고를 쳐도 이상하지 않다는 그딴 어이없는 생각을 해버렸는지.

카샬은 검을 뽑아 들었고, 정령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죽이지 마십시오!"

카샬은 정령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필 오늘 다른 나라 대신들이 모인 날이었다.

이런 날 무언가 터졌다는 것 자체가 조짐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든 범인을 살리는 게 먼저였다.

'내 말을 들었을까.'

카샬의 걸음이 다급해졌다.

안에서 누군가 튀어나왔고, 기사들은 검날이 아닌 검등으로 바꿔 그 누군가를 후려치려고 했다.

투투투!

하지만 뾰족한 가시가 날아오자마자 정령들은 따분한 표정으로 바람을 만들어 가시를 튕겨냈고, 바로 만들어낸 흙으로 마법사들을 제압하려고 했다.

[그만해.]

그때, 한 정령이 다른 정령을 말리며 속삭였다.

[왜?]

[기억 안 나?]

―대장이 있지, 마법사들을 적당히 상대해주면 좋겠다고 말했어.

[…아!]

곧 정령은 아라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흙을 지우고 기사들의 행동을 기다렸다.

이미 아라가 다 알려주지 않았던가.

이 행동 자체가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왕실에서 계속 느껴지는 이 압박에 그만 잠깐 잊고 말았다니.

퍼억!

기사가 마법사의 다리를 향해 다시금 검등으로 검을 휘둘렀다.

"으악!"

굵직한 신음이 들렸고, 그 틈으로 거대한 돌덩이가 밀려오자 정령은 기사에게 정령수를 넣었다.

기사가 쥔 검에 압축된 바람이 어리자 주변에 퍼진 연기가 흩어졌다.

쉬이익!

기사는 정확한 타이밍에 검을 휘둘러 돌덩이를 정확히 반으로 가른 뒤 앞으로 달려 적을 향해 발을 휘둘렀다.

"크흑!"

벽에 맞아 쓰러지는 소리를 뒤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도와주세요!"

카샬은 그 목소리에 잠깐 걸음을 멈췄다.

누가 들어도 칼리우스가 아닌가.

'…이런.'

적어도 자신이 아는 칼리우스는 저럴 애가 아니었다.

'이러언……!'

갑자기 맥이 빠졌다.

다다다.

기사들의 공격이 이어짐에도 자유롭게 달려오는 칼리우스의 발놀림에 카샬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망할, 도련님!'

저게 무슨 도망치는 사람의 모습인지.

이가 절로 갈렸다.

'적어도 레디나한테 시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눈을 질끈 감고 달리던 칼리우스가 익숙한 발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집사님!"

방금까지 도와달라던 사람이 맞는지조차 의심이 될 만큼 너무도 환히 웃고 있질 않은가.

"그냥 입 다물고, 고개 숙이고 있어."

카샬은 칼리우스를 단속시키고 난 뒤에 마법사들을 다시 묶는 기사들을 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휘이이잉.

바람 소리가 뚫린 벽에서부터 흘러나왔다.

"…흑."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를 듣자마자 카샬은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레디나 너도……?'

"집사님."

당장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울먹이는 레디나의 모습에 카샬은 소름이 쫙 돋아났다.

밝게 웃으며 적의 목을 따던 레디나가 생각나는 터라 당장 그만두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카샬은 벌써 머리가 어질거려왔다.

곧 이를 악물으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이 망할 도련님.'

하벨이 갑자기 시선 피하자 카샬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껴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러고 보면 하벨의 팔에 감긴 천을 레디나가 꼭 쥐고 있지 않은가.

"그거 왜 그래?"

"카샬. 이거… 어떡하죠?"

레디나는 가짜 눈물을 때려치우고, 진짜 곤란해하며 물었다.

"진짜야……? 진짜?"

카샬이 미심쩍은 눈을 하자 레디나가 슬쩍 천을 뗐다.

팔에서 주르륵 흐르는 건 피였다.

"…지금 뭐하신 겁니까, 도련님!"

