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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70화 (170/415)

170화. 물 마법사 몰라요?(2)

* * *

하벨은 그대로 실수한 척 입을 가렸다.

크게 뜬 눈으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망설이는 것처럼 바안을 보고 룬델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벨은 당당하게 정화제가 줄어들고 있다는 걸 알렸지만, 거기서 헤스트리아 왕국은 자연스럽게 뺐다.

어차피 쇄국 정책을 펼치고 있는 그 나라는 지금 그렇게 중요한 나라가 아닐 테니.

"와. 이거 어쩌죠."

하벨이 넌지시 꺼낸 말에 룬델은 때에 맞춰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치 아들이 멋대로 벌인 일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처럼.

"제가 실수했네요."

뒤이은 하벨의 말에 협회장이 이를 악물었고, 마법사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설마하니 여기서 정화제 이야기가 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쩌면 일부러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바로 들 정도였다.

'여기가 특등석일 줄이야.'

하벨의 시선에 경악으로 물든 바안의 표정도 웃음을 한껏 참는 라르웬과 진짜 놀라는 넬시아,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어주는 아라를 포함해 많은 사람의 표정이 대놓고 보였다.

이런 구조를 과거에 얼마나 많이 봐왔겠는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무대에 선 연기자가 된 기분이라 하벨은 무척 즐거웠다.

'정신이 없을 거다.'

큰 게 하나도 아니고 두 개가 터졌으니.

자신이 물 마법사라는 의문과 줄어드는 정화제.

아무리 물이 오염된 상황이 일상처럼 되어버렸다지만, 새롭게 나타난 물 마법사는 희망을, 줄어든 정화제는 절망을 선사하고 있지 않은가.

룬델이 숨을 몇 번이나 들이키다 더는 참지 못한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자신이 나설 차례였다.

하벨이 저토록 훌륭한 자리를 만들어주었는데 먹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거의 모든 시선이 룬델에게 쏠렸다.

그 시선 속에 해명을 바라는 의지가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모두에게… 죄송합니다."

룬델은 고개를 숙였고, 하벨은 손을 내리고 빤히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룬델과 하벨의 행동이 거의 정반대라 바안은 괜히 속에서 웃음이 났다.

하벨이 여기서도 뻔뻔하게 굴 줄이야.

"전하."

하지만 진중하게 자신을 부르는 룬델의 말에 바안 역시 덩달아 진지해졌다.

"네, 룬델 공."

"방금 제 아들이 꺼낸 말에 사실을 덧붙일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허락하겠습니다."

바안은 자신을 노려보다시피 바라보는 다른 나라 대신들의 바람을 들어주는 척 말을 꺼냈다.

룬델은 허락이 떨어지자 무거운 표정으로 하벨에게 걸어왔다.

"…좀 아쉽죠? 아무래도 자중한다고 했는데 많이 부족하네요."

하벨이 슬쩍 꺼내는 그 목소리에 룬델은 흔들렸다.

이렇게 간 큰 행동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지.

하벨이 이다음에 벌일 행동이 심각하게 걱정스러웠다.

하벨은 어서 하라며 손짓하고는 룬델 뒤로 물러났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이렇게 소란을 일으켜 몹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부디, 제 아들놈을 용서해주십시오."

룬델이 먼저 고개를 숙인 쪽은 에르티안의 왕이었다.

그 후에 룬델은 이곳에 초대받아 온 여러 손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 고개가 무엇이라고 그리 아깝겠는가.

이걸로 줄어드는 정화제의 양이 잠깐이라도 멈춘다면 이보다 더 값싼 건 없었다.

"방금 모두 들으셨겠지만, 정화제가 줄었다는 말은."

룬델이 입을 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저 속에 왕을 죽인 범인도, 정화제를 독점한 범인도 모두 숨어 있겠지.

그렇기에 룬델은 속으로 분노를 삼키고, 복수심을 씹으며 하벨이 만들어준 이 기회를 이용해 그저 덤덤한 척, 어쩔 수 없는 척 가면을 뒤집어쓰고 말을 꺼냈다.

"…전부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숨을 삼켰다.

사실이라니.

저게 전부 사실이라니.

"그, 그렇다면 정화제 공급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룬델과 가장 가까이 있던 에르티안 귀족이 목소리를 냈다.

"누군가 정화제를 독점하는 행동을 멈추질 않는다면 정화제 공급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을 겁니다."

룬델은 숨을 한 번 고른 뒤 그제야 분노를 터트렸다.

"그러니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리겠습니다. 정화제를 건드리는 누구든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걸 씹어 삼킬 것 같은 룬델의 기세에 분위기가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그럼… 룬델 공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대부분이 룬델의 눈치를 살피던 와중에 코스모피안 대신이 조심스레 손을 들어 물었다.

