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69화 (169/415)

169화. 물 마법사 몰라요?

* * *

하벨이 다시 천천히 고개를 올렸을 때, 바안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벨은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꽃을 바치는 그 손길에, 고개를 숙이는 그 모습에, 그리고 하벨이 꽃을 들고 오면서 만들어낸 그 분위기만으로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밀려온 슬픔이 기어코 자신이 만든 벽을 넘어버렸다.

'아니, 대체…….'

바안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을 겪었길래.'

마치 하벨이 슬픔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적이 있던 사람처럼 보여 바안은 생각조차 이어나갈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개구쟁이 같은 하벨은 무엇이며 이 모습은 또 무엇인지.

하지만 바안은 눈물을 훔치며 살며시 웃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해주는 하벨의 행동에 어느새 흐느끼는 사람들의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고맙습니다, 하벨 공.'

바안은 자신을 뒤돌아보는 하벨을 향해 웃어주었다.

하얀 꽃송이가 바쳐졌다.

장례식의 시작을 알리는 그 행동과 함께 합창단들이 부르는 노래가 더욱 잔잔하게 이어졌다.

원래라면 자신이 고인 앞으로 걸어가 고개를 두 번 숙인 뒤, 5분의 묵례 끝에 하얀 꽃을 올린 사람과 함께 옆에 앉아 초대된 손님하고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손님이 고인에게 하는 짧은 말을 모두 듣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바안은 자신을 바라보는 하벨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식 자체가 누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는지에 대한 범인과 그리고 다른 나라들을 향한 경고라면, 이제 하벨을 위해 자신이 기다릴 차례가 왔다.

'하벨 공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무엇이 됐든 뒤는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갈 자신이 책임질 생각이었다.

하벨 역시 자신의 백성이 아닌가.

하벨은 잠깐 미소를 지었다.

장례식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환한 미소에 바안은 잠깐 자신의 결정이 흔들렸다.

'진짜… 괜찮은 게 맞겠지?'

바안이 괜히 룬델에게 미안함을 느낄 때, 하벨은 용왕의 힘을 거침없이 끌어왔다.

장례식의 시작을 자신이 알렸으니 이제 시작과 함께 볼 가장 좋은 선물을 저들에게 뿌릴 차례였다.

'두 눈 크게 뜨고 똑바로 바라보거라.'

하벨은 잠깐 룬델을 바라보았다.

걱정이 담긴 그 눈빛에 잠깐 흔들리긴 했지만, 하벨은 아라가 수줍게 흔드는 손을 보며 더욱 마음을 굳혔다.

'용용아. 보고 있는가?'

하벨은 물을 끌어오기 전 자신의 자리 옆에 서 있는 카샬과 레디나를 이어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이미 검은 꽃이 뿌려진 그곳을 걷기 전에 몇몇 사람이 칼리우스를 보고 놀라지 않았던가.

분명 칼리우스를 알고 있는 마법사일 테지.

'지금 마법사들이 널 보고도 달려들지 않았다.'

자신과 시선이 맞자 칼리우스는 방금까지 얼굴에 남아 있던 걱정을 싹 지우고 활짝 웃었다.

곧 칼리우스의 눈이 커졌다.

몽글몽글.

하벨의 주변에 물이 생겨나고 있었다.

"…잠깐만. 저게 뭐야?"

한창 슬픔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숙연한 척 온 힘을 다하고 있던 레놀드 왕국의 대신들은 제 눈을 의심했으며 신께 기도하듯 두 손을 움켜쥐던 신성 국가 시엘느의 사제들은 그대로 굳어져 신의 이름을 불렀고, 이미 하벨을 주목하고 있던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들은 저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기겁했다.

몽글몽글.

누가 보아도 하벨 근처에 피어나는 건 물방울이었기에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마법사 협회 협회장마저 자리에서 일어날 정도였다.

찰랑.

물이 내는 그 선명한 소리에 순간 장례식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벨은 천천히 달라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미하며 조금 전 자신이 왕에게 바쳤던 하얀 꽃송이로 모습을 바꿔나갔다.

'보고 있는가?'

급할 건 없었다.

그저 물만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물의 모습을 바꾼다는 자체로 한층 더 자신의 몸값이 올라갈 테지.

하벨은 다시 등을 돌려 왕에게 꽃을 바치는 듯한 흉내를 내다 물을 잘게 쪼개며 옆으로 펼쳐 아주 작은 물방울로 만들었다.

비보다 더 천천히 떨어지는 물방울들의 행진에 사람들의 시선이 덩달아 내려갔고, '투둑' 소리를 내며 검은 꽃을 적시자 빛을 머금은 것처럼 반짝거리는 꽃잎에 입을 벌렸다.