바로 카샬의 언성이 올라가자 하벨은 그의 눈치를 살짝 살피고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대장이… 파편에 맞았어! 이 몸이랑 레디나랑 쳐냈는데도 맞아버렸다구!]

아라가 울먹였다.

카샬이 근처에 올 때쯤, 환각을 보여주는 독을 먹은 마법사들을 깨우려 하벨이 물을 뿌렸다.

무슨 환각을 보는지 몰라도 마법사들이 겁을 먹었고, 당장 도망치는 그들을 행동에 칼리우스는 당황한 채로 벽을 터트리고는 그들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우수수 튄 파편을 레디나가 단검으로 쳐냈고, 아라 자신이 침착하게 바람을 퍼트려 하벨에게 잔해가 튀지 않게 막았을 텐데.

어떻게 된 게 파면 중 하나가 하벨의 팔을 스치듯 지나가 버렸다.

자신이 미숙해서 그럴까. 너무 속상했다.

"그러니까. 잠깐 멍하니 있었거든."

하벨은 실실 웃었다.

아까 기분 나쁜 감각의 후유증으로 물의 저주가 일시적으로 심해지지 않았던가.

순간 느낀 현기증에 다리에 힘이 풀려 아라가 만든 바람의 힘 밖으로 팔이 살짝 나와버린 탓이었다.

이건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라 자신도 당황했다.

자작극임에도 다치는 멍청이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설마하니 자신이 될 줄이야.

'가주님하고 헤레스 얼굴을 또 제대로 못 쳐다보겠네.'

원래라면 그냥 아무 부상도 없이 놀란 척 이를 가는 게 자신의 역할이었는데.

"제가 진짜……."

카샬은 입술을 세게 깨물다 하벨을 부축했다.

이러다 제 명에 못 살지.

무슨 눈만 떼면 사고라니.

"레디나. 일단 도련님을 헤레스 씨한테 데려가. 나는 다른 방을 알아볼 테니까."

"언니가 눈에 불을 켜고 도련님을 쳐다보겠네요. 아, 참고로 저는 말렸어요. 진짜로요."

[이 몸도 그래. 이 몸도 말렸다구.]

레디나와 아라가 순수한 눈빛으로 카샬을 바라보았다.

긴 한숨을 내쉰 카샬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오늘 반드시 가주님께 월급을 올려달라고 말할 겁니다. 반드시요."

이건 보상을 받아야 했다.

무조건.

* * *

헤레스는 하벨이 꺼내는 말이 너무도 기가 차 자신의 손을 어쩌질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하벨의 이마를 때려주고 싶었다.

"…자작극이요? 자작극이 진짜 맞으신 건가요? 자작극이……."

길게 이어진 헤레스의 눈빛에 하벨은 헛기침을 잠깐 내뱉다 고개를 끄덕였다.

헤레스는 화를 꾹 누른 채로 하벨의 팔을 가리켰다.

"그럼 그 자작극에 이것도 포함되어 있었나요?"

오늘 하벨이 정화제 사건을 대놓고 고발해 마법사 협회를 압박하지 않았던가.

그 일은 자신에게 있어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지금이라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크라마한테 연락도 했다.

하벨이 협회장한테 한 방 먹였다고.

"아니. 이건 없었지."

하벨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좋으시겠어요. 자작극을 했는데 팔도 다치시고, 보일 증거가 많아지셨잖아요?"

헤레스가 한껏 비꼬았지만, 하벨의 눈이 잠깐 반짝였다.

"도련님. 저는 지금 화를 내는 거예요."

"알고 있어. 그냥 기왕 이렇게 된 거 한 가지 덧붙이면 정말로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뿐이야."

"한 대 때려도 되나요?"

"아프지 않다면야."

"진짜 얄미우세요. 제가 어떻게 도련님을 때리겠어요?"

헤레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도련님. 이것 보세요. 여기 꿰맸어요. 이전에 손바닥처럼요."

하벨의 팔에 감긴 붕대를 가리키던 헤레스가 손을 내밀었다.

