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새 보금자리(3)
* * *
"한 가지도 아니고 두 가지나 있습니까?"
페트리오가 경악하며 하벨에게 물어보다 곧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니. 일단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이만 안심하시고 그만 쉬십시오."
"그럴 수 없지. 이건 네가 할 수 없는 일이야."
하벨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맛있게 수프를 음미했다.
카샬과 레디나의 미간이 거의 동시에 찌푸려졌다.
왜 이렇게 얄미운 건지.
"왜 두 가지나 된 겁니까? 원래는 한 가지였잖습니까."
카샬은 참다못해 물었다.
"떠돌이가 된 정령들이 늘어났잖아. 마침 적당한 곳이 있어서 그곳에서 지내면 어떨까 싶어서 가는 김에 데려다주려고."
하벨은 창문 밖으로 고개를 잠깐 돌렸다.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햇살을 받으며 행복해하는 정령들의 모습만 봐도 웃음이 감돌았다.
"적당한… 곳이요?"
레디나가 눈을 깜박거리다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혹시 거기요?"
"맞아. 거기야."
레디나가 손가락을 슬쩍 내밀자 하벨도 똑같이 손가락을 내밀었다.
[거기가 어디야? 이 몸은 모르겠어.]
"거기라니?"
아라와 칼리우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자 하벨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 땅."
처음 크라마를 만났을 때 엮었던 땅이자, 칼리우스의 이성을 잃게 한 그 땅이었다.
"그, 그 땅 말이야?"
칼리우스가 바로 몸을 움츠렸다.
"땅이요?"
헤레스만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대체 그 땅이 뭐길래 칼리우스가 또 겁을 먹었을까.
"크라마가 탐내 하던 땅이기도 하지."
헤레스가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 하벨은 일부러 크라마를 언급했다.
"…혹시, 설마, 거기에 마성물이 가득한 겁니까?"
정령사가 정령을 통해 성장한다고 하면 마법사는 마나가 고인 물건을 통해 성장했다.
그 물건을 '마성물'이라고 부르며 마법사 협회에서 이를 독점했기에 마법사들은 강제로 마법사 협회에 가입할 수밖에 없으며 더욱 막강한 권력을 부릴 수 있었다.
하벨은 손가락을 입술에 올려 대답했다.
"맞아."
이건 비밀이다.
그 말이 저 행동 속에 숨어 있었다.
"…좋습니다."
카샬은 한 번은 참았다.
자신이 봐도 이번 사태에서 정령사와 정령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으니 정령사 가문이라고 하는 티에라 가문이 나서야 하는 건 당연했다.
오히려 티에라 가문에서 정령들을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더 이상했다.
애초에 그랬으면 정령사 가문이라는 이름을 내걸면 안 되지 않은가.
"첫 번째는 괜찮지만, 두 번째는 안 됩니다."
"카샬. 레디나가 그 의뢰를 언제까지 막아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하벨이 꺼내는 말에 레디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실상 의뢰자의 재촉에 의뢰 시간마저 더 짧아진 상태죠."
"봤지? 절대 나하고 관련 없지 않아."
하벨은 이참에 확실히 못을 박았다.
하벨 티에라를 죽이라고 시킨 놈이 누구인지 몰라도 마법사 협회랑 상황은 비슷했다.
먼저 자신을 건드렸으니 짓밟아줄 뿐이었다.
'…물론, 마법사 협회가 더 싫지만.'
하벨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카샬을 쳐다보며 해야 할 두 번째를 언급했다.
"정령들을 데려다주고 집으로 가면서 검은 달의 지부를 박살 내야지."
마치 소풍 가듯 가벼운 저 말에 잠깐 누구 하나 심각함을 인지하지 못했다.
"…네에?"
뒤늦게 레디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촤르륵.
커튼을 젖히자 햇살이 쏟아졌다.
'…아쉽다.'
그는 햇살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어제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다.
자신이 다시 떠올릴 만큼 당황스러운 일.
한가롭게 산책하고 있을 때, 오랜만에 자신의 힘이 발동했다.