데론 트로인처럼 에르티안 왕국을 배신한 귀족을 포함해 에르티안 왕국에 심어둔 첩자들이 사라진 상황을 확인 뒤였기에 코스모피안 대신의 태도는 공손했다.

"현재 모종의 이유로 정령들과 정령사들이 죽고 있습니다."

룬델이 꺼낸 대답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은 많았다.

대체 멀쩡한 정령과 정령사들이 왜 죽는단 말인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고, 외람되오나 신의 종으로서 물어보겠습니다. 룬델 공이 말한 그 모종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성 국가 시엘느의 신관이 꼭 쥔 손을 흔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죽음에 가장 엄숙해야 할 자신들이 이런 질문을 꺼내 부끄러움이 밀려왔지만, 지금 정령사 왕국 헤스트리아가 침묵하고 있는 이상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존재는 정령사 가문뿐이었다.

룬델이 바라본 곳은 마법사들이 앉아 있는 곳이었다.

"마법사 협회 소속 마법사들이 정령들과 정령사들을 납치한 후 강제로 정화제를 만드는 상황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룬델은 그다지 힘도 들이지 않은 상태로 하벨의 사냥감에게 제대로 경고했다.

그딴 미친 짓은 더는 벌이지 말라고.

동시에 다른 나라들에게 알렸다.

너희에게도 있는 마법사 협회가 그딴 짓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르니 잘 살펴보라고.

"잠시만요…!"

협회장이 저 소리에 발끈하자 룬델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에르티안 왕국의 모든 마법사는 등록되어야 하며 그 마법사를 관리하는 곳이 바로 마법사 협회입니다. 지금 마법사와 마법사 협회의 관계를 부정하는 겁니까?"

마성물을 미끼로 등록된 모든 마법사를 흡수하던 그 일이 이렇게 마법사 협회의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겠지.

협회장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으며 화를 억누르려 하는 모습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보였다.

"그게 아닙니다. 저는… 등록되지 않은 마법사일 가능성을 언급하는 겁니다."

"등록된 마법사입니다. 증거 사진은 다음에 보내겠습니다."

룬델은 깔끔하게 대답하고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다시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더는 여기서 무얼 말해봤자 얻을 이득은 없었다.

오히려 이제 해명해야 하는 자는 마법사 협회였고, 이제 어떤 나라든 서로를 비방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을 손에 쥐여주었다.

서로를 향한 감시 체계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순간이 아닌가.

단번에 사람들이 짓는 사나운 시선이 마법사 협회를 향해 돌아가는 걸 확인하며 룬델은 발걸음을 뗐다.

툭.

가기 전에 하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치든 간에 룬델은 그가 자랑스러웠다.

수많은 사람, 그것도 저명한 인사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이렇게 날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애를 쓴다는 것일 테니.

협회장은 자신에게 쏠리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그 시선에 분노를 터트렸다.

"이는 모함입니다. 등록된 마법사라고 모두 마법사 협회에 소속된 건 아닙니다! 마법사 협회를 탈퇴하는 마법사들이……."

"그만. 이제 그만하면 됐습니다."

바안은 이 이상 분위기가 과열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까지면 충분했다.

약속대로 하벨과 룬델에게도 자리를 내어주었기에 다시 장례식이 이어져야 했다.

오늘 주인공은 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의 아버지였으니.

"여기까지입니다. 더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바안은 전보다 더 깊이 경고하며 관을 바라보았다.

아주 훌륭한 선물이 아닌가.

장례식만 끝나면 당장이라도 물러날 것처럼 보이던 다른 나라 대신들이 벌써 군침을 질질 흘리고 있으니.

아마도 아버지가 살아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무척 좋아하시지 않을까 싶었다.

'정화제 일로 놀란 건 놀란 것이고, 지금은 하벨 공이 탐이 나겠지.'

가뜩이나 왕권이 약한 상황에 왕까지 살해당했다는 그 소식에 더욱 휘청거리고 있질 않은가.

이런 좋은 순간을 다른 나라들이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오히려 바라던 바다.'

바안은 이번 기회로 숨죽여 있던 벌레들을 다 쳐내고 왕실의 권력을 제대로 잡을 기회라 생각했다.

아직 저들은 티에라 가문이 왕실에 충성을 바쳤다는 사실을 모를 테니.

바안이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걸었고, 하벨이 옆으로 물러나 섰다.

잠깐 하벨과 시선이 마주했다.

눈빛에는 뿌듯함과 장난기가 가득했다.

'어디에서 이런 장난꾸러기가 나왔는지.'

바안은 짧게나마 미소를 지어주고는 아버지 앞에 섰다.

방금까지 들떴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막아도, 막아도 새어 나오던 그 붉은 핏방울을 기억했다.

'아버지. 저를 지켜봐 주십시오.'

바안은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이 에르티안 왕국이 무너지지 않게 이끌어가겠습니다.'

