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하얀 꽃송이(3)
* * *
* * *
"…오셨나요?"
왕의 시체가 안치된 곳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바안이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일어났다.
울었는지, 그의 눈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바안은 고개를 돌리다 다시금 눈시울이 일렁거렸다.
안으로 들어온 룬델, 넬시아, 라르웬, 하벨까지 차례대로 바라보며 가슴이 뭉클거리는 걸 느꼈다.
룬델만이 아니라 티에라 가문 전체가 자신을 위해 오지 않았던가.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바안은 룬델을 보며 손을 맞잡았다.
아무 무늬도 없는 까만 옷을 입은 바안의 소매 끝에 금색 줄이 박혀 있었다.
"아닙니다, 전하. 당연히 와야 하는 길입니다. 오히려 늦게 와 무척 송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딱 맞추어 와주었습니다."
바안은 이어 넬시아를 보더니 반가운 미소를 그리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보네요, 넬시아 공. 그간 잘 지냈나요?"
"전하.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고마워요. 슬픔은 장례식에서 잠깐 묻어둬야겠지요."
바안은 라르웬에게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클로저 일은 보고 받았습니다, 라르웬 공. 부디 에트리안 왕국에 크나큰 폭풍이 오질 않길 바라봅니다."
"클로저로서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전하."
고개를 숙이는 라르웬을 지나 바안은 마지막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와줘서 고마워요."
하벨을 보는 바안의 눈빛이 복잡했다.
칭찬을 바라는 것 같기도 했고, 확인을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슬픔은 전하를 계속 붙잡을 겁니다. 악착같이 버티십시오."
칭찬도, 확인도 아닌 경고 같은 하벨의 말에 바안은 비로소 활짝 웃었다.
벌써 다음을 준비하라는 말이 아닌가.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아 바안은 참 우습다 싶었다.
"몸은 괜찮나요?"
"보는 것처럼 멀쩡합니다. 여기 눈물 자국이 있네요."
"이럴 땐 모르는 척해야죠."
"저라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누가 흉보기 전에 얼른 닦으세요."
그 태평한 말에 하벨과 손을 맞잡은 바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도 하벨은 참 뻔뻔했다.
"힘이 남아도는가 봅니다, 전하."
"내가 얼마나 괜찮은지 알려드리는 거예요."
"잘 버티고 계십니다, 전하."
하벨이 작게 속삭이자 순간 바안은 유치한 싸움을 하던 자신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하벨의 입꼬리가 실룩거렸고, 바안은 그 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보다 손을 놓았다.
"룬델 공."
"예, 전하."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다른 나라에서 보낸 대신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아마 그들은 장례식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오겠지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바안은 알고 있었다.
에르티안 왕국이 가진 국격이 겨우 그 정도라는 걸.
왕이 될 자신을 먼저 만나지 않고 그냥 장례식에 참석한다는 의미가 너무도 뻔했다.
괜찮았다.
그런 놈들에게 누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건지 경고도 날리고 다른 의미로 긴장하게 만들 테니까.
"전하. 저희를 이렇게 따로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공께서도 아시다시피 왕족이든 귀족이든, 일반 백성들이든 상관없이 시체를 고온에 태워 가공 후에 하나의 보석으로 만들어 보관합니다."
[아! 아까 룬델한테 들었어.]
하벨한테 꼭 매달린 아라가 꼬리를 흔들었다.
시체를 불에 태워 보석으로 만들고 그걸 보관하는 게 에르티안의 장례 문화라고 했다.
"욕심이라는 걸 알지만, 나는… 아버지의 시신을 마법사들 손에 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이번에 룬델을 통해 마법사 협회가 무슨 짓을 했는지 보고를 받지 않았던가.
정령사들과 정령들을 데리고 강제로 정화제를 만들다니.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마법사 협회 손에 아버지가 더럽혀지는 걸 볼 수가 없었다.
"하겠습니다, 전하."
룬델은 바안의 말을 더 듣지 않았다. 그 정도면 이미 충분했다.
"저 역시 선왕의 옥체를 놈들 손에 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전하께 제안하고 싶었습니다."
예상 밖의 일에 바안은 절로 목이 말랐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티에라 가문이 노골적으로 왕실 편을 드는 게 아닙니까? 그간 룬델 공이 지켜온 게 무너집니다. 나는 마법사들과……."
갑자기 룬델이 바안에게 무릎을 꿇었다.
바안의 어깨가 올라갈 정도로 깜짝 놀랐다.
"루, 룬델 공?"
"제가 티에라 가문의 가주인 이상, 티에라 가문은 전하를 지킬 겁니다."
바안을 보호하는 것.
그게 정령들과 티에라 가문을 위한 일이었다.