툭.

코피가 떨어졌지만, 하벨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럴 줄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손가락으로 피를 닦아내고는 다시 등을 돌렸다.

졸지에 장례식이 아닌 느낌이 되어버려 하벨은 미안함을 느꼈지만, 멈추질 않았다.

'내가 무엇인 것 같은가?'

그렇게 사람들을 향해 의문을 던지는 하벨의 눈빛에 누군가 말을 꺼냈다.

"…무, 물 마법사?"

하벨 옆에 정령이 없었다. 그럼 물 마법사가 아니면 대체 무어란 말인가.

"물 마법사라니?"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물 마법사는 물의 오염이 시작된 이후로 다 사라졌잖습니까?"

마법사들은 자신의 앞에서 꺼내는 저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그냥 흘리지 않았다.

마법은 마나를 미끼처럼 던져 자연과 자연을 밑바탕으로 둬 만들어지는 힘을 사용하는 모든 걸 일컬었다.

하지만 물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존의 물 마법사 역시 그 불운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마법사도 물의 선택을 받을 수 없던 그때, 정령사만은 달랐다.

현재 물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정령사만이 유일했다.

재수 없는 정령사.

자연의 존재인 정령의 가호로 자신들이 누려야 할 것들마저 앗아가지 않았던가.

"저건 마법이 아니라 정령을 부린 겁니다!"

마법사는 자신들을 욕하는 것처럼 들려오는 그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이 힘껏 소리쳤다.

"맞습니다! 지금 신성한 장례식장에서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예의에 어긋납니다! 당장 사과하십시오!"

이어지는 마법사들의 항의가 점점 거세졌다.

그 말에 처음에 물 마법사라며 술렁거리던 분위기가 뒤바뀌어갔다.

생각해보면 그것마저도 이상한 게 아닌가.

지금 모두의 시선을 홀린 저 물을 사용한 사람은 하벨 티에라였다.

하벨 티에라가 누구인가.

티에라 가문의 막내아들임에도 정령사가 되지도 못한 둔재에 물의 저주에 걸려 다 죽어가는 시든 푸른 꽃일 텐데.

귀족들과 그를 아는 여러 나라의 대신들은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무엇이 진실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 소란을 뚫고 한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룬델이었다.

대체 무엇이 아니라는 걸까.

물 마법사가 아님을 인정하는 말인지 어딘가 곤란해 보이는 룬델의 표정에 저절로 다음 말이 기다려졌다.

"하벨 옆에 지금 어떤 정령도 없습니다. 혹시 여기에 정령사가 계신다면 사실을 말씀해주시죠."

너무도 단호한 룬델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사람들이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정령사가 아니라면 남은 건 하나뿐이지 않은가.

바로 물 마법사.

"…세상에."

"그러니까 진짜 물 마법사가 나타났다는 말입니까?"

"이건… 에르티안 왕국의 축복이 아닙니까?"

하벨을 바라보던 에르티안 귀족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가뜩이나 이번에 왕이 살해당한 사실이 에르티안 왕국의 위상을 얼마나 깎았던가.

피로 가득했던 연회와 티에라 가문에서 왕실로 하벨 티에라를 보내 경고했던 일이 아직 잊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왕국의 위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반드시 하벨 티에라가 사라진 물 마법사가 되어야만 했다.

'벌써 여러 얼굴이 보이네.'

하벨은 이 상황이 흐뭇했다.

바안의 표정이 굳어진 게 신경 쓰였지만, 상황은 무척 좋았다.

남의 장례식에 참가해 뜻밖의 정보를 손에 넣는 다른 나라들.

역린이라 할 수 있는 물 마법사를 건드려 발끈한 마법사들.

이 상황을 어떻게든 유리하게 쓰고자 머리를 굴리는 에르티안의 귀족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이 상황이 왜 즐겁지 않을까.

'자자, 이 정도로 도발했으면 이쯤에서 들어와야지. 그렇지 않은가?'

하벨은 협회장을 힐끔 바라보았다.

지금 분위기가 복잡하지만, 결론적으로 본다면 자신과 티에라 가문에게 굉장히 유리한 상황이었다.

꼭 하벨 티에라가 물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정령사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큰 경사일 테니.

하벨 티에라를 죽이려 했고, 마성물이 깃든 땅을 뺏기고, 정화제 사건을 파헤쳐진 상황에서 마법사 협회가 과연 이걸 내버려 두겠는가.

"지금 그 말을 증명할 수 있는 겁니까?"

아니나 다를까, 협회장이 기어코 목소리를 높였다.

협회장은 방금 룬델이 곤란한 표정을 짓는 걸 보았다.