하벨이 손을 주자 그의 손바닥을 펼쳐 붕대를 풀었다.

"흉터 안 지게 잘 낫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 더 생겨버렸네요."

"…음, 이건 불가피했어."

"또 현기증이 일어나셨죠?"

헤레스의 물음에 하벨은 잠깐 아라를 바라보았다.

[…진짜 그랬어?]

"그래."

하벨은 헤레스와 아라의 눈동자를 보자 거짓말을 하기가 참 어려웠다.

헤레스는 잠깐 말을 멈추고 안경만 만지작거렸다.

그 침묵 동안 하벨은 입술을 다물고 눈동자를 굴렸다.

"그… 헤레스."

"그럼 이렇게 된 거 이제 편안하게 정화제를 달고 다닙시다."

"정화제를 달고 다니다니?"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이번에 장례식 때 도련님이 펼칠 작전 때문에 보류되고 말았잖아요. 아무래도 몸이 멀쩡하게 보이는 편이 효과도 좋을 테니까요. 그런데 어차피 진짜 아픈 거 그냥 숨기지 말자고요. 저는 차라리 이게 맞다고 생각해요."

줄줄이 말을 이어가던 헤레스가 잠깐 하벨의 눈치를 봤다.

"드웰 아저씨가……."

드웰이라는 말에 하벨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헤레스는 주춤거렸지만, 말을 멈추질 않았다.

"빙의의 후유증이 어떻게 찾아올지는 모른다는 말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달고 있는 게 어때요?"

"그래. 진작 그럴 걸 그랬네."

하벨이 고개를 끄덕이자 헤레스가 싱긋 웃었다.

"도련님. 왜 이렇게 됐는지는 아시죠? 도련님께서 수도 갔다 오셔서 검은 물에 두 손바닥이 뚫리셔서 침대도 떠나지 못할 상태가 되셨는데 억지로 수도로 가시고, 정화제 사건이 벌어져 거기서 거대한 물도 부리면서 피도 신나게 토하시고, 그래서 이틀 만에 깨어나셔서……."

"그, 협회장 말이야."

하벨은 헤레스의 입을 멈추고자 다급히 주제를 바꿨다.

다른 주제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다른 이도 아닌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 이야기이질 않은가.

"협회장이 왜요? 아까 도련님이랑 악수하면서 말을 나누던데 뭐라고 한 건가요?"

헤레스의 입가에 어느새 웃음이 사라졌다.

"시비를 걸긴 했지만, 그거야 당연히 나한테 할 행동이었고. 그것보다 진짜 협회장이 맞아?"

"예. 진짜 맞아요."

"이름이 헤일리스 퀸이고?"

"그걸 어떻게 아세요?"

"들었거든."

"대단하시네요. 보통 '협회장'이라 불려서 이름을 모르는 마법사들도 꽤 많은데요. 아. 물론, 그게 본명인지는 몰라요. 마법사는 마나에 얽매인 자들이라 진짜 이름만으로도 마나의 얽매임을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요. 그래서 보통 가짜 이름을 써요."

헤레스는 살며시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물론, 저도 가짜 이름이에요."

저번에 라르웬에게도 저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에 하벨은 그때 들었던 궁금증 꺼냈다.

"마나에 얽매인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인데?"

"으음…….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그런 뜻으로 쓰이거든요."

"그럼 마법사가 가진 진짜 이름만 알아낸다면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이네?"

하벨의 눈이 살포시 감겼다.

너무도 수상한 표정에 아라가 하벨을 빤히 바라보았다.

[대장은 어음, 마나가 없어서 음, 안 될 것 같은데.]

아라가 꼬리를 붙잡고 슬쩍 말하자 하벨은 아라의 볼을 가볍게 눌렀다.

그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이나 누군가에게 듣는 이름을 말하는 거고, 또, 음, 누군가를 지배하려면 마나가 아주 많아야 해요."

헤레스마저 하벨을 말리려 변명처럼 말을 늘어트렸다.