에르티안 왕국이라는 그 이름이 무너진다면 무슨 일이 닥칠지 알면서도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룬델은 바안이라는 불안정하면서도 증명되지 않은 흐름과 함께하기로 했다.
하벨은 그 모습에 방긋 웃었다.
룬델이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가장 최선의 선택임을 알기에 선택을 했다는 자체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룬델 공."
바안은 머뭇거렸고, 그의 시선이 잠깐 하벨에게 향했다.
아직 즉위 전인 자신이 벌써 이 에트리안에서 가장 강한 힘을 손에 넣게 되다니.
이를 어쩌면 좋을지 난감한 마음이 앞섰다.
"뭐 하십니까, 전하?"
바안이 계속 망설이자 하벨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버르장머리가 없어 보이는 행동에 라르웬은 기겁했다.
"입 좀. 그 입 좀 단속해, 막내야."
다른 사람 앞이라면 그래도 너그럽게 봐줄 수 있다지만, 지금 왕 앞에 서 있질 않은가.
대체 간을 어디에다 두고 온 건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대장은 그래도 괜찮은데.]
"저는 허락 받았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라가 말하고, 하벨이 당당히 언급하자 시선이 자연스럽게 바안에게 쏠렸다.
바안은 잠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벨에게 너무 선을 긋지 말라는 소리를 자신이 내뱉었다.
그 속에 편안하게 대해달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었지만, 자신이 하벨에게 했던 최악의 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건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 속이 살짝 끓는 거겠지.
봤지?
하벨은 우쭐거리며 라르웬을 바라보았다.
할 말을 잃은 그 표정에 하벨은 말을 이어나갔다.
"큰 걸 손에 쥐고 탈이 날지, 나지 않을지 고민하는 건 멍청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티에라 가문은 내가 손에 쥐어본 적 없을 만큼 너무 거대합니다."
"그래서 저 기회를 걷어차는 아둔하고 멍청한 행동을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뭔가 혼이 나는 기분에 바안은 주춤거렸고, 하벨은 부드럽게 웃었다.
"나라는 더 크고, 세계는 더욱더 큽니다, 전하. 그 넓은 것을 두고 고작 티에라 가문을 품기 전에 겁에 질려서 되겠습니까?"
티에라 가문을 '고작'이라고 말하는 게 참 우습다 싶지만, 바안은 그 대상이 하벨이기에 이해가 갔다.
"…그렇네요. 내가 웃기는 소리를 했네요."
하벨이 그제야 만족하며 뒤로 빠지자 바안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룬델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세요, 룬델 공. 즉위식이 끝나는 즉시 약속한 대로 그대들의 오랜 속박에서 풀어주겠습니다."
"하면……."
"왕실은 그대의 제안을 존중하는 바입니다. 그러니 속박에서 벗어난 그 후에 이 관계를 어떻게 굳건하게 하는 게 좋을지 말을 나눠봅시다."
바안이 활짝 웃자 룬델의 눈마저 휘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감사는 내가 해야 합니다. 이렇게 그대들이 있으니 오늘은 외롭지 않겠네요."
바안은 진심을 가득 담아 선왕을 바라보았다.
―바안아. 적과 친우는 가장 위급한 순간에서야 알 수 있단다. 하지만 잘 보거라. 적이 친우의 껍데기를 쓰고 너한테 접근할 수 있으니.
오늘 많은 이들의 시선을 보았고, 바안은 오늘로써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전하."
하벨이 갑자기 입을 열자 바안은 당장 긴장했다.
"이게 예의에 어긋난다는 걸 알지만, 나중에 제가 감히 선왕께 하얀 꽃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대, 대장! 그러면 안 된다고 룬델이 말해줬잖아! 이 몸도 들었는데?]
아라가 놀라며 하벨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그렇게 들었지.'
누군가 시신에 하얀 꽃을 올려 장례식의 시작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이는 아무나 올리는 게 아닌, 오로지 유족의 선택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했다.
하여 유족에게 하얀 꽃을 올려도 될지 물어보는 것도 하면 안 되며 만약 꽃을 올릴 제안을 받으면 거절해서도 안 되는 게 예의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하벨은 바안에게 제안했다.
자신의 욕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불이 왕의 시체를 태우기 전에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다.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에게도.
그때가 가장 적절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바안은 하벨의 속내보다 그를 걱정했다.
솔직히 그날의 기억에서 가장 자유로울 수 없는 건 하벨이었다.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이 죽은 그 사실이 어떻게 쉽게 잊힐까.
어쩌면 한 발만 더 빨랐으면 하는 생각이 맴돌지 않을까 싶었다.
"괜찮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야 바랄 게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보여줄 거라뇨?"
"전하께 미리 말씀드린 일 말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물 마법사가 될 생각입니다, 저하.
바안은 하벨이 이전에 꺼냈던 말을 떠올리며 그대로 굳었다.