워낙 옛날 일이었고, 이제는 한 번씩 오작동할 때가 있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유흥이라 생각하고 의식 속으로 파고들었다.
―…돌아가!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자신을 튕겨내지 않았는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쪼르르르.
차를 잔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금세 방안에 향긋한 차 냄새가 퍼져가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으흠."
차를 한 모금 머금고는 따사로운 햇살을 바라보았다.
'의식 속에 나를 밀어내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자신이 누구인가.
가장 거룩한 존재가 아니던가.
'흥미로워.'
그는 다시금 차를 머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힘을 왜 두었더라?'
그는 턱을 괴었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자신에게 있어 턱없이 사소했던 일이 아닐까.
찰랑.
찻잔을 가볍게 흔들자 울리는 저 소리에 그는 눈에 광채가 어렸다.
"아."
기억이 났다.
그의 눈꼬리가 휘었다.
'열쇠를 위해서였지?'
그때 참 거슬리는 존재가 있었다.
누구였더라.
뭔가 기분이 나빠졌다.
거슬려.
거슬려.
조용히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힘에 창문가에 두었던 모든 식물이 바스러졌다.
근처를 날아가던 새마저도 가루처럼 부서지고 말았다.
팅.
그가 찻잔을 손가락을 튕겼다.
거슬리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자신 말고는 죄다 멍청이든, 같잖은 존재일 뿐이니.
'오늘따라 차 맛이 좋네.'
그는 미소를 짓고는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참 온화한 미소였다.
* * *
<…하벨아.>
룬델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재킷을 반쯤 걸친 채로 하벨은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라르웬한테 들었고, 카샬한테 보고를 들었지만, 이렇게 너한테 연락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혹시 방해된 게 아닌지 모르겠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카샬이 어떻게 말했는지 몰라도 그게… 음. 사소한 실수가 벌어졌습니다."
하벨은 말을 더듬거렸다.
갑자기 정령수를 받지 못하게 됐기에 치솟는 불순물 때문에 기절했다.
그걸 어떻게 제 입으로 털어놓겠는가.
연락용 아이템에 귀를 파묻은 아라도 긴가민가한 표정을 했다.
<…다치지 않았더냐?>
룬델이 꺼낸 물음은 너무도 중의적이었다.
몸을 말하는 걸까, 마음을 말하는 걸까.
"더한 것도 봤기에 괜찮습니다. 그, 음, 이러면 괜히 부담스러울까 봐 말씀을 드리지 않았지만, 저 나이 많습니다."
<네가 살던 곳과 이곳이 다르지 않더냐.>
"그렇죠. 기존에 제 나이가 다 소용없게 됐으니 그렇게 따지면, 음, 36일은 됐으려나 싶습니다."
<하하하.>
룬델이 갑자기 웃었다.
너무 밝게 웃기에 하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벨은 그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36일.
자신이 생각해도 기가 찼다.
<크흠. 하벨아, 네가 바로 집에 오지 않는다는 말을 하며 카샬이 너를 말려달라고 신신당부하더구나.>
"말려도 소용없습니다. 전 처음부터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원하는 걸 할 거라고요."
하벨은 말을 던지다 잠깐 머뭇거렸다.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들 오해하고 있지만, 진짜 자중하고 있어요. 얼마나 억울한지 모릅니다."
<네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건 나는 알고 있단다.>
연락용 아이템을 쥔 하벨의 손에 잠깐 힘이 들어갔다.
"힘들지 않습니까?"
<무얼 말하는 것이더냐?>
"누군가를… 이해하는 거 말입니다."
<머리로 생각하면 그렇지만, 나도 모르게 자연히 나오는 거라 힘이 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구나.>
"당분간은 저한테 신경을 덜 써도 됩니다."
<그건 내가 싫구나.>
룬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만약 부담스럽다면 내게 말을 해줬으면 한단다.>
"아, 아뇨.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그, 정화제 사건이 터졌잖습니까. 아마 밤새 고민하셨겠죠. 제가 발견한 게 어쩌면 일부분일지도 모르고, 지금 누가 마법사 협회를 통해 정화제를 대량으로 사는지도 모르는 상태잖습니까. 게다가 어디에서 구멍이 생겨버렸는지……."