"가령 용용이처럼?"

"…카, 칼리우스 님이요?"

헤레스는 흘러내린 안경을 올렸다.

여기서 왜 갑자기 칼리우스의 이름이 나오는지.

헤레스는 당황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천천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어음… 용용이는 마나를 가지고 있구……. 그렇긴 한데.]

아라가 눈을 깜빡거리다 곧 눈을 크게 떴다.

[아! 대장은 용용이가 마법사를 지배하길 원하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었는데, 이론상으로 가능하나 보네? 그럼 한 번 해봐야지."

헤레스가 멈칫거렸고, 하벨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뭘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카샬의 표정이 주름진 종이만큼이나 일그러졌다.

"내가 뭘 하겠어?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능성을 보겠다는 거지. 놈들은?"

"일단 가둬뒀습니다."

미심쩍은 카샬의 감정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래? 레디나 좀 불러줘."

"저 여기 있어요."

레디나는 옷장 뒤쪽에서 걸어 나오자 아라가 깜짝 놀라 하벨의 망토 속으로 다급히 숨었다.

[으아앗!]

"…왜 거기서 튀어나와?"

하벨이 눈을 크게 뜨며 묻자 레디나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제가 카샬보다 먼저 왔는데요? 이게 참, 제 직업이 그렇다 보니 습관적으로 옷장 뒤나 이런 곳이 편해서요."

"그러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물어봐. 내가 대답은 잘 해주잖아."

"도련님. 도련님은 제 신으로써 제가 감히 염탐이나……."

"네가 해줘야 할 게 있어, 레디나."

하벨이 레디나의 말을 싹둑 잘랐다.

레디나가 신을 언급할 때마다 그냥 장난인지 진심인지 매번 헷갈렸다.

"마법사를 가둔 감옥으로 가서 제가 뭘 하면 되는 건가요?"

레디나가 활짝 웃으며 단검을 꺼내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아라가 슬쩍 나와 정령수를 넣자 하벨은 독의 힘을 끌어왔다.

자신의 손등 위에 둥둥 떠다니는 삼지창에 헤레스가 기겁했다.

"도련님. 제발, 힘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이 정도는 괜찮아. 무엇보다 지금 꼭 필요하고."

하벨은 삼지창을 내버려 두고 온전히 독만 만들어냈다.

조금 전처럼 머릿속에 작은 창이 나타났다.

거기에서 만들어내고 싶은 독을 입력하면 지금으로서는 완전한 게 아닌, 얼추 비슷한 독이 만들어졌다.

마치 인간 세상에서 보았던 컴퓨터 속 검색창 같았기에 하벨은 나름 익숙했다.

하벨의 손바닥에 보라색으로 된 작은 알약이 만들어지자 레디나가 두근거리며 물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독이에요?"

"자백제야. 효과는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걸로 마법사들의 진짜 이름을 알아봐 줘."

"진짜 이름이요……?"

레디나가 알약을 받으며 말꼬리를 늘리자 헤레스가 숨을 들이켰다.

"정말로 해보실 생각입니까?"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해볼 생각이 없으면 뭐하러 이렇게 번거로운 행동을 하겠는가.

"그럼. 솔직히 너도 궁금하잖아? 만약에 정말로 된다면 용용이한테도 좋은 일이고."

"그러니까, 지금 칼리우스한테 마법사의 진짜 이름을 알려줘서 마나로 얽매게 할 생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카샬이 그제야 하벨이 무얼 하려는지 알았지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했다.

"도련님. 만약에 이게 가능하다면 너무 위험한 걸 칼리우스한테 손에 쥐여주는 게 아닙니까?"

아직 칼리우스는 제 감정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어리숙한 용이었다.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용용이를 먼저 괴롭힌 건 마법사 협회였어. 이제 반대로 되는 것뿐이야."

하벨은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칼리우스를 보며 활짝 웃었다.

만약에 칼리우스가 세상을 멸망시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는데 마법사 협회가 가장 큰 제공자라면 그 또한 역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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