"물론 내가 허락하긴 했지만, 진짜로 하는 거… 였습니까?"
바안이 눈동자를 굴리며 룬델을 보자 그는 물가에 앉아 노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뜯어말리고 싶은지, 바안은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고생이… 많습니다, 룬델 공."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룬델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 * *
[…진짜 아직도 그래?]
아라가 놀란 눈으로 세렌과 루룸뿐만 아니라 다른 정령들을 보았다.
그들은 왕실 내에 그것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에 벌써 거부감을 내비쳤다.
왕실에서 들어올 때부터 정령들이 재잘거리는 걸 그만뒀고, 지금은 룬델 옆에서 엄숙한 분위기에 선 사람처럼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네가 신기한 거야, 아라야.]
[바보 루룸아, 그건 신기한 게 아니라 특별한 거라고 말해야지.]
루룸이 던진 말에 세렌이 반박하듯 말했다.
[특별한 건 이상한 게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왕실 내에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으면 좋잖아?]
[그렇긴 한데, 이 몸은 뭔가 다른 것 같아서 좀 싫은데.]
아라는 세렌의 위로에도 시무룩해지는 걸 막기 어려웠다.
자신은 왕실에 들어서는 순간 밀려오는 반갑고 그리운 느낌에 행복했는데.
왜 자신만 느끼는 건지, 아라는 그게 참 궁금했다.
"슬슬 움직이셔야 합니다, 도련님."
카샬이 시계를 닫으며 말했다.
오늘 갑작스럽게 장례식에서 마법사 대신 왕의 시신을 태우는 일을 맡게 되어 룬델과 더불어 정령 기사들이 짧게나마 연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벨."
자신을 부르는 넬시아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자 하벨은 의문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라르웬이랑 말을 나누고 있던데,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표정도 굳어버렸는지.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
"뭘 말입니까?"
"그 작전은 위험해. 적진으로 뛰어들겠다니."
'…아.'
하벨의 시선이 라르웬에게 향하자 그는 넬시아를 응원하는 듯한 행동을 취했고,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카샬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참 얄미웠다.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몸 걱정이라면 괜찮습니다. 물론, 형님은 믿지 말라고 했겠지만, 지금도 아끼고 있어요."
하벨은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몸이 아니라 널… 걱정하는 거야."
"왜요?"
하벨은 정말 궁금했다.
당연히 걱정해야 할 하벨 티에라의 몸 말고 자신을 왜 걱정하는가.
"아버지랑… 라르웬이 널 좋아하니까."
넬시아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몰라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오늘만 보아도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낯선 손님이 아니라 진짜 가족이 찾아왔다는 걸.
하지만 이걸 인정해버리면 사라져버린 동생이 마치 진짜 가족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져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그건……."
처음으로 하벨이 흔들리자 넬시아는 금세 올라온 원망을 삼켰다.
지금 하벨도 이 상황이 무척 버거운 모양이었으니.
"그, 어쨌든, 만약에 무슨 일이 터지면 달려오세요."
"달려오라니?"
"이 몸은 동생의 몸이 아닙니까? 누나로서 다가오는 건 막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편안하게 해도 된다는 말이에요."
하벨이 씩 웃으며 카샬을 따라가자 넬시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달려오라니.
그 말이 마치 지금껏 동생에게 달려가지 못한 자신을 꾸짖는 말처럼 들려왔다.
* * *
사람들이 양쪽에 서 있었고, 슬픔이 가득한 노래가 번져갔다.
바안이 가고자 한 그 길 끝에 왕이 누워 있는 관이 있었으며 주변에 검은 꽃들이 바닥과 그곳까지 가기 위한 길목에 깔려있었다.
"…저기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현재 '레놀드' 왕국에서 온 대신들입니다."
하벨이 하얀 꽃을 올리기 위해 바안의 뒤를 따르자 그가 소리를 죽이며 하벨을 위해 누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아마 하벨에게 이런 자리는 처음일 테니.
'지금 제1 왕국이라고 했던가. 여러 나라가 모여서 만들어진 곳이랬지?'
하벨은 카샬이 알려주었던 세계 왕국을 떠올리며 어쩐지 깐깐해 보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 뒤쪽에 덩치가 큰 사람들이 코스모피안 왕국이에요."
'한때 제1 왕국이었다가 레놀드에게 뺏긴 나라인데… 덩치가 정말로 다들 크다.'
한눈에 봐도 코스모피안 왕국 사람들의 키가 컸다.
저들이 티에라 가문 근처에 있는 귀족들을 포섭해 티에라 가문을 무너트리려 했으며 전 기상국장이었던 '웨인 톨'이 소유한 날씨를 맞히는 기술을 가지려 했던 자들이 아닌가.
에르티안 왕국을 가지고자 현재 아주 깊게 관여되어 있는 나라이기도 했다.