다시 고개를 든 바안의 눈빛에 거친 물살이 깃든 것처럼 일렁거림이 가득했다.

품에 안았지만, 차갑고 빳빳하게 굳어진 그 감촉이 떠올랐다.

바안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습니다, 아버지.'

* * *

"…아주 큰 사고를 치셨습니다."

코스모피안 왕국의 대신들이 하벨과 악수하며 말을 꺼냈다.

자신은 하얀 꽃송이를 바쳤기에 자동으로 바안 옆에 있어야 했다.

'이건 마음에 들지 않아. 아주, 아주.'

하벨은 루룸하고 세렌하고 놀고 있는 아라 옆으로 가고 싶어 벌써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이건 하나도 재미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좀도둑이랑 눈이 마주쳤을 때, 사고를 아주 거하게 쳤냐는 표정을 하던데.'

하벨은 그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말해주었는데 왜 그렇게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지.

하지만 적어도 페트리오의 눈빛이 나았다.

지금 스치듯 지나가는 코스모피안 왕국 대신들의 눈빛에 자신을 향한 탐스러움이 가득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꺼지게.'

하벨은 방긋 웃었다.

아직 절반 정도 남았는데 벌써 똑같은 눈빛에 질렸다.

하지만 답을 하는 과정만은 달랐다.

재수 없으면 똑같이 재수 없이 하고, 예의를 지키면 똑같이 예의를 지켜 전혀 질리지 않았다.

"사고라뇨. 사실을 말했는데요? 모두를 위한 일이었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솔직히 솔깃하셨잖아요? 우리나라는 이런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요."

비아냥거리지만, 그게 또 사실이었기에 대신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 나중에 사실 여부를 가리는 자리가 만들어진다니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대신의 시선은 잠깐 바안을 향했다.

"정말 물 마법사가 맞다면 에르티안 왕국의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네놈들이 탐을 내는 게 아닐까 싶네.'

하벨은 입을 더 털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줄이 길어 그저 웃었다.

코스모피안 대신들을 보내고 다음 손님과 그다음 이어지는 손님과 지겨운 말을 나누던 차, 하벨은 갑자기 따가운 시선과 함께 무언가를 느꼈다.

눈을 깜박거렸고, 땅이 가까워지자 겨우 허벅지를 쥐어 버텼다.

부들거리는 손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보글보글.

정화 장치에 거품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프거나 따갑다거나 하는 감각과 달랐다.

기억 속 어디선가 느껴본 아주 불길한 감각.

몸을 핥듯 지나가는 그 느낌에 모든 게 마비가 되는 기분이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고, 분노가 천천히 치밀어올랐다.

'어디더라…….'

하벨은 불안정한 자신의 기억을 되새겨 보려 애를 썼다.

'어디에서 느껴봤지?'

"…괜찮으십니까? 몸이 안 좋은 거 아닙니까?"

바안은 그 말에 방긋 웃다 말고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하벨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았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차례가 된 귀족이 하벨에게 물어봤겠는가.

바안은 하벨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하벨 공. 괜찮은가요? 나는 괜찮으니까……."

"…괜찮습니다, 전하."

하벨은 장갑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마비되었던 감각이 천천히 돌아오자 죽기 직전에 불길함이 가득했던 무기에 찔렸던 그 부위가 쓰라렸다.

'그 감각이 갑자기 왜 생각이 나는 거지?'

주변을 살펴본 하벨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 이유 없이 그 감각이 생각이 날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애초에. 이 감각이 드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네놈이 가진 그 열쇠.

'여기는… 다른 세계다. 놈이 있을 리가 없다.'

―그건 이제 내 것이 될 테니까.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 목소리를 부정해보지만, 하벨은 찝찝함에 주변으로 시선을 뒀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 속 특정한 누군가를 찾는다는 건 무척 어려웠다.

슬쩍 망토를 걷어 쳐다본 정화 장치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물의 저주마저… 반응했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갑자기 그림자가 지자 하벨은 깜짝 놀라며 시선을 올렸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신의 은총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신성 국가 시엘느의 사제가 말을 걸어왔다.

그 말에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신의… 은총이요?"

하벨 역시 저들의 반응에 예전부터 느꼈던 궁금증이 일어났다.

이 몸으로 처음 외식했을 때, 신관은 신을 믿는 자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 후로 진짜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었다.

"…그걸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신의 은총이 사라진 지 오래이질 않는가. 그래서 시엘느가……."

신관들이 뒤쪽을 보자마자 누군가 서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신께서 내리시는 따스한 손길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세상에 물 마법사가 탄생하는 것만큼 기쁘고 아름다운 순간이 없을 텐데 이리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니 신의 종으로서 가만히 볼 수 없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신관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달라는 듯 양손으로 내밀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은총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저 사람한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하벨은 일단 손을 내밀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송곳처럼 솟구치는 궁금증을 억누르지 못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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