<구멍은 바로 찾았단다.>
"…예?"
하벨은 눈을 크게 떴다.
<너한테 정화제가 줄어들고 있다고 말한 그 전부터 쫓고 있었단다. 의심되는 몇몇이 있었고, 카샬이 내게 한 보고 덕에 마법사와 엮어있다는 점을 노려 잡을 수 있었구나.>
"그것참 다행이네요.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이릅니다. 이번 일로 마법사 협회가 더 음지로 파고들지도 모르니까요."
어쩌다 한 번 들켜버렸다.
하지만 놈들이라면 '뭐 어쩌란 건가'라고 생각하며 더 활동할 게 분명했다.
지금부터 시작인 셈이었다.
<네 말이 맞단다. 그래서 하벨아.>
하벨은 오늘따라 유난히 긴 룬델의 말꼬리에 살짝 긴장했다.
<네 사냥감에 손대는 일은 없단다. 다만, 네가 만들 무대를 이용해도 되겠더냐?>
하벨의 눈이 살포시 감겼다.
룬델이 무얼 하려는지 눈치채자마자 벌써 즐거웠다.
"예. 얼마든지 이용해도 됩니다. 확실히 그편이 좋겠네요."
[…으응? 이, 이 몸만 모르는 거야?]
아라가 놀라며 눈동자를 다급히 움직였다.
"놈들이 숨기려 하면 억지로 드러내야죠. 모든 나라가 모이는 장례식에서 말입니다."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으며 웃음기를 천천히 지워나갔다.
[아! 그때 룬델이 '마법사 협회가 나빠요!' 하고 말하려는 거구나.]
아라가 귀를 쫑긋거렸고,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참았던 분노를 터트리세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분노에 사로잡히신다면 제가 말려드리겠습니다."
룬델과 왕은 긴밀한 사이였다.
왜 슬프지 않을까.
모든 나라가 모이는 그 자리에 누구인지 몰라도 범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끔찍할 테지.
<고맙구나, 하벨아. 나 역시 약속하마.>
"예?"
<그럴 일은 없으면 좋겠지만, 만약 네가… 분노에 사로잡힌다면 나 역시 너를 말리마.>
"고맙습니다."
하벨은 가볍게 웃었다.
그럴 일은 없어도 말만이라도 고마웠다.
"아 참, 바안 전하께 허락부터 받으십시오. 저는 이미 받은 후입니다."
<그래. 그게 먼저지.>
룬델은 터덜거리며 웃었다.
<하벨아. 너를 아껴주거라. 다치지 말고.>
"저만큼 절 아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밥… 잘 챙겨 드세요."
이래도 될까 싶었지만, 하벨은 그냥 말을 꺼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고맙구나.>
하지만 룬델은 하벨이 생각한 것보다 더 깊이 감동하고 있었다.
하벨은 크게 당황했다.
<하벨 너도 잘 챙겨 먹거라. 조금, 아니, 많아 야위었더구나.>
"밥은… 잘 먹고 있어요. 잘 먹는데도 이러네요."
[그건 대장이 쓰러졌기 때문이라구. 자면 밥을 먹을 수가 없어. 그건 이 몸도 알고 있는데.]
아라가 툴툴거렸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대장은 매일매일 쓰러지구. 이 몸은 매일매일 울먹이구.]
방금 내뱉은 말을 실천하는 것처럼 아라가 점점 울먹이자 하벨은 당황했다.
"아니, 왜 울어? 진정해, 아라야."
<하벨아. 자고로 정령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단다.>
"조금 왜곡된 부분을 보셔야 합니다. 매일은 아닙니다."
<하핫. 알겠으니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언제든지 돌아와도 된단다.>
하벨은 룬델이 꺼낸 '집'이라는 말에 갑자기 차분해졌다.
자신도 자연스럽게 집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네."