'뻔뻔하게도 잘 앉아 있네.'
하벨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오른쪽에 유일하게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신성 국가 '시엘느'입니다."
바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벨의 고개가 돌아갔다.
덩달아 아라가 관심을 가졌다.
[오… 어어.]
아라의 꼬리가 흔들리다 멈췄다.
[이 몸은 신성한 게 뭔지 궁금했는데, 음, 다른 사람하고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어. 저게 신성하다는 거야?]
하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짜 신을 모신다는 곳이라기에는 아라 말대로 무언가 특별한 게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이상하다.'
하벨도 실망감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저쪽에 에티르안 내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이 왔습니다."
바안은 살짝 이를 갈며 말했고, 하벨은 넌지시 고개를 돌렸다.
붉은 기가 가득한 곱슬머리를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얼굴이 면사포에 가려져 있어 보이질 않았다.
'저놈이 헤일리스 퀸인가?'
하벨은 놈이 대역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하지만 그건 이번에 벌어질 일과 아무 상관없었다.
이제 모든 것은 바뀔 테니.
하벨은 미리 기다리고 있던 왕실 시종에게 하얀 꽃송이를 받았다.
[이 몸은 이제 룬델한테 가 있을게. 잘하고 와.]
아라는 하벨을 위해 그를 꼭 안아주고는 룬델에게로 날아갔다.
"하벨 공."
바안은 목소리를 낮추며 어딘가를 바라보는 하벨을 부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앞장섰던 바안이 하얀 꽃송이를 쥔 하벨의 뒤로 물러섰다.
하벨의 시야가 트이자 검은 꽃이 가득한 길이 보였다.
꼭 굳어진 피로 칠해졌던 전쟁터 속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하벨은 천천히 자신의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앞을 바라보았고, 검은 길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꽃이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그 소리는 질퍽한 피를 밟을 때와 비슷했다.
'흔들리지 마라.'
하벨은 또 시작되는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철퍽.
하지만 나아갈 때마다 피 웅덩이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마음이 가라앉기 전 '대장'하고 소리치는 아라의 목소리가 들려왔기에 하벨은 손에 쥔 하얀 꽃송이를 더 꽉 쥐었다.
처음에 심드렁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바안마저 가려버리는 그 걸음걸이에 한 명씩 하벨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손에 쥔 하얀 꽃송이가 유달리 싱그럽고, 반짝여 보였다.
누구냐는 소리도 들려왔고, 하벨을 이미 아는 사람들은 어딘가 달라진 모습에 놀랐으며 이득을 챙기는 자들은 왜 티에라 가문의 막내아들이 하얀 꽃송이를 쥐었는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하벨에게 그 소리는 닿지 않았다.
부하들의 시체가 눈앞에 보였다.
얼굴이 뜯기고, 손가락만 남고, 내장이 전부 바닥에 쏟아졌던 그 모습이 보여와 그저 고요히.
천천히.
바닥에 널린 부하들의 시체를 가슴에 껴안듯이 하벨은 나아갔다.
'나를 원망하는 것인가?'
하벨은 환상이라는 걸 알지만, 그들을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손에 쥐었던 하얀 꽃송이는 어느새 부하들의 시신이 되었고, 눈앞에 놓인 관은 검은 연기를 토하는 불꽃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너희를… 잊은 적이 없다.'
자신의 손으로 부하들의 시신을 태웠던 그때가 눈앞에 펼쳐져 하벨은 오히려 더 덤덤해졌다.
'매일. …매일, 생각했다.'
하벨의 발걸음이 점점 깊어지자 슬픔을 하나씩 끌어안고 있는 듯한 하벨의 분위기에 취해 조금씩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은은하게 퍼진 노래와 함께 정말 누군가를 추모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모두가 똑같이 검은 옷을 입었지만, 하벨은 달랐다.
하벨이 움직이며 흔들리는 망토에 맞춰 정말로 죽음의 길이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하벨이 일렁거리는 불꽃 앞에 멈춰 서야 갑자기 자신을 사로잡을 것 같은 거센 검은 연기가 밀려왔다.
하벨은 이를 덤덤히 받아들였고, 감았던 눈을 뜨자 자신의 눈앞에 놓인 관이 보였다.
밀려오는 슬픔을 꾹 참으며 하벨은 조용히 잠든 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살며시 하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참. 부럽구나.'
자신이 바라던 마지막 모습이 저러하였다.
침묵과 고요함 속에 조용히 죽어가는 것.
하벨은 자신이 이곳에 선 목적을 떠올리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손에 쥔 하얀 꽃송이를 왕의 위에 올렸다.
'이만, 편히 쉬거라.'
천천히 하벨의 고개가 내려갔다.
한때, 같이 가시밭길을 걸었던 동지로서 꺼내는 마지막 존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