구체적인 상황은 몰라도 하벨이 벌인 저 일은 예상치 못한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룬델이 저토록 성급하게 굴 리가 없을 테니까.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마법사 협회에서 정식으로 티에라 가문에 사실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협회장의 말에 분위기가 한순간에 달아올라 버렸다.

―나중에 불구경하시죠, 전하. 아마 재미있을 겁니다.

바안은 문득 하벨이 꺼낸 말이 떠올랐다.

아마 이걸 보고 불구경이라고 했겠지.

'확실히 볼만은 하네요.'

바안이 이 분위기를 조금 더 달구고자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번에 다시 새로 뽑은 왕실 기사단이기에 그 위엄이 다소 약할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자신의 손을 거쳐 간 자들이었다.

그간 왕실에게 은혜를 받은 자들을 중점으로 신분에 상관없이 뽑았기에 그 충성심이 남달랐다.

짧은 시간에 대체 몇 번의 합을 맞춰봤는지 몰라도 순식간에 좌석 전부를 에워싸는 행동이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발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멈추세요."

검은 갑옷을 입은 왕실 기사들의 모습에 사람들은 주춤거렸고, 이어 꺼낸 바안의 목소리에 소란은 금방 잠재워졌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다들 잊었나요?"

바안은 뻔뻔하게 입을 놀린 자들을 더욱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누가 뭐라고 하든 이 자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아버지였다.

"선왕이자, 내 아버지께서 가시는 마지막 순간입니다. 이런 날에 피를 뿌리고 싶지 않으니 이 이상 소란은 알아서 자제할 거라 생각합니다."

부드럽지만, 강한 압박을 담은 말에 룬델과 협회장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어 하벨마저 마치 이번 일을 독단적으로 벌인 것처럼 연기하기 시작했다.

"저 역시 죄송합니다, 전하."

"왜 그랬나요?"

바안은 이를 알아채고는 자연스럽게 하벨을 추궁했다.

"물이야말로 선왕께서 가장 보고 싶어 할 모습이라 생각했습니다."

미안함을 담아 이야기하는 하벨의 목소리는 조용해진 장례식장에 넓게 퍼져나갔다.

바안이 하벨의 말을 자연스럽게 받는 것만큼이나 물을 언급하는 저 천연덕스러운 말에 룬델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걸 이렇게 엮는 것이더냐?'

룬델의 어깨에 앉은 세렌이 콧바람을 내쉬었다.

대체 하벨 티에라가 되기 전에 무엇이었나 궁금할 정도였지만, 세렌은 말을 아꼈다.

룬델이 원하는 자리를 지금 하벨이 깔아두고 있고, 여기서는 누가 자신의 말을 들을지 모르니.

"어찌 그리 생각했나요?"

바안은 그저 하벨의 생각을 묻고 싶은 것처럼 부드러움을 섞었다.

하벨의 시선이 힐끔 룬델을 향했다.

마치 잘못을 하기 전 표정이라 이런 사태를 대략 알고 있었던 바안마저 자연스럽게 물어볼 정도였다.

"룬델 공을 왜 그렇게 보십니까?"

"미안해서요."

"미안하다뇨?"

바안은 순간 저 말이 연기인지 진심인지 헷갈렸다.

하벨은 숨을 크게 몰아쉬고 목소리를 높였다.

룬델이 제대로 나서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대를 만들어주어야 했다.

"전하. 지금 물의 오염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물의 오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요. 하여 저는 선왕께서 깨끗한 물의 모습을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 물을 만들었습니다."

하벨은 자연스럽게 아직도 자신이 정말로 물을 만들었나 의심하는 이들을 향해 알려주었다.

그 물은 자신이 만들었다는 걸.

이로써 못을 하나 박았고, 하벨은 하나 더 못을 박을 셈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더군요. 혼자만 살겠다고 수작을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위기를 고스란히 타고 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하벨은 소리쳤다.

"지금 누군가 정화제를 빼돌리고 있습니다!"

철부지처럼.

어린 나이에 혈기를 부리는 것처럼.

하벨은 그렇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아니라면 티에라 가문의 정화제가 줄어들고 있겠습니까?"

이 장례식 자체가 자기 왕국이 에르티안의 왕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밝히러 온 자리라고 하지만,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대충 행동하고 발을 빼도록 허락하겠는가.

이제 거기서 물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정화제 사건도 들으면서 서로 눈치 싸움을 해야지.

특히 한 놈.

'듣고 있나?'

하벨은 뒤늦게 놀라는 척 협회장을 잠깐 바라보았다.

협회장마저 자신을 보는 듯했다.

'그래. 너 말이다, 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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