머뭇거리다 대답했고, 하벨은 살짝 피어나는 어색함에 눈을 돌리다 곧 떠오르는 생각을 꺼냈다.
"형님이 사준 땅 말입니다."
<그래.>
"그곳에 정령들을 데려가겠습니다."
이미 그 땅에 마법사 협회를 견제하고자 정령 기사들이 주둔해 있었다.
<좋은 생각이구나. 그곳이 다른 장소보다 특이하다는 보고를 받았단다.>
"특이하다뇨?"
<물의 오염도가 상대적으로 아주 낮다더구나. 정령들이 지내기에 좋은 곳이 아닐까 싶단다.>
[오염도가? 오오, 정령들이 엄청 좋아하겠어!]
<그래, 아라야. 내 생각도 그렇단다. 그럼 이만 끊으마, 하벨아. 지금 나가려던 참이 아니더냐? 네 발목을 붙잡을 수는 없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간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옷을 입는 것도 멈추질 않았던가.
<지금까지 네 행동을 보면, 음, 대충 예상이 되더구나. 분명 멈추질 않는 마차처럼 달리고 있겠구나, 하고 말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들려오는 룬델의 웃음소리가 어쩐지 영혼이 없는 것처럼 들려왔다.
'뭔가 일부분을 포기한 것 같은데.'
<그럼, 이만 끊으마.>
"예. 이대로 말이 이어지면 끝이 없겠습니다."
하벨은 룬델이 연락용 아이템을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제야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걸쳤다.
[대장.]
아라가 나가려는 하벨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왜 그래 아라야? 음, 아까 쓰러지는 일이라면 솔직히……."
[이 몸은 어제 엄청 속상했어.]
아라의 꼬리가 축 늘어지자 하벨은 가슴이 따끔거렸다.
"미안해, 아라야. 네가 엄청 놀랄 걸 아는데, 음. 나는 원래 이래서……."
[이 몸은 대장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어. 룬델이 말한 것처럼 대장은 멈추지 않는 마차야!]
"…음, 꼭 그렇지는 않아. 나도 자제하고 있어. 그것도 엄청."
아라가 눈을 크게 떴다.
살짝 놀란 듯, 혼란스러운 듯 하벨을 바라보다 곧 배시시 웃었다.
[응! 이 몸은 대장을 믿을래! 대장은 엄청 자제하고 있는데도 그게 잘되지 않았구나!]
아라는 하벨을 쓰다듬어주었다.
[대장도 힘내고 있구나.]
"그래. 나도 힘내고 있어. 그럼 뭐가 속상했어, 아라야?"
[이 몸은 있잖아, 이 몸 자신한테 속상했어.]
"왜?"
[대장을 옮길 수도 없고, 대장을 낫게 해줄 수도 없고, 대장한테 정령수를 넣을 수도 없었어.]
아라는 입이 살짝 내밀었다.
[이 몸이 대장한테 가장 많이 정령수를 넣어줬는데. 단계 끝에 도달했는지 모르구, 정령수를 주지도 못하구.]
하벨이 아라를 쓰다듬자 아라는 눈에 힘을 가득 주었다.
[괜찮아. 이 몸은 더더 힘낼 거야! 그러니까 대장도 힘내!]
무얼 힘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하벨은 실실 웃었다.
가장 큰 응원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래, 힘낼게."
* * *
[…우와.]
마차 안과 마차 밖에 매달리던 정령들이 마차가 멈추자마자 일제히 목소리를 냈다.
[정말… 여기가 우리가 지내게 될 곳이라고?]
창문에 매달려 있던 정령들까지 일제히 하벨을 쳐다보았다.
부정한 것들도 없고, 작은 저택과 밭이 전부인 곳이었다.
정령들마다 다 웃음꽃이 만개해서는 기대에 찬 눈빛을 했다.
"그래. 너희의 새 보금자리라고 생각해."
[…새 보금자리?]
얼떨떨한 정령들을 보며 하벨은 우쭐거렸다.
"내 땅이기도